토니 클리프

Tony Cliff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영국 폴란드 1917–2000 ○ 자연사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세운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성장과 노선 전환

1950년 클리프 지지자들은 기존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더 클럽에서 갈라져 사회주의평론그룹(SRG)을 만들었다. 1951년 창립 회의에 모인 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 분석이 이 소규모 그룹의 이론적 토대였고, 그룹은 노동당 내부 활동을 통해 조직을 넓히려 했다. 특히 노동당 청년조직인 노동자청년동맹(LLY)에 진입해 청년 활동가를 조직했다. 반핵운동과 청년사회주의자 활동도 신입 회원을 끌어들였다. 1964년 그룹 회원은 200명에 이르렀다. 이 조직 경로는 노동당 내 활동을 통해 노동자와 청년에게 접근하려는 전술이었다.

1960년 《사회주의평론》을 대신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룹은 1962년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이름을 바꿨다. 노동당이 집권한 뒤 IS는 1965년 무렵 노동당 내 진입전술을 거두고 노동조합과 직접 노동자 조직에 더 무게를 두었다. 1966년 클리프와 콜린 바커가 발표한 소책자는 노동당 정부의 소득정책에 반대하고 노동현장 대표(shop stewards)가 이를 어떻게 저지할지 다뤘다. 1968년 조직은 민주집중제를 채택했다. 베트남연대운동과 1968년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회원은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었지만, 내부 분열도 뒤따랐다.

1970~74년 IS는 공장 지부와 평조합원 신문을 만들고 산업 현장 활동을 확대했다. 1972년 광부 파업에서는 광부들이 《소셜리스트 워커》를 가져가 판매했다. 회원 수는 1971년 1,000명에서 1977년 약 4,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74년 38곳이던 공장 지부는 1976년 세 곳 또는 네 곳으로 줄었고, 1977년 소방관 파업 때 IS는 유의미한 연대를 조직하지 못했다. 클리프는 1978년 무렵 노동자 투쟁의 고양기가 끝나고 후퇴기가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1977년 1월 IS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으로 재편됐으며, 1982년까지 지도부는 평조합원 조직 건설을 접고 지역 지부와 정치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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