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의 군사령관, 제국 원수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헬베티아 방면군을 이끌고 코르사코프의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격파했고, 1800년 제노바를 약 60일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묶어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승리를 도왔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사령관. 1758년 5월 6일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 니스 백작령)에서 출생명 안드레아 마세나로 태어났다. 구체제 왕립 이탈리아 연대의 사병으로 출발해 1784년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부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1793년 8월 여단장, 같은 해 12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창설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808년 리볼리 공작, 에슬링 대공 작위는 1809년(일부 문헌은 1810년 1월)에 받았다.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58세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름: 안드레아 마세나 · 리볼리 공작 · 에슬링 대공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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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령정부·제1제국 국가기관제국 원수대표
군사·지휘 -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헬베티아 방면군 사령관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758니스에서 출생
- 1784왕립 이탈리아 연대 최고 부사관 계급(adjudant)
- 17938월 여단장, 12월 20일 사단장
- 1799헬베티아 방면군 사령관, 제2차 취리히 전투 승리
- 1800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제노바 방어
- 1804제국 원수 임명
- 1808리볼리 공작
- 1809에슬링 대공(일부 문헌은 1810년 1월)
- 1810포르투갈 침공, 부사쿠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패배
- 18115월 11일 지휘권에서 해임
- 18151월 20일 루이 18세로부터 프랑스 귀화
- 1817파리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포르투갈 전역과 마지막 지휘: 1810~1811
1810년 4월 17일 나폴레옹은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교착을 깨기 위해 마세나에게 포르투갈 재정복을 맡겼다. 주노(1808)와 술트(1809)의 실패에 이은 제3차 침공이었고, 마세나는 네이·레이니에·주노의 군단으로 편성된 포르투갈 방면군을 받았다. 이론상 13만을 넘는 병력이었으나 부하들의 비협조, 보급 문제, 게릴라가 들끓는 자원 빈약 지역의 불안정한 통신선 탓에 실제로 침공에 동원된 것은 약 6만이었다. 그는 이 임무에 대한 열의가 없음을 황제에게 분명히 밝혔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쇠한 모습이었다.
추수를 기다려 보급을 마친 마세나는 7월 10일 시우다드로드리구, 8월 27일 알메이다를 차지하고 9월 포르투갈에 들어갔다. 웰링턴은 곡물을 없애며 리스본으로 물러섰고, 9월 27일 부사쿠에서 고지에 의지해 프랑스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정면 공격의 무익함을 깨달은 마세나는 우회 기동으로 적 방어선을 돌아 다시 리스본으로 향했으나, 웰링턴은 군대를 온전히 보존한 채 후퇴했다.
리스본 앞에서 그는 웰링턴이 세운 토레스베드라스 방어선에 막혔다. 연합군은 해상 보급을 받았지만 요새 앞에 멈춘 프랑스군은 보급 위기로 점점 궁지에 몰렸다. 한 달 넘게 방어선 앞에서 시간을 허비한 끝에 마세나는 11월 14일 공성을 포기하고 산타렝으로 물러나 1811년 3월 6일까지 어려운 조건에서 머물렀고, 알메이다를 거쳐 4월 10일 살라망카에 도착했다. 이 와중에 그는 네이와 격렬히 다퉈 네이의 지휘권을 박탈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1811년 5월 3일 푸엔테스데오뇨로에서 마세나는 웰링턴 방어선의 약점을 찌르는 데 성공했으나, 르피크 기병의 무활동과 베시에르의 미협조로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 침공의 실패에 실망한 나폴레옹은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마세나는 5월 11일 마르몽에게 지휘권을 넘기며 야전 지휘관의 삶을 마감했다.
이 전역의 평가는 갈린다. 리처드 험블은 부사쿠에서의 정면 공격 결정을 두고 그의 경력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수행 가운데 하나로 비판한다. 반면 도널드 하워드는 침공 전략 자체가 나폴레옹이 정하고 참모진과 군단장들이 집행한 것이며, 목표를 눈앞에 둔 군대가 버려졌다고 그를 변호한다.
이 전역은 전쟁 수행 방식에서도 주목할 지점을 남긴다. 1806년 남부 이탈리아 지휘 당시 마세나는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점령 지역을 황폐화했으며 때로 대량 처형을 초래했다. 봉기 지도자 프라 디아볼로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라우리아 마을은 프랑스군의 학살로 파괴되었다. 한편 저술가로서 그는 1815년 3~4월 프로방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글을 1816년에 출간했고, 1849~1850년에 나온 《마세나 회고록》은 실제로는 장바티스트프레데리크 코흐 장군이 작성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