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튀르키예

4 명

해당 인물

율리 오시포비치 마르토프

Юлий Осипович Мартов
비소련 혁명가 소련 튀르키예 1873–1923 → 망명지 사망

레닌의 가장 오랜 벗이자 가장 원칙적인 적수

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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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레닌과 공동)
  • 1900–03이스크라 편집진, 1903년 분열로 멘셰비키 지도자
  • 1914–17반전 국제주의파
  • 1917–20멘셰비키 국제주의파 지도, 합법 야당 시도
  • 1921–23베를린에서 『사회주의 통보』 창간

블라디미르 키리아코비치 트리안다필로프

Владимир Кириакович Триандафиллов
군사 · 국방 소련 튀르키예 1894–1931 ○ 순직

「소련 작전술의 아버지」: 종심작전 교리의 설계자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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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 1918–23붉은 군대 입대, 남북전쟁 여단장; 군사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24–28참모본부 제1(작전)부장, 작전총국장 — 프룬제의 발탁
  • 1926『현대군의 작전 규모』 출간 — 작전술의 기초 개념 제시
  • 1928–31붉은 군대 부참모총장 (1929–30년 제2소총군단장 겸임)
  • 1929『현대군 작전의 성격』 출간 — 종심작전 이론의 결정판
  • 1931근무 비행 중 항공 사고로 순직, 유해 크렘린 성벽 안치

나즘 히크메트

Nâzım Hikmet
비소련 혁명가 튀르키예 튀르키예 1902–1963 ○ 망명 중 자연사

28년형을 시로 살아낸 터키 혁명시인, 모더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20세기 문학의 거인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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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 1938–1950군사반란 선동 혐의로 28년형 선고, 4개 도시 교도소에서 12년 복역
  • 1939–1960옥중에서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 16,000행 집필
  • 1950국제 석방운동과 단식투쟁 끝에 사면 — 국제평화상 수상
  • 1951–1963소련 망명 — 세계평화평의회 상임위원, 반식민주의·반전 활동
  • 1963.6.3모스크바 페레델키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니키타 아르카디예비치 크리먄

Никита Аркадьевич Кримя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튀르키예 1913–1955 ✕ 처형

서른한 살에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이 된 수사관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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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캅카스 GPU 경제부 견습, 이어 담당관
  • 1935–1937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선임요원, 이어 과 부책임자
  • 1937–1938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과장
  • 1938–1940그루지야 NKVD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리보프주 NKVD 관리국 부국장
  • 1941–1943야로슬라블주 NKGB·NKVD 관리국 부국장
  • 1943–1945야로슬라블주 NKGB 관리국장
  • 1945–1947아르메니아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7–1950울리야놉스크주 MGB 관리국장
  • 1951–1953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 인사부장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