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경력 연표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기독교 아나키즘과 정치적 유산
톨스토이의 기독교 아나키즘은 1870년대 말 그의 영적 위기에서 출발했다. 『참회』(1882)와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1884)에서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 국가폭력, 사유재산을 성서에 근거해 전면 부정했고, 산상수훈의 다섯 계명(분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을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이 사상은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서 체계화되어 러시아 검열을 피해 독일에서 초판이 출간되었다.
톨스토이는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나, 그의 비판은 교회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국가를 "면책 특권을 누리며 가장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는 제도"로, 사유재산과 조세를 노예제의 근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1905년 혁명에 깊은 공감을 표현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급투쟁에는 반대했다. 레닌은 1908년 「톨스토이와 러시아 혁명」에서 그를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 불렀다. 톨스토이가 농민의 반란적 감정과 착취 체제에 대한 증오를 반영하면서도 혁명의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폭력에 의한 악의 저항을 부정함으로써 혁명 운동의 약점 또한 구현했다는 평이었다. 그럼에도 레닌은 "톨스토이의 유산 속에는 지나간 것에 속하지 않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 있다"고 인정했다.
톨스토이 사상의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은 러시아가 아닌 인도에서 나타났다. 마하트마 간디는 『내 안의 하느님 나라』를 읽고 "압도당했다"고 회고했으며, 1909년 톨스토이에게 서신을 보내 조언을 구했다. 톨스토이는 1908년 인도 민족주의자 타라크 나트 다스에게 보낸 「힌두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옹호했고, 이는 간디가 구자라트어로 번역해 배포했다. 톨스토이와 간디는 1909-1910년 여섯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며, 톨스토이의 마지막 편지 중 하나가 간디에게 보낸 것이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자신의 협동 농장을 '톨스토이 농장'이라 명명했고, 이후 인도 독립운동의 사티아그라하는 톨스토이의 비폭력 저항론에 깊이 뿌리내렸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는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전략가 제임스 베벨에게도 결정적 영향을 끼쳐, 그가 미 해군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이 '톨스토이주의'(толстовство)라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채식·금주·금연·순결을 실천했고, 병역을 거부했으며, 스몰렌스크·트베리·사마라 등지에 농업 공동체를 건설했다. 1917년 혁명 직후 약 6천 명에 달했던 톨스토이주의자들은 볼셰비키의 집산화와 사상적 숙청 속에 급감했다. 야코프 드라구놉스키 등 지도자들이 재판을 거쳐 굴라크로 보내졌고, '삶과 노동 공동체' 등 일부 공동체는 박해를 피해 시베리아로 이주했으나 1930년대 말 사실상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