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공화주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여러 갈래입니다. 국민주권·대표제, 시민적 자유와 권리, 경제적 자유주의를 전개한 사상가와 정치인들을 포함합니다. 시장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는 다르며, 경제 노선의 분류가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태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입헌군주제 아래의 자유주의 활동도 포함합니다.

28 명

소속 인물

에마뉘엘 시에예스

Emmanuel Joseph Sieyès

제3신분의 국민 주권을 이론화한 성직자·정치가

1788~1789년 삼부회 소집을 둘러싸고 제3신분을 국민 전체와 등치시켰고, 이후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끝냈다.

성직자이자 정치사상가로 1789년 팸플릿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제3신분을 국민과 결부했다. 국민의회 성립에 기여했고 국민공회에서는 평원파에 속했다. 총재정부 말기에는 브뤼메르 쿠데타에 참여해 통령정부 수립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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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5–1788트레기에 주교 비서와 대리, 샤르트르 교구장대리로 재직했고 브르타뉴 삼부회 의원으로 특권 신분의 횡포를 목격했다.
  • 1789「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펴냈고 제3신분 대의원으로 국민의회 성립을 추진해 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 1792–1795국민공회 의원으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고 총재정부 말기에 헤이그에 파견되어 대사 자격으로 활동했다.
  • 17995월 총재로 선출되었고 브뤼메르 쿠데타를 주도해 통령정부의 임시 집정관이 되었다.
  • 1799–1830상원의원(Sénat conservateur)을 지냈고 왕정복고 후 아카데미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갔다가 1830년 7월 혁명 후 귀국했다.
  • 1836파리에서 88세로 사망했으며, 유고에서 ‘사회학(sociologie)’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

Jacques Pierre Brissot

전쟁론을 주도한 지롱드파 언론인·의원

1791~1792년 입법의회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주도했고, 1792년 4월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1793년 10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언론인이자 입법의회·국민공회 의원으로 노예제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1791~1792년 혁명을 지키고 확산한다는 명분으로 대외전쟁을 강하게 주장했고 지롱드파의 대표 인물이 됐다. 1793년 6월 지롱드파 몰락 뒤 체포되어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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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0년대~1780년대법률 서기로 수학한 뒤 《메르퀴르 드 프랑스》와 《쿠리예 드 레롭》에 기고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 1788년노예제 폐지 단체인 흑인 친우회를 창설하고 서기로 활동했다.
  • 1789년파리 시정부 의원으로 선출되고 《파트리오트 프랑세》를 창간해 1793년까지 편집했다.
  • 1791년 10월~1792년 9월센주 선거구에서 입법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외교위원회에서 대외정책을 좌우했다.
  • 1792년 9월~1793년 10월국민공회에서 외르에루아르주 의원을 지냈고 1793년 6월 체포돼 10월 처형됐다.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
푀양파 자유주의·공화주의 프랑스 프랑스 1757–1834 ○ 자연사 · 파리

두 대륙의 혁명에 참전한 프랑스 장군

1789년 7월 11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고, 바스티유 습격 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 샹드마르스에서 국민위병이 군중에게 발포해 신임을 잃고 중도 노선은 끝났다.

1757년 태어나 1834년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대륙군 소장으로 요크타운 포위전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고, 1789년 삼부회 의원과 국민위병 총사령관을 지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혁명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1791년 샹드마르스 유혈 사건으로 민중의 신임을 잃었고 1792년 체포령 뒤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5년 넘게 수감되었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복고 왕정 아래 자유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을 다시 지휘하고 루이필리프를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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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7–1781대륙군 소장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미국군 우익 지휘
  • 1787–1789명사회 의원, 1789년 삼부회 귀족 대표(리에즈몽 선거구)
  • 1789–1791국민위병 총사령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 제출
  • 1791–1792중부군·북부군 사령관, 1792년 8월 체포령 뒤 탈출
  • 1792–1797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억류되어 올뮈츠 등지에 수감, 1797년 석방
  • 1814–1830부르봉 복고 왕정 아래 국민의회 자유파 의원
  • 1830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 사령관으로 루이필리프 즉위를 지지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Alexandre de Lameth

혁명 초기의 삼두파에서 푀양파로 이동한 정치가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지만 삼두파와 푀양파에서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고, 1792년 왕정이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귀족 장교로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고 특권 폐지를 지지했다. 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루다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의 지도자가 됐다. 망명과 귀환 뒤 나폴레옹 정부의 지방관,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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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7–1785왕의 친위대에 들어가 근위 기병 장교로 복무했고, 1782년 로샹보 휘하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 1789페론느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제3신분에 합류했고, 8월 4일 밤 특권 폐지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89–1791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뤄 의회 좌파를 이끌었고, 1790년 11월 20일 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 1791–1792자코뱅 클럽 창립 회원이자 푀양파 지도자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고, 1792년 5월 북부군에서 준장이 되었으나 8월 10일 라파예트와 함께 적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에 억류됐다.
  • 1800–1814귀국해 바스알프·라인모젤·뢰르·포 주의 지방관을 지냈고 1810년 제국 남작이 됐으며, 1814년 중장으로서 솜 주 지방관을 맡았다.
  • 1820–1827왕정복고기에 센마리팀과 센에우아즈에서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빌레르 내각에 맞섰다.

샤를 들레클뤼즈

Charles Delescluze

1830·1848년 혁명을 거쳐 코뮌의 전쟁 대표가 되고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택한 자코뱅 언론인

1871년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는 피의 주간 마지막 날인 5월 25일, 무장하지 않은 채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로 걸어가 전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드뢰 출신으로 1830년 7월 혁명에 가담했고, 1848년 2월 혁명 뒤 공화파 신문을 내며 활동하다 망명했다. 제2제정기에 체포되어 기아나 유형지 카옌에서 복역했고, 1868년 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혔으나 코뮌에 참여하려고 사퇴했다.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로 공안위원이 되었고 5월 11일 민간인으로서 전쟁 대표를 맡았다. 5월 25일 패배가 분명해지자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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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07월 혁명에 참여했다.
  • 18482월 혁명 뒤 공화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망명했다.
  • 1868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 1871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사퇴하고 파리 코뮌에 합류해 공안위원과 전쟁 대표를 맡았다.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쿠스코바

Екатерина Дмитриевна Кускова
자유주의·공화주의 러시아 러시아인 1869–1958 → 사망

개혁적 사회주의와 반당주의를 오간 공론가

1921년 기근 속에서 그녀는 폼골의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쿠스코바는 혁명적 인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주의를 거쳐 자유주의적 개혁사회주의로 이동한 정치활동가·저술가였다. 1899년의 《크레도》는 노동운동의 경제투쟁과 민주적 개혁을 앞세우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1905년 이후 그녀는 해방동맹, 협동조합 운동, 여성 평등 운동과 여러 신문을 통해 정당 독점에 맞선 민주적 연합을 모색했고, 1917년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코르닐로프 세력을 비판했다. 1921년 기근 때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함께 폼골의 비볼셰비키 구호 활동을 조직했으나, 위원회가 해산된 뒤 체포·추방되어 망명지에서 글을 계속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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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s–1893인민주의 지하모임 참여, 체포와 니즈니노브고로드 유형
  • 1895–1899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결혼, 해외 사회민주주의·경제주의 활동
  • 1903–1905해방동맹 창립 참여, 《우리의 삶》 편집
  • 1906–1914《제목 없음》 발행, 협동조합·여성 평등 운동
  • 1917《인민의 권력》 발행, 민주회의·임시공화국회의 대표
  • 1921전러시아 기근 구호 위원회 폼골의 비볼셰비키측 조직자
  • 1922–1958추방 뒤 베를린·프라하·제네바에서 망명 언론 활동

폴 레노

Paul Reynaud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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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아이모 카얀데르

Aimo Cajander

산림 유형론을 세우고 전쟁 전야의 내각을 이끈 핀란드의 산림학자·정치가

겨울전쟁 당시 민간복 차림의 예비병을 가리켜 '모델 카얀데르'라는 말이 돌았다. 총리 재임 중 국방준비 부족의 상징처럼 그의 이름이 붙었으나, 책임이 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의 산림학자이자 정치가. 1879년 우시카우풍키에서 태어나 시베리아 답사를 거친 식물학 논문으로 190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1년 헬싱키대학교 산림학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산림청장 대행을 거쳐 1934년 총국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산림행정을 이끌었다. 1922년과 1924년, 1937년에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 국민진보당 의장을 맡았다.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했고 1943년 1월 21일 의사당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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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시베리아 답사에 기초한 식물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04헬싱키대학교 식물학 도슨트
  • 1911–1934헬싱키대학교 산림학(임업) 교수
  • 1918–1943산림청(메찰리투스) 지휘, 1918년 청장 대행·1927년 상임 청장·1934년 총국장
  • 1922핀란드 총리, 독립 후 첫 관료 내각 수반
  • 1924핀란드 총리, 제2차 내각 수반
  • 1928–1929국방장관
  • 1929–국민진보당 소속 의원(바사·비푸리 서부 선거구)
  • 1933–1943국민진보당 의장, 당내 좌파로 평가됨
  • 1937–1939핀란드 총리, 최초의 사회민주당·농민당 연립(제3차 내각),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

마누엘 아사냐

Manuel Azaña

내전 내내 공화국을 상징했으나 끝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한 마지막 대통령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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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20마드리드 아테네오 서기
  • 1926공화행동당 창당
  • 1931.04–10전쟁장관
  • 1931.10–1933.09총리 겸 전쟁장관
  • 1936.02–05총리
  • 1936.05–1939.02공화국 대통령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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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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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Γεώργιος Παπανδρέου

해방과 내전의 경계에 선 자유주의 정치가

카세르타 협정에서 그는 해방 뒤에도 영국군 사령관 스코비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는 구상에 동의했다.

그리스의 자유주의 정치가로, 군주제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운동과는 대립한 사회개혁 지향의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정부를 이끌며 레바논 회의와 카세르타 협정을 통해 저항 세력의 정부 참여와 군 통합의 틀을 마련했다. 1944년 귀국 뒤 국민통합정부의 수상으로 국가 통치권을 세우려 했지만, 영국의 군사적 개입과 EAM·비EAM 세력의 충돌 속에서 그 구상은 데켐브리아나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연합을 창당해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며 1967년 군사 쿠데타 뒤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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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베니젤로스의 반군 정부에 합류해 반군주제 운동을 조직했다.
  • 1923내무장관
  • 1930–1932교육장관, 난민 아동을 위한 학교 확충을 추진했다.
  • 1935그리스 민주사회당 창당
  • 1944–1945망명정부 및 국민통합정부 수상, 레바논·카세르타 합의를 대표했다.
  • 1950–1952부수상
  • 1961–1965중앙연합 지도자, 1963년과 1964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 1967–1968군사정권 아래 가택연금
핀란드 국가기관 자유주의·공화주의 핀란드 핀란드 1889–1956 ○ 전쟁책임 10년형, 1949년 사면

겨울전쟁 중 총리로 등장하여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한 핀란드 대통령

이 재판은 익살극이다. 실제 기소자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라 한 초강대국의 정부이며, 실제 피고는 핀란드 국민이다.

겨울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 총리가 되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핀란드은행 총재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계속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했으나 1944년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을 개인 자격으로 맺고 사임해 만네르헤임의 대소 강화를 열었다. 전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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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 1927–1929국회의원 (국민진보당)
  • 1921–1924재무장관
  • 1924–1939, 1944–1945핀란드은행 총재
  • 1925국민진보당 대통령 후보
  • 1939–1940핀란드 총리
  • 1940–1944핀란드 대통령

후스

胡适
자유주의·공화주의 중국 중국 1891–1962 ○ 심장마비

백화문 운동을 이끈 신문화운동의 자유주의자, 뒤에 국민정부의 외교관

미국 컬럼비아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실용주의 철학자로, 문어 대신 백화문으로 글을 쓰는 문학혁명을 이끌어 중국인의 문자 생활을 바꾸었다. 신청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헌정을 저버린 국민정부와도 거리를 두었으며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철학자로 1917년 『신청년』에 문학개량을 제안해 백화문 운동을 열었다. 5·4 시기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主義)를 적게 말하라」며 마르크스주의로 기운 리다자오·천두슈와 갈라섰다. 베이징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항일전쟁기 주미대사로 일했다. 1949년 뒤 미국과 대만에서 활동했으며 대륙에서는 1950년대 그의 사상을 겨냥한 대규모 비판운동이 벌어졌다. 타이베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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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6베이징대학 교수
  • 1938–1942주미 중화민국 대사
  • 1946–1948베이징대학 총장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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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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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피에르 망데스프랑스

Pierre Mendès France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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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헨리 M. 잭슨

Henry M. Jackson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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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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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전차 위에 올라간 남자

1999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시간 낮 12시 신년사 방송에서: "여러분, 나는 사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1931년 우랄 부트카에서 집단화로 몰락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07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 1961년 입당해 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1976–85)와 모스크바 당 제1서기(1985–87)를 지냈고,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뒤 해임되었다. 1990년 러시아 연방 인민대의원, 이어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91)이 되었고 1991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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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85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
  • 1985–87모스크바 당 제1서기: 특권 비판으로 인기
  • 1987지도부 정면 비판 후 해임
  • 1989–90인민대의원 압승,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의장, 탈당
  • 1991.6러시아 대통령(사상 첫 직선)
  • 1991.8/12쿠데타 저지, 벨라베자 합의 서명
  • 1999.12.31사임, 국민에게 사과

휴 토머스

Hugh Thomas
자유주의·공화주의 영국 영국인 1931–2017 ○ 자연사

스페인 내전을 세계사적 서사로 만든 역사가

스페인어 한마디 몰랐던 서른 살의 영국인이 쓴 《스페인 내전》이 파리에서 출간되어 프랑코 정권 아래 금서로 밀반입됐다.

휴 토머스는 1961년 저서 《스페인 내전》으로 전쟁을 국제 독자에게 널리 알린 영국 역사가다. 그는 외교 자료와 참전자들의 기록, 인터뷰를 바탕으로 공화파의 투쟁과 내부 폭력을 공산주의 진영이나 반공주의 진영의 논리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서술했다. 이 책은 프랑코 독재 아래의 스페인에서 clandestine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사실과 해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출발점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쿠바와 스페인 제국, 세계사를 연구했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으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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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52윈저 출생, 셔본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 수학
  • 1952–1953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 트라이포스에서 최우등, 케임브리지 유니언 회장
  • 1954–1957영국 외무부 근무, 유엔 군축위원회 영국 대표단과 파리 대사관에서 활동
  • 1957왕립육군사관학교 샌드허스트에서 강의, 첫 소설 《세계의 게임》 출간
  • 1961《스페인 내전》 초판 출간, 1962년 서머싯 몸상 수상
  • 1966–1976리딩 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71–2014쿠바, 멕시코 정복, 스페인 제국을 다룬 대작과 세계사 저술
  • 1981–2017스위너턴의 토머스 남작으로 귀족원 의원, 2017년 사망

니세포르 소글로

Nicéphore Soglo

베냉의 과도정부와 다당제

1991년 결선투표에서 67.7%를 얻어 케레쿠를 꺾고, 프랑스어권 탈식민 아프리카에서 야당 후보가 선거로 정권을 잡은 첫 사례가 되었다.

세계은행에서 일한 경제 관료 출신의 베냉 정치가다. 1990년 국민회의 뒤 과도정부 총리를 맡았고 1991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레쿠를 이겼다. 사회주의 정권의 창건자가 아니라 그 체제에서 다당제와 경제 구조조정으로 이행한 시기의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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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재무 감사관
  • 1967–1968재무·경제부 장관
  • 1990–1991총리
  • 1991–1996대통령
  • 1994르네상스당 당수
  • 2003–2015코토누 시장

예브게니 그리고리예비치 야신

Евг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Ясин
자유주의·공화주의 러시아 러시아계 1934–2023 ○ 자연사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설계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1968년,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주로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것을 지켜본 야신은 훗날 '나에게는 그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고 회고했다.

예브게니 야신은 소련 말기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려는 개혁 구상을 발전시킨 경제학자였다. 그는 샤탈린 그룹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로 참여해 급진적 시장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소련의 해체 뒤에는 러시아의 개혁 국가기구에서 일했다. 옐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시장개혁을 추진했지만, 전환의 사회적 비용과 국가 역량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자유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이후 고등경제대학과 자유주의 사상 재단을 이끌며 러시아의 경제정책과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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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데사 수문공학연구소 졸업, 교량 건설기사
  • 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4–1973중앙통계국 연구소 부서장·연구실장
  • 1973–1989소련 과학아카데미 중앙경제수학연구소 연구실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서장,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
  • 1994–1997러시아 연방 경제부 장관
  • 1998–2021고등경제대학 학술감독
  • 2000–2019자유주의 사명 재단 대표

마난다피 라코토니리나

Manandafy Rakotonirina
자유주의·공화주의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베치레오족) 1938–2019 ○ 자연사

1972년 혁명세대 좌파 정당 MFM의 창당자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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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모니마(MONIMA) 입당
  • 1968모니마 안타나나리보 지부 책임자
  • 1972MFM 창당(12월 27일)
  • 1977–1989혁명최고평의회 위원·경제위원장
  • 1989대통령 선거 2위(약 20%)
  • 1991–1993경제사회복구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3–1998국회의원(마난드리아나)
  • 2009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제3의 길을 거부한 시장개혁 정치가

“우리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시장경제를 원한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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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프라하 경제대학교 졸업
  • 1971–1986체코슬로바키아 국립은행 근무
  • 1987–1989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분석가
  • 1989–1991체코슬로바키아 재무장관
  • 1991–2002시민민주당 초대 의장
  • 1992–1998체코 총리
  • 1998–2002체코 하원 의장
  • 2003–2013체코 대통령

블라디미르 티스머네아누

Vladimir Tismăneanu

망명한 루마니아계 미국 정치학자, 1989년 혁명 연구의 권위자

1990년 6월 부쿠레슈티에서 광부들이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가장 조잡하고 역겨운 형태의 야만성'에 대한 통찰을 준 경험이라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나 1981년 망명한 정치학자로, 스탈린주의와 동유럽 공산 체제의 몰락을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왔다. 2003년 『모든 계절을 위한 스탈린주의』로 루마니아 공산주의사의 결정적 종합을 제시했고, 2006년 루마니아 대통령 직속 공산독재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산주의 과거사 청산 보고서를 이끌었다. 1989년 혁명의 원인·의미·결과를 다룬 2009년 논문은 혁명 이후 민족 갈등과 권위주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한 메시지'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989년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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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1981부쿠레슈티 표준건축설계연구소 사회학자
  • 1983–1990필라델피아 외교정책연구소(FPRI) 연구원
  • 1985–1990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강사
  • 1990–메릴랜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 1998–2004『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편집장
  • 2006루마니아 공산독재연구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 2009「1989년 혁명: 원인, 의미, 결과」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발표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

Francis Yoshihiro Fukuyama

1989년의 승리를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점으로 읽은 학자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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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코넬대학교 고전학 학사
  • 1979–1981하버드대학교 정치학 박사 과정 및 박사학위
  • 1979–1989랜드연구소 정치학 부서 연구원
  • 1981–1982미 국무부 정책기획참모
  • 1989「역사의 종말?」 발표, 『내셔널 인터레스트』
  • 1992『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 출간
  • 2001–2010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정치경제 교수
  • 2010–현재스탠퍼드대학교 프리먼 스폴리 국제학연구소 선임연구원

티모시 가튼 애시

Timothy Garton Ash

1989년 혁명을 목격하고 '개혁혁명(refolution)' 개념으로 평화적 체제 전환을 규정한 영국 역사가

프라하의 한 지하 술집에서 바츨라프 하벨을 만난 1989년 11월 23일, 하벨이 체제 전환의 속도에 놀라워하자 응수했다: '폴란드에서는 10년, 헝가리에서는 10개월, 동독에서는 10주 걸렸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0일이면 되지 않을까요?'

옥스퍼드대 유럽학 교수이자 《가디언》 칼럼니스트로, 중동부 유럽의 현대사와 1989년 공산 체제의 붕괴를 현장에서 추적해온 영국 역사가다. 1989년 바르샤바·부다페스트·베를린·프라하를 종횡하며 시민혁명을 목격하고 《마법의 랜턴》(1990)에 기록했으며, 개혁(reform)과 혁명(revolution)의 합성어인 '개혁혁명(refolution)' 개념을 제안해 평화적 체제 전환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했다. 조지 케넌이 '현재의 역사가'라 부른 뒤로도 40년 가까이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글쓰기를 이어왔으며, 2017년 샤를마뉴상을 비롯한 수상 경력은 그의 저작이 학계와 정책 결정 현장을 동시에 움직여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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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을 서방 언론 최초로 보도, 레흐 바웬사를 만남
  • 1986–1987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펠로
  • 1989바르샤바·부다페스트·베를린·프라하에서 1989년 혁명 목격, 《마법의 랜턴》(1990) 집필
  • 2000–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선임펠로
  • 2004–옥스퍼드대 유럽학 교수, 《가디언》 국제정치 칼럼 연재
  • 2017샤를마뉴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