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863–1887 문학·예술
경력 연표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편집자에서 정치적 논객으로: 1863년 이후
카트코프는 모스크바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 뒤 1851년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의 편집자가 되었고, 1856년에는 『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도 맡았다. 초기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하고 전제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자는 글을 썼다. 그러나 1863년 폴란드 봉기는 그의 노선을 러시아 민족주의 쪽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두 간행물에 국내 반동 정책과 범슬라브주의 외교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고, 알렉산드르 3세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어 정부 정책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공직자가 아닌 언론인이 공식 권력기구 밖에서 정책에 개입한 사례였다.
그의 정치적 논설은 문학 편집 활동과 분리되지 않았다. 『루스키 베스트니크』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1~7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80)을 연재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의 관계는 끝내 결렬되었다. 카트코프는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자원한 러시아인들을 풍자한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부분을 게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편집자로서 작품을 후원하고 선택하는 권한과 정치적 입장은 잡지의 문학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