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을 이끌었고,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해 소비에트 사법의 토대를 놓았다.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파슈카니스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하고 최초의 『국가와 법 백과사전』을 편집했으며,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로 정의한 계급적 법 개념은 초기 소비에트 법이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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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수사 방법은 피의자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거짓 자백을 꾸며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NKVD 기관 안에는 아직 도려내지 못한 곪은 상처가 있으며, 그곳에서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합니다.
라트비아 쿠를란트의 농업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 리가와 빈다바에서 지하운동을 이끌다 1909년 10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 1917년 석방 후 섬유노조 서기로 두각을 드러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과 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냈다.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의 강령을 지지하며 전연방적 위상을 얻었다. 1924년 교통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철도망을 재건했고, 1926년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31년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이 되어 당내 숙청의 도구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대숙청의 표적이 되었다. 1937년 5월 '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전면 부인하고 NKVD의 인위적 사건 조작을 법정에서 폭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레닌이 스탈린 대신 그를 총서기 후보로 검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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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해 지하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1918년 5월 체카 간부위원으로 들어가 제르진스키 대리와 반혁명투쟁부장을 맡았다. 1918년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발표해 계급 기반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으며,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 내전기 보안기구를 지휘했다. 1922년 이후 경제·교육 행정으로 전환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35년 덴마크에서 비밀회합이 발각되자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4명의 중앙 간부가 한꺼번에 체포된 GRU 역사상 최대의 작전 실패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1년간 소련 군사정보국(GRU)을 이끌며 세계적인 첩보망을 구축한 창설자. 리하르트 조르게, 레오폴트 트레퍼, 얀 체르냐크 등 정예 요원들을 발굴·훈련시켰고, 기술정보 수집 체계를 정비해 소련 방위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으로 활약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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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1918.11RKP(b) 입당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1937년 5월 체포되어 투하쳅스키 사건의 피고인 8인 중 한 명으로 6월 12일 총살됐으며, 1957년 복권됐다.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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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1924–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1926–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1931–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체포되기 몇 시간 전,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 — 평생을.」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집안 출신으로 라트비아 KGB 의장과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소련 내무장관까지 오른 보수 강경파로, 범죄·민족분규 격화 속에서 강경 법질서 노선을 고수했다. 1991년 8월 쿠데타(GKChP)에 가담했고, 실패 후 체포 직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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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