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롱드파를 지지한 귀족 출신으로 마라를 암살한 인물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다른 이름: 샤를로트 드 코르데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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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조직대표
관련 역사 사건
사후 이미지와 정치적 기억
코르데의 사후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재판이 진행되던 때부터 그녀는 해방적 폭군 처단자로 여겨지기도 하고,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로 저주받기도 했다. 처형 직후 노르망디 오주 지방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노래가 퍼졌고, 코르데 다르몽 가문은 며칠 만에 중도파와 반혁명 여론에서 뜻밖의 명성을 얻었다. 1806년 망명에서 돌아온 조카 알렉시 드 코르데 다르몽은 누이의 명성 덕분에 후광을 입었고, 5년 뒤 프레데리크 드 코르데 뒤 르누아르는 켈레르만의 눈에 띄어 궁정에 소개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이미지는 더욱 다기해졌다. 한편에서는 그녀를 일탈적 여성으로 규정했는데, 독신이라는 점과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문제 삼아졌다. 세기 말에는 공화정이 절제와 시민적 평화, 정치 폭력 배격에 기초한 정치 문화를 세우려 하면서 이 범죄화가 강화되었고, 코르데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규탄하는 사례로 동원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가 점차 희생자로 그려졌다. 처음에는 혁명에 바쳐진 성녀순교자에 비견되는 종교적 희생자였고, 19세기에 그 종교적 색채가 옅어지면서 왕당파·보수·반공화파 진영에서는 혁명과 공화정의 희생자로 재해석되었다. 그녀의 재판은 재판 오류로, 처형은 부정의로 다시 읽혔으며, 나아가 조국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동의한 희생자’라는 이미지가 20세기 초 민족주의·반의회주의 진영에 널리 수용되었다.
문화적 재현도 이 흐름에 얹혀 있었다. 알퐁 드 라마르탱은 《지롱드파사》에서 그녀에게 ‘암살의 천사’(l'ange de l'assassinat)라는 별칭을 붙였고, 19세기 사학자들은 그녀를 혁명의 열렬한 영웅으로 혹은 몽상적 왕당파로 그렸다. 산송의 《회고록》에 실린 처형 장면은 실제 증언이 아니라 발자크와 다른 필자가 쓴 위작으로, 오히려 19세기 가톨릭·왕당파 귀족의 기억 속에서 코르데가 차지한 자리를 드러낸다. 남성복장의 여성성 논쟁, 사후의 두개골 행방 이야기처럼 출처가 확실치 않은 일화들도 이렇게 유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