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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인물 133명

올랭프 드 구주

Olympe de Gouges
문학·예술 프랑스 프랑스 1748–1793

여성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저술가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여성의 투표권과 법적 평등을 요구했다.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마리 구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정치 저술가다. 노예제를 비판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여성의 법적 평등과 공적 발언·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아니라 기존 권리 선언의 배제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혁명기의 폭력과 산악파의 권력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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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몽토방의 요리업자 루이이브 오브리와 강제로 혼인했다
  • 1766아들 피에르 오브리가 태어났고 남편이 곧 죽은 뒤 올랭프 드 구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1770파리에 정착해 교양을 넓히고 문학 살롱에 드나들었다
  • 1784자전적 소설 「발몽 부인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 1785노예제를 비판한 희곡 「자모르와 미르자」가 코메디 프랑세즈 레퍼토리에 올랐으나 공연되지 않았다
  • 1788「민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하고 표현의 자유, 이혼, 성평등,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 1789포스터와 팸플릿으로 혁명 논쟁에 개입했다
  • 1791「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담은 「여성의 권리」를 출간했으나 입법의회는 심의를 거부했다
  • 1792왕정 붕괴 후 온건한 지롱드파에 합류해 공포정치에 반대하고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했다
  • 1793반혁명적 글로 7월에 투옥됐고 11월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문학·예술 프랑스 프랑스 1748–1825 ○ 브뤼셀에서 사망

프랑스 혁명의 신고전주의 화가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 장폴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1780년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자코뱅 클럽 성원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다.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공포정치에 관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1794~1795년 두 차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04년 제정 선포 후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지로데·제라르·그로·앵그르 등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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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4《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음
  • 1789–1794혁명 지지, 국민공회 의원,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
  • 1794–1795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두 차례 투옥
  • 1804나폴레옹의 궁정 화가
  • 1815–1825브뤼셀에서 망명 생활, 그곳에서 사망

실뱅 마레샬

Sylvain Maréchal
문학·예술 프랑스 프랑스 1750–1803

평등파 선언을 쓴 프랑스의 저술가

혁명기 급진 저술가로,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의 평등을 넘어 실제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저술가로, 법률가·사서로도 일했다.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에 적힌 평등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의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바뵈프의 운동과 관련된 글이지만 저자는 마레샬이다. 선언의 모든 표현이 운동 지도부의 합의나 실현된 정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글을 통해 혁명기의 평등 요구와 후대 사회주의 사이의 연결, 그 사이에 놓인 차이를 함께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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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0마자랭 도서관 부사서로 임용되어 고전학 소양을 쌓았다.
  • 1788「정직한 사람들의 연감」이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로 불태워지고 3개월 수감되었으며, 이후 저작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 1790–1792「파리 혁명」지의 주필로서 성직자와 교회를 비판하는 반교권 운동을 이끌었고 전쟁 반대 논설을 실었다.
  • 1793–1796바뵈프를 만나 1796년 「평등파 선언」을 작성했으며, 평등파 음모의 비밀 구제위원회 위원이었다.
  • 1801여성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법률안을 제안했고, 유고 「덕에 대하여」는 1807년 간행되었다.

자크 르네 에베르

Jacques René Héber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757–1794 ✕ 처형

『페르 뒤셴』으로 상퀼로트 여론을 이끈 혁명 언론인

『페르 뒤셴』을 창간해 파리 상퀼로트의 목소리를 만들고 1793년 지롱드파 타도에 앞장선 언론인으로, 급진적 비기독교화를 밀어붙이다 1794년 3월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 1790년 창간한 『페르 뒤셴』의 거칠고 대중적인 문체로 상퀼로트 독자층에 영향력을 얻었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이 됐다. 1793년 지롱드파 공격, 더 강한 경제 통제와 비기독교화 운동을 지지했다. 다만 ‘에베르파’는 정식 정당이 아니라 그의 신문, 코르들리에 일부, 코뮌 인맥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794년 3월 봉기 호소가 실패한 뒤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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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0대중적 혁명 신문 『페르 뒤셴』 창간
  • 1791–1792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 파리 코뮌 검사 대리
  • 1793지롱드파 공격과 상퀼로트 요구, 비기독교화 운동 지지
  • 1794.03봉기 호소 실패 뒤 체포, 3월 24일 처형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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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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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미하일 니키포로비치 카트코프

Михаил Никифорович Катков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18–1887 ○ 자연사

『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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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21–1878 ○ 장암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동시대인》을 혁명적 문학의 중심으로 만든 시인·출판인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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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 1873–1876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집필

미하일 예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

Михаил Евграфович Салтыков-Щедрин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26–1889 ○ 뇌졸중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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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8군부성 문서국 관리
  • 1848–1855뱟카 유배, 지방 관료
  • 1858–1860랴잔 부지사
  • 1860–1862트베리 부지사
  • 1863–1864《동시대인》 기고
  • 1864–1868펜자·툴라·랴잔 재무국장
  • 1868–1884《조국의 수기》 편집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문학·예술 러시아 러시아 1828–1910 ○ 폐렴

『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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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피사레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Писарев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0–1868 ✕ 익사

부숴야 할 것은 부숴야 한다고 선언한 러시아 허무주의의 기수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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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8–1861여성잡지 『라스베트』(Рассвет) 서평 기고
  • 1860–1862『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 비평가·사실상의 주필
  • 1862–1866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옥중 집필
  • 1866–1868『델로』(Дело)·『조국의 수기』(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 기고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스테프냐크-크라프친스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пняк-Кравчинский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1–1895 ✕ 열차 사고사

차르 헌병대장을 단검으로 처단하고 펜으로 서구에 러시아 혁명을 소개한 나로드니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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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52–1942 ○ 자연사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회 최후의 생존자, 20년 독방을 산 회고록 작가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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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5취리히·베른 대학 의학부 수학, '프리치' 서클 참여
  • 1876–1879사마라·사라토프현에서 '민중 속으로' 선전 활동, 펠처 근무
  • 1879–1883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기획
  • 1883–1884체포, '14인 재판'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1884–1904슐리셀부르크 요새 독방 20년 수감
  • 1906–1915해외 망명, 파리 정치범구제위원회 조직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위원, 제헌의회 후보
  • 1921–1932『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 출간, 구(舊)정치범 협회 활동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1 ○ 폐렴

제정도 볼셰비키도 거부한 러시아 문학의 양심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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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 1917–1921볼셰비키 테러 비판 — 루나차르스키 서한, 기근 구호 활동 중 사망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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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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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레옹 도데

Léon Daude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67–1942 ○ 병사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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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8–1936 ○ 자연사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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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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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에마 골드만

Эмма Гольдман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미국 러시아 1869–1940 ○ 사망

아나키즘을 국제적 정치운동으로 만든 망명 혁명가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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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뉴욕으로 이주, 요한 모스트의 지도 아래 아나키스트 활동 시작
  • 1892버크먼의 프릭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체포·심문
  • 1893첫 수감 — 유니언스퀘어 연설로 폭동선동죄 1년형
  • 1906아나키스트 잡지 『마더 어스』 창간
  • 1917징병 반대 조직으로 2년 수감
  • 1919소비에트 러시아로 강제 추방 — '소비에트 방주' 편
  • 1923《러시아에서의 환멸》 출간, 볼셰비키 비판
  • 1936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혁명 지지 활동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1–1942 ○ 사망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를 이끈 목사이자 작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영리한 연설이나 조약이 아니라 힘이다"는 1924년 반역 재판 석상에서 남긴 말이다.

라트비아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루터교 목사로 1919년 5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고 1924년 귀국해 국가반역죄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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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9도르파트(타르투) 대학 신학부 수학
  • 1903–1906체시스에서 잡지 《아우스트룸스》 편집·발행
  • 1906–1918마티시·칼스나바·비에탈바 교구 루터교 목사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창립 참여, 이사
  • 1919.05–06친독 임시정부 수반(총리)
  • 1924국가반역죄 유죄 판결, 대통령 사면 뒤 추방
  • 1926–1930동프로이센 알트슈타트 독일 교구 목사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74–1940 ✕ 처형

생체역학의 창시자, 무대 위에서 혁명을 실현한 연극의 건축가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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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 1908–1917알렉산드린스키·마린스키 극장 연출가 —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몰리에르 〈돈 후안〉,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1918볼셰비키 입당 및 마야콥스키 〈미스테리야 부프〉 초연 (페트로그라드)
  • 1920–1938국립 메이예르홀트 극장(고스찜) 예술감독 — 생체역학 체계와 구성주의 무대 전성기
  • 1920–1921나르콤프로스 연극부(TEO) 책임자 — 루나차르스키 하에서 소비에트 연극 정책 주도
  • 1923공화국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22–1924혁명 극장 예술감독 겸임 — 파이코 〈류리 호수〉 초연
  • 1926–1930고골 〈검찰관〉, 마야콥스키 〈빈대〉·〈목욕탕〉 — 쇼스타코비치·로드첸코 협업의 걸작들
  • 1938–1939고스찜 폐쇄 후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 극장 수석 연출가로 〈리골레토〉 작업

콘코르디야 니콜라예브나 사모일로바

Конкордия Николаевна Самойлова
문학·예술 러시아 러시아 1876–1921 ○ 콜레라

『라보트니차』를 창간하고 러시아 첫 여성의 날을 조직한 볼셰비키 여성 운동의 설계자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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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 1907런던 RSDLP 제5차 대회 대의원
  • 1912–14『프라우다』 편집서기
  • 1913.02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 집회 조직,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동원
  • 1914.02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 창간 — 발간 직전 체포
  • 19172월 혁명 후 『라보트니차』 복간, 11월 제1차 여성노동자회의 조직
  • 1918.01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 공동 조직
  • 1919–20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제8차 당대회 대의원
  • 1920–21『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 볼가 선전선 「붉은 별」 정치부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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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