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개하거나 공산주의 운동을 조직·지지한 사람들입니다. 공산당 활동과 사회주의 시기의 주요 국가 복무로 공산주의 세력에 연결되는 인물도 함께 봅니다. 마르크스·엥겔스와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상가·예술가를 포함하며, 당원 여부와 지지 활동은 구별합니다. 특정 시기의 경력이 포함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생애 전체가 같은 입장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1484 명

소속 인물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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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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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46–1919 ○ 병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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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Сергей Геннадиевич Нечаев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47–1882 ○ 옥사

『혁명가의 교리문답』 저자,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허무주의 혁명가

「혁명가는 파멸된 인간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익도, 사업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이름조차도 없다. 그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사상, 하나의 열정 — 혁명에 삼켜졌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서두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집필한 허무주의 혁명가.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을 조직했으나 동료 살해로 추방당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그의 '네차예프시나'는 혁명 조직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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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1866모스크바로 이주, 역사가 포고딘의 사무원으로 근무; 교사 시험 응시했으나 실패
  • 1867–1868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교사 자격 취득 후 교구학교 교사로 근무; 대학 청강생으로 급진 학생운동 참여
  • 1869.4–8자작 체포극을 꾸민 후 스위스로 망명; 바쿠닌·오가료프와 교류, '바흐메테프 기금' 1만 프랑을 확보; 『혁명가의 교리문답』 집필
  • 1869.9–11모스크바 귀환 후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 조직, 5인조 체계와 철저한 규율 도입; 자신에게 불복종한 학생 이바노프를 직접 살해
  • 1870–1872재차 해외 도주; 제네바에서 잡지 『인민의 보복』·『공동체』 발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됨
  • 1872–1873취리히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정부에 범죄인 인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20년 카토르가형 선고
  • 1873–188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이옙스크 라벨린에 독방 수감; 수비병 40여 명을 포섭하고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와 비밀 연락망 구축
  • 1882.12.3수종과 괴혈병 합병증으로 옥사, 35세; 시신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역 인근에 매장(정확한 위치 미상)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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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옐리자베타 루키니치나 드미트리예프

Елизавета Лукинична Кушелева

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조직한 러시아 혁명가

여성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옐리자베타 쿠셰레바로 태어나 결혼 뒤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썼다.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서 활동하고 1870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만났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대표로 파리에 가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코뮌 진압 때 바리케이드 전투에 참여해 부상당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다.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며 1916년 이후, 1918년 이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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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미하일 토마노프스키와 결혼해 상속 재산을 얻고 혁명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 1868–1869제네바에서 러시아어 잡지 《나로드노예 델로》를 재정 지원·공동 편집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 창설에 참여했다.
  • 1870제네바 지부의 사절로 런던에 가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 1871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과 노동권을 추진했다.
  • 1871–1877코뮌 패배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하고 그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갔다.

디미터르 니콜로프 블라고예프

Димитр Николов Благоев
공산주의 불가리아 불가리아 1856–1924 ○ 자연사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불가리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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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5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결성, 『라보치』 발행
  • 1891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 1897–1923이론지 『노보 브레메』 편집장
  • 1903–1919협소파(테스냐키) 지도자
  • 1905『자본론』 제1권 불가리아어 번역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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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가타야마 센

片山潜
코민테른 공산주의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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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Ольм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33 ○ 자연사

이스트파르트의 창설자이자 볼셰비키 당사 편찬의 설계자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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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 1922–1933구볼셰비키협회 회장(회원번호 1번), 살티코프-셰드린 전집 편찬위원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베르나츠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Вернад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생물권과 지식권 개념으로 지구를 재발견한 생지화학의 창시자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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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1모스크바대학 광물학 교수
  • 1906–1917카데트당 중앙위원 · 국가평의회 의원
  • 1917임시정부 교육부 차관
  • 1918–1921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 1922–1939소련 라듐연구소 소장
  • 1927–1945생지화학연구소 소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릴로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ры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소련 조선과학의 아버지,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옮긴 수학자

손자 안드레이 카피차가 "왜 혁명 때 장군인 할아버지는 총살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크릴로프는 짧게 답했다. "장군도 장군 나름이란다."

제정 말기부터 소련까지 활동한 수학자·조선공학자. 마카로프 제독과 선박 불침몰성 이론을 정립했고, 1915년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완역했다. 혁명 후 조선과학 토대를 닦고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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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 소위·나침반부 근무, 자차 이론 첫 연구
  • 1888–1890니콜라옙스크 해군사관학교 조선학과 수료
  • 1890–1908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 교수, 조선에 수학을 최초로 체계 응용
  • 1900–1908해군성 실험수조장 — 조선 연구 기초 마련
  • 1908–1911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수석 조선감독관
  • 1911–1917해군장관 특별임무 담당 대장, 세바스토폴급 전함 설계
  • 1915뉴턴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러시아어 최초 완역
  • 1916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수리물리학)
  • 1919–1920해군대학장
  • 1928–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 1938–1941나침반 편차·자이로콤파스 이론 출판, 스탈린상 1급
  • 1943사회주의노동영웅 — 조선과학 평생 공로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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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안나 일리니치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

Анна Ильинична Елизарова-Ульян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4–1935 ○ 병사

레닌의 맏누이이자 이스크라 지하유통을 조직한 구볼셰비키 혁명가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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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64–1941 ○ 자연사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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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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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1865년 7월 14일(26일) 리가현 콕네세 볼로스트에서 태어나 1932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과 신문 『디에나스 라파』를 이끌었고, 1897년 체포되어 7개월 구금 후 뱟카현으로 5년 유형되었다.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했으며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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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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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

Андрей Евгеньевич Снеса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5–1937 ○ 수용 후유증

차르 장군 출신 붉은 군대 이론가,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하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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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휴 쿠퍼

Hugh Lincoln Cooper
소련 소련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65–1937 ○ 자연사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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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도이믹

Ernst Friedrich Däumig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66–1922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지도자다.

사회민주당 언론인으로 출발한 도이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베를린 급진파와 혁명적 오프로이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18년 11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지도부로서 평의회 체제를 헌정의 토대로 삼으려 했으나 제헌의회 지지 세력에 패했다. 그는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이끌고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1921년 2월 파울 레비와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3월 행동과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고, 1922년 USPD에 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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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게라·할레·에르푸르트의 사회민주당 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1911베를린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에 군사 기술·노동자 교육 담당자로 합류했다.
  • 1916《포어베르츠》를 떠난 뒤 독립사회민주당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
  • 1918혁명적 오프로이테 지도자이자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주요 인사가 되었다.
  • 1920독립사회민주당 의원으로 제국의회에 들어갔고, 볼셰비키의 21개 조건 수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지지했다. 12월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다.
  • 19212월 파울 레비와 함께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직에서 사퇴했다. 3월 행동 이후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다.
  • 1922공산주의 노동공동체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에 복당했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폴란드인 1866–1925 ○ 병사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과 러시아 혁명을 모두 거친 국제주의자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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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폴란드 노동자동맹 공동 창립
  • 1893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공동 창립
  • 1896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 1906–1907SDKPiL 대표로 RSDLP 런던 당대회 참석, 중앙위 후보위원
  • 1914–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독일에서 반전 운동으로 투옥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TKRP) 위원장
  • 1922–1925MOPR 중앙위 초대 의장, KUNMZ 초대 총장

레오 요기헤스

Leo Jogiches

혁명의 지하 조직가. 언제나 뒤에서, 마지막엔 맨 앞에서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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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빌뉴스 최초의 지하 사회주의 연구 서클 창립
  • 1890징집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룩셈부르크와 만남
  • 1892사회민주주의 도서관 출판사 설립
  • 1893룩셈부르크와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 훗날 SDKPiL) 공동 창립
  • 1905–1906바르샤바에서 SDKPiL 중앙위 지도 — 체포, 8년 중노동형, 탈옥
  • 1907RSDLP 런던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 선출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지하 조직 총괄 — 신문 《스파르타쿠스》 발행 지휘
  • 1919.1–1919.3KPD 지도부 장악,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조사 주도

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쿠르나톱스키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натовский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시작해 치타 공화국을 이끈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사람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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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 1906–1912사형 선고 후 종신 카토르가 감형, 일본 탈출, 파리 망명 중 사망

체렌도르지

Цэрэндорж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868–1928 ○ 재임 중 병사

몽골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 구체제의 외교관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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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90허레 만주 행정청 서기
  • 1890–1904러시아 영사관 통역학교 교사
  • 1904–1911허레 만주부 중국어 통역관(6품)
  • 1913–1915자치 몽골 외무차관
  • 1915–1919외무부 수석장관
  • 1923–1928몽골 총리(1924년부터 인민공화국 총리)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포크롭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ок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8–1932 ○ 암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이자 사후 부정된 혁명적 역사가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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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 1905–1907모스크바 볼셰비키 강연단·신문 ≪보르바≫ 편집; 12월 봉기 참가; RSDLP 제5차 런던대회 대의원·중앙위 후보위원
  • 1908–1917망명: '전진파'·이후 반파벳적 입장; 1차대전 때 국제주의자로 복귀; ≪고대 이후의 러시아사≫ 5권 집필(1910–1913)
  • 1917–1918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7.11–1918.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대표단 위원
  • 1918–1932계몽인민부위원(루나차르스키 대리); 고등교육·과학·기록보관소 개혁 주도; 공산주의 아카데미·적색교수양성원·이스트파르트·레닌연구소·중앙기록보관소장
  • 1920–1923≪가장 간결한 러시아사≫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의 표준 교재
  • 1929–1932소비에트 아카데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회원 선출(1929);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1930–1932); 암으로 사망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8–1936 ○ 자연사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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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슐리흐테르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Шлихт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제정 러시아 신민권 취득, 문서화된 혈통은 독일계·우크라이나계) 1868–1940 ○ 자연사 ( 키이우 사망)

첫 농업인민위원에서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이 된 볼셰비키 농정가

1905년 10월 키이우의 대규모 혁명 집회를 이끌었고 10월 17일 칙령 이후 군중이 시두마 청사를 파괴했다. 10월 18일 발코니 연설은 1908–09년 재판의 기소 사유가 되었으며, 핀란드로 피신한 뒤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68년 8월 20일(구력)/9월 1일(신력) 폴타바현 루브니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일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조부는 뷔르템베르크에서 1818년 러시아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목수, 어머니는 몰락한 폴란드계 지주 가문 출신이다. 1882년 가족이 러시아 신민권을 취득했고 본인도 대학 시절 이를 취득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 학생 서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07년 제5차 RSDLP 대회(런던) 대의원이었다. 1917년 11월 RSFSR 농업인민위원, 1917년 12월–1918년 2월 식량인민위원으로 곡물 독점과 징발을 집행했다. 1920–21년 탐보프 주 집행위원장으로 반란 진압에 실패해 해임된 뒤 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1927–2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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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 1917.12–1918.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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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68–1944 ○ 자연사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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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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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W. E. B. 듀보이스

W. E. B. Du Bois
공산주의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1868–1963 ○ 자연사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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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34–1944애틀랜타대 교수, 『미국의 흑인 재건』(1935) 출간
  • 1944–1948NAACP 특별연구국장; 유엔 창설 회의 참석
  • 1950–1951평화정보센터 의장;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기소, 무죄
  • 1961–1963미국 공산당 입당; 가나로 이주,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 착수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9–1939 ○ 복막염

남편의 그림자 속에서 소비에트 학교와 도서관을 만든 여성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절의 그녀 방을 이렇게 기억했다. 방에서는 늘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암호 편지를 촛불에 쬐어 읽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 지하 연락원의 가명과 주소가 그녀 머릿속에 있었다.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였지만, 스스로 조직을 세운 혁명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몰락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사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이스크라』의 서기로서 암호와 가명, 주소로 이어지는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을 묶어냈고, 1917년 이후에는 리크베스 문맹 퇴치와 전국 도서관망으로 소비에트 교육을 세웠다. 1925년 신반대파를 잠시 지지했다가 철회했고, 추콥스키의 동화를 비판한 글은 그를 아동문학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해로운' 도서를 걷어내는 도서관 정화를 주도하면서도 테러의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해 탄원했다. 1939년 2월 27일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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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 1927–1939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29–1939RSFSR 계몽인민부위원, 소비에트 교육·도서관·검열 정책 주도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 1937소비에트 최고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비노쿠로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Виноку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9–1944 ○ 자연사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 14년간 사법부를 이끈 의사 출신 볼셰비키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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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 1917.10첫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두마 의장; 노동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1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
  • 1921–1924기근구제위원회 및 기근후속대책위원회 위원
  • 1924–1938소련 최고재판소 의장
  • 1938–1944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부장; 메드기즈 근무

블라디미르 레온티예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тьевич Ком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9–1945 ○ 자연사

스탈린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식물학자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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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식물학 학위
  • 1895–1897극동·만주·한반도 북부 탐사
  • 1899–1931제국 식물원(후일 식물연구소) 연구원
  • 192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0–193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6–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41–1945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 동원 위원회 의장

마르셀 카섕

Marcel Cachin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869–1958 ○ 자연사

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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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 1936센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프랑스 공산당 계열 첫 상원의원이 됐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4 ○ 병사

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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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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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레오니트 보리소비치 크라신

Леонид Борисович Крас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6 ○ 백혈병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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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추루파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Цюруп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출생지 기준 우크라이나(민족 분류 아님) 1870–1928 ○ 사망(심장마비)

식량독재를 설계한 내전기 최고의 식량 행정관

그가 굶주림으로 열차에서 실신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1939년 영화 장면으로 퍼졌고 후대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이 1919년 6월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고 지시한 일은 문헌으로 확인된다.

1870년 알료시키(현 우크라이나 올레슈키)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대가정에서 자랐고, 1891년 마르크스주의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1893년 체포되어 헤르손 농업학교에서 제적된 뒤 통계사로 일했고, 1898년 RSDLP에 입당해 우파와 하르코프에서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하다 1902년 올로네츠현 3년 유형을 받았다. 1917년 우파 소비에트와 시두마를 이끌며 페트로그라드로 곡물을 보냈고, 1918년 2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식량인민위원으로서 5월 8일 식량 독재를 제안하고 곡물 분견대와 빈농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고스플란 의장을 지냈다. 1928년 5월 크림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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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 1902–1904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3년 유형, 1904년 11월 우파로 복귀
  •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 1917–19211917년 11월 식량인민위원 대리, 1918년 2월 25일부터 1921년 12월 2일까지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고스플란 의장, 1925~26년 통제 수치로 연례 계획 수립 개시
  • 1925–1926소련 대외·국내무역인민위원

이반 이바노비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Сквор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8 ○ 장티푸스

『자본』을 러시아어로 옮기고 최초의 재무인민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지식인

「수동적으로 굶주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농촌 —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아니다」 — 1919년 회고록에서 1891–1892년 기근이 자신의 세대에 끼친 영향을 회고하며

1898년 입당한 초기 볼셰비키. 마르크스 『자본』의 러시아어 번역을 주도했으며, 레닌이 최고의 번역으로 꼽은 판본을 남겼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부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즈베스티야』와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레닌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을 이끌었고, 야로슬랍스키와 함께 전투적 무신론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사망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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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차르 암살 준비 혐의로 체포, 툴라 유배 중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
  • 1901모스크바 사회민주당 위원회 조직 시도 중 체포, 시베리아 아친스크 유배
  • 1907–1909보그다노프·바자로프와 함께 마르크스 『자본』 러시아어 번역 출간
  • 1917.10RSFSR 초대 재무인민위원 임명 (취임하지 않음);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
  • 1925–192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이후 『프라우다』 부편집장 겸 레닌 연구소 소장
  • 1926–1928『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 지도

페르낭 로리오

Fernand Loriot
코민테른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배경, 확인 자료 부족 1870–1932

프랑스 사회주의자이자 교원 노동조합 활동가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를 이끌었다

전쟁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했고, 프랑스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교사로 일하며 1901년 사회당에 가입했고, 교원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협력에 반대하고 짐머발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국제관계 재개 위원회와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창당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지도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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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사회당에 가입
  • 1917국제관계 재개 위원회 서기로 선출
  •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
  • 1920투르 대회에서 신설된 공산당 집행위원회 위원 및 국제 서기로 선출
  • 1925공산당 내 볼셰비키화 반대파에서 활동
  • 1926당을 떠나 혁명적 생디칼리즘 운동에 합류

다비트 보리소비치 랴자노프

Давид Борисович Рязан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38 ✕ 처형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창설자, 이견을 멈추지 않은 당내 독립적 마르크스주의자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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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표트르 아나니예비치 크라시코프

Пётр Ананьевич Крас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39 ○ 병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혁명적 합법성의 설계자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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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제네바 '노동해방단' 가입
  • 1903제2차 당대회 뷰로 위원 (레닌·플레하노프와 공동)
  • 1905페테르부르크 당위원회 선동부장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조직 참여, 군사수사위원회 의장
  • 1918–1924법무부 인민위원
  • 1919–1924《혁명과 교회》 창간·편집장
  • 1924–1933초대 소련 검찰총장
  • 1933–1938소련 대법원 부원장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56 ○ 자연사

볼셰비키에 합류한 첫 제국군 장성으로 적군 창설을 지휘한 군사지도자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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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 1917.3–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 1917.11–1918.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 1919.6–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니콜라이 예브그라포비치 페도세예프

Николай Евграфович Федосеев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898 ✕ 자살

볼가 지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러시아 혁명가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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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889.7불법 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 1890–1892카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레스티' 감옥 수감
  • 1892.9모로조프 공장 파업에서 노동자 조직 — 다시 체포됨
  • 1893.11솔비체고츠크로 3년 유형
  • 1895.7동시베리아로 5년 유형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폴란드 1871–1919 ✕ 살해

「자유는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다」

1919년 1월 14일, 봉기 진압 다음 날, 룩셈부르크는 마지막 논설을 발표했다. '베를린엔 질서가 지배한다'는 승자들에게 그녀는 답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있다, 나는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체포, 이튿날 살해.

폴란드 태생의 독일 혁명가이자 볼셰비키의 가장 날카로운 동지적 비판자. 옥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며 제헌의회 해산과 언론 통제를 경고했다. 1919년 1월 베를린 봉기 진압 때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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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공동 창립
  • 1898–1914독일 사민당 좌파의 이론가, 수정주의 논쟁
  • 1899《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출간
  • 1906『대중파업론』
  • 1913《자본축적론》 출간
  • 1915–18반전 투옥, 옥중에서 러시아 혁명 논평 집필
  • 1918.12독일공산당 창립
  • 1919.1베를린 봉기 진압 중 의용군에게 살해
등장 장면 제헌의회의 하루

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71–1919 ✕ 살해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의원, 혁명의 첫 순교자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 반전 팸플릿(1915)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차관에 유일하게 반대한 제국의회 의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을 창립했다. 1919년 1월 봉기 후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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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출간 — 이 저술로 요새금고형
  • 1912–1916제국의회 의원 — 1914년 12월 전쟁공채 표결의 유일한 반대표
  • 1916노동절 반전 시위로 체포, 징역형
  • 1918.1111월 혁명 —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사회주의공화국' 선포
  • 1918.12–1919.1스파르타쿠스단·KPD 공동 창립, 1월 봉기
  • 1919.1의용군에 체포되어 룩셈부르크와 함께 살해

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1–1923 ✕ 암살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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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71–1953 ○ 자연사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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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미콜라 올렉시요비치 스크리프니크

Микола Олексійович Скрипн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72–1933 ✕ 자살

우크라이나화의 설계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문화혁명가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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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 1917.3–1917.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2–1918.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 1918.7–1919.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 1919.1–1919.5우크라이나 국가통제인민위원 겸 최고사회주의검열 위원장
  • 1927–1933.2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 우크라이나화 정책·철자법 개혁·과학원·백과사전 총괄
  • 1933.2–1933.7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좌천

파벨 파블로비치 레베데프

Павел Павлович Лебед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3 ○ 자연사

차르의 소장에서 붉은 군대 첫 참모장으로, 내전 승리의 작전 설계자

1918년 3월, 전직 차르 소장이 예이스크에서 은퇴해 있을 때 레닌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스크바로 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차르 군대 소장 출신으로 1918년 레닌의 요청으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 결정적 작전들을 설계했다. 공화국 야전참모장(1919–1921)으로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을 상대한 모든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1919년 10월 오룔-쿠르스크 작전으로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을 저지했다. 1921년 붉은 군대 초대 참모장이 되어 참모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아카데미 원장을 겸하며 장교 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이오나 야키르 휘하 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1925–1928)을 지냈다. 제정 참모본부와 소비에트 군사 전문성을 이은 핵심 보옌스페츠로, 비당원이었으나 '극히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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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남서부전선 작전국장, 제3군 참모장, 서부전선 병참참모장 (소장)
  • 1918–1919전러시아 총참모부 동원국장
  • 1919동부전선 참모장 겸 사령관 대행
  • 1919–1921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야전참모장
  • 1921–1924붉은 군대 참모장 (초대)
  • 1922–19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임)
  • 1925–1928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 겸 부사령관
  • 1928–1933우크라이나 군관구 부사령관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6 ○ 자연사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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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0외무인민위원
  • 1898–1904제정 러시아 외무성 관리

아론 알렉산드로비치 솔츠

Ар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ль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72–1945 ○ 사망

당의 양심이라 불린 볼셰비키 원로, 대숙청기에 검찰총장과 맞선 법률가

「나는 뜨리포노프를 30년 동안 진짜 볼셰비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멘셰비키로 알고 있다!」 — 1938년, 체포된 동료를 변호하며 비신스키에게 던진 말.

1898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당 윤리 체계를 설계해 '당의 양심'으로 불렸다. 1937년 비신스키의 조작 사건을 공개 비판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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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입당
  • 1903–1905예까쩨리노슬라브 지하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6년형 선고 후 조기 석방
  • 1905–1917뚜멘·뚜린스크·나름에서 유형 생활; 첫 비합법 신문 『뚜멘스끼 라보치』 발행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자』『쁘라브다』 편집진
  • 1920–1934중앙통제위원회(ЦКК) 위원 및 상임위원 (1923–1934); 당 윤리·징계 제도 구축
  • 1921–1934러시아·소련 대법원 판사, 노동농민감찰원 법률부장
  • 1935–1938.2소련 부검사 (비신스키 산하), 대법원 법률합의체 의장
  • 1938.2–1945비신스키 비판 후 강제 정신병원 격리; 말년에 민족박물관 기록보관원

파벨 일리치 포포프

Павел Ильич П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2–1950 ○ 자연사

레닌이 질책하고도 신뢰한 소비에트 통계의 설계자

1921년 8월 16일, 레닌은 포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ЦСУ를 '비공식 필자 집단보다도 뒤처진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고 불렀다.

파벨 포포프는 소비에트 중앙통계청(ЦСУ)의 초대 청장으로서 중앙계획의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였던 그는 우파 유형지에서 레닌 및 치우루파와 인연을 맺었고, 그 연결로 1918년 국가 통계 기구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ЦСУ는 1923/24년 세계 최초로 국민경제 산업연관균형표를 편찬했다. 1921년 레닌은 ЦСУ를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 질책했으나, 포포프는 1926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으로 경제 데이터의 계획 통합을 주도했다. 1924년에야 입당한 비볼셰비키였음에도 대숙청을 넘기고 1948년까지 근무한 드문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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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5우스티우다 교사,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
  • 1896–1898혁명 활동으로 체포, 우파현 유형 중 통계학 입문
  • 1898–1917우파·사마라·스몰렌스크·볼로그다·하리코프·툴라 젬스트보 통계국 근무
  • 1917–1918식량성·농업인민위원부·최고경제회의 통계 부서장
  • 1918–1926ЦСУ РСФСР/소련 관리자 (인민위원급); 세계 최초 산업연관균형표 편찬 주도
  • 1922–1928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28–1929ЦСУ 소련 산하 경기연구소 소장
  • 1931–1948고스플란 РСФСР 농업부문장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52 ○ 자연사

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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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7망명, 여성 노동운동 조직
  •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 1917–18복지인민위원: 세계 첫 여성 각료
  • 1919–22여성부(제노트델) 지도
  • 1920–21노동자반대파 참여
  • 1921팸플릿 《노동자 반대파》 발표
  • 1923–45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 공사·대사: 세계 첫 여성 공사
  • 1923《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발표
  • 1944소련-핀란드 강화 교섭 중개

글렙 막시밀리아노비치 크르지자놉스키

Глеб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Кржижа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59 ○ 자연사

전력화와 계획의 초기 설계자

1920년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8차 소비에트 대회. 크르지자놉스키의 GOELRO 계획 보고를 들은 레닌이 일어나 "당의 제2강령"이라고 선언했다. 거대한 지도 위로 30개 발전소의 붉은 등불이 점멸했다.

레닌의 가장 오랜 동지로, 1893년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체포·유배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혁명가 '바르샤뱐카'의 러시아어 가사를 썼다. GOELRO 전력화 계획의 수석 설계자이자 초대 고스플란 의장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 국가발전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소비에트 5개년 계획의 방법론적 원형을 세웠다.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에너지연구소를 창설, 통합에너지시스템의 과학적 기초를 닦았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으로 모든 지도직에서 밀려났으나 숙청은 면했고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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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1917레닌의 오랜 동지, 지하활동과 전기공학 전문성을 함께 축적
  • 1920GOELRO 전력화 계획 작성의 핵심 인물
  • 1921–1923, 1925–1930초기 고스플란 의장, 계획경제의 기술관료적 언어를 정착
  • 1930s과학아카데미와 에너지 연구기관에서 전력화 노선 지원
  • 1959스탈린 이후까지 생존한 초기 볼셰비키 기술관료로 사망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독일 1873–1905 ✕ 살해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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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이반 바실리예비치 바부시킨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Бабушк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73–1906 ✕ 처형

이스크라가 가장 신뢰한 노동자 조직가, 볼셰비키 노동자 전형의 원형

1902년, 알렉산드롭스크 감옥 창살을 톱으로 잘라 탈옥한 그는 외국어 하나 모르는 채 런던으로 향했다. '이스크라' 편집부와 당면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의 노동자 서클에서 성장한 혁명가. 《이스크라》 특파원으로 오레호보-보고로츠크 조직을 건설했고 체포·유형·탈옥을 거듭했다. 1905년 치타 무장봉기를 지도했고 이듬해 무기 호송 중 체포·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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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91크론슈타트 어뢰 작업장 견습공
  • 1891–96페테르부르크 세먀니코프 공장 기계공
  • 1894–95레닌의 노동자 마르크스주의 서클 참여, '투쟁동맹'에서 서클·도서관 조직
  • 1896–97체포, 예카테리노슬라프 유형 ― 현지 '투쟁동맹'·RSDDP 위원회·《유즈니 라보치》 창간
  • 1900–01《이스크라》 특파원·배포책 ― 오레호보-보고로츠크 RSDDP 조직 건설
  • 1902–03체포·탈옥·런던 망명·귀국. 재체포 후 베르호얀스크 유형
  • 1905사면, 이르쿠츠크·치타 위원 ―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치타 무장봉기 지도
  • 1906.1무기 호송 중 슬류뎬카 역 체포, 미소바야 역에서 즉결 총살

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73–1918 ✕ 암살

붉은 테러를 막으려 했으나 그 방아쇠가 된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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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897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군 복무 중 선동 혐의 체포
  • 1901–05야쿠티야 올료크민스크 8년형 유형, 1905년 탈출
  • 1906–14볼로그다·아르한겔스크 유형, 1912년 빈 SD 회의 참가
  • 1914–17망명: 『나셰 슬로보』 특파원, 스톡홀름 체류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 1917.10–12군사혁명당중앙·VRK 위원,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
  • 1918.3–8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 내무위원 겸임

이오아킴 이오아키모비치 바체티스

Иоаким Иоакимович Вацети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73–1938 ✕ 처형

적군 최초의 총사령관, 제국군 대령에서 혁명의 군사 건설자로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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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17차르 군대에서 복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장으로 종군하여 대령까지 진급
  • 1917–18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2군 사령관,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장 역임
  • 1918.07모스크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진압 지휘
  • 1918.07–09동부전선 사령관
  • 1918.09–1919.07RSFSR 전군 총사령관 — 붉은 군대 최초의 총사령관
  • 1919–37적군 군사 아카데미에서 교편, 1927년 교수, 1935년 2등급 군사령관
  • 1937/1957대숙청 속 체포·처형, 1957년 복권

유리 미하일로비치 스테클로프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кл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3–1941 ✕ 옥사

이즈베스티야 첫 소비에트 편집장, 소비에트 헌법의 설계자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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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3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894–1899체포되어 야쿠츠크주 중콜림스크로 10년 유형
  • 1901–1903《이스크라》 편집 참여, RSDLP 제2차 대회 후 볼셰비키 합류
  • 1905–1910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참가·체포, 두마 사회민주당 분파 자문
  • 1911롱쥐모 당학교 교사, 유럽 사회민주주의 언론에 기고
  • 1917–192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VTsIK 상임간부회 위원
  • 1918–1924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 공동 기초
  • 1920–1930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 등 사회주의 사상사 저술
  • 1925월간 《노비 미르》 창간 주도
  • 1929–1938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위원회 부위원장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3–1955 ○ 자연사

소비에트 정부 기구를 설계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을 연구한 혁명가

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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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 1933–1945국립문학박물관 창설·초대 관장
  • 1945–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종교·무신론사 박물관 관장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Елена Дмитриевна Стас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3–1966 ○ 자연사

혁명 직후 당 서기국의 실무 관리자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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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중앙위 기술서기, 합법화된 당 조직의 기록과 연락 실무
  • 1919중앙위 서기국 의장
  • 1921–26코민테른 독일 담당

이네사 표도로브나 아르만트

Инесса Фёдоровна Арманд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프랑스 1874–1920 ○ 자연사

레닌과 가장 가까웠던 여성 볼셰비키: 죽음이 그녀를 숙청에서 구했다

1914년 레닌은 그녀를 브뤼셀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에 단독 대표로 파견하며 편지했다: "그대는 혼자 책임을 질 때 더 성장하고 강해지며 대담해지는 사람이다."

레닌의 절친한 동지였던 프랑스 태생 볼셰비키 혁명가. 1919년 제노트델(당 여성부) 초대 책임자로서 여성 해방 정책의 틀을 세우고, 1920년 제1차 국제공산주의여성회의를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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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 입당, 볼셰비키가 되다
  • 1905–081905년 혁명 참여, 체포·메젠 유배, 탈출
  • 1909–11레닌과 조우, 롱쥐모 당학교 교무주임
  • 1912–13《여성문제에 관하여》 집필, 러시아 잠입·재체포
  • 1917.04'봉인열차' 편으로 레닌과 귀국, 모스크바 시의원 당선
  • 1919–20제노트델(여성부) 초대 책임자, 제1차 국제여성공산주의자회의 조직

세묜 이바노비치 발라쇼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Балаш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74–1925 ✕ 자살

프룬제와 함께 첫 소비에트를 세운 이바노보 볼셰비키, 당명 '스트란니크'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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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회에 입당
  • 1905프룬제·아파나시예프와 함께 총파업 지도, 첫 소비에트 대표 선출
  • 1905–190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장, 브랸스크·모스크바에서 당 활동
  • 1908–1917체포 후 시베리아 유형
  • 1917–1918이바노보 볼셰비키 위원장·체카, 내전 전투 참전
  • 1919–1925하리코프·폴타바·모스크바에서 당 및 소비에트 직책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쿠르스키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Ку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32 ○ 자연사

혁명적 합법성의 건축가, 첫 소비에트 법무인민위원 겸 검찰총장

범죄자는 '현재 위험한 사람이며, 격리하거나 교화하려고 시도해야 하지만, 결코 복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 1922년 형법 초안 작업 중

키예프 출신의 법률가로,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모스크바 무장봉기와 육군 병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으로서 소비에트 형법·민법·가족법의 기초를 놓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법을 종속시키는 '혁명적 합법성' 개념을 정식화했다. 1919~1920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대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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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변호사 개업
  • 1904RSDRP 가입, 1905년 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
  • 1906–1909RSDRP(b) 모스크바 지역국 위원, 볼셰비키 신문 발행 참여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소위로 동원, 루마니아 전선 제4군 병사위원회 의장
  • 1917.10오데사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1928RSFSR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 — 형법·민법·가족법 초안 주도
  • 1919–1920전러시아 총참모부 및 야전참모부 정치위원, 군사정보 등록국장
  • 1928–1932주이탈리아 소련 전권대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구세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Гус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33 ○ 병사

적군 정치장치의 설계자,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선 구볼셰비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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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3제2차 당대회 대의원,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
  • 1904–05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 서기, 1905년 혁명 지도
  • 1917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사무국장
  • 1918–20동부·남부·캅카스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22적군 정치총국(PUR) 국장
  • 1925–26중앙위원회 출판부장
  • 1928–33코민테른 중앙유럽 사무국장, 집행위원회 간부

뱌체슬라프 루돌포비치 멘진스키

Вячеслав Рудольфович Менж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4–1934 ○ 자연사

병상에서 OGPU를 지휘한 제르진스키의 후계자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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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망명, 혁명 뒤 재무·외교 업무 수행
  • 1919–1923체카와 GPU에서 제르진스키의 측근으로 보안 업무에 진입
  • 1926–1934OGPU 의장, 병약한 수장 아래 야고다 등 실무진이 성장
  • 1928–1933샤흐티 사건, 산업당 사건 등 초기 쇼 재판과 강제수용 체계 확대기 감독
  • 1934사망 뒤 OGPU가 NKVD로 편입되고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이 됨

표트르 게르모게노비치 스미도비치

Пётр Гермогенович Смид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4–1935 ○ 자연사

세 혁명을 관통한 이스크라 요원, 비로비잔의 국가건설을 설계한 볼셰비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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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혁명활동
  • 1902–1905이스크라 요원, 우만 지하인쇄소 공동 조직, 세 혁명 참여
  • 1917–1918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VTsIK 간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1안토노프 봉기·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4–1935KOMZET 위원장: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잔) 기획·추진
  • 1924–1935북방위원회 위원장: 북방 소수민족 행정·경제 기반 수립
  • 1933–1935VTsIK 자연보호구위원회 위원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바자로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з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39 ○ 폐렴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을 제안한 고스플란의 마흐주의 철학자-경제학자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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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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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0 ✕ 처형

생체역학의 창시자, 무대 위에서 혁명을 실현한 연극의 건축가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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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 1908–1917알렉산드린스키·마린스키 극장 연출가 —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몰리에르 〈돈 후안〉,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1918볼셰비키 입당 및 마야콥스키 〈미스테리야 부프〉 초연 (페트로그라드)
  • 1920–1938국립 메이예르홀트 극장(고스찜) 예술감독 — 생체역학 체계와 구성주의 무대 전성기
  • 1920–1921나르콤프로스 연극부(TEO) 책임자 — 루나차르스키 하에서 소비에트 연극 정책 주도
  • 1923공화국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22–1924혁명 극장 예술감독 겸임 — 파이코 〈류리 호수〉 초연
  • 1926–1930고골 〈검찰관〉, 마야콥스키 〈빈대〉·〈목욕탕〉 — 쇼스타코비치·로드첸코 협업의 걸작들
  • 1938–1939고스찜 폐쇄 후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 극장 수석 연출가로 〈리골레토〉 작업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포툠킨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отём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6 ○ 자연사

폴란드 국가의 사망을 선언한 외교관, 교육인민위원이 되다

1939년 9월 17일 새벽 3시, 포툠킨은 폴란드 대사에게 "폴란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읽어주었다. 소련군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포툠킨은 교사와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에서 출발해 외교관으로 전환, 1939년 9월 폴란드 대사에게 국가 소멸을 통보한 인물이다. 이후 러시아 교육인민위원으로 교육학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3권의 『외교사』를 편찬해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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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7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김나지움 교사,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
  • 1919–1920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남부전선 정치국장
  • 1924–1932주이스탄불 총영사 → 주그리스 전권대표
  • 1932–1934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33년 소련-이탈리아 우호조약 서명)
  • 1934–1937주프랑스 전권대표 (1935년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37–1940제1외무인민부위원
  • 1940–1946러시아 교육인민위원 · 교육학 아카데미 초대 총재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세마슈코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ема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9 ○ 자연사

무료 보편 의료를 설계한 소비에트 보건의 창건자

«예방의학(프로필락티카)이 우리가 가는 길이며, 디스판세리자치야는 그 예방 과제를 푸는 방법이다.»라는 공식으로 소비에트 보건의료의 예방 우위 원칙을 대표하게 되었다.

의사이자 옛 볼셰비키로, 아버지 알렉산드르 세베리노비치 세마슈코는 폴란드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발렌티노브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누이였다. 학생 시절 체포·제적되어 1897년 고향으로 유배되었고, 1901년 카잔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마쳤다. 1904년부터 니즈니노브고로드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1905년 소르모보 파업을 함께 조직했다. 1918년 7월 11일부터 1930년 1월 25일까지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으로서 무료 보편의료와 구역 담당의, 디스판세리자치야를 축으로 하는 '세마슈코 모델'을 세웠고, 1921년부터 사회위생학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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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1모스크바대 의대 입학, 맑스주의 서클 참여, 체포·유배 후 카잔대학 의학 졸업
  • 1904–1906니즈니노브고로드 RSDLP 위원회 활동, 1905년 소르모보 공장 파업 조직, 체포 후 스위스 망명
  • 1907–1912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표, 파리 자граничное бю로 ЦК 서기, 롱쥐모 당학교, 프라하 전러시아당대회 보고
  • 1917–1918모스크바 10월 봉기 의료 지원, 모스크바소비에트 의료위생부장
  • 1918–1930초대 RSFSR 보건인민위원, 전 국민 무료의료·중앙집중식 국영 병원·예방의학 체계 구축
  • 1921–1949모스크바대학(후 제1의학원) 사회위생학 교수, 대의학백과사전 편집장(1927–1936)
  • 1930–193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아동위원회 의장으로 아동보건·부랑아 대책 주도
  • 1944–1949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교육아카데미 회원, 학교위생연구소·보건조직의학사연구소 소장

미하일 표도로비치 블라디미르스키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Владими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51 ○ 자연사

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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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예브게니 빅토로비치 탈레

Евгений Викторович Тарле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55 ○ 자연사

나폴레옹 전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의 유배에서 스탈린의 비호로 복귀한 역사가

1951년 가을,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한창이던 MГИМО 첫 강의에서 탈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내 성은 탈레다."

키예프 출신 유대인 역사가. ≪대륙봉쇄≫(1913)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 유배 후 ≪나폴레옹≫(1936)이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복권, 스탈린상 3회 수상. 소련 서양사학의 제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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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대학(성 블라디미르) 역사·문헌학부 졸업, 루치츠키 사사
  • 1900–1903루나차르스키 강연 모임에서 체포, 헤르손으로 유배; 사강사로 페테르부르크대학 강의 시작
  • 1909–1911≪프랑스혁명기 노동계급≫(2권)으로 박사학위 취득; 1913년 ≪대륙봉쇄≫ 출간
  • 1913–1918유리예프(타르투)대학 교수; 런던 국제역사학회의(1913)에서 논문 발표
  • 1918–1927페트로그라드 중앙기록부 지도부; 1921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1927년 정회원
  • 1929–1932'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1931년 8월 알마아타 유배, 1932년 말 레닌그라드 귀환
  • 1936–1939≪나폴레옹≫(1936) 출간 — 스탈린의 주목으로 복권;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937), ≪탈레랑≫(1939) 출간
  • 1941–1945카잔대학 교수(1941–1943); ≪크림전쟁≫ 1·2권 출간(1941, 1943); 나치 전쟁범죄 조사 국가특별위원
  • 1942–1955스탈린상 1급 3회(1942, 1943, 1946); 소르본·오슬로·프라하·브르노·알제 명예박사; 영국학사원 통신회원(1944); 1955년 1월 사망, 노보데비치 안장

아나톨리 바실리예비치 루나차르스키

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Лунача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33 ○ 자연사

러시아 혁명가·초대 계몽인민위원·문예비평가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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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 1914–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 1930소련과학원 회원 선출(2월 1일)

이반 아돌포비치 테오도로비치

Иван Адольфович Теодор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폴란드계·벨라루스계 기록 병존) 1875–1937 ✕ 처형

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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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가입, 스몰렌스크 최초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2RSDLP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체포되어 야쿠티아 6년 유형
  • 1905제네바 《프롤레타리》 편집 서기; 10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07RSDLP 제5차 대회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7첫 소브나르콤 식량인민위원 (10월–12월); 연립정부 불발로 사퇴
  • 1922–1928농업부인민위원
  • 1926–1930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농민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29–1935《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자, 옛 정치범·유형자협회 출판국장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아내와 함께 무장 없이 요새로 들어가 앵커광장에서 박수로 맞았으나 수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연설은 중단되었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금속 노동자가 된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27년간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로 있었다. 대숙청기의 핵심 법령들, 즉 1932년 8월 7일 국가재산 보호에 관한 법령, 1934년 12월 1일 테러 사건 신속처리 법령, 1935년 4월 7일 형사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춘 법령에 서명했다. 벨라루스 제1서기가 3천 명 총살과 9천 8백 명 추방을 제안한 전문에도 '칼리닌 찬성'으로 기록되었고, 1940년 3월에는 폴란드 장교·수감자 2만 5천 7백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4일 농민 3만 8천 가구 추방 표결에서는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고, 2주 뒤 정치국의 결정 번복으로 이미 시작된 조치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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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46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콘코르디야 니콜라예브나 사모일로바

Конкордия Николаевна Самойлова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76–1921 ○ 콜레라

『라보트니차』를 창간하고 러시아 첫 여성의 날을 조직한 볼셰비키 여성 운동의 설계자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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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 1907런던 RSDLP 제5차 대회 대의원
  • 1912–14『프라우다』 편집서기
  • 1913.02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 집회 조직,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동원
  • 1914.02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 창간 — 발간 직전 체포
  • 19172월 혁명 후 『라보트니차』 복간, 11월 제1차 여성노동자회의 조직
  • 1918.01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 공동 조직
  • 1919–20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제8차 당대회 대의원
  • 1920–21『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 볼가 선전선 「붉은 별」 정치부장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

Luis Emilio Recabarren
공산주의 칠레 칠레 1876–1924 ✕ 자살

칠레 노동운동의 아버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의 선구자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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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칠레 민주당 입당
  • 1906토코피야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의석 거부됨)
  • 1908–1909아르헨티나·유럽 망명
  • 1912사회주의노동자당(POS) 창당, 《엘 데스페르타르》 창간
  • 1918아르헨티나 공산당 창당 참여, 초대 전국지도부 위원
  • 1921안토파가스타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 1922POS를 공산당(PCCh)으로 전환,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1924산티아고에서 권총 자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넵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6–1937 ✕ 처형

10월에 철도를 장악하고 당 역사를 쓴 혁명가-사학자

1935년 체포된 뒤 수감자들에게 당 역사와 10월 혁명에 관한 강의를 이어갔고, 끝내 자신의 볼셰비키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동료 수감자들이 증언했다.

1897년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올드 볼셰비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철도역을 장악했고, 초대 철도인민위원(1918–1919)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이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거쳐 당 역사 연구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 도서관장을 지냈다. 500편이 넘는 혁명운동사 저술을 남겼으며, 1935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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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모스크바 대학에서 사민주의 서클 조직, 체포와 유형 반복
  • 1904–1905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 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조직 건설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당 집행위원, 체포·유형 반복, 중앙위원 후보에서 정위원으로
  • 1917.3–10군사기구 창설, 「솔다츠카야 프라우다」 편집, 7월 봉기와 10월 혁명 준비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철도역 점거 지휘
  • 1918–1919철도인민위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192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부의장
  • 1922–1935이스트파르트 부의장, 당사 집필, 레닌 도서관장
  • 1935–1937체포되어 5년형, 대숙청 중 재판받고 총살

필리프 이사예비치 골로쇼킨

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6–1941 ✕ 처형

카자흐스탄의 '소(小) 10월'을 이끈 혁명가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 강령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지도했으며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저택에서의 차르 가족 처형을 조직한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로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강제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0~1933년 카자흐 대기근과 함께 기록된다. 1933년 해임되어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내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61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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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6–09페테르부르크 위원회·모스크바 위원회
  • 1912중앙위원 겸 러시아국 선출 (프라하 당대회)
  • 1917–18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우랄 소비에트 권력 수립
  • 1922–25사마라 주 집행위원장, 기근 복구 지도
  • 1925–33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사실상 독자적 통치, '소(小) 10월' 집단화
  • 1933–39소련 국가중재관
  • 1939–41체포, 수감, 총살

니콜라이 닐로비치 부르덴코

Николай Нилович Бур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76–1946 ○ 뇌졸중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적군 주임외과의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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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 1923–1937모스크바 대학·제1모스크바 의학원 외과 교수, 외과 클리닉 원장, 신경외과 병동 개설
  • 1932세계 최초 중앙신경외과연구소 창설, 소장
  • 1937–1946적군 주임외과의, 소련-핀란드 전쟁·대조국전쟁 야전의료 지휘, 수천 건 수술, 페니실린 도입
  • 1944–1946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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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6–1951 ○ 자연사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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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76–1960 ○ 자연사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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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7–1926 ○ 자연사

「철의 펠릭스」: 혁명의 칼을 만든 금욕주의자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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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7체포와 유형 11년, 1917년 석방
  • 1917.12체카 창설, 의장
  • 1921–24교통인민위원 겸임: 철도 복구
  • 1924–26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공업 재건
  • 1926.7중앙위 연설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

아벨 사프로노비치 예누키제

Авель Сафронович Енук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7–1937 ✕ 처형

스탈린의 절친이자 17년간 소비에트 국가기구의 중추, 대숙청의 서막을 연 최초의 몰락

「소소, 그들도 나처럼, 너처럼 늙은 볼셰비키야. 늙은 볼셰비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지!」 예누키제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재판에 세워 처형하려는 스탈린을 말렸다. 스탈린은 답했다. 「기억해, 아벨.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이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의 공동 창립자.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로 17년간 소비에트 국가 최고 형식기관의 실무를 관장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를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대부였고,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1935년 「크렘린 사건」으로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처음으로 축출되었으며, 이는 대숙청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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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 1901–1906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 공동 설립·운영
  • 1902–19147차례 체포, 크레스티·메테히 성·오네가·투루한스크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참여
  • 1918–1922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2–1935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
  • 1932개인 최초 레닌 훈장(제3호) 수훈
  • 1935/1959중앙위원 제명·출당, 1937년 체포·처형, 1959년 복권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스미르노프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Сми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77–1938 ✕ 처형

크레스틴테른을 이끈 농민의 아들, 네프 농정에서 당 서기국까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 치는 목동에서 시작해 스스로 공부한 이 올드 볼셰비키는,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동시에 맡으며 집단화 직전까지 볼셰비키 농민정책의 얼굴이었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한 올드 볼셰비키로, 차르 치하에서 5년간 투옥과 유형을 겪었다. 1917년 보고로츠크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거쳐 내전기에는 식량인민위원부 차관으로 곡물 조달을 담당했고, 1923년부터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겸임하며 네프 시기 농업정책과 코민테른의 국제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중앙위 서기와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승진해 당 지도부 핵심에 올랐으나, '스미르노프-에이스몬트-톨마초프' 반대파 그룹에 연루되어 1934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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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입, 트베리·모스크바에서 당 활동, 반복 체포·유형 (5년간 복역)
  • 1907, 1912RSDLP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당선
  • 1917보고로츠크 소비에트 의장, 모스크바현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9RSFSR 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내무부인민위원
  • 1919–1923RSFSR 식량인민위원부 차관
  • 1923–1928RSFSR 농업인민위원 겸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
  • 1925–1929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1928–1929 제1부의장)
  • 1928–1930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오르그뷰로 위원 (1924–1930)
  • 1930–1933소련 최고경제회의 상임간부회 위원 → 전연방 공동주택위원회 의장 → 오르그뷰로 후보위원으로 강등
  • 1933–1937소련 경공업인민위원부 삼 가공 공장 부서장 — 1933년 중앙위 제명, 1934년 당 제명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코민테른 공산주의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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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스타니슬라프 구스타보비치 스트루밀린

Станислав Густавович Струми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7–1974

숫자로 사회주의를 설계한 경제학자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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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9페테르부르크 전기기술연구소 입학, 혁명운동 참여
  • 1899RSDLP 입당 (멘셰비키), 학생 총파업 참여로 제적·징집
  • 1906–1907RSDLP 제4차(스톡홀름) 및 제5차(런던) 대회 대의원
  • 1914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 상업과 졸업
  • 1918–1923노동인민위원부·전소비에트노조중앙회의 통계국장
  • 1921–1937고스플란 근무, 부의장 겸 상임위원 (1930년대)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2–1946과학아카데미 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동원위원회 위원
  • 1943–1951고스플란 과학기술심의회 위원
  • 1947–1952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국민경제사 부문장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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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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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1918.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빅토르 파블로비치 노긴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Ногин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24 ○ 병사

연립내각을 요구하며 사퇴한 첫 인민위원, 붉은광장에 잠들다

「사회주의 정부는 모든 소비에트 정당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 외의 길은 순수 볼셰비키 정부를 정치적 테러로 유지하는 것뿐이다」 — 1917년 11월 4일, 인민위원직 사퇴 성명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 볼셰비키. 1917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고 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다당제 연정을 요구하며 사퇴했다. 이후 경제 행정에 복귀, 붉은광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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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민주주의 그룹 '노동자의 깃발' 가입
  • 1900–1901〈이스크라〉 대리인 — 런던·뮌헨에서 활동,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
  • 1907RSDLP 제5차(런던) 대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바쿠·모스크바에서 노동조합 조직
  • 1912–1914베르호얀스크 유형; 저서 『추위의 극점에서』 집필
  • 1917.9–11최초의 볼셰비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지휘
  • 1917.11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 다당제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사퇴
  • 1918–1924RSFSR 노동 부인민위원; 섬유산업 행정 담당
  • 1921–1924RCP(b)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마리야 일리니치나 울리야노바

Мария Ильинична Ульян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7 ○ 뇌동맥경화

레닌의 막내동생이자, 연필로 혁명을 편집한 언론 조직가

1917년 봄, 페트로그라드의 『프라우다』 편집실 — 마리야 울리야노바가 원고 더미 앞에 앉아 연필을 쥐고 있었다. 혁명의 신문을 편집하는 유일한 울리야노프 집안 사람이었다.

레닌의 막내 여동생. 1898년 RSDLP 입당 후 여섯 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활동했다. 1917~1929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겸 책임서기로 랍코르·셀코르 운동을 조직, 소비에트 언론의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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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심비르스크 여성 김나지움 졸업
  • 1896–1898모스크바 2년제 과정 수료, 가정교사 자격 취득
  • 1898RSDLP 입당, 노동자 서클 선전·연락 활동
  • 1899–1900체포, 니즈니노브고로드 유형
  • 1900–1903「이스크라」 대리인, 당 중앙위 서기국 근무
  • 1901체포, 타간카 감옥 7개월 독방 후 사마라 유형
  • 1904체포 후 보석, 스위스 망명
  • 1905–1907페테르부르크 바실레오스트롭스키 구당위 서기
  • 1908–1909파리 소르본에서 불어 교사 자격 취득
  • 1912체포, 볼로그다 유형
  • 1915간호 과정 수료, 서부전선 의료·영양 부대 복무
  • 1917.3RSDLP(b) 중앙위원회 국에 보선, 6차 대회 대의원
  • 1917–1929『프라우다』 편집위원 겸 책임서기, 랍코르·셀코르 운동 조직
  • 1925–19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1932–1934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 위원
  • 1935–1937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위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33레닌 훈장 수훈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브류하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Брюх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기근의 그림자에서 네프의 재정으로 이행을 이끈 인민위원

1930년 4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니켈 주화를 제안한 브류하노프를 조롱하는 음란한 쪽지를 돌렸고, 메줄라우크는 매달린 인민위원의 그림을 덧붙였다. 둘 다 1938년 총살되었다.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심비르스크에서 측량 기술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와 카잔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혁명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차르 체제에서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우파에서 볼셰비키 위원회를 이끌고 우파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으며, 제7차(4월) 전러시아 회의 대의원이었다. 내전기에 대규모 곡물 징발을 조직하고 식량징발대와 징벌 원정대를 지휘했으며, 1926년 1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되었다. 1930년 10월 해임 뒤 밀려났고, 1938년 2월 3일 체포되어 9월 1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일부 참고문헌은 사망일을 1942년 6월 30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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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5학생운동으로 체포·제적, RSDLP 입당(1902), 카잔·볼로그다에서 지하 활동과 유형
  • 1906–1917우파에서 볼셰비키 신문 편집, V차 당대회 대의원, 우랄 지역위원, 반복적 체포와 행정구금
  • 1917–1921우파현 식량위원, RSFSR 식량부인민위원, 동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1–1924RSFSR 및 소련 식량인민위원, 붉은 군대 주식보급 총국장 겸임
  • 1924–1926소련 재무부인민위원, 소콜니코프의 네프 재정 안정화 보좌
  • 1926–1930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차 5개년계획 초기 재정·주화 정책 관장
  • 1930–1937모스크바주 부집행위원장·주계획위원장, 공급 부인민위원, 중앙수확량위원회 부의장 역임 후 1937년 연금
  • 19382월 3일 체포, 9월 1일 총살. 1956년 복권

모이세이 일리치 프룸킨

Моисей Ильич Фрум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시골이 우리를 등졌다', 당에 직언한 재정 부인민위원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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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분트 가입, 이어 RSDLP 가입
  • 1909–1911모스크바 중앙노조사무국 의장
  • 1911–1917예니세이현 유형
  • 1918–1922식량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식량 부인민위원
  • 1922–1928대외무역 부인민위원
  • 1928–1929재정 부인민위원
  • 1928–1930'우편향' 참여자로 지목, 첫 공식 비판 대상
  • 1932–1935대외무역 부인민위원 (복귀)
  • 1935–1937소유즈플라스트마스 트레스트 관리자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스베친

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러시아의 클라우제비츠」. 전략과 작전술의 이론가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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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 1926–27주저 『전략』 출간 — 작전술 개념 정립, 전략적 소모 이론 제시
  • 1931–32「봄」 사건으로 체포, 5년형 선고 후 1932년 석방
  • 1938/1956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 1956년 사후 복권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Ю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위궤양 천공

마지막 차르를 손수 사살한 체카 집행자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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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톰스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 1912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 사진관 개업
  • 1917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군사부에서 골로쇼킨의 부관
  • 1918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 7월 17일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
  • 1918–1919모스크바 체카 콜레기움 위원, 구역 체카 책임자
  • 1919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
  • 1921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
  • 1928–1933폴리테크닉 박물관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케드로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Кед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1 ✕ 처형

체카 특별부를 이끌며 북부 적색테러와 최초의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축한 올드 볼셰비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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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DP 가입, 코스트로마 노동자대 조직, 모스크바 봉기 무기 공급
  • 1912–1916스위스 망명, 의학 학위 취득, 레닌의 측근
  • 1917군사조직 위원, 『솔다츠카야 프라브다』 편집, 군 해산 인민위원
  • 1918.9–1919체카 군사부장 → 특별부장 (내전기 군내 숙청 총괄)
  • 1920–1921체카 북부 전권대표: 홀모고리·페르토민스크·솔로베츠키 수용소 설립
  • 1927–1931적색스포츠인터내셔널 의장
  • 1939–1941체포·고문, 무죄 판결에도 석방되지 않고 총살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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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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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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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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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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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안젤리카 이사코브나 발라바노바

Анжелика Исааковна Балабанова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65 ○ 자연사

무솔리니를 가르치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코민테른의 첫 서기

「그보다 더 비참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 로잔에서 처음 만난 무솔리니를 두고

러시아 태생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코민테른 초대 서기로 무솔리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쳤고, 그가 파시즘으로 전향하자 배신자라 규탄했다. 1922년 볼셰비즘과 결별하고 이탈리아 최대주의 분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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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를 떠나 브뤼셀 신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 학위 취득
  • 1900이탈리아 사회당(PSI) 입당, 이주노동자 조직화
  • 1912–14PSI 중앙위원, 《아반티!》 편집자로 무솔리니와 협력
  • 1915–16치머발트·킨탈 회의 참석, 반전 국제사회주의 운동
  • 1917러시아로 돌아가 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코민테른 초대 서기, 제1·2차 대회 준비
  • 1922–1930볼셰비즘과 결별, 이탈리아로 돌아가 PSI 최대주의 분파 주도
  • 1930–1945PSIm(최대주의 사회당) 지도, 망명 중 반파시스트 활동

글레프 이바노비치 보키

Глеб Иванович Бо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79–1937 ✕ 처형

소련 신호정보의 아버지, 체카 스페츠오트델 창설자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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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지하조직 활동
  • 1904–1909RSDLP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17.04–1918.03RSDLP(b)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서기
  • 1918.03–08북부지역·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8.08–11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19.01–09동부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19.09–1920.08투르케스탄 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21–1937체카·GPU·OGPU·GUGB NKVD 스페츠오트델(제9부) 국장
  • 1923–1934OGPU 콜레기야 위원
  • 1935국가보안 3등급 정치위원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9–1937 ✕ 처형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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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이오시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운쉴리흐트

Иосиф Станиславович Уншлих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9–1938 ✕ 처형

체카 부의장에서 민간항공까지: 혁명의 전천후 조직가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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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DKPiL 입당, 이후 RSDLP 볼셰비키 분파 합류
  • 1900–1917여섯 차례 체포,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프스코프 전선
  • 1919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군사인민위원
  • 1920서부전선·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 1921–1923체카·GPU 부의장, 능동정찰 특별국, 지식인 추방
  • 1925–1930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부인민위원
  • 1927–1930오소아비아힘 의장
  • 1930–1933고스플란 부의장 (군수공업)
  • 1933–1935민간항공총국장
  • 1935중앙집행위원회 연방회의 서기 직무대행

천두슈

陈独秀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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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계 1879–1947 ○ 자연사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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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헝가리 1879–1964 ○ 자연사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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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당 기관지 《넵서버》 경제부 편집
  • 1909부다페스트대학 철학박사 — 칸트의 이율배반론 연구
  • 1919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0소련 망명,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 활동 시작
  • 1921–1927코민테른 통계정보연구소(베를린 '바르가 사무소') 소장
  • 1927–1947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 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현대 자본주의 연구로 레닌상 수상

빈차스 카프수카스

Vincas Mickevičius-Kapsukas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0–1935 ○ 사망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 정부를 이끈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

그는 레닌이 리투아니아인을 붉은 군대에 더 징집하라고 요구하자,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며 이를 거부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8년 12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반이 되고 1919년 리트벨을 이끌었으나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패배 뒤 코민테른에서 발트 문제를 맡았고 1935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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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14크라쿠프에서 레닌과 접촉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입당, 리투아니아 문제 인민위원
  • 1918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용어 《티에사》 편집자
  • 1918–19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수반, 이어 리트벨 인민위원회 의장
  • 1923–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

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36 ✕ 자살

노동조합의 수장, 우편향의 세 번째 사람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918년부터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를 이끌고 1922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 자율성을 지켰고, 1929년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했다. 인쇄공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1936년 8월 22일 조사 개시가 발표되자 볼셰보의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가족도 1930년대 후반에 탄압당했고, 1988년에야 혐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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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1930년 해임
  • 1929노조 의장직 사퇴,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аснощё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80–1937 ✕ 처형

극동공화국을 설계한 실용주의 볼셰비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은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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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 1923도브롤료트(Добролёт) 초대 이사회 의장
  • 1924–1925부패 혐의로 체포·6년형 선고, 이듬해 사면
  • 1926–1937농업인민위원회 신규인피작물 총국장, 섬유작물 연구소장

쿨레르보 아킬레스 만네르

Kullervo Achilles Manner
핀란드 사회민주당 공산주의 핀란드 핀란드 1880–1939 ✕ 옥사

1918년 핀란드 적색혁명 정부의 수반, 이후 망명 공산당과 코민테른을 오간 혁명가

1917년 7월 만네르의 "자유로운 핀란드로!"라는 외침과 함께 에두스쿤타는 '최고권력법'을 가결했고, 방청석은 핀란드 국가로 화답했다.

핀란드의 사회주의 혁명가. 1918년 내전 당시 핀란드 인민대표단 의장으로 적색정부를 이끌었고, 패배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핀란드 공산당을 공동 창당하고 14년간 당을 이끌며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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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헬싱키 대학 졸업, 포르보 신문사 기자
  • 1906사민당 입당, 노동자 신문 『튀욀래이넨』 창간·주필
  • 1910–1914, 1917핀란드 의회 의원 (우시마 선거구)
  • 1917핀란드 의회 의장 겸 사민당 의장
  • 1918.01–04핀란드 인민대표단 의장 (적색정부 수반), 4월에는 적위대 총사령관 겸임
  • 1918.08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SKP) 공동 창당
  • 1920–1934핀란드 공산당 의장, 코민테른 집행위원 (1920, 1928 선출)
  • 1934–1935코민테른 중남미 담당 보고관으로 전보
  • 1935–1939체포·10년형 선고, 우흐타-페초라 수용소에서 사망

리하르트 뮐러

Richard Müller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0–1943 ○ 자연사

베를린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1918년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혁명사를 쓴 선반공

1918년 11월 혁명 때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부터 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했다.

튀링겐 농촌 출신의 선반공으로 베를린 금속노조 선반공 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 공장 대표들의 비밀 조직인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 리프크네히트 체포 항의 파업,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중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9일 밤 제국의회를 점거해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고,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 되었다. 뒤에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떠났고, 1924~1925년 세 권짜리 혁명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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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정치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 1918독일 혁명기에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카르비셰프

Дмит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б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45 ✕ 고문사

나치의 회유를 거부하고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한 소련 최고의 축성공학자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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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 1941–1945포로, 나치 회유 거부,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국

니콜라이 일리치 포드보이스키

Николай Ильич Подвой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0–1948 ○ 심장마비

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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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데그탸료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Дегтяр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49 ○ 자연사

DP-27·DShK·PTRD를 설계한 소련 소형화기 설계의 창시자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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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 1940–1949코브로프 공장 특별설계국(OKB) 국장,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
  • 1941PTRD-41 대전차소총 긴급 설계·양산 (스탈린상 2급)
  • 1944RPD 분대지원화기 완성, 공병포병소장 진급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제국(폴타바 주 롬니)의 유대인 가정 출신 1880–1960 ○ 자연사 (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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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뱌체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카르핀스키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арпинс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65 ○ 자연사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언론인, 68년 당원

1917년 1월, 레닌이 올가 라비치에게 격앙된 편지를 쓰자 카르핀스키는 "이건 욕설입니다"라고 직언했다. 레닌은 후일 이네사 아르만트에게 "카르핀스키가 내 편지를 욕설이라고 하더군. 사과 편지를 써야겠어"라고 털어놓았다.

1898년 입당한 최고참 볼셰비키로, 제네바 망명 시절 레닌 직속에서 당 기관지를 편집했다. 혁명 후 《베드노타》 편집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농민·대중 선전의 제도적 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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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펜자에서 중등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선전 활동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7세)
  • 1899–1902하리코프대학 의학부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체포·유형
  • 1904–1917제네바 망명, 레닌 지도 아래 《전진》·《프롤레타리》·《사회민주주의자》 편집
  • 1917–1918귀국, 《농촌의 진리》 편집,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
  • 1918–1922《베드노타》 편집장,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발행
  • 1918–1927《프라우다》 편집위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1~7기 위원
  • 1936–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근무
  • 1937–1965학술·문필 활동 전념, 레닌·당사 연구, 경제학 박사, 사회주의노동영웅(1962)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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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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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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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루쉰

鲁迅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중국 중국 1881–1936 ○ 결핵

『아Q정전』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작가연맹으로 이어 간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1918년 「광인일기」로 백화문학을 열고,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돌아선 저장 사오싱 출신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 문예운동으로 이어 갔다.

저장 사오싱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다 「국민의 정신을 고치겠다」며 문학으로 돌아섰다.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이어 「아Q정전」에서 낡은 사회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그렸다. 1927년 이후 상하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번역하고 1930년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1936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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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6베이징대학 강사
  • 1930–1936중국좌익작가연맹 지도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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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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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플라톤 미하일로비치 케르젠체프

Платон Михайлович Керженце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40 ○ 심장마비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스탈린기 예술 검열의 설계자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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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 1938–1940《소백과사전》 편집장·《파리코뮌의 역사》 집필

파벨 이바노비치 레베데프-폴랸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Лебедев-Поля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1–1948 ○ 자연사

소비에트 검열 기구의 설계자이자 첫 책임자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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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유리예프 대학에서 제적 후 혁명운동
  • 1908–1917제네바 망명, '브페료트' 그룹 서기
  • 191710월 혁명 참여, 성직자회의 및 학술위원회 청산
  • 1919–1922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평의회 의장
  • 1922–1930글라블리트(문학·출판 총국) 초대 책임자
  • 1934–1939『문학 백과사전』 주필
  • 1937–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푸시킨 관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윌리엄 Z. 제불론 포스터

William Zebulon Foster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1–1961 ○ 자연사

1919년 대철강파업 지도자에서 미국 공산당의 최장기 지도자로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혁명적 정당뿐이다.” — 『노동자 생활의 페이지들』(1939)

1919년 대철강파업을 지휘한 노동운동 전략가에서 CPUSA 최장기 지도자로 전환했다. 1944년 브라우더의 당 해산에 맞서 당을 재건했고, 『미국 공산당사』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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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국 사회당 입당
  • 1909IWW 가입, 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참가
  • 1912북미신디칼리스트연맹(SLNA) 창립
  • 1917–1918시카고 도축산업 노동자 조직화 — 8시간 노동제 중재
  • 1919대철강파업 지휘 — 25만 노동자 동원
  • 1920노동조합교육연맹(TUEL) 창립
  • 1921코민테른 제3차 대회 참석 후 공산당 입당
  • 1924첫 대선 출마 — 공산당 후보
  • 1929CPUSA 의장 취임, TUUL 창설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44–1945브라우더 당 해산 반대 — CPUSA 재건, 서기장
  • 1948스미스법 기소 — 건강 악화로 재판 연기
  • 1957CPUSA 명예의장 은퇴
  • 1961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1–1963 ○ 자연사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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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오토 빌레 쿠시넨

Otto Wille Kuusinen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핀란드 1881–1964 ○ 자연사

핀란드 노동운동에서 코민테른을 거쳐 흐루쇼프의 이론가로

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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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핀란드 사회민주당 입당
  • 1905알렉산드로프 대학 철학사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 (SDP)
  • 1911–1913핀란드 사회민주당 의장
  • 1918핀란드 혁명정부 교육담당 인민위원
  • 1918핀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 1921–1939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39–1940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
  • 1940–1956카렐로-핀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40–1958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부의장
  • 1952–1953, 1957–1964CPSU 중앙위 상임간부회 위원
  • 1957–1964CPSU 중앙위 서기
  • 1959《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편집 책임

하인리히 브란들러

Heinrich Brandler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1–1967 ○ 자연사

혁명 봉기를 취소한 KPD 의장이자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공동 창립자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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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카자흐스탄 유배, 모스크바 VSNKh 근무
  • 1929KPD 제명, 탈하이머와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국제적 우익반대파 형성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주창
  • 1949–1956서독 귀환,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 창립·지도

이반 리바르

Ivan Ribar

왕국의 의회주의에서 해방전선으로 건너간 정치가

1943년 제2차 AVNOJ 회의를 주재해 신유고슬라비아의 수립 결정을 이끌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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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크로아티아 진보민주당 창립에 참여, 변호사 활동 시작
  • 1918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중앙위원
  • 1919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임시 국민대표부 부의장
  • 1920–1922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제헌의회 및 국민의회 의장
  • 1942–1945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 의장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집단적 국가원수
  • 1960정치 활동에서 은퇴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이견 있음) 1881–1969 ○ 자연사

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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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 1940–1953인민위원회 부의장,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 1945–1947헝가리 연합통제위원회 의장
  • 1941–1944국가방위위원회 위원, 북서방면군·레닌그라드 전선 지휘, 빨치산 총사령관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75 ○ 자연사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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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표도르 이바노비치 칼리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2–1920 ○ 사망

프롤레트쿨트의 노동자-지식인, 직조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이론가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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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 1903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 1918–1920『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 공동 편집자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카모

Симон Тер-Петрося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2–1922 ✕ 교통사고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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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03RSDLP 입당, 티플리스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티플리스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 1912–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유리 미하일로비치 라린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Ла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32 ○ 자연사

네프에서 계획으로 다리를 놓은 상상력의 경제이론가

"훨씬 덜 단단한 정신이라면 오래전에 굴복했을 신체적 장애를 그가 정복하는 진정한 영웅성." — 1920년 모스크바에서 라린을 만난 영국 저널리스트 아서 랜섬

심페로폴 출신 경제학자·혁명가. 고스플란 창립 멤버로, 독일 전시경제 연구를 바탕으로 계획경제를 주창했다. 유대인 농업정착(OZET) 운동을 주도하며 근위축증 속에서도 왕성히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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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3심페로폴·오데사에서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8년 유형 선고
  • 1904–1916망명 중 멘셰비키로 활동, 독일 전시경제 연구로 중앙계획 구상
  • 1917볼셰비키 합류, 최고경제회의(VSNKh) 창립 멤버·간부
  • 1921–1932고스플란 창립·간부, 연속노동주간 제안 등 계획경제 정책 구상
  • 1925–1932OZET 의장으로 유대인 농업정착 운동 주도, 반유대주의 비판 저술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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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얀손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Янс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882–1938 ✕ 처형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상한 소련 법무인민위원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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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레벨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
  • 1907–1917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 서기 (미국)
  • 1921–1923금속노조 중앙위원회 서기
  • 1923–1927중앙통제위원회 서기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28–1930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1–1934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
  • 1935–1937글라브세브모르푸티 부국장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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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38 ✕ 처형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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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합류, 보로네시 당 위원회 군사조직 책임자
  • 1906–1908모스크바 당 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 지도
  • 1909–1914모스크바 시청 엔지니어, 도시 가스망 책임자
  • 1917고멜 소비에트 군사부문 의장, 시 두마 의장, 11월 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21VSNKh 화학공업 부문 위원, 우랄·북부 화학산업 국유화 전권대표
  • 1919–1925군수공업회의(국방공업 총국) 의장
  • 1921–1925VSNKh 의장 겸 RSFSR 인민위원회 위원, 주요 양허위원회 의장
  • 1926–1929북카프카스 지역집행위원회 의장
  • 1930–1934암토르그(소련 대미 무역회사) 사장
  • 1935–1937RSFSR 지방공업 제1부인민위원

알렉세이 카피토노비치 가스테프

Алексей Капитонович Гастев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RSFSR), 소련 러시아(블라디미르 주 수즈달 출생) 1882–1939 ✕ 처형

노동을 과학으로, 인간을 기계의 리듬으로: 50만 노동자를 훈련시킨 사회공학의 창시자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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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 1905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
  • 1906RSDLP 제4차 대회 대의원
  • 1917–1918전러시아금속노동자동맹 중앙위 서기
  • 1920–1938중앙노동연구소(CIT) 창설·소장
  • 1931VKP(b) 재입당
  • 1932–1936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 대숙청에 희생된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

리투아니아가 독립 국가로 남도록 촉구했으나, 스스로는 그 독립을 사회주의 국가로 상상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로 1918~1919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내무 인민위원을 지냈다. 망명 뒤 코민테른에서 일하며 리투아니아 노동운동사를 썼고,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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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1907년부터 중앙위원)
  • 1909체포되어 4년 카토르가형 선고, 이후 예니세이 지방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 담당 부인민위원, 『티에사』 편집
  • 1918–1919최초의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내무 인민위원
  • 1920리투아니아 공산당 해외국 서기(1921년부터 코민테른 집행위 대표)
  • 1926–1935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벨렌키

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Белень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2–1941 ✕ 처형

레닌의 개인 경호를 맡은 체카 창립 멤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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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 1917.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 1936–1938NKVD 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56년 복권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 가문) 1882–1945 ○ 병사

스탈린이 이름과 부칭으로 부른 유일한 장성, 『군대의 두뇌』의 저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펼쳐 두고 일하던 샤포시니코프는 찾아온 젊은 대령을 다정하게 맞았다. 보고가 어긋나도 고함 대신 "자네, 이게 뭡니까, 귀여운 친구(голубчик)?"라고 되물었다.

제정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저작으로 지금도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1937년 6월에는 투하쳅스키 등을 사형에 처한 특별재판부에 참여했고, NKVD는 동시에 그에 대한 공작 진술을 수집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반격 계획 수립에 관여했고, 1945년 3월 폐결핵으로 죽기까지 스탈린의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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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제국군 복무, 1차대전 참전, 대령
  • 1918–21붉은 군대 입대, 내전 중 작전국장으로 주요 작전 기획
  • 1925–27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8–31참모총장 (1차), 『군대의 두뇌』 출간
  • 1932–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 교수
  • 1937–40참모총장 (2차), 원수 진급, 겨울전쟁 기획
  • 1941–42참모총장 (3차), 모스크바 반격 설계
  • 1943–45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스탈린 군사 고문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공산주의 불가리아 (1934–1945 소련 시민권 겸유)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사망 경위 일부 미확인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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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3서기장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2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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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그레코프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Гре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3 ○ 자연사

키예프 루스 봉건제론을 정립한 소비에트 중세사의 창시자

1939년,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하며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창시자. ≪키예프 루스≫(1939)에서 키예프 루스를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공동 요람으로 정립했다. 1936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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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바르샤바대학에서 페트루셰프스키 사사 후 모스크바대학으로 편입, 류뱝스키 지도 아래 졸업
  • 1910–1916페테르부르크 김나지움 교사, 셰레메테프 가문 도서관장; 플라토노프 지도로 석사논문 방어(1914) 후 페트로그라드대학 사강사
  • 1916–1921페름대학 러시아사 강좌 개설 및 초대 주임(1916–1918); 내전기 타브리다대학 교수 겸 타브리다 학술기록위원회 부위원장
  • 1930'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약 한 달 구금 후 톰신스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 1934–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4), 정회원(1935); ≪키예프 루스≫(1939) 출간 — 봉건제론 정립
  • 1936–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소장; 역사·철학부 아카데미 서기(1946–1953) 겸임
  • 1943–1952스탈린상 3회(1943, 1948, 1952), 레닌훈장 2회(1944, 1952); 물질문화사연구소장(1943–1947)·슬라브학연구소장(1947–1951) 겸임
  • 1947–1953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1947–1950) 및 소련 최고소비에트(1950–1953) 대의원; 1953년 9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트로야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5 ○ 자연사

차르의 포병 장교에서 스탈린의 첫 주미 대사로: 혁명과 외교를 오간 러시아 귀족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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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분파) 입당, 키예프 군사조직 활동
  • 1909–1910예니세이현 유형, 탈출 후 망명
  • 1914–1917멘셰비키 방위파, 망명 중 레닌·스탈린과 협력
  • 1918멘셰비키 중앙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8–1921붉은 군대 복무, 교관
  • 1923RKP(b) 입당
  • 1924–1927RSFSR 국가무역청(Gostorg) 청장,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 1927–1933주일 소련 전권대표
  • 1933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33–1938주미 소련 전권대표 — 초대 대사
  • 1939–1955고등외교학교 교수, 소비에트정보국 활동

소피야 시기즈문도브나 제르진스카야

Софья Сигизмундовна Дзержинская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폴란드 1882–1968 ○ 자연사

독자적 혁명 경로를 걸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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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 1912시베리아 유형 탈출; 크라쿠프에서 SDKPiL 해외분과 사무국 서기
  • 1918–1919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근무
  • 1922–1928로자 룩셈부르크 학교·서방 민족소수자 공산대학 교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폴란드국 선전선동부 책임비서
  • 1929–1937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겸 책임편집자
  • 1939–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 담당
  • 1941–1946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 1946년 은퇴; 회고록 『대투쟁의 시절』 출간 (1964)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자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аго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3–1919 ✕ 폭탄 테러 사망

모스크바 당을 이끌고 초기 소비에트 외교를 개척한 혁명 조직가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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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볼셰비키) 입당
  • 1902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 1904제네바로 탈출, 레닌과 접촉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8독일 주재 RSFSR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
  • 1918–1919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서기
  • 1919제르진스키와 도시방어위원회 공동 지휘

오이겐 레비네

Eugen Leviné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러시아 (유대계) 1883–1919 ✕ 총살

1919년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을 이끌다 진압 뒤 총살된 공산주의자

레비네는 1919년 4월 13일 뮌헨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붉은 군대 편성과 자본주의 극복을 내걸었고, 공화국이 진압된 뒤 6월 처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독일로 이주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러 돌아가 투옥되었다. 독일에서 USPD와 스파르타쿠스단에서 활동했고, 1919년 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갔다. 4월 13일 KPD가 톨러의 평의회 정부를 대신하자 그 지도자가 되어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공장을 노동자 관리에 넘겼다. 5월 뮌헨이 함락된 뒤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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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참가했다가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 1918–1919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 창설에 참여하고 독일공산당(KPD)에서 활동했다.
  • 1919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가 지역 조직을 정비하고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관여했다. 4월 13일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화국을 이끌었다.
  • 1919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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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출신 배경: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으로 기록하는 사료가 다수이며, 카라임계 혈통 표기는 일부 사료에 한정된다) 1883–1927 ✕ 자살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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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6–1927트로츠키가 의장인 중앙양보위원회 부의장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 1927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

파울 레비

Paul Levi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3–1930 ○ 폐렴 중 추락사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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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6 ✕ 총살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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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7망명기 레닌의 최측근
  • 1917.10카메네프와 봉기 반대, 계획 누설 파동
  • 1919–26코민테른 초대 의장
  • 1923–25트로이카, 트로츠키 견제
  • 1926–27통합반대파, 출당과 굴복 반복
  • 1936제1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유대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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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쿠즈민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узь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3–1938 ✕ 처형

크론슈타트의 '폭발'을 예고한 발트함대 정치위원

쿠론슈타트 수병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오히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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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 1917가치나 소비에트 의장, 볼셰비키 군사조직 활동
  • 1918–1919남서전선 정치위원, 북부전선·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발트함대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12군 사령관
  • 1921발트함대 정치국장,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가
  • 1924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부 차석 검사
  • 1925–1932중앙아시아·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장 등 요직
  • 1932북방해로 옴스크 지부장으로 전직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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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재무인민위원
  • 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테렌티 드미트리예비치 데리바스

Терентий Дмитриевич Дериба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8 ✕ 처형

극동의 보안 총독

1937년 8월 11일, 예조프가 류시코프의 전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자, 스탈린은 여백에 직접 써넣었다. "데리바스를 체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가 '찬성'을 덧붙였고, 데리바스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출신으로 1929년부터 극동 OGPU-NKVD 전권대표를 맡아 대일 방첩 작전과 BAM 강제노동 건설을 지휘했다. 8년간 '극동의 총독'으로 불렸으나 대숙청에 휩쓸려 1938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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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GPU·OGPU 비밀국장
  • 1927–1929OGPU 비밀작전총국 제1부국장
  • 1929–1934극동변경주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4BAM 건설 책임자
  • 1934–1937극동변경주 NKVD 관리국장 겸 극동군 특별부장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일리치 예고로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Ег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9 ✕ 처형

데니킨을 무너뜨린 남부전선 사령관, 초대 원수 5인 중 마지막으로 이름이 지워진 참모총장

「나는 인민과 당, 붉은 군대 앞에 깨끗하다」 1938년 3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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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 1918–19붉은 군대 입대, 제9군·제10군·제14군 사령관
  • 1919–20남부전선 사령관 — 데니킨 백군 격파, 오룔·보로네시·로스토프 탈환
  • 1920남서전선 사령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키예프 탈환 후 르부프 진격
  • 1925–26중국 군사고문: 장제스·펑위샹에게 파견
  • 1927–31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31–37붉은 군대 참모총장 — 기계화군단·탱크전 교리 추진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이후 자캅카스 군관구로 강등
  • 1939/1956군사재판 없이 처형, 1956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

미하일 아브라모비치 트릴리세르

Меер Абрамович Трилисс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40 ✕ 처형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설계자, 이녜의 7년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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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직업혁명가
  • 1905–1907카잔·페테르부르크 전투조직, 스베아보르크 봉기 주도
  • 1909–19145년 카토르가, 이후 이르쿠츠크주 영구유형
  • 1917–1921시베리아 체카·아무르 혁명위 활동, 극동 첩보망 구축
  • 1922–1929GPU·OGPU 해외부(INO) 부장 — 대외정보 체계 창설
  • 1926–1929OGPU 부의장 겸임
  • 1930–1934노농감찰 부인민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
  • 1935–1938코민테른 집행위 간부위원 (필명 '모스크빈')

올가 다비도브나 카메네바

Ольга Давыдовна Каменева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3–1941 ✕ 처형

트로츠키의 동생이자 카메네프의 아내: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첫 설계자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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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8–1919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
  • 1919–1920s당 여성부 이사
  • 1921–1923기근후유증대책중앙위원회 주요 위원
  • 1923–1925대외구호위원회(KZP) 위원장
  • 1925–1928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
  • 1927남편과 오빠의 몰락으로 모든 직위 상실

프리츠 플라텐

Fritz Platten
독립 활동 공산주의 스위스 스위스 1883–1942 ✕ 총살

1917년 레닌의 봉인 열차 귀국을 조직하고 코민테른 창립 대회 의장단에 앉은 스위스 공산주의자

1917년 레닌 일행의 독일 통과 귀국을 조직했고,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스위스 대표로 활동했다.

장크트갈렌 출신으로 스위스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활동했고 치머발트 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스위스에 있던 레닌 일행이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가는 봉인 열차 여행을 주선한 주역이었다. 1919년 스위스 공산주의자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의장단에 앉았고, 스위스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7~1922년 연방 하원 의원을 지낸 뒤 소련으로 이주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어 1942년 수용소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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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레닌 일행의 스위스발 독일 경유 러시아 귀국을 조직했다.
  • 1919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스위스 공산주의자를 대표했다.
  • 1923국제노동자구호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소련 볼가 지역의 농업 협동조합을 이끌었다.
  • 1938소련에서 체포되어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헨크 스네블릿

Henk Sneevliet
공산주의 네덜란드 네덜란드 1883–1942 ✕ 처형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공산당의 씨앗을 뿌리고 스탈린주의·나치즘 둘 다에 맞선 네덜란드 혁명가

1942년 4월 12일 밤 아메르스포르트 수용장에서 총살형 직전, 스네블릿은 집행대에 묶인 채로 나치에게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동지 일곱 명과 함께 「인테르내셔널」을 불렀다. 그는 사수에게 손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네덜란드 혁명가. 동인도에서 인도네시아공산당의 전신 ISDV를, 코민테른 특사로는 중국공산당 창당과 국공합작을 중개했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모두에 맞서다 1942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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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11네덜란드 철도·전차노조(NV) 간부, 1911년 위원장
  • 1912사회민주당(SDP) 합류, 《De Nieuwe Tijd》 기고
  • 1914–1918동인도 — ISDV 공동 창립, 철도노조 조직, 식민당국에 추방
  • 1920코민테른 제2차 대회 PKI 대표, 집행위원 선출
  • 1921–1923코민테른 중국 대표 — CCP 창당 입회, 쑨원 접촉, 제1차 국공합작 중개
  • 1924–1927네덜란드 공산당 중앙위원, NAS 서기, 스탈린주의와 결별
  • 1929–1938RSAP 창당·지도, 국제혁명사회주의통일국 참여
  • 1933–1937하원의원 — 군함 반란 지지로 수감 중 당선
  • 1940–1942MLL-Front 조직, 『스파르타쿠스』 발행, 1941년 2월 파업, 체포·처형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추구린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Чугу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3–1947 ○ 1940년 체포, 사후 복권

비보르크 구 노동자 볼셰비키, 레닌에게 당원증을 건네다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 역, 비보르크 구 위원회를 대표해 막 귀환한 레닌에게 당원증 제600호를 건넸다.

1905년 소르모보 봉기의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부였고, 1911년 레닌의 롱주모 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7년 2월에는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의 핵심으로서 여성의 날 파업을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레닌 귀환 당일 핀란드 역에서 당원증 제600호를 직접 건넨 노동자 혁명가이며, 10월에는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에 있었고 내전기에는 제5군 정치국장과 체카 간부를 지냈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갔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 함석공으로 일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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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소르모보 공장에서 노동하며 RSDLP에 입당, 지하 혁명 활동 시작
  • 1905.12소르모보 무장봉기 지도 '5인조'의 일원으로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
  • 1911레닌의 롱주모 당학교 수학, 귀국 직후 체포되어 나림스키 변방 5년 유형
  • 1916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 RSDLP(b) 지하위원회 위원
  • 1917.02–102월 혁명에서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무장봉기 주도;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 위원
  • 1918–1919제5군 정치국장, 체카 간부회 위원 겸 서기, 체카 수송부장
  • 1921–1937크라스노예 소르모보 부소장, 북부 조선소 소장, '혁명의 엔진' 공장 소장 등 산업 지도자
  • 1940날조된 혐의로 체포, 수용소에서 병을 얻어 석방 후 함석공으로 생계를 이음

알렉세이 예고로비치 바다예프

Алексей Егорович Бад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3–1951 ○ 자연사

두마 의원에서 러시아 공화국 명목상 국가원수가 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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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의원 · 《프라우다》 공식 발행인
  • 1914–1917투루한스크 유배
  • 1917–1920페트로그라드·북부 지역 식량 공급 인민위원
  • 1930–1935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
  • 1935–1937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7–1938러시아 식품공업 인민위원
  • 1938–1944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부의장
  • 1943–1951글라브피보(맥주공업총국) 국장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시키랴토프

Матвей Фёдорович Шкиря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54 ○ 담석증

30년간 당원 명부 위에 놓인 지우개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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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입당,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
  • 1910–14체포·볼로그다 유형 → 귀환 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하조직 복귀
  • 1917모스크바 병사대표 소비에트·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20전러시아 재봉노조 중앙위 서기, 모스크바 시당위원
  • 1921–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상임위원, 당 검증·숙청 실무 총괄
  • 1934–39당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39–52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
  • 1952–54당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위 상임위원 (1953.3 제외)

안드레이 야누아리예비치 비신스키

Андрей Януарьевич Выш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3–1954 ○ 자연사

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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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외무장관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글라드코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Гладков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3–1958 ○ 식도암

시멘트 공장의 재건을 통해 소비에트 산업소설의 길을 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전 작가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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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선전활동 시작
  • 1906RSDLP 가입, 이르쿠츠크주 만주르카로 4년 유형
  • 1910쿠반주 파블롭스카야 초등학교장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노보로시스크 교육 책임자
  • 1920–1921『크라스노예 체르노모리예』 편집자
  • 1921–1925『노비 미르』 서기, 문학그룹 '쿠즈니차' 활동
  • 1925『시멘트』 발표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 1932–1938『에네르기야』 집필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 형상화
  • 1941–1943『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특파원 (우랄)
  • 1945–1947고리키 문학대학 학장
  • 1949–1954자전적 3부작 발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58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드미트리 자하로비치 마누일스키

Дмитрий Захарович Мануиль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59 ○ 자연사

스탈린주의 숙청을 집행한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1928~1943)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말했다: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트로츠키주의자 도적떼를 숙청할 때 침묵한 것을 우리가 비판했는데 이제는 아첨을 시작했어!" 트로츠키와 연이 닿은 구볼셰비키 가운데 그만 살아남았다.

볼린의 스비아테츠 마을에서 성직자 가문(영어권 사료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소르본에서 법학을 마친 볼셰비키다. 《브페료드》파 성원이었고 1917년 메즈라욘치에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코민테른 요직을 맡았다. 1920~30년대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로서 기구와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숙청을 지도했고, 1945~46년에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헌장 전문과 제1장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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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 1926–1943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 1926년 12월~1928년 7월, 1931년 4월 15일~1943년 5월 해산
  •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 1924–19431924년 7월 15일~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 및 상임간부
  • 1944–1952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외무장관 - 1944년 7월 12일~1952년 6월 10일
  • 1948–1949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우크라이나 대표, 이사회 의장직 대행

나프탈리 아로노비치 프렌켈

Нафталий Аронович Френкел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자연사

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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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이반 파블로비치 바르딘

Иван Павлович Бард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심장마비

쿠즈네츠크를 세운 소련 제철의 아버지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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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키예프 공대 졸업, 유좁카 제철소 기술자
  • 1910–1911미국 기계·제철 공장 노동자
  • 1915–1923예나키예보 제철소 주임기사 → 수석 엔지니어
  • 1924–1925마케옙카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5–1929카멘스코예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9–1937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KMK) 수석 엔지니어
  • 1937–1939중공업인민위원부 철강총국 수석 엔지니어 → 기술위 의장
  • 1939소련 철강금속공업 부인민위원
  • 1939–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야금학연구소 소장
  • 194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44–1960중앙철강금속연구소(TSNIIchermet) 창립 소장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73 ○ 자연사

말 탄 내전의 전설, 기계화 시대까지 살아남은 원수

1941년 9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스타브카에 전보로 건의했으나 스탈린에게 해임되었고, 뒤이어 남서방면군 주력이 포위되었다.

돈 지역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징집되어 제정 러시아 기병으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을 이끌어 백군을 격파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고, 대숙청에서는 부하린·리코프 처형을 요구하고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했으나 자신도 수사 대상이었다. 1941년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 키예프 돌출부 철수를 건의했다가 스탈린에게 경질되어 다시는 야전군을 지휘하지 못했고, 전후에는 농업부 차관으로 군마 육종을 맡았다. 기병의 시대를 고집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직접 낙하산 강하를 시험하고 기계화기병집단 편성을 주도했으며, 1973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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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러시아 제국군 기병,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 수훈
  • 1919–23제1기병군 사령관: 데니킨·브란겔 격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1924–37적군 기병 감찰관; 군마 육종 사업 조직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40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이어 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 1941남서방면군 총사령관 — 키예프 철수 권고로 경질됨
  • 1943–53적군 기병 사령관, 전후 농업부 차관(마정 담당)
  • 1958/63/683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이반 크세노폰토비치 크세노폰토프

Иван Ксенофонтович Ксенофон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26 ○ 자연사

체카의 영원한 2인자, 혁명재판의 설계자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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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분파
  • 1905–1914모스크바·리가에서 혁명 활동, 수차례 체포
  • 1914–1917서부전선 복무, 네스비시·슬루츠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2체카 창설 멤버, 제르진스키 비서
  • 1919–1921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2–1925RKP(b)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
  • 1925–1926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그리고리 예레메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Григорий Еремее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6 ✕ 처형

지노비예프의 오른팔로 페트로그라드를 구했고, 스탈린의 쇼재판에서 사라졌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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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8–16수차례 체포와 유형, 시베리아 탈출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조직, 제헌의회 의원
  • 1919제7군 정치부장, 페트로그라드 방어
  • 1922–25페트로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소비에트 부의장
  • 1925–2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신반대파'
  • 1926.1–4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7통합반대파, 중앙위 제명, 출당
  • 1929–34낙농공업 총관리국장 등 경제 관료
  • 1936.8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 사형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밀류틴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Милю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 기초를 놓은 첫 농업인민위원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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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0RSDLP 입당,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쿠르스크·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 조직
  • 1910볼셰비키로 전향, 이후 8차례 체포로 약 5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초대 의장,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소브나르콤 초대 농업인민위원(10.26–11.4)
  • 1917–1918연립정부 주장하며 당중앙위·인민위원직 사퇴했다가 번복, VTsIK 경제부장과 VSNKh 부의장 역임
  • 1918–1924VSNKh 간부·북서지역 경제회의 부의장, 코민테른 발칸·오스트리아 대표로 대외 활동
  • 1924–1930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부 간부,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의장, 중앙통계국(TSu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30–1937고스플란 부의장,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계획·학술 관료로 활동
  • 1937'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 10월 30일 처형

얀 안벨트

Jaan Anvelt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884–1937 ✕ 옥사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 1924년 봉기의 지도자

1918년 11월 나르바에서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동부 에스토니아를 통치했고,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중 체포되어 심문 중 구타로 받은 상처로 12월 11일 죽었다.

1918년 11월 나르바에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두 달 남짓 에스토니아 동부를 통치했고 1924년 탈린 봉기를 조직했다. 1937년 체포되어 심문 중 구타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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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가담해 혁명 운동에 나선 교사
  • 1912나르바에서 노동자 신문 『키르』 편집자
  • 1917에스틀랴트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탈린 권력 장악 주도
  • 1918에스토니아 노동 코뮌 평의회 의장
  • 1921에스토니아 공산당 지하 지도자, 1924년 12월 봉기 지휘
  • 192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정치위원
  • 1929민간항공총국 부국장, 이후 국장
  • 1935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위원 겸 책임비서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7 →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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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안드레이 세르게예비치 부브노프

Андрей Сергеевич Буб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1940년 옥사설)

10월혁명 정치국원에서 문맹퇴치를 이끈 계몽인민위원으로

1917년 10월 10일(23일) 정치국원, 10월 16일(29일) 무장봉기를 지휘할 당중심 위원에 선출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10월 24–25일 철도역 장악을 지도했고, 25일에는 야전참모장으로서 참모부를 지휘했다.

러시아 제정기에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당에 입당했고, 10월혁명을 준비한 정치국원이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맞선 좌파공산주의자였고, 1921–22년 민주중앙파에 속했으며, 1923년에는 트로츠키에게 가담했다가 그와 결별하고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1924년부터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트로츠키 계열 위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1929–1937년 계몽인민위원으로 전면 의무초등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10월 해임되어 그해 말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었으며, 1938년 8월 1일 처형되었다. 1956년 3월 14일 재활되고 3월 22일 당적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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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19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 조직
  • 1906–1913스톡홀름 당대회 대표,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4–1916사마라·볼가 하류 지역 혁명운동 지도, 투루한스크 유배
  • 1917정치국원, 군사혁명당중심 위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22–1924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편집장
  • 1925중앙위원회 서기
  • 1929–1937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 — 의무초등교육·문맹퇴치·아동문학 출판사 설립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세레브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Сереб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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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 (푸틸로프 공장 대표)
  • 1908–1911벨기에 망명; 브뤼셀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 1917–1918무역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9우크라이나 전선 군수보급 책임자; 중앙 포병공장 관리위원회 의장
  • 1920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0–1926아즈네프티(아제르바이잔 석유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
  • 1926소련 석유신디케이트(네프테신디카트) 이사회 의장
  • 1927–1930소련 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 1928–1937글라브졸로토(비철금속·금·백금 총관리국) 국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야코블레바

Варвара Николаевна Яковл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체카에서 좌익 반대파로 간 재정 인민위원

죄수열차 안에서 발렌티나 폴랴코바가 추궁했다. 「당신의 거짓 증언으로 내 남편이 총살당했다.」 야코블레바가 답했다. 「예조프의 명령이었다. 15일 밤낮 잠을 못 자게 하더니 결국 서명했다.」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체카를 이끌었던 옛 볼셰비키이자, 1924~26년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을 지낸 뒤 1937년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오룔 감옥의 집단 처형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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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6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29–1937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
  • 1937–1941체포, 수감과 오룔 감옥 처형

아우구스트 탈하이머

August Thalheimer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4–1948 ○ 자연사

독일공산당의 주요 이론가이자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 분석가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세대의 대표적 이론가로, 파시즘을 금융자본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계급 대립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집행권력으로 본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론의 창시자. 1929년 KPD에서 축출된 뒤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해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와 거리를 둔 독자 노선을 지키며 망명 속에서도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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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좌파 언론 편집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반전 선전으로 징집·투옥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초기 주요 이론가
  • 1923브란들러와 함께 KPD 공동 지도, '독일 10월' 실패로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모스크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쑨원대학에서 연구·강의
  • 1929KPD에서 제명,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이론 활동 지속

미하일 마르코비치 보로딘

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4–1951 ✕ 옥사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의 설계자,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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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가입, 볼셰비키
  • 1905–1907리가에서 혁명 활동, 스톡홀름 제4차 당 대회 대의원
  • 1907–1918미국 망명 — 시카고에서 이민자 학교 운영
  • 1919초대 소비에트 멕시코 영사, 멕시코공산당 창립 지원
  • 1919–1922코민테른 요원으로 유럽·아메리카 순회
  • 1923–1927쑨원 정치고문 — 국민당 재편, 제1차 국공합작, 황포군관학교
  • 1932–1949《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소비에트 정보국 편집장
  • 1949–1951반코스모폴리탄 캠페인으로 체포, 레포르토보에서 사망

안토닌 자포토츠키

Antonín Zápotocký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884–1957 ○ 자연사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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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해 당 언론·노동조합·협동조합 조직에 힘썼다.
  • 1929–1939공산주의 노동조합 총서기를 지냈다.
  • 1945전후 결성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의장이 되었다.
  • 1948공산당 정권 장악 뒤 정치서기국 위원과 체코슬로바키아 총리가 되었다.
  • 1953–1957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펠트만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льд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58 ○ 자연사

자본재 부문 주도 성장 모형을 최초로 정식화한 고스플란의 수학적 경제학자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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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 1935–1937북극해항로총국(GUSMP) 종합계획반장
  • 1937–1953탄압을 겪은 후 여러 도시에서 공학직으로 근무, 시추 관련 발명특허 획득
  • 1953–1958중병을 앓으며 모스크바 귀환, 경제학 연구에서 물러나고 사후 복권

페트루 그로자

Petru Groza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1884–1958 ○ 자연사

공산당원이 아닌 지주 변호사로 공산 정권의 첫 총리와 국가원수를 지낸 「붉은 부르주아」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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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26–1927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33농민전선 창설
  • 1935체베아 협정, 공산당과 제휴
  • 1944–1945부총리
  • 1945–1952총리
  • 194712월 30일 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 1952–1958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국가원수)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안토노프-사라톱스키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Антонов-Сарат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65 ○ 자연사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이자 소비에트 법제의 설계자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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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 혁명위원회 위원장
  • 1919RSFSR 내무인민위원부 부위원, 쿠르스크 현 집행위원장, 제13군 혁명재판소장
  • 1920–1921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마흐노 진압 담당, 제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총장
  • 1923–1938소련 인민위원회 입법제안위원회 의장 겸 소련 대법원 판사
  • 1939–1952RSFSR 법무인민위원부·법무부에서 근무

이반 미하일로비치 마이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Май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75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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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 1906–19081905년 혁명 참여로 체포, 토볼스크 유배
  • 1912뮌헨 대학 경제학부 졸업, 런던으로 이주
  • 1917임시정부 노동부 차관
  • 1918사마라 KOMUCh 정부 노동상; 멘셰비키당 제명
  • 1920–1921볼셰비키 전향 선언, RKP(b)에 입당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29–1932핀란드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2–1943영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대사
  • 1941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 서명,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 복원
  • 1943–1946외무인민부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참여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53–1955간첩 혐의로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및 복권
  • 1957–1975당적 회복, 학술 활동 재개; 회고록 및 외교 일기 집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조선 1885–1918 ✕ 처형

러시아 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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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지부 서기 겸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 1918.4한인사회당(이후 조선공산당의 전신) 공동 창당
  • 1918.6–8조선인 적위대 및 국제 적위대 조직, 백군·일본군에 맞서 전투
  • 1918.9.4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됨
  • 1918.9.16하바롭스크에서 백군 코사크에 의해 처형됨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Сверд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19 ○ 병사

혁명 직후 당과 국가를 연결한 조직가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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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중앙위 서기, 10월 봉기 조직 실무
  • 1917–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8–19중앙위 서기국 의장

단잔

Данзан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885–1924 ✕ 총살 · 1962년 복권

초대 당 의장에서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된 창당 공신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체포된 그는,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도 못 되어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1919년 몽골인민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 혁명 뒤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과 재무장관을 지내며 초기 인민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1922년 총리 보도를 숙청·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제한된 자본주의와 소련 고문 축소를 주장하다 코민테른 좌파와 충돌했고,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부르주아로 몰려 하루 만에 체포·총살됐다. 그 숙청이 당을 비자본주의 노선과 공화국으로 돌려세우는 분수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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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동(東) 후레' 그룹 결성, 몽골인민당 창당 참여
  • 1920모스크바 방문 대표단으로 레닌 접견
  • 1921제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의장 선출 (3–9월)
  • 1921–1922재무장관
  • 1922보도 총리의 숙청·처형 주도
  • 1923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24제3차 당대회에서 '부르주아'로 규탄·처형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Фрун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출생: 키르기스스탄(피슈페크) 1885–1925 ○ 수술 중 사망, 사인 논쟁

내전의 전선 사령관, 붉은 군대 개혁자

1925년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에게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고 썼다.

1885년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피슈페크(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태어나 192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군사 지도자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에 입학해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총파업을 이끌고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1907년 체포되어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16년 탈출해 1917년 민스크에서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하고 크림을 점령했으며, 1924년부터 군사개혁을 추진하다 1925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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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혁명운동과 투옥·유형, 1917년 뒤 볼셰비키 군사조직으로 이동
  • 1919–1920동부전선과 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백군 격파
  • 1920남부전선에서 브란겔군 격파와 크림 점령 지휘
  • 1924–1925군사개혁 구상, 통일군사교리와 정규군 재편 추진
  • 1925전쟁인민위원 취임 직후 수술 중 사망

솔로몬 그리고리예비치 모길렙스키

Соломон Григорьевич Могил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25 ✕ 항공사고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첫 책임자: 이녜의 토대를 놓은 8개월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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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대숙청에 삼켜진 검사

1918년 5월, 사형제가 폐지된 뒤 방청객이 술렁이자 크릴렌코는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몰렌스크 현 베흐테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당명은 아브람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연대와 사단, 11군 위원회 의장을 거쳐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열었다. 이듬해부터 혁명재판소와 검찰, 사법인민위원직을 거치며 혁명적 법의식을 내세워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하고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과 1928년 샤흐띠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이끌었다. 1938년 1월 31일 부하린 우익 조직 연계와 사법기관 파괴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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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비밀 활동, 체포와 망명 반복;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
  • 1917.11–1918.3소비에트 최초의 최고총사령관; 두호닌 해임, 휴전 교섭 개시
  • 1918–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혁명재판소 의장
  • 1922–1929러시아 공화국 법무부차관 겸 수석 검사보
  • 1929–1931러시아 공화국 검사;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의 국가검사
  • 1931–1936러시아 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6–1938.1소련 법무인민위원
  • 1938.7.2920분 재판 후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아론 리보비치 셰인만

Арон Львович Шейн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44 ○ 자연사

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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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이반 이바노비치 코롯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49 ○ 자연사

당 통제 기관에서 미술관으로 간 볼셰비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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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 1913–16체포 및 유형
  •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 1922–24RKP(b) 중앙위원
  • 1923–24중앙위 조직지도부장, 오르그뷰로 후보위원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간부위원
  • 1934–39당통제위원회 위원
  • 1939–44푸시킨 국립미술관 관장
  • 1944은퇴

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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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카멘스카야 볼셰비키 위원회 의장 · 적위대 지휘관
  • 1918–1919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우크라이나 전선 RVS 위원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제2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마흐노 토벌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
  • 1939–1941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1–1943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글라부쁘라포름 국장
  • 1943–1944남부전선 · 제4우크라이나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애나 루이즈 스트롱

Anna Louise Strong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5–1970 ○ 자연사

러시아·중국 혁명을 50년간 현장에서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모스크바 뉴스』 창간자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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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네브래스카주 프렌드에서 진보적 목사 가정의 딸로 출생
  • 1908시카고대 철학 박사 — 「기도의 사회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 1916–1918시애틀 교육위원 선출 — IWW 지지·반전 활동으로 리콜
  • 1919『시애틀 유니언 레코드』 편집자 — 시애틀 총파업을 현장 취재
  • 1921AFSC 구호단원으로 소련행 — 볼가 기근 구호 참여 후 모스크바 특파원 정착
  • 1930소련 최초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 창간·편집장
  • 1931소련 농업경제학자 조엘 슈빈과 결혼 (1942년 사별)
  • 1937–1938스페인 내전·중국 항일 근거지 종군 취재
  • 1946옌안에서 마오쩌둥 인터뷰 —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 발언 기록
  • 1949소련 당국에 체포, 「미국 간첩」 혐의로 추방 — 1955년 명예 회복
  • 1958–1970중국 영구 정착 — 마오·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며 '외국인 친구'로 활동
  • 19703월 29일 베이징에서 심장마비 사망 — 저우언라이·궈모뤄 문상

파벨 드미트리예비치 바실리예프

Павел Дмитриевич Васил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 ○ 행적과 최후 미상

혁명의 거점에서 권력의 역풍을 맞은 지방 소비에트 간부

1921년 3월 2일, 크론시타트 반란 세력은 그를 체포해 가두었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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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크론시타트 소비에트 의장
  • 1919–1921크론시타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 1921.3.1앵커 광장 집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대표
  • 1921.3.2대표자 회의에서 발언, 반란 세력에 체포됨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파르호멘코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Пархом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6–1921 ✕ 전사

차리친 방어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를 이끈 내전 지휘관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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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먀스니코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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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4 ✕ 암살

레닌그라드의 조직가, 대숙청의 구실이 된 암살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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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Григо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ерго) Орджоник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총상 사망, 자살로 추정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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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 1924–26트랜스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북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30노농검열인민위원,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0–37정치국 정위원
  • 1935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국적 캠페인으로 전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우글라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гл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모스크바를 쥔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당 위원회 및 통제위원회 합동 총회 연단에 올라 '우경 위험'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우글라노프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886년 12월 5일(구력 17일) 야로슬라블현 페오도리츠코예의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다 1905~07년 혁명에 가담했고 1907년 볼셰비키로 입당했으며, 1914년 재징집되었다가 부상으로 1916년 제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고,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류틴과 함께 좌익 반대파 분쇄에 앞장섰다. 1928년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했으나 그해 11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37년 5월 31일 사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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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 입당, 볼셰비키
  • 1914–16차르군 복무, 부상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19172월·10월 혁명 참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
  • 1921–22페트로그라드 현당 책임서기, 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2–24니즈니노브고로드 현당 책임서기
  • 1924–28모스크바 현당 제1서기, 중앙위 서기
  • 1926–29정치국 후보위원
  • 1928–30소련 노동인민위원
  • 1932류틴 사건으로 출당
  • 1937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처형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아서 랜섬은 1918년 12월 임명 직후 그를 만나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고 기록했고, 슈미트는 인민위원부가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1886년 12월 17일(그레고리력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어 전기에서는 독일계로 기재되어 있다.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일에서 도장공으로 지내다 돌아와 1915년부터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1917년 11월 노동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재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37년 1월 체포되어 1938년 1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7년 7월 30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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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보리스 자하로비치 슈먀츠키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8 ✕ 처형

소련 영화산업을 설계한 혁명가 출신 문화행정가,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꾸다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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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 1906–1913지하신문 편집·선동, 아르헨티나 망명, 귀국 후 체포·징집
  • 1917.10–1918.3첸트로시비리 의장,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 선포
  • 1920.6–1920.10극동공화국 외무장관 겸 총리
  • 1921–1922코민테른 극동비서국장, 몽골 인민혁명 고문, 수흐바타르와 의형제
  • 1923–1925페르시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6–1928동방노동자공산대학(KUTV) 총장, 《혁명적 동방》 편집장
  • 1930–1938소유즈키노 이사장 →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장, 소련 영화산업 총괄
  • 1935제1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창설, 레닌훈장 수훈
  • 1938.1–1938.7해임·체포, 반혁명·간첩 혐의로 사형, 코뮤나르카에서 총살

세묜 마르코비치 디만시테인

Семён Маркович Диманштей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6–1938 ✕ 처형

랍비 서품을 받은 볼셰비키 유대인위원장이자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설계자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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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빌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합류
  • 1918민족문제인민위원부 유대인위원회 위원장
  • 1918–1920예브섹치야(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유대인부) 의장
  • 1920–1922투르케스탄 교육·민족문제 인민위원, 부하라 공화국 정치대표
  • 1922–192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조직국 위원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 1926–1938OZET(유대인 노동자 토지정착촉진협회) 중앙이사회 의장
  • 1932–1936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

야코프 흐리스토포로비치 페테르스

Яков Христофорович Петер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6–1938 ✕ 처형

체카 창설 부의장, 명예체키스트 제2호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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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 입당
  • 1907–1908체포·기소, 리가 군사법원에서 무죄 판결
  • 1909–1917런던 망명, 영국 사회당 및 라트비아 SD 그룹 활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준비
  • 1917.12–1918.07체카 부의장 (제1대)
  • 1918.07–1918.08체카 권한대행 의장 — 좌파SR 반란 진압
  • 1918.08–1919.03체카 부의장, 카플란 사건·로카트 음모 수사
  • 1920–1922투르키스탄 전권대표·타슈켄트 체카장, 바스마치 소탕
  • 1922–1929GPU·OGPU 동부국장, 국경군 감찰관 겸임
  • 1930–1934모스크바 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7당 통제위원회 위원

쿤 벨러

Kun Béla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루마니아 1886–1938 ✕ 처형

133일간의 유럽 두 번째 소비에트 국가 — 그리고 19년 후의 처형장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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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트란실바니아 지부 조직
  • 1916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됨 — 포로수용소에서 볼셰비키 사상 접함
  • 191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톰스크 당위원회 활동
  • 1918.3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주의 그룹 결성 — KMP의 전신
  • 1918.11부다페스트 귀환, 헝가리 공산당(KMP) 창당 및 중앙위원회 의장
  • 1919.3–8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외무인민위원 겸 실질적 지도자
  • 1920크림 혁명위원회 의장
  • 1921독일 3월봉기 지도 — 실패
  • 1921–1936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위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
  • 1924–ECCI 선전선동부장
  • 1937체포 — '반혁명 테러조직 지도' 혐의
  • 1938.8.29사형 선고 및 집행 — 모스크바 콤무나르카

에른스트 텔만

Ernst Thälmann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6–1944 ✕ 처형

11년 독방에서도 굴하지 않은 히틀러의 개인적 정치수

“힌덴부르크를 찍는 자는 히틀러를 찍는 것이고, 히틀러를 찍는 자는 전쟁을 찍는 것이다.” — 대통령 선거(1932)

독일공산당(KPD) 의장. 함부르크 항만 노동자 출신으로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정당으로 성장시켰다. 나치 집권 후 체포되어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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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0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 SPD, USPD를 거쳐 KPD로
  • 1925–1933KPD 의장, 적색전선전사동맹 지도
  • 1925, 1932대통령 선거 출마
  • 1933게슈타포에 체포 — 11년 독방
  • 1944.8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부헨발트에서 총살

앙드레 마르티

André Marty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886–1956 ○ 폐암

흑해 함대 반란을 이끈 해군 기관사, 코민테른 서기국에 오르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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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 1923국제적 석방 캠페인으로 사면,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24–1955프랑스 하원의원 (센에우아즈) 및 PCF 중앙위원
  • 1931–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활동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
  • 1936–1938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정치위원 — 알바세테에서 여단 조직·지휘
  • 1939–1943소련 체류하며 코민테른 업무, 1943년 알제에서 드골 측과 연락
  • 1944파리 해방 후 귀국, 혁명 기도 — 스탈린의 거부권으로 무산
  • 1952마르티-티용 사건: 경찰 간첩 혐의로 PCF에서 제명

주더

朱德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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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바실리 이바노비치 차파예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ап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7–1919 ✕ 전사

소련 영화와 민담으로 되살아난 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내가 목수였을 땐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용감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잘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이제는 목숨이 아까워.

가난한 농민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정규 군사교육 없이 과감한 전술과 카리스마로 내전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우랄 전선에서 전사했으나 푸르마노프의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영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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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326 벨고라이 연대에서 복무하며 펠트페벨까지 승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개 수훈.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니콜라옙스크에서 붉은위병대 조직, 니콜라옙스크 제1·제2연대 지휘.
  • 1918제2니콜라옙스크사단장으로 우랄 코사크 및 체코군단과 교전. 능선을 따라 사마라 방면으로 진격.
  • 1918–1919붉은 군대 참모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이탈.
  • 1919제25소총병사단장으로 부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서 두각. 적기훈장 수훈.
  • 1919.6–9우랄 전선으로 재배치. 특별집단 지휘관으로 우랄스크 포위 해제.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코사크 기습으로 전사.

존 리드

John Reed
독립 활동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7–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혁명의 목격자에서 미국 공산당 창립자로: 크렘린 성벽에 묻힌 미국인

붉은광장 혁명 희생자 합동 장례식. 리드는 깨달았다. 경건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사제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지상에 어떤 천국보다 찬란한 왕국을 짓고 있었다.

미국 언론인이자 공산주의자. 1917년 10월 혁명을 목격하고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썼다. 미국 공산노동당을 공동 창립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이 되었다. 크렘린 벽에 안장된 극소수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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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하버드대 졸업, 뉴욕에서 저널리즘 경력 시작
  • 1913『더 매시스』 기자 합류, 패터슨 파업 취재 중 첫 체포
  • 1913–1914멕시코 혁명 종군기자 — 판초 비야 군대와 4개월 동행, 『반란의 멕시코』 출간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 직접 목격, 볼셰비키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서 활동
  • 1919『세계를 뒤흔든 10일』 출간, 미국 공산노동당(CLP) 공동 창립
  • 1919–1920코민테른 집행위원,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미국 대표, 바쿠 동방민족대회 참석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지노비예프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Зинов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7–1934 ○ 자연사

공군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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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서부전선 제2군 제3시베리아소총군단 항공대 비행사
  • 1917제3시베리아소총군단 병사위원회 의장
  • 1918스몰렌스크 주둔군 사령관
  • 1918–1919오렌부르크·악튜빈스크 전선 지휘관
  • 1919투르키스탄군 사령관
  • 1919–1920제1군 사령관
  • 1920–1921투르키스탄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4군사공병아카데미장 겸 정치위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글레보프-아빌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Глебов-Ав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7 ✕ 처형

첫 체신인민위원에서 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까지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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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칼루가 인쇄소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
  • 1905–1907칼루가·모스크바·우랄 지하인쇄소 혁명활동
  • 1912–1914볼로냐 당학교 수학, 『프라우다』 협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노조 중앙뷰로 서기, 군사혁명위 노조 대표
  • 1917.11–12초대 체신인민위원 (첫 인민위원회의)
  • 1918–1921흑해함대 정치위원, VTsSPS 간부, 우크라이나 노동인민위원
  • 1923–1926레닌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XIV차 대회 반대파 지도자
  • 1929–1936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

아우구스트 이바노비치 코르크

Август Иванович Кор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887–1937 ✕ 처형

제국 장교에서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으로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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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 1918.06붉은 군대 자원입대, 전러시아 총참모부 작전과 근무
  • 1919.02–05에스토니아 적군 (에스토니아 노동코뮌 군대) 참모장
  • 1919.06–08제7군 부사령관 — 페트로그라드 방어, 유데니치 군 격퇴
  • 1919.08–1920.10제15군 사령관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 1920.10–1921.05제6군 사령관 — 페레콥-촌가르 작전, 브란겔 백군 최종 격멸
  • 1921–1922하리코프 군관구 사령관, 이후 우크라이나·크림 군 부사령관
  • 1922–1923투르케스탄 전선군 사령관 — 바스마치 반군 진압
  • 1924–1927서부 군관구 사령관 → 캅카스 적기군 사령관 →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27–1928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28–1929소련 주독 무관; 독일 국가방위군 교육 시설에서 연수
  • 1929.05–11붉은 군대 보급국장
  • 1929–1935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35–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정치위원 (2급 군사령관)

발레리안 발레리아노비치 오볼렌스키

Валериан Валери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7–1938 ✕ 처형

최고경제회의 첫 의장, 좌파 공산주의와 민주집중제의 이론가

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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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7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수확고·총수확량 산정 국가위원회 의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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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7–1939 ✕ 처형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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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후고 에벌라인

Hugo Eberlein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7–1941 ✕ 총살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 창립에 기권하고, 뒤에 대숙청으로 총살된 공산주의자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에벌라인은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위임에 따라 즉각 창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레닌의 설득으로 개인 의견은 바뀌었지만, 위임을 따라 반대표 대신 기권했다.

튀링겐 잘펠트 출신의 설계 기술자로 SPD에 들어갔고, 전쟁 중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1919년 3월 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서둘러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면 볼셰비키가 지배하게 된다는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권고에 따라 창립 표결에 기권했다. 창립 뒤에는 코민테른과 독일 당에서 조직·재정 일을 맡았고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7년 체포되어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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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스파르타쿠스단의 지하 정치 조직화에 참여하다.
  • 1918독일 공산당(KPD) 창당에 참여하다.
  • 1919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창립 표결에 기권하다.
  • 1921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다.
  • 1937소련에서 체포되어 수감되다.
  • 1941모스크바에서 총살되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7–1943 ○ 옥사

세계 최대 종자은행을 세운 유전학자, 리센코의 반대자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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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사라토프 대학 교수, 식물면역 연구
  • 1920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 발견
  • 1920–1940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
  • 1926재배식물 기원중심지 이론 발표
  • 1929–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총재
  • 1930–1940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31–1940전연방지리학회 회장
  • 1935–1940VASKhNIL 부총재, 리센코 학설에 공개적 반대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바그다체프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Багдать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887–1949 ○ 자연사

대중의 급진성을 앞세운 볼셰비키 실천가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에는 전쟁을 끝낼 희망이 없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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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 1908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및 집행위원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실천가, 4월 시위 전단 작성
  • 19176월·7월 시위 참가, 임시정부에 체포됨
  • 1918–1925모스크바와 자캅카스에서 당 활동
  • 1926–1939소련 인민위원평의회 관개위원회 부위원장, 레지노트레스트 의장 등
  • 1940–1949개인연금 수급자로 생활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

মানবেন্দ্র নাথ রায়
코민테른 공산주의 인도 인도 1887–1954 ○ 심장마비

레닌과 식민지 혁명을 논쟁한 인도 마르크스주의자

“당신은 정말 젊군요! 나는 동방에서 온 백발의 현자를 기대했는데.” — 1920년 크렘린에서 로이를 처음 만난 레닌이 27세의 인도 혁명가에게 건넨 첫마디.

벵골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1920년 코민테른에서 식민지 문제로 레닌과 논쟁했고, 멕시코 공산당과 인도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다. 제명 후 영국에서 6년간 투옥, 말년에 급진적 인본주의로 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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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멕시코 사회당 창립 참여 (이후 멕시코 공산당으로 전환)
  • 1919멕시코 공산당 창당 — 러시아 밖 최초의 공산당
  • 1920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 보충 테제 제출, 레닌과 논쟁
  • 1920타슈켄트에서 인도 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29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위원, 중국 문제 담당
  • 1929부하린 우익반대파 가담으로 코민테른에서 제명
  • 1931–1936영국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6년간 투옥
  • 1940–1948급진민주당 창당, 반파시스트 노선 견지
  • 1947『신인본주의』 선언 발표 — 급진적 인본주의 철학 정립

오메르 니샤니

Omer Nishani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887–1954 사인 미확정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인민공화국의 공식 첫 국가수반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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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 1923–1924두러스 시의사
  •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3.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44.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 1946.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 1953.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야코프 모이세예비치 피시만

Яков Моисеевич Фишман
좌파 사회혁명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7–1961 ○ 사망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에서 소련 화학전의 설계자가 된 혁명가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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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대의원 · 오흐타 화약공장 전투대 지휘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 10월 혁명 참가
  • 1918좌파 사회혁명당 전투대장 · 미르바흐 암살 폭탄 제조
  • 1921–1925적군 정보국 요원 · 이탈리아·독일 주재 무관
  • 1925–1937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국장 · 화학방어연구소장
  • 1937–1947체포·10년형 ·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개발
  • 1955복권 · 기술병 소장 계급 수여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콥파크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7–1967 ○ 자연사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한 소비에트 최고의 파르티잔 사령관

「화염이 카르파티아 산비탈을 밝혔다… 밤인데도 대낮 같았고, 불타는 기름의 굉음은 우리를 괴롭히던 독일 비행기 엔진 소리조차 삼켜버렸다.」 — 1943년 비트쿠프 유전 습격을 회고하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사령관. 1941년 푸티블에서 부대를 조직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며 독일군 후방을 교란했고,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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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러시아 제국군 제186아슬란두스 보병연대 복무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정찰병·부사관,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 1918–1919코텔바 적색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 1919–1926붉은 군대 보급·병사 업무, 현 군사위원 역임
  • 1926–1939군 협동조합 지도원, 푸티블 도로국장 등 지방 경제 관료
  • 1940–1941푸티블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41–1943수미 파르티잔 연대 지휘관, 소장 진급 (1943)
  • 1944–1947우크라이나 SSR 최고재판소 판사
  • 1947–1967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부의장

빅토르 킹기세프

Viktor Kingissepp
소련 공산주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888–1922 ✕ 처형

독립 에스토니아에서 지하 공산당을 이끌다 처형된 볼셰비키

로카트 음모와 카플란 사건을 수사한 체카 수사관이었던 그는, 1922년 메이데이 시위 뒤 체포되어 그날 밤 유예미스테 호숫가 숲에서 총살되었다.

1917년 에스토니아의 10월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로 독립 공화국에서 지하 공산당을 지도하다 1922년 탈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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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아렌스부르크(쿠레사아레) 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6페테르부르크로 이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3페테르부르크와 레벨(탈린)에서 당 활동, 에스토니아어 신문 「키르」 발간 참여
  • 1917에스틀랸트 지역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행정부장
  • 1918최고혁명재판소·체카 수사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18–1922지하로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 중앙위원·정치국원
  • 19223일 체포되어 그 다음날 밤 총살

표트르 라자레비치 보이코프

Пётр Лазаревич Вой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27 ✕ 암살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한 볼셰비키 외교관: 바르샤바에서 암살당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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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멘셰비키
  • 1906얄타 경찰서장 겨냥 폭탄 테러 기도 실패, 도피
  • 1907–1917제네바 망명, 제네바 대학교 수학·화학 전공, 멘셰비키-국제주의파 활동
  • 1917.8볼셰비키 합류, 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및 군사혁명위원회 참여
  • 1918.1–12우랄 지역 소비에트 공급위원
  • 1918.7우랄 소비에트 특별회의에서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 황산 공급 서명
  • 1919–1920식량인민위원부 분배국 근무, 첸트로소유스(중앙소비자협동조합) 부의장
  • 1920–1921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이사, 수출위원회 참여
  • 1924–1927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전권대사)
  • 1927.6.7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백계 망명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에게 암살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5 ○ 자연사

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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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s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게오르기 이폴리토비치 로모프

Георгий Ипполитович Оппо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초대 법무인민위원, 고스플란 부의장, 그리고 대숙청의 희생자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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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7–1910모스크바 시·지구 당위원회, 페테르부르크 당비서
  • 1910–1913체포·아르한겔스크 유형
  • 1917.10–11초대 법무인민위원 (RSFSR)
  • 1918–1921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부의장, 연료 공급 책임
  • 1921–1923시브뷰로·우랄뷰로 위원, 시브프롬뷰로·우랄경제회의 의장
  • 1923–1926네프테신디카트(석유 신디케이트) 의장
  • 1926–1929돈우골(도네츠 석탄) 이사장
  • 1931–1933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위원

모이세이 이오시포비치 칼마노비치

Моисей Иосифович Калман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집단화 시기 국가은행을 이끈 혁명가 출신 금융행정가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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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민스크 수비대장,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 서부지역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9–1920벨라루스·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 서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0–1923우크라이나 식량부인민위원, 시베리아 식량위원회 의장
  • 1923–1924러시아 SFSR 식량인민위원, 소련 식량부인민위원
  • 1924–1929사하로트레스트·프롬방크·제르노트레스트 이사, 노농감독부 간부
  • 1929–1930소련 농업부인민위원
  • 1930–1934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 신용개혁 주관
  • 1934–1937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

세묜 세묘노비치 로보프

Семён Семёнович Ло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체카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고경제회의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산업행정가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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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로젠크란츠 공장 노동자
  • 1917–1918페트로그라드·비보르크 당위원, 공장위원장, 소비에트 대표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9–1920사라토프 체카 의장 → 바시키르 체카 의장 겸 내무인민위원
  • 1921–1923석유신디케이트 연료국장
  • 1923–1926북서공업국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6–1930ВСНХ РСФСР 의장 겸 글라브에네르고 책임자
  • 1930–1932소련 공급인민위원부 부위원
  • 1932–1936소련 임업인민위원
  • 1936–1937러시아 식품공업인민위원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차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ая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농민 경제의 도덕적 논리를 탐구한 농업경제학자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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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 1921–1923농업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겸 고스플란 대표
  • 1930–1935'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5년형 선고, 유형지 알마아타로 이감
  • 1937알마아타에서 재체포, 당일 총살 — 1987년 전면 복권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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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8 ✕ 처형

「당 전체의 총아」, 당의 이름으로 죽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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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7뉴욕에서 망명 신문 편집
  • 1917《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출간(1915년 집필)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 반대
  • 1918–29프라우다 주필, 코민테른 지도부
  • 1920프레오브라젠스키와 《공산주의 ABC》 공저·출간
  • 1921《사적 유물론: 사회학 체계》 출간
  • 1925–28네프 이론가, 「부유해지십시오」
  • 1929「우편향」으로 실각
  • 1934–36이즈베스티야 주필, 1936년 헌법 기초 참여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8–1938 ✕ 처형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 계급적 적색 테러의 이론가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출신의 소련 혁명가이자 저술가로, 본명은 야니스 수드랍스이다. 1918년 7월부터 11월까지 동부전선 제5군의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을 지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서 키예프 체카를 직접 지휘했다. 1918년 11월 1일 카잔의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실어 계급 출신과 양육, 직업만으로 피의자의 운명을 정하자고 주장하며 계급적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다. 자료들은 그가 개인적 잔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전하며, 데니킨 위원회의 전우크라이나 체카 관련 자료와 라치스 자신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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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SDLK) 입당, 비합법 활동
  • 1908–1915교사 자격 취득, 교편 생활; 모스크바 샤냡스키 인민대 청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 1918.5–7체카 간부위원·반혁명투쟁부장; 제르진스키 직무대행
  • 1918.7–11동부전선 제5군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
  • 1919–1921전우크라이나 체카(VuChK) 의장
  • 1922–1932글라프솔·솔레신디카트·농업인민위원부 등 경제 행정
  • 1932–1937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소장

볼로디미르 페트로비치 자톤스키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Зато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8–1938 ✕ 처형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건설자이자 학자정치인, 교육·당·통제를 관통한 혁명 관료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아들 드미트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여겼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뜻하는 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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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엘벡도르지 린치노비치 린치노

Элбек-Доржи Ринчинович Ринчино
몽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부랴트) 1888–1938 ✕ 총살(선고일 · 집행지 · 시점 사료 상충)

부랴트 혁명가, 1924년 몽골 헌법 초안 작성자, 대숙청 피해자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 지도자로서 담바도르지가 이끄는 우파와 함께 단잔을 '부르주아 이익 대표·미국·중국 회사와의 거래'로 고발했고, 단잔과 바바산 등은 대회가 계속되는 동안 24시간 안에 재판·사형·총살됐다.

자바이칼 부랴트 출신으로 1917년 4월 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이 되어 부랴트 자치의 기초를 놓았고, 1920년 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로 몽골 혁명가들과 협력했다. 1921년 혁명 뒤 1925년까지 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과 정부 고문, 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 대·소후랄 의원을 지냈으며, 1924년 헌법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이고 제3차 당대회에서 비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정당화했으나 같은 대회에서 단잔 고발에 가담했다. 1937년 6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체포돼(수감 기록에는 7월 19일로 기재) 1938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일과 처형 시점·장소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1955년 재심이 개시돼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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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 선출
  • 1918시베리아 임시정부 교육장관에 서면 선출
  • 1920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
  • 1921–1925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정부 고문·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대후랄 및 소후랄 의원
  • 1924헌법 초안 작성 참여, 제3차 당대회에서 단잔 고발
  • 1926–1930적색교수연구소 수학
  • 1927–1934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KUTV)에서 연구·교육 활동, 1934년 11월부터 정치경제학 교수
  • 1937모스크바에서 체포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소콜니코프

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Соко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9 ✕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네프의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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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활동과 망명, 혁명기 당 실무에 참여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대표단에서 활동
  • 1920–1921투르케스탄 전선과 중앙아시아 소비에트화에 관여
  • 1922–1926재무인민위원, 체르보네츠와 네프 화폐 안정 추진
  • 1926–1936반대파와 연루되어 외교·경제직을 거쳐 점차 실각
  • 1936–1939모스크바 재판 뒤 수감, 수용소에서 살해

안톤 세묘노비치 마카렌코

Антон Семёнович Мака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9 ○ 심장마비

거리 아이들을 노동과 자치로 키운 교육자, 유네스코 4대 교육사상가

「인간에 대한 최대의 요구와 최대의 존중」 — 마카렌코의 교육 원칙

소비에트 교육학의 창건자. 내전 후 거리 아이들을 집단노동과 자치로 사회화하는 '마카렌코 시스템'을 확립했으며, 그 경험을 쓴 『교육시』는 세계 교육학의 고전이다. 1988년 유네스코 4대 교육사상가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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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크레멘추크 사범과정 졸업, 크류코프 철도학교 교사
  • 1914–1917폴타바 사범대학 금메달 졸업
  • 1920–1928고리키 콜로니 설립·지도 (비행청소년 노동교육)
  • 1927–1935제르진스키 노동코뮌 지도 (자립 생산공동체)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회원
  • 1935–1936우크라이나 NKVD 노동콜로니 부서 차장보
  • 1937–1939모스크바 전업 작가·교육학 저술
  • 1939노동적기훈장 수훈

미하일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Михаил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41 ✕ 자살

소련 군수공업의 건설자, 형 라자르의 그늘 속에서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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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 1923–1927니즈니노브고로드 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7–1932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독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2기계제조총국장 겸 최고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중공업부인민위원 — 오르조니키제의 수석 대리
  • 1937–1939국방공업인민위원
  • 1939–1940항공공업인민위원
  • 1940–1941카잔 제124항공공장 책임자로 좌천

이반 테렌티예비치 골랴코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Гол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61 ○ 자연사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한 소련 최고재판소장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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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RKP(b) 입당
  • 1919–1925혁명군사재판소장 (제14소총사단·북카프카스 군관구)
  • 1925북카프카스대학 법학과 졸업
  • 1925–1933벨로루시 군관구 혁명군사재판소 부의장
  • 1931–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위원
  • 1938.1–4RSFSR 검찰총장
  • 1938–1948소련 최고재판소장
  • 1938–1947, 1949–1956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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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Тупо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72 ○ 자연사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소련 금속항공의 아버지의 말이다.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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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8주콥스키의 제자, 러시아 최초 항공계산국 참여
  • 1918–36ЦАГИ 부소장,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 창설
  • 1925–34TB-1, TB-3, АНТ-25, «막심 고리키» — 중폭격기 시대
  • 1937–41체포, ЦКБ-29(샤라시카)에서 Tu-2 설계
  • 1943–52Tu-2 전력화, Tu-4 전략폭격기, Tu-16 제트폭격기
  • 1955–68Tu-104 제트여객기, Tu-114, Tu-144 초음속여객기
  • 1956–72소련 항공공업 총설계사,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김두봉

김두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889–1958? ↓ 실각 후 실종 1958

독립운동가이자 언어학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를 지낸 연안파 지도자

1948년 7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채택한 날, 김두봉이 직접 태극기를 내리고 새 국기를 게양했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소련 장군에게 태극기의 철학적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주시경 문하의 한글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로,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에 올랐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고, 1958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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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6주시경 문하에서 한글 연구, 《말모이》 편찬 참여
  • 19193·1 운동 참가 후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 1920–1930년대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언어학 연구 병행
  • 1942–1945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옌안파 지도
  • 1946.2–1946.8조선신민당 위원장
  • 1946.8–1949.6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9–1957.9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초대 국가원수
  • 1957–19588월 종파 사건 연루로 모든 직위 해임, 실종

리다자오

李大钊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89–1927 ✕ 처형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껴안고 마오쩌둥 세대를 길러낸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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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3톈진 북양법정전문학교 정치경제학 전공
  • 1913–1916와세다대학 유학, 반위안스카이 학생운동 지도
  • 1918–1927베이징대학 도서관장·역사학 교수, 『신청년』 편집위원
  • 1919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조직자
  • 1920베이징 공산주의 소조 창립, 보이틴스키와 천두슈 연결
  • 1921중국공산당 공동 창립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2–1924제1차 국공합작 주창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 1926–1927농민무장혁명론 전환, 소련대사관에서 지하활동 지도

이반 파블로비치 톱스투하

Иван Павлович Товстух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5 ○ 폐결핵

스탈린의 첫 비서, 그 기록 보관자이자 첫 전기 작가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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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 1917–18적위대 중앙참모부 감찰부 서기
  • 1918–21민족인민위원부 서기·간부, 스탈린과 결합
  • 1921–24중앙위 기구 책임일꾼, 스탈린 개인 사무국 조직·운영
  • 1922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 최초 공식 전기 집필
  • 1924–26레닌연구소 부소장,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참여
  • 1926–30중앙위 비밀부장 겸 서기장 제1보좌관
  • 1930–31레닌연구소 부소장,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위원
  • 1931–35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부소장 겸 기록보관소장
  • 1934–35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후보위원,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89–1937 ✕ 처형

중국에 대한 짜르 불평등조약을 폐기한 1919년 카라한 선언의 주역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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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5세에 RSDLP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17–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서기
  • 1918–1921외무부인민위원 (RSFSR)
  • 1921–1922주폴란드 RSFSR 전권대표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동방부장
  • 1923–1926주중 소비에트 전권대표 (1924년부터 대사)
  • 1925베이징 외교단 단장 (두아옌)
  • 1926–1934외무부인민위원 (USSR)
  • 1934–1937주터키 소비에트 전권대표

아카키 비사리오노비치 코바히제

Акаки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Кабах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9–1937 ✕ 처형됨

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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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년(10월설·11월설)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년 12월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모이세이 리보비치 루히모비치

Моисей Львович Рухим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유대인 (러시아 제국) 1889–1938 ✕ 처형

레닌이 신뢰한 산업 건설자, 국방공업 초대 인민위원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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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 1920–1925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도누골 트러스트 관리자 —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
  • 1925–1930우크라이나 SSR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0–1931소련 교통인민위원
  • 1931–1936쿠즈바수골 트러스트 관리자, 중공업 부인민위원 (오르조니키제 휘하)
  • 1936–1937소련 국방공업인민위원 (초대)

아르카디 파블로비치 로젠골츠

Аркадий Павлович Розенголь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38 ✕ 처형

소비에트 공군을 세우고 대외무역을 맡은 볼셰비키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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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얀 카를로비치 베르진

Jānis Ян Карлович Берзин Bērziņš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9–1938 ✕ 총살

군사정보국(GRU)을 세우고 대숙청에 삼켜진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1935년 2월 덴마크에서 열린 비밀 주재원 회의가 발각되어 중앙기구 간부 네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었고,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라트비아 출신으로 본명은 페테리스 큐지스이며, 1889년 리가 근처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1938년 처형되었다. 190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을 벌였고, 경찰 살해로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이르쿠츠크 유형에서 1914년 탈출했다. 1919년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년부터 적군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24~35년 제4(정보)국장으로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웠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을 지내고 1937년 정보국장에 복귀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1938년 7월 29일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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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7RSDLP 입당, 16세에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
  • 1907–14경찰 살해로 8년 카토르가형(미성년으로 2년 감형), 복역 후 이르쿠츠크 유형, 1914년 탈출
  • 1917겨울궁전 습격에 참가, 12월부터 체카에서 근무
  • 1919.1–5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 1920–24적군 정보부(GRU 전신)에서 근무
  • 1924–35제4(정보)국장,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움
  • 1935.4–1936.6코펜하겐 실패로 사표를 내고 극동특별군(OKDVA) 부사령관
  • 1936.10–1937.5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 «그리신 장군», 레닌훈장 수훈
  • 1937.6–8GRU 국장 재임명, 두 달 만에 해임·체포
  • 1937.11–1938«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으로 11월 27일 체포, 1938년 7월 29일 처형, 1956년 복권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메호노신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хоно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8 ✕ 처형

적군 창설의 조용한 설계자,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맞선 트로츠키의 대리인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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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 1920–1926제3군·11군 РВС 위원(소비에트-폴란드 전쟁·바쿠 진입); 브세보부치 책임자; 최고체육평의회 의장; 붉은스포르틴테른
  • 1926–1937폴란드 주재 무관; 고스플란 방위부문 책임자; 오소아비아힘; 해양연구소장; 해군정보부 부장

파벨 예피모비치 디벤코

Павел Ефимович Дыб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8 ✕ 처형

발트 함대를 이끌고 10월 혁명의 승부를 결정지은 첫 해군 인민위원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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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처형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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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OGPU 굴라크 수장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건설 책임자
  • 1932–1936굴라크 부수장
  • 1936–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39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조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ыж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심문 중 사망

예조프 곁에서 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뒤 심문실에서 죽어 간 측근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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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군사위원·군관구 행정직
  • 1930년대 전반농업 행정과 모스크바시 행정 근무
  • 1937.7–8NKVD 총무경리국(AKhU)장
  • 1937.8–12소련 내무부인민위원
  • 1937.12–1938.10소련 임업인민위원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9–1939 ✕ 처형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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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빌리 뮌첸베르크

Willi Münzenberg
코민테른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9–1940 ✕ 의문사

나치의 실체를 출판으로 폭로한 '붉은 백만장자'이자, 스탈린과 결별한 코민테른 최고의 선전가

“슈탈린, 너는 배신자다!” —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에 대한 뮌첸베르크의 반응

코민테른 최고의 대중선전가. 국제노동자원조와 반제국주의연맹을 설립하고, 1933년 『갈색서』로 라이프치히 방화의 나치 조작을 폭로했다. 스탈린주의와 결별 후 의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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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합 서기장
  • 1919–1921청년 코민테른 초대 서기장
  • 1921–1937국제노동자원조(IAH/Межрабпом) 창립자·지도자
  • 1924–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KPD, 헤센-나사우)
  • 1927–1935반제국주의연맹 공동창립자·지도자
  • 1933–1939반파시즘 지하출판·국제연대운동 지휘 (파리)
  • 1939–1940『디 추쿤프트』 발행인, 반나치·반스탈린 독립노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벨스키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Бель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41 ✕ 처형

소비에트 민병대를 관장한 부인민위원

1931년 야고다의 '베스나' 사건 조작에 항의했다 해고된 인물이, 6년 후 예조프 휘하에서 대숙청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체카 출신으로 1934년 소비에트 민병대 총국장, 1936년 예조프 휘하의 내무부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기 지방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1939년 체포돼 1941년 처형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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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NKVD 노농민병대 총국장
  • 1936–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39철도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체포, 재판과 처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밀류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лю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9–1942 ○ 위암

나르콤핀 건물을 발주하고 선형도시 『소츠고로드』를 쓴 RSFSR 재무인민위원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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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볼셰비키에 가입
  • 1912–1916사무직원노조 이사 · 푸틸로프 공장 병원기금 관리
  • 19172월 혁명 · 7월 봉기 · 겨울궁전 습격 참여
  • 1921–1924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 1924–1929RSFSR 재무인민위원
  • 1929–1930RSFSR 소인민위원회 의장
  • 1931–1934RSFSR 교육 부인민위원 ·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 편집장
  • 1939–1941소비에트 궁전 건설 예술감독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89–1951 ○ 뇌졸중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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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레프 자하로비치 메흘리스

Лев Захарович Мехли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인 가정 출신) 1889–1953 ○ 자연사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숙청 집행자로, '붉은 군대의 인퀴지토르'라 불린 인물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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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겸 국가편성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유벨리안 다비도비치 숨바토프-토푸리제

Ювельян Давидович Сумбатов-Топур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계 모친) 1889–1960 ○ 구금 중 사망

대량작전기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된 체키스트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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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69 ○ 자연사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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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아마데오 보르디가

Amadeo Bordiga
이탈리아 공산당 공산주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1889–1970 ○ 자연사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한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려는 것이다. 때가 오면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 1912년, 나폴리 카를 마르크스 서클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이자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의회선거 거부와 '불변의 혁명 프로그램'을 주창했고 레닌과 직접 논쟁했다. 축출 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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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이탈리아 사회당(PSI) 입당
  • 1912나폴리에서 카를 마르크스 서클 창설 — 금선거주의 좌파의 거점
  • 1920제2차 코민테른 대회 참석 — 의회주의를 둘러싸고 레닌과 논쟁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d'I) 창당 — 초대 서기장
  • 1923–1924무솔리니 정권에 체포·구금; 석방 후 지도부 복귀 거부
  • 1926재차 체포, 우스티카 섬 유배 — 그람시와 재회
  • 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당에서 제명
  • 1951–1970국제공산당(ICP)에서 활동 — 『바탈리아 코무니스타』, 『프로메테오』에 기고

그리고리 이사코비치 추드놉스키

Григорий Исаакович Чуд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18 ✕ 자살

겨울궁전에 두 번 들어간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항복 협상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으로 열다섯 살에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파리와 뉴욕 망명길에서 트로츠키를 따르다 1917년 5월 메즈라이온치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들어가 협상했으며(처음엔 팔친스키에게 체포됐다가 사관생도들의 요구로 풀려났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무사 통행을 보장한다는 약속으로 수비대가 잇달아 궁을 떠나게 했다.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독일 점령군·중앙라다와 싸우다 1917년 12월 라다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키예프에 들어온 소비에트군에 풀려났고,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된 끝에 숨졌는데, 전사했다는 기록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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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 1917.11–12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 중앙라다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 1918.01–04소련군에 구출; 키예프 민사위원;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되어 자살

다닐 예고로비치 술리모프

Даниил Егорович Сул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자신이 산업화를 이끈 국가에 파괴된 노동자 출신 러시아 공화국 총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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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공장 노동 시작
  • 1918–1919페름 시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광산·야금부 간부
  • 1919–1920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첼랴빈스크 현 위원회 의장
  • 1923–1926우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우랄 주 위원회 제1서기
  • 1927–1930소련 교통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0–1937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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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보리스 미로노비치 펠트만

Борис Миронович Фельд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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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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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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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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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나타노비치 크리츠만

Лев Натанович Криц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병사

전시공산주의를 이론화한 농업마르크스주의자

『영웅적 시기』에서 전시공산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본질에서 그것은 개인이나 계급의 오류가 아니었다. 비록 순수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의 예기요, 미래가 현재로 돌입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선취적 돌파로 분석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고스플란 간부로 계획경제 제도화에 참여했고, 차야노프를 비판하며 삼층계급분화론을 주창해 집단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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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 청년활동가로 혁명운동 참여, 오데사대학 제적 후 취리히대학 졸업
  • 1918귀국 후 RKP(b) 입당, 최고경제회의(Vesenkha)에서 경제정책 실무
  • 1920–1921최고경제회의 이용위원회 위원장, 자원 중앙배분 체계 구축
  • 1921–1925고스플란 간부회원, 『프라우다』 편집위원, 공산아카데미 간부회원
  • 1925–1930농업경제연구소장·공산아카데미 농업연구소장, 『농업전선에서』 책임편집자
  • 1926–1936『대소비에트백과사전』 경제 부문 편집위원, 『경제백과사전』 편집장
  • 1928–1933중앙통계국 부국장, 소련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8지병으로 공직 사임, 연구에 전념하다 신장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옥사

「적기 훈장 제1호」: 내전의 영웅이자 첫 원수 5인 중 하나, 레포르토보에서 스러지다

산재한 적위대를 규합해 54일간 우랄 산맥 1,500㎞를 싸우며 돌파했다. 이 불멸의 행군으로 블류헤르 동지에게 적기 훈장 제1호를 수여한다.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1918.9.28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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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두 차례 게오르기 훈장, 중상으로 제대
  • 1916볼셰비키당 입당
  • 1918우랄 1,500㎞ 대장정 — 적기 훈장 제1호
  • 1919–1920제51소총사단장: 시베리아 전역, 페레콥 돌파로 크림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군사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볼로차옙카 승리
  • 1924–1927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 — 국민혁명군 북벌 입안
  • 1929중동철도 분쟁: 만주군 격파, 적성 훈장 제1호 수훈
  • 1929–1938특별극동군 사령관 — 소비에트 극동 방위 총괄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 참여
  • 1938하산 호 전투 후 해임, 체포, 루뱐카에서 사망
  • 1956사후 복권

빌헬름 게오르기예비치 크노린

Вильгельм Георгиевич Кно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38 ✕ 처형

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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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아로세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Аросе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처형

크렘린 포격명령을 내린 혁명가이자 30권을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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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포격 명령
  • 1918주공군총국(Gлаввоздухфлот) 커미사르
  • 1920우크라이나 최고혁명재판소 의장
  • 1921–1927레닌 연구소 부소장; 체카·OGPU 근무; 프랑스·스웨덴 외교관
  • 1927–1928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9–193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4–1937VOKS(전연방 대외문화교류협회) 의장

로베르트 인드리코비치 에이헤

Роберт Индрикович Эйх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40 ✕ 처형

시베리아 대숙청의 설계자, 고문 속에서도 자백을 철회하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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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08–11영국 망명: 탄광부·선박 화부
  • 1917–19리가 소비에트 간부 → 라트비아 소비에트 식량인민위원
  • 1920첼랴빈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25–29시비르 변경 집행위원회 의장
  • 1929–30시비르 당 제1서기
  • 1930–37서시비르 당 제1서기 — 집단화·쿨라크 숙청 지휘
  • 1935정치국 후보위원
  • 1937NKVD 트로이카 위원 → 농업인민위원
  • 1938–40체포 → 고문 → 자백 철회 편지 → 총살

올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슘스키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Шум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46 ✕ 살해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선구자, '슘스키즘'의 원형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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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1–1923폴란드 주재 우크라이나 SSR 전권대표
  • 1924–192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두 번째 임기); 우크라이나화 정책 주도
  • 1927'슘스키즘'으로 규탄받고 전보; 레닌그라드 국민경제연구소·공업대 학장
  • 1933–1946체포·수감·유형; 석방 직후 NKVD에 암살됨 (1958년 복권)

조지 시안토스

Γιώργης Σιάντος
그리스 공산당 공산주의 그리스 그리스계 아로마니아인 1890–1947 ○ 자연사

저항운동의 승리와 협상의 패배를 함께 짊어진 KKE 지도자

그를 '영국의 요원'으로 여긴 자하리아디스는 1946년 '어떤 경우에도 시안토스를 내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해외 탈출을 미뤘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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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카르디차 담배노동자 노동조합 위원장
  • 1922그리스 담배노동자연맹 서기장, SEKE 가입
  • 1927KKE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
  • 1936팔라ï코 메토포 전선 소속 트리칼라 국회의원
  • 1941KKE 직무대행 서기장, 점령기 당 지도
  • 1944PEEA 내무·식량 담당 서기,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 지휘
  • 1945KKE·EAM 바르키자 협상 대표단 단장, 협정 서명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0–1950 ✕ 처형

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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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비탈리 그리고리예비치 흘로핀

Вита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Хлоп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0–1950 ○ 사망

라듐연구소를 이끌며 소련 핵물리학의 제도적 토대를 놓은 방사화학자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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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베르나츠키의 초청으로 과학아카데미 방사선연구소에서 연구 시작
  • 1921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 획득
  • 1922–1935라듐연구소 부소장 겸 화학부장
  • 1936–1950라듐연구소 소장
  • 1940과학아카데미 우라늄 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43, 1946, 1949스탈린상 3회 수상
  • 1945레닌그라드대학에 소련 최초의 방사화학 강좌 개설

레프 모이세예비치 크비트코

Лев Моисеевич Квитко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0–1952 ✕ 처형

소비에트 유대 문화를 노래한 이디시 시인

그의 시 「에텔레」는 나치가 살해한 유대인 희생자를 이디시어와 유대적 기억으로 애도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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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키예프에서 첫 시 발표, 첫 시집 《노래들》 출간
  • 1917–1921키예프 그룹의 이디시 시인
  • 1921–1925베를린·함부르크 체류, 독일공산당 가입 및 노동자 선전 활동
  • 1928–1941자전적 운문소설 《젊은 시절》 집필
  • 1941–1948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 및 《에이니카이트》 편집위원
  • 1947–1948문학예술 연감 《헤임란트》 편집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사건으로 수감, 군사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 1952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처형

해리 폴릿

Harry Pollitt
영국 공산당 공산주의 영국 영국 1890–1960 ○ 뇌출혈

스탈린이 직접 승인한 영국 공산당 총비서, 4반세기 동안 당을 이끌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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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CPGB 창립 당원
  • 1924–1929전국소수민족운동(NMM) · 프로핀테른 영국국 사무총장
  • 1929–1939CPGB 총비서 (1기)
  • 1939–1941반전 노선 거부로 총비서직 해임 · 정치국원 잔류
  • 1941–1956CPGB 총비서 (2기)
  • 1956–1960CPGB 의장
세계산업노동자연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90–1964 ○ 자연사

"이스트사이드의 잔 다르크": IWW 반항소녀에서 공산당 첫 여성 의장까지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공공연히 공산주의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범죄 음모단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당면한 요구와 열망에 헌신하는 33년 된 노동계급 정당입니다." — 스미스법 재판 최후 진술, 1952년 4월 24일

미국 노동운동가·공산주의자. 15세에 IWW '반항소녀'로 불리며 로렌스 파업을 이끌고 ACLU 공동 창립에 참여했다. 1961년 CPUSA 첫 여성 의장이 되었고, 사후 모스크바 붉은광장 국장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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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할렘사회주의클럽 첫 연설 직후 체포; IWW 가입
  • 1907–1916IWW 전임 조직가 — 로렌스·패터슨 파업, 미줄라·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 1918노동자방위연합(WDU) 창설 — 간첩법 기소자 법률지원
  • 1920ACLU 공동 창립; 사코-반제티 구명운동 주도
  • 1936CPUSA 입당, 『데일리 워커』 칼럼 집필
  • 1940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ACLU 이사회에서 축출
  • 1951–1955스미스법 위반 유죄 판결 — 올더슨 교도소 2년 복역, 『올더슨 이야기』 집필
  • 1961–1964CPUSA 국가위원회 의장; 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호치민

Hồ Chí Minh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890–1969 ○ 자연사

프랑스, 일본, 미국을 차례로 상대해 베트남 독립을 이끈 혁명가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 대미 항전 라디오 연설(1966)

베트남의 혁명가. 30년 망명 중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베트남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5년 비엣민을 이끌어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미국과 맞서 북베트남을 이끈 독립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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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0선원·노동자로 세계를 떠돌다 프랑스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25《프랑스 식민주의 재판》 출간
  • 1927혁명 교육서 《혁명의 길》 출간
  • 1930베트남공산당 창립
  • 1941–1945비엣민 결성 — 일본·프랑스에 맞선 독립투쟁
  • 1945.9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 선언, 초대 주석
  • 1946–195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디엔비엔푸 승리
  • 1955–1969북베트남 주석으로 통일 전쟁 지도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86 ○ 자연사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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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49, 1953–56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1984출당, 그리고 22년 뒤 복당

V.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91–1918 ✕ 암살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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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파벨 예브게니예비치 라지미르

Павел Евгеньевич Лазими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1–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봉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을 빌려준, 이름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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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군 병원 위생병; 사회혁명당원으로 병사 선전 활동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병사부 의장·군사부 부의장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MRC 규정 초안 기초
  • 1917.11–1918내무인민위원부·군사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보급·위생 조직 총괄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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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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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예브게니 브로니슬라보비치 파슈카니스

Евгений Брониславович Пашуканис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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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 1922스투치카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 공동 창설
  • 1924『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출간 — 법의 상품형태론 정립
  • 1927–1930공산아카데미 정회원 → 부원장
  • 1931–1936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
  • 1936–1937소련 법무부인민위원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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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체르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곡물조달에서 VDNKh까지, 2차 5개년 농업을 이끈 인민위원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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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3–1925도네츠크 현집행위원회 의장
  • 1925–1928우크라이나 SSR 국내무역인민위원
  • 1930–1932소련 공급부인민위원
  • 1933–1934농산물조달위원회(KomzagotSTO) 의장
  • 1934–1937소련 농업인민위원 · 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1–1938 ✕ 처형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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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총살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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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에서 사형 판결, 당일 총살; 1955년 복권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0 ✕ 처형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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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아르카디 마슬로프

Аркадий Маслов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91–1941 ✕ 의문사 (NKVD 암살 추정)

KPD의 초좌익 전환을 이끈 피아니스트 출신 혁명가,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영원한 이단아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아인슈타인·플랑크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1차대전을 겪으며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라 통일전선을 배격하며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였으나, 스탈린과 텔만에게 밀려나 1926년 제명된 뒤로는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길을 헤맨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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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 1924–1925KPD 의장 — 당의 '볼셰비키화'와 초좌익 전환 주도
  • 1924–1926독일 당국 체포·4년형 수감 — 1926년 7월 건강 악화로 조기 석방
  • 1926KPD 제명 — 스탈린과 텔만에 반대,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공동 창립 — 우르반스·피셔와 결성, 곧 탈퇴
  • 1934–1937트로츠키와 협력 — 제4인터내셔널 운동 참여, 국제사무국 활동
  • 1937–1941파리-쿠바 망명 — 트로츠키와 결별 후 국제그룹 결성, 쿠바로 피신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페틀랴코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Петл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2 ✕ 항공사고

샤라슈카에서 태어난 Pe-2: 소련 최고의 전술폭격기를 만든 죄수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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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 1936–37항공공장 수석설계자, ЦАГИ 부소장
  • 1937–40체포·수감, NKVD 샤라슈카에서 VI-100 → Pe-2 설계
  • 1940–42석방, 제22공장 수석설계자 — Pe-2 대량생산, Pe-3 개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51 ○ 심근경색

초기 원자력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물리학자-행정가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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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복무, 공병·기술 부대
  • 1918–1932모스크바대학·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 강사, 물리·생물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32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45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
  • 1934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 공동 발견
  • 1934–195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 1945–1951소련과학아카데미 총재,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드첸코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дченко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56 ○ 자연사

구성주의의 창시자, 소비에트 디자인·광고·사진의 선구자

1921년, 노랑·빨강·파랑 세 개의 단색 캔버스를 전시하며 선언했다: "나는 회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붓을 놓고 생산 예술로 향했다.

소비에트 화가·디자이너·사진가. 구성주의 창시자로서 추상 회화에서 '생산 예술'로 전환, 소비에트 디자인과 사진의 기초를 세웠다. 급진적 앵글의 사진과 마야콥스키와의 포스터로 혁명기 시각 문화를 혁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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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4카잔 예술학교 수학
  • 1916모스크바로 이주, 타틀린의 〈잡화점〉 전시 참가
  • 1918–1921인민교육위원회 미술국 박물관 사무소장
  • 1920–1930Vkhutemas-Vkhutein 교수
  • 1921–1924예술문화연구소(Inkhuk) 활동, 칸딘스키 후임 의장
  • 1923–1928LEF 및 Novy LEF 잡지 아티스트, 마야콥스키와 협업
  • 1925파리 만국박람회 〈노동자 클럽〉으로 은메달 수상
  • 1928–1932사진 그룹 '10월(Oktyabr)' 창립 멤버
  • 1933벨로모르 운하 건설 촬영, 〈건설중인 소련〉 디자인
  • 1938–1942서커스 연기자 촬영 및 회화로 복귀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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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65 ○ 자연사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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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

마리야 아키모브나 볼로디체바

Мария Акимовна Володич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레닌의 업무서기, 마지막 구술의 기록자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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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 1924–1928V.I. 레닌 연구소(후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고르바토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Горб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콜리마에서 살아 돌아와 베를린을 점령하고, 스탈린 시대 억압을 증언한 육군 대장

돈바스 탄광 갱목용 목재를 금지령을 어기고 반출한 사건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리사욕이 없었음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전해진다.

1891년 블라디미르현 파호티노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2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을 받으며 상급 하사관까지 올랐다. 1919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에서 기병연대장과 바슈키르 기병여단장을 지켰으며, 1937년 해임되고 1938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3월 석방되었으며, 1943년부터 종전까지 제3군을 지휘했고 1945년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를 지휘하고 1955년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1964년 회고록으로 1930년대 대숙청을 상세히 밝힌 초기 소련 국가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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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817 체르니고프 후사르 연대, 1차대전 참전 —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게오르기 메달
  • 1919–21붉은군대 입대, 58기병연대장·바슈키르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적기훈장
  • 1933–37제4 투르케스탄 산악기병사단장, 제2기병사단장 (1935년 콤브리그)
  • 1938–41체포·고문, 콜리마 수용소 15년형 선고 (1939), 1941년 3월 복권·석방
  • 1941–43제226소총사단장, 제24군 부사령관, 제20근위소총군단장
  • 1943–45제3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바그라티온·동프로이센·베를린 작전, 소련영웅 (1945.4)
  • 1945–46베를린 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메클렌부르크 소련군정청장
  • 1950–58공수군 사령관 (1950–54),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54–58), 1955년 육군 대장
  • 1958–73국방부 감찰총국 감찰고문, 1964년 회고록 《내 생애의 세월》 출간

얼 러셀 브라우더

Earl Russell Browder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91–1973 ○ 자연사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이라 선언하고, 당을 스스로 해산한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이다.” — 1938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성조기와 적기를 함께 걸며

캔자스 출신으로 15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얼 브라우더는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을 내걸고 1944년 당을 해산하는 '브라우더리즘'을 추진했으나, 1946년 제명 후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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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미국 사회당 입당 (16세)
  • 1912사회당 분열로 탈당, 신디칼리스트 동맹 참여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간첩법 위반 혐의 체포, 2년형 복역
  • 1920미국 통일공산당 입당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RILU) 창립대회 미국 대표단으로 모스크바 파견
  • 1926–1929RILU 범태평양 노동조합 사무국 서기 — 상하이 주재
  • 1930미국 공산당 정치국 서기 — 사실상의 당 지도자
  • 1932–1945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위원 선출
  • 1936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 공산당 후보
  • 1940여권 사기 혐의로 4년형 선고; 대선 재출마
  • 1942.5루스벨트 대통령의 감형으로 14개월 복역 후 석방
  • 1944제12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해산 결의 통과 — '공산주의정치협회' 창설
  • 1945.7제13차 당대회에서 브라우더리즘 노선 폐기, 당 재건
  • 1946.2미국 공산당 제명
  • 1958『마르크스와 미국』 출간 — 미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적용 불가 주장

즈데네크 피를링게르

Zdeněk Fierlinger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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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 19482월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주도하고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 1948–1953부총리를 지냈다.
  • 1951–1953종교사무 국가국 장관을 지냈다.
  • 1953–1964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다.
  • 1968프라하의 봄 개혁을 지지했으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했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1–1979 → 수용 10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의 개척자

벤야민은 『일방통행로』(1928)를 이렇게 헌정했다: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이름 붙여졌다, 기술자로서 이 거리를 저자를 관통해 낸 그녀의 이름을 따서.」

라트비아 출신 연극연출가.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을 개척했고, 1924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으며 브레히트·피스카토어와 협업했다. 수용 10년 후 발미에라 극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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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모스크바 코미사르젭스키 연극학교 수학; 라트비아 난민학교 교사
  • 1918–1920오룔 실험아동극장 설립·운영, 프롤레타리아 아동극 방법론 개척
  • 1920–1924리가 인민대학 연극스튜디오 책임자; 뮌헨에서 브레히트 『에드워드 2세』 조연출; 카프리에서 벤야민과 만남
  • 1925–1930리가·베를린·모스크바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아동영화관·소련 영화 수출 활동
  • 1930–1935피스카토어 영화 『산타바바라 어부들의 반란』 조감독; 라트비아 국립극장 연출; 『독일 혁명연극』 출간
  • 1938–1948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서 10년간 수용·유형
  • 1950–1957발미에라 드라마극장 주임연출; 1955년 복권, 1956년 당적 회복

에프라임 마르코비치 스클랸스키

Эфраим Маркович Скля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25 ✕ 의문의 익사

트로츠키의 카르노, 적군의 행정 두뇌이자 삭제된 창건자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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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의대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6–1917징집, 보병 복무 후 군의관; 5군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2차 소비에트 대회 상임위원
  • 1917–1918총참모부·최고사령부 정치위원, 구군 해체 및 군수물자 보존 책임
  • 1918.3–9공화국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 1918–1924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인민위원 대리 — 적군 행정·작전 총괄
  • 1924–1925해임, 모스수크노 국영섬유트러스트 관리국장
  • 1925독일·프랑스·미국 기술정보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익사

표트르 이오노비치 바라노프

Пётр Ионович Бар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2–1933 ✕ 항공사고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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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루마니아 전선 병사대표소비에트 전선부 의장; 제4도네츠크군 사령관
  • 1919–1921제8군·동부전선 남부집단·투르케스탄 전선·제1군·제1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크론슈타트 진압 참가(적기훈장)
  • 1921–1922투르케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바스마치 토벌 지휘(호레즘 공화국 군사훈장)
  • 1923–1924노농적군 기갑부대장 겸 정치위원; 공군 부사령관 겸 사령관 대행
  • 1924–1931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 1925년부터 소련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3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체르뱌코프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Черв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37 ✕ 자살

벨라루스 소비에트 국가성의 건설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연방의 설계자

1937년 6월 16일, 당 대회에서 '인민의 적' 색출이 미흡하다고 공개 비난받은 체르뱌코프는 휴회 중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국은 '가정사'라고 발표했다.

1919년 BSSR 수립 선언문에 서명하고 이듬해부터 초대 정부수반 겸 국가원수로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소련 중앙집행위 공동의장, 벨라루스화 정책 주도. 1937년 대숙청 와중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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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5빌렌스크현에서 농촌 교사로 근무, 빌렌스크 교원대학 졸업 (1915)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1916), 소위
  • 1917.5RSDLP(볼셰비키) 입당, 벨라루스 사회민주노동당 창당 지도부 참여
  • 1918.1–6러시아 SFSR 민족문제인민위원부 벨라루스 담당 인민위원 (벨나츠콤)
  • 1919.1벨라루스 임시혁명노농정부 위원으로 BSSR 수립 선언문 서명; 리트벨 SSR 교육인민위원
  • 1920–1924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2–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칼리닌·페트롭스키·나리마노프와 4인 체제)
  • 1924–1937벨라루스 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카를 야노비치 바우만

Карл Янович Бау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제국의 라트비아계 1892–1937 ○ 옥사

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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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프세볼로트 아폴로노비치 발리츠키

Всеволод Аполлонович Бал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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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콘드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ондра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8 ✕ 처형

장기 경제 파동을 발견한 농업경제학자

1924년 정부 연구 여행으로 독일·영국·캐나다·미국을 돌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생산 조직을 연구하던 중 소로킨을 만났고, 소로킨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귀국해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892년 3월 4일(신력 3월 16일) 코스트로마현 키네솀마 우예즈드 갈루옙스카야 마을에서 열 자녀를 둔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경제학자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로, 1905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1906년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15년 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케렌스키의 농업 비서관과 식량차관을 지냈고,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창립해 1928년까지 소장을 맡으며 1923~1928년 농업 장기계획을 주도했다. 1927년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했고 1928년 4월 해임, 1930년 체포되어 1932년 8년형을 받고 1938년 9월 17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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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 차르 체제 하 체포와 투옥
  • 1915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 졸업, 첫 단행본 출간
  • 1917케렌스키 농업비서관, 임시정부 식량차관, 제헌의회 의원
  • 1920–1928콘윤크투라 연구소 창립 소장, 세계경제 순환 연구
  • 1923–1928농업인민위원부·고스플란에서 첫 농업 5개년 계획 수립 주도
  • 1925『대순환』 발표 —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 정식화
  • 1928–19301차 5개년 계획 불균형 비판, 연구소장 해임, 체포
  • 1938수감 8년 뒤 코뮤나르카에서 총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2–1938 ✕ 처형

레닌의 개인비서에서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까지 소비에트 과학행정의 설계자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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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서기, 레닌의 개인비서
  • 1918–1919최고경제회의 과학기술부장
  • 1919–1920제14군·제13군 정치위원 (남부전선)
  • 1920–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
  • 1923–1929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
  • 1932–1935타지크-파미르 원정대장
  • 1935–1937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8 ○ 자살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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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표도르 표도로비치 라스콜니코프

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Раско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9 → 사망

볼가 소함대 사령관에서 망명 비판자로: 스탈린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외교관

1918년 12월, 구축함 스파르타크 호에서 영국군에 나포될 때 — 에스토니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감자 자루 속에 숨었으나, 에스토니아어를 한마디도 못해 정체가 탄로났다.

내전기 볼가·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낸 볼셰비키 해군 지휘관.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38년 소환을 거부하고 망명, 1939년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대숙청을 공개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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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 1912–1914《즈베즈다》·《프라우다》 문학 담당 기자
  • 1917크론시타트 소비에트 부의장, 7월 사건 후 체포·투옥, 10월 석방
  • 1918해군참모부 정치위원, 볼가 소함대 사령관 — 카잔 탈환, '죽음의 바지선' 포로 432명 구출
  • 1919–1920영국군 포로(런던 브릭스턴), 교환 후 볼가-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엔젤리 상륙작전 지휘
  • 1920–1921발트함대 사령관, 두 차례 적기훈장 수훈
  • 1921–1924아프가니스탄 주재 전권대표
  • 1928–1930글라브레페르트콤 의장, 《크라스나야 노비》 주필
  • 1930–1938에스토니아·덴마크·불가리아 주재 전권대표
  • 1938–1939소환 거부, 파리 망명; 1939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미르사이드 하이다르갈리예비치 술탄-갈리예프

Мирсаид Хайдаргалиевич Султан-Гал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40 ✕ 처형

이슬람 사회주의와 민족 공산주의의 창안자, 스탈린의 첫 번째 이념적 희생양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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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 1923.5'민족 일탈주의'로 체포·제명; '술탄갈리예프주의' 숙청 시작
  • 1928–1934재체포,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솔로프키 수용소 수감
  • 1937–19403차 체포; 194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총살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2–1940 ✕ 처형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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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41 ✕ 전사

키예프 포위망에서 전사한 남서전선 사령관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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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제국군 징집, 하사관·연대위원장
  • 1918–21붉은군대 입대, 쇼로스 사단에서 대대장·제22연대장
  • 1927–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44소총사단 참모장 등
  • 1934–39카잔 보병학교 교장
  • 1939–40제70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소련영웅 수훈
  • 1940.04–06제49소총군단장
  • 1940–41 (1월)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01–06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 (주코프 후임)
  • 1941.06–09남서전선 사령관 — 브로디·우만·키예프 전투
  • 1941.09.20키예프 포위망 탈출 중 전사

누리야 포즈데라츠

Nurija Pozderac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보슈냐크계) 1892–1943 ✕ 전사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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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s–1930s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폴리카르포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92–1944 ○ 위암

10년간 소련 전투기 전력을 지배한 '전투기 왕'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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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바츨라프 노세크

Václav Nosek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92–1955 ○ 폐암

1948년 2월 비공산당 경찰 간부 해임으로 정부 위기를 촉발시킨 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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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대의원
  • 1929KSČ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41–1942런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위원 → 부의장
  • 1945–1953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53–1955체코슬로바키아 노동사회복지장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Bolesław Bierut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892–1956 ○ 심장마비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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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 1955동독 카를 마르크스 훈장 수훈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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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에스에르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에스에르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에스에르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주크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Ж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57 ○ 자연사

굴라크 수로를 설계한 스탈린 시대의 수석 수력기술자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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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 1932–1933OGPU 정식 간부, 벨로모르-발트 운하 부수석기사
  • 1933–1935모스크바 운하 건설 수석기사
  • 1935–1937우글리치·르빈스크·이반코보 수력발전소 건설 수석기사
  • 1937–1939쿠이비셰프 수력발전단지 건설관리국 수석기사 겸 국장대행
  • 1939–1941NKVD 글라브기드로스트로이 수석기사 겸 제1부국장
  • 1941–1942NKVD 방어공사총국(GUOBR) 수석기사 겸 부국장
  • 1942–1957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 (1942년 설립부터 사망까지)
  • 1944–1957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기술경제평의회 위원
  • 1948–1952볼가-돈 운하·치믈랸스크 수력발전소 수석기사

안드레이 바실리예비치 흐룰료프

Андрей Васильевич Хру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62 ○ 자연사

전쟁 물자를 움직인 보이지 않는 총사령관, 스탈린이 승리의 축배를 바친 유일한 병참 장군

크렘린 승전 축하연. 스탈린이 지휘관들에 대한 건배가 끝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이제 진정한 사령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위대한 전쟁의 일꾼을 위해. 흐룔료프 동지를 위해.」

가난한 대장장이 가문의 소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금세공 도제를 거쳐 소련군 대장과 소련군 후방의 창설자로 올랐다. 1941년 8월 1일 통합병참체계인 소련군 후방(Тыл Красной армии)을 설립하고 종전까지 이를 이끌며, 동시에 1942~1943년에는 교통인민위원으로서 전시 철도를 관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크렘린궁 스탈린 집무실을 113회 방문하며 최고사령관과 직접 물자와 보급을 조율했고, 승전 기념연에서 스탈린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진정한 사령관이자 위대한 전쟁의 일꾼」이라며 흐룔료프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사후 흐루쇼프의 반대를 뚫고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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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제1기병군 제11기병사단 정치위원, 남북전쟁 참전
  • 1930–1936붉은군대 중앙군사재정국장 → 국방인민위원부 총무국장
  • 1939–1941붉은군대 보급국장 → 주병참감부장
  • 1941–1951국방부인민위원 → 붉은군대 후방총국장 (Тыл 창설)
  • 1942–1943소련 교통인민위원 (철도 총괄)
  • 1943대장 진급 (11월 7일)
  • 1955–1957숙청 군 지휘관 98명 재활 주도, 블류헤르 원수 포함
  • 1958–1962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여생을 보냄

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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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7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의 남쪽 집게발을 닫은 기병 출신 사령관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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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국군 징집병, 남서·루마니아 전선에서 하사관
  • 1918–20마르콥카 빨치산 조직, 제1기병군에서 내전 종군
  • 19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8–39제6기병군단장, 폴란드 동부 진주
  • 1941.6–7서부전선군 사령관 대리, 스몰렌스크 방어전에서 부상
  • 1941.8–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타이푼 작전에서 포위·부상
  • 1942.8–1943.1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천왕성 작전 남쪽 집게발
  • 1943–44칼리닌·제1발트·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1944독립연안군 사령관, 크림 해방
  • 1945.3–5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45–58카르파티아·서시베리아·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55소련 원수 진급
  • 1958–70국방부 감찰총감, 회고록 집필

라코시 마차시

Rákosi Mátyás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2–1971 ○ 사망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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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통상 인민위원, 적위대·적군 지휘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25–1940호르티 정권 아래 투옥 (8.5년형 이후 종신형, 1940년 석방)
  • 1940–1945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당 해외국 지도
  • 1945–1948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1956헝가리 노동인민당(MDP)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까지 서기장)
  • 1952–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71소련 강제 망명 (키르기스스탄, 아르자마스, 고리키)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7 ○ 자연사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출발해 18년간 소비에트 문학의 최고 문지기가 된 소설가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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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노비 사티리콘』에 첫 풍자 소품 발표
  • 1914–1918독일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1차대전 기간 체류
  • 1919–1921적군 복무, 입당 후 전업 작가를 위해 탈당
  • 1924『도시와 해』 발표 —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적 장편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로 선출
  • 1949『첫 기쁨』과 『이상한 여름』으로 스탈린상 1등급 수상
  • 1959–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71–1977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튤레네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Тюле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8 ○ 자연사

캅카스의 문을 걸어잠근 기병 장군, 세 전쟁의 증인

1942년 여름, 독일 산악병들이 엘브루스 산에 나치 깃발을 꽂았다. 튤레네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미리 구축해 둔 테레크-그로즈니 방어선은 버텼고, 독일군은 석유에 닿지 못했다.

심비르스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4개 등급의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모두 받은 완전 기사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보과장과 기병여단장으로 싸웠고, 1940년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세 육군대장 중 한 명으로 진급했다. 1941년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나 참패 속에 중상을 입었고, 1942년 2월 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테레크 강과 그로즈니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2~43년 비터를 위한 캅카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바쿠 유전 돌파를 저지한 것이 그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공헌이었다. 전후에는 군관구 사령관과 기병 감찰감을 지냈고, 회고록 『세 전쟁을 넘어』를 남겼으며 1978년 사망 직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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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4등급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완전 기사
  • 1917치스토폴 사관학교 졸업, 10월 혁명 후 적위대 합류
  • 1919–1920제1기병군 정보과장,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1938–1940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0년 육군대장 진급
  • 1941.06–08남부전선 사령관 — 몰도바·우만 후퇴, 드네프르에서 중상
  • 1942–1945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전 지휘
  • 1947–1958육군 기병 감찰감, 군관구 사령관, 전투훈련총국 근무
  • 1958–1978국방성 감찰총감 그룹. 1978년 소비에트연방영웅 수여

요시프 브로즈 티토

Josip Broz Tito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계 1892–1980 ○ 자연사

비동맹을 선택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지도자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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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민족해방투쟁 지도
  • 1945–1980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자
  • 1948스탈린·코민포름과 결별

류보청

刘伯承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2–1986 ○ 자연사

「외눈의 용」, 덩샤오핑과 짝을 이룬 홍군 총참모장이자 회하이 전역의 지휘관

1916년 펑두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고 「외눈의 용」이라 불렸으며,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1948년 11월 회하이 전역을 지휘한 전략가였다.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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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홍군 총참모장
  • 1937–1945팔로군 129사단장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노사카 산조

野坂参三
일본 공산당 공산주의 일본 일본 1892–1993 ○ 자연사

일본공산당을 세 번이나 창설한 국제적 공산주의자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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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유아이카이(우애회) 입회, 기관지 『노동 및 산업』 편집
  • 1920영국공산당(CPGB) 창립 참여, 런던 대표
  • 1922일본공산당(JCP) 창립 참여, 『무산자신문』 편집
  • 1931–1940코민테른 집행위원, 소련·미국·중국에서 대일 정보활동
  • 1940–1945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 지도, 일본군 포로 전향사업 총괄
  • 1946–1950중의원 의원 당선, JCP 중앙위원
  • 1955–1958일본공산당 제1서기
  • 1958–1982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수흐바타르

Сүхбаатар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893–1923 독살설 · 병사설, 미확정

1921년 몽골 인민혁명의 군사 지도자, 사후에 '혁명의 아버지'로 정전화됐다

1921년 2월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월 캬흐타를 점령하고 7월 6일 후레에 입성했으며, 7월 11일 새 정부에서 군사부 장관이 됐다. 이 임명을 1922년 7월로 적는 몽골어권 기록도 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몽골인민당 창립 성원이며, 1921년 혁명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어 후레(오늘날 울란바타르)에 입성했다. 가난한 아랫(평민) 출신으로 활자공과 역참 마부로 일했고, 1919년 후레의 반중국 지하조직에 참여했다. 1920년 소련 방문에 나섰고 1921년 캬흐타에서 총사령관으로 확정됐으며, 같은 해 7월 군사부 장관이 됐고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사후 신격화 경위도 주요 논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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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후레의 지하 반중국 조직에 참여
  • 1920–1921몽골인민당 대원으로 소련 방문
  • 1921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캬흐타 점령과 후레 입성
  • 1921–1923군사부 장관 겸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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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미콜라 흐리호로비치 흐빌로비

Микола Григорович Хвильов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3–1933 ✕ 자살

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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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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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게센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Гессе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6 ✕ 처형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

1931년 런던, 게센은 연단에서 포프의 시를 인용했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프린키피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17세기 상업·산업·전쟁의 기술적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선언했고, 강당은 술렁였다.

소비에트 물리학자·과학사학자. 1931년 런던에서 뉴턴 역학이 17세기 기술·경제적 요구의 산물임을 논증, 과학사회학 외재주의 전통을 열었다.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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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에든버러대·페트로그라드대에서 물리학 수학, 폴리테크닉에서 경제학 병행
  • 1919–1921적군 복무, 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 근무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교원
  • 1924–1928붉은 교수직 연구소 수학, 졸업 후 강의
  • 1928《상대성이론의 기본 이념》 출간
  • 1931런던 국제과학사회의에서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 발표
  • 1931–1934MSU 물리학 교수, 물리학부 초대 학장, NIIF 소장
  • 193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35–1936FIAN 부소장, 《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대소비에트백과사전 편집위원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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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붉은 나폴레옹」: 자신이 만든 군대의 손에 죽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자신감뿐이다. 나는 서른에 장군이 되거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1914년 근위 소위 시절의 서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는 1893년 2월 4일(16일) 스몰렌스크현 알렉산드롭스코예에서 몰락한 귀족 아버지와 농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근위 제1사단 소속으로 부상당하고 다섯 차례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2월 포로가 되었고, 탈출 끝에 1917년 귀국해 1918년 3월 적군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제1군과 콜차크에 맞선 제5군을 지휘했고, 1921년에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하며 포병·항공기와 함께 화학무기 사용을 명령했다. 1925~1928년 참모총장과 1935년 최초의 소련원수 다섯 명 중 한 사람을 지냈으나, 1937년 6월 11일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밤 총살되어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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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025세에 제1군 사령관, 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사령관
  • 1921크론시타트·탐보프 진압 지휘
  • 1925–28참모총장
  • 1931–37군 현대화: 기계화군단, 공수부대, 종심작전 교리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1957비밀 재판 후 처형, 1957년 복권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유대계 1893–1937 ✕ 처형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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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르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ыр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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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

카를 빅토로비치 파우케르

Карл Викторович Паук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스탈린의 경호를 맡은 작전국장

1936년 12월 체카 기념 만찬에서 파우케르는 지노비예프 처형을 재연했다. 두 동료에게 끌려가 무릎 꿇고 "제발 스탈린 동지를 불러주시오!"라 애원했고, 스탈린은 포복절도했다.

렘베르크 출신 유대인 이발사·분장사로, OGPU·NKVD 작전국장과 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를 지내며 대숙청기 체포·처형을 관장했다. 스탈린의 신임을 받았으나 1937년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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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3OGPU 작전국 부국장
  • 1923–1936OGPU·NKVD 작전국장
  • 1924–1937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제1부장
  • 1937체포와 처형

발레리 이바노비치 메즐라우크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Межла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3–1938 ✕ 처형

계획경제의 숫자를 만들다 숙청된 관료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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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s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내전과 경제 행정에서 성장
  • 1931–1934중공업·경제 행정에서 5개년계획 지표 관리
  • 1934–1937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숫자와 배분을 조정
  • 1937대숙청 속에서 체포
  • 1938처형, 계획기관도 숙청의 대상이 됨을 보여줌

야코프 사울로비치 아그라노프

Яков Саулович Агр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3–1938 ✕ 처형

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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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니콜라이 이오시포비치 안토노프-그리추크

Николай Иосифович Антонов-Грицю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3–1939 ✕ 처형

카바르다발카르 트로이카 의장에서 NKVD 감옥부장이 된 체키스트

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 특별 트로이카 의장으로 탄압을 주도한 뒤, 1937~1938년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볼린현 돌스크의 우크라이나인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루카 그리추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8년 입당해 두브로비차 봉기를 조직했다. 1920년부터 체카에서 일하며 튜튜닉 장군을 폴란드에서 끌어낸 작전에 참여했다. 1934~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를 이끌며 공화국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부터 NKVD 감옥부 부부장,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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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두브로비차 봉기의 조직자·지도자로 활동한 뒤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 1920–1934체카·GPU·OGPU에서 근무했고, 카바르다발카르 OGPU 지역부서장까지 올랐다.
  • 1934–1937카바르다발카르 자치주·공화국 국가보안부서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 1937–1938카바르다발카르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뒤 소련 NKVD 감옥부 부부장과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 1938–1939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44 ○ 병사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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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보이틴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Войтин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53 ○ 자연사

중국 공산당 창당을 산파한 코민테른 첫 중국 특사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와 당 건설 문제를 논의하며 "중국의 신사조 운동은 분분하지만 아니키즘, 생디칼리즘, 사회민주주의, 길드 사회주의가 난립해 주류가 없고, 글 쓰고 공론만 할 뿐 실천이 전혀 없다. 이래서는 중국 혁명을 추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민테른의 첫 중국 대표로 1920년 리다자오·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했다. 소환 후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중국학의 창시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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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8미국·캐나다 이주 노동, 미국 사회당 활동
  • 1918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백군 체포, 사할린 종신 유형, 수감자 봉기로 탈출
  • 1920–1927코민테른 집행위 극동부장·중국 대표, 중국 공산당 창당 지원
  • 1926코민테른 극동국(상하이) 의장
  • 1927–1929이르쿠츠크 경제 부문 근무
  • 1929–1934모스크바 동양학, 적색노조인터내셔널 태평양서기국 서기
  • 1934–1953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소련과학원 연구원, 중국학 저술

아나 파우케르

Ana Pauker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유대계 루마니아인 1893–1960 ○ 암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자 루마니아 공산당 「모스크바파」의 수장, 1952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숙청으로 몰락하다

1952년 5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게오르기우데지는 파우케르·루카·제오르제스쿠를 「반당 분파」로 규탄하고 파우케르를 정치국에서 제거했다. 데지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온 뒤였고, 슬란스키 재판으로 동유럽 전역에 유대인 공산주의자 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바슬루이 지방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하나 라빈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어 교사로 일하다 191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1년 루마니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이듬해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며, 1941년 소련과의 죄수 교환으로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밑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1947년 11월 외무장관에 올라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 되었다. 바실레 루카·테오하리 제오르제스쿠와 함께 이른바 「모스크바파」를 이루어 감옥파의 게오르기우데지와 당권을 다투었으나, 1952년 5월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데지에 의해 「우편향」과 「좌편향」을 동시에 범했다는 죄목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나고 7월 외무장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풀려나 재판 없이 당적을 잃었고, 정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미국 『타임』이 1948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성」으로 표지에 올린 인물이지만, 로버트 레비의 연구는 그가 강제 집단화에 제동을 걸고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해 데지보다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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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사회민주당 입당
  • 1921루마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35–1936체포,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
  • 1941죄수 교환으로 소련행, 코민테른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 지도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외무장관
  • 1952정치국 제거, 외무장관 해임
  • 1953–1954체포, 스탈린 사후 석방, 당적 박탈

팔미로 톨리아티

Palmiro Togliatti
이탈리아 공산당 공산주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1893–1964 ○ 자연사

「일 미리오레(Il Migliore)」: 40년간 서유럽 최대 공산당을 이끈 전략가

죽음을 앞두고 쓴 '얄타 각서'로 모스크바로부터의 자율, 다중심주의를 제창하다 (1964)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서기장. 코민테른 인민전선을 주도했고 1944년 살레르노 전환으로 반파시스트 연정 참여를 이끌었다. 임종 직전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를 제창,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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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이탈리아공산당(PCd'I) 창립 참여
  • 1927–1964당 서기 — PCI를 서유럽 최대 공산당으로
  • 1935–1939코민테른 집행부,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지도
  • 1944살레르노 전환 — 반파시스트 연립정부 참여
  • 1946–1948제헌의회 '헌법의 아버지', 1948년 암살 미수 생존
  • 1964얄타에서 사망 —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 제창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93–1973 ○ 자연사(뇌졸중)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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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파리·프라하·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활동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마오쩌둥

毛泽东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청 제국 출생, 중화민국 시기 활동,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중국 후난성 샤오산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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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구레비치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Гур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76 ○ 자연사

MiG의 공동 창립자: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소련 최고의 전투기 설계자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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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악셀 이바노비치 베르그

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핀란드·스웨덴·독일계 1893–1979 ○ 자연사

소련 레이더를 세우고 사이버네틱스를 부흥시킨 과학자-제독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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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 1943–1944전기공업 부인민위원; 전연방 레이더 과학연구소 창설·초대 소장
  • 1943–1947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 (위원장: 말렌코프)
  • 1953–1957소련 국방차관
  • 1953–1955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연구소 초대 소장
  • 1959–1979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

쑹칭링

宋庆龄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3–1981 ○ 자연사

쑨원의 부인으로 국민당 좌파에 남아 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이 된 인물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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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9–1975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3–1986 ○ 자연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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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유대계 가정, 현 우크라이나 출생) 1893–1991 ↓ 실각 1957

스탈린의 강경 집행자 '아이언 라자르'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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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24조직지도부, 임명과 배치 실무
  • 1928–39중앙위 서기,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 지원
  • 1957반당 그룹으로 실각
  • 1925–28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
  • 1935–42, 1943–44철도 인민위원
  • 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61당 제명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조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몰도바 1894–1920 ✕ 화형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볼셰비키 혁명가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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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제국군 소위 임관, 크라스노야르스크 제15시베리아소총연대 배속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 군인부 의장; 전러시아 소비에트 제1차 대회 대표
  • 1917–1918이르쿠츠크 군사사령관; 첸트로시비리 위원
  • 1918자바이칼(다우리아) 전선 사령관 — 세묘노프 백군 격파
  • 1918–1919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 극동지역당 위원
  • 1919프리모리예 유격대 총사령관
  • 1920블라디보스토크 봉기 조직; 극동임시정부 군사평의회 부의장

블라디미르 키리아코비치 트리안다필로프

Владимир Кириакович Триандафил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튀르키예 1894–1931 ○ 순직

「소련 작전술의 아버지」: 종심작전 교리의 설계자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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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 1918–23붉은 군대 입대, 남북전쟁 여단장; 군사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24–28참모본부 제1(작전)부장, 작전총국장 — 프룬제의 발탁
  • 1926『현대군의 작전 규모』 출간 — 작전술의 기초 개념 제시
  • 1928–31붉은 군대 부참모총장 (1929–30년 제2소총군단장 겸임)
  • 1929『현대군 작전의 성격』 출간 — 종심작전 이론의 결정판
  • 1931근무 비행 중 항공 사고로 순직, 유해 크렘린 성벽 안치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골로데트

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Голодед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4–1937 ✕ 심문 중 투신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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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 1937.6.14모스크바에서 체포, 민스크 이송; 6월 21일 NKVD 심문 중 사망
  • 1956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얀 보리소비치 가마르니크

Ян Борисович Гамарн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37 ✕ 자살

숙청을 지지한 붉은 군대 정치수장, 숙청이 닥치자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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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LP(b) 입당, 키예프 아르세날 공장 선전 활동
  • 1917–1918키예프 볼셰비키 위원장; 1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오데사 현당위원장; 제12군 남부집단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1923키예프 현 혁명위원회 위원장 겸 현 집행위원회 위원장
  • 1923–1928극동혁명위원회 위원장; 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28–192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9–1937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국방인민위원 제1부위원
  • 19375월 30일 해임 통보, 다음날 권총 자살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안티포프

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Анти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38 ✕ 처형

스탈린의 간부 임명 기구를 움직인 통제 관료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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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당 위원,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간부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5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
  • 1925–1926우랄 지역당 제1서기
  • 1926–1927레닌그라드 당 제2서기, 북서부국 서기
  • 1928–1931소련 체신인민위원
  • 1931–1934노동농민감독 부인민위원,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5–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인민위원회의·노동국방회의 부의장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자콥스키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Зак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레닌그라드의 해머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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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라트비아 볼셰비키 활동, 체포와 유형
  • 1918–1921체카 전권대표, 전선 특별부서장
  • 1921–1925우크라이나 포돌·오데사 GPU 의장, 몰도바 전권대표
  • 1926–1932시베리아·서시베리아 OGPU 전권대표, 특별3인조 의장
  • 1932–1934벨라루스 OGPU 전권대표, 벨라루스 NKVD 인민위원
  • 1934–1938레닌그라드 NKVD 수장, 키로프 사건 수사·대규모 추방
  • 1938.1–1938.4내무부인민위원·모스크바 NKVD 수장
  • 1938.4–1938.8해임·체포·총살, 복권 거부

레프 예피모비치 마랴신

Лев Ефимович Марьяс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스탈린이 '우리의 붉은 은행가'라 부르고서 일주일 만에 내친 고스방크 총재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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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
  • 1918–1920전러시아 총참모부 프세보부치 부서장
  • 1920–1921보로네시 시당위원장, 오룔 현당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23투르케스탄 ASSR 중앙경제회의 의장
  • 1923–1924최고경제회의(ВСНХ) 중앙경제관리국 무역·금융정책 부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정보통계부장, 중앙위원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
  • 1928–1930적색교수양성소 수학
  • 1934–1936국가은행 총재, 재정부인민위원, 노동국방평의회 위원

에두아르트 페트로비치 베르진

Эдуард Петрович Берз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콜리마 금광의 굴라그를 설계한 라트비아 출신 체키스트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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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 1918.11RKP(b) 입당
  •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 1931.11달스트로이(Дальстрой) 초대 국장 임명
  • 1932.02나가예바 만에 상륙, 마가단 건설과 콜리마 금광 개발 개시
  • 1935.03금 채굴 계획 달성으로 레닌 훈장 수훈
  • 1937.04사단인텐단트(дивинтендант) 특별계급 수여
  • 1937.12휴가차 모스크바行, 12월 19일 체포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바레이키스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Варейки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4–1938 ✕ 처형

집단화와 대숙청의 지역당 보스, 스탈린에게 '간첩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듣다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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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01–1918.0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 · 당 지역위 서기
  • 1918.06–1920.08심비르스크 현당위원회 위원장
  • 1920–1921비텝스크 현집행위원회 위원장 · 식량인민위원
  • 1921–1923바쿠 소비에트 부의장
  • 1923.08–1924.02키예프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4.02–1924.10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책임서기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4.10–1926.01중앙위 출판부장 ·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편집장
  • 1926.01–1928.04사라토프 현당위원회 서기
  • 1928.08–1934.06중앙검은토지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30–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
  • 1934.06–1935.03보로네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5.03–1936.12스탈린그라드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01–1937.10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10체포
  • 1938.07.29사형선고 후 총살 (코무나르카)

투라르 리스쿨로비치 리스쿨로프

Турар Рыскулович Рыск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카자흐스탄 1894–1938 ✕ 처형

통합 투르키스탄을 주장한 카자흐인 볼셰비키 전략가, 민족 획정에 맞선 목소리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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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 1919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국(Мусбюро) 의장
  • 1920.1–8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9바쿠 동방민족대회 대표; '동방행동평의회' 간부 선출
  • 1921–1922RSFSR 민족인민위원부(Наркомнац) 전권대표(아제르바이잔) → 부위원
  • 1922–1924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통합 투르키스탄론 주창, 1923년 스탈린과 공개 논쟁
  • 1924–1925코민테른 전권대표로 몽골 인민공화국 파견
  • 1926–1937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투르크시브 철도·카라간다 산업화 주도, 1932–1933년 카자흐 기근 구호 개입

세르게이 나우모비치 미로노프

Сергей Наумович Мир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94–1940 ✕ 처형

서시베리아에서 대량작전의 포문을 연 '북캅카스인' 체키스트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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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8–1921붉은군대 입대, 국내전 참전
  • 1921–1931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1–1933카자흐스탄 OGPU 전권대표부 부대표
  • 1933–1936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GPU·NKVD 지도자
  • 1936–1937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
  • 1937서시베리아 트로이카 의장, 레닌훈장 수훈
  • 1937–1938몽골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8–1939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
  • 1939–1940체포, 총살

파벨 세묘노비치 리발코

Павел Семёнович Рыбал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48 ○ 신장병

스탈린그라드에서 프라하까지, 3근위전차군을 이끈 두 번의 영웅

쿠르스크 전투 중, 리발코의 차량에 독일 공군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운전병과 부관이 쓰러졌고 차는 구덩이에 빠졌지만, 리발코는 상처 하나 없이 일어나 다른 차로 갈아타고 작전을 계속했다.

평기병에서 출발해 제3근위전차군을 이끌고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진격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다섯 번 부상당했고,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중 53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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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82보병사단, 프셰미실 공방전·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부상
  • 1917–1922적위대·적군에서 파르티잔 지휘관, 연대장, 여단 정치위원으로 내전 종군, 다섯 차례 부상
  • 1931–19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이후 중국 신장에서 군사고문(1934–1935)
  • 1937–1939, 1940소련 주폴란드·주중국 무관
  • 1942–1943제5전차군·제3전차군 사령관,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 성공, 중장 진급
  • 1943–1945제3근위전차군 사령관 — 쿠르스크, 드네프르, 키예프, 르보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 1943, 1945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47–1948소련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표도르 이바노비치 톨부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олбу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49 ○ 당뇨

발칸을 해방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가장 아낀 원수

「톨부힌 원수는 전쟁을 장인이 아닌 정밀과학으로 여겼다. 서구적 합리성과 동방적 직관을 결합해, 수가 아닌 기술로 승리했다.」 — 보리스 슬루츠키

농민 출신 장교로 스탈린그라드에서 57군을 지휘했고, 제3·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발칸 해방을 이끌었다. 신중한 작전 설계로 병사 희생을 최소화했으며, 사후 소련영웅을 받은 유일한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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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참모대위까지 진급, 성 안나·스타니슬라프 훈장
  • 1918–1922적군 입대, 제56소총사단 참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크론슈타트 진압·카렐리아 전역
  • 1938–1941자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이란 진주 작전 기획
  • 1942–1943제57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방어·반격; 제68군 사령관
  • 1943–1944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돈바스·멜리토폴·크림 해방
  • 1944–1945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야시-키시뇨프·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발라톤·빈 작전, 원수 진급
  • 1945–1947남부군집단 총사령관 (루마니아·불가리아), 연합통제위원회 불가리아 의장
  • 1947–1949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도쿠다 규이치

徳田球一
일본 공산당 공산주의 일본 일본 (오키나와) 1894–1953 ○ 사망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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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일본공산당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8–1945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8년 복역 (아바시리·지바·도요타마·후추 형무소)
  • 1945일본공산당 서기장 (초대)
  • 1946–1950중의원 의원 (3선, 도쿄 3구)
  • 1950–1953중국 망명, 베이징기관 조직 및 무장투쟁 지휘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

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894–1953 ○ 자연사

목수 아들에서 대장으로, 만주 작전을 지휘한 모르드바인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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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사라토프 준사관학교 졸업
  • 1918붉은 군대 입대, 중대장 · 대대장
  • 1936제1차량화소총사단장
  • 1938–1939벨라루스 군관구 참모장
  • 1939–1940소련 주재 독일 무관
  • 1940–1941키예프 특별군관구 참모장 → 남서전선군 참모장
  • 1941–1942제60군 · 제3충격군 사령관
  • 1942–1943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 1943–1945극동전선군 →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만주 작전 지휘
  • 1945–1947극동군관구 사령관
  • 1947–1952극동군 총참모장 · 제1부사령관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4–1955 ✕ 처형

제정군 장교에서 베리야의 비공식 집행자가 된 국가보안 장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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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도브젠코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Довженко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56 ○ 심장마비

〈대지〉의 시인: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서정적 몽타주로 노래한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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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 1948〈미추린〉 발표, 두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50–1956모스필름에서 활동, 유작 〈바다의 시〉 시나리오 집필 중 심장마비로 사망

세묜 일리치 보그다노프

Семён Ильич Богд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60 ○ 뇌졸중

베를린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갑군 사령관, 스탈린 사후 밀려나다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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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 1930–1938연대장·기계화여단장, 1938년 체포·수감
  • 1940–1943복권 후 전차사단장·기계화군단장,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 참전
  • 1943–1947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베를린 최초 진입 부대 지휘
  • 1948–1953소비에트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 1953–1956제7기계화군 사령관 → 기갑군사관학교장,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

야코프 일리치 골레프

Яков Ильич Го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60 ○ 자연사

전후 재건기에 고스방크를 이끈 재정 기술관료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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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붉은 군대 복무
  •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 1937–1939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부 계획부 부장 · 재정 담당
  • 1939–1940소련 농업은행 총재
  • 1940–1941소련 재무 부인민위원
  • 1941–1945소련 재무 제1부인민위원
  • 1945–1948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
  • 1948–1952소련 재무부 차관 겸 농업은행 총재
  • 1953–1959소련 농업은행 총재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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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오토 그로테볼

Otto Grotewohl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94–1964 ○ 자연사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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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토도르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Тодо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65 ○ 자연사

레닌이 '놀라운 책'이라 칭송한 베세곤스크의 소비에트 연대기 작가

레닌은 1919년 『프라우다』에서 토도르스키의 지방 소비에트 경험담을 두고 "이 훌륭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말들을 돌에 새겨 모든 경제위원회와 공장에 걸어두어야 한다"고 썼다.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1918)으로 레닌의 극찬을 받은 소비에트 군사교육 지도자.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을 지냈고, 대숙청 때 15년간 수감된 후 복권되어 투하쳅스키 평전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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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제국군 장교, 1차대전 참전, 대위까지 진급, 6개 전투훈장 수훈
  • 1918베세곤스크 현 신문 편집자 겸 당 선동부장,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 출간
  • 1919–21붉은 군대 사단장, 다게스탄 반란 진압 작전 지휘
  • 1923–24투르케스탄 전선 페르가나 지역군 사령관, 바스마치 진압 작전
  • 1927–33제5소총군단장, 독일 제국군 참관 훈련
  • 1933–3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 겸 정치위원, 콤코르(1935) 진급
  • 1936–38적군 고등군사교육국장
  • 1955–65복권 후 중장 진급 및 은퇴, 회고록과 투하쳅스키 평전 집필

이반 스테파노비치 이사코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Ис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4–1967 ○ 자연사

한쪽 다리를 잃고도 두 전쟁을 치른 소련 해군의 학자 제독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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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해군사관학교 졸업, 발트함대 구축함 이쟈슬라프에서 복무
  • 1918발트함대 빙상 항해 참가
  • 1922–1928흑해함대 작전부장 등 참모직 역임
  • 1937–1938발트함대 사령관
  • 1938–1939해군 부인민위원 겸 해군대학교장
  • 1939–1946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40–1942해군 주참모부장
  • 1942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 투압세에서 중상으로 다리 절단
  • 1946–1947해군 주참모부장
  • 1947–1950해군 부총사령관
  • 1955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 진급
  • 1958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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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71 ↓ 실각 1964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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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자루빈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Зару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4–1972 ○ 자연사

게슈타포 첩자를 운용한 소련 원자력 스파이의 대미 레지던트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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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참전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남부전선 참전
  • 1920–1925체카·OGPU 내부보안·경제부서 근무 (블라디보스토크)
  • 1925–1927INO OGPU 합법 레지던트: 중국, 핀란드
  • 1927–1929비합법 레지던트: 덴마크, 독일 (체코인 신분)
  • 1929–1933비합법 레지던트: 프랑스 (암호명 '베티')
  • 1933–1937비합법 레지던트: 베를린, 게슈타포 요원 빌리 레만 운용
  • 1939–1940NKVD 장교,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 심문
  • 1941NKGB 제1총국 부국장, 중국 특수임무 (발터 슈테네스 접촉)
  • 1941–1944NKVD/NKGB 대미 수석 레지던트 (신분: 부영사 바실리 주빌린)
  • 1945–1948NKGB/MGB 대외정보 부국장 겸 비합법정보 부국장
  • 1948건강 문제로 예편, 이후 KGB 훈련기관 강사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Илью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77 ○ 자연사

일류신 설계국 창립자: Il-2 스투르모빅,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투기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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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8러시아군 항공부대 정비사, 조종사 자격 취득
  • 1919–21붉은군대 항공기 수리열차 정비사·정치위원
  • 1921–2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군 항공기사
  • 1926–31공군 과학기술위 항공부문 위원장
  • 1931–33ЦАГИ 설계국장
  • 1933–70일류신 설계국(ОКБ) 수석설계사·총설계사
  • 1967–77공병기술대장(상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

Friedrich Ebert junior
동독 공산주의 독일 독일계 1894–1979 ○ 자연사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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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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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Пётр Леонидович Капиц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4 ○ 자연사

베리야를 거부하고 초유동성을 발견한 노벨상 물리학자

지난 20년을 보면,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세계 기술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들은 모두 해외에서 발전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확실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받아들였다. —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6년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했고 1934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37년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발견, 베리야의 원자탄 프로젝트 지휘를 거부했다.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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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4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자기연구 부소장·몬드 연구소장
  • 1934–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 1943–1946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산소총국(글라프키슬로로드) 국장
  • 1945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 — 베리야의 지휘 방식을 거부하고 사임
  • 1946–1955해임 및 사실상의 가택연금 — 자택 실험실 '물리문제의 오두막'에서 연구 지속
  • 1955–1984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복권)
  • 1957–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이반 미하일로비치 그론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Гро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5 ○ 자연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스탈린과 함께 만든 문학 정치위원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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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사회혁명당 맥시멀리스트 당원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32'사회주의 리얼리즘' 용어 창안 (5월, 스탈린과의 대화)
  • 1932–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
  • 1932–1937《노비 미르》 편집장
  • 1933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 설립
  • 1938–1954체포 · 15년형 · 수용소 및 유형
  • 1954–1985복권 ·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파파닌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Папа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6 ○ 자연사

유빙 위에서 북극을 기록한 소련 극지 탐험의 얼굴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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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러시아 제국 해군 징집
  • 1918–1920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 활동, 내전 참전
  • 1920–1922크림 체카 사령관, 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 군사령관
  • 1923–1932통신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2–1933프란츠요제프 제도 티하야만 극지기지장
  • 1934–1935첼류스킨곶 극지기지장
  • 1937–1938세계 최초 유빙기지 '북극점-1' 대장
  • 1939–1946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북부 해상수송 전권대표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학연구소 부소장
  • 195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
  • 1952–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내수생물학연구소장 (겸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쇼르스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Щор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19 ✕ 전사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로 지목한 전설의 붉은 군대 사단장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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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 1919.8제44소총병사단으로 통합, 사단장 임명. 코로스텐 철도 교차점 방어로 키예프 철수 엄호.
  • 1919.8.30빌로시치 인근 전투 중 후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사, 향년 24세. 사마라에 안장.

라리사 미하일로브나 레이스네르

Лариса Михайловна Рейсне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5–1926 ○ 장티푸스

혁명의 발키리. 시인, 정찰대원,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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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 1925『석탄, 철,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 및 『데카브리스트의 초상』 출간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경제 파괴 사건을 만들어 낸 부인민위원

1934년 미국 《타임》지는 프로코피예프를 "공장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사보타주'로 총살하는 일을 관장하는" OGPU 산업 담당 인민위원으로 묘사했다.

OGPU 경제국장으로 소련 기술 전문가들을 겨냥한 '파괴 공작' 사건들을 조작한 체키스트. NKVD 제2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야고다 실각 후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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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6OGPU 비밀국장, 이어 정보국장
  • 1926–1931OGPU 경제국장
  • 1932–1934OGPU 부의장
  • 1932–1934노농민병대 총국장 겸임
  • 1934–1936내무 제2부인민위원
  • 1936–1937체신 제1부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로베르트 페트로비치 에이데만

Роберт Петрович Эйде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인 1895–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재판의 피고인이 된 라트비아 출신 내전 영웅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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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키예프 군사학교 졸업, 16시베리아 예비연대 소위
  • 1917–1918중앙시베리아 집행위원회 부의장, 볼셰비키 입당
  • 1918–1920내전: 제16·41·46소총사단장, 제13군 사령관, 카홉카 방어
  • 1924–1925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1932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군사위원
  • 1932–1937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
  • 1937체포(5.22), 투하쳅스키 재판 피고, 총살(6.12)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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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카민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Кам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 예방의학의 창시자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와 베리아를 비판했다고 여러 회고록이 전하는데, 해당 회의는 속기록이 남지 않아 발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 10월 20일(구력)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영어권 연구는 11월 1일생으로만 적는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툴라에서 「콤무나르」를 창간하고 시·주 소비에트와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되었다.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1925년에는 쿨라크의 협동조합 가입을 막는 데 반대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를 비판하고 베리아 관련 자료를 제출한 뒤 6월 25일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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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1915년 모스크바대 의대 입학(2개 학년 수료), 툴라 볼셰비키 서기
  •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림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를 추진
  •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1934.2–1937.3), 소련 위생총감(1935년부터),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

Семён Петрович Ур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5–1938 ✕ 처형

소련 군사정보를 확장하고 대숙청에 삼켜진 GRU 수장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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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1920오데사 붉은위병 조직, 내전기 기병여단장·제2기병군 여단장
  • 1920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부 정보국 작전과장
  • 1922–1924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
  • 1927–1930제20소총병사단장, 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참모장
  • 1931–1932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5. 4 – 1937. 6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 1937. 6 – 1937. 11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

파벨 페트로비치 불라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Бул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야고다의 비서로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다 스스로 피고가 된 체키스트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피고들의 진술을 짜고 연습시켰으며, 이듬해 숙청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펜자현 인사르의 산림 감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프리놉스키의 도움으로 적위대 사무소에 들어갔고 1921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1929년 알마아타에 유배된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오데사로 옮겨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오게페우 참사회와 NKVD의 비서,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로 야고다의 신임을 받았고,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피고마다 진술을 연습시켰다. 1937년 3월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불리한 상세한 진술을 한 뒤 1938년 3월 15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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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펜자현 체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해 말 전러시아 체카 비밀정치부로 옮겼다.
  • 1929알마아타에서 유배 중이던 트로츠키를 오데사로 비밀리에 이송하고 소련에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 1929–1934오게페우 참사회 비서, 이어 제1비서를 지냈다.
  • 1934–1937NKVD 비서와 NKVD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대본을 작성하고 피고들의 진술을 연습시켰으며, 1937년 3월 해임·체포되었다.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대한 증언을 한 뒤, 3월 13일 사형을 선고받아 15일 총살되었다. 1988년 사후 복권되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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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9내무인민위원
  •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1940체포, 처형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체사르스키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Цеса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유대계) 1895–1940 ✕ 처형

대숙청의 회계장부를 쥐었던 예조프의 심복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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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활동가
  • 1930–1935당 중앙위 배치부·공업부 실무 간부
  • 1935–1937당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
  • 1936.10–11내무인민위원 직속 특임전권위원
  • 1936.11–1938.3GUGB 제8부(회계등록)부장 · 「앨범」 심사·명부 실무
  • 1938.3–5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5–9모스크바주 NKVD 국장
  • 1938.9–12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

이사크 일리치 샤피로

Исаак Ильич Шапир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40 ✕ 처형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를 관리한 예조프의 비서실장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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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적군 정치위원 — 여단 코미사르
  • 1922–1929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부·고스플란 근무
  • 1930년대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부장, 당 중앙위 기구 부문장
  • 1937.1–7NKVD 비서실 부실장
  • 1937–1938NKVD 비서실장(겸임) · GUGB 제9특별부장
  • 1938.3–11NKVD 제1특별부장 — 작전 기록·등록·통계 총괄
  • 1937–1938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이즈라일 야코블레비치 다긴

Израиль Яковлевич Да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북캅카스 NKVD 국장에서 정부 경호부장으로, 대숙청 집행자

1938년 11월, 정부 경호부장 다긴은 베리야의 NKVD 내부 숙청으로 체포되었다. 크렘린을 지키던 자가 루뱐카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예브도키모프의 측근으로 북캅카스 NKVD에서 대숙청기 대량 체포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정부 경호부장으로 크렘린을 지키다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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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차르군 복무, 적위대·지하당 활동
  • 1919–1924니콜라예프·헤르손·크림 체카 주요 직책
  • 1924–1934북캅카스 OGPU에서 테르스크 주·변경주 보안 책임자로 승진
  • 1934–1937북캅카스(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4–1937.6고리키 주 NKVD 국장
  • 1937–1938GUGB NKVD 제1부(정부 경호) 부장
  • 1938–1940체포, 재판, 총살

지노비 마르코비치 우샤코프

Зиновий Маркович Уш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투하쳅스키의 자백을 받아낸 심문관, 자기가 맞고 나서야 매를 말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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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키예프 체카
  • 1935–1936벨로루시 NKVD 특별부 부부장
  • 1937.01국가보안총국(GUGB) 특별부 부부장
  • 1937‘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 주임 심문관
  • 1937.09국가보안소장
  • 1938.09하바롭스크에서 체포
  • 1940.01군사합의회의 사형 선고, 총살

호세 디아스

José Díaz
스페인 공산당 공산주의 스페인 스페인 1895–1942 ✕ 자살

빵집 노동자에서 공산당 서기장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이끈 스페인 혁명의 지도자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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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세비야 제빵노동조합 '라 아우로라' 가입
  • 1917세비야 제빵노동자 파업 지도
  • 1920CNT 총파업 참여
  • 1925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시기 마드리드에서 체포, 투옥
  • 1927스페인공산당(PCE) 입당, 안달루시아 조직 지도
  • 1932.3제4차 PCE 대회 —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32.9PCE 정치국 진입, 곧 서기장 임명
  • 1935제7차 코민테른 대회 참석 — 디미트로프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 지지
  • 1936.2마드리드 선거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1939내전 기간 PCE 지휘 — 군사적 승리와 공화국 진영 단결에 주력
  • 1938.12위암 치료 위해 소련으로 이송, 레닌그라드에서 수술
  • 1939–1942코민테른 사무국 간부 — 스페인·남미·영국령 인도 담당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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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33상하이 정보망
  • 1933–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5–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1944.11체포, 도쿄에서 처형

초이발산

Чойбалсан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895–1952 ○ 자연사

몽골 혁명과 권력 집중

1945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에서, 몽골과 소련 인민의 우정은 영원히 불멸하리라고 다짐했다.

몽골의 1921년 혁명에 참여한 군사·정치 지도자다.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권력을 집중했고 1930년대 후반 대규모 숙청을 이끌었다. 그의 지도기는 국가 기반 형성과 정치·종교적 억압을 함께 살펴야 하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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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8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1928–1930소후랄 상임위원회 의장
  • 1930외무장관
  • 1935–1939제1부수상
  • 1936몽골 인민공화국 원수 칭호
  • 1939–1952수상 (정부 수반)
  • 1939할힌골 전투에서 몽골군 지휘

페레츠 다비도비치 마르키시

Перец Давидович Маркиш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5–1952 ✕ 처형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급진적 서정시인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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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7볼린에서 성장, 제정 러시아군 복무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1키이우에서 이디시 시인으로 활동 시작
  • 1921–1926바르샤바·베를린·파리 등지에서 집필·출판
  • 1926–1941소련 귀환, 시·소설·희곡 집필과 작가 활동
  • 1939레닌훈장 수훈
  • 1941–1945전쟁 시기 반나치 시와 문화 활동 전개
  • 1942–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로 활동
  • 1949–1955체포·처형, 사후 복권

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53 ✕ 처형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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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그루지야 체카·GPU 경제부와 정보국
  • 1931–1934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제1서기(베리야)의 보좌관
  • 1934–1937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소비에트무역부장, 이어 특별부장
  • 1937–1938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수송부장
  • 1938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
  • 1938–1941내무 제1부인민위원 겸 국가보안총국장
  • 1941국가보안인민위원(NKGB 1차)
  • 1941–1943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43–1946국가보안인민위원, 1946년부터 국가보안장관(MGB)
  • 1947–1950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장
  • 1950–1953국가통제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블로힌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Бло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55 사인 불명

세 명의 수장을 거쳐 이십칠 년을 집행한 사형집행인

1940년 4월, 블로힌은 가죽 앞치마와 어깨까지 오는 장갑을 갖추고 칼리닌 NKVD 지하실에서 28일 밤 동안 폴란드 포로 약 7천 명을 3분에 한 명꼴로 직접 사살했다.

NKVD 사령부장으로 27년간 루뱐카의 사형을 집행한 소련의 사형집행인. 야고다·예조프·베리야를 거치며 대숙청 희생자를 처형했고, 1940년 카틴 학살 시 칼리닌 처형팀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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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53NKVD·MGB 행정경제국 사령부장, 사실상의 사형집행 책임자
  • 1937–1938대숙청기 처형 집행과 감독
  • 1940칼리닌 처형팀 지휘(카틴 작전)
  • 1953–1954퇴역, 이어 계급 박탈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을 20년간 통치한 스탈린 시대의 당 서기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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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푸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58 ○ 자연사

세미나리 출신 교관에서 13군을 유럽 중부까지 이끈 육군대장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단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손으로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령관이었다." — 이반 코네프 원수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고 내전에서는 여단·사단 참모장을 지낸 니콜라이 푸호프는, 전간기 대부분을 군사학교 교관으로 보내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소전을 맞았다. 1942년 1월 13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쿠르스크 북측면에서 모델의 9군을 6일간 저지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에서 세 개 전선군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체르니고프를 해방하여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까지 13군을 이끌며 중부 유럽을 관통했고, 13군은 최고사령관 명령에 26회 거명되었다. 전후에는 오데사·북캅카스·서시베리아·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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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러시아 제국군 준사관, 북부전선에서 독가스 피해
  • 1918–23적군 입대, 남부전선·카렐리야·폴란드 전선에서 여단·사단 참모장
  • 1924–30제34소총연대장, 비스트렐 과정 수료
  • 1930–41비스트렐 교관 → 기계화군사아카데미 교관 → 하리코프 기갑학교장 → 군사경제아카데미 교관
  • 1941–42제304소총사단장, 폴타바·돈바스 방어전
  • 1942–46제13군 사령관 — 쿠르스크·드네프르·우안우크라이나·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
  • 1946–48제8기계화군 사령관,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48–57오데사 → 북캅카스 → 서시베리아 →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57–58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

루트 피셔

Ruth Fischer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오스트리아 1895–1961 ○ 자연사

유럽 대중공산당의 첫 여성 지도자,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반스탈린주의 전향자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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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 1924–1925KPD 공동의장 — 제국의회·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 후보
  • 1924코민테른 제5차 대회 독일 대표단장 — 트로츠키 공개 비난
  • 1925–1926모스크바에 강제 체류 — 스탈린의 당 노선 복종 요구 거부
  • 1926KPD 제명 —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참여 후 곧 탈퇴
  • 1933–1941파리 망명 — 트로츠키와 협력, 국제그룹 결성
  • 1941–1955미국 망명 — 《스탈린과 독일 공산주의》(1948) 출간
  • 1947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형제 게르하르트·한스 아이슬러에게 불리한 증언
  • 1955–1961파리 귀환 — 《레닌에서 마오까지》(1956) 출간, 반공주의 철회

이오나 티모페예비치 니키첸코

Иона Тимофеевич Никит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67 ○ 자연사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소련 측 판사, 대숙청 사형 선고자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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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918노보체르카스크 적위대 분대장 대리
  • 1918–1920제4군 및 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 근무
  • 1920–1924세미레치예 군집단·투르케스탄 전선 군사법정 부의장 및 의장
  • 1924–1926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합의부 위원
  • 1926–1935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의장
  • 1935–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부의장
  • 1938–1949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3법무 소장 진급
  • 1945런던 회의 소련 대표 — 국제군사재판 헌장 기초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
  • 1949–1951소련 법무부 수상운수선박법정 관리국장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5–1970 ○ 자연사

소련 원수, 1940-1941년 국방인민위원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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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기병 지휘관으로 내전 참전, 부됸니 기병군 계열에서 성장
  • 1939–1940겨울전쟁 후반 지휘로 명성을 얻고 원수로 승진
  • 1940–1941국방인민위원, 대숙청 뒤 붉은 군대 재건 시도
  • 1941–1942독소전 초기 여러 전선을 지휘하나 하리코프 패배 등 한계 노출
  • 1943–1945최고사령부 대표와 원로 지휘관 역할로 후퇴
  • 전후군 원로와 명예직으로 남음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1 ○ 자연사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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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

Игорь Евгеньевич Тамм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5–1971 ○ 루게릭병

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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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Юма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2 ○ 자연사

8월 폭풍 작전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스탈린에게 '장관감이 못 된다' 일갈당한 해군원수

1951년 7월 해군 주력군사평의회에서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깨끗하고 용감하며 훌륭한 선원이지만, 장관이 아니다.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맡기고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짜르 해군의 수병으로 출발하여 소련 해군 최고위에 오른 제독. 1939년부터 태평양함대를 지휘하며 극동의 해군 기지를 정비했고, 1945년 8월 대일전에서 함대를 이끌어 남사할린·쿠릴 열도 상륙과 조선 북부 해안의 청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7년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1950년 해군장관에 올랐으나, 스탈린은 그가 실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음주에 빠져 있다며 '사람은 좋지만 장관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1951년 경질했다. 이후 해군아카데미 교장으로 물러나 함대보다 교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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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함대 크론슈타트 소년병학교 입교, 순양함 보가티리에서 복무
  • 1917레발 해안포대 수병위원회 위원장, 혁명 후 질병으로 제대
  • 1918–1920입당 및 붉은의용대 지휘관, 볼가-카스피 소함대에서 내전 참전
  • 1920–1924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후일 마라트) 포술지휘관·부함장
  • 1926–1937흑해함대: 구축함·순양함 지휘, 구축함대·순양함여단장
  • 1938.01–1939.03흑해함대 사령관
  • 1939.03–1947.01태평양함대 사령관, 대일전 승리로 소련영웅 칭호(1945)
  • 1947.01–1950.02군무차관 겸 해군총사령관
  • 1950.02–1951.07소련 해군장관
  • 1951–1957보로실로프 해군아카데미 교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Ор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73 ○ 자연사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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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 1938.07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38–1953알렉산더 버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잠적 생활
  • 1953『스탈린 범죄의 비사』 출간, 《라이프》에 연재
  • 1955–1957미국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두 차례 증언
  • 1963『방첩·유격전 편람』 출간, 미시간 대학 법학대학원 연구원
  • 1973.03.25클리블랜드에서 사망

이반 세르게예비치 호흘로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Хох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5–197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직조공 출신 총리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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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40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 상임간부회 의장
  • 1940–1943러시아 공화국(RSF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41–1944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모스크바 방어·스몰렌스크 해방)
  • 1944–1945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동프로이센 공세)
  • 1945–1954첸트로소유스 이사회 의장
  • 1955–1965국가무역감독국장 (소련·RSFSR 무역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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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슈밀로프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남부를 6개월 사수한 64군 사령관

1943년 1월 31일, 베케톱카 64군 사령부. 슈밀로프 장군 앞에 파울루스 원수가 들어섰다. 독일군 원수가 적군에 항복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를 생포한 것은 슈밀로프의 병사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베테랑 보병 장교. 1942년 8월 6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를 6개월간 책임졌다. 추이코프의 62군이 북부 시가전을 치르는 동안 64군은 헤르만 호트의 4기갑군을 저지하며 남부 방어선을 사수했고, 1943년 1월 부하들이 생포한 파울루스 원수를 직접 심문했다. 이후 제7근위군으로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쿠르스크, 드네프르 도하, 부다페스트, 프라하 공세까지 진군했으며, 드네프르 도하의 공로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백해군관구와 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을 지냈고, 사후 마마예프 쿠르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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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추구예프 군사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붉은 군대·볼셰비키당 입대
  • 1918–20내전: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 1938–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
  • 1938–41제11소총군단장 (폴란드·핀란드 전쟁, 발트 방어)
  • 1942.1–8제21군 부사령관 (하리코프·돈 강)
  • 1942.8–1943.4제64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
  • 1943.4–1945.5제7근위군 사령관 (쿠르스크 → 프라하)
  • 1949–55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

파벨 오시포비치 수호이

Павел Осипович Сухо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75 ○ 자연사

Су(Sukhoi) 설계국의 창립자, Su-7, Su-24, Su-27의 아버지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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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 1949–1953OKB 해체; 투폴레프 설계국 부수석 설계자
  • 1953–1975OKB-51 재건 — Su-7, Su-9, Su-15, Su-17, Su-24, Su-27 착수
  • 1958–197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7 ○ 자연사

천왕성 작전을 설계한 신학교 출신 참모

겨울전쟁 계획기 무렵 크렘린의 비공식 오찬에서 스탈린이 부모에 대해 물었다. 바실렙스키는 1938년 자서전에서 1924년부터 개인적·서신적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놀라며 당장 관계를 회복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40년 회복되었다.

1895년 키네솀스키군 노바야 골치하에서 교회 선창자였다가 뒤에 사제가 된 아버지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코스트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9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1942년 6월 26일 참모총장이 되고 같은 해 10월 14일부터 국방인민위원을 겸해 스탈린그라드 반격을 조율했으며, 이후 쿠르스크·크림·벨라루스·발트 전역에서 스타프카 대표로 전선을 조율했다. 1943년 2월 16일 소련 원수가 되었다. 1945년 2월부터 4월까지 3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해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켰고, 그해 하반기에는 극동 소련군을 지휘했다. 전후 1946~1948년 참모총장, 1949~1953년 군사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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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41참모본부 작전부, 숙청으로 빈 자리를 채우며 초고속 승진
  • 1942–45참모총장, 천왕성 작전 공동 설계
  • 1945.8극동군 총사령관, 만주 전역
  • 1949–53군사장관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폐렴)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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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1962헝가리 개입 반대, 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루드비크 스보보다

Ludvík Svoboda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 체코 1895–1979 ○ 자연사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국민영웅에서 프라하의 봄의 뜻밖의 보루가 된 군인 대통령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둡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둡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둡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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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즈보로프·바흐마치 전투, 시베리아 철수
  • 1921–1939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뮌헨 위기 당시 대대장
  • 1939–1945폴란드·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성; 제1군단장으로 키예프·두클라 해방
  • 1945–1950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1950–1951부총리 겸 체육위원장으로 전보
  • 1951–1954숙청: 체포·수감 후 석방, 고향 협동조합에서 노동
  • 1954–1959클레멘트 고트발트 군사대학 총장
  • 1968–1975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돌로레스 이바루리

Dolores Ibárruri
스페인 공산당 공산주의 스페인 스페인 1895–1989 ○ 자연사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을 저지한 반파시즘의 목소리

“침략의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저지르는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파시즘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밀어닥칠 것입니다. 스페인 인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합니다.” — 파리 지지집회 연설, 1936년 9월 3일

스페인공산당(PCE)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전 중 "¡No pasarán!"을 외쳐 반파시즘 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망명 중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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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입당
  • 1918『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 게재, 필명 '파시오나리아' 사용 시작
  • 1922통일 스페인공산당(PCE) 창립 참여
  • 1930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933반파시스트 여성연합 창설 의장
  • 1935코민테른 제7차 대회 —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 1936.2아스투리아스 지역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7라디오 연설 “¡No pasarán!” —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 저지 호소
  • 1937코르테스 부의장 선출
  • 1939–1942소련 망명 — 코민테른 활동 지속
  • 1941–1963단파방송 '독립 스페인 라디오'(라디오 피레나이카) 지휘
  • 1942–1960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
  • 1945국제민주여성연맹(WIDF) 공동 창립, 부의장
  • 1960–1989PCE 의장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공개 반대
  • 1977프랑코 사후 귀국 — 41년 만에 다시 코르테스 의원 당선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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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이에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37 ✕ 처형

23세에 육군을 지휘한 천재 지휘관, 붉은 군대 기계화의 설계자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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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7제국군 포병 장교, 중위 계급
  • 1918–1918소총사단장, 북부전선
  • 1919–2014군 사령관 — 데니킨군 격파, 하리코프·오데사 점령
  • 1921–22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 1925–28북캅카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9–31적군 무장부장, 부국방인민위원
  • 1931–37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 1936년 기동훈련 지휘
  • 1935제1급 군사령관 칭호 수여

이오나 에마누일로비치 야키르

Иона Эммануилович Яки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몰도바 1896–1937 ✕ 처형

키예프 군관구를 개혁의 실험실로 바꾼 내전 영웅

체포 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썼다. 스탈린은 여백에 '악당이자 매춘부'라고 적었고, 보로실로프는 '완벽히 정확한 정의'라고 덧붙였다.

키시뇨프 유대인 약사 가정에서 태어나, 차르 시대 입학 제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 중 오데사에서 지토미르까지 적진 400km를 돌파한 전설적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기계화·공수 실험과 종심작전 교리 발전을 주도한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로, 1935년 콤안다름 1계급이 되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총살, 1957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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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집행위원, 루마니아군에 맞서 붉은 부대 지휘
  • 1918–1919제8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남부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 1919제45소총사단장·남부집단군 사령관 — 오데사→지토미르 400km 적후 탈출
  • 1921–1924크림군 사령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우크라이나·크림군 부사령관
  • 1924–1925군사교육기관 총국장, 『보옌니 베스트니크』 편집장
  • 1925–1935우크라이나 군관구 사령관 — 기계화·공수 실험, 독일 참모 교육 이수
  • 1935–193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국방 군사평의회 위원, 콤안다름 1계급
  • 1937/19575월 체포, 6월 12일 총살, 1957년 사후 복권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블라고느라보프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Благонрав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38 ✕ 처형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볼셰비키 군사위원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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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3RSDLP(b) 입당, 예고리옙스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0–1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사령관
  • 1918.6–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31체카·GPU·OGPU 수송국장
  • 1929–1932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35–1936중앙 고속도로·자동차수송국장 (구쇼스도르)
  • 1936–1937NKVD 고속도로건설총국장, 국가보안 1급 위원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츠키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Сте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38 ✕ 처형

부하린파 '적색 교수'에서 스탈린 편으로 전향한 선전 책임자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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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 1917당 선동원, 10월 봉기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란 진압 참가
  • 1918–1920적군에서 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
  • 1921–1923적색교수양성소 수학, 부하린파 '적색 교수' 그룹
  • 1925『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초대 주필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작가동맹 조직위 실질적 운영
  • 1934–1938중앙위 조직국 위원, 잡지 『볼셰비키』 주필
  • 1935–1938중앙위 당 선전선동부장, 대숙청기 선전 캠페인 조직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1934년 문화·레닌주의선전부로 개편
  • 1937소련 최고소비에트 제1기 대의원

야코프 아르카디예비치 야코블레프

Яков Аркадь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38 ✕ 처형

집단화 행정을 맡은 농업인민위원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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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농업인민위원 · 집단화 행정

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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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 1937–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제6부장, 이어 제3관리국장(수송·통신)
  • 1938체포와 처형

파이줄라 구바이둘라예비치 호자예프

Файзулла Губайдуллаевич Ходж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6–1938 ✕ 처형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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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자디드 운동 참여, 청년 부하라당 창당, 비밀 중앙위원
  • 1918부하라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타슈켄트 도피, 궐석 사형
  • 1919–1920타슈켄트에서 혁명적 청년 부하라인 사무국 조직, 『우치쿤』 편집
  • 1920–1924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
  • 1924–1937우즈베크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 192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우즈베크 SSR 대표 의장
  • 1937–1938전직 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3월 15일 총살

바실리 표도로비치 데멘티예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Демен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0 ✕ 처형

체첸에서 연해주까지 옮겨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1938년 12월 28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2일 밤 총살되었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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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8체첸-인구시 NKVD 책임자
  • 1938연해주 NKVD 국장 (국가보안소령)

세묜 보리소비치 주콥스키

Семён Борисович Жук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0 ✕ 처형

무역 관리에서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

1923년 당내 토론에서 트로츠키 측 결의안에 투표했다. 15년 후 스탈린은 이를 기억했고, 1938년 10월 3일 카자흐스탄 리데르 광산 책임자로 좌천되었으나 부임도 못 가고 19일 만에 체포되었다.

예조프의 NKVD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적 무역 관료. 키예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독일 주재 무역대표를 거쳐 1936년 예조프에게 발탁돼 NKVD 행정·보급을 총괄했다. 1938년 숙청으로 체포·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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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베를린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 대외무역인민위원부 수입국장
  • 1936–1937NKVD 행정경제국장
  • 1937국가보안총국 제3부 부부장, 제12부장
  • 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렌초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Зелен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1 ✕ 전사

돌파를 시도했지만 상부 명령에 묶인 사단 지휘관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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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제정 러시아군 보병 장교와 항공 관측장교
  • 1918–1921붉은 군대 입대, 내전기 군사위원·후방 지휘관
  • 1921–1933소총연대 지휘와 군사교육·참모 보직
  • 1936–1939제5독립중전차여단 참모장, 제3소총군단 기갑부대 책임자
  • 1939–1940제163소총사단장,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포위와 철수 지휘
  • 1940–1941소장 진급, 제88소총사단장과 아르한겔스크 군관구 임시 지휘
  • 1941카렐리야 전선에서 제88사단 지휘 중 전사

볼데마르 아우구스토비치 울메르

Вольдемар Августович Ульм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스웨덴계) 1896–1945 ○ 옥사

대숙청 작전명령마다 「확인함」 서명을 남긴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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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준사관 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남서전선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 1919–1922적군 보구차르 연대·여단에서 부관과 참모장
  • 1924–1925체카-OGPU 국경부대 지휘관·교관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국경수비 고등학교 교관
  • 1934국경·내무 병력 총국(GUPVO) 작전부장
  • 1937–1938국가보안총국(GUGB) 작전서기,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인증
  • 1938–1939베리야 비서실장, 뒤이어 GUPVV 부국장 대행

야코프 니콜라예비치 페도렌코

Яков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7 ○ 자연사

전쟁 내내 붉은 군대 기갑부대를 지휘한 초대 기갑군 원수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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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흑해 함대 수병, 기뢰소해정 선상위원회 위원장
  • 1917–1918적위대 오데사 수병 부대 지휘관
  • 1918–1920붉은 군대 장갑열차 지휘관·군정위원, 내전 참전
  • 1937–1940키예프 특별군관구 자동차장갑전차부대장
  • 1940–1942붉은 군대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 국장
  • 1941–1943소련 국방 인민위원
  • 1942–1947붉은 군대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 1946–1947소련 육군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최고회의 대의원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사인 논쟁)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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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체르니셰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Черныш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52 ○ 자연사

예조프의 부관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굴라그를 관리한 내무인민위원부 차관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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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소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0랴잔 시소비에트 부의장, 특수목적부대 조직
  • 1920–1927체카·OGPU 부대 지휘관, 투르키스탄 전선
  • 1927–1937극동 OGPU·NKVD 국경군 사령관
  • 1937–1939NKVD 부인민위원 겸 노동자농민민병대 총국장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겸 굴라그 국장
  • 1941–1952NKVD·MVD 부인민위원/부장관, 원자력 건설 감독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체코계 1896–1953 ○ 자연사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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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이반 알렉세예비치 리하초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Лиха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56 ○ 자연사

소련 자동차 공업의 아버지, 포드에게 '나는 인민의 하인'이라고 말한 붉은 디렉터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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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헬싱키에서 적위대 조직
  • 1917–1921붉은 군대 지휘관 및 체카 근무
  • 1926–1939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ZIS) 디렉터
  • 1939–1940소련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1940–1950ZIS 디렉터 복귀, 전시 생산 및 대피 공장 설립 총괄
  • 1950–1953항공기 공장 No. 41 디렉터
  • 1953–1956소련 자동차운수·도로 장관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

Иван Ефимович Пет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58 ○ 자연사

오데사·세바스토폴을 지키고 두 번 강등당해도 다시 전선에 선 육군대장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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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알렉세이 이노켄티예비치 안토노프

Алексей Иннокентьевич Ант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62 ○ 자연사

원수도 영웅도 아니었지만, 1943년 이후 모든 대규모 작전의 설계자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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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 1941–1942남부전선 참모장, 이후 자캅카스 전선 참모장
  • 1942–1945작전국장 → 부참모장 → 총참모장;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 주도
  • 1948–1954자캅카스 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55–1962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야놉스카야

Соф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Яновская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6–1966 ○ 당뇨병

소련 수리논리학을 부활시킨 볼셰비키 수학자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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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오데사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하 적십자사 서기
  • 1919–1920제12군 정치국 신문 《적군》 편집보좌·정보부장
  • 1920–1923오데사 현당위원회 정보부 당원
  • 1923–1929적색교수양성소 수학·수강생, 이후 교원
  • 1931–1941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1935년 물리수학 박사
  • 1943–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세미나 조직·지도
  • 1944–1955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과학사 학과장
  • 1959–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학과 교수

니콜라이 시도로비치 블라시크

Николай Сидорович Влас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67 ○ 폐암

25년간 스탈린의 그림자였던 경호 책임자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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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하사관,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9모스크바 경찰, 이후 체카로 전속
  • 1926–1931OGPU 작전국 선임전권대표
  • 1931–1952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8–1942NKVD 국가보안총국(GUGB) 제1국장
  • 1943NKGB 제6총국장
  • 1946–1952MGB 경호총국(GUO) 국장
  • 1952바제노프 강제노동수용소 부소장으로 좌천

콘스탄틴 크사베리예비치(출생) / 콘스탄티노비치(개명)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6–1968 ○ 전립선암

소련과 폴란드의 두 원수, 1945년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하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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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서 1차대전 참전,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18–21붉은기병대에서 내전 참전, 35기병연대장, 두 차례 적기훈장
  • 1937–40대숙청으로 체포·투옥, 1940년 복권·석방
  • 1941–4216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1942–43돈 전선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포위 및 파울루스 생포
  • 1943–44중부·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쿠르스크 방어, 바그라티온
  • 1944–451·2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동프로이센·포메라니아·베를린
  • 1949–56폴란드 국방장관 겸 부총리, 폴란드 원수

허룽

贺龙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6–1969 ○ 옥사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후난의 사나이, 난창 봉기 총지휘와 제2방면군 사령관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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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08난창 봉기 총지휘
  • 1936–1937홍군 제2방면군 총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공산주의 스페인 스페인계 1896–1973 ○ 자연사

분열을 넘어 노동자 통합을 추구한 혁명가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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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레리다에서 교사로 일하며 CNT에 가입
  • 1920–1922레리다 CNT 서기, 《루차 소시알》 편집자
  • 1921–1922CNT 전국 서기국 임시 서기
  • 1924–1930카탈루냐발레아르 공산주의연맹 조직자
  • 1931–1935노동자농민블록 서기장
  • 1935–1936POUM 공동 창립자, 초대 총서기
  • 1936인민전선 후보로 바르셀로나 하원의원
  • 1949–1973뉴욕 아메리칸 리터러리 에이전시 설립자·작가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74 ○ 자연사

스탈린이 총애한 승리의 원수, 그 명성 때문에 두 번 좌천되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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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할힌골에서 일본군 격파
  • 1941참모총장, 이후 레닌그라드·모스크바 방어 지휘
  • 1942–45최고부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 1945독일 항복 접수, 소련 점령지구 사령관
  • 1946–19481차 실각: 오데사, 이어 우랄 군관구로
  • 1953–1957베리야 체포에 가담, 국방장관을 거쳐 1957년 해임
  • 1969회고록 출간으로 복권

라자니 팔메 더트

Rajani Palme Dutt
영국 공산당 공산주의 영국 인도 1896–1974 ○ 자연사

CPGB 창립 당원이자 반세기 수석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의 개척자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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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CPGB 창립 당원
  • 1921–1974《Labour Monthly》 창간 · 53년간 편집장
  • 1923–1965CPGB 집행위원회 위원
  • 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부위원
  • 1925–1935코민테른 대표(벨기에·스웨덴) · 인도 공산당 지도
  • 1936–1938《Daily Worker》 편집장
  • 1939–1941CPGB 총서기
  • 1943–1965CPGB 집행위원회 부의장 · 부총재

자크 뒤클로

Jacques Duclos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896–1975 ○ 폐울혈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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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미하일 세묘노비치 호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Хоз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79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의 첫 겨울을 지휘하고, 제2충격군 상실로 경질된 소련 상장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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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 징집, 준사관으로 임관
  • 1918적군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 192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고등학술과정 수료
  • 1937레닌그라드 군관구 부사령관
  • 1938–1939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39–194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 1941.09레닌그라드 전선 참모장 겸 제54군 사령관
  • 1941.10–1942.06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
  • 1942.06–10제33군 사령관
  • 1942.12–1943.01제20군 사령관 (화성 작전)
  • 1943상장 진급
  • 1944–1945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46–1963군사교육기관장 역임
  • 1963퇴역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세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мё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86 ○ 자연사

소련 유일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연쇄반응 이론의 창시자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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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1LFTI 전자현상연구실장, 부소장
  • 1931–1986화학물리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1–1945연소·폭발 연구, 원자폭탄 계획 기여
  • 1944–1986모스크바대학교 화학반응속도론 강좌 주임
  • 1957–1971과학아카데미 화학부문 아카데미-서기
  • 1963–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게오르기 안드레예비치 몰차노프

Георгий Андреевич Молч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37 ✕ 처형

야고다의 비밀정치국장

1937년 2-3월 중앙위 전원회의. 스탈린이 예조프의 보고 도중 물었다: "몰차노프는 어떻게 됐나? 체포됐나, 안 됐나?" 예조프가 답했다: "체포했습니다, 스탈린 동지, 앉아 있습니다."

야고다의 측근으로 OGPU·NKVD 비밀정치국장을 맡아 반대파 탄압을 총괄했다. 류틴 그룹 체포와 키로프 암살 후 대량 체포를 지휘했다. 야고다 실각 후 벨로루시 NKVD로 밀려났다가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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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그로즈니 체카 의장
  • 1925–1931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도 GPU 책임자
  • 1931–1936OGPU·NKVD 비밀정치국장
  • 1936–1937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у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97–1937 ✕ 자살

경력의 정점에서 방아쇠를 당긴 '북캅카스파' 부인민위원

1937년 7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로즈넨스키 라보치」의 부고는 그가 '잠깐의 병을 앓다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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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 요원
  • 1923–1936북캅카스 OGPU·NKVD, 예브도키모프 그룹
  • 1936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 1937내무 부인민위원 겸 방첩부장
  • 1937수훈 며칠 뒤 권총 자살

비탈리 마르코비치 프리마코프

Виталий Маркович Прим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7 ✕ 처형

붉은 카자크를 이끈 '붉은 로렌스',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소련 군사령관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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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5반전 선전 활동으로 시베리아 종신 유형
  •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키예프 볼셰비키 위원, 겨울궁전 습격 지휘
  • 1918–1920붉은 카자크 연대→여단→8기병사단→1기병군단 지휘, 3차례 적기훈장
  • 1924–1925레닌그라드 고등기병학교장
  • 1925–1926중국 국민군 군사고문
  • 1927–1930아프가니스탄·일본 주재 무관
  • 1929'라기브 베이'로 위장,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지휘
  • 1933–1934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사령관
  • 1935–1936레닌그라드 군관구 부사령관, 국방인민위원 산하 군사평의회 위원
  • 1936체포 (8월 14일)
  • 1937'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 총살 (6월 12일)
  • 1957사후 복권 (1월 31일)

이그나티 이그나티예비치 소스놉스키

Игнатий Игнатьевич Сос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계 1897–1937 ✕ 처형

폴란드 정보원에서 체카 방첩 간부가 된 체키스트

폴란드 정보장교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잠입해 활동하다 체카에 체포된 뒤, 체카·오게페우·엔카베데의 방첩 간부로 일했고 1937년 처형됐다.

리가의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폴란드군 정보장교이자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이었고,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 거점을 이끌었다. 1920년 6월 체카에 체포되어 8월 협력에 동의했고, 제르진스키가 레닌과 상의한 뒤 그의 입당을 추천했다. 방첩부 백위파과장, 오게페우 특별부 부부장 등을 지냈고 1935년부터 사라토프 변경주 NKVD 제1부국장이었다. 예조프 취임 직후인 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총살되었고 195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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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폴란드군 정보장교와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망을 운영했다.
  • 19206월 체카에 체포되었고, 8월 체카 협력에 동의했다.
  • 1920–1927체카·GPU 방첩부에서 근무하고, 1922~1927년 방첩부 백위파과장을 지냈다.
  • 1934–1936오게페우·엔카베데 특별부 부부장을 거쳐, 1935년 1월부터 1936년 11월까지 사라토프 변경주 NKVD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 1936–1958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으며, 1958년 사후 복권되었다.

이반 아다모비치 크라발

Иван Адамович Кравал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7–1937 ✕ 처형

스탈린에게 불만족스러운 인구를 센 통계학자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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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입당
  • 1924–1930최고국민경제회의(ВСНХ) 간부로 노동경제·통계 기반 구축
  • 1930–1932소련 노동부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1933–1935TSUNKHU 제1부국장 겸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35–1937TSUNKH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전연방 인구총조사 책임
  • 1937인구총조사 결과를 이유로 체포·처형, 1956년 복권

니콜라이 쿠즈미치 크루친킨

Николай Кузьмич Кручин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38 ✕ 처형

NKVD 국경·내무군 총국장을 지내다 총살된 사단장

1933년 12월부터 1934년 5월까지 소련군을 이끌고 신장에 개입해 중국 당국을 지원하며 봉기를 진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톰스크 공과대학을 다니다 1916년 동원되었다. 내전기 적군 대대장·연대장을 지냈고 1920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마쳤다. 오게페우 부대를 이끌고 1931년 망기실라크 봉기와 1933년 바스마치 진압을 지휘했고, 1933년 12월~1934년 5월 신장의 무슬림 봉기 진압에 나선 소련군을 이끌었다. 1937년 4월 NKVD 국경·내무군 총국장이 되었으나 1938년 1월 우크라이나로 좌천되고 4월 체포되었다. 8월 19일 군사 음모 가담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아 그날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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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적군에 들어가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 1920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연대장과 여단 참모장·여단장을 지냈다.
  • 1921체카 부대에 들어가며 군 경력을 보안·국경 부대로 옮겼다.
  • 1923OGPU 국경경비국 부국장과 OGPU 부대 감찰관 보좌를 겸했다.
  • 1931망기실라크반도 봉기와 두르디 무르타의 바스마치 부대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 1933–1934신장 작전에서 소련군을 지휘해 중국 당국을 지원하고 봉기 진압에 나섰다.
  • 1937–1938NKVD 국경·내무군 수장을 지냈고, 이후 우크라이나 부대장으로 옮겨졌다가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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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RSDLP(b) 입당,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 그로즈니 방어전 지휘, 적기훈장 수훈
  • 1919–1921카프카스 지방위원, 테레크·다게스탄 반란군 사령관, 페르시아 적군 사령관
  • 1921–1927고르스키 주당위 책임서기, 남동부 중앙위 뷰로 위원, 북카프카스 지방위 선전부장·서기·제2서기
  • 1927–1930중앙아시아 뷰로 조직부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1929),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29–1930)
  • 1930–1932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모스크바 주·시 당위원회 서기
  • 1932–1937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 중앙위 후보위원(1934–1937), NKVD 트로이카 참여
  • 1937–1938하리코프 주·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체포(1937.10.11), 총살(1938.4.25), 1955년 복권

야코프 이바노비치 알크스니스

Яков Иванович Алксни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7–1938 ✕ 처형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을 구축하고, 자신이 선고한 죽음과 같은 죽음을 맞다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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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 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 1924–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 1926–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 1931–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 1937.06투하쳅스키 등 8명에게 사형 선고한 특별재판부 최대 강경파
  • 1937.11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 1938.07.29 콤무나르카에서 총살
  • 1956사후 복권

이반 세묘노비치 쿠탸코프

Иван Семёнович Кут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38 ✕ 처형

차파예프의 후계자이자 스탈린에게 쓸모를 다한 내전 영웅

적군 최고 사령부가 서로를 비방하던 시절, 쿠탸코프는 디벤코의 만취와 무능을 고발했다. 답장은 NKVD였다.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디벤코의 도움으로 체포되었다.

사마라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7세부터 머슴살이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차파예프 여단에 합류, 두 달 만에 정찰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올랐다. 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을 이끌어 우랄 백코사크군을 격멸했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바스마치 토벌에서 적기훈장을 세 차례 수훈했다. 콤코르 계급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까지 올랐으나, 1937년 상관 디벤코와의 상호 비방전 끝에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어 1938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사후 소설 『차파예프』에서 그의 이름은 '옐란'으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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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하급 부사관으로 복무.
  • 1917.5볼셰비키 입당. 제2차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18붉은 군대 입대, 차파예프 여단 합류. 73여단장으로 승진.
  • 1919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장 취임. 우랄 코사크군 격멸. 명예혁명무기 수훈.
  •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25사단 지휘. 두 번째 적기훈장.
  • 1923–1924군사아카데미 졸업. 호레즘 집단군 사령관으로 바스마치 토벌. 세 번째 적기훈장.
  • 1928–1930제4소총병군단장.
  • 1931–1935제2소총병군단장. 소련 및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35–1937콤코르 계급. 프리볼시스키 군관구 부사령관.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 1937.5.15체포.
  • 1938.7.28사형 판결, 당일 총살.

이반 표도로비치 페드코

Иван Фёдорович Федь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9 ✕ 처형

적기훈장 4회 수훈의 내전 영웅, 국방제1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숙청의 칼날에 스러지다

수사관이 내게 말했다: '네가 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는 자백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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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페오도시야에서 적위대 조직, 제1흑해혁명연대 지휘
  • 1918–1920북카프카스 혁명군 총사령관 대행, 제11군 부사령관, 제58·46소총사단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제187여단장), 탐보프 봉기 진압(제1전투구역 사령관)
  • 1922–1931제18사단장 → 제13·2군단장 → 북카프카스·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부사령관
  • 1931–1937카프카스군·볼가군관구 사령관, 극동특별군 부사령관, 연해주군집단 사령관
  • 1937–1938키예프군관구 사령관
  • 1938국방제1부인민위원, 1등군사령관

표트르 이바노비치 스모로딘

Пётр Иванович Сморо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7–1939 ✕ 처형

콤소몰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기치로 내건 노동자 출신 제1서기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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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 견습공·노동자
  • 1917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공동 창설자
  • 1920–1921페트로그라드 콤소몰 시위원회 서기
  • 1921–1924콤소몰(РКС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레닌그라드 바실레오스트롭스키·비보르크·모스크바 구당위원회 서기
  • 1937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7–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시당위원회 제1서기

니콜라이 갈락티오노비치 니콜라예프-주리드

Николай Галактионович Николаев-Журид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40 ✕ 처형

군 숙청과 민족 작전을 지휘한 예조프의 방첩 책임자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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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정군 하급 장교
  • 1918–1919적군 입대, 정보 업무
  • 1919–1921체카 군 방첩 요원
  • 1921–1930우크라이나·북캅카스 보안기관 근무
  • 1930–1932OGPU 특수부 부부장
  • 1935–1936레닌그라드주 NKVD 부책임자
  • 1936–1937NKVD 작전부장
  • 1937–1938GUGB 특수부(제5부)장·방첩부장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시피겔글라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Шпигельгла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0 ✕ 처형

대숙청기 NKVD 해외 공작의 설계자

파리 몽마르트르 대로 근처에서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소련의 유럽 불법 첩보망을 지휘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백군 망명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침투 작전의 거점이었다.

1936년부터 소련 대외정보국(INO NKVD) 부국장,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국장 대행을 지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체카 출신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가장 중대한 해외 공작들(파리에서 백군 장군 예브게니 밀레르 납치, 스위스에서 망명자 이그나티 레이스 암살, 로테르담에서 OUN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 제거)을 직접 지휘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파리 불법 거점을 운영했으며,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후대 정보장교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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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징집, 프라포르시크로 42예비연대 복무
  • 1918–1919모스크바 군사위원회 재무, 군사통제기관, 체카 특별부 재무과장
  • 1921–1922벨로루시 체카
  • 1922–1926INO OGPU, 몽골 주재 첩보 활동
  • 1926–1935INO OGPU 국장 보좌, 파리 불법 거주국장
  • 1935–1936INO GUGB NKVD 국장 보좌
  • 1936–1938제7부(INO) GUGB NKVD 부국장
  • 1938.2–6제7부(INO) GUGB NKVD 국장 대행
  • 1938.3–9NKVD 제1총국 제5부 부국장
  • 1940.1.29처형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나세드킨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Насед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0 ✕ 처형

라트비아 작전을 발단시킨 스몰렌스크 NKVD 국장

예조프에게 라트비아인 500명 체포를 청했다가 "말도 안 돼, 1,500~2,000명은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민족주의자다"라는 답을 받았다.

모스크바 노동자 출신으로, 적군 복무와 국가계획위원회 당비서를 거쳐 1927년 OGPU에 입문했다. 1937년 스몰렌스크 UNKVD 국장으로서 '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을 조작해 예조프에게 보고했고, 예조프의 "라트비아인 1,500~2,00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내 라트비아 작전 전역을 촉발시켰다. 1938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독일·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계 주민을 겨냥한 대량 체포와 즉결처형 체계를 도입해 수개월 만에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1938년 12월 베리야의 NKVD 숙청으로 체포돼 1940년 1월 총살되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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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4OGPU 경제관리국 수사관
  • 1934–1935중·볼가 지방 UNKVD 경제부장
  • 1935–1937모스크바주 UNKVD 3부장
  • 1937–1938스몰렌스크주 UNKVD 국장
  • 1938벨라루스 SSR 내무인민위원

드미트리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로프

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1 ✕ 처형

소련 기갑군을 설계하고 그 첫 희생양이 된 장군

1940년 12월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파블로프는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인민의 적이 너무 많아서, 그 모두가 정말 적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장군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직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하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1937년부터 붉은군대 자동차장갑전차국장으로서 T-34 개발과 기갑 교리를 주도한 소련 기갑군의 설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고, 붉은군대에 합류해 시베리아에서 바스마치 반란까지 진압했다. 1941년 6월 서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 중앙집단군의 주공을 정면에서 맞았으나 전선은 참사로 무너졌다. 민스크 함락 후 체포되어 직무 태만으로 기소되었고, 전쟁 발발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되었으며, 그가 설계를 주도한 T-34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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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36제4기계화여단장 겸 정치위원 — 키예프 대기동훈련에서 두각
  • 1936–37스페인 내전 전차여단장 「파블로」 — 소련영웅 수훈
  • 1937–40자동차장갑전차국장 — T-34·KV 전차 개발 추진
  • 1940–41서부특별군관구 사령관, 육군대장 진급
  • 1941.06서부전선 사령관 — 비아위스토크-민스크 포위 참패
  • 1941.07.22체포·재판·총살 — 1957년 복권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아스타호프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ста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2 ✕ 옥사

독소 접근의 비밀 통로를 연 베를린 소련 대리대사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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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볼셰비키당 입당
  • 1918–1920베를린 통신사 특파원, 블라디카프카스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2–1928터키·독일·일본 전권대표부 언론 부서 근무
  • 1928예멘 파견, 소련 최초의 아랍국 조약(소-예멘 우호) 체결
  • 1930–1935터키·영국 전권대표부 고문
  • 1936–1937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37–1939독일 주재 소련 대사관 고문·대리대사
  • 1940체포, 15년형 선고 (1942년 수용소에서 사망)

미하일 G. 그리고리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Григорь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97–1942 ✕ 자살

모스크바 방어전의 33군 사령관, 스탈린의 퇴각 거부로 뱌지마에서 포위되어 자결하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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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제국군 포병 사관후보생, 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 1917–1920붉은 근위대 합류, 내전에서 중대·대대·연대·여단 지휘, 장갑열차로 바쿠 점령
  • 1921–193333소총사단장, 군사고문으로 중국 파견,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소총군단장
  • 1937–1940볼가·자바이칼·오룔·북캅카스·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41.01–07보병총감 제1부감, 21군 사령관, 중부전선 사령관
  • 1941.10–1942.0433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나로-포민스크 돌파 분쇄, 뱌지마 포위에서 전사

바실리 티모페예비치 볼스키

Василий Тимофеевич Воль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6 ○ 결핵

스탈린에게 작전 실패를 경고한 편지를 쓴 소련 전차군 사령관

11월 17일, 공세 이틀 전, 볼스키는 직속 상관을 건너뛰어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우라누스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고.

차르 군대 이등병으로 출발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볼스키는 1930년대 초 소련 최초의 기계화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4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공세 이틀 전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우라누스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스탈린과의 통화 후 편지를 철회하고 공세에 참가해 포위망 최초 봉쇄 부대가 되었다. 이후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발트 해방과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했으며, 결핵 악화로 전선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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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이등병, 제1차 세계 대전
  • 1918–1921정치위원, 남북전쟁 (연대·사단·군단급)
  • 1930–1935제6기계화여단장 등 기계화부대 지휘
  • 1939–1941모스크바 기계화·차량화 군사아카데미 부원장
  • 1942–1943제4기계화군단(후 제3근위기계화군단)장, 스탈린그라드
  • 1943–1944적군 기갑·기계화부대 부사령관
  • 1944–1945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탄 말라카

Tan Malaka
인도네시아 공산당 공산주의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897–1949 ✕ 처형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아버지,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접목한 혁명 이론가

“모스크바에 앉아 인도네시아 혁명을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식민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 1926년 봉기 승인을 구하러 마닐라로 온 알리민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 초기 의장이자 『공화국을 향하여』의 저자.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연대를 주장해 코민테른과 결별했고, 해방 후 완전 독립 노선으로 신생 공화국의 방향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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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포트 더 콕 사범학교 졸업, 다툭(datuk) 족장 칭호 수여
  • 1913–1919네덜란드 유학, 러시아혁명에 감화되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19–1920델리 차 농장 노동자 자녀 교사 — 『가난한 자들의 땅』 집필
  • 1921.6사레카트 이슬람 학교(세콜라 탄 말라카) 설립, 세마랑과 반둥으로 확산
  • 1921.12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의장 취임 — 세마운 후임
  • 1922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네덜란드로 추방 — CPN 하원 후보 출마
  • 1922–1923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범이슬람주의와 공산주의 연대 주장
  • 1923–1925코민테른 동방부 대리인 — 광저우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향하여』 집필
  • 1925–1927마닐라 체류, 1926년 PKI 봉기를 반대했으나 저지 실패
  • 1927방콕에서 인도네시아 공화당(PARI) 결성 — 코민테른과 결별
  • 1927–1942중국·싱가포르·필리핀 등지에서 가명으로 지하활동 — 『마딜록』 집필
  • 1945–1946인도네시아 귀환, 투쟁연맹 결성 — 스자르르 내각 퇴진 견인
  • 1946–1948체포·구금 — 수감 중 자서전 『감옥에서 감옥으로』 집필
  • 1949.2.21동자바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 체포되어 총살

트라이초 코스토프

Трайчо Костов
불가리아 공산주의 불가리아 불가리아 1897–1949 ✕ 처형

억압을 집행하고 스탈린의 숙청에 쓰러진 불가리아 2인자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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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불가리아 공산당 입당
  • 1924공산 출판 배포로 8년형 선고
  • 1931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기관지 편집
  • 1937정치국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
  • 1942지하 저항 조직 중 종신형 선고
  • 1945–48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6–49부총리 · 전력화부 장관, 경제 정책 총괄
  • 1949해임·체포·재판 후 교수형

레오니트 알렉산드로비치 고보로프

Леонид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ов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55 ○ 심장마비

콜차크 백군에서 시작해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를 깬 소련 원수

1944년 1월 27일 봉쇄 완전 해제. 스탈린은 관례를 깨고 승전 축포 명령을 고보로프에게 맡겼다. 대조국전쟁에서 어떤 전선군 사령관도 받지 못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뱌트카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제국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내전에서 콜차크 백군에 복무하다 1919년 탈주, 블류헤르 51사단에 들어가 적군으로 전향했다. 대숙청 시기 백군 경력으로 의심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독소전에서 5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맡아 주코프의 신임을 얻었고,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 방어를 체계화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하고 1944년 1월 완전 해방을 이뤘다. 전후 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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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7콘스탄틴 포병학교 졸업, 제국군 소위
  • 1918–19콜차크 백군 8카마 사단 포대 장교, 중위 진급 후 탈주
  • 1920–21블류헤르 51사단 포대장, 페레콥·카홉카 전투서 부상, 적기훈장
  • 1933–38프룬제 사관학교·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원수 반', 포병 교관
  • 1941.10–42.045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방어·반격
  • 1942.04–45.05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이스크라 봉쇄 돌파, 완전 해방, 비보르크·발트 공세
  • 1944.06소비에트 연방 원수 진급, 소비에트 연방 영웅, 승리훈장
  • 1948–55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자하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Зах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바그라티온에서 강등된 농민 출신 사령관, 불같은 성격의 육군대장

예료멘코 원수는 이렇게 평했다: '자하로프는 머리는 나쁘지 않고 의지가 강하지만 끔찍한 무례자다.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때로는 구타하기까지 한다.'

사라토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1세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1916년 징집되었다. 1917년 10월 병사들에게 연대장으로 선출된 후 적군에 합류, 동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아카데미를 마친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좌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제2근위군을 이끌며 미우스 강 방어선 돌파와 세바스토폴 해방에 기여했다. 1944년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가했으나 공세 지연으로 신임을 잃고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전후 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과 비스트렐 과정장을 지냈다. 날카로운 작전 감각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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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준위 학교 졸업. 10월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 선출
  • 1919적군 입대, RKP(b) 입당. 동부전선에서 내전 종군
  • 1923–1939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우랄 군관구 참모장(1939–1941)
  • 1941–1942제22군 참모장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서부전선군 부사령관
  • 1942–1943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 좌익 부대 지휘로 반격 성공
  • 1943–1944제2근위군 사령관 — 미우스강·페레코프 돌파, 세바스토폴 해방
  • 1944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육군대장 진급. 바그라티온 후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
  • 1945–1954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비스트렐 과정장,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안나 미하일로브나 판크라토바

Анна Михайловна Панкратова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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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연구원
  • 1942–1949『카자흐 SSR사』(1949) 집필 지도 — 소련 최초의 공화국 통사
  • 1952제19차 당대회에서 CPSU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53–1957잡지 『역사의 제문제』(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주필
  • 1955–1957소련 역사가 전국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리치코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Рыч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59 ○ 자연사

대숙청부터 전범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관장한, 법학 학위 없는 법무인민위원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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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7나데즈딘스크 제철소 선반 견습생·금속 선반공
  • 1917–1918나데즈딘스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서기
  • 1918–1920우랄의 체카(ВЧК) 기관 근무
  • 1921–1922제5군 군사재판소 부의장 (이르쿠츠크)
  • 1922–1927시베리아 군관구 군사검사
  • 1927–1931붉은 군대 검찰 부검사
  • 1931–1937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 (1936년 사단군법관 계급)
  • 1937.8–1938.1러시아 SFSR 검사
  • 1938.1–1948.1소련 법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법무장관)
  • 1947–1948독일 전범 공개 재판 상설위원회 위원장
  • 1948–1955육군 부군사검사 → 주군사검찰 부장 (1955년 퇴역)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크류코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Крю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59 ○ 자연사

근위기병군단의 영웅, 전리품 사건으로 무너지고 해빙기에 복권되다

1948년 9월 모스크바. 소련영웅 금성훈장을 단 크류코프 중장이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압수품에는 다이아몬드 208개, 레핀과 세로프의 그림 132점, 고급 승용차 3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형량은 징역 25년.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위까지 지낸 후 적군에 합류한 소련의 기병 지휘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장으로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을 이끌어 194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종전 후 유명 민요 가수 리디야 루슬라노바와 결혼했으나, 1948년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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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소위로 전역
  • 1918–20적군 합류, 남부·동부전선에서 기병대 지휘
  • 1933–37제4코사크기병사단 제20기병연대장, 주코프 휘하
  • 1940소련-핀란드 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로 레닌훈장
  • 1941제198차량화사단장, 레닌그라드 방어전
  • 1942–45제2근위기병군단장, 비스와-오데르·동포메라니아 작전, 소련영웅
  • 1948–53'전리품 사건' 체포, 25년형, 1953년 복권
  • 1955–57군사법률아카데미 부원장, 퇴역

미론 세묘노비치 보브시

Мирон Семёнович Вовси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7–1960 ○ 육종

소련군 전시 치료 체계를 수립한 주임 내과의사, 그리고 '의사들 음모'의 첫 피고인

절단 수술 후 라포포르트가 문병하자 보브시가 말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나? 이제 나는 다리만 잃었을 뿐 사람으로 남았지만, 거기서 나는 사람이기를 그만뒀네.'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1941~1950)로서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군대 전역의 치료 체계를 조직하고 전시 내과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8년 살해된 솔로몬 미호엘스의 사촌으로, 1953년 1월 '의사들 음모' 사건의 수괴로 타스 통신에 지목되어 체포·고문당했다. 스탈린 사후 석방되어 보트킨 병원에서 임상과 연구를 재개했으며, 말기 육종으로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병원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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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모스크바대학 의학부 졸업, 붉은군대 입대
  • 1919–1921제6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 사단 연대 선임의사
  • 1922–1935모스크바대학 내과 클리닉 연구원, 이후 의학생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1935–1941중앙의사연수원 내과 주임·보트킨병원 치료과장
  • 1941–1950붉은군대(이후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
  • 1943의무부대 소장 진급
  • 1948소련 의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3'의사들 음모'로 체포, 스탈린 사후 석방·복직

보리스 리보비치 반니코프

Борис Львович Ва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7–1962 ○ 자연사

탄약과 원자력 행정을 맡은 베리야의 생산 관리자

«스탈린 동지, 당신은 적들에게 갇히셨지만, 나는 우리 편에게 갇혔습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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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방위산업과 병기 생산 행정에서 성장
  • 1941체포 직후 전쟁 발발로 석방되어 탄약 생산에 복귀
  • 1941–1945탄약인민위원, 포탄·탄약 대량생산 체계 지휘
  • 1945–1953제1총국에서 원자폭탄 계획 행정 담당
  • 1953 이후베리야 몰락 뒤에도 원자력 생산 행정 경험으로 생존

바실리 다닐로비치 소콜롭스키

Василий Данилович Сокол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러시아인(출처 상충) 1897–1968 ○ 자연사(모스크바, )

그로드노 현 빈농의 아들, 소련 핵시대 군사교리를 세우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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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붉은 군대 자원입대(1918), 군사아카데미를 최우수 3인 중 하나로 졸업
  • 1921–30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바스마치와 교전, 전투 중 총상
  • 1941–42서부방면군 참모장 — 모스크바 반격 계획 주도
  • 1943–44서부방면군 사령관 —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경질
  • 1944–45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 제1벨로루시 방면군 부사령관
  • 1946–49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 지휘
  • 1952–60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
  • 1960–68국방부 총감찰; 1962년 『군사전략』 주편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68 ○ 자연사

NKVD에 고문당하고 살아 돌아와 레닌그라드 봉쇄를 뚫은 원수

1941년 6월 23일 체포되어 9월 6일 석방되었다. 회고록에는 두 달간 "내 의사와 무관한 사정"으로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고 적었다.

러시아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에 모스크바 제철공이 되었고, 1917년 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를 조직해 서기가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7군을 지휘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참모총장이던 1941년 6월 23일 반소 군사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레포르토보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9월 6일 석방되었고 수사 파일은 1955년 폐기되었다.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깼고, 1945년 제1극동전선을 이끌어 관동군을 격파했다. 1944년 원수에 올랐고 1968년 사망해 유골이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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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 조직, 서기 겸 적위대 참모장
  • 1918–19218월부터 적군 복무, 카잔 전투에서 부상, 1921년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2–1937벨로루시·극동군관구 참모장, 1936~1937년 스페인 내전 군사고문(가명 페트로비치)
  • 1939–19401939년 12월 9일부터 제7군 지휘, 만네르헤임 선 돌파로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0–19411940년 8월부터 참모총장, 이듬해 1월 해임; 1941년 6월 체포·고문, 9월 석방
  • 1942–1944볼호프·카렐리야 전선 사령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 돌파, 1944년 원수
  • 1945제1극동전선 사령관, 관동군 격파로 승리훈장
  • 전후연해·모스크바·백해·북부 군관구 사령관, 국방성 감찰총감으로 현역 유지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샬린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Ш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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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 1931–1936제13소총군단 부참모장, 프룬제 사관학교 동방학부 졸업
  • 1936–1939정보총국(Razvedupr): 일본 주재, 제2(동방)과 과장 대리, 정보지휘관 중앙학교장, 제5국 부국장 대리
  • 1940–1941제16군 참모장 — 스몰렌스크 방어전 참가
  • 1941–1943제22군 참모장 — 모스크바 전투, 르제프 전투
  • 1943–1946제1전차군·제1근위전차군 참모장 — 쿠르스크,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공세
  • 1946–1949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
  • 1949–1951GRU 제1국장 겸 부국장
  • 1951–1952GRU 제1부국장 겸 한국전쟁 파견 —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 1952–1956GRU 국장 (제1차)
  • 1956–1957GRU 제1부국장 (쉬테멘코 체제)
  • 1957–1958GRU 국장 (제2차)
  • 1958–1960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질병으로 퇴역

폴리나 세묘노브나 젬추지나

Полина Семёновна Жемчужин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장관: 크렘린 권력과 유대인 정체성 사이에서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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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볼셰비키 입당, 붉은군대 정치장교
  • 1930–32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
  • 1932–36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
  • 1937–39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9수산공업 인민위원 — 최초 여성 산업장관
  • 1939–48경공업부 방직·잡화 본부장
  • 1942–48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활동
  • 1949–53체포·출당·쿠스타나이 유배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쿠라소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Кур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97–1973 ○ 자연사

참모의 예술로 1발트전선군을 설계한 소비에트 군사 지성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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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 1946–1949중부군집단 총사령관 겸 주오스트리아 소련 최고위원
  • 1949–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1차)
  • 1956–1961참모본부 부참모장 겸 군사과학국장
  • 1961–1963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2차), 교수 직함 수여
  • 1963–1968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 동독 국가인민군 지도
  • 1968–1973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3 ○ 암으로 사망

전선을 포위로 예술로 만든 원수, 평화 속에서는 정치군인

1945년 4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나란히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에 들어갔지만 제국의사당 게양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5월 9일 프라하를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고, 같은 해 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베리야 재판부를 이끌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1957년 주코프 실각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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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하사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1922적군 장갑열차 정치위원, 여단·사단 정치위원, 내전 종군
  • 1941서부전선군 사령관 — 뱌지마 포위에서 패배, 주코프의 구명으로 복귀
  • 1943–1944스텝·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코르순 포위전 성공, 원수 진급
  • 1944–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베를린·프라하 점령, 두 번째 영웅칭호
  • 1946–1950, 1955–1956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 1955–1960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지휘
  • 1953특별재판부 의장으로 베리야 사형 판결

쿠즈마 니키토비치 갈리츠키

Кузьма Никитович Гал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3 ○ 자연사

숙청을 견디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한 육군대장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된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어 석방되었다.

타간로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내전과 겨울전쟁을 거쳐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어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붉은군대에 복귀했다. 종전 직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여러 군관구와 북부군집단을 지휘하고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건강상 이유로 퇴역해 197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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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

장궈타오

张国焘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7–1979 ↓ 실각 1938 · 자연사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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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

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7–1982 ○ 자연사

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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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파벨 이바노비치 바토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85 ○ 자연사

65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진격한 도하 작전의 명수

'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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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1차대전, 제국육군 정찰대 지휘, 게오르기 십자훈장 2회
  • 1918–21붉은군대 내전,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군사고문 (가명 파블로 프리츠), 중상
  • 1939–403소총군단장, 폴란드 진주·핀란드 전역
  • 1941–4251군 부사령관→사령관(크림), 3군 사령관(브랸스크 전선)
  • 1942–4565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베를린
  • 1955–62카르파티아·발트 군관구 사령관, 남부군집단 사령관
  • 1962–65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 (소련군 제1부참모총장 겸임)
  • 1970–81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예젠잉

叶剑英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7–1986 ○ 자연사

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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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75–1978국방부장
  • 1978–198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고르킨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Гор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88 ○ 자연사

재활의 최고재판소장, 오렌부르크에서 살아남은 자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취임한 고르킨 앞으로, 스탈린 시대에 총살된 옛 당원들의 명예회복 청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자신 오렌부르크에서 동료 전원이 숙청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916년 입당한 농민 출신 볼셰비키. 오렌부르크 주당 제1서기 시절 동료 전원이 숙청된 후,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5년간 사법적 재활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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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RP(볼셰비키) 입당
  • 1917–19트베리 시소비에트 서기, 트베리 현집행위원장
  • 1919쿠르스크 현체카 간부, 펜자 현농촌부장
  • 1934–37오렌부르크 주당위 제1서기
  • 1937–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서기
  • 1938–53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1953–56 부서기)
  • 1956–57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재임)
  • 1957–72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9–61CPSU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프랑스 의용유격대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계 1897–1993 ○ 자연사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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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세묜 자하로비치 긴즈부르크

Семён Захарович Гинзбург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93 ○ 자연사

소련 건설의 첫 인민위원, 전시 공업을 기초부터 세우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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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지즈드라 소비에트 서기, 제8군 정치부
  • 1919–1921군사경제아카데미 정치위원
  • 1927–1932MVTU 강사, 노농검사인민위원부 건설그룹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 (오르조니키제 휘하)
  • 1937–1938중공업 부인민위원
  • 1938–1939건설위원회 의장 (인민위원회의 산하)
  • 1939–1946초대 건설인민위원 (Наркомстрой)
  • 1946–1947군사·해군 건설 인민위원 → 장관
  • 1947–1950건설자재공업 장관
  • 1963–1970스트로이방크 총재

레온 야코블레비치 가이키스

Леон Яковлевич Гайки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8–1937 ✕ 처형

스페인 주재 두 번째 소련 대사, 부임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총살당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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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폴란드 사회당 좌파·사회민주당 활동, 적군 제11군 복무
  • 1920카자흐 군사혁명위원회(Kazrevkom) 간부
  • 1921–1924외무인민위원부 근무, 치체린 인민위원 비서
  • 1924–1928주멕시코 대사관 일등서기관 겸 대리대사
  • 1929–1933프로핀테른(적색노조인터내셔널) 근무
  • 1935–1936주이스탄불 총영사
  • 1936–1937.02주스페인 대사관 고문
  • 1937.02–06주스페인 전권대표(대사)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피린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Фи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8–1937 ✕ 처형

‘개조’ 선전을 만든 드미트라크 수용소장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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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적군 정보기관 요원(그리스·터키·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 1932–1933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
  • 1933–1937드미트라크 수용소장(모스크바-볼가 운하)
  • 1937체포와 처형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란게마크

Георгий Эрихович Лангема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8–1938 ✕ 처형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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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 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 1923–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 1928–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 1934–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 1937–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 1955/1991사후 복권(1955), 사회주의노동영웅 추서(1991)

아브람 아로노비치 슬루츠키

Абрам Аронович Слу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38 ✕ 독살로 전한다

야고다 시대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대외정보국장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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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안디잔 혁명재판소 의장, 투르케스탄 체카
  • 1922–1925투르케스탄 최고재판소 부의장, 이어 군사재판소 의장
  • 1926–1930OGPU 경제국 과장, 이어 부국장
  • 1930–1934INO OGPU 부국장(유럽 담당, 일부 기간 베를린 잠복)
  • 1934–1935국가보안총국 대외국 부국장
  • 1935–1936국가보안총국 대외국(INO) 국장
  • 1936–1938국가보안총국 제7부장
  • 1938프리놉스키의 집무실에서 사망

아크말 이크라모비치 이크라모프

Акмаль Икрамович Икра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8–1938 ✕ 처형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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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나만간 교육국 교사·시찰관, 페르가나 농촌사업부장
  • 1920–1921나만간 혁명위 부위원장, 무슬림국 의장, 페르가나·시르다리야 지역위 책임서기
  • 1921–1922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조직부장 겸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학
  • 1924–1929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 중앙위 제2서기,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9–1937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집단화·목화 단작 주도
  • 1934–193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소수민족 출신 유일)
  • 1937–1938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총살

야코프 아브라모비치 데이치

Яков Абрамович Дей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98–1938 ✕ 옥사

예조프의 비서국장을 거쳐 로스토프주 트로이카에 든 NKVD 국장

야코프 데이치는 1937년 로스토프주 NKVD 국장으로서 대숙청을 집행한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8년 수사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11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북캅카스 체카·오게페우에서 체첸-그로즈니 주 지부장 등을 지냈고, 모스크바주와 칼리닌주를 거쳐 1936년 NKVD 인민위원 작전비서, 11월부터 NKVD 비서국장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1937년 체포된 정보기관 간부 아르투조프 사건의 '수사'에 관여했다. 1937년 8월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로스토프주 NKVD 국장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3월 체포되어 9월 27일 옥중에서 숨졌고, 고문 때문으로 추정된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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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 1920–1931체카·GPU·OGPU에서 북캅카스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924~1925년 체첸-그로즈니주 부서를 이끌었다.
  • 1931–1936모스크바주 OGPU에서 근무한 뒤 1935~1936년 칼리닌주 NKVD 국장을 지냈다.
  • 1936–1937NKVD 중앙기구에서 인민위원 작전비서와 비서국장을 맡아 아르투조프 사건의 수사에 참여했다.
  • 1937–1938아조프흑해 변경주와 로스토프주 NKVD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8년 3월 체포되어 9월 수사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표트르 표도로비치 불라흐

Пётр Фёдорович Була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8–1938 ✕ 처형

기한보다 먼저 쏘기 시작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38년 7월 28일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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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NKVD 요원
  • 1936–1937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
  • 1937–1938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기한 전 대량작전 개시, 상한 초과 집행
  • 19383월 해임, 4월 체포
  • 1940총살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고르바치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орба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8–1939 ✕ 처형

옴스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상한 증액을 몰고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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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7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
  • 1937옴스크주 NKVD 국장, 한도 9천 명 증액
  • 1937–1938노보시비르스크주 NKVD 국장
  • 1938하바롭스크(극동) 변경주 NKVD 국장
  • 1938–193911월 체포, 총살

마트베이 다비도비치 베르만

Матвей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39 ✕ 처형

굴라크를 확장한 최장수 수장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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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부랴트-몽골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27–1928우즈베크 GPU 의장
  • 1930–1932굴라크 부수장
  • 1932–1937굴라크 수장
  • 1936–1937내무부인민위원 겸임
  • 1937–1938체신인민위원
  • 1938–1939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예피모비치 콜초프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ольц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40 ✕ 처형

소비에트 저널리즘의 대표적 목소리, 헤밍웨이가 카르코프로 형상화한 인물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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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오고뇨크』 편집장
  • 1925–1938저널-가제타 연합(주르가즈) 책임자
  • 1922–1938『프라우다』 특파원
  • 1934–1938『크로코딜』 편집장
  • 1932–1938『자 루베좀』 창간자 겸 편집자
  • 1936–1937스페인 내전 프라우다 특파원 겸 소련 정치 대리인
  • 1934–1938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장
  • 1938러시아 SR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미하일 일리치 코시킨

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40 ○ 폐렴

T-34를 낳고 폐렴으로 사라진 41세의 수석설계자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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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러시아 제국군 징집, 서부전선에서 부상
  • 1918–21붉은군대 자원입대, 차리친·북부전선에서 전투
  • 1919RKP(b) 입당, 제3철도여단 당세포 서기
  • 1921–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졸업
  • 1924–29뱟카에서 제과공장장·당 선전선동부장
  • 1929–34레닌그라드 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중형전차 변속기로 졸업
  • 1934–36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 전차설계국, T-29·T-46-1 개발 참여
  • 1936–37하리코프 183호 공장 KB-190 설계국장, BT-7 디젤 개량 완료
  • 1937–39KB-24 조직,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39.12T-34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붉은군대 정식 채택
  • 1940.3하리코프-모스크바-하리코프 시제차 시험주행 직접 수행
  • 1940.9폐렴 악화로 사망, 후임 수석설계자 A. 모로조프

미하일 페트로비치 프리놉스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Фри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40 ✕ 총살

예조프의 강철 부관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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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체카·GPU 요원
  • 1926–1930아제르바이잔 GPU 책임자
  • 1933–1936OGPU·NKVD 국가보안총국 부지도부
  • 1936–1938내무인민위원 제1부관·국가보안총국장
  • 1938–1939해군인민위원
  • 1939–1940체포, 재판과 처형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 리조바

Серафим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ыж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40 ✕ 처형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을 받아 낸 그의 오랜 비서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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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당 중앙위 각 부서 기술서기
  • 1930–1936당 중앙위에서 예조프의 비서
  • 1936–1938NKVD 비서국 근무 후 당 중앙위 복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말체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ь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8–1940 ○ 옥사

지역 보안기구를 지휘한 실무형 국가보안 관료

판결문은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NKVD에서 ‘근거 없는 체포’와 수사자료 조작을 허용했다고 기록했다.

이반 말체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을 거쳐 국가보안기관의 지역 지휘관이 된 소련 관료였다. 그는 우랄과 시베리아, 북캅카스의 조직을 거치며 VChK·OGPU·NKVD가 지방 행정과 정치적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이끈 그는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테러의 집행 구조에 책임을 졌으며, 이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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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빌림바이 공장 적위대 분견대 지휘관
  • 1918–1921적군 동부전선 정치·군사 간부
  • 1921–1925예카테린부르크 губерния ЧК·GPU 요원, 타길 지구부장
  • 1925–1931첼랴빈스크·페름·톰스크 OGPU 지구부장
  • 1931–1935오렌부르크 작전부문장, 중부볼가 OGPU 전권대표 보좌
  • 1936–1938아디게이 자치주 NKVD 부장,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 NKVD 부부장
  • 1938–1939노보시비르스크주 NKVD 부장, 특별 트로이카 참여

이반 페트로비치 포파셴코

Иван Петрович Попаш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8–1940 ✕ 처형

쿠이비셰프주에서 대량작전 트로이카에 든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명령 제00447호의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탄압을 집행했고, 모스크바에서는 대숙청 관련 체포 작전을 지휘했다.

보로네시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사마르칸트에서 자랐다. 1918년 입당해 투르키스탄과 북캅카스의 특별부에서 경력을 쌓은, 예브도키모프가 이끈 '북캅카스파'의 일원이었다. 1937년 1~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으로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특별 트로이카에 들어 탄압을 집행했다. 가을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행정경리국장과 작전부장을 지내며 '우익·트로츠키 지하조직'과 민족 작전 관련 체포·수색·호송을 맡았다. 1938년 1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총살되었고, 2013년 복권 불가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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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볼셰비키당에 가입하고 사마르칸트 주 혁명재판소 서기를 지냈다.
  • 1920–1935투르키스탄과 북캅카스에서 체카·GPU·OGPU의 특별부서와 작전부서를 맡았다.
  • 1935–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 1937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과 볼가 군관구 NKVD 특별부서장을 맡았으며, 명령 제00447호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 1937–1938모스크바에서 NKVD 행정경리국장, 제2 작전부장, 제3 특별부장을 지냈다.

블라디미르 게오르기예비치 데카노조프

Владимир Георгиевич Декано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8–1953 ✕ 처형

리투아니아 병합을 연출하고 베를린에서 선전포고를 받은 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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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체카·GPU 근무
  • 1936–1938그루지야 식품공업인민위원, 이어 고스플란 의장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제5부장(대외정보)
  • 1939–1947외무 부인민위원(부장관)
  • 1940리투아니아 주재 전권대표, 병합 감독
  • 1940–1941독일 주재 소련 대사
  • 1953그루지야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레버이 요제프

Révai József
헝가리 노동인민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59 ○ 심장병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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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차렙스키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Цар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8–1963 ○ 뇌졸중

마야크 플루토늄 단지를 세운 내무부 공병 소장

톰스크-7 건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원자로가 아니라 빵 공장이었다. 그는 '내가 석공을 구해 오겠다'며 수용자 중 벽돌공을 직접 찾아 데려왔다.

체카 기병 출신의 소련 내무부 공병 소장이자 산업 건설자로,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 시설인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 건설을 지휘했다. 1947년 ITL 제859호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해 1948년까지 4만 5천 명의 인원으로 공업용 원자로와 방사화학 공장을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까지 소련 핵 지도의 주요 시설을 연이어 건설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1949)과 스탈린상(195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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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4제국군 기병 위생병 → 1917년 볼셰비키 입당 → 체카 기병대 내전 참전, 특별기병대대장
  • 1925–1936발라흐나 제지공장 → 고리키 자동차공장 → 니즈니타길 자동차공장 건설 총책임자, 타길스트로이 트러스트장
  • 1937–1941NKVD 콜스트로이 트러스트장, 몬체고르스크 니켈 콤비나트, 세베로니켈 ITL 국장
  • 1941–1943북부전선 방어시설 건설 → 제2공병군 사령관 → 악튜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건설 국장
  • 1943–1946타길스트로이-타길라그 NKVD 국장, 소장 진급(1943.2)
  • 1946–1950콤비나트 제7호(에스토니아) → 콤비나트 제817호 마야크(첼랴빈스크-40) 건설 국장 겸 ITL 제859호장
  • 1950–1962글라프프롬스트로이 제1부국장 →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 건설 지휘

바실레 루카

Vasile Luca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헝가리계 1898–1963 ○ 옥사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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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판필로프

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Панф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66 ○ 자연사

화학전 정보로 처칠을 움직인 GRU 국장, 베를린까지 진군한 전차군 중장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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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 1927–31제5기병여단 정치부장 겸 군정위원 → 레닌그라드 군관구 군검찰 보좌관
  • 1931–37군사기술아카데미 입학 → 기계화·차량화 군사아카데미 지휘학부 졸업
  • 1937–40기갑시험장 군정위원 → 기갑총국 부국장 → 제2기계화여단장(하산 호) → 정보총국(GRU) 부국장
  • 1941–42GRU 정보총국장 대행(7~9월) → 정식 국장(10월~) 겸 참모본부 부총장 겸 안데르스군 편성 전권위원
  • 1942–43제3전차군 부사령관(코젤스크) → 제5전차군 부사령관(보로실로브그라드)
  • 1943–44기갑·기계화군 총국 제2부국장 → 제6근위전차군단장(키예프·지토미르)
  • 1944–45제3근위전차군단장 — 동포메라니아·베를린 공세, 그디니아-단치히 독일 제2군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5–51제3근위전차사단장 → 기갑군사아카데미 공병전술학부장 → 외국군 장교 교육학부장
  • 1952–53북부군관구 기갑·기계화군 사령관
  • 1954–59참모본부 아카데미 고위과정 졸업 → 동 아카데미 교관·전술학부 부장, 1959년 11월 예편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원수이자 1957–1967년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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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도비 이슈트반

Dobi István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68 ○ 자연사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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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류사오치

刘少奇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69 ○ 옥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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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야코블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시 내내 포병을 책임지고 로켓 시대를 연 군수 원수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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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제국군 징집 → 붉은군대 입대; 제1차 세계대전·내전 참전, 페트로그라드 포병과정 졸업
  • 1920–193728산악사단 포대장·포병연대장 등 포병 지휘관 역임, 고등포병학교 졸업(1924)
  • 1937–1941벨로루시아·북카프카스·키예프 특별군관구 포병사령관; 폴란드 원정·겨울전쟁 참전
  • 1941–1948포병총국(GAU)장; 포병원수 진급(1944); 전시 내내 포병 보급·개발 총괄
  • 1948–1952군무차관; S-60 대공포 결함으로 1952년 2월 체포·계급 박탈
  • 1953–1960복권(1953.4); 방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총사령관; S-25 위원장; ABM 서한 공동서명
  • 1960–1972국방부 감찰장단 감찰고문; 회고록 『Об артиллерии и немного о себе』

마트베이 바실리예비치 자하로프

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격전을 예견하고 오데사 군관구를 구한 참모, 냉전 소련군의 총참모장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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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적위대원으로 겨울궁전 습격, 볼셰비키 입당
  • 1918–1921적군 포병 지휘관으로 내전 종군, 차리친 전투 참가
  • 1924–1937프룬제 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벨라루스 군관구 작전과장
  • 1938–1940적군 참모부 부참모장
  • 1940–1941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 6월 21일 자발적 경계태세 명령
  • 1941–1944칼리닌·스텝·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주요 공세 기획
  • 1945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만주 전략작전 기획
  • 1945–1949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 1949–1952참모부 부참모장 겸 정보총국(GRU) 국장
  • 1953–1957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57–1960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0–1963소련군 총참모장 — 흐루쇼프와 충돌 후 경질
  • 1964–1971총참모장 재임명, 냉전기 전략 현대화 지휘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카바노프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Каб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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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러시아SFSR 공공주택인민위원 → 러시아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8–1939소련 식품공업인민위원 (수개월 만에 강등)
  • 1940–1941'디나모'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모스크바)
  • 1941–1951소련 전기공업인민위원 → 전기공업장관 (1946년 개칭)
  • 1951–1953국가물자기술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제1부의장 → 의장
  • 1953소련 국내·대외무역부 제1차관
  • 1953–195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대외경제활동위원회 부의장 — 소련 장관

펑더화이

彭德怀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74 ○ 옥사

대약진을 비판했다가 숙청된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이자 한국전쟁 지휘관

'나는 하이루이(海瑞)가 되겠다!' — 1962년 마오쩌둥에게 제출한 8만 자 상소문에서, 황제에게 직언한 명나라 청렴 관리를 자처하며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했고 국방부장으로서 소련식 군대 개혁을 추진한 군사 지도자였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서한으로 비판한 일로 '반당 집단' 수장으로 숙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투옥·고문 끝에 1974년 옥사했으며 197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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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국민당 군대에서 봉기, 홍5군 창설 후 징강산에서 마오·주더와 합류
  • 1930–1934홍3군단 사령관, 장시 소비에트 방어전 지휘
  • 1934–1935대장정 참가,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 지지
  • 1937–1940팔로군 부총사령관, 백단대전 총지휘
  • 1947–1949서북야전군 사령관, 옌안 방어 및 서북 5개 성 해방
  • 1950–1953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한국전쟁 지휘
  • 1954–1959국방부장, 중앙군사위 부주석; 소련식 군 현대화 추진
  • 1959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비판 서한으로 숙청, 전직 박탈

캉성

康生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75 ○ 자연사

옌안 정풍의 「구조(搶救)」 운동부터 문화대혁명까지 당의 보안·정보를 쥔 마오의 심문관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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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중공 중앙 사회부장 (정보·보안)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고문
  • 1973–1975중공 중앙 부주석

게오르기 사모일로비치 이세르손

Георгий Самойлович Иссерс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6 ○ 자연사

종심작전 교리의 삼두정치를 완성한 군사 이론가. 그리고 버림받은 예언자

「전쟁은 일반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이미 전개된 군대로 그냥 시작된다. 동원과 집중은 1914년처럼 전쟁 상태 발발 이후의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은밀히 진행된다」 — 『새로운 투쟁 형태』(1940)

소련의 군사 이론가이자 군 장교로, 트리안다필로프와 투하쳅스키와 함께 종심작전(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 교리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전술의 진화』(1932, 1937)는 전략과 전술 사이의 작전술을 체계화한 기념비적 저작이며, 참모 아카데미 작전술 학과장으로서 붉은 군대 지휘관 세대를 양성했다. 1940년 저서 『새로운 투쟁 형태』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동원 없는 전쟁 개시를 예언했으나 스탈린 지도부는 외면했고, 이 책은 오늘날 게라시모프 doctrine에서 인용되며 재평가되고 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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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준사관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여름 붉은 군대 자원입대
  • 1918–21제6군 정치부, 제159소총연대 군 정치위원, 제154소총연대 부지휘관
  • 1921–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졸업; 서부전선 참모부 정보부장 겸임 (1923–24)
  • 1925–30레닌그라드 군관구 작전부장 → 제10소총군단 참모장
  • 1930–3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작전학부장 (1932)
  • 1933–36제4소총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1935년 콤브리그 계급 부여
  • 1936–39참모본부 제1부 부부장 → 참모 아카데미 군 작전학과장 → 작전술 학과장, 교수
  • 1939.12겨울전쟁 당시 제7군 참모장 (12월 17–30일), 콤디브 계급 (12.9)
  • 1940–41국방인민위원회 배속; 『새로운 투쟁 형태』 출간 (1940); 1941년 6월 7일 체포
  • 1942–55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 복역; 만기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
  • 1955–761955년 6월 복권, 대령 계급 회복 후 퇴역; 『군사사상』 편집부 근무, 저술 재개

저우언라이

周恩来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76 ○ 자연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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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49–1958외교부장
  • 1971–1972키신저 비밀 회담과 미중 정상회담으로 가는 외교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76 ○ 자연사

미추린 농생물학으로 소비에트 생물학을 30년간 지배한 농학자

「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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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간자 육종시험장 연구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개발
  • 1929–1938오데사 전연방육종유전연구소(VSGI) 선임전문원 → 소장
  • 1938–1956, 1961–1962VASKhNIL 총재
  • 1940–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488월 VASKhNIL 총회 — 멘델유전학 '패배' 선언, 전국 금지
  • 1965–1975'고르키 레닌스키예' 실험기지 실험실장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펠로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пе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9 ○ 자연사

스탈린의 전기를 쓰고, 그 신화를 해체한 역사가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포스펠로프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베리야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야? 그만해!"라고 외쳤다. 불과 3년 뒤, 바로 그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된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탈린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프라우다』를 9년간 이끈 당 역사가. 흐루쇼프 시기에는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로 스탈린 신화 해체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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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볼셰비키 입당, 트베리에서 노동조합·당 활동, 첼랴빈스크에서 백군 점령 하 지하운동, '죽음의 열차'로 알렉산드롭스크 중앙형무소 수감 후 탈출, 시베리아 파르티잔 활동
  • 1924–1930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붉은 교수양성소 경제학부 졸업
  • 1931–1939잡지 『볼셰비키』 및 『프라우다』 편집, 당통제위원회 출판 담당,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 집필 참여, 아지트프로프 부책임자 (1937–1939), 제1부책임자 (1939–1940)
  • 1940–1949『프라우다』 주필, 전시 스탈린상 수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 증보판 「이오시프 스탈린 약전」 편찬 참여
  • 1949–1952, 1961–1967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두 차례), 다권본 「소비에트 연방 대조국전쟁사」·「레닌 전기」 편집 주도
  • 1953–1960중앙위 서기, '포스펠로프 위원회' 위원장으로 스탈린 시대 대량 탄압 조사 — 보고서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됨
  • 1957–1961중앙위 간부위원회 후보위원,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말렌코프 반당 그룹 비판 연설
  • 1972–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부 아카데미크 서기 대행, 1973년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말년에 『볼셰비키』 지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스탈린의 역할을 옹호하는 복합적 입장 견지

게뢰 에르뇌

Gerő Ernő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80 ○ 자연사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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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리디야 페오도시예브나 티마슈크

Лидия Феодосьевна Тимаш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83 ○ 사망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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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하사관의 딸로 출생
  • 1920사마라 의대 재학 중 발진티푸스·콜레라 방역에 동원
  • 1926제1모스크바대 의대 졸업, 크렘린 병원(레치산우프르) 근무 시작
  • 1943–1953NKVD-MGB 비밀정보원으로 활동
  • 1948.8기능진단과장으로서 즈다노프의 심근경색 진단 후 상부에 항의 편지 발송
  • 1953.1'의사-살인자 적발 공로'로 레닌 훈장 수훈, 전국적 영웅으로 부상
  • 1953.4스탈린 사후 레닌 훈장 박탈, 이듬해 노동적기훈장 수훈
  • 1964크렘린 병원 퇴직, 사망 시까지 명예 회복을 청원

해리 헤이우드

Harry Haywood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98–1985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 벨트' 테제의 설계자: 남부 흑인은 자결권을 가진 억압된 네이션이다

“흑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억압된 네이션의 문제이며 완전한 자결권을 가진다.” — 『흑인 해방』(1948)

전 노예의 아들로 급진화된 미국 공산주의자. 코민테른에서 남부 흑인 자결권 테제를 수립했고, CPUSA 정치국원과 스페인 내전 정치위원을 지냈다. 탈스탈린화 반대로 제명된 후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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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제1차 세계대전 — 미 육군 제8연대(흑인연대) 복무, 프랑스 전선 참전
  • 1922–1925아프리카 혈맹단 → 청년공산주의동맹 → 미국공산당 입당
  • 1926–1930모스크바 유학 —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국제레닌학교, 코민테른 흑인문제 결의 초안
  • 1931–1938CPUSA 정치국원 겸 흑인부장 — 스코츠보로 구명운동, 남부 소작인조합 조직
  • 1937스페인 내전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 브루네테 전투
  • 1943–1945제2차 세계대전 — 미국 상선대 복무
  • 1948『흑인 해방』 출간 — 남부 흑인 해방을 미완의 민주혁명 과제로 이론화
  • 1959반수정주의와 흑인 자결권 고수로 CPUSA에서 제명
  • 1964–1978신공산주의 운동 — 10월동맹/CPML 중앙위원, 『블랙 볼셰비키』 출간
브라질 공산당 공산주의 브라질 브라질 1898–1990 ○ 자연사

희망의 기사: 2만 5천 km를 행군한 브라질 혁명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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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프레스테스 종대 참모장 — 14개 주 25,000km 행군
  • 1931–1934소련 망명,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
  • 1934브라질 공산당 입당
  • 1935ANL 명예의장 · 코민테른 집행위원 · 무장봉기 지도
  • 1936–1945수감; 1943년 PCB 사무총장으로 선출
  • 1945–1948연방 상원의원; 1947년 당 불법화 후 지하활동
  • 1943–1980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 (37년간)
  • 1971–1979군사독재 아래 소련 망명; 1979년 사면으로 귀국

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Ефим Павлович Сла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91 ○ 자연사

29년간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한 '위대한 예핌'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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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지휘 후 강제 퇴임

취추바이

瞿秋白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9–1935 ✕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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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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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이그나티 스타니슬라보비치 레이스

Игнатий Станиславович Рейс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갈리치아 유대계) 1899–1937 ✕ 암살

스탈린에게 결별장을 보내고 NKVD에 살해된 소련의 불법공작원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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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 가입
  • 1921–1937중·서유럽에서 코민테른·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 불법공작 수행
  • 1928정보 공작 공로로 적기훈장 수훈
  • 1937.07스탈린 체제와 공개 결별, 훈장 반납과 제4인터내셔널 지지 선언
  • 1937.09로잔 근교에서 NKVD 암살조에 피살

이반 테렌티예비치 클레이묘노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Клеймё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9–1938 ✕ 처형

로켓 연구를 국가 기관으로 묶은 조직가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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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 1920–1921붉은군대 군수·보급 복무
  • 1928–1930공군과학연구소 공방장
  • 1930–1932베를린 소련 무역대표부 공학부 부책임자
  • 1932–1933기체역학연구소 소장
  • 1933–1937반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원장
  • 1937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 프로펠러·엔진 부문 부소장
  • 1938처형, 1955년 무혐의 복권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비노그라도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40 ✕ 처형

수오무살미 참패 후 사단 앞에서 총살된 제44사단장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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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동부전선에서 콜차크군과 교전 중 부상
  • 1920–1924보병 지휘 과정 수료, 소대장·중대장 보좌
  • 1924–1937제48소총병사단 내 중대장·연대학교장·연대 참모장 역임, 1936년 소령
  • 1937–1938제143소총연대장, 1938년 대령 진급
  • 1938–1939지휘관 예비역, 중국 특별 파견; 1939년 1월 콤브리그 진급
  • 1939.01–1940.01제44소총병사단장: 폴란드 침공, 겨울전쟁 라테 도로 전투
  • 1940.01.11제9군 군사재판소 사형 판결, 사단 앞에서 총살

발터 게르마노비치 크리비츠키

Вальтер Германович Крив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갈리치아 유대계) 1899–1941 ✕ 의문사, 자살 판정

스탈린의 비밀 정보 활동을 서방에 처음 증언한 망명 정보관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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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혁명기 붉은군대 정보 활동 시작
  • 1921–1935군사정보국(4국) 요원, 유럽 비합법 활동
  • 1935–1937헤이그 주재 비합법 레지덴트
  • 1937라이스 암살 뒤 파리에서 망명
  • 1939회고록 출간, 미 의회 증언
  • 1941워싱턴에서 사망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야르체프

Борис Аркадьевич Рыб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1899–1947 ✕ 의문의 교통사고사

정보관의 얼굴로 수행한 위험한 외교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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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예카테리노슬라프 체카에 입문
  • 1924–1929OGPU 반정보 부문 간부
  • 1931–1935이노 OGPU 중앙아시아·해외 공작
  • 1935–1938헬싱키 소련 공사관 영사, 야르체프 명의 활동
  • 1938–1939핀란드와 비밀 협상 담당
  • 1941–1943스톡홀름 소련 공관 정보 거점 책임
  • 1944–1945동유럽 비합법 공작·공작원 침투 부서장
  • 1947MGB 대외특수공작 중 사망

안드리야 헤브란그

Andrija Hebrang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899–1949 ✕ 옥중 실종 · 사망 처리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란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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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플라토노프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ич Платон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51 ○ 병사

유토피아의 폐허를 쓴 엔지니어

1932년 10월, 고리키의 말라야 니키츠카야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을 향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1년 전 자기 손에 파멸한 작가를 그 자리에서 찾았다.

기술자이자 토지개량 전문가였던 그는 소설가로 돌아서 소련 문학에 뚜렷한 목소리를 남긴 작가였다. 본명은 클리멘토프이며, 아버지의 이름 플라톤에서 따온 '플라토노프'는 필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쓴 『체벤구르』와 『구덩이』는 집단화와 스탈린 정책을 회의적으로 그려 수십 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했고, 마지막 출판물은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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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기술자·기자·시인으로 활동
  • 1927–1929『체벤구르』와 『구덩이』 집필
  • 1930년대검열과 출판 배제
  • 1942–1945전쟁 특파원 활동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9–1953 ✕ 처형

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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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31캅카스 체카·GPU
  •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 1945–53원폭 계획 총괄(특별위원회 의장)
  • 1953.3–6제1부총리, 사면·복권 등 개혁안 연발
  • 1953.6/12체포, 처형

솔로몬 라파일로비치 밀시테인

Соломон Рафаилович Мильштей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55 ✕ 처형

강제이주의 열차를 조직한 수송총국장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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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8그루지야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등
  • 1938–1939NKVD 수사부 부부장
  • 1939–1941NKVD 수송총국장
  • 1941–1942NKVD 특별부관리국 제1부국장
  • 1942–1943NKVD 수송국장
  • 1943–1947NKGB·MGB 제3관리국장(수송)
  • 1951–1953MVD 굴라크 부수장
  • 1953우크라이나 내무 제1부장관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압크센티 나리키예비치 라파바

Авксентий Нарикиевич Рапа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9–1955 ✕ 처형

십 년간 그루지야 경찰기구를 운영한 자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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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아자리야 GPU 책임자
  • 1931–1933그루지야 GPU 부의장
  • 1936–1937자캅카스·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 1937–1938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이어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8–1943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 1943–1948그루지야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8–1951그루지야 법무장관
  • 1953그루지야 국가통제장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스테판 아코포비치 아코포프

Степан Акопович Ак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9–1958 ○ 자연사

전시 중형기계에서 자동차공업까지 이끈 아르메니아계 생산 관료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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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말리닌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Мал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60 ○ 자연사

로코솝스키의 불가분의 참모장, 위대한 공세의 기획자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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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 1945소련 영웅 칭호 수여; 독일주둔 소련군 참모장
  • 1948–50지상군 주참모장
  • 1953–60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1956년 헝가리 개입 계획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크랍첸코

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9–1963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만주까지, 소련 최정예 전차군을 이끈 기갑사령관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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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남북전쟁 참전 — 타라샤 연대, 제44소총병사단, 제60소총연대
  • 1923폴타바 보병학교 졸업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173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소련-핀란드 전쟁 및 베사라비아 진주 참전
  • 1941–1942제31전차여단장 (모스크바 방어전), 제61군 전차병과 부사령관
  • 1942제1전차군단 참모장 → 제2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 1942–1944제4전차군단장 → 제5근위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포위, 쿠르스크, 드네프르)
  • 1944–1947제6전차군 사령관 →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 (코르순,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만주)
  • 1948–1954자바이칼·발트·극동 군관구 기갑·기계화병과 사령관, 극동 군관구 전차무장 담당 부사령관
  • 1955건강 악화로 예비역 편입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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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리리싼

李立三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9–1967 ✕ 실각 1930 · 자살

1930년 도시 봉기 노선 「리리싼 노선」으로 당을 이끌다 실각한 노동운동 지도자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을 조직한 중공 노동운동 지도자로, 1930년 3월부터 8월까지 당 중앙의 실권을 쥐었다.

후난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 입당했고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 1925년 5·30 운동의 조직자였다. 1928년 이후 당 중앙의 실권을 쥐고 1930년 혁명의 고조가 왔다며 창사·우한 등 대도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실각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5년 동안 소련에 머물며 소련인 아내를 맞았고 1946년 귀국해 노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속에 1967년 자살했으며 1980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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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0중공 중앙 선전부장 · 실질적 지도자
  • 1949–1954노동부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Вор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엮어낸 붉은군대 포병의 설계자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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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붉은군대 입대,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군 포로
  • 193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포병연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포병 고문 (암호명 '볼테르')
  • 1937–40적군 포병 총책임자, 할힌골·겨울전쟁 참전
  • 1941–50포병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 스타프카 대표로 주요 작전 지휘
  • 1943천왕성 작전 포병 계획 수립, 파울루스 직접 신문
  • 1944최초의 포병 총사령관 진급, 타임지 표지 인물
  • 1950–68포병과학아카데미 원장, 포병지휘아카데미장, 감찰장단

파벨 표도로비치 유딘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Ю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주의 철학 정통을 세우고 말년에 소련 문화사의 토대를 잉태한 철학자 외교관

「유딘과 미틴은 하늘의 별을 딸 재목은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는 일을 잘 안다」 — 스탈린, 두 철학자를 평가하며

1930년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를 숙청한 철학자.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하고 주중 대사로 중소 분열을 목격했다. 말년에 비정통파 문화사학자들을 보호해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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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제고로드 현 아프락시노 촌락 빈농 가정 출생, 1912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이주하여 선반공 견습
  • 1918–1921붉은 군대 지원 입대, 콜차크군과 교전. RKP(b) 입당(1918.10), 정치지도원에서 제57소총사단 연대 정치위원까지 승진
  • 1921–1931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1924), 니제고로드 현당 선전선동부장·현신문 『즈베즈다』 편집국장(1924~1927),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1931)
  • 1930–1932미틴·랄체비치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대하여」(『프라우다』 1930.6.7) 발표 —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 숙청 개시
  • 1932–1938적색교수양성소 소장, 『문학비평가』 주필(1933~1937),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 조직위 책임서기, 아기트프롭 부장(1934~1937)
  • 1937–1947국립출판사연합(OGIZ) 소장, 1937년 「왜 RAPP를 해체해야 했는가」로 키르숀·아베르바흐 공격 — 키르숀은 이후 체포·처형됨
  • 1939–1944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통신회원(1939),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모스크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임(1943~1948)
  • 1950–1951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베이징 파견 — 마오쩌둥 『선집』 러시아어판 편집, 중국 각지에서 정치·이론 강연. 마오와 철학·정치 대화
  • 1952–1959CPSU 중앙위원(1952~1961), 당중앙 간부회의 후보위원(1952.10~1953.3). 주중 소련 대사(1953.12~1959.10) —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노선에 비협조, 중소 분열 초기 목격 후 소환
  • 1960–1968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인류와 문화' 4권 기획 참여. '세계 문화사' 프로젝트 지도 — 아베린체프·구레비치·카주단 등 비정통파 학자 기용, 사후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남김

필리프 세르게예비치 옥탸브리스키

Филипп Сергеевич Октябрь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69 ○ 자연사

흑해함대를 이끌고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을 방어한 해군 제독, 그리고 대피 논쟁의 주인공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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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발트함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20발트함대 기뢰학교 졸업
  • 1924이바노프에서 옥탸브리스키로 개명 (10월 혁명 기념)
  • 1938–1939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하산 호 전투 참전
  • 1939–1943흑해함대 사령관 —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
  • 1943–1944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경질 후 좌천)
  • 1944–1948흑해함대 사령관 복귀, 제독 진급 (1944.4.10)
  • 1948–1951해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나히모프 흑해고등해군학교장
  • 1960–1969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

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70 ○ 자연사

〈쿨레쇼프 효과〉의 창안자, 편집이 촬영보다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아버지

“우리는 영화를 만든다 — 쿨레쇼프는 영화를 만들었다.” — 1929년 제자들이 스승의 저서 《영화의 예술(나의 경험)》 서문에 바친 헌사

소련 영화감독·이론가·교육자. '쿨레쇼프 효과'로 몽타주의 심리적 원리를 입증했고, 1919년 세계 최초 영화학교(VGIK)를 창설해 에이젠슈테인·푸돕킨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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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한존코프 영화사에서 예브게니 바우에르의 미술감독으로 영화계 입문
  • 1918첫 연출작 〈프라이트 기술사의 계획〉 — 초기 몽타주 실험을 담은 데뷔작
  • 1919국립영화학교(현 VGIK) 설립, 세계 최초의 체계적 영화 교육 시작
  • 1920〈붉은 전선에서〉 — 다큐와 극을 결합한 최초의 소비에트 영화, 쿨레쇼프 워크숍 결성
  • 1924〈볼셰비키 나라의 미스터 웨스트〉 — 쿨레쇼프 집단의 첫 장편으로 소비에트 영화의 국제 경쟁력 입증
  • 1939VGIK 교수 임명, 예술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941저서 〈영화 연출의 기초〉 출간 — 전 세계 영화학교의 표준 교재
  • 1944–1969VGIK 학장(1944), 이후 연출학과장으로 25년간 후진 양성; 노동적기훈장·레닌훈장·인민예술가 수훈

스레텐 주요비치

Сретен Жујо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1899–1976 ○ 자연사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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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세묜 모이세예비치 크리보셰인

Семён Моисеевич Кривоше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78 ○ 자연사

구데리안과 함께 브레스트 열병식을 주관한 소련 기갑군 중장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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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 군대 입대, 남북전쟁 참전 (제1기병군)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제7기계화연대 참모장
  • 1934제6기계화연대장
  • 1936–1937스페인 내전 참전,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전차부대 지휘
  • 1937제8독립기계화여단장 (곧 전차여단으로 개편)
  • 1938하산 호 전투 조사위원회 대표로 파견
  • 1939폴란드 진주: 제29전차여단 지휘, 브레스트에서 구데리안과 합동 열병식
  • 1939–1940겨울전쟁 참전, 비보르크 점령
  • 1940–1941소장 진급; 제15기계화사단장, 제2전차사단장, 제25기계화군단장
  • 1941–1943적군 기갑총국 전투훈련국장
  • 1943제3기계화군단장; 쿠르스크 오보얀 축선 방어; 중장 진급, 근위군단 승격
  • 1944제1기계화군단장; 바그라치온 작전에서 브레스트 탈환
  • 1945비스와-오데르·베를린 공세 — 4월 25일 베를린 최초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6–1949프룬제 사관학교 기갑전술학과장
  • 1950–1952오데사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사령관
  • 1953예비역 편입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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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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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나움 이사코비치 에이팅곤

Наум Исаакович Эйтинг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9–1981 ○ 자연사, 모스크바

트로츠키 암살과 원자력 첩보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암약 지휘관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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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 1940수도플라토프와 '오리 작전' 공동 지휘 — 멕시코 트로츠키 암살
  • 1941–1945NKVD 제4국 부책임자 — 기만작전 '수도원'·'베레지노' 지휘
  • 1945–1951NKVD/NKGB 'S' 부서 부책임자 — 원자력 첩보; 발트·서우크라이나 반소 파르티잔 제압
  • 1951–1964'MGB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 12년형;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일시 복직 후 재체포
  • 1964–1981석방, 출판사 선임 편집자; 1992년 사후 복권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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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수르코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р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젬랸카〉를 썼고 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지휘한 작가동맹 집행자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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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붉은 군대 복무, 내전 참전
  • 1926–1928『세베르니 콤소몰레츠』 편집장
  • 1934–1939『리테라투르나야 우초바』 부편집장, 문학대학 강사
  • 1940–1941『노비 미르』 편집장
  • 1941–1945종군기자, 전선 신문 특파원
  • 1944–1946『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49–1953『오고뇨크』 편집장
  • 1953–1959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56–196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그로모프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Гро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9–1985 ○ 자연사

기록비행의 영웅에서 공군 지휘관으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1937년 7월 14일, ANT-25기가 캘리포니아 샌재신토 목장에 착륙하자 현지 목장 주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로모프는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전설적 시험비행사이자 공군 지휘관. 1937년 ANT-25기로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무착륙 비행해 세계 거리 기록을 세웠고, 독소전쟁에서는 항공군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이감을 주선해 소련 우주 개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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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NII VVS 시험비행사
  • 1930–1941TsAGI 수석 시험비행사
  • 1941LII 초대 소장
  • 1942–1943제3항공군 사령관
  • 1943–1944제1항공군 사령관
  • 1944–1946VVS 전선항공 전투훈련총국장
  • 1946–1949장거리항공 부사령관
  • 1949–1955항공산업성 비행근무국장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차긴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гин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9–1987 ○ 자연사

숙청당한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련 마르크스주의 철학사 연구의 대부

1930년대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에서 차긴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체포되었고, 대다수는 총살되었다.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 동료들이 스탈린 숙청으로 전원 처형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그의 철학 저작 선집 편집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플레하노프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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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남북전쟁 및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전, RKP(b) 입당
  • 1922–1931교편 생활 시작, 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 1930s붉은군대 교육기관·레닌그라드 공산아카데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 1940–1941레닌그라드대학 철학학부 학장
  • 1946철학박사 학위 취득
  • 1956–1967레닌그라드대학 철학사 교수주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철학부문 선임연구원·주임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바르민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р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7 ○ 자연사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해 망명한 소련 GRU 준장: 극소수 생존자

「내가 책을 쓸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실수처럼 느껴진다」 — 『살아남은 자』(1945)

소련 군사정보국(GRU)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와 그리스 주재 대리대사를 역임했다.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7년, 동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처형 소식을 접한 뒤 아테네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OSS에서 복무하고 16년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회고록 『살아남은 자』에서 '내가 집필할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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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RCP(b) 입당
  • 1920–23보병장교학교·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수학
  • 1921–25투르케스탄 전선 RVS 전권대표, 부하라 총영사, 페르시아 길란 총영사
  • 1929–32파리·밀라노·브뤼셀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34–35아프토모토엑스포르트 청장; 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대표부 1등서기관
  • 1935–37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 그리스 주재 소련 대리대사
  • 1937.7그리스에서 프랑스로 망명 — 초기 고위급 소련 정보장교 망명자
  • 1940–44미국 이주; 미육군 사병 복무 후 OSS(전략첩보국) 근무
  • 1948–64미국의 소리(VO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
  • 1964–72미국 정보국(USIA) 소련 담당 고문

녜룽전

聂荣臻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9–1992 ○ 자연사

진차지 근거지의 사령관에서 「양탄일성」 핵·미사일 계획의 총책임자가 된 원수

1958년부터 국방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국 핵 계획을 지휘했고, '제국주의의 핵 공격을 받을 때 최소한의 보복 수단을 갖추기 위해' 첨단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벨기에·소련에서 배우고 황푸군관학교 정치교관을 지냈다. 대장정에서 린뱌오의 제1군단 정치위원이었고 항일전쟁기 화베이의 진차지 근거지를 세워 지휘했다. 국공내전 뒤 베이징 시장을 지냈고 1955년 원수가 되었다. 1956년부터 국무원 과학기술 담당 부총리로 소련 원조 철수 뒤에도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이르는 국방과학 계획을 총괄했다. 10대 원수 중 마지막으로 199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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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5진차지 군구 사령관
  • 1958–1975국방과학기술위원회 주임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돌레잘

Николай Антонович Доллежал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체코 1899–2000 ○ 자연사

소련 원자로 설계의 총설계사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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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MVTU 졸업, 기계기사
  • 1930–1932프롬파르티야 사건으로 수감; OGPU OKB-8 부수석기사
  • 1933–1942볼셰비크 공장(키예프) 수석기사 · 우랄히마쉬 수석기사
  • 1943–1952NIIkhimmash 소장 (1946년부터 원자력 사업 참여)
  • 1952–1986NII-8 / NIKIET 소장
  • 1954오브닌스크 AM-1 원자로 수석설계자 (세계 최초 원전)
  • 1961–1986MVTU '원자력기계' 학과장

바실리 아브라모비치 카루츠키

Василий Абрамович Кару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900–1938 ✕ 자살

대량작전 트로이카에 들었다가 체포를 앞두고 자살한 NKVD 국장

카루츠키는 명령 제00447호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스탈린 시기 탄압을 실행했으며, 1938년 5월 체포를 예상하고 자살을 시도해 그날 병원에서 숨졌다.

톰스크의 유대인 점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8년 콜차크군 군악대에 동원되었다가 탈영해 적색 빨치산에 합류했고,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투르크멘 GPU 의장, 카자흐스탄 오게페우 전권대표를 거쳐 서시베리아 변경주, 서부주, 모스크바주 NKVD 국장 등을 지내며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한편 '해결률'을 높이려는 증거 날조에는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1938년 4월 NKVD 참사회원이 되었으나 체포가 임박하자 5월 13일 권총 자살을 기도해 그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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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체카에서 근무를 시작해 동시베리아 군관구 특별부 부책임자, 제26소총사단·제5군 혁명군사재판소 수사관 등을 지냈다.
  • 1922GPU에서 프리모리예·아무르주 부서장, 투르크멘 SSR GPU 의장, 중앙아시아 오게페우 전권대표부 부대표와 카자흐스탄 전권대표 등을 지냈다.
  • 1934카자흐 자치 SSR과 서시베리아 변경주의 NKVD 국장, 벨로루시 SSR 내무인민위원 부위원장, 서부·스몰렌스크·모스크바주 NKVD 국장 등을 지냈다. 00447호 작전의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 19384월 5일 NKVD 참사회원이 되었다. 5월 13일 체포를 예상해 권총 자살을 시도했고, 그날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고레프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Го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계 1900–1938 ✕ 처형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한 국제주의 군인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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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적군, 러시아 내전 참전 및 지휘관
  • 1925–1927중국 국민혁명군 군사·정보 고문, ‘니키틴’·‘고든’
  • 1930–1933미국 비합법 정보원
  • 1933–1935레닌그라드 군관구 자동차·기갑 부대 지휘부
  • 1935–1936제31독립기계화여단장 겸 정치위원, 콤브리그
  • 1936–1937스페인 공화국군 소련 군사고문 및 군사주재관, ‘산초’
  • 1937스페인 북부 전선 군사고문
  • 1938체포·처형, 1956년 복권

이반 야코블레비치 라브루신

Иван Яковлевич Лавру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40 ✕ 처형

고리키주 트로이카 의장을 지낸 NKVD 국장

1937년 6월부터 고리키주 NKVD 국장과 주 트로이카 의장을 맡아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탄압을 집행했다. 체포된 뒤 1940년 총살되었다.

오룔의 식당 급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입당했고, 1920년 제1기병군 특별부를 거쳐 체카에 들어갔다. 돈과 쿠반에서 부농 청산과 카자크 청산 정책을 집행했고, 샤흐티-도네츠 작전구역에서 '샤흐티 사건' 날조에 가담했다. 북캅카스 변경주 NKVD 비밀정치부장 등을 거쳐 1937년 6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고리키주 NKVD 국장으로 일하며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주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았다. 1938년 12월 4일 체포되어 1940년 1월 28일 총살되었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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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1919년 적군에 입대했고 1920년 제1기병군 특별부에서 일했다. 1922년 흑해관구 GPU 정보·요원부장이 되었다.
  • 1925–1937블라디캅카스·쿠반 GPU에서 정보·등록 및 방첩 부서를 이끌었고, 1931~1933년 샤흐티·도네츠 작전구역 부국장을 지냈다. 부농 청산·카자크 청산 정책을 집행하고 샤흐티 사건 등 사건 조작에 가담했다.
  • 1933–1938북캅카스 GPU·NKVD에서 비밀정치부장 등을 맡았고, 1937년 고리키주 NKVD 부국장을 거쳐 1937년 6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국장이었다.
  • 1938–19401938년 12월 4일 체포되었다. 1940년 1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1956년 딸에게는 1945년 수감 중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시테른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Штер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유대인,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출신, 현 우크라이나) 1900–1941 ✕ 재판 없이 총살

하산·할힌골의 승리자, 숙청된 극동전선 사령관

1939년 7월 5일 국방인민위원 명령으로 시테른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선집단이 편성되어 제1붉은기군, 제2붉은기군, 자바이칼군관구, 제57특수군단을 통제했다. 7월 19일 제57특수군단이 주코프의 제1군집단으로 개편되었다.

1900년 8월 6일(구력 7월 24일) 키예프현 스멜라(현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에서 태어나 1941년 10월 28일 사망한 소련 군사지휘관이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키예프의 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했다. 1937~38년 '그리고로비치'라는 성으로 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을 지냈고,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을 지휘했다. 1939년 7월 5일 전선집단 사령관으로 할힌골 전투를 총괄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41년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 음모와 독일 스파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고, 10월 28일 쿠이비셰프 인근에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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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4투르키스탄에서 바스마치 토벌
  • 192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졸업, 국방인민위원부 참모
  • 1936제7사마라기병사단장
  • 1937–1938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 (가명: 그리고로비치)
  • 1938극동전선 참모장 →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 지휘
  • 1938–1939제1독립붉은기군 사령관
  • 1939할힌골 전투 전선집단 사령관 —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0제8군 사령관 (겨울전쟁) → 극동전선 사령관, 상장 진급
  • 1941방공총국장 → 6월 체포, 10월 28일 재판 없이 처형

이반 이바노비치 마슬렌니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Масле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54 ✕ 자살

NKVD 부인민위원에서 육군대장까지: 두 세계를 오간 군사령관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마슬렌니코프가 협상장에 나타나자 수감자가 외쳤다 — 「장군! 41년에 우릴 무장도 없이 늪지에 버렸소! 우린 25년형인데 장군만 살아남으셨군요!」 마슬렌니코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철도원 아들로 내전에서 기병여단장까지 올랐고, 1928년 OGPU 국경군으로 이적해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39년 베리야에 의해 NKVD 부인민위원 겸 국경·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 발발 후 29군·39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 선봉, 캅카스 전투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을 지휘해 바쿠 유전을 사수했으며, 1944년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프스코프·타르투·리가를 탈환하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대일전에서 바실렙스키 부사령관으로 관동군 격멸 작전을 입안해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MGB 부장관으로 복귀했으나 베리야 몰락 후 '부대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추궁받다 1954년 4월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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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붉은군대 복무, 내전 종결 시 기병여단장
  • 1928–1935OGPU·NKVD 국경군,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1937–1939벨로루시 NKVD 국경군 사령관, 벨로루시 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 국경군·내무군 총괄
  • 1941–194229군·39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반격, 르제프 포위
  • 1942–1943북부집단군 사령관,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
  • 1944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 — 프스코프·타르투·리가 탈환, 육군대장
  • 1945극동 소련군 부사령관 — 관동군 격멸 작전, 소비에트 연방 영웅
  • 1948–1954MGB·MVD 부장관 — 소련 내무군 총괄

라브렌티 포미치 차나바

Лаврентий Фомич Цана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0–1955 ○ 옥사

‘두 번째 라브렌티’, 미호엘스 살해를 주관한 베리야의 사람

1948년 1월 12일 밤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은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본명 라브렌티 잔즈가바로, 1900년 쿠타이시 현 나후나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20년 8월 당에 입당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기관을 이끌며 서부 벨로루시의 대규모 총살과 추방을 조직했고, 이 시기 체포자에 대한 구타에 직접 가담했다는 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의 지시로 미호엘스 암살이 결정되자 그의 다차가 작전 거점이 되었고, 1948년 1월 12일 밤 극장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1951년 말 소련 MGB 부장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4월 체포되어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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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4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벨로루시 NKVD, 서부·중부전선 특별부장
  • 1942–1943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
  • 1943–195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1–1952소련 국가보안 부장관, 제2총국장(방첩)
  • 1953–1955체포, 재판 없이 옥중 사망

박헌영

박헌영
조선공산당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55 ✕ 처형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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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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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자루빈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Зару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58 ○ 자연사

캐나다·영국·미국, 냉전기 서방 3대 수도에서 소련을 대표한 외교관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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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붉은 군대 복무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35산업아카데미 원장
  • 1935–1938경공업인민위원부 교육기관 총국장
  • 1938–1940뉴욕 세계박람회 소련관 부총감독·예술위원회 의장
  • 1940–1941외무인민위원부 영사국장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중남미국장
  • 1944–1946주캐나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46–1952주영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8소련 외무부 차관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예프레모프

Дмитрий Василь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0 ○ 자연사

NKVD 수사 받던 전기기술자가 전기공업장관이 되어 원자폭탄의 동위원소 분리법을 낳기까지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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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8'엘렉트로실라' 공장 설계기사 → 전기기계연구실장 → 기술부장
  • 1938–1941NKVD 수사 중 '엘렉트로실라' 제40부서 특수연구실장으로 발전기 설계 지속
  • 1941–1947'엘렉트로실라' 공장 주임기사 → 부공장장, 특수설계국장(1945–1946) 겸임
  • 1947–1948소련 전기공업차관 — 기술관리국장 겸 과학기술평의회 의장
  • 1948–1951소련 전기공업 제1차관
  • 1951–1953소련 전기공업장관
  • 1953–1954소련 발전소·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54–1956소련 각료회의 화학·전력국 부의장
  • 1956–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

세묜 알렉세예비치 라보치킨

Семён Алексеевич Лавоч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0 ○ 심장마비

La-5와 La-7로 동부전선 제공권을 장악한 전투기 설계자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비행기를 생각했다 — 이미 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행기를.”

세묜 라보치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공군 주력 전투기 La-5와 La-7을 설계한 항공기 설계자로, 22,000대 이상 생산되어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LaGG-3로 시작한 OKB-301은 전후 La-176으로 소련 최초 음속 돌파(1948년)를 달성했고, 1950년대 이후 S-25 베르쿠트 방공망과 SA-2 대공미사일, 순항미사일 부랴 개발로 방공·우주 분야로 전환했다. SA-2는 1960년 게리 파워스의 U-2기 격추로 냉전사에 기록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4회, 과학아카데미 회원, 공병기술소장을 지냈으며 1960년 사리샤간 시험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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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0–1927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수학, 항공역학 기사 자격 취득
  • 1927–1939각 항공설계국에서 근무, 1939년 항공기 제작 수석설계사 직급
  • 1939–1940고르부노프·구드코프와 함께 LaGG-3 전투기 공동 개발, OKB-301
  • 1940–1945OKB-21 수석설계사(고리키), La-5·La-7 전투기 설계, 22,000대 이상 생산
  • 1945–1960OKB-301 총책임자(힘키), La-15 제트 전투기, S-25·SA-2·부랴 미사일 개발 주도

파벨 표도로비치 지가레프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Жига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3 ○ 자연사

바르바로사 작전의 폭풍 속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하고, 해빙기에는 다시 공군을 재건한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공장 전보들이 증명한 진실: 701대의 완성 항공기가 조종사 부족으로 공장 비행장에 묶여 있었다. 스탈린 앞에서 지가레프의 '전투 불가' 이야기는 산산조각 났고, 스탈린은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열한 놈! 꺼져!"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에서 항공으로 전환한 소련 공군 지도자였다. 1941년 6월 독일 침공 직후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전쟁 첫해의 참담한 손실과 항공기 생산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대면에서 거짓말이 발각되어 1942년 4월 경질되었다. 이후 극동전선 공군을 지휘하며 1945년 소일전쟁에서 제10항공군을 이끌었고, 전후 장거리 항공대를 지휘하다 1949년 다시 공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1957년까지 재임하며 제트기 전환을 주도했다. 1955년 항공 총원수로 진급했고, 말년에는 민간항공총국장과 방공군사령학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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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제4트베리 기병학교 졸업, 기병 소대장
  • 1927레닌그라드 군사비행관측사 학교 졸업
  • 1932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 지휘학부 졸업
  • 1937–1938주중 소련 대사관 항공 무관보, 중국 내 소련 의용비행대 지휘
  • 1938–1939국방인민위원부 공군 전투훈련국장
  • 1940–1941공군 총국 제1부국장 → 국장
  • 1941–1942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
  • 1942–1945극동전선 공군 사령관
  • 1945제10항공군 사령관 — 소일전쟁 참전
  • 1946–1948공군 제1부총사령관 겸 장거리 항공대 사령관
  • 1949–1957공군 총사령관, 국방차관 → 국방제1차관 (1955)
  • 1955항공 총원수 진급
  • 1957–1959민간항공총국장
  • 1959–1963방공군사령학교장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페도토프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Федо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3 ○ 자연사

체카에서 KGB까지 38년, 방첩과 해외정보를 모두 지휘한 보안장교

1940년, 리투아니아 NKVD에 보낸 지령에서 용의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체포할 것이며, 심문 중 태도에 따라 포섭 여부를 결정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차 차장 아들로 태어나 1921년 체카에 입문한 이후 KGB까지 38년간 소련 보안기관에 몸담으며 방첩과 해외정보 양 영역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NKVD·NKGB 방첩총국장으로서 전시 방첩작전과 카틴 학살에 관여했고, 전후 잠시 MGB 해외정보총국장과 정보위원회(KI) 부의장으로 소련의 대외첩보를 총괄했다. 1954년 KGB 출범과 함께 제2총국(방첩) 국장으로 복귀했으나 흐루쇼프 해빙기인 1956년 스탈린 시대 불법행위로 해임·강등되었고, 1959년 장군 계급을 박탈당하고 제명된 뒤 1963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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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7체카·GPU·OGPU·NKVD에서 북캅카스 지역 방첩·정보·비밀정치부서 요직 역임
  • 1937–1939NKVD 중앙기구(GUGB) 비밀정치부서(SPO) 과장, 제4부 부국장
  • 1939–1946NKVD·NKGB 제2국(방첩) 국장, 전시 방첩 총괄
  • 1946–1947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47–1952정보위원회(KI) 부의장, 소련 해외정보 총괄
  • 1953–1954MVD 제1총국(방첩) 국장
  • 1954–1956K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6–1959KGB 고등학교 편집출판부 차장으로 강등, 1959년 제명·계급 박탈

모리스 토레즈

Maurice Thorez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900–1964 ○ 병사

광부의 아들에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인민전선의 설계자

「프랑스 국민은 결코 소련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 NATO 가입을 앞둔 1949년 2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뉴욕 타임스』 1949년 2월 23일 보도)

탄광 소년 노동자 출신으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정치인(1930–1964). 1936년 인민전선을 설계했고 전후 '프랑스식 사회주의로의 길'로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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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2세에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
  • 1919–1920사회당(SFIO) 입당 →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 참여
  • 1930–1964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34년간 당을 이끎
  • 1936인민전선 결성 주도, 블룸 정부의 사회개혁 뒷받침
  • 1939–1944프랑스군 탈영 후 소련 망명, PCF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드골 정부 국무장관 → 부총리(1946–1947)
  • 1950–1953뇌졸중으로 소련에서 치료, 자크 뒤클로가 당 대행
  • 1964서기장 사임 후 명예 의장, 흑해 유람선에서 사망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즈베레프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Зве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9 ○ 자연사

전쟁과 전후 재정을 버틴 장기 재무장관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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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 스탈린기 재정관료로 부상
  • 1938–1941재무인민위원, 전쟁 전 재정동원 체계 정비
  • 1941–1945전쟁 재정, 국채, 배급경제의 재정 기반 관리
  • 1947전후 화폐개혁과 배급제 폐지 국면에 관여
  • 1950s–1960흐루쇼프와 재정 노선 충돌 뒤 퇴임

콘스탄틴 안드레예비치 베르시닌

Константин Андреевич Верш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73 ○ 자연사

소련 공군을 제트·핵 시대로 이끈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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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남부전선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4항공군 사령관
  • 1943북캅카스전선 공군 사령관
  • 1943–1945제4항공군 사령관 (재임)
  • 1946–194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 1953–1954소련 방공군 사령관
  • 1957–196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재임)
  • 1969–1973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미하일 클라프디예비치 티혼라보프

Михаил Клавдиевич Тихонрав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4 ○ 자연사

패킷 로켓으로 우주 가는 길을 연 이론적 개척자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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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 1956–1974OKB-1 제9설계국장,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 총괄
  • 1962–1974모스크바 항공대(MAI) 교수

오토 브라운

Otto Braun
코민테른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00–1974 ○ 자연사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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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9코민테른 파견 중국 군사고문

미하일 예피모비치 카투코프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0–1976 ○ 자연사

구데리안을 막아내고 근위전차군을 이끈 기갑군 원수

구데리안은 므첸스크에서 카투코프의 T-34에 막힌 후 이렇게 썼다. "그들(러시아군)은 이미 무언가 배웠다."

미하일 카투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제1근위전차군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붉은 군대 최고의 기갑 지휘관이다.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그의 제4전차여단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저지하며 붉은 군대 최초로 근위 칭호를 획득했다. 쿠르스크에서는 전차 매복과 역습으로 독일 남부 돌파를 소모시켰고, 이후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기갑 선봉으로 활약했다. 전후 독일 주둔 소련군 기갑부대 사령관과 국방부 감찰총감을 지냈으며, 1959년 기갑군 원수와 두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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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내전 참전
  • 1932기계화부대로 전속, 참모 및 지휘 보직
  • 1940제20전차사단장 (루츠크-두브노 전투)
  • 1941제4전차여단장 → 제1근위전차여단 (므첸스크-모스크바)
  • 1942제1전차군단장, 이후 제3기계화군단장
  • 1943제1전차군 → 제1근위전차군 사령관 (쿠르스크~베를린)
  • 1945독일 주둔 소련군 제1근위전차군 사령관
  • 1955국방부 감찰총감, 전투훈련총국 부국장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오골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Оголь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6 ○ 자연사

35년간 소련 보안기관의 모든 변천을 관통한 작전가

1945년 12월, 오골초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정치국 회의에서 MGB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며 거절했으나, 6년 뒤 아바쿠모프가 체포되자 그는 바로 그 자리의 대행을 맡았다.

세르게이 오골초프는 체카에서 MVD까지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전 역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1918년 17세로 체카에 들어가 제르진스키의 눈에 띄어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고, 마흐노 진압에서 인질 처형과 봉기 전멸 전술을 익혔다. MGB 차관 및 제1차관(1946–1953)으로서 아바쿠모프 휘하에서 작전 서부·봄·파도 등 대규모 강제이주를 조율했고, 1948년 솔로몬 미호엘스 살해를 민스크에서 직접 지휘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 해임 후 한 달간 MGB 장관 대행을 맡았으며, 스탈린 사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59년 계급과 훈장을 모두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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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사포조크 현 체카 수사관 → 랴잔 현 체카 작전집행위원 → 모스크바 체카 압수수색위원
  • 1920–1925폴타바 현 체카 부서장 → 로흐비차 현 체카·GPU 정치국장
  • 1927–1935OGPU 특별부서장 (제1기병사단, 제95·44·99소총사단 등)
  • 1936–1939NKVD 국경부대 지휘관 (크림·아르한겔스크) → 레닌그라드시 NKVD 국장
  • 1942–1944쿠이비셰프 주 NKVD·NKGB 국장 → 카자흐 SSR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5–1951NKGB·MGB 제1차관 → MGB 차관(일반 담당)
  • 1951–1952MGB 장관 대행(7–8월) → MGB 제1차관 → 우즈베크 SSR MGB 장관
  • 1952–1953MGB 제1차관 겸 MGB GRU 국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노비코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Нов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6 ○ 자연사

붉은 공군을 파멸 직전에서 승리의 공중함대로 탈바꿈시킨 공군 총사령관

1942년 12월~1943년 2월, 노비코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독일군 집단에 대한 공중봉쇄를 조직해 수송기 보급로를 끊었다.

코스트로마 시골의 농민 아들로 태어나 교사로 일하다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30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33년 공군으로 전환해 겨울전쟁에 참전했고 1942년 4월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전선 공군을 항공군으로 바꾸고 동종 항공군단을 세워 대규모 항공작전을 가능케 했으며, 스탈린그라드 공중봉쇄와 쿠르스크·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 작전을 조율했고 1943년 항공원수, 1944년 항공 총원수를 처음 받았다.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야간 심문 끝에 자백을 강요당하고 티크시에서 복역, 1952년 석방과 1953년 복권 뒤 장거리항공대를 지휘했다. 1956년부터 레닌그라드 고등민간항공학교장을 지내고 1966년 중풍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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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30붉은군대 보병 입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3–38공군 전환, 경폭격비행대대장, 레닌그라드 군관구 공군 참모장
  • 1939–41겨울전쟁 참전, 레닌그라드 군관구 공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방어전
  • 1942–46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항공담당 부인민위원, 공군 전면 재편
  • 1943–44최초의 항공원수 (1943), 최초의 항공 총원수 (1944)
  • 1945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만주 항공작전 조율,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6–53항공사건으로 체포·수감, 1952년 석방 후 민간항공 근무
  • 1953–55복권,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겸 공군 부총사령관
  • 1956–66레닌그라드 고등민간항공학교장, 교수

장원톈

张闻天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0–1976 ↓ 실각 1959 · 심장마비

쭌이 회의 뒤 총서기를 맡은 「28인의 볼셰비키」,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 편에 섰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으로 쭌이 회의 뒤 보구를 대신해 총서기가 되었고,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1976년 우시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 대신 마오를 지지해 당 총서기(총부책)를 맡았다. 옌안에서 선전·이론 부문을 이끌었고 정풍운동 이후 마오에게 실권을 넘겼다. 건국 후 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을 비판해 펑더화이와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문화대혁명기 유배지에서 197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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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3중공 중앙 총서기
  • 1951–1955주소련 대사
  • 1954–1959외교부 부부장

최용건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76 ○ 병사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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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막심 자하로비치 사부로프

Максим Захарович Сабу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7 ↓ 실각 1957

스탈린 말기와 말렌코프기의 계획 관료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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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0s공업·계획기관에서 성장한 스탈린식 경제 관료
  • 1941–1942, 1949–1953전시와 전후 고스플란/국가계획 지도부에서 활동
  • 1953–1955말렌코프기 국가계획 지도부, 소비재·중공업 균형 논쟁 속에 있음
  • 1957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중앙 권력에서 축출
  • 1960s–1970s지방·하급 경제직으로 밀려난 뒤 은퇴

블라디미르 필리포비치 트리부츠

Владимир Филиппович Трибу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7 ○ 자연사

발트 함대의 최장기 전시 사령관, 탈린 탈출에서 쾨니히스베르크까지

1941년 8월 28일 밤, 탈린을 탈출한 발트 함대가 기뢰밭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트리부츠는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라 명했다. 그는 밤새 함교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 해군에서 가장 오래 발트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1939–1947). 핀란드 겨울전쟁, 탈린 철수,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4–45년 발트 공세까지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함대를 지휘한 유일한 함대 사령관이었다. 독소전 직전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고,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함포와 해군 항공대로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탈린 전환에서 지휘 과실로 상당한 손실을 냈다는 비판도 있지만, 1943년 제독으로 진급해 전후까지 함대를 이끌었다. 퇴역 후 200여 편의 해군사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늘날 태평양 함대 구축함 '트리부츠 제독'에 그 이름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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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적위대·발트 해군 비행분견대 입대
  • 1918–1920볼가-카스피 소함대에서 남북전쟁 참전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26–1929전함 파리시스카야 콤무나 포탑장·당직장교
  • 1929–1932해군대학교 수학
  • 1932–1934전함 마라트 부함장
  • 1934–1937구축함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함장
  • 1937–1938발트 함대 전투훈련부장
  • 1938–1939발트 함대 참모장
  • 1939–1947발트 함대 사령관
  • 1943제독 진급 (5월 31일)
  • 1947–1948극동군 해군 담당 부사령관
  • 1949–1951해군 수로국장
  • 1952–1957보로실로프 고등군사대학 해군학부장
  • 1957–1961해군 감찰 제독
  • 1961–1977퇴역, VINITI 부문장, 200여 편 해군사 저술

이반 이바노비치 페듀닌스키

Иван Иванович Федюн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7 ○ 자연사

할힌골 영웅에서 레닌그라드 봉쇄 해방군 사령관으로

주코프 회고: “스탈린이 나를 기계로 불러 레닌그라드 근처 군대를 지휘할 좋은 사령관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페듀닌스키 장군의 이름을 댔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가이고, 부대 지휘의 명수다.”

우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내전을 치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제24차량화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후방을 돌파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 공적으로 주코프의 눈에 띄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으로서 도시 방어의 결정적 시기를 지휘했고, 이후 제2충격군 사령관으로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주공을 위장 전환하는 작전으로 1944년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트란스코카서스 및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며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망 시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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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서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9제36소총사단 중대장, 중동철도 충돌 참전
  • 1939제24차량화연대장, 할힌골 전투 → 소련 영웅
  • 1941제15소총군단장;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 겸 제42군 사령관; 제54군 사령관
  • 1943–1944제2충격군 사령관,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레닌그라드 봉쇄 돌파
  • 1946–1951제7근위군 사령관
  • 1954–1957트란스코카서스 군관구 사령관
  • 1957–1965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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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루이지 론고

Luigi Longo
이탈리아 공산당 공산주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1900–1980 ○ 자연사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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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PCI 창당 참여
  • 1936–1939국제여단 총감독 (스페인 내전), 별명 '갈로'
  • 1943–1945가리발디 여단 총사령관, CVL 부사령관
  • 1945–1964PCI 부서기
  • 1947.09코민포름 창립 회의 PCI 대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 1964–1972PCI 사무총장
  • 1972–1980PCI 명예 의장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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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바실리 가브릴로비치 그라빈

Василий Гаврилович Гра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소련 야포 설계의 거장, 속도설계 방식의 창시자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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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크라스니 푸틸로베츠 공장 설계국 기술자
  • 1932GKB-38 제1부국장
  • 1933–1942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 겸 포병설계국장
  • 1942–1946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 겸 수석설계자
  • 1946–1957포병무장과학연구소(NII AV) 소장 겸 수석설계자
  • 1957–1959TsNII-58 소장 겸 수석설계자
  • 1960–1980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공과대학 교수

필리프 이바노비치 골리코프

Филипп Иванович Гол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정보를 쥐고도 침공을 놓친 GRU 수장, 다시 전선에서 원수로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올봄 소련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소문과 문서들은 영국, 어쩌면 독일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허위정보로 간주해야 한다." 94일 뒤 바르바로사가 시작되었다.

농민 출신 정치지도원으로 내전에 참전한 후 11년간 군 정치기관에서 복무하다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치고 지휘관으로 전환했다. 1940년 7월 GRU 정보총국장에 올랐으나, 1941년 봄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영미의 도발적 허위정보'라고 보고해 바르바로사의 전략적 기습을 막지 못했다. 독소전에서 모스크바 반격의 10군과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두 차례 대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했으나 그해 3월 하리코프 상실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전후 인사총국장을 거쳐 1958년 글라프PUR 총정치국장으로 흐루쇼프 시기 당의 군대 통제를 담당했고 1961년 소련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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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적군 자원입대, '붉은 독수리' 연대에서 내전 참전, 정치지도원
  • 1921–31군 정치기관에서 선전·선동 부서장 역임, KUVNAS 졸업(1929)
  • 1931–3895연대장 → 61사단장 → 8기계화여단장 → 45기계화군단장
  • 1938–39벨로루시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빈니차 군집단·6군 사령관
  • 1939–406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참전
  • 1940–41부참모총장 겸 GRU 정보총국장 — 바르바로사 직전의 첩보 평가
  • 1941–42소련 군사사절단장(영·미) → 1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1942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1근위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 1942–43재임명된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하리코프 공세, 이후 해임
  • 1943–50국방인민위원부 인사총국장 · 송환 담당 전권위원(1944~)
  • 1950–56독립기계화군 사령관
  • 1956–58기갑군사아카데미 원장
  • 1958–62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글라프PUR), 1961년 소련원수 진급
  • 1962–80국방부 총감찰원, 1980년 7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2 ○ 자연사

「볼가 너머에 우리 땅은 없다」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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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9제62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 1943–45근위 제8군, 베를린까지
  • 1945.5.1베를린에서 독일군의 첫 항복 교섭을 접수
  • 1949–53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55/1960–64원수 승진, 지상군 총사령관

보리스 게오르기예비치 바자노프

Борис Георгиевич Баж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900–1982 ○ 자연사

스탈린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망명한 정치국 기록자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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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2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화학 전공 (중퇴)
  • 1922중앙위 조직지도부 근무, 카가노비치 보좌
  • 1923중앙위원회 조직국 서기
  • 1923–1925스탈린 개인보좌관 · 정치국 서기 — 모든 정치국 회의 기록
  • 1926–1927『재정신문』 편집자, 재무인민위원부 및 체육최고위원회 근무
  • 19281월 1일 소련 탈출 — 이란 · 인도 경유 프랑스 망명
  • 1930–1980회고록 『스탈린의 전 비서의 회상』 출간 및 확대판 간행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로치킨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Куроч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9 ○ 자연사

내전의 기병에서 아우슈비츠 해방군 사령관까지, 마지막 생존 전선 지휘관

1917년 7월 4일, 16세의 쿠로치킨은 크셰신스카야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경비했고, 훗날 그 연설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스몰렌스크주 고르네보 마을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제과점 심부름꾼과 기관차 수리공장에서 일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무장대에서 볼셰비키 집회를 경비하다 10월에 적위대에 가담했다. 1918년 8월 적군에 입대해 기병 과정을 마치고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으며, 1921년에는 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41년 7월 제20군 사령관으로 레펠 반격과 스몰렌크 포위전을 겪고 포위된 제16·제20군의 주력 돌파를 조직했으며, 이후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데먄스크 포위전을 지휘했다. 1944년부터 제60군을 이끌어 1945년 1월 27일 제322소총사단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진입했고, 1989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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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10월 혁명 참가
  • 1918–1921적군 기병 장교,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탐보프 봉기 진압 참전
  • 1932, 1940프룬제 군사아카데미·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28소총군단장,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비보르크 차단 작전 수행
  • 1941–1942북서전선군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작전·데먄스크 포위전 지휘
  • 1943–1944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부사령관,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기획
  • 1944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폴레스카야 공세 수행
  • 1944–1945제60군 사령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해방·프라하 진격
  • 1954–196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교수(1962)
  • 1968–1970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부 동독 대표
  • 1970–1989소련 국방부 총감찰관단

일리야 그리고리예비치 스타리노프

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Стар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2000 ○ 자연사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 무선조종 지뢰와 철도 사보타주로 파르티잔전을 설계한 사보타주 기술자

1941년 11월 14일 새벽 3시 30분, 스타리노프는 보로네시에서 암호화된 무선 신호를 보냈다. 300km 떨어진 하리코프에서 독일군 사령부 건물이 R-10 지뢰와 함께 폭발해 게오르크 폰 브라운 장군이 매몰됐다.

일찍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거친 뒤 철도부대 공병장교로 복무하며 기폭 기술을 독학했고,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파르티잔·사보타주 교관으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의 사보타주 작전을 조직했고,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무선조종 지뢰 R-10으로 하리코프 독일군 사령부를 원격 폭파했으며 중앙유격대본부의 사보타주 담당으로서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의 기술적 토대를 설계했다. 전후에도 KGB 교육기관에서 1987년까지 사보타주 전술을 가르친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로, 그의 반열차 지뢰(PMS)와 훈련 체계는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20세기 비정규전의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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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27공병대대에서 복무
  • 1925–30키예프에서 폭파 전문가·사보타주 교관 양성
  • 1930–33우크라이나 군관구 제4부: 파르티잔 사보타주 계획 및 교관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 고문, 사보타주 작전 조직
  • 1941–42서부·남서전선 작전공병대장, 하리코프 R-10 무선지뢰 작전, 제5특수공병여단장
  • 1942–44중앙유격대본부 사보타주 보좌관, 우크라이나 유격대본부 사보타주 부본부장
  • 1944–45폴란드 유격대본부 부본부장, 유고슬라비아 소련 군사임무 참모장
  • 1956–87은퇴 후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 KGB 장교과정에서 사보타주 전술 강의, 1984년 교수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32 ✕ 자살

레닌 비서실에서 일하고 스탈린과 결혼한, 자신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볼셰비키 여성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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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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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

드미트리 마트베예비치 드미트리예프

Дмитрий Матвеевич Дмитр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유대계 러시아인 1901–1939 ✕ 처형

'NKVD 내부 음모' 이야기를 처음 풀어놓은 스베르들롭스크 NKVD 국장

명령 제00447호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준 한도는 1범주 4천 명, 2범주 6천 명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1일 자 그의 보고서는 작전 종료를 이렇게 명시했다.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해 1만 5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번째 범주로 7500명...'

체카와 OGPU 중앙 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1936년 여름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이 된 체키스트로, 나우모프는 그를 류시코프, 레덴스와 함께 '북캅카스 출신자' 집단으로 분류한다. 쿨라크 작전에서 정치국의 서면 승인 없이 한도 증액을 관철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명령 제00447호가 준 한도 1만 명을 훌쩍 넘겨 1만 5천 명 유죄 판결로 작전 종료를 보고했다. 1938년 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되었다가 6월 체포되었고, 10월 22일 'NKVD 내부의 공모'에 대한 상세한 진술로 공모 사건의 실을 처음 풀었으며 1939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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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체카·OGPU 요원, 중앙 기구 근무
  • 1936–1938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
  • 1937한도 초과 집행, 1만 5천 명 유죄 판결 보고
  • 1938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 6월 체포
  • 193810월, 'NKVD 내부 공모' 진술
  • 1939총살

보리스 다비도비치 베르만

Борис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39 ✕ 처형

벨라루스 대숙청을 지휘한 정보장교 출신 내무인민위원

부하린 아파트 수색에 "검은 양복, 흰 셔츠, 고운 반지에 긴 새끼손톱" 차림으로 나타났다. 안나 라리나는 "마치 연회에 온 듯했다"고 남겼다.

1921년 체카에 입문해 경제·방첩 부서를 거쳐 이노(INO)로 옮겨 베를린과 로마에서 비밀 거점을 운영한 소련 정보장교였다. 1935년 이노 제1부책임자로 외국정보를 총괄했고, 1937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공화국 전역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해 8개월 만에 6만 명을 체포하고 쿠라파티 집단처형을 감독했다. 1938년 9월 NKVD 3국장으로 전보된 직후 베리야의 숙청에 휘말려 체포됐고, 1939년 2월 총살됐으며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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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3이르쿠츠크 구베르니야 체카 요원
  • 1923–1928OGPU 경제관리국 부서장
  • 1928–1931중앙아시아 OGPU 방첩·특별부서장
  • 1931–1933이노 OGPU 베를린·로마 거점장
  • 1935–1936GUGB NKVD 이노 제1부책임자
  • 1936–1937GUGB NKVD 비밀정치부 부책임자
  • 1937–1938벨라루스 SSR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3국(수송·통신) 국장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팜필로프

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Памф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1–194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행정가, 모스크바 대피 실패의 책임자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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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지원자)
  • 1923스몰렌스크 노동자학교 졸업
  • 1924–192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비에트 법학부 야간과정 수학
  • 1927–1937모스크바 소비에트 근무, 모스크바 주택신탁 관리자
  • 1937–1938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부 주택총국장
  • 1938–1940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
  • 1940–1942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41.9–12소련 인민위원회의 대피위원회 부의장
  • 1942–1943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44 ✕ 전사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의 전략 설계자, 전선에서 쓰러진 육군대장

1942년 7월 보로네시가 위태롭던 작전회의에서 바투틴이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 저를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스탈린이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훗날 바투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행동은 아마도 주변에 더 적임자가 보이지 않을 때 즉시 중대 지휘를 맡겠다고 결심한 병장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소련의 육군대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라누스' 작전을 입안하고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를 지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했다. 1944년 2월 UPA 매복으로 중상, 4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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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6적군 입대, 마흐노·우크라이나군과 교전, 사병에서 중대장까지 진급
  • 1926–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참모아카데미 수료, 유명한 '원수반'에서 두각
  • 1938–41키예프 특별군관구 참모장 → 작전총국장 → 제1부참모총장
  • 1941–42북서전선군 참모장, 레닌그라드·모스크바 방어 및 반격 작전
  • 1942–43보로네시·남서전선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반격(우라누스·소토성) 주도
  • 1943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와 벨고로드-하리코프 반격
  • 1943–44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키예프 해방·코르순 포위전·우안 우크라이나 해방

오자키 호쓰미

尾崎秀実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일본 일본 1901–1944 ✕ 처형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오자키 호쓰미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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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셰르바코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45 ○ 심장마비

스탈린의 전시 선전 책임자이자 모스크바 당 보스, 죽음은 「의사들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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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
  • 19455월 10일 43세로 심장마비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펙렌코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Фекл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1–1951 ○ 자연사

변동하는 전선에서 책임을 떠안은 기갑 지휘관

1939년 6월, 그는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내 군단 지휘를 주코프에게 넘겼다고 알렸다.

니콜라이 펙렌코는 러시아 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소련의 기갑 지휘관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초기에 제57특별소총군단을 지휘했으나, 5월 전투의 실패 뒤 6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기계화군단과 전차군단, 전차병과 기계화부대의 편성·훈련을 맡으며 전쟁 수행 체계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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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군대 기병 부대 병사·소대 지휘관 보좌
  • 1922–1932정치지도원, 기병대대 지휘관 및 연대 학교장
  • 1932–1937제5기계화연대 지휘관, 기갑 과정 수료
  • 1937–1938몽골 주둔 제57특별소총군단 예하 기계화·전차여단 지휘관
  • 1938–1939제57특별소총군단 지휘관
  • 1939–1941제14중전차여단, 제15전차사단 지휘관
  • 1941–1943제19기계화군단·제38군 지휘관, 전차군단 지휘관
  • 1943–1950전차·기계화부대 편성·전투훈련 총국장 및 군관구 지휘관

루돌프 슬란스키

Rudolf Slánský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 체코 1901–1952 ✕ 처형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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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45–1951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인민민병대 사령관 겸직, 2월 쿠데타 실무 지휘
  • 1951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세르고 아르세니예비치 고글리제

Сергей Арсеньевич Гогл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1–1953 ✕ 처형

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 총괄에서 극동의 총독으로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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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그루지야 NKVD 트로이카 의장
  • 1938–1941레닌그라드주 NKVD 관리국장
  • 1941몰다비아 주재 NKVD 전권대표
  • 1941–1951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 극동 MGB 전권대표
  • 1951–1952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1–1952우즈베크 국가보안장관
  • 1952–1953MGB 제3총국장(군 방첩), 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3구금, 재판과 처형

아브라아미 파블로비치 자베냐긴

Авраамий Павлович Завеня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56 사인 미확정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노릴스크, 원자폭탄까지 스탈린 시대 산업 건설의 조직자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회고)

1930년 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를 용광로 전문으로 졸업한 광산·야금 기술자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을 거쳐 1938년부터 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건설을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력으로 지휘했고, 1941년 3월부터 1946년 8월까지 NKVD 부인민위원으로 굴라그의 산업건설 기구들을 총괄했다. 원자력 계획에서는 1944년 12월 우라늄 탐사 책임을 맡았고, 1945년 8월부터 제1총국 제1부책임자 겸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특수수용자 노동력을 감독했으며 1949년 첫 핵실험을 앞두고 RDS-1 조립을 책임졌다. 1955년 중형기계공업 장관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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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3RKP(b) 입당, 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 우크라이나 당 활동
  • 1923–1930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졸업, 용광로 기술자
  • 1930–1933기프로메즈 소장, 카멘스코예 제철공장 지배인
  • 1933–1937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
  • 1938–1941노릴스크 건설 총책임자,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으로 최초 니켈 생산
  • 1941–1946NKVD 부인민위원, 산업건설·광산·수로 굴라그 총국 지휘
  • 1945–1953원자폭탄 계획 제1총국 제1부책임자, 우라늄·폐쇄도시·RDS-1 조립 책임
  • 1955–1956소련 부수상 겸 중형기계공업 장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파데예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ад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56 ✕ 자살

작가동맹의 관리자, 해빙 앞에서 자살하다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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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소설 《괴멸》 출간
  • 1946–1954작가동맹 서기장 · 의장
  • 1946 / 1951소설 《젊은 근위대》 초판 출간 / 당의 비판 뒤 개정판 출간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흐루니체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Хрун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61 ○ 자연사

스탈린에게 영국 제트엔진 구매를 설득해 MiG-15 시대를 연 항공공업 장관

1946년, 흐루니체프와 야코블레프가 영국제 제트엔진 구매를 건의하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자기 비밀을 우리에게 팔겠는가?' 노동당 정부는 기꺼이 롤스로이스 닌 엔진과 청사진을 넘겼고, 이를 복제한 RD-45가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병대·공장 관리직을 거쳐 소련 항공공업 장관(1946~1953)까지 오른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탄약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포탄·항공폭탄 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 항공공업 수장으로서 쇠퇴한 소련 제트 기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1946년 야코블레프와 함께 스탈린을 설득해 영국 롤스로이스 닌 엔진을 도입, 이를 역설계한 클리모프 RD-45가 MiG-15에 탑재되며 소련은 단숨에 제트 전투기 시대에 진입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흐루니체프 우주센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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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광부 견습·마부·해머공, 슈빈스키 광산
  • 1920–1924붉은 군대 복무 — 제1기병군 식량위원회·공병소대장
  • 1924–1930도네츠크·루간스크 민병대 간부, 루간스크 지구 민병대장
  • 1930–1936아르템 공장 부소장, 제60탄약공장 부소장, 우크라이나 산업아카데미 졸업
  • 1936–1937제184군수공장장(젤레노돌스크) — 탄피·항공폭탄 생산 3배 증대
  • 1937–1942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12총국장 → 항공공업 부인민위원
  • 1942–1946탄약 제1부인민위원 — 전시 탄약 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5)
  • 1946–1953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MiG-15 개발 주도
  • 1953–1955중형기계공업 제1차관(원자력 산업)
  • 1955–1961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과학연구조정위원장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Gheorghe Gheorghiu-Dej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01–1965 ○ 폐암

소련의 위성에서 반자율적 공산주의 국가로 루마니아를 전환시킨 초대 공산당 지도자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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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33그리비차 철도 파업 주도, 체포·투옥
  • 1936당 중앙위원회 위원, 감옥파 수장
  • 1944탈옥, 루마니아 공산당 총서기
  • 1947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인민공화국 선포
  • 1952–1955루마니아 총리
  • 1955–1965루마니아 노동자당 제1서기
  • 1961–1965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이그나토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Игн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66 ○ 자연사

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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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미하일 일리치 롬

Михаил Ильич Ромм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1–1971 ○ 심부전

스탈린을 위해 레닌 신화를 창조하고, 해빙기에는 파시즘을 해부한 감독

〈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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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 1940–1947모스필름 예술감독·영화배우극장 감독
  • 1948–1962VGIK 배우·감독 워크숍 지도교수 (1962년부터 교수)
  • 1962〈1년 중 9일〉 연출, 바실리예프 형제상 수상 (1966)
  • 1965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 발표, 4천만 명 이상 관람
  • 1971〈그래도 나는 믿는다〉 작업 중 사망

천이

陈毅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1–1972 ○ 자연사

신4군과 제3야전군을 이끈 시인 원수, 저우언라이를 이은 외교부장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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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상하이 시장
  • 1958–1972외교부장

알렉세이 세묘노비치 자도프

Алексей Семёнович Жа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77 ○ 자연사

스탈린이 성을 바꾸게 한 사령관, 제5근위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에서 프라하까지 진군하다

1942년 11월 로콥소프스키가 전했다: "당신의 성 '지도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꾸길 바란다." 유대인 비하 표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철자 하나를 바꾸자 스탈린은 "아주 좋다"고 결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세력과 싸웠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6군 사령관으로 북쪽 방어를 지휘하며 독일군 측면 공격을 좌절시켰고, 이 공로로 부대는 제5근위군으로 개칭되었다. 쿠르스크의 프로호롭카 전차전,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제5근위군을 지휘하며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역을 관통했고, 1945년 4월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했다. 전후 지상군 제1부사령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55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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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22붉은군대 입대, 제46소총사단·제1기병군에서 내전 참전 —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토벌, 중상
  • 1934–4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병연대·사단 참모, 기병감찰부 근무, 제21투르케스탄 산악기병사단장
  • 1941.6–8제4공수군단장 (서부전선) — 베레지나·소시 강 방어전, 민스크 포위망 탈출
  • 1941.8–1942.5제3군 참모장 (중앙·브랸스크 전선) — 모스크바 공방전, 옐레츠 공세 참가
  • 1942.10–1943.4제66군 사령관 (돈 전선) — 스탈린그라드 북부 방어·반격, 1942.11 스탈린 지시로 성을 지도프에서 자도프로 변경
  • 1943.4–1945.5제5근위군 사령관 — 쿠르스크·프로호롭카,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 1945.4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
  • 1946–49소련 지상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
  • 1950–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 1954–55중앙집단군 총사령관 (오스트리아)
  • 1955–64육군대장 진급 (1955), 소련 지상군 제1부사령관
  • 1964–69소련 국방부 감찰총국 제1부감찰관
  • 1969–77국방부 감찰총국 감찰고문, 1977년 사망 —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오르가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рг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1–1982 ○ 자연사

NKVD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던 러시아 공화국 국가원수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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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붉은 군대 복무
  • 1924–1925유리예프-폴스키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4–1937네코우스키 구당위원회 제1서기 (야로슬라블 주)
  • 1937–1938야로슬라블 주당위원회 제2서기 대행 ·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
  • 1943–1947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3서기 → 제2서기
  • 1947–1952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8–1959RSFSR 각료회의 부의장
  • 1959–1962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61–1962RSFSR 담당 CPSU 중앙위원회 뷰로 위원
  • 1963–1967주불가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3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82 ○ 자연사

프로호롭카에서 역사상 최대 전차전을 지휘한 기갑 원수

1943년 2월 스탈린 앞에서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에게 첫 개편 전차군을 맡기며 "당신이 직접 증명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농촌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이자 기갑군 총원수로 올라선 전차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막은 코텔니코보 전투와 역사상 최대 전차전인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을 지휘했다. 프로호롭카의 막대한 손실은 평생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반격은 쿠르크 남부 방면 독일군 진격을 결정적으로 멈춰 세웠다. 1943년 초 스탈린에게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전환하자고 직접 설득해 전선의 주 타격 수단으로 재편시켰고, 자신이 첫 편제의 사령관이 되었다. 코르순-셰우첸콥스키 포위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민스크 해방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기갑군사학교장과 국방차관보로 소련 전차 교리와 장교 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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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부상, 적기훈장 수훈
  • 1924–28제11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
  •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6–37극동 특별붉은기군 사령부 제1부장, 제63연대장
  • 1937–39스탈린 기갑·차량화군사학교 전술교관, 당에서 잠시 제명 후 복권
  • 1940소련-핀란드 전쟁 전차대대장, 제35경전차여단 참모장
  • 1941.5–9제3기계화군단 참모장, 개전 직후 포위망 탈출
  • 1941.9–1942.4제8전차여단(후 제3근위전차여단)장, 모스크바 공세
  • 1942.4–12제7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 1942.12–1943.2제3근위전차군단장, 코텔니코보에서 만슈타인 구원 차단
  • 1943.2–1944.8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프로호롭카, 드네프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바그라티온, 민스크·빌뉴스 해방
  • 1944.8–1945.6붉은 군대 기갑·기계화군 부사령관
  • 1945–47주독 소련군 기갑·기계화군 사령관
  • 1947–48극동 기갑·기계화군 사령관
  • 1948–56보로실로프 고등군사학교 기갑과장
  • 1958–64기갑군사학교 교장
  • 1964–68국방차관보 (고등군사교육)
  • 1968–82국방부 감찰총감단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코샤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Кося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1–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와 전환기의 고스플란 계획가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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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2적위대 · 파르티잔 · 제42소총사단 정치일꾼
  • 1922–1929톨마초프 군사정치아카데미 수료 후 군사정치학교 교원
  • 1929–1937적색교수경제연구소 수료, 프룬제·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
  • 1940–1949고스플란 부의장 ·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 편집장(1944–1949)
  • 1949–1953고스플란 제1부의장 · 초대 코메콘 소련 상임대표(1949)
  • 1953 (3–6월)고스플란 의장
  • 1953–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 1957–1970재무차관(1957–1960) · 재무연구소 소장(1960–1970)

야쿠프 베르만

Jakub Berman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1–1984 ○ 자연사

폴란드 스탈린주의 권력의 이론가

베르만은 테레사 토란스카에게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에 복무하는 것은 단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내적 필요였다”고 말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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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폴란드 공산당 입당, 지식인 담당 활동
  • 1939–1941소련 점령지에서 폴란드어 공산주의 언론 편집
  • 1941–1944코민테른 국제레닌학교 강사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원, 국가보안·정무 감독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이념·문화·보안 담당
  • 1956정치국·중앙위원회에서 사임
  • 1957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서 제명
  • 1958–1969『책과 지식』 출판사 편집자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1–1986 ○ 자연사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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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드미트리 다닐로비치 렐류셴코

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계 1901–1987 ○ 자연사

구데리안을 멈춰 세운 '전진 장군', 4근위전차군을 프라하까지 이끌다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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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 1941제21기계화군단장(다우가프필스 방어), 제1근위특수소총군단을 급편성하여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 차단, 제5군 사령관(보로지노 방어)으로 중상
  • 1941–1943제3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클린 탈환), 제1·제3근위군 사령관(스탈린그라드 포위, 보로실로브그라드 공세)
  • 1944–1945제4전차군(후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 —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 소비에트 연방 영웅 2차 수훈
  • 1946–1964주독군 기갑·기계화부대 사령관, 제1독립군 사령관(극동), 자바이칼·우랄 군관구 사령관,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1960–1964)
  • 1964–1987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으로 복무, 육군대장(1959), 군사과학 후보(1951)

마르크 보리소비치 미틴

Марк Борисович Ми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87 ○ 자연사

스탈린 시기 변증법적 유물론을 국가 교리로 제도화한 철학 총책

「철학 전선의 절대다수가 적, 배신자로 밝혀져 NKVD에 체포되었다」 — 1937년 5월 철학연구소 총회에서 동료 철학자들의 대숙청을 정당화하며

데보린 학파를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몰아내고 스탈린주의 철학을 제도화한 소련 철학계의 최고 책임자. 30년간 당적 통제를 상징했으나, 말년에 표절 파문으로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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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지토미르 유대인 가정 출생, 본명 모르드코 게르셰비치 게르시코비치
  • 1919–1921RKP(b) 입당(1919), 지토미르 시·볼린 현 콤소몰 제1서기, 특수임무부대(CHON) 복무
  • 1921–192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료,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부총장
  • 1931–1933데보린 학파에 대한 철학 논쟁 주도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유딘과 함께 스탈린주의 철학 노선 확립
  • 1931–1944『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활동,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9–1944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IMEL) 소장, 중앙위원(1939~1961),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 1944–1950스탈린상 철회 후 주필·소장직 해임, 『볼셰비키』 편집국 책임비서, 고급당학교 변증법적유물론 주임
  • 1950–1968부쿠레슈티 코민포름 기관지 주필(1950~1956), 즈나니예 협회장(1956~1960), 『철학의 제문제』 주필(1960~1968), 표절 파문으로 퇴진
  • 1970–1987국가와법 연구소 분과장(1970~1985), 플레하노프상 수상(1982), 노환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88 ↓ 실각 1957

패자가 죽지 않게 된 시대의 첫 패자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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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5서기국 간부 인사, 전시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항공기 생산 총괄
  • 1953.3–55총리,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 발언
  • 1957「반당 그룹」 주모자로 실각
  • 1957–68카자흐스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장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예멜랴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Емелья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88 ○ 자연사

전시 탱크 장갑에서 평화적 원자력 외교까지 이끈 핵행정가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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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조교·중앙기계제조기술연구소 연구실장
  • 1932–1934독일 에센·베를린 크루프 공장 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대표
  • 1935–1937첼랴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기술이사
  • 1937–1939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7총국장 (장갑강)
  • 1940–1946소련 인민위원회의 표준화위원회 부의장·의장
  • 1946–1953제1총국 과학기술부장·부국장 (원자력 프로젝트)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국장
  • 1955–1957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신기술 담당)
  • 1957–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 국장 · IAEA 소련 상임대표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부의장
  • 1966–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군축과학문제위원회 의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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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마케옙카 제철소 연구기사·평로공장장
  • 1931–1933카네기공과대학 연수 (미국)
  • 1937–1940중공업인민위원부 기술국장·주임기사
  • 1940–1944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44–1953전소비에트노조 중앙평의회 의장
  • 1953주중 소련 대사
  • 1955–1977소련 외무부 제1차관
  • 1977–1986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

쉬샹첸

徐向前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1–1990 ○ 자연사

제4방면군 총지휘로 장궈타오의 분열을 겪고, 1979년 국방부장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원수

1990년 6월 결핵이 재발해 입원했고 9월 21일 89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시신 인사도 추도회도 없이, 유골을 대별산·대파산·태행산·하서회랑에 뿌리라는 것이었다. 화장한 유골은 네 곳에 나뉘어 뿌려졌다.

산시 출신 황푸 1기생으로 광저우 봉기 뒤 어위완 소비에트에서 제4방면군 총지휘가 되었고, 대장정 중 장궈타오의 남하 결정에 따르다 1936년 서로군이 하서회랑에서 궤멸하는 참패를 겪었다. 항일전쟁기 129사단 부사단장, 국공내전기 화베이 군구 부사령관으로 타이위안을 점령했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2월 역류」 뒤 한직에 있다가 1978년 복귀해 국방부장으로 1979년 중월전쟁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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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6홍군 제4방면군 총지휘
  • 1978–1981국방부장

올가 그리고리예브나 샤투놉스카야

Ольга Григорьевна Шатуновская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1–1990 ○ 자연사

스탈린의 범죄를 끝까지 추적한 흐루쇼프의 수석 조사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당신은 제가 인민의 적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 유형지에서 흐루쇼프에게 보낸 단 한 줄의 편지, 1954년

1916년 15세로 입당한 구볼셰비키. 흐루쇼프 시기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으로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학살이 스탈린의 조작임을 64권으로 입증했다. 콜리마 8년을 견디고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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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5세로 RSDLP(b) 입당
  • 1918바쿠 코뮌에서 샤우먄 비서; 터키군에 사형 선고, 극적 사면
  • 1918–20자캅카스 지하운동, 레닌에게 밀서 전달
  • 1920–37바쿠·브랸스크·모스크바 당 간부, 모스크바 시당 조직부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46체포, 8년형 — 콜리마 수용소
  • 1949–54재체포, 무기한 유형 — 크라스노야르스크
  • 1956–62KPK 위원,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 —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조작 규명
  • 1962스탈린의 오흐란카 협력 의혹 공개 요구, 흐루쇼프의 거부로 은퇴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콘스탄티노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Констант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91 ○ 자연사

『철학 백과사전』 주필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교과서의 설계자

「이건 그들에 대해 쓴 겁니까, 아니면 우리에 대해 쓴 겁니까?!」 — 레바다의 『철학 백과사전』 '파시즘' 표제어 원고에 친필로 남긴 결재 의견

해빙기 소련 철학의 공식 교리를 수호한 이념 관료. 5권 『철학 백과사전』 주필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설정했고, 동료들 사이에선 흔들림 없는 '스탈린주의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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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니제고로드 현 노보숄키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
  • 1917–192010월혁명·시베리아 내전 참전, 1918년 RKP(b) 입당
  • 1932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IMEL 선임연구원(1932~1933)
  • 1933–1941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학술비서(1933~1935), 『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주필 겸 『프라우다』 부장(1935~1941), 1935년 교수·철학박사
  • 1941–1945중앙위 선전선동국 강사(1941~1942), 자원입대해 제84소총군단 전리품 부서장, 중령, 적성훈장 2회
  • 1945–1954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부소장·당위 비서(1945~1951), 『철학의 제문제』 주필(1952~1954), 모스크바대학 철학부 주임(1953~1954),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1954~1955)
  • 1955–1958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6년부터 연방공화국 담당), 중앙위원 후보(1956~1961)
  • 1958–1967『콤무니스트』 주필(1958~1962), 철학연구소장(1962~1967),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4)
  • 1960–19705권짜리 『철학 백과사전』 주필 — 소련 철학의 공식 지식 총서 총괄
  • 1967–1991과학아카데미 철학·법학부 학술비서(1967~1975), 소련철학회 창립 회장(1971~1987), 『지식』협회 부회장(1968~1987), 노환으로 사망, 트로예쿠로보 묘지 안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코발료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ва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1–1993 ○ 자연사

대군을 비밀리에 움직인 철도 장군, 귀걸이 하나로 실각하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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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붉은 군대 정찰병, 보로네시 체카 대대 적군 병사
  • 1935군사수송대학 우등 졸업
  • 1937–1939서부철도 관리국장
  • 1939–1941교통인민위원부 중앙군사부장 · 위원회 위원
  • 1941–1944붉은 군대 군사수송국장 · 중앙군사수송국장
  • 1944–1948소비에트 연방 교통인민위원 · 교통장관
  • 1948–1950스탈린의 중공 대표 · 주중 소비에트 군사고문단장
  • 1951–1957소비에트 연방 석탄공업 차관
  • 1960–1969참모대학교 전략학과 선임강사
  • 1969–1985IMEMO 선임연구원 · 연구실장 · 수석연구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셀리바놉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лива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97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사령관 교체를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건의해 전세를 바꾼 방첩 간부

스탈린에게 직통 전보를 보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된 그는 부하에게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처형 가능성에 대비했다.

스탈린 시대 군 방첩과 국가보안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전선 특별부서장으로서 사령관 고르도프의 무능함을 직통 전보로 스탈린에게 보고해 교체를 이끌어냈다. 1943년부터 스메르시 부국장으로서 독일 후방 침투 공작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폴란드 공안부의 소련 측 수석고문으로서 공산주의 보안 기구 건설을 주도했다. 1946년 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에 올랐으나, 1951년 'MGB 내 시온주의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 1953년 '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된 뒤 1997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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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NKVD 특별부서 각 분과 차장·분과장을 역임하며 보안 간부로 성장
  • 1941–1943남서전선·스탈린그라드·돈·남부전선 NKVD 특별부서장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 부국장, 독일 후방 침투 및 사보타주 공작 지휘
  • 1945–1946폴란드 공안부 소련 측 수석고문, 공산주의 보안기구 건설 주도
  • 1946–1951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
  • 1951–1953'시온주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 1953'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 이후 연금 생활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차플린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Чап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2–1938 ✕ 처형

콤소몰을 당의 청년 훈련 기관으로 만든 소년 정치위원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와 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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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스몰렌스크 학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 결성
  • 1919스몰렌스크 군·시 콤소몰 위원회 의장
  • 1920–1921튜멘 현·스몰렌스크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1–1922콤소몰 중앙위원회 정치교육부장
  • 1922전연방 피오네르 조직 중앙국 초대 의장
  • 1922–1924트란스캅카스 지역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4–1928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총서기
  • 1924–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4–1930전연방 공산당 조직국 후보위원
  • 1930–1931트란스캅카스 지역 당위원회 제2서기
  • 1931–1933중앙소비자조합 간부회 위원·전연방급식조합 의장
  • 1933–1937무르만스크·키로프 철도 정치부장
  • 1937남동철도 관리국장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Ген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2–1939 ✕ 처형

대숙청기 GRU를 이끌며 조르게 도쿄 거점을 구한 체카 출신 정보장교

1918년, 16세 겐딘은 이렇게 썼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일을 탐욕스럽게 지켜보았고, 물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내 자리는 혁명 대열 속에 있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은 체카·OGPU·NKVD 방첩 장교로 경력을 쌓다 1937년 9월 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대리가 된 소련 군사정보 지휘관이다. 1918년 16세에 붉은군대와 볼셰비키당에 합류했고, 내전 후 모스크바 체카 수사관으로 전환해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에 참여했으며, 이후 OGPU 방첩부와 NKVD 특별부·비밀정치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GRU 국장 대리로서 대숙청이 정보기관을 초토화하는 와중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비합법 거점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막아냈으며, 이는 훗날 소련이 독소전 직전 일본의 전략 방향을 확인하는 결정적 정보선을 보존한 조치였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되었고 1957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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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군대 입대·RKP(b) 입당
  • 1918–1921남북전쟁: 페트로그라드·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대장·포대장·노보로시스크 요새지구 포병부사령관
  • 1921–1925모스크바 체카 수사관 → OGPU 방첩부 제6·제7과 부과장·과장
  • 1924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 참여
  • 1926–1929OGPU 서부지역 전권대표부 방첩부 부장 (민스크)
  • 1929–1934OGPU 방첩부 과장들 → 특별부 과장
  • 1934–1936GUGB NKVD 특별부 과장 겸 부부장
  • 1936. 9 – 1937. 4NKVD 서부주(스몰렌스크) 국장
  • 1937. 4 – 1937. 9GUGB NKVD 제4(비밀정치)부 부부장
  • 1937. 9 – 1938. 10노농적군 정보국(GRU) 국장 대리 겸 부국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우스펜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Успе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0 ✕ 처형

자살을 위장하고 달아난 우크라이나 NKVD 수장

1938년 11월 14일, 우스펜스키는 사무실에 유서를 남기고 드네프르 강변에 외투와 모자를 벗어둔 채 종적을 감추었다. 류시코프의 망명, 리트빈의 자살에 이은 석 달 새 NKVD 고위간부의 세 번째 비상사태였다.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서 대숙청의 가장 격렬한 말기 국면을 주재했다. 1938년 예조프가 몰락하자 드네프르 강가에 유서와 외투를 남겨 익사로 위장, 도주했다. 5개월 뒤 체포되어 1940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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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7서시베리아 NKVD 관리국 부국장
  • 1937–1938오렌부르크주 NKVD 관리국장
  • 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1939자살 위장 뒤 도주, 미아스에서 체포
  • 1940재판과 처형

야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스무시케비치

Яков Владимирович Смушк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유대계 러시아 제국 출신 1902–1941 ✕ 처형

승리한 공군 재건자이자 숙청의 희생자

할힌골의 조종사들은 그를 뛰어난 조직가이자 훌륭한 지휘관으로 기억했다.

야코프 스무시케비치는 스페인과 할힌골에서 소련의 공중전 경험을 축적한 군사 지도자이자 전쟁 직전 붉은군 공군을 재편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일본군에 맞선 항공작전을 지휘해 제공권을 회복했고, 귀환 뒤 붉은군 공군 수장이 되어 겨울전쟁의 교훈과 조종사 훈련·신형 장비의 부족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날조된 군사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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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민스크 공산주의 대대 정치위원, 서부전선 붉은군
  • 1922–1931항공부대 정치공작 담당, 비행술 습득, 제2항공여단 정치부 부장
  • 1931–1936제2혼성항공여단장 겸 정치위원
  • 1936–1937스페인 공화국군 항공 선임고문, 마드리드 방공 지휘
  • 1937–1939붉은군 공군 관리국 부장 대리, 할힌골 제1군집단 항공 지휘관
  • 1939–1940붉은군 공군 사령관
  • 1940–1941붉은군 공군 총감, 총참모부 항공 담당 부참모장
  • 1941체포·무재판 처형, 1954년 사후 복권

예브게니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Евгений Петрович Петр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2 ✕ 추락사

일리프와 함께 『열두 개의 의자』를 쓴 풍자 작가이자 『오고뇨크』 편집장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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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 1920–1923오데사 형사국 수사관 — 40건 이상 수사, 소꿉친구였던 도적 코자친스키 체포
  • 1923–1926모스크바 이주, 『크라스니 페레츠』 기자, 후에 『구도크』로 옮기며 필명 '페트로프' 채택
  • 1927일리야 일리프와 공동 집필 시작
  • 1928–1931『열두 개의 의자』와 『황금 송아지』 발표 — 오스타프 벤데르 신화 창조
  • 1935–1936일리프와 미국 자동차 횡단 (25개 주, 16,000km), 『단층집 미국』 집필
  • 1938–1941『오고뇨크』 편집장; 1939년 레닌 훈장·전연방 공산당 입당
  • 1942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 취재, 귀환 중 7월 2일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우만스키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ма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5 ✕ 항공사고

TASS 특파원에서 워싱턴 최연소 대사로. 스탈린 외교의 날카로운 얼굴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소련 대사 우만스키가 완고하고 비협조적이며 금 보유고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자, 화가 난 루스벨트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우만스키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당시 워싱턴 최연소 대사였다. TASS 특파원과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장을 거치며 외신 검열을 총괄했고, 언론인 경력 속에 NKVD 정보 활동이 섞여 있었다는 정황이 여러 사료에서 제기된다. 주미 대사 시절 군수 물자 협상에서의 고압적 태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각료회의에서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다. 1943년 주멕시코 대사로 부임해 3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익혀 가장 인기 있는 외교관이 되었으나, 1945년 코스타리카 부임길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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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ROSTA·베를린·비엔나에서 예술 저널리즘 활동
  • 1922R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22–1931TASS 특파원 — 로마, 파리, 제네바 지국장
  • 1931–1936소련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 부국장 → 국장
  • 1936–1939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 대리대사
  • 1939–1941주미 소련 전권대표 → 특명전권대사
  • 1941–1943NKID USSR 콜레기야 위원
  • 1943–1945주멕시코 소련 대사, 1944년부터 코스타리카 겸임

빅토르 파블로비치 주라블료프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Журав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6 ○ 자연사

예조프를 무너뜨린 밀고 편지의 작성자

미하일 시레이데르는 그를 '극악무도한 출세주의자'로 기억했다. '예조프 주변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써서'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싸 왔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1937년 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이 되어 두 차례 상한 증액으로 한도를 4,800명 늘린 체키스트다. 1938년 2월 이바노보주로 옮겨 전임자 라드지빌롭스키가 '실수로' 풀어 준 사람들을 다시 잡아들였고, 그해 11월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쌌다고 고발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정치국에서 심의된 이 편지는 예조프 해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그 공으로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과 중앙위원 자리를 받았으나 곧 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밀려나 1946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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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7체카·OGPU·NKVD 복무
  • 1937–1938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 한도 4,800명 증액
  • 1938이바노보주 NKVD 국장
  • 193811월, 예조프 고발 편지를 스탈린에게 제출
  • 1938–1939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 중앙위원
  • 1939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전출
  • 1946사망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바흐루셰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Вахру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7 ○ 급사

석탄을 무기로 바꾼 인민위원

1939년 10월 소련 지도부는 석탄공업인민위원부를 신설하고 바흐루셰프를 초대 위원으로 임명했다 — 그는 이미 러시아공화국 총리였다. 한 사람에게 정부 수반과 전략 산업을 동시에 맡긴 것은 전운 속에서 석탄이 곧 총력전의 연료라는 판단이었다.

툴라의 자물쇠공 견습공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화국 정부 수반과 소련 최초의 석탄공업인민위원을 겸임한 산업 행정가. 1939년 신설된 석탄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었으며, 1943년 전시 연료 공급의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하던 중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공로는 크렘린 벽 묘지 안장으로 기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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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툴라 「사회주의자」 공장 사령관 · 부소장
  • 1919–21붉은군대 서부전선 정치국 선동원
  • 1923–26툴라 현 형사수사국장
  • 1927–31코소고르스크 제철소장: 제2고로 복구, 광산 개발
  • 1931–36카시라 화력발전소장 (당시 소련 최대)
  • 1937–38러시아공화국 지방공업인민위원
  • 1939–4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46소련 석탄공업인민위원(초대): 전시 탄광 대피·증산
  • 1946–47소련 서부지역 석탄공업장관: 돈바스 복구 지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후댜코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Худ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2–1950 ✕ 처형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에서 숙청된 유일한 아르메니아인 항공원수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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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니키타 알렉세예비치 이조토프

Никита Алексеевич Изо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51 ○ 심장마비

초보 광부를 작업장에서 직접 가르친 이조토프 운동(1932): 스타하노프 운동의 원형

「여기엔 아무 '비밀'도 없습니다. 모든 채탄공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단지 내 노동일을 꽉 채우고, 나와 국가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 『프라우다』 (1932.5.11)

돈바스 채탄공 출신으로 1932년 작업장에서 초보 광부를 직접 가르치는 '이조토프 운동'을 창시해 스타하노프 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후 탄광 관리자와 중앙감사위원(193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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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2고를롭카 연탄공장 보조공 → 코르순 탄광 화부, 내전 후 갱 복구 작업 참여
  • 1922–1932고를롭카 제1 '쇠체가르카' 갱 채탄공, 지속적 기준치 초과 달성
  • 1932.5.11『프라우다』에 작업 경험 공개 기고 — 이조토프 운동의 출발점
  • 1932.12쇠체가르카 갱에 최초의 이조토프 학교 개설, 작업장 직접 교습
  • 1933갱내 청년 채탄공 숙련 교육구간 정식 조직, 『나의 삶, 나의 일』 출간
  • 1935–19369월 240톤(30배 기준치), 1936.2.1 세계 기록 607톤/6시간 — 스타하노프 운동 합류
  • 1935–1937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수학, 1936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7–1941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관리자, 제18차 당대회 중앙감사위원 선출(1939), 최고회의 대의원
  • 1942–1946우랄·동시베리아 탄광 관리 → 하차페톱카 광산관리국장(1945~46)
  • 1946–1951예나키예보 오르조니키제우골 트러스트 제2광산관리국장

블라디미르 클레멘티스

Vladimír Clementis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02–1952 ✕ 처형

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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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 1950「편향주의」 혐의 속에 사임을 강요당한 뒤 체포되었다.
  • 1952슬란스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1963사후 복권되었다.

이반 이시도로비치 노센코

Иван Исидорович Нос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56 ○ 자연사

조선소 메신저 보이에서 소련 조선공업 수장으로

전쟁 중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그의 직접 감독 아래 12,000대의 T-34 탱크가 생산되었다. 조선 인민위원이 바다가 아닌 육상 전투를 위해 가장 많은 탱크를 찍어낸 역설이다.

니콜라예프 조선소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소련 조선공업을 17년간 이끈 생산 관료다. 1940년 조선공업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대양함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전시에는 조선소 대피와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한편 탱크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을 겸임했다. 전후 수송기계·중기계 분야를 거쳐 1954년 조선공업장관으로 복귀, 소련 해군의 원양화와 원자력 잠수함 시대의 산업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유리 노센코는 KGB 장교로서 미국에 망명, 냉전기의 대표적 이중 스파이 사건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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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8조선소 견습에서 니콜라예프 조선연구소 졸업까지
  • 1928–1935마르티 공장에서 설계부장·주임 건조자로 성장
  • 1935–1939레닌그라드 발트 조선소 주임기사·소장
  • 1939–1940조선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0–1946조선공업 인민위원 — 대양함대 계획과 전시 생산 지휘
  • 1941–1942탱크공업 제1부인민위원 겸임, 12,000대 탱크 생산 관여
  • 1947–1950수송기계공업 장관
  • 1952–1956조선공업장관 — 전후 해군 재건과 원자력 잠수함 기반 구축

뱌체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말리셰프

Вячесла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57 ○ 자연사

전차와 원자력 산업을 잇는 생산 관료

1939년, 스탈린의 호출에 트럭이 두 번 펑크 나 1시간 30분 늦었다. '콜롬나에서 트베리 경유로 오셨나?'라는 빈정거림에 서른일곱 살 공장장은 '기술도 사람이 못 따라가면 배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중기계 인민위원 임명을 사양하자 보로실로프가 팔을 붙잡았다: '모루 위의 보드카는 어디 갔나?'

스탈린 시대 소련 군수공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소련 원자력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중형기계공업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 기관차 설계사에서 출발해 전차, 조선, 핵무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수-기술 행정의 정점을 두루 거친 '스탈린의 인민위원' 세대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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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기계공업과 전차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41–1945전차공업 인민위원, T-34 등 전시 전차생산 총괄
  • 1945–1953수송기계·중형기계공업 지도부, 군수와 원자력 행정의 접점에 있음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장관, 원자력·미사일 산업 행정에 관여
  • 1957젊은 생산 관료 세대의 핵심 인물로 사망

이반 표도로비치 테보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Тевос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2–1958 ○ 자연사

스탈린 공업화의 금속 관료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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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금속공업과 중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39–1940조선공업 인민위원으로 군수 생산 기반 관리
  • 1940–1953철금속·조선·수송기계 분야를 오가며 전시 생산 관리
  • 1949–1956철금속공업 장관, 전후 중공업 재건에 관여
  • 1956–1958주일 대사로 이동, 생산 관료에서 외교직으로 전환

미트로판 이바노비치 네델린

Митрофан Иванович Неде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60 ✕ 폭발사

전략로켓군을 창설하고 R-7 개발을 주도한 포병총사령관, 발사대에서 산화하다

폭발이 가라앉은 뒤 부분적으로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폭발 순간에 멈춘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1902년 11월 9일(구력 10월 27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현 보리스оглеб스크에서 태어나 1960년 10월 24일 바이코누르에서 사망했다. 출신 배경은 사료마다 달라 귀족 집안, 노동자 집안, 상인 점원 집안으로 갈리며, 아버지는 1907년에 사망했다. 1920년 붉은군대에 입대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고 1924년 당에 입당했으며, 스페인과 핀란드와 독소전쟁에서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1950~1952년과 1953~1955년 두 차례 포병총사령관을 지냈고 그 사이인 1952~1953년에는 무장 담당 전쟁차관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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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 1937–1939스페인 내전 공화국측 지원병
  • 1941–1943제18군·제37군 포병사령관
  • 1943–1945제3우크라이나전선군 포병사령관
  • 1945소비에트연방영웅
  • 1950–1952, 1953–1955소련군 포병총사령관
  • 1955–1959국방차관 (특수무장·로켓기술)
  • 1959–1960전략로켓군(RVSN) 초대 총사령관

나즘 히크메트

Nâzım Hikmet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튀르키예 튀르키예 1902–1963 ○ 자연사

28년형을 시로 살아낸 터키 혁명시인, 모더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20세기 문학의 거인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와 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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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 1938–1950군사반란 선동 혐의로 28년형 선고, 4개 도시 교도소에서 12년 복역
  • 1939–1960옥중에서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 16,000행 집필
  • 1950국제 석방운동과 단식투쟁 끝에 사면 — 국제평화상 수상
  • 1951–1963소련 망명 — 세계평화평의회 상임위원, 반식민주의·반전 활동
  • 1963.6.3모스크바 페레델키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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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마르키안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Маркиан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69 ○ 가스 사고사

가장 재능 있던 전선군 사령관, 그러나 원수는 아니었다

1941년 8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타전했다. 「누군가 이 구역에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포포프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황제의 의심은 3년 뒤 강등으로 이어졌다.

돈 강 유역 출신으로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했다. 독소전 초기 북부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독일군 진격을 저지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부사령관으로 포위 작전을 입안했다. 1943년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오룔과 브랸스크를 해방해 육군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발트에서의 부진과 정치위원 불가닌과의 충돌로 상장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부터 지상군 주참모장을 지냈고 196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바실렙스키와 골로바노프가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했지만 끝내 원수가 되지 못한 대표적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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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1제1독립적기군 사령관(극동)
  • 1941.1–6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6–9북부전선군·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1941.12–42.6제61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1942.10–12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 1943.6–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 해방, 육군대장 진급
  • 1943.10–44.4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작전 부진으로 상장 강등
  • 1944–45레닌그라드 전선군 참모장
  • 1955–62지상군 전투훈련총국장, 이후 주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그리고리 테오필로비치 카라나제

Григорий Теофилович Карана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2–1970 ○ 자연사

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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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니콜라이 일리치 카모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Ка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3 ○ 자연사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한 소련 해군 항공의 설계자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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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톰스크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최연소 졸업생·기술자로 기록
  • 1924–27도브롤료트에서 융커스 Ju-13 역설계 및 날개 개량
  • 1927–29그리고로비치 설계국, 이어 리샤르 설계국에서 해상항공기 설계
  • 1929스크르진스키와 소련 최초 오토자이로 KASKR-1 제작
  • 1931–39TsAGI 오토자이로 설계반장, A-7 정찰·포병교정 오토자이로 개발
  • 1940–73헬리콥터 설계국(OKB Kamov) 수석설계자 겸 국장
  • 1948–68Ka-8, Ka-10, Ka-15, Ka-18, Ka-25 함상헬기, Ka-22 винтокрыл, Ka-26
  • 1972사회주의노동영웅, 소련 국가상 수상

스타니스와프 길랴로비치 포프와프스키

Станислав Гилярович Попла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인 1902–1973 ○ 사망

포즈난 봉기를 진압한 폴란드계 소비에트 장군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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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징집, 병사로 복무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44–1945폴란드 제1군 사령관, 베를린 공방전
  • 194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 1949–1956폴란드 국방성 차관
  • 1956포즈난 6월 봉기 진압 지휘
  • 1956–1963소련 국방성 복귀, 육군대장으로 퇴역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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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

필리프 예고로비치 미헤예프

Филипп Егорович Михеев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2–1975 ○ 옥고 후 재활

숙청에 휩쓸린 당 조직의 실무 책임자

“진심으로 뉘우치니 죄를 씻을 기회를 달라”고 그는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필리프 미헤예프는 전쟁과 전후를 거쳐 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의 관리국장으로 조직의 운영을 떠받친 소련 공산당 실무 간부였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0년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불법 수사가 확인되며 복권과 함께 당적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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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트베리현 체르노야로보 마을에서 출생
  • 1923프스코프 소비에트당 학교에서 수학
  • 1924–1926붉은군대 복무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6–1940데츠코셀스키 지구당위원회 부서기 및 제1서기
  • 1940–1949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 관리국장
  • 1941–1944레닌그라드 방어에 참여
  • 1950–1954레닌그라드 사건으로 10년형, 1954년 재활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멘시코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еньш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6 ○ 자연사

스탈린에게 바나나 때문에 해임되고 흐루쇼프 아래 냉전 대사로 복귀한 무역·외교 관료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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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 1921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참여
  • 1930–1936아르코스(ARCOS) 런던 지부 책임자
  • 1943–1946유엔구제부흥기구(UNRRA) 부국장 (미국)
  • 1946–1949소련 대외무역부 차관
  • 1949–1951소련 대외무역부 장관
  • 1953–1957주인도 소련 대사
  • 1957주네팔 소련 대사 (겸임)
  • 1958–1962주미 소련 대사
  • 1962–1968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2–1976 ○ 자연사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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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고레미킨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Горемы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6 ○ 자연사

탄약에서 우주까지: 흐린 이름 뒤에 숨은 로켓부처의 첫 장관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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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보리소글렙스크 철도공장 견습 기계공, 당학교·노동자대학 수학
  • 1931바우만 MVTU 졸업, 모스기프로마시 기술자·부소장
  • 1936–1938제92공장(고리키) 주임기술자, 제8공장(모스크바) 기술부장
  • 1939–1940군비담당 부인민위원
  • 1941–1942탄약인민위원 — 전쟁 1년차 군수 지휘
  • 1946–1951농업기계공작부 장관 (1951년 체포·제명, 1953년 복권)
  • 1955–1957초대 일반기계공작부 장관 — 로켓·우주산업의 비밀 행정 수장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2–1978 ○ 자연사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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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 1935–1938.1이바노보주 밀리치야 수사부서 책임자, 밀리치야 관리국장(내무인민위원부 부국장 겸임)
  • 1938.2–6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알마아타); 6월 체포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안드리아노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и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8 ○ 자연사

전시 스베르들롭스크를 이끌고 숙청된 레닌그라드를 재건한 스탈린 시대의 지역 당 보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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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5붉은군대 복무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37–1938코브로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9–1946스베르들롭스크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46–1952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49–1953레닌그라드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3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
  • 1953–1956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먀시셰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Мясищ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8 ○ 자연사

투폴레프가 거절한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1년 10개월 만에 현실로 만든 설계자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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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 1946–51MAI 항공기설계학과장·학장; OKB 해산 (낮은 생산성 이유)
  • 1951–60OKB-23 수석·총설계사 — M-4(1953), 3M(1956), M-50(1959); 세계기록 19건
  • 1960–67TsAGI 소장 — 초음속·가변익·수직이착륙 기초연구 총괄
  • 1967–78EMZ(먀시셰프 실험기계제작공장) 총설계사 — M-17, M-18, M-20, VM-T 아틀란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2 ○ 자연사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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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베네딕토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недик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와 전후 농업행정의 장기 관료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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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5농업인민위원 · 농업장관

판텔레이몬 콘드라티예비치 포노마렌코

Пантелеймон Кондратьевич Понома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4 ○ 자연사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총사령관, 후계 문턱에서 밀려나다

1941년 12월, 스탈린은 포노마렌코를 불러들여 여러 시간 면담한 끝에 전 유격대를 총괄할 중앙본부 설립안을 직접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 후방을 향한 '철도전쟁'의 씨앗이 그날 뿌려졌다.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지휘관으로 '철도전쟁'을 기획해 독일군 후방을 마비시켰다. 1952년 간부국에 올라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스탈린 사후 실권을 잃고 외교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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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7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39년 서부 벨라루스 병합 관리
  • 1942–1944중앙유격대본부장, '철도전쟁'·'콘체르트' 작전 기획·지휘
  • 1944–1948벨라루스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48–1953중앙위 서기, 조달장관, 당 간부국원 — 스탈린 말기 급부상
  • 1953–1954소련 초대 문화장관
  • 1954–1955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1955–1962폴란드·인도·네팔·네덜란드 주재 대사
  • 1965–1978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키릴 세묘노비치 모스칼렌코

Кирилл Семёнович Москал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2–1985 ○ 자연사

베리야 체포를 주도하고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부른 원수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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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1960–62소련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

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6 ○ 자연사

유엔 안보리에서 쿠바 미사일을 부인한 소련의 냉전 외교관

스티븐슨: "쿠바 미사일을 부인합니까, 예스 오어 노?" 조린: "나는 미국 법정에 서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직후 스티븐슨의 보좌관들이 미사일 기지 항공사진을 안보리 회의장으로 들여왔다.

소련의 냉전 외교관으로, 25년간 외무차관을 지내며 체코슬로바키아·서독·프랑스 대사와 유엔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유엔 안보리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추궁에 답변을 거부한 장면으로 냉전 외교사의 상징적 순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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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2콤소몰·피오네르 운동 조직가, 모스크바 당위원회
  • 1941–1945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5–1947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대사
  • 1947–1965소련 외무차관 (세 차례 재임)
  • 1949–1952소련 대외정보위원회 위원장
  • 1952–1953, 1960–1963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5–1956주서독 초대 소련 대사
  • 1965–1971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7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바카예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Бак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7 ○ 자연사

소련 상선대를 세계적 해운 강국으로 키운 16년 장관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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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베르댠스크 항만 공장 견습공
  • 1919–1920적군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1929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 수운학부 수학
  • 1929–1937중앙해운관리국 기사 → 항만중앙관리국장
  • 1937–1942군사수송아카데미·레닌그라드 수운대학 교원
  • 1943–1945국방위원회 전권대표, 무르만스크 항 연합군 화물 하역 총괄
  • 1945–1952해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해운부 차관
  • 1952–1953해운부 제1차관
  • 1953–1954해운·하운부 제1차관 → 각료회의 운수·통신국 부의장
  • 1954–1970소련 해운부 장관
  • 1970–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 연구소 연구원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2–1988 ○ 실각 1972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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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펑전

彭真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2–1997 ○ 혈액암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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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Julio Antonio Mella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쿠바 쿠바 1903–1929 ✕ 암살

25세에 암살된 쿠바 공산당의 학생 창립자, 반제국주의 순교자

1928년 12월, 멕시코시티의 격렬한 당 회의에서 비탈리가 메야에게 소리쳤다 — "잊지 마라: 인터내셔널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다, 제명되거나 죽거나!" 한 달 후 메야는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쿠바 공산당을 공동 창립한 학생운동 지도자로, 아바나 대학에서 반제국주의 학생투쟁을 조직하고 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1925년 쿠바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세웠다. 마차도 독재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도 혁명운동을 이어가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으며, 쿠바 혁명 좌파의 상징적 순교자로 카스트로 세대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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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아바나 대학 법학부 입학 — FEU 공동 창립, 서기 역임
  • 1923FEU 회장 취임 — 제1차 전국학생대회 주최, 호세 마르티 인민대학 설립
  • 1924아바나 공산주의 그룹 가입, 반제국주의 동맹 쿠바 지부 결성
  • 1925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쿠바 공산당 창당 — 중앙위원; 체포 후 18일 단식투쟁
  • 1926대학 제적, 당에서 2년간 제명 — 온두라스·과테말라 거쳐 멕시코시티로 망명
  • 1926–1927쿠바 혁명적 망명자 협회(ANERC) 창립 — 『쿠바 리브레』 등에 기고
  • 1927브뤼셀 식민지 억압 반대 세계대회 참석 — 모스크바에서 국제노조인터내셔널 4차 대회 참관
  • 19291월 10일 멕시코시티에서 귀가 중 총격 암살 — 향년 25세

겐나디 이바노비치 스미르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Сми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38 ✕ 처형

8개월 만에 숙청으로 사라진 계획 수장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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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 1930–1934소유즈콜호즈방크 부총재, 고스플란 자본건설부문장·간부회 구성원
  • 1934–1937고스플란 부의장 겸 종합계획국장 — 메즐라우크의 최측근
  • 1937.02–10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계획 총괄
  • 1937.10–1938체포·기소·사형 — 대숙청이 계획기구마저 집어삼키다
  • 1956사후 복권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사레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са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39 ✕ 처형

콤소몰을 이끌며 대숙청을 집행하다 그 숙청에 삼켜진 젊은 지도자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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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콤소몰 창립과 동시 가입, 볼셰비키당 입당
  • 1922–26모스크바 바우만·펜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26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 위해 레닌그라드 파견
  • 1929–3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25세 최연소 지도자
  • 1934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정위원 — 최연소
  • 1936–38콤소몰 대숙청: 141,337명 제명
  • 1938–39베리야가 직접 체포,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 거부, 총살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보즈네센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Вознесе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50 ✕ 처형

전시계획의 천재, 레닌그라드 사건에 죽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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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레닌그라드 당·계획기관에서 빠르게 성장한 젊은 경제관료
  • 1938–1941, 1942–1949고스플란 및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전시 생산계획 조정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와 전시 경제관리의 핵심 실무자
  • 1946–1949전후 유력 경제 지도자로 부상, 『전시 소련경제』 저술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처형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포프코프

Пётр Сергеевич Поп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50 ✕ 처형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무 지휘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첫 희생자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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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김책

김책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3–1951 ✕ 전시 과로사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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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조지 패드모어

George Padmore
공산주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3–1959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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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이고리 바실리예비치 쿠르차토프

Игорь Васильевич Курч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0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의 과학 책임자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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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60원자력 과학지도자

티모페이 암브로시예비치 스트로카치

Тимофей Амвросиевич Строка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03–1963 ○ 병사

베리야가 '수용소 먼지'로 위협하고 흐루쇼프에게 쿠데타를 경고한 내무장관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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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부인민위원
  • 1942–1945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 1946–1953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 1953.03–06르비우 주 내무국장
  • 1953–1956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복귀)
  • 1956–1957소련 내무차관 겸 국경·내무군 총국장

바실리 표도로비치 포포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П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4 ○ 자연사

전후 화폐개혁을 집행한 10년의 국가은행 총재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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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 1934–1937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 수료
  • 1937–1938타타르 자치공화국 재무부인민위원,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38–1940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소련 재무부인민위원 → 제1부인민위원
  • 1940–1948소련 국가통제부인민위원(후에 장관), 협동조합 총국장, 각료회의 무역·경공업국 부의장
  • 1948–1958소련 국가은행 총재 (1954년까지 재무차관 겸임)
  • 1958–1960국가은행 제1부총재로 강등, 1960년 6월 병으로 연금 퇴직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소볼레프

Аркад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о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3–1964 ○ 자연사

유엔헌장을 공동 기초한 소련 외교관, 냉전기 유엔의 소련 얼굴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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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
  • 1942–1945주영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45–1946소련군정청(독일) 정치국장
  • 1946–1949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
  • 1949–1950소련 외무부 유엔국장
  • 1950–1951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51–1953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53–1954소련 외무부 미주국장
  • 1954–1955소련 유엔 차석대표
  • 1955–1960소련 유엔 상임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
  • 1960–1964소련 외무차관

세묜 아리예비치 코스베르크

Семён Ариевич Косберг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5

3단 로켓엔진으로 루나와 가가린을 우주로 밀어올린 OKB-154 수석설계자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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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직접분사장치 연구
  • 1940제33공장 OKB 부수석설계자, 직접분사 설계국장
  • 1941–46OKB-154(베르츠크) 수석설계자: ASh-82FN용 NV-3U 직접분사장치, La-5·La-7·Tu-2에 탑재
  • 1946–54OKB-154 보로네시 이전, 터보제트·터보프롭 연료장치 및 액체로켓엔진 전환
  • 1958–59RD-0105 개발(9개월): 루나 1·2·3호 3단 엔진, 세계 최초 우주 점화
  • 1960레닌상 수상, 기술과학 박사학위
  • 1961RD-0109: 보스토크 3단, 가가린 궤도 진입.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2–65소유즈·몰니야·프로톤 상단 엔진 개발 주도

니콜라이 일리치 벨랴예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Беля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6 ↓ 실각 1960

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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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체르카소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Черкас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6 ○ 폐기종·심부전

〈변신의 배우〉: 넵스키 훈장에 얼굴이 새겨진 소련의 국민 배우

저는 이반 뇌제의 형상을 영화만이 아니라 극장에서도 다뤄왔고, 이 형상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우리의 시나리오 개작이 올바르고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드린스키 무대와 소련 영화를 오간 배우. 예이젠시테인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와 〈이반 뇌제〉 주연으로 국가 서사시의 얼굴이 되었고, 파가넬부터 돈키호테까지 이르는 변신의 폭으로 스탈린에게서 「변신할 줄 아는 배우」라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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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마린스키 극장을 비롯한 페트로그라드 극장들의 단역·마임 배우로 출발
  • 1926레닌그라드 무대예술대학 졸업, 레닌그라드 청소년관객극장(TYuZ) 배우
  • 1933레닌그라드 푸시킨 연극극장(알렉산드린스키) 입단, 이후 26개 배역
  • 1938예이젠시테인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 주연
  • 1944〈이반 뇌제〉에서 이반 뇌제 역
  • 1947소련 인민예술가 칭호
  • 1957〈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 역
  • 1964레닌상 수상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크릴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ры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2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략로켓군까지, 핵 3축의 세 번째 기둥을 세운 원수

1966년, 드골의 노보시비르스크 미사일 사단 시찰 중 브레즈네프의 신호에 지하 사일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불쑥 솟아올랐다. "파리도 겨냥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브레즈네프는 연기나는 발사대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16세에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한 크릴로프는 내전부터 만주 작전까지 소련의 모든 주요 분쟁을 관통한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추이코프의 제62군 참모장으로서 시가전을 지휘했고, 바그라티온 작전과 만주 공세에서 제5군을 이끌어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원수로 진급한 뒤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에 올라, 쿠바 위기 이후 열세였던 소련 핵전력을 지하 사일로 기반의 전투태세를 갖춘 군종으로 탈바꿈시켰다. 9년간의 재임기는 전략로켓군의 창설기이자 가장 집중적인 성장기로서, 소련 핵 3축의 한 기둥을 완성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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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6세에 붉은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41–1942연해군 참모장,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 1942–1943제62군 참모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3–1945제5군 사령관, 바그라티온·동프로이센·만주 공세
  • 1947–1960극동·우랄·레닌그라드·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62소비에트연방원수
  • 1963–197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핵전력 전투태세화 주도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

Аверкий Борисович Арис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3 ○ 자연사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레지디움 위원, 낚시를 사랑한 당 조직관리자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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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6스베르들롭스크·케메로보·크라스노야르스크 당 서기
  • 1946–50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0–5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53프레지디움 위원 겸 중앙위 서기, 당·노조·콤소몰 담당
  • 1955–60중앙위 서기 (재임명)
  • 1957–61프레지디움 위원 (재진입), 러시아공화국 당국 부의장
  • 1961–7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71–73주오스트리아 소련 대사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3–1974 ○ 자연사

소련 리투아니아를 34년간 통치한 공산주의자

1949~50년,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려 하자 스니에치쿠스는 스탈린에게 직접 맞섰다. 리투아니아는 구시대 공산주의자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34년간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소련 최장수 공화국 지도자다. 지하운동 출신으로 소비에트화를 주도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간섭을 완충하며 리투아니아어와 문화 공간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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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리투아니아 공산당 알리투스 지하위원회 책임자
  • 1921–1925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 공산당 출판국 근무
  • 1925–1926, 1933–193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27–1930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지하), 선전·조직 담당
  • 1936–1939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비합법, 카우나스)
  • 1940.6–1940.8리투아니아 국가보안국장
  • 1940–1974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34년)
  • 1942–1944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라오수스

饶漱石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3–1975 ↓ 체포 1955 · 옥사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건국 후 첫 고위 숙청에 걸린 화둥의 지도자

천이와 함께 화둥 당을 이끌다 1953년 중앙조직부장으로 베이징에 갔다. 1954년 가오강과 함께 숙청되고 1955년 당적이 박탈되었으며, 1975년 구금 중 사망했고 복권되지 않았다.

장시 출신으로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기 화둥국 서기로 천이와 함께 화둥을 관할했다. 건국 후 화둥 군정위원회 주석과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다. 1953년 가오강과 함께 류사오치·저우언라이를 밀어내려 했다는 이유로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비판받고 1955년 체포되었다.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가오강과 달리 공식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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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화둥 군정위원회 주석
  • 1953–1954중공 중앙 조직부장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그레치코

Андрей Антонович Греч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6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 초의 국방장관

1968년 8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최종 결정한 정치국 회의에서 그레치코는 '이 침공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더라도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병대 사병으로 남북전쟁에 뛰어든 후 정규 군사교육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카프카스 방어·키예프 해방·프라하 진격을 지휘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1967년 소련 국방장관에 올라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사상 최대 규모의 재래식 증강을 주도했으며, 19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한 핵심 책임자였다. 1973년에는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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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에서 군·전선 지휘관으로 성장, 카프카스와 우크라이나 작전 지휘
  • 1953–1957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57–1960지상군 총사령관
  • 1960–1967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 1967–1976국방장관, 브레즈네프 시대 군사력 확대를 대표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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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 부의장
  • 1943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4아르메니아 SSR 국가 작곡
  • 1950그네신 음악교육원 교수
  • 1951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54소비에트 인민예술가
  • 1957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서기
  • 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5소집)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레온티예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Леонтьев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3–1979 ○ 자연사

활동 이론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학자

인간은 인격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되어 간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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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모스크바국립대 졸업, 심리학연구소 연구원
  • 1924–1930비고츠키·루리야와 공동 연구
  • 1931–1934하리코프 심리학파 지도
  • 1934–1941모스크바 복귀, 심리학연구소 연구 지속
  • 1941–1966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철학부 심리학과장
  • 1950–1957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심리학부 학술서기
  • 1959–1961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6–1979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

이사 알렉산드로비치 플리예프

Исса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오세트인) 1903–1979 ○ 자연사

유일한 기병 출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쿠바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가다

1942년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 교두보. 플리예프의 기병군단 병사들이 돈 전선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쳤다. 독일 6군 33만 명을 가둔 포위환이 처음으로 닫힌 순간이었다.

북오세티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소련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에서 도바토르 휘하 모스크바 방어전을 시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그의 부대가 독일 6군 포위를 최초로 완성했고, 이후 기계화기병집단을 이끌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종심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만주에서는 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을 지휘해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붉은군대에서 유일하게 기병 장군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핵전쟁 직전의 긴장을 직접 관리했고, 같은 해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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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95기병사단 작전과장, 몽골 군사고문, 48기병연대장
  • 194150(후일 3근위)기병사단장 —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방어
  • 1942–433근위기병군단장 — 스탈린그라드, 독일 6군 포위 최초 완성
  • 1944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오데사 해방 (1차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4–451근위기계화기병집단 — 바그라티온·데브레첸·부다페스트·프라하
  • 1945.8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관동군 격파 (2차 영웅)
  • 1958–68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62–63아나디리 작전 —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

보리스 파블로비치 베셰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ещ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1 ○ 자연사

29년간 소련 철도를 이끈 최장수 장관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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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레닌그라드 철도운수기사 연구소 졸업, 모스크바 호브리노 역 선임기사
  • 1937–1940오르조니키제 철도국장
  • 1940–1941옥탸브리스카야 철도국장
  • 1941–1942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수송 및 대피 총괄
  • 1942–1944쿠이비셰프 철도국장
  • 1944–1946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운수관리국장
  • 1946–1948교통부 제1차관
  • 1948–1977소련 교통부 장관 (28년 7개월)

사르디온 니콜라예비치 나다라야

Сардион Николаевич Надара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3–1982 ○ 자연사

베리야의 경호를 맡은 내부감옥 책임자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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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 부책임자, 이어 책임자
  • 1939–1946베리야 개인 경호 부책임자
  • 1946–1952MGB 경호총국 장교
  • 1952–1953MGB 제41 경호대 부책임자
  • 1953베리야 개인 경호 책임자
  • 1953–1965체포, 십 년형 복역

유리 예브게니예비치 막사료프

Юрий Евгеньевич Максар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3–1982 ○ 자연사

T-34 대량생산을 조직한 전차공업의 핵심 책임자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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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키로프 공장: 직장·공장장·전차부장
  • 1938–1941하리코프 제183전차공장장
  • 1941–1942니즈니타길 제183공장장 (1942년 2월 해임)
  • 1942–1946우랄 제183전차공장장 (스탈린 기념)
  • 1946–1949소련 수송기계공업부 차관
  • 1950–1953소련 수송기계공업장관
  • 1957–1959소련 각료회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 1961–1978소련 각료회의 발명발견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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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5 ○ 자연사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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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лмог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7 ○ 자연사

현대 확률론의 공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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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87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35–1965모스크바 국립대학 확률론 학과장
  • 1939–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39–1942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64–1966, 1974–1985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63–1987콜모고로프 기숙학교 (제18학교) 창립자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노비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Нов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9 ○ 자연사

케넌의 장전보에 맞선 노비코프 전보: 냉전 개막을 쓴 소련 외교관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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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동양학원 졸업,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기관에서 근무
  • 1935세계경제·세계정치 적색교수연구소 입소
  • 1938외무인민위원부 제1동방부 책임고문
  • 1941–1943외무인민위원부 제4유럽부장
  • 1943–1944주이집트 소련 대사 (그리스 대사 겸임)
  • 1946–1947주미국 소련 대사
  • 1947대사직 해임, 중앙위 간부예비역으로 전출
  • 1950소련 작가동맹 가입, 학술·문학 활동 전념

아나톨리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94 ○ 자연사

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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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즈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예르쇼바

Зинаида Васильевна Ерш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3–1995 ○ 자연사

소련 원자력 계획을 개척한 방사화학자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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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학생, 방사화학 연구
  • 1930–1937모스크바 희소원소 공장 방사늄 부문, 물리实验실장
  • 1936–1937파리 라듐연구소 연수, 이렌 졸리오퀴리 지도
  • 1938–1945기레드메트 라듐 연구실장, 우라늄 카바이드·금속 우라늄 생산
  • 1946–1948특수금속연구소 NII-9 제1방사화학연구실장
  • 1947–1954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생산 기술 연구, 스탈린상 수상
  • 1960년대–1989전러시아 무기재료연구소에서 폴로늄 화학과 동위원소 전원 연구

레오니트 가톱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Гат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97 ○ 자연사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한 편집자

1949년 여름, 보즈네센스키의 『소련 전시경제』를 '중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이라 평했다는 이유로 당 중앙위 결정에 따라 《볼셰비키》 잡지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경제학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1957–1965)로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1929년 곡물 시장 연구로 집단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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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민스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 (유대계)
  • 1924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1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가격 부문 책임자, 제1·2차 5개년 계획 작성 참여
  • 1931–1936공산주의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비에트 무역 부문 주임
  • 1933–1937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무역회전·국민경제균형 부서장
  • 1939–1949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볼셰비키》 잡지 편집위원
  • 1949보즈네센스키 저서 호평으로 《볼셰비키》·고등당학교에서 해임
  • 1957–1965《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정치경제학)
  • 1965–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71–1997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
  • 1997모스크바에서 사망,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

아나톨리 안토노비치 볼린

Анатол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2007 ○ 자연사

판사 숙청을 지휘하고 재활 조치로 실각한 최고재판소장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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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테므류크 어류가공공장 노동자
  • 1921붉은군대 부대 본부 비밀부서장, 내전 참전
  • 1923–1926크라스노다르 라브파크 학생
  • 1925RKP(b) 입당
  • 1930레닌그라드국립대학 법학부 졸업
  • 1930–1931공산주의아카데미 대학원생 (레닌그라드)
  • 1931–1932레닌그라드대학 교원·교수주임
  • 1932–1933카렐리야 자치SSR 문화·공교육 부문장
  • 1933–1935페트로자보츠크 검사
  • 1935–1937레닌그라드 볼로다르스키 구역 검사보, 소콜니키 구역 검사
  • 1937–1939RSFSR 부검찰총장
  • 1939–1948RSFSR 검찰총장
  • 1948–1957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7–1969소련 각료회의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
  • 1969–2007연방급 개인연금자, 《인간과 법》 잡지 고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4–1936 ○ 병사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저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범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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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셰페톱카 볼셰비키 지하운동 연락원
  • 1919콤소몰 가입 및 붉은군대 자원입대, 코톱스키 기병여단 복무
  • 1921–1923키예프 철도공장 전기공·콤소몰 서기
  • 1924당 가입, 베레즈디프·이자슬라프 콤소몰 지구위원회 서기
  • 1930–1934시력·보행 상실 상태에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집필
  • 1935레닌 훈장 수훈
  • 1936『폭풍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 집필 착수, 완성 전 사망

발레리 파블로비치 치칼로프

Валерий Павлович Чка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4–1938 ✕ 추락사

북극을 넘어 미국까지: 스탈린의 매, 그리고 마지막 시험비행

1937년 6월 20일, ANT-25기가 밴쿠버의 피어슨 비행장에 착륙하자 미군 장교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치칼로프가 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1930년대 소비에트 항공력의 상징.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I-15, I-16 전투기를 시험하며 상승 스핀과 슬로 배럴 롤이라는 새 곡예비행 기동을 창안했다. 1936년 모스크바-우드 섬 9,374km 무착륙 비행으로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같은 ANT-25기로 모스크바-북극-밴쿠버(미국) 8,811km를 63시간 만에 횡단하며 북극 항로를 개척했다. 스탈린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올 만큼 대중적 영웅이 되었으나, 1938년 12월 서둘러 추진된 I-180 전투기 초도비행에서 엔진 정지로 추락해 3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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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제4카나빈 항공대 항공기 정비공
  • 1921–1924예고리옙스크·보리소글렙스크·모스크바·세르푸호프 비행학교 수료
  • 1924–1930제1적기전투비행대 전투기 조종사
  • 1930–1933NII VVS RKKA 시험비행사
  • 1933–1938제39항공공장 시험비행사 (폴리카르포프 설계국)
  • 1935–1938공군 곡예비행 부문 책임자
  • 1937–193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1소집)

런비스

任弼时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4–1950 ○ 뇌출혈

옌안 시기 「5대 서기」의 한 사람이었던 조직가, 건국 이듬해 요절했다

1940년 옌안으로 돌아온 뒤 서기처와 조직부에서 일했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혀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 서열에 올랐다. 1950년 10월 2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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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43–1950중앙서기처 서기

야코프 표도로비치 카푸스틴

Яков Фёдорович Капус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50 ✕ 처형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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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김무정

金武亭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4–1952 ↓ 병사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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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04–1953 ✕ 처형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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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 1953.3–1953.6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의 측근으로 복귀
  • 1953.6–1953.12베리야와 함께 체포, 사형 선고 후 총살

쿠즈마 니콜라예비치 데레뱐코

Кузьма Николаевич Деревя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54 ○ 암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한 소련 대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소련 대표가 서명할 차례입니다"라는 맥아더의 말에 데레뱐코 중장이 걸어나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3분간의 의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소련의 군사정보 장교이자 중장으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소련 대표로 서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 종결에 참여했다. 독소전 기간에는 제53군, 제57군, 제4근위군의 참모장으로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셰브첸코 작전,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부다페스트와 빈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종전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시찰한 최초의 소련 관료로서 원자폭탄 피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소련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와 GRU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시찰 당시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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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붉은 군대 입대
  • 1924제2키예프 붉은감제관학교 졸업, 제297보병연대 배속
  • 1933–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방학부에서 영어·일본어 전공
  • 1936–1938적군 정보총국(GRU) 근무, 스페인 내전 파견, 중국군 비밀 무기지원 작전 수행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특별스키여단 참모장
  • 1940–1941발트 특별군관구 정보부 부장, 동프로이센 특수임무
  • 1941–1942서북전선 사령부 정보부 부장·대리
  • 1942–1943제53군 참모장 (서북전선 → 스텝전선)
  • 1943–1944제57군 참모장 (제2·제3우크라이나전선)
  • 1944–1945제4근위군 참모장 (제2·제3우크라이나전선), 부다페스트·빈 공세 참여
  • 1945제35군 참모장, 9월 2일 일본 항복문서 서명 (소련 대표)
  • 1945–1950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 히로시마·나가사키 시찰 및 스탈린 보고
  • 1950–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직 → GRU 정보국장

니콜라이 레오니도비치 두호프

Николай Леонидович Ду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64 ○ 자연사

KV·IS 중전차에서 핵탄두까지: 전차와 핵무기 양대축을 설계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기둥

하리톤은 두호프를 두고 “그의 설계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다”라고 평했다.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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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 1948–1954KB-11 부수석설계자 — 최초의 소련 원자폭탄 내폭 시스템
  • 1954–1964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 — 열핵탄두 및 핵탄약 설계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마흐뇨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Махн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4–1965 ○ 자연사

비밀 원자력 행정의 조직자

첫 소련 원자탄의 이름을 정할 때 마흐뇨프는 'РД'(반응 엔진)에 이니셜 'С'를 덧붙여 'РДС', 곧 '스탈린의 반응 엔진'이 되게 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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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4노동자·농민 감독기관에서 근무
  • 1934–1940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지역 전권대표
  • 1940–1941소비에트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 1941–1945군수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GKO 위원 대리
  • 1945–1953소련 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위원·서기
  • 1953–1956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국장
  • 1956–1965원자력 이용 국가위원회 과학기술정보·전시국장

퍼르커시 미하이

Farkas Mihály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4–1965 ○ 자연사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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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빌리스 테니소비치 라치스

Вилис Тенисович Лацис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04–1966 ○ 자연사

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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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6–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세르게이 로마노비치 사브첸코

Сергей Романович Сав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66 ○ 실각 1955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 해체한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대외첩보 책임자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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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 1949–1951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제1부의장, 사실상 소련 대외정보 총괄
  • 1951–1953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53베리야 체포 후 MVD 제2총국 제1부국장으로 좌천, 곧 해임
  • 1955'직무 부적합'으로 강제 전역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포스코노프

Алексей Андреевич Поск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69 ○ 자연사

코시긴 개혁기 고스방크를 이끈 바시키르 출신 재정 엘리트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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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 1966–1969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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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사포노프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Саф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2 ○ 자연사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하고 베리야 체포를 거부하며 물러난 소련 검찰총장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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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5레닌그라드 기업 법률고문·법률국장, 소비에트법 연구소 민법 강사
  • 1935–1939레닌그라드주 오쿨롭카군·키롭스키구 검사
  • 1939소련 검찰청 민사소송부장
  • 1939–1948소련 부검사장·제1부검사장 (1946년부터 검찰총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검찰단 참여
  • 1948–1953소련 검찰총장
  • 1955–1957모스크바 지방교통검찰청 부검사
  • 1957–1968러시아 SFSR 검찰청 형사재판감독부 차장·수사관리국 검사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4 ○ 자연사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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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북드비나 소함대 입대 (나이를 두 살 높여 지원)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우등 졸업
  • 1933–1936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 1936–1937스페인 공화국 해군 수석 고문 (돈 니콜라스 레판토)
  • 1938–1939태평양함대 사령관
  • 1939–1946해군인민위원 (34세,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
  • 1948소장으로 강등, 극동 해군 부사령관으로 전출
  • 1951–1953해군장관으로 복귀 (계급은 중장)
  • 1953–1955국방제1차관·해군총사령관,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 1956중장으로 재강등 및 강제 퇴역

왕밍

王明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한족) 1904–1974 ○ 사망

'28인의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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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 체코 1904–1975 ↓ 실각 1968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다 프라하의 봄 개혁운동에 의해 축출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둡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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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당원으로 입당
  • 1937–1938KSČ 호도닌 지역위원회 서기
  • 1941–1945나치 점령 하 지하활동으로 체포,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수감
  • 1945–1951KSČ 프라하 시당 제1서기
  • 1951–1953KSČ 정치서기국 위원 겸 부총리
  • 1953–1968KSČ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7–196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71정상화 국면 KSČ 중앙위원 재선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골로바노프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Голов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5 ○ 자연사

붉은 군대 최연소 원수: 스탈린의 직속 전략폭격 사령관

스탈린이 내외투를 벗겨주자 원수는 당황했고, 스탈린은 말했다. "당신은 내 손님이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이자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에 이은 두 번째 항공 총원수였다. 1919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해 제59소총연대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1924년 10월부터 OGPU에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아에로플로트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비행 조종사로 불렸다. 1942년 2월부터 스타프카 직속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했고, 1944년 12월 ADD가 제18항공군으로 재편되자 그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해임되었다. 1952년 공수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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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 1943.08항공원수 진급, 붉은 군대 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
  • 1944.08항공 총원수 진급
  • 1944.12–1946.04제18항공군 사령관 (1944년 12월 6일 ADD에서 재편)
  • 1946.04–1948.05소련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1948년 5월 해임
  • 1948–1950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수학 (금메달 졸업)
  • 1952–1953공수군단장 (TASS·«로디나»는 프스코프의 제15근위공수군단,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제37근위공수군단으로 기록)
  • 1953예비역 편입
  • 1958–1966민간항공연구소 비행부문 부소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샤후린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5 ○ 자연사

전시 항공공업을 지휘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한 인민위원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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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7모스크바 전기기술자·콤소몰 간부
  • 1927–1932모스크바 공학경제연구소 학생
  • 1933–1938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및 항공공장 당조직자
  • 1938–1940야로슬라블·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40–1946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
  • 1946–1953수감 — '항공사건'으로 7년형
  • 1953–1959항공공업 차관·제1차관; 대외경제관계 국가위원회 부의장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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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 1946–1948제6근위군 사령관, 이후 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과정 수료
  • 1948–1954제5군 사령관 (극동)
  • 1954–1955제11근위군 사령관 (발트 군관구)
  • 1955–1957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60–1965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5–1969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8소련군 원수 진급 (4월 15일)
  • 1969–1976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에서 명예직 수행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페르부힌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Перву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뇌졸중), 모스크바

첫 원자폭탄 시험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7년 흐루쇼프에 맞서 좌천된 인물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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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 1958–1962주동독 특명전권대사
  • 1965–1978고스플란 부서장·위원, 원자력발전소 인수 국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이반 테렌티예비치 페레시프킨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Пересып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를 연결한 통신의 설계자, 최초의 통신병과 원수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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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25재입대, 키예프 군사정치학교 졸업, 제1기병사단 통신대대 복무
  • 1937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 졸업, 통신연구소 군정위원
  • 1938–1939붉은 군대 통신국 군정위원, 이후 부국장 (대령)
  • 1939–1944소련 체신인민위원
  • 1941–1944국방부인민위원 겸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4–1946통신병과 원수,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6–1957육군 통신병과 사령관
  • 1957–1978국방부 차관 과학고문, 국방부 감찰총감단

보리스 글레보비치 무즈루코프

Борис Глебович Музру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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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키로프 공장 기술자 → 주임 야금기사
  • 1939–1947우랄마시 공장장
  • 1947–1953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제4총국장
  • 1955–1974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T-34·T-54·T-64를 설계한 소련 전차의 얼굴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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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 1951–6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 수석설계자, T-55·T-64 개발
  • 1966–7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장 겸 수석설계자, T-64A 완성
  • 1976–79하리코프 설계국 고문·소련 방위산업부 과학기술위원회 위원

표도르 페도토비치 쿠즈네초프

Фёдор Федот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GRU에서 글라프PUR까지: 전시 정보와 말기 스탈린 군 정치를 모두 지휘한 상장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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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프롤레타르스키 구당위 제1서기
  • 1938붉은군대 총정치국 간부부장
  • 1938–1942붉은군대 총정치국 부국장
  • 1942–1943제60군·보로네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3–1945총참모부 정보국장 —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5–1947총참모부 정보총국(GRU)장 — 소비에트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7–1949소련 각료회의 산하 정보위원회 부의장
  • 1950–1953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
  • 1953–1957소련 국방부 총인사국장
  • 1957–1959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 1959–1969북부군집단 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80 ○ 자연사( 심장마비)

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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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수데츠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де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4–1981 ○ 자연사

17항공군을 이끌고 프라하까지 진격한 공군원수,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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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제51군 공군 · 볼가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1폭격항공군단장
  • 1943–1946제17항공군 사령관
  • 1946–1949공군 주참모장 ·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55제26항공군 사령관
  • 1955–1962장거리항공대 사령관
  • 1962–1966방공군 총사령관 · 국방차관
  • 1966–1981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스테판 아파나시예비치 발레진

Степан Афанасьевич Балез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4–1982 ○ 자연사

카프타노프 밑에서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린 GKO 과학실 선임보좌관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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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초등학교 교사·고아원장, 비르스크 현 콤소몰 지도자
  • 1925–1932게르첸 사범대학 졸업, 적색교수대학원 이수, 카르포프 연구소 연구원
  • 1936–1938쿠이비셰프 의과대학 물리·콜로이드 화학 주임
  • 1938–1941레닌 사범대 화학과장, 고등교육위원회 대학부장
  • 1941–1943GKO 과학 전권위원 선임보좌관: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 1944–1948볼셰비키당 중앙위 간부국 대학·과학기관 부부장
  • 1948–1967레닌 사범대 일반·분석화학 주임, 금속 부식 억제제 연구실 창설
  • 1967–1982유네스코 인도 교육 개혁 고문, 『학교에서의 화학』 편집위원장

세묜 데니소비치 이그나티예프

Семён Денисович Игна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83 ↓ 실각 1953

스탈린 말기의 마지막 MGB 장관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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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0s당 조직·선전 라인에서 성장, 중앙위 관료로 승진
  • 1951–1953MGB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보안기관 수장
  • 1952–1953의사 음모 수사와 말기 반유대주의 공포 국면에 관여
  • 1953스탈린 사후 베리야에게 공격받고 MGB에서 축출
  • 1950s–1960s처형은 피하고 지방 당직으로 밀려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샤탈린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Шат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4–1984 ○ 실각 1955

말렌코프의 간부 책임자: 스탈린 사후 보안기관을 감독하다 흐루쇼프에게 밀려난 당 조직가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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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복무
  • 1923–1929콤소몰 · 소비에트 · 교사 활동 (모스크바주 카시라)
  • 1933–1935국영농장 정치부장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 1935–1938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대학원 · 강사 · 학장 직무대행
  • 1938–1939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당기관부 지도원 · 부부장
  • 1939–1944중앙위 간부국 제1부국장
  • 1944–1947중앙위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담당 국장 겸 간부국 제1부국장
  • 1946–1952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국원
  • 1947–1950『파르티나야 지즌』 주필 겸 하바롭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50–1953중앙위 계획재정부장 · 간부배치부장
  • 1953–195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서기 · 내무성 제1차장 (1953년 7월)
  • 1955–1956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
  • 1956–1958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 1958–1959소련 각료회의 ·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60–1984연금생활 · 국가계획위 산하 계획규범연구소 부소장

야코프 예르몰라예비치 차다예프

Яков Ермолаевич Чад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85 ○ 자연사

전시 정부 법령에 스탈린과 함께 서명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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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딩링

丁玲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4–1986 ○ 자연사

『소피 여사의 일기』에서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까지, 옌안과 반우파 투쟁을 모두 겪은 작가

1904년 10월 12일 후난 린리에서 태어나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이름을 얻고, 반우파 투쟁이던 1958년 당에서 제명되어 1986년 3월 4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난 출신으로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신여성의 내면을 그려 이름을 얻었고, 남편 후예핀이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입당했다. 1936년 산베이의 홍군 지역에 도착해 마오의 환영을 받았으나 1942년 「3·8절 유감」으로 옌안의 성차별을 지적해 정풍운동에서 비판받았다. 토지개혁을 그린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로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로 몰려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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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7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미하일 보리소비치 흐랍첸코

Михаил Борисович Храп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86 ○ 자연사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공세에 희생된 문화행정 수장, 고골·톨스토이 연구로 부활한 문학학자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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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 1948–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4–1957잡지 《옥탸브리》 편집장
  • 1967–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문학·언어 분과 아카데미크-서기(분과장)

천보다

陈伯达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4–1989 ↓ 실각 1970 · 자연사

마오의 정치비서 겸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중앙문혁소조 조장에서 1970년 실각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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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홍기』 편집장
  • 1966–1970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세르게이 이그나티예비치 루덴코

Сергей Игнатьевич Ру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904–199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제16공군을 지휘한 공군원수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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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 생도
  • 1927전투기 조종사, 항공대 지휘관
  • 1932–1941항공여단·항공사단 지휘관, 주콥스키 공군아카데미 졸업
  • 1942제16공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 1948–1949공수부대(VDV) 사령관
  • 1950–1953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겸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68공군 주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 1968–1973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 교수

파벨 알렉세예비치 체렌코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Черенк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체렌코프 효과를 발견한 소련의 노벨 물리학자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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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보로네시 국립대 물리수학부 졸업
  • 1930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연구원
  • 1934체렌코프 복사 발견
  • 194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6스탈린상 1급 수상, CPSU 입당
  • 1948모스크바 동력공학연구소(MEI) 교수
  • 1951스탈린상 2급 수상, MIFI 교수
  • 1958노벨 물리학상(타므, 프랑크와 공동 수상)
  • 1959FIAN 광중간자과정 연구실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원사)
  • 1977소비에트 국가상 수상
  • 1984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표트르 파데예비치 로마코

Пётр Фаддеевич Лома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이자 고스플란 의장

1988년 기네스북이 46년 장관직을 기록할 때, 로마코는 이미 2년 전 은퇴한 상태로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로 46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금속공학자다. 알루미늄·타이타늄 산업의 기초를 닦고 전시 우라늄 공급으로 핵개발을 뒷받침했으며, 고스플란 의장으로 계획경제 재중앙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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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콜추기노 비철금속가공공장장
  • 1939–1940비철금속공업 부인민위원, 알루미늄·마그네슘 총국장
  • 1940–1948비철금속공업 인민위원·장관, 전시 공장 이전과 우라늄 공급 총괄
  • 1948–1950금속공업부 제1차관으로 통합 부처에서 실무 지휘
  • 1950–1953, 1954–1957비철금속공업 장관, 알루미늄·희귀금속 생산 확대 주도
  • 1957–1961크라스노야르스크 소브나르호스 의장, 지역경제 개혁 실무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의장, 계획체계 재중앙화 주도
  • 1965–1986비철금속공업 장관, 브레즈네프기 산업 확장과 다이아몬드·타이타늄 생산 개시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젤토프

Алексей Сергеевич Жел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4–1991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자 주코프를 무너뜨린 정치장교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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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50중앙군집단 군사평의회 위원·소련 최고위원 대리 (오스트리아)
  • 1951–1953소비에트군 총간부국장
  • 1953–1958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
  • 1958–1959CPSU 중앙위 행정부장
  • 1959–1971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 1971–1991국방부 총감찰단 고문, 1981–87년 참전용사위원회 의장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랴스노이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Рясно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4–1995 ○ 자연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반군 진압을 지휘한 NKVD 내무인민위원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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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3투르크메니스탄 콤소몰·당 활동; 모스크바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 1933–1937MTS 정치부장, 스탈린그라드 지역구 당 서기
  • 1937–1941GUG NKVD 방첩부 요원 → 과장
  • 1941–1943고리키주 NKVD/NKGB 국장
  • 1943–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
  • 1946–1952소련 내무제1차관 → 내무차관
  • 1952–1953소련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3–1956모스크바·모스크바주 MVD 국장

율리 보리소비치 하리톤

Юлий Борисович Харит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96 ○ 자연사

46년간 소련 핵무기 설계국을 이끈 수석설계자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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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세묘노프 지도)
  • 1926–1928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수 (러더퍼드·채드윅)
  • 1931–1946화학물리연구소 폭발물 연구실장
  • 1939–1941젤도비치와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계산
  • 1946–1992KB-11(아르자마스-16)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
  • 1953–199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92–1996VNIIEF 명예 과학책임자

덩샤오핑

邓小平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4–1997 ○ 자연사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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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
  • 1978–1992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개혁개방 주도
  • 1979미국 방문과 대외 개방의 상징적 출발

김산

김산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 1905–1938 ✕ 처형

일제하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 《아리랑》의 주인공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일제하 조선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다.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에게 스물두 차례 인터뷰를 남겨 《아리랑》(1941)의 생생한 증언을 남겼고, 1938년 간첩 누명으로 처형되었다가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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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3·1운동 참가, 일본 경찰에 3일간 구금
  • 1921일본 도쿄 유학 후 중국으로 이동
  • 1922중국 공산당 입당
  • 1923공산청년동맹 가입, 잡지 《혁명》 간행
  • 1925–1927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 수학, 광저우 봉기 참전
  • 1936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출
  • 1937옌안 항일군정대학 강사, 님 웨일즈와 인터뷰
  • 1938캉성 보안기관에 체포, 간첩 누명으로 처형

잘만 이사예비치 파소프

Зельман Исаевич Пас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40 ✕ 처형

대숙청기 외국정보를 이끈 폴란드 작전 책임자

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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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연소로 제대
  • 1920–1922군사령부 서기, 스타라야루사
  • 1922–1928GPU 스타라야루사·노브고로드·프스코프·포르호프
  • 1928–1929OGPU 고등국경학교 과정, 레닌그라드 군관구 특별부
  • 1929–1934OGPU 중앙기구: 방첩부 → 특별부서 제3과 부과장
  • 1934–1936GUGB NKVD 특별부서 제7분과 부과장 → 제11분과장
  • 1936–1937GUGB NKVD 제3(방첩)부서 폴란드과장, 곧 부서장 보좌
  • 1937.9–1938.3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
  • 1938.3–1938.10NKVD 제5(외국)부서 책임자
  • 1940.2.15총살형
그리스 인민해방군 공산주의 그리스 그리스계 1905–1945 ✕ 자살

점령에 맞선 민중전쟁의 조직가

1942년 도므니스타에서 그는 소수의 산악 유격대를 이끌고 ELAS의 출현을 선언했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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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좌익·반군국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그리스 공산당에 가입
  • 1930년대 초공산주의 신문 《리조스파스티스》 편집진으로 활동
  • 1936–1941메타자스 독재 아래 투옥과 강제 전향 선언을 겪음
  • 1942년 1월KKE의 파견으로 루멜리에서 유격전 준비를 시작
  • 1942년 6월도므니스타에서 ELAS의 창설과 산악 유격대 활동을 공개
  • 1942년 11월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작전에 참여
  • 1944년 10월해방 뒤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에서 ELAS 작전을 지휘
  • 1945년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투쟁을 계속하다 전사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나세트킨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Насед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자연사

전시 굴라그를 지휘한 수용소 제국의 관리자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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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군대 입대, 사령부 서기
  • 1921체카 기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 시작
  • 1931OGPU 모스크바주 전권대표부 경제과
  • 1935GUGB NKVD 수송(6)부 과장 보좌
  • 193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9NKVD 중앙경제관리국 부국장 겸 6과장
  • 1941–1947GULAG NKVD/MVD 책임자
  • 1948예비역 편입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네초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전후 당 서기국의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되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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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복권)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라주틴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азу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처형된 6인 중 하나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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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레프 예멜리야노비치 블로지미르스키

Лев Емельянович Влодзими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3 ✕ 처형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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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국가보안총국 제3부장, 수사 부부장
  • 1941–1943NKVD 수사부장
  • 1943–1946NKGB·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 1946–1947고리키주 MGB 관리국장, 이어 예비역
  • 1947–1953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 부장
  • 1953MVD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가오강

高岗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5–1954 ✕ 자살

만주에서 사실상 독자적 권력을 휘둘렀다가 마오의 함정에 걸려 죽음으로 몰락한 당내 2인자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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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중국공산당 입당
  • 1932–1935산시-간쑤 소비에트 지역 창설, 대장정 종착 기지 제공
  • 1941정풍운동 지도소조 위원
  • 1945–1952둥베이국 부서기(1945), 서기(1946), 둥베이 인민정부 주석(1949), 둥베이 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0–1953둥베이 변경 방위군 사령원, 중국인민지원군 후방·보급 총책
  • 1952–1954국가계획위원회 주석, 제1차 5개년 계획 주도
  • 1954'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실각, 8월 자살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에사울로프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са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4 ○ 자연사

예조프를 심문한 수사관: 기구가 제 주인을 삼킬 때 조서를 쓴 손

1939년, 어제까지 온 나라가 이름만으로 떨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가 심문 조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서를 쓰는 손은 에사울로프의 것이었다.

베리야의 수사선에서 몰락한 예조프의 자백을 받아내며 두각을 드러낸 NKVD 수사관. 뱌트카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어 일터로 나갔고, 로도스와 함께 베리야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까지 올랐으나 1954년 자연사하여 흐루쇼프 시기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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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뱌트카·고리키 지역 GPU·NKVD 지구기관 요원·지구장
  • 1937–1939GUGB 중앙학교 수료, 비밀정치·방첩 부서 작전요원
  • 1939–1940NKVD 수사부 선임수사관·부부장 — 예조프 심문 담당
  • 1940–1941NKVD 국가보안총국(GUGB) 수사부장
  • 1941–1944NKVD 제3국 수사부장, NKGB 제2국 11과장
  • 1944–1947벨로루시 SSR 국가보안 부인민위원(후 차관) — 1945년 소장 진급
  • 1947–1952소련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 1952년 1월 예편

니콜라이 막시모비치 루하제

Николай Максимович Руха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5–1955 ✕ 처형

밍그렐리아 사건을 몰아붙이다 스스로 무너진 자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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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압하지야 가그라 지구 NKVD 부장
  • 1939–1941그루지야 NKVD 수사과장
  • 1941–1943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자캅카스전선 특별부장
  • 1943–1945자캅카스전선·군관구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
  • 1948–1952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
  • 1952–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사비츠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ав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05–1955 ✕ 처형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 1955년의 사형수

트빌리시 처형장에서 사비츠키와 NKVD 간부들은 '사슬에 묶인 개처럼 죄수들에게 달려들어 권총 손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1954년 목격자 증언.

타슈켄트 출신의 NKVD 장교로, 차르 군대 대령이자 백위대 조직가의 아들이었다. 1931년 그루지야 NKVD에 들어가 보그단 코불로프의 후원 아래 빠르게 승진했으며, 대숙청기에는 제4부에서 수감자 고문과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로 전속되어 NKGB 서기국, 대외재산관리국을 거치며 베리야 파벌의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다. 대령 계급에 그쳤으나 1953년 베리야 몰락 직후 체포되어 2년 뒤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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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그루지야 NKVD 제4부 요원, 과장, 부부장
  • 1941–1943NKVD 제4국 과 부책임자
  • 1943–1945보그단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
  • 1945–1953NKGB 서기국 부국장, 이후 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 보좌
  • 1953내무 제1부장관 보그단 코불로프의 보좌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보리스 로도스

Борис Вениаминович Родо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6 ✕ 처형

대숙청의 수석 심문관: 정치국 위원부터 작가까지 굴복시킨 NKVD 수사부 부국장

흐루쇼프,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1956년 2월 25일): "최근 우리는 수사관 로도스를 심문했다... 그는 보잘것없는 인간, 닭의 시야를 가진, 도덕적으로 말 그대로 타락한 자다. 바로 이런 인간이 당의 저명한 활동가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대숙청 시기 NKVD 수사부 부국장으로 정치국 위원 코시오르·추바르 등 고위 인사들을 직접 고문해 허위자백을 받아낸 국가보안 대령.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에서 실명 규탄된 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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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베리슬라프 지구 OGPU 서기
  • 1932즈나멘스크 지구 OGPU 보좌전권대표
  • 1933–1936오데사 OGPU/NKVD 제4부에서 보좌전권대표, 전권대표, 작전전권대표, 과장보좌 역임
  • 1937모스크바 GUGB NKVD 제4부(비밀정치부) 연수 후 중앙 기관에 잔류
  • 1938–1939GUGB NKVD 제4부 제6과장 보좌 → NKVD 수사부 부장 보좌 → GUGB NKVD 수사부 부국장
  • 1940폴란드 진주 작전 중 리보프 파견: NKVD 작전체키스트반에서 폴란드인 체포·처형 결정 서류 작성
  • 1943–1946NKGB 소련 수사부 부국장 (국가보안 대령)
  • 1947–1952크림주 UMGB 수사부장. 1952년 MGB 해고, 심페로폴 전신국 민방위 참모장으로 좌천

파벨 미하일로비치 제르노프

Павел Михайлович Зе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64 ○ 심장질환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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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콜추긴스키 공장 노동자, 콤소몰 구위원회 서기
  • 1929–1937바우만 공과대학 졸업, 기술과학 후보학위 취득
  • 1938–1940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2전연방 표준위원회 의장
  • 1941–1945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 공장 대피·생산 재개 지휘
  • 1946–1951KB-11(아르자마스-16) 초대 소장
  • 1951–1964제1총국 부서장, 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아르툠 이바노비치 미코얀

Артём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5–1970 ○ 뇌졸중

미그(MiG)의 아버지: '한순간'에 하늘을 지배한 전투기 설계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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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28로스토프·모스크바 «디나모» 공장 선반공
  • 1931–37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경비행기 «옥탸브료노크» 설계
  • 1939–41OKB-155(MiG) 창설, MiG-1·MiG-3 전투기 개발
  • 1946–53영국서 롤스로이스 닌 도입 → MiG-15; 한국전쟁 제트공중전 주도
  • 1953–64MiG-17·MiG-19·MiG-21 — 초음속 전투기 시대로 이행
  • 1956–68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6회, 레닌상, 소련과학원 정회원
  • 1964–70MiG-23·MiG-25·MiG-27 — 가변익·고속요격기 세대 설계

알렉산드르 세묘노비치 파뉴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мёнович Паню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74 ○ 자연사

중국·미국 주재 대사로 정보를 지휘한 소련 대외정보 책임자

1941년 5월, 충칭 주재 파뉴시킨 휘하 정보거점이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는 개전 약 한 달 반 전에 전달된, 침공 주공 방향에 관한 정보였다.

1905년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했고, 1927년 당에 입당한 뒤 극동 국경부대에서 복무했다. 1938년 NKVD에 배치되어 제3특별부장을 지냈으며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으로 최대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고, 1941년 5월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워싱턴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을 지냈고, 1953년 내무부 대외정보국장, 1954년부터 1955년까지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외정보를 총괄했다.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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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붉은군대 자원입대, 말라리아로 제대 후 사마라 철도에서 수리공으로 일함
  • 1927–1935극동 국경부대 복무, 초소장 보좌에서 국경구역 사령관까지 진급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NKVD 배치
  • 1938–1939NKVD 제3특별부장 (1938년 12월 23일 임명, 예조프 체포에 참여)
  • 1939–1944주중 소련 전권대표 겸 정보총책 (충칭)
  • 1944–1947중앙위원회 국제정보부 제1부장
  • 1947각료회의 정보위원회 주임비서
  • 1947–1952주미 소련 대사 겸 정보총책 (워싱턴)
  • 1952–1953주중 소련 대사 (베이징)
  • 1953–1954내무부 제2총국(대외정보) 국장
  • 1954–1955K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1954년 3월 17일~1955년 6월 23일)
  • 1955–1959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 1959–1973중앙위원회 외교·대외경제(이후 대외간부) 부장, 1973년 3월까지

블라디미르 니코노비치 스타롭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нович Ста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75 ○ 자연사

소련 통계를 35년간 관장한 인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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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 1931–1937고스플란 ЦУНХУ 연구원, 인사부 차장
  • 1937–1939ЦУНХУ 전연방인구총조사국 차장
  • 1940–1941고스플란 ЦУНХУ 국장
  • 1941–1948고스플란 ЦСУ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48–1975소련 각료회의 직속 ЦСУ 국장 (1957년부터 각료 급)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딤체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Родим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5–1977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을 사수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파블리토는 망설임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선두 전차 장갑 위로 올라타 해치를 두드리며 방향을 바꾸라고 외쳤다. 그가 지휘소로 돌아왔을 때, 외투에는 총알과 파편 구멍이 열 개도 넘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도제로 일하던 로딤체프는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자원하여 스페인 내전에 '파블리토 대위'라는 가명으로 참전, 공화파 편에서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여 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9월 13근위소총사단을 이끌고 맹렬한 포화 속에서 볼가 강을 도하,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을 탈환하여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 32근위소총군단장으로 쿠르스크·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지휘하며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여러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역임하고 회고록 여러 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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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OGPU 호송대대 적군 병사
  • 1929–193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 생도 (기병)
  • 1932–193661기병연대 소대장·중대장
  • 1936–1937스페인 내전 참전 — '파블리토 대위' (공화파 군사고문)
  • 1937–193861기병연대장
  • 1938–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청강
  • 1939–194036기병사단 부사단장 (서부 벨라루스 진주·겨울전쟁)
  • 1941제5공수여단장 (키예프 방어전)
  • 1941–194287소총사단장 → 제13근위소총사단장
  • 1942–1943제13근위소총사단장 — 스탈린그라드 전투 · 마마예프 쿠르간
  • 1943–1945제32근위소총군단장 (쿠르스크·드네프르·베를린·프라하)
  • 1947–1951제11근위소총군단장
  • 1951–1953동시베리아 군관구 부사령관
  • 1953–1956알바니아 주재 수석 군사고문 겸 무관
  • 1956–1960북부군관구 제1부사령관
  • 1960–1966제1근위군 사령관 (키예프 군관구)
  • 1966–1977국방부 감찰총감단 군사고문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카프타노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Кафт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5–1978 ○ 자연사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스탈린에게 건의한 GKO 과학 전권위원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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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돈소다 공장 노동자, 콤소몰 조직원
  • 1931–1937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연구원·강사, 카르포프 연구소 당비서
  • 1937–1946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VKVSh) 의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
  • 1946–1951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3–1959소련 문화부 제1차관
  • 1959–1962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
  • 1962–1973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

나자티 시드키

نجاتي صدقي
코민테른 공산주의 팔레스타인 1905–1979

팔레스타인과 스페인의 반파시즘을 연결한 활동가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반파시즘 연대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경험했다.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작가·번역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스페인으로 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코군에 속한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이며 스페인의 반파시즘과 아랍인의 해방 문제를 연결했다. 이후 언론과 문학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랍인 참가자의 시각에서 스페인 내전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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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예루살렘에서 영국 위임통치 당국 체신부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노동자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접촉,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
  • 1925–1928팔레스타인 공산당 지도부의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수학하고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 1930예루살렘에서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지하 신문 『일랄-아맘』 편집에 참여했다.
  • 1931–1933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야파·아크레 감옥에서 2년형을 복역하고 석방 후 6개월간 경찰 감시를 받았다.
  • 1933–1936코민테른의 파견으로 파리에서 아랍어 월간지 『알-샤르크 알-아라비』를 편집했으나 프랑스 당국의 폐간 조치를 당했다.
  • 1935–1936타슈켄트에서 소련의 민족 문제 경험을 연구한 뒤 1936년 8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
  • 1937–1939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옮겨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에 글을 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비판한 이유로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 1939–1948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국 당국이 운영하는 근동방송에서 일하면서 문학 활동에 집중했고, 카이로에서 푸시킨(1945)과 체호프(1947)를 출간했다.
  • 1948–19761948년 팔레스타인인 대이주 이후 방송국을 따라 키프로스 리마솔로 옮겨 1950년까지 살았고, 이후 베이루트에서 언론·번역·문학 비평 활동을 이어갔다.
  • 1976–1979딸이 살던 그리스 아테네로 옮겼고 1979년 그곳에서 사망해 아테네에 안장되었다.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네메노프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Неме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인 러시아계 1905–1980 ○ 자연사

전쟁 속에서 원자력 가속기를 세운 물리학자

“우리는 비행기로 호이노야까지 간 뒤 어둠을 기다렸다가 라도가호 상공을 저공비행했다.”

레오니트 네메노프는 핵물리학과 입자가속기 기술을 연구한 소비에트 물리학자였다. 그는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들어가 피지테흐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을 회수했고, 실험실 2에서 1944년 가동한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끌었다. 이 장치는 최초의 미량 플루토늄을 얻어 화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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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졸업
  • 1929–1939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39–1944대형 사이클로트론 설계와 건설 참여
  • 1943–1944실험실 2 사이클로트론 건설 책임
  • 1949공학박사 학위 취득
  • 1962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교수
  • 1968–1980가속기 물리기술·전파기술 측정 전연방연구소 소장
  • 1980모스크바에서 사망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5–1982 ○ 폐암

1956년 폴란드 10월로 복귀해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을 실험한 민족공산주의자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분할령 갈리시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부터 배관공으로 일했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3년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로 밀려나 1951~1954년 옥살이를 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10월 20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소련군의 진격에는 저항하되 동맹은 유지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소련이 물러섰다. 1967~68년 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노선은 끝났고, 1970년 12월 가격 인상에 항의한 그단스크·그디니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군대의 발포를 명령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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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폴란드 공산당 입당
  • 1934–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43–48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
  • 1948–51'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해임, 1951년 체포
  • 1954–56석방·복권, 폴란드 10월로 복귀
  • 1956–7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 1970.12가격 인상 반대 파업 유혈 진압, 심장발작 뒤 12월 20일 해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리프시츠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ифшиц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절대적 진리와 미를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건설자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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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25브후테마스 회화 수학, 아방가르드와 결별하고 리얼리즘·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25–29브후테마스 변증법적 유물론 강사; '바그라먄 사건'으로 축출
  • 1930–33IMEL 선임연구원; 루카치와 공동 작업 시작
  • 1933–38『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1933/37), 『레닌 예술론』(1938) 편찬; 저속사회학 논박
  • 1938–41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학술부부장, IFLI 예술론 학과장
  • 1941–46핀스크 소함대 복무, 부상·포로 탈출; 해군 문예교관, 적성훈장 수훈
  • 1954–68『샤기냔의 일기』(1954)로 재등장; 『왜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닌가』(1964), 『추함의 위기』(1968)
  • 1973–83철학박사(1973), 예술아카데미 정회원(1975); 일리옌코프와 '이상적인 것' 논쟁

이반 이바노비치 일리초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보고한 전시 GRU 수장, 전략정보로 소련의 승리를 뒷받침한 정찰총국장

한밤 3시, 스탈린의 직통 전화가 울렸다. 손자들이 책상 위 연필을 모두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몇 분 동안 이어진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받아 적어야 했다.

소련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1942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이르는 모든 주요 작전의 정보 지원을 총괄했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과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1938년 정보기관에 투입되었고,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이력을 지닌 채 33세에 스탈린의 직접 면접을 받았다. GRU 수장으로서 베리야를 거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통 보고했으며, 해독반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가능성 발견(1942)과 클라우스 푹스를 통한 원자폭탄 정보 입수 등 전략정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오스트리아·주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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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칼루가·스몰렌스크주 콤소몰 간부
  • 1929–1938적군 정치일꾼, 레닌 군사정치학교 졸업
  • 1938–1942적군 정보국 정치부장·정치담당 부국장
  • 1942–1945소련 국방인민위원부 정보총국(GRU) 국장
  • 1945–1947GRU 부국장
  • 1948–1953주독 소련통제위원회 부정치고문 → 주동독 외교사절단장
  • 1953–1956주오스트리아 소련 전권대사
  • 1956–196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
  • 1966–1968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68–1975외무부 중앙기관 근무 후 퇴직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олох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4 ○ 자연사

『고요한 돈강』을 쓴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

“우리 각자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쓴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당과 인민의 것이다.” 소비에트 작가 제2차 전연합 대회 연설(1954)에서.

러시아 제국 돈 지방의 비코사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로, 1925년부터 1940년까지 네 권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은 혁명과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어 놓은 10여 년을 그려 냈다. 1932년 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고발해 곡물 지원과 조사를 이끌어 냈고, 1937~1938년 대숙청기에도 탄원으로 지역 간부들을 구해 냈다. 충성스러운 당원으로서 1932년 입당해 1937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으나, 1966년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갈라섰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84년 뵤셴스카야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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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0『고요한 돈강』 연재와 완간
  • 1933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직접 보고
  • 1965노벨문학상 수상
  • 1966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 옹호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결별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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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이탈리아 공산당(PCI) 입당
  • 1932파시스트 특별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
  • 1937–1939파리에서 『라 보체 델리 이탈리아니』 편집자
  • 1944–1947보노미, 파리, 데 가스페리 내각에서 외무차관
  • 1945–1947주폴란드 이탈리아 대사
  • 1947.09코민포름 창립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 이탈리아 대표
  • 1948–1953이탈리아 공화국 상원의원
  • 1957PCI에서 제명; 『사회주의 통신』 공동 창간

표도르 타라소비치 구세프

Фёдор Тарасович Гус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7 ○ 자연사

전시 연합국 정상회담을 누빈 소련 외교관, 몰로토프의 대리인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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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외무인민위원부 입부
  • 1938–1939외무인민위원부 제3서방과장
  • 1941–1942외무인민위원부 제2유럽과장 (영국·자치령 담당)
  • 1942–1943주캐나다 소련 공사
  • 1943–1946주영국 소련 대사
  • 1946–1952소련 외무차관
  • 1956–1962주스웨덴 소련 대사
  • 1975은퇴

알렉산드르 아키모비치 이시코프

Александр Акимович И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8 ○ 자연사

소련 원양어선단의 설계자, '어류 마피아'로 퇴장하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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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아조프-흑해·볼가-카스피 국영어업트러스트 관리직
  • 1939–1940소련 수산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6소련 수산공업 인민위원 → 수산공업장관
  • 1946–1948소련 서부지역 수산공업장관
  • 1948–1950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0–1954수산공업 차관·유역관리국장
  • 1954–1957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7–1965국가계획위원회 수산부문 책임자 (장관급)
  • 1965–1979소련 수산장관

이사크 모이세예비치 잘츠만

Исаак Моисеевич Зальц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8 ○ 자연사

'탱코그라드'를 세운 전차왕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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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3제당공장 노동자 → 콤소몰 →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 1933–1938키로프 공장 기술자, 생산직을 거쳐 승진
  • 1938–1941키로프 공장장, KV 중전차 양산 체제 구축
  • 1941–1942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 '탱코그라드' 건설;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 1942–1943소련 전차공업 인민위원, 전국 전차 생산 총괄
  • 1943–1949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장 복귀, IS-2 중전차 양산
  • 1949비리·'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 및 전직 해임
  • 1955–1986당 복권, 무롬·오룔·레닌그라드 공장 현장직 후 은퇴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세로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е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0 ○ 사망

초대 KGB 의장

스탈린은 1943년 8월 2~5일 전선 후방 시찰의 준비와 안전을 세로프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세로프는 그와 사흘을 함께했고, 이는 전시 스탈린이 수도에서 가장 멀리 나간 행차였다. 스탈린은 정치국에도 알리지 않았고, 세로프는 이를 일기에 남겼다.

1905년 볼로그다 주 농가에서 태어났다. 표준 인사기록은 민족을 러시아인으로 적었고 출생일은 8월 25·26일, 사망일은 7월 1일로 전한다. 1939년 NKVD 중앙기구에 들어가 우크라이나 인민위원과 부인민위원을 지내며 서우크라이나 병합과 1944년 북캅카스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베를린 함락과 독일 항복 조인식에 참여했고,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초대 KGB 의장이 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범 재활성화에 착수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현장에서 진압했고,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해임돼 계급과 영웅칭호를 잃었으며 1965년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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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서우크라이나·발트 지역 병합과 강제이주 실무에 관여
  • 1941–1945전시 NKVD 보안·후방통제 업무 수행
  • 1953–1954베리야 몰락 뒤 보안기관 재편에 참여
  • 1954–1958초대 KGB 의장, 탈스탈린화기 보안기관을 재정비
  • 1958–1963GRU 총국장, 이후 펜콥스키 사건 여파로 몰락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페고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Пег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서기국에서 외교로 밀려난 간부 책임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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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극동지역당위원회 제3서기, 이후 프리모르스키 조직국 제1서기
  • 1939–1947프리모르스키 주당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시당위 제1서기 겸임)
  • 1941–1945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
  • 1947–1952중앙위 당기관검증국 부국장 → 경공업부장 → 당·노조·콤소몰 기관 담당 부장 → 간부선발배치부장
  • 1952–1953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후보위원
  • 1953–195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56–1973주이란 대사 (1956–63) → 주알제리 대사 (1964–67) → 주인도 대사 (1967–73)
  • 1973–1982외무차관 → 중앙위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크루슈코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Круж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전기를 공동 집필하고 즈다노프 노선을 집행한 후 성 스캔들로 몰락한 이념 관료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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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크룹스카야 공산주의 교육 아카데미 졸업
  • 1933공산주의 사회과학 교원대학 철학부 대학원 수료
  • 1940교수 학위 취득
  • 1941–1942대외정책선전국 위원
  • 1942–1943소비에트 정보국 위원
  • 1943–1944잡지 『전쟁과 노동계급』 부편집장
  • 1944–1949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
  • 1947스탈린 공식 단평전 공동 집필
  • 1949–1950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제1부부장
  • 1950–1953중앙위 문학예술부장
  • 1950철학 박사학위 논문 방어
  • 1952–195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53–1955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55–1961우랄 국립대 교수·『우랄 노동자』 편집장
  • 1961–1973소련 문화부 예술사연구소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스피리도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Спирид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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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오룔 직물기계 공장장
  • 1941–1944쿠즈네츠크 직물기계 공장장 (전시 소개)
  • 1944–1950레닌그라드 국영계측기 공장장
  • 1950–1952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구당위 서기
  • 1952–1954레닌그라드 주집행위 부의장
  • 1954–1956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56–1957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57–1962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1–1962CPSU 중앙위원회 서기
  • 1962–1970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호앙반호안

Hoàng Văn Hoan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05–1991 → 망명지에서 사망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이자 친중파 원로로, 1979년 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한 정치국원 출신 정치가

1979년 중월전쟁 뒤 카라치에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하고 소련에 굴종한다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응에안 성 출신의 혁명가로 호찌민과 함께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50~1957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를 지내며 두 나라를 잇는 핵심 통로였고, 1956~1976년 정치국원, 1958~1979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중소분열 때 북베트남이 잠시 중국 쪽으로 기운 1960년대 초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밀려났다. 1979년 7월 동독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던 중 카라치에서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 영사관으로 피신해 베이징으로 갔고, 8월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했다. 1991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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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호찌민과 함께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을 도왔다.
  • 1950–1957북베트남 초대 주중 대사로 재임했다.
  • 1958–1979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국회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19761956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재선되었다.
  • 1963당 국제연락부장에 임명되어 친중 노선의 대외 정책을 맡았다.
  • 1976제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에서 배제되었다.
  • 1979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레오니트 로마노비치 크바스니코프

Леонид Романович Квас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원자폭탄을 훔친 과학자-첩보원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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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NKVD 5부(외국) 10과(미국) 선임작전장교
  • 1939NKVD 5부 16과(과학기술정보) 부과장
  • 1940NKVD/NKGB 과학기술정보과장
  • 1943뉴욕 NKVD/NKGB 부주재관 (과학기술정보)
  • 1945NKGB 1총국 11부 부부장
  • 1947정보위원회(KI) 5총국 4부장
  • 1954KGB 1총국 10부장
  • 1963KGB 1총국장 자문그룹 선임고문
  • 1966은퇴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05–1995 ↓ 실각 1957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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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5 ○ 자연사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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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s–1970s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천윈

陈云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5–1995 ○ 자연사

'새장 경제' 개념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설계한 공산당 원로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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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 1987–1992중앙고문위원회 주임, 당내 보수파 구심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티호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7 ↓ 퇴임 1985

브레즈네프 말기의 보수적 총리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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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1985각료회의 의장

요한네스 구스타보비치 캐빈

Иван Густавович Кэ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905–1999 ○ 자연사

모스크바와 에스토니아 사이를 28년간 조종한 실용적 민족공산주의자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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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부문장, 이후 선전선동부문 제1부부장
  • 1946–194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당역사연구소 소장
  • 1948–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0–197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2–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8–1983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왕스웨이

王实味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6–1947 ✕ 처형

「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했다가 정풍운동의 첫 희생자가 된 작가

1942년 「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한 당원으로, 제명과 투옥을 거쳐 1947년 비밀리에 처형된다. 다이칭은 이 사건을 정풍운동의 억압을 가늠하는 핵심 사례로 꼽는다.

허난 출신 번역가·작가로 1937년 옌안에 가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했다. 1942년 3월 『해방일보』에 실은 잡문 「야생 백합」에서 간부의 식사·의복 등급과 청년의 좌절을 지적했고, 곧 정풍운동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판 대회의 표적이 되었다. 1943년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1947년 국민당군의 옌안 공격으로 철수하던 중 산시성 싱현에서 처형되었다. 1991년 공안부가 트로츠키파 혐의를 공식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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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2마르크스-레닌학원 번역원

아마야크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Амаяк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6–1955 ✕ 처형

나치의 역정보를 모스크바로 흘려보낸 베를린 레지덴트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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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가그라 시 NKVD 부장, 이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NKVD
  • 1938–1939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 1939–1941베를린 주재 대사관 참사관, NKVD 합법 레지덴트
  • 1941–1945우즈베크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내무인민위원
  • 1945–1951포로·억류자 관리총국 부국장, 이어 제1부국장
  • 1951–1953포로관리국장 겸 굴라크 제1부수장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사모일로비치 하잔

Александр Самойлович Хаз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55 ✕ 처형

1938년 풀려나 1955년 총살된 수사관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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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3오데사 GPU 관구부 요원, OGPU 고등학교 수학
  • 1933–1937그루지야 NKVD 요원, 이어 과장
  • 1937–1938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 제1과장 겸 부부장
  • 1938체포되었다가 두 달 뒤 석방, 전역
  • 1942–1945NKVD 중앙기구 장교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골롭코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Голов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62 ○ 자연사

북극 호송대를 지킨 북방함대 사령관, 소련 해군 대서양 작전역량의 설계자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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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콤소몰 동원으로 해군 입대
  • 1928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37–1938스페인 내전: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
  • 1938–1939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이후 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 1940–1946북방함대 사령관
  • 1947–1950해군 주력참모부장·해군총사령관 부사령관
  • 1952–1956제4함대 사령관, 이후 발트함대 사령관
  • 1956–1962해군 제1부총사령관

레프 로마노비치 셰이닌

Лев Романович Шейн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67 ○ 심장마비

스탈린 시대의 수사반장, 소비에트 탐정소설의 개척자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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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소련 검찰청 근무, 모스크바
  • 1927–1931레닌그라드 지방법원 수사관
  • 1931–1935소련 검찰청 특별중요사건 수사관
  • 1935, 1939–1949소련 검찰청 수사국장, 2급 국가법률고문
  • 1945–1946뉘른베르크 재판 소련 수석검사 보좌관
  • 1953–1960《옥탸브리》 편집위원·부편집장
  • 1960–1964모스필름 편집장, 소련 문화부 예술위원회 위원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68 ○ 자연사

전후 모스크바 재건을 이끌었으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당 보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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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탐보프현·타타르 자치공화국에서 콤소몰 활동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28–1938모스크바 중앙노동연구소 근무
  • 1938전연방 산업아카데미 기계공학부 졸업, 중앙위 간부부 인스트럭터
  • 1938–1945모스크바 시당 제2서기
  • 1941예비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7~10월)
  • 1944–1950모스크바 시 집행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5–1949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 1946–1949중앙위 서기 · 조직국 위원
  • 1949–1951도시건설장관 → 농업기계제조장관
  • 1951–1953쿠이비셰프 프룬제 항공공장장
  • 1953–1954주폴란드 소련 대사 (간섭 문제로 소환)
  • 1954–1965항공산업 공장장, 블라디미르 공장장(1959~), 1965년 연금

후안 모데스토

Juan Guilloto León

패배한 공화국의 현장 지휘관

민병대 지휘관들을 평가한 한 보고서는 '도면 하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는 모데스토뿐'이라고 적었다.

후안 모데스토는 스페인 공산당의 군사 조직가에서 출발해 공화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5연대와 제5군단을 이끌며 민병대를 정규 군대로 통합하는 전쟁의 변화를 구현했다. 1938년 에브로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지휘했지만, 장기 소모전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패전 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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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스페인 공산당 가입
  • 1933–1936마드리드 노동자·농민 반파시스트 민병대 조직 책임자
  • 1936제5연대 창설 조직자·초대 지휘관
  • 1936–1937제4사단 지휘관, 중령 승진
  • 1937–1938제5군단 사령관, 브루네테·벨치테·테루엘 전투 지휘
  • 1938.04–11에브로군 사령관, 에브로 공세 지휘
  • 1939공화군 중장 및 중앙군 사령관, 3월 망명
  • 1944–1969소련·불가리아·프라하에서 망명 군인·공산주의자로 활동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마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ма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6–1973 ○ 자연사

원자력 프로젝트를 지은 소련 군사 건설자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페르신스카야 부지에 들판의 말뚝 하나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이끌어, 1943년 4월 1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1944년부터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수용소 노동력으로 특수 시설을 지었고, 체랴빈스크-40(마야크)과 콤비나트 817호를 비롯한 원자력 시설 건설을 지휘해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맡았으며, 197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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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Свирьстрой 설계국 기술자
  • 1931–1937모스크바 운하: 기술부문장 → 중앙지구 책임자
  • 1937–1938모스크바 운하 운영국장 겸 수석기술자
  • 1939–1940건설인민위원부 차관
  • 1941–1942제5공병군 사령관
  • 1942–1944첼랴프메탈루르크스트로이 국장
  • 1944–1951글라프프롬스트로이(산업건설수용소총국) 국장
  • 1955–1963중형기계공업부 차관(건설)
  • 1963–1973국방부 차관(건설·주둔)

이오시프 바실리예비치 시킨

Иосиф Васильевич Ши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3 ○ 자연사

즈다노프의 글라프푸르 수장, 레닌그라드 사건을 살아남은 군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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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해임, 레닌 군사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
  • 1950–1960중앙위 당기관부 감찰원·부장·제1부장, 1956년부터 중앙검열위원회 위원
  • 1960–1973소련 주알바니아 대사(1960~1961),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소환; 당-국가 통제위원회 제1부의장(1962~1965), 인민통제위원회 제1부의장(1965~1973)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5 ○ 폐암

소비에트 세기의 음악을 쓰고 두 번의 공식적 파멸을 통과한 작곡가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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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야니스 볼데마로비치 페이베

Ян Вольдемарович Пейв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06–1976 ○ 자연사

미량원소에서 연방 정치까지: 라트비아 농화학자가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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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티미랴제프 농업대학 졸업,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연구 경력 시작
  • 1940농업학 박사 학위 취득, 볼셰비키당 입당
  • 1944–1950라트비아 농업대학 초대 총장
  • 1951–1959라트비아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58–1966소련 최고소비에트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2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66–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간사장, 이후 일반생물학부 학술서기
  • 1969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레닌상(1964) 등 다수 훈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두도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Дуд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7 ○ 자연사

흐루쇼프의 민간인 내무장관, 정보원 제도를 폐지하려다 좌초되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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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9모스크바 칼리닌 크리스탈 공장 견습공·기능공
  • 1929–1934모스크바 화학기술연구소(멘델레예프 대학) 학생
  • 1934–1937모스크바 아브토스테클로 공장 '트리플렉스' 작업장장
  • 1937–1949중공업·건설자재 인민위원부에서 생산·당위원회·관리직 역임
  • 1950–1952모스크바 시당 건설부장, 이후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부의장
  • 1954–1956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56–1960소련 내무장관(MVD): 굴라그 개편, 밀리치야 정보원제 폐지 시도
  • 1960–19721967년 세계박람회 총감독, 이후 모스크바 건설자재 총국장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타하노프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Стах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7 ○ 자연사

석탄 102톤, 기준치 14배: 스탈린 시대 최대 노동생산성 운동을 촉발한 광부

「노동을 분업화하면 한 교대에 9톤이 아니라 70~80톤을 캘 수 있습니다.」 — 동료 채탄공들과의 대화에서, 기록 수립 며칠 전 (1935년 8월)

돈바스 광부로 1935년 8월 31일 단 한 교대 만에 석탄 102톤을 캐내 기준치 14배를 기록했다. 채탄과 지주 분리라는 노동 혁신으로 소비에트 생산문화의 원형인 스타하노프 운동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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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3돈바스 첸트랄나야-이르미노 갱에서 제동공·마부·채탄보조공으로 노동
  • 1933–1935착암기 채탄공 전직, 갱내 강습 수료 후 기록 도전 준비
  • 1935.8.315시간 45분간 석탄 102톤 채굴, 기준치 14배 — 스타하노프 운동 발단
  • 1935–1941레닌 훈장·타임지 표지(1935.12)·당 입당(1936), 산업아카데미 수학, 최고회의 대의원(1937)
  • 1941–1957카라간다 제31갱 관리소장(1941~42), 석탄공업인민위원부 사회주의경쟁 부문장(1943~57)
  • 1957–1974도네츠크 귀환, 신탁 부소장 → 광산관리국 수석기사 보좌, 1974년 퇴직
  • 1970사회주의 노동영웅 및 두 번째 레닌 훈장 수훈

뤄루이칭

罗瑞卿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6–1978 ↓ 실각 1965 · 자연사

초대 공안부장이자 총참모장, 문화대혁명 전야에 린뱌오의 표적이 되어 실각한 인물

마오쩌둥은 "하늘이 무너져도 키 큰 뤄가 받쳐 준다"며 그를 최측근 경호 책임자로 신임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으로 10년간 공안 체계를 세웠고, 총참모장을 지내다 1965년 말 실각했다.

쓰촨 출신 황푸 6기생으로 홍군 정치·보위 부문에서 일했고 항일군정대학 교육장이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이 되어 반혁명 진압운동과 공안 체계를 세웠고, 1959년 펑더화이 실각 뒤 총참모장으로 군을 관리했다. 정치보다 훈련을 앞세운 그는 1965년 말 린뱌오의 고발로 「군권 탈취」를 꾀했다는 비판을 받아 실각했고, 1966년 자살을 기도해 다리를 다쳤다. 1977년 복권되어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서독에서 수술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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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9공안부장
  • 1959–1965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코제브니코프

Евгений Фёдорович Кожев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운송건설부를 창설해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이끈 초대 장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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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 1936–1940니켈스트로이·오르메디스트로이·유주랄탸시스트로이 주임기사 (남우랄)
  • 1941–1943유주랄탸시스트로이 트러스트 주임기사 → 관리자 — 방산공장 건설
  • 1943–1944주미 소련 정부구매위원회 전문위원
  • 1944–1945소련 건설인민위원부 특수건설총국장
  • 1945–1949국가계획위원회 건설산업 계획국장 → 국가계획위 부의장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연료·운수 담당 부의장 보좌관 → 각료회의 건설부장
  • 1954소련 건설부 제1차관
  • 1954–1963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초대)
  • 1963–1965소련 국가운송건설생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재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그리슈마노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шм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건축자재 산업을 14년간 이끈 공사판 출신 장관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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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9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공사감독·기사장·트러스트 관리자
  • 1944–1949프스코프스트로이 등 전후 복구 트러스트 책임자
  • 1949–1955레닌그라드 키로프 구집행위원장 → 시집행위 제1부위원장
  • 1956–1961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61–1962고스스트로이 소련 의장
  • 1963–1965고스플란 산하 건설자재공업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79소련 건설자재공업 장관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말리크

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0 ○ 자연사

안보리 보이콧으로 한국전 개입을 허용하고 휴전을 제안한 소련 유엔 외교관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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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5하리코프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며 당 간부 활동
  • 1937–1939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2–1945주일 소련대사
  • 1946–1953외무차관
  • 1948–1952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3–1960주영 소련대사
  • 1960–1967외무차관
  • 1967–1976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레오니트 게오르기예비치 멜니코프

Леонид Георгиевич Ме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최대 공화당을 4년간 통치한 우크라이나 제1서기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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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스탈리노(도네츠크) 시당 · 주당 간부
  • 1939–41스탈리노 주당 제2서기
  • 1941–42제66군 군사위원,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2–44카라간다 주당 제1서기 — 코크스용 석탄 증산
  • 1944–47스탈리노 주당 제1서기
  • 1947–49우크라이나 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49–53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간부회 정위원(1952–53)
  • 1953–55주 루마니아 소련 대사
  • 1955–57소련 석탄산업 기업건설부 장관
  • 1957–61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제1부의장 →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장
  • 1961–66카자흐 · 러시아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 1966–81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로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хай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스탈린의 청년 동원가에서 해빙기 문화장관까지, 당 기구를 오가며 생존한 기구인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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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 1938–1952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원
  • 1952–1953공산당 중앙위 상임위원 겸 서기, 선전선동부장
  • 1953–1954모스크바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4–1955소련 주폴란드 대사
  • 1955–1960소련 문화부 장관
  • 1960–1965소련 주인도네시아 대사
  • 1965–1970국가출판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2 ○ 자연사

흔들지 않는 것을 통치로 삼은 사람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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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2몰다비아 당 제1서기
  • 1954–56카자흐스탄에서 처녀지 개간 지휘
  • 1964.10흐루쇼프 해임을 주도하고 제1서기로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 1972–79데탕트: SALT I·II, 헬싱키 협정
  • 1977신헌법 제정, 국가원수 겸임
  • 1979아프가니스탄 침공 승인

블라디미르 니키포로비치 말린

Владимир Никифорович М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당 중앙 문서 흐름을 11년간 통제한 총무부장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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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3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
  • 1938–1939벨라루스 공산당 모길료프 주당위 제1서기
  • 1939–1941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서기
  • 1942–1944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3–194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3서기
  • 1949–1952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서기
  • 1952–1954CPSU 중앙위원회 인스펙터
  • 1954–1965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65–1970CPSU 중앙위 부설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

올레크 콘스탄티노비치 안토노프

Олег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Ант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4 ○ 자연사

An-2에서 An-225까지: 소련 수송항공의 아버지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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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 1931–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 1938–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 1943–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 1946–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 1952–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 1958–8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5~11대 소집), 우크라이나·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2–66레닌상(An-12, 1962), 사회주의노동영웅(1966)

쉬스유

许世友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6–1985 ○ 자연사

소림사에서 무술을 익힌 홍군 장군으로, 1979년 중월전쟁에서 광저우 군구를 이끌고 동부 전선을 지휘한 인물

1979년 중월전쟁에서 쉬스유는 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중국군 총사령관을 맡아 동부 전선을 지휘했다. 그의 지휘 아래 중국군은 베트남 북부의 까오방과 랑선 방면으로 진격했다.

허난 신셴 출신으로 소림사에서 8년 동안 무술을 익혔고, 「불교의 벗」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 홍군에 들어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렀고, 오랫동안 난징 군구를 이끌었다. 1974년 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옮겼고, 1976년 저우언라이 사후 4인방에게 밀려난 덩샤오핑을 정치위원 웨이궈칭과 함께 보호했다.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이끌며 까오방·랑선 방향의 동부 전선을 지휘했다. 1969~1982년 정치국원을 지냈고 1985년 난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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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홍군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1954~1974난징 군구 사령관을 지냈다.
  • 1974~1980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옮겼으며,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지휘했다.
  • 1969~1982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을 지냈다.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코스토우소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Костоу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6–1985 ○ 자연사

소련 공작기계 공업을 세계 1위로 이끈 최장수 공업장관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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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레닌그라드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공장: 기사 → 부감독
  • 1939–1946크라스노다르 세딘 공장 → 노보시비르스크 중공작기계공장 주임기사
  • 1946–1949소련 공작기계공업 차관
  • 1949–1953소련 공작기계공업 장관
  • 1954–1957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57–1959모스크바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9–1965국가 자동화·기계제조 위원회 의장 → 국가계획위 부속 기계제조위 의장
  • 1965–1980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9 ○ 자연사

Yak 전투기의 아버지: 스탈린이 직접 불러 조언을 구한 유일한 항공설계자

스탈린이 말했다: '자네 생각을 말하게, 부끄러워 말게 — 자네는 젊지만 우린 자네를 믿네. 과거의 실수와 연루되지 않았으니, 우리를 항공의 수렁으로 이끈 옛 전문가들보다 객관적일 걸세.'

2차대전 소련 전투기의 3분의 2를 담당한 Yak-1·Yak-3·Yak-7·Yak-9의 설계자. '비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콥스키 사관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으나 글라이더 경연으로 돌파해 1932년 독자 설계국을 세웠다. 1940년 항공공업 부인민위원과 OKB-115 수석을 겸임: 소련 항공설계자 중 유일한 행정·설계 권력의 결합이었다. 전후 Yak-15(소련 최초 제트전투기), Yak-25(전천후 요격기), Yak-28(초음속 폭격기)에 이어 Yak-40·Yak-42 여객기까지 아우르며, 43년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스탈린상 6회·레닌상·레닌 훈장 10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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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31AVF-10 글라이더, AIR-1 경비행기 설계; 주콥스키 사관학교 졸업
  • 1932–39항공제39공장에서 경항공기 설계국 창설; 주임설계자로 승진
  • 1940–46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OKB-115 수석; Yak-1·Yak-7·Yak-9·Yak-3 전투기
  • 1945–53Yak-15 제트전투기, Yak-17, Yak-23, Yak-25 전천후 요격기
  • 1956–68총설계자; Yak-28 초음속 폭격기, Yak-24 헬리콥터, Yak-40 여객기
  • 1968–84Yak-42 여객기, Yak-50/Yak-52 곡예기; 소련과학원 정회원
  • 1946–89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6회, 레닌상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사망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 1956년 폴란드 해빙기의 과도기적 제1서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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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1939바르샤바 방어전 참전 후 소련으로 이동
  • 1943베를링군 제1사단 정치위원, 레니노 전투 참전
  • 1944–1946PPR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 1949–1950국방차관 겸 군 정치총국장
  • 1956.3–10PZPR 제1서기, 흐루쇼프 비밀연설 대량 유포 결정
  • 1964–1968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68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해 전직 사퇴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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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북캅카스 공산대학 졸업
  • 1937적색교수양성소 졸업 (철학)
  • 1938–1944잡지 《볼셰비크》 책임비서
  • 1944–194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1–1952《프라우다》 편집장
  • 1953–1958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 편집장 겸임
  • 1958–1961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연방공화국 담당)
  • 1961–1965CPSU 중앙위원회 서기, 이념위원회 의장, 이념부장
  • 1965–1989소련 외무차관
  • 1962소련 과학원 학술원 회원 (철학)

안드레이 파블로비치 키릴렌코

Андрей Павлович Кирил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0 ↓ 은퇴 1982

브레즈네프 시대의 간부 담당 선임서기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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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5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 제1서기
  • 1966–76중앙위 간부 담당 선임서기
  • 1982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은퇴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야스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Яс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러시아 공화국의 20년짜리 국가원수

“그에게는 단호한 행정가의 손길이 있었고, 건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동시대인의 평가

가죽 공장 노동자와 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으로 출발한 미하일 야스노프는 소비에트 체제가 길러낸 행정 실무자였다.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1950–1956)으로서 스탈린식 고층건물 완공, 남서부 주택단지 착공, 지하철 대순환선 개통 등 제2차 모스크바 재건계획을 진두지휘했으며, 주택 건설량을 두 배로 늘렸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85년까지 19년간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식적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방어선 구축을 지휘한 건설 전문가로서,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칠지만 확실한 행정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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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
  • 1922–1928가죽 공장 노동자
  • 1925모스크바국립대 노동자학부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 1928–1930붉은 군대 복무
  • 1930–1938모스크바 건설 신탁 관리직 역임
  • 1938–1949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1942년부터 제1부의장), 모스크바 전투 시 방어선 구축 지휘
  • 1949–1950소련 도시건설부 차관
  • 1950–195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연방회의 의장(1950–1954) 겸임
  • 1956–1957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7–1966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6–1985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76사회주의 노동 영웅 수훈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스트루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Стру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18년간 소비에트 상업을 총괄한 무역장관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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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도네츠크주 소비자협동조합연합 회장
  • 1941스탈리노(도네츠크)주 집행위 부위원장
  • 1942–1943남부·북캅카스·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
  • 1944–1947스탈리노주 집행위원장
  • 1947–1953스탈리노주 당위원회 제1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 1954–1958페름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8–1962러시아SFSR 각료회의 부의장 (무역 담당)
  • 1962–1965소련 국가무역위원회 의장
  • 1965–1983소련 무역장관

페테르 가보르

Péter Gábor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6–1993 ○ 자연사

헝가리 비밀경찰의 창설자이자 그 희생자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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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 말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 1952직위에서 해임되고 헝가리 노동자당에서 제명되었다.
  • 19531월 3일 체포되었다.
  • 1954군사최고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1957형기가 14년으로 감형되었다.
  • 1959개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은퇴할 때까지 사서로 일했다.

드미트리 게오르기예비치 지메린

Дмитрий Георгиевич Жиме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5 ○ 자연사

35세에 전시 전력장관이 된 소비에트 전기화의 기수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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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남부지역 발전소·전력망 총관리국 수석기사·국장
  • 1940–1941전력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42–1953전력인민위원 · 전력장관
  • 1954–1955각료회의 화학·에너지 담당 뷰로 제1부의장
  • 1955–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장기계획·현행계획 분할기)
  • 1964–1971국립 크르지자놉스키 에너지연구소장
  • 1971–1983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푸자노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уз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8 ○ 자연사

크림 이관을 반대했고 조용히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한 러시아 수상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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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칸다우로보 촌소비에트 의장, 푸체시 군집행위 부의장
  • 1930플료스 농업전문학교 졸업, 세레다군 농경지과 농업기사
  • 1931–1933이바노보 주 교외농장 트러스트 부소장
  • 1934–1940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소비에트통제위원회 근무
  • 1940–1943소련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주임통제관
  • 1943–1944소련 국가통제 부인민위원
  • 1944–1946쿠이비셰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46–1952쿠이비셰프 주당위·시당위 제1서기
  • 1952–1956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수상)
  • 1952–1953CPSU 중앙위 간부회(정치국) 후보위원
  • 1956–1957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62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2–1967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 1967–1972주불가리아 소련 대사
  • 1972–1979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 1979–1980소련 외무부 중앙기구 근무
  • 1980연금 퇴직

팜반동

Phạm Văn Đồng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06–2000 ○ 자연사

32년간 베트남을 이끈 호치민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최장수 총리

1970년대 말 팜반동은 한 방문객에게 말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926년 광저우에서 호치민의 혁명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팜반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제네바 회담(1954) 북베트남 대표단장으로서 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대외적 얼굴로서 외교와 언론 대응을 주도했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수행, 통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나, 전시 동원형 경제 체제를 평화기에도 고수하여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호치민이 '또 하나의 나'라고 부를 만큼 신임한 혁명가로, 보응우옌잡·레주언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의 전 과정을 형성한 핵심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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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광저우에서 호치민 주관 혁명 훈련 수료,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 가입
  • 1929–1936프랑스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꼰다오 감옥에서 7년 복역
  • 1940보응우옌잡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5–1946베트남 민주 공화국 초대 재무장관
  • 1949–1954부총리 겸 외무장관, 제네바 회담 북베트남 대표단장
  • 1955–1987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총리 (32년)
  • 1986–1997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문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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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이반 이오시포비치 프로스쿠로프

Иван Иосифович Проску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1 ✕ 처형

스탈린에게 독일 침공을 경고하고 총살당한 GRU 국장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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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스탈린그라드 군사비행학교 졸업, 비행교관
  • 1936.9모스크바-하바롭스크 TB-3 기록 비행, 보로실로프로부터 금시계 수여
  • 1936–37스페인 내전 제1국제폭격비행대 지휘관, 46회 출격
  • 1937.6소련영웅 칭호 수여,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
  • 1938제2특수목적항공군 사령관, 극동 전선
  • 1939.4–1940.7GRU(제5국) 국장 겸 소련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
  • 1940.6항공 중장 진급,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에 관한 첫 경고 보고서 제출
  • 1941.6.19제7군 공군사령관 임명, 취임 전 독소전 발발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

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5 ✕ 전사

37세에 전선을 지휘한 최연소 사령관, 승리 직전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하다

체르냐홉스키의 60군이 보조 공격축에서 독일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로코솝스키는 직접 그의 지휘소로 날아와 전선군 전체의 주공 방향을 이 구역으로 전환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대장. 60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드네프르 돌파를 이끌었고,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해방했다. 1945년 2월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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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8오데사 보병학교 → 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VKP(b) 입당
  • 1928–3617군단 포병연대에서 소대장·포대장,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수석 졸업
  • 1938–41제9경전차연대장 → 제28전차사단장 (프리발트 특별군관구)
  • 1941–42북서전선군에서 28전차사단 지휘, 솔치·노브고로드 방어, 제18전차군단장
  • 1942–4460군 사령관 — 보로네시·쿠르스크·드네프르 도하·키예프 해방, 첫 영웅 칭호
  • 1944–45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빌뉴스·카우나스 해방, 두 번째 영웅 칭호

보구

博古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한족) 1907–1946 ✕ 추락사

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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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

아르소 라디보예프 요바노비치

Арсо Радивојев Јовано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 1907–1948 ✕ 의문사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한 참모 장교

1948년 8월, 루마니아로 향하던 국경에서 그의 전쟁 경력은 망명 시도와 함께 끝났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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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8베오그라드 왕립 군사학교 하급과정 생도
  • 1932–1934왕립 군사학교 고급과정 수학
  • 1939『보병대대 전술』 출간, 보병학교 교관·지휘관
  • 1941몬테네그로 봉기 임시 최고사령부 사령관
  • 1942–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1945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
  • 1946–1948모스크바 보로실로프 고등군사학교 유학
  • 1948인포르비로 결의 지지, 루마니아 탈출 시도 중 사망

미하일 이바노비치 로디오노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оди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50 ✕ 처형

전시 고리키를 무기고로 만든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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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6–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1–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41–1943고리키 시방위위원회 의장 · 국방위원회 전권위원 (군수 생산)
  • 1940–1946고리키 주당위 및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0고리키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39고리키 주당위 제3서기

레프 레오니도비치 (아로노비치) 시바르츠만

Лев Леонидович (Аронович) Шварц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55 ✕ 처형

MGB 최악의 고문수사관, 블류헤르·바벨·메이예르홀트를 죽인 자

사형선고 후 유서에 "5발의 확산탄으로 쏴 달라. 보통 총알 한 발로는 죽지 않을 테니"라고 썼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던 자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소련 MGB 대령, 국가보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수사관으로 악명 높다. 1937-38년 대숙청기 NKVD에 들어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 살해하고, 이삭 바벨과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를 심문했다. 전기 케이블로 그리고리 시테른의 눈을 적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1955년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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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콤소몰 가입, 키예프에서 신문 기자 활동
  • 1929모스크바로 전근, 《모스콥스키 콤소몰레츠》 근무
  • 1935NKVD 채용
  • 1938NKVD 수사관 — 블류헤르·코사레프 등 고문, 바벨·메이예르홀트 심문
  • 1941NKGB 수사부 부부장
  • 1951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 1955사형판결 후 총살형

레프 일리치 루시노프

Лев Ильич Рус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7–1960 ○ 자연사

핵분열과 핵이성질체를 탐구한 실험물리학자

1935년 브로민의 방사능을 연구하던 그는 쿠르차토프 형제·미솝스키와 함께 원자핵 이성질체 현상을 발견했다.

레프 루시노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의 실험 기반을 넓힌 소련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에서 한 번의 분열마다 둘 이상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연쇄반응 조건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인공 방사성 핵의 이성질체와 중성자·감마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했으며, 전후에는 연구용 원자로 건설과 핵물리학 연구 집단의 조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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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기계학부 학생
  • 1930–1944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쿠르차토프 연구실 연구자
  • 1939–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 중성자 실험 수행
  • 1944핵이성질체 연구로 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8실험물리학 교수
  • 1946–1960소련 원자 프로젝트 및 연구용 원자로 개발 참여
  • 1950s고중성자 특성 연구용 원자로 프로젝트 과학책임자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07–1964 ○ 자연사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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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8레닌그라드 콤소몰 → 비보르크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5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4상장 진급
  • 1945–1948북조선 소련군정 실질적 수장, 소련민정청 조직
  • 1948–1950초대 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 대사
  • 1951–1954칼루가 주 집행위 부의장 (강등)
  • 1954–1959노브고로드 주당 → 프리모리예 변경당 제1서기
  • 1959–1960주헝가리 소련 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수호돌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Суходоль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66 ○ 사망

툴라 방어전을 지휘하고 몰락한 NKVD 소장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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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1툴라 무기 공장 노동자, 라브파크 야간부 수료
  • 1931–1935모스크바 항공대학 입학 후 툴라 기계연구소 편입, 기계공학사
  • 1935–1938제173공장 기술자·선임 설계사
  • 1938–1939NKVD 중앙학교 졸업, GUGB 1국 8과 작전관
  • 1939–1940NKVD 경제총국(GEMU) 1과 부과장
  • 1940–1941에스토니아 SSR NKVD/NKGB 경제과 부과장
  • 1941.4–7툴라 주 NKGB 국장
  • 1941–1943툴라 주 NKVD 국장 겸 시 방위위원회 위원
  • 1943–1946툴라 주 NKGB/MGB 국장
  • 1946–1951보로네시 주 MGB 국장
  • 1951–1955불가리아 내무부 주재 MGB/MVD/KGB 수석 고문
  • 1956질병으로 예편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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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아이작 도이처

Isaac Deutscher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7–1967 ○ 자연사

트로츠키 3부작을 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비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남기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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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지하출판 편집자
  • 1931소련 방문 — 모스크바대·민스크대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귀국
  • 1932KPP 내 최초 반스탈린 그룹 공동창설 — '사회파시즘' 노선 반대로 제명
  • 1939런던 망명 — 『이코노미스트』 소련·군사 담당 기자로 활동
  • 1946–1947저술 전념을 위해 언론계 은퇴
  • 1949『스탈린: 정치적 전기』 출간 — 세계적 소련 권위자로 부상
  • 1954–1963트로츠키 3부작 완성: 『무장한 예언자』(1954)·『비무장한 예언자』(1959)·『추방된 예언자』(1963)
  • 1965버클리 반전 티치인 연설 — 신좌파의 지적 스승으로 부상
  • 1966–1967케임브리지대 G. M. 트리벌리언 강연 — 『미완의 혁명』으로 사후 출간

린뱌오

林彪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7–1971 ✕ 추락사

마오의 후계자였던 군사 천재,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10대 원수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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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황푸군관학교 입학, 중국 공산당 입당
  • 1932홍군 제1군단장
  • 1937팔로군 115사단장 — 핑싱관 대첩 승리
  • 1948–1949동북야전군 사령관, 랴오선·핑진 전역 승리로 베이징 입성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제3위)
  • 1959국방부장 — 마오쩌둥 개인숭배와 인민해방군 정치화 주도
  • 1966–1971당 중앙위원회 유일 부주석,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

Павел Михайлович Фи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71 ○ 자연사

예조프시나의 폐허에서 해외정보국을 재건하고 원자폭탄을 훔친 사내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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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8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후 국영출판사 셀호즈기즈 편집자·부편집장
  • 1938.8–11NKVD 특수목적학교 수료, 제5과 실습생 → 9분과장 → 부과장
  • 1939–1946소련 해외정보 총책임자: GUGB NKVD 제5과장 → NKGB·NKVD·MGB 제1총국장
  • 1946–1947독일 소련군정청 MGB 부전권대표
  • 1947–1951스베르들롭스크주 MGB 부국장 — 폐쇄 원자력도시 감독
  • 1951–1953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 —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 관할
  • 1953.3–7스베르들롭스크주 MVD 국장
  • 1954–1963국가통제부·각료회의 감사위원, 대외우호협회 사진공장장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코르투노프

Алексей Кириллович Корт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7–1973 ○ 자연사

소련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건설한 영웅-장관

“우리는 우리 목숨은 걸 수 있어도 교두보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걸 수 없었다.” — 비스와 강 도하 후, 1944년

소련 가스 산업의 실질적 창설자. 1957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글라브가스를 이끌며 연중무휴 시공 기술과 1420mm 대구경 파이프라인으로 거의 10만 km에 달하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대조국전쟁에서는 629소총연대를 지휘해 비스와 강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샤임-튜멘 송유관으로 서시베리아 원유의 경제성을 입증하며 튜멘 유전 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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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8아조프스탈 제철소 · 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TsAGI) 건설 기술자
  • 1943–1945제629소총연대장 · 소비에트연방영웅 (1945)
  • 1948–1953투이마지 건설국장 → 석유공업부 건설담당 차관
  • 1955–1957소련 석유공업기업건설장관
  • 1957–1965글라브가스(가스공업총국) 국장 · 통합가스공급체계 설계
  • 1965–1972소련 가스공업장관
  • 1972–1973소련 석유·가스공업기업건설장관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랴비코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Ряб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74 ○ 자연사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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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보리스 예프스타피예비치 부토마

Борис Евстафьевич Бутом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7–1976 ○ 자연사

19년간 소련 조선을 지휘한 핵잠수함 함대의 설계자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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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레닌그라드 조선연구소 졸업
  • 1936–1944블라디보스토크 달자보트 조선소에서 정비공·진수기사·수석기사 역임
  • 1944–1948젤레노돌스크 제340조선소 수석기사, 이후 소장
  • 1948–1952소련 조선공업부 본부장
  • 1952–1953, 1954–1957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7–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조선위원회 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세르게이 마트베예비치 시테멘코

Сергей Матвеевич Штем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7–1976 ○ 자연사

스탈린의 작전지도를 설계하고 두 번 몰락한 참모장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시테멘코는 스탈린을 수행해 매일 아침 전황을 브리핑했다. 스탈린이 연합국 수뇌들 앞에 펼쳐 보인 작전지도는 시테멘코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르게이 시테멘코는 스탈린 시기 소련군 작전기획의 핵심이자 최연소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엘리트였다. 돈 카자크 출신으로 1926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포병·기갑 장교를 거쳐 참모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중 작전총국장으로서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의 구체적 기획을 주도했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을 수행했다. 1948년 41세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52년 경질되고 베리야 연루로 강등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으로 복귀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고, 회고록 『전쟁 시기 참모본부』는 소련 군사사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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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붉은 군대 자원입대
  • 1937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졸업, 전차대대장
  • 1943–1946작전총국장 —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 기획
  • 1948–1952참모총장 겸 국방차관, 육군대장
  • 1952–1953소련군 독일주둔군 집단 참모장
  • 1956–1957참모본부 정보총국(GRU) 국장
  • 1968–1976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

세르게이 니키포로비치 크루글로프

Сергей Никифорович Круг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77 사인 미확정

마지막 내무인민위원, 최장수 내무장관, 전직 간부로 기차에 치여 숨진 인물

전후 11년간 내무기관을 이끌다 해임·박탈·제명을 겪은 크루글로프는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는데,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사인은 사고·자살·심장마비설로 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일하다 동양학을 공부한 크루글로프는 1938년 베리야 취임 뒤 국가보안 기관에 들어갔다. 1945년 12월 내무인민위원, 1946년 3월 내무장관이 되어 굴라그를 최대 규모로 운영했고, 1944~1945년 체첸인·인구시인 강제이주를 조직한 주요 책임자였다. 1953년 베리야 체포 이후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KGB 창설을 주도했으나, 1956년 초 해임되고 1959년 장성 연금과 전용 아파트를 박탈당했으며 1960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으나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갈리고 사인도 사고·자살·심장마비 등으로 엇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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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당 조직인사부(ORPO) 책임조직원, 이후 NKVD 특별전권대표로 발탁
  • 1939–1941NKVD 인사 담당 부인민위원 겸 간부국장
  • 1941–1945NKVD 제1부인민위원, 전쟁 중 방어선 건설과 군사평의회 활동
  • 1945.12–1946.3마지막 NKVD 내무인민위원
  • 1946–1953MVD 내무장관: 굴라그 최대 규모, 원폭 건설, 민족 강제이주
  • 1953.3–6베리야의 제1차관, 이후 베리야 체포에 가담
  • 1953.6–1956.1재임명된 MVD 장관, KGB 분리 창설 주도
  • 1956–1977좌천과 퇴직, 연금·주택 박탈, 당 제명, 1977년 기차 사망(사인 미확정)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데멘티예프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Демен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추바시) 1907–1977 ○ 자연사

추바시 출신으로 24년간 소련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대제'

1953년 3월, 베리야가 항공공업성을 국방공업성에 통합하면서 데멘티예프는 자리를 잃었다. 8월 베리야가 체포되자마자 그는 항공공업 장관으로 복귀했고, 이후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휘했다.

추바시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소련 항공공업을 거의 24년간(1953~1977) 이끈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전투기 대량 생산을 총괄했고, 종전 후 장관으로서 MiG 전투기에서 Tu-144 초음속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용·민간 항공기 생산 전반을 지휘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에 걸쳐 항공산업을 관장한 유일한 인물로,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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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7공장 노동자, 심비르스크 직업기술학교 졸업
  • 1927–1931모스크바 기계연구소 →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31–1934민간항공함대 연구소 선임기사·운용기술부장
  • 1934–1941모스크바 제81·제1항공공장 작업반장 → 주임기사 → 공장장
  • 1941–1953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제1부장관) — 전시 항공기 대량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1)
  • 1953–1977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Tu-144·Il-76·Il-86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 재수훈(1977)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고르셰닌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Горше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7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전범 재판을 조직하고 흐루쇼프에게 대숙청 통계를 올리다

1954년 2월, 고르셰닌은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사형·유형·수용된 자의 정확한 숫자를 담은 증명서를 올렸다. 스탈린 사후 처음 나온 그 숫자는 해빙기 복권의 출발점이었다.

알라티리의 철도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법 연구소를 졸업하고 노동법 학자로 출발했다.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하는 한편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준비를 주도했다. 1948~1956년 소련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 제도 정비를 이끌었고, 1954년 2월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대숙청 희생자 통계를 담은 공식 증명서를 제출했으며, 1956년 주코프·루덴코와 함께 옛 포로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앙위원회 결의를 공동 발의했다. 법무부 폐지 후에는 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으로 학계에 복귀하여 소비에트 노동법전 편찬 작업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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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카잔 소비에트법 연구소 학술담당 부소장
  • 1937–1940소련 법무인민위원부 교육기관국장·부부위원
  • 1940–1943러시아 SFSR 법무인민위원
  • 1943–1948소련 검찰총장 (1946년부터 '검찰총장' 호칭)
  • 1943–1947정치국 사형선고 비밀위원회 위원
  • 1948–1956소련 법무장관
  • 1952–195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6–1963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
  • 1963–1967전연방 소비에트입법 연구소 노동·사회보장 부문장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루네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Лун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80 ○ 자연사

당 경력으로 보안기관에 들어선 관료

1953년 베리야 사건 특별재판소에서 내무부 제1차관 자격으로 전임 장관을 심리했다.

콘스탄틴 루네프는 섬유 노동자 출신의 당 관료로, 전후 모스크바 당 조직에서 경력을 쌓은 뒤 국가보안기구의 고위직으로 이동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 뒤 내무부 제1차관이 된 그는 전임 수장을 심리한 특별재판소에 내무부 대표로 참여했다. 이 역할은 내무부가 당의 정치적 결정에 복속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당 인사가 강압적 국가기구의 운영을 맡은 체제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후 KGB 제1부의장과 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대행을 지냈으나,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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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7섬유산업 노동자·노조 및 관리직
  • 1941–1946모스크바주 당위원회 지도원·도시당 제1서기
  • 1946–1953모스크바시 당위원회 간부·행정 부문 책임자
  • 1953.06–07소련 내무부 제9국장
  • 1953–1954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 사건 특별재판소 위원
  • 1954–1959KGB 제1부의장
  • 1958–1959KGB 의장 직무대행·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 1961–1969에너지기술 연구기관 부소장, 정년퇴직

로만 안드레예비치 루덴코

Роман Андреевич Ру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1 ○ 자연사

뉘른베르크의 소련 수석검사, 소련 검찰을 28년간 이끈 최장수 검찰총장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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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체르니고프 지역 검찰청 수사관
  • 1937–1938도네츠크 주 검사
  • 1938–1940스탈리노 주 검사
  • 1942–1944우크라이나 SSR 부검사장
  • 1944–1953우크라이나 SSR 검사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수석검사
  • 1953–1981소련 검찰총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하리토노비치 부시긴

Александр Харитонович Бусы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85 ○ 자연사

생산성 혁신으로 이름난 자동차 공장 대장장이

포드의 초청에 그는 “우리에게 조국은 금보다 소중하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르 부시긴은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대장장이로서 생산성 향상 방법을 현장에 도입하고 노동자 집단의 조직을 이끈 소련의 대표적 생산 노동자였다. 1935년 그의 작업반은 교대 한 번에 규정량 675개를 크게 웃도는 크랭크축 966개와 1001개를 단조해, 스타하노프 운동이 기계공업으로 확산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전쟁과 전후에도 공장 관리와 노동자 교육에 참여했으며, 노동 영웅의 성취가 개인의 숙련뿐 아니라 작업장 조직과 국가적 동원에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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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노동자
  • 1932고리키 자동차 공장 대장장이
  • 1935스타하노프 운동 전연방 회의 참가
  • 1937–1950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 1938공산당 입당
  • 1940년대–1970년대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요 작업장 책임자
  • 1975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주언

Lê Duẩn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07–1986 ○ 자연사

베트남을 통일하고 캄보디아를 침공한 26년 집권의 최장기 서기장

“우리 당은 혁명의 첫날부터 베트남 인민의 전체 투쟁을 조직하고 통제한 유일한 지도자다.” — 1976년 통일 승리 연설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이론가.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프랑스 식민 감옥을 두 번 거친 후 호치민의 신임을 얻어 남부 조직을 책임졌다. 1956년 〈남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여 남베트남 무장해방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되어 호치민 사후(1969)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친소 노선 아래 중월전쟁(1979)을 겪으면서도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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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 1931–1945두 차례 투옥 — 8월 혁명으로 석방, 호치민의 신임 획득
  • 1951–1954남부 중앙사무국장 — 항불전쟁 남부 전선 지휘
  • 1956〈남으로 가는 길〉 집필 — 남부 무장투쟁의 이론적 토대 마련
  • 1960–1969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대미 전쟁의 실질적 최고지휘관
  • 1969–1986당 최고지도자 — 통일(1975), 캄보디아 침공(1978), 중월전쟁(1979)

파벨 바실리예비치 코바노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Ков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86 ○ 자연사

인민통제 초대 의장, 셸레핀의 대리인에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감사관으로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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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인민교육위원회 산하 교육학 실험실·연구소 소장
  • 1941–1942러시아 인민교육위원회 초등·중등학교 관리국장
  • 1942–1944칼리닌 전선·북카프카스 전선·제2우크라이나 전선 종군기자
  • 1944–1956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지도원, 부문장, 부부장으로 승진
  • 1956–196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62–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의장 (셸레핀의 보좌)
  • 1965–1971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1–1986연금 생활, 석유·가스 산업 건설부 산하 연구소 과학 고문

쯔엉찐

Trường Chinh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07–1988 ○ 사망

토지개혁의 실패로 물러났다가 도이머이 개혁으로 귀환한 베트남의 수석 이론가

그의 혁명 가명 '쯔엉찐'은 '장정(長征)'을 뜻하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바치는 의도적 경의였다 — 이 이름 하나로 그가 당의 친중 이론가임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수석 이론가. 1928년 혁명청년동맹에 가입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0년 서기장에 선출되어 8월 혁명과 항불전쟁 시기 당을 이끌었다. 1953–1956년 토지개혁을 주도하여 대규모 과잉 숙청을 초래했고 그 책임으로 서기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국회 상임위원장(1960–1981)과 국가주석(1981–1987)을 지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1986년 레주언 사후 다시 서기장에 올라 도이머이 개혁 노선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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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참여
  • 1930–1936프랑스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12년형 선고, 1936년 석방
  • 1940–1945인도차이나공산당 서기장 — 8월 혁명 주도
  • 1946–1947『8월 혁명』(1946)과 『항전은 반드시 승리한다』(1947) 출간
  • 1951–1956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토지개혁을 주도했으나 실패로 해임
  • 1960–1981국회 상임위원장
  • 1981–1987베트남 국가주석
  • 1986.7–12당 서기장 재취임 — 도이머이 개혁 추진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지갈린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Жиг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7–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중공업을 18년간 관장한 장관

베리야에게 밤마다 전화로 공장 상황을 보고할 때면, 차관임에도 전화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소련의 중공업 행정가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산업과 민간 중공업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레닌그라드의 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책임자까지 오른 현장형 기술관료였으며, 1940년대에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직접 지휘 아래 노보크라마토르스크 중기계공장(NKMZ)의 방산 생산을 현장에서 감독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64~1986)과 최고회의 대의원(6~10기)을 지냈고,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장기 집권은 소련 군산복합체가 당-국가 체제 안에서 제도화된 안정적 관리 구조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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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기술자·작업반장
  • 1931–1940레닌그라드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작업장장 → 생산책임자 → 주임기사 → 공장장
  • 1940–1945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생산배치국장
  • 1945–1953소련 중공업부 차관 → 제1차관
  • 1957–1963모스크바 시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제1부의장 → 의장
  • 1963–1965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겸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
  • 1975–1983소련 중공업·수송기계부 장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랑팡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ангфанг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프랑스 1907–1990 ○ 자연사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심문관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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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7OGPU·NKVD 방첩 요원
  • 1937–1940NKVD 심문관, 방첩부 부장 보좌
  • 1940–1941수사부장, 그리스 파견
  • 1942–1946전시 작전부서 지휘, 투바·몽골·신장 파견
  • 1946–1955MGB·KGB 간부, 중국 고문
  • 1955–1957해임과 계급 박탈
  • 1957–1972체포, 15년형 복역

뱌체슬라프 페트로비치 옐류틴

Вячеслав Петрович Елю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93 ○ 자연사

31년간 소련 고등교육을 총괄한 최장수 각료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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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졸업, 동 대학원 진학
  • 1933–194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도센트,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부원장
  • 1941–1943레닌그라드 포병기술학교 수료 후 포병기술장교 복무
  • 1945–195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소장(총장)
  • 1951–1954소련 고등교육부 제1차관
  • 1954–1959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9–1985소련 고등·중등전문교육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이그나티 트로피모비치 노비코프

Игнатий Трофимович Нов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93 ○ 실각 1983

브레즈네프의 동창으로 21년간 소련 건설을 총괄한 에너지 기술관료

“러시아인은 곰이 아니라 코끼리다. 우리는 기억이 길기 때문이다.” —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보이콧 위협에 답하며.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21년간 소련의 건설·에너지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 관료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동창.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위기 속에서 대회를 성사시켰으나,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주도로 1983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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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사라토프 제236공장장
  • 1941–1943사라토프 주당위원회 산업·에너지 담당 서기
  • 1943–1950소련 발전소인민위원부·발전소부 중앙관리국장
  • 1950–1954고리키 수력발전소 건설 부책임자
  • 1954–1958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관리국장
  • 1958–1962소련 발전소건설장관
  • 1962소련 에너지·전화장관 (10~11월)
  • 1962–1983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
  • 1975–1980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

게오르기 필리포비치 바이두코프

Георгий Филиппович Байду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94 ○ 자연사

치칼로프와 북극을 넘은 부조종사, 소련 방공무기 체계를 구축한 조달 사령관

1937년 6월 20일, 북극 상공에서 치칼로프가 저산소증으로 코피를 흘리자 바이두코프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 13시간을 홀로 비행해 ANT-25기를 밴쿠버 피어슨 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의 시험비행사, 군사 지휘관, 그리고 소비에트 훈장 최다 수훈자(21개). 1936년과 1937년 발레리 치칼로프의 ANT-25기 부조종사로서 모스크바–우드 섬 및 모스크바–북극–밴쿠버 무착륙 비행에 참여해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항공사단과 항공군단을 지휘했고, 전후 민간항공단 총국장(1947–1949)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국방부 제4총국장으로서 방공군(PVO)의 무기 조달을 총괄하며 소련 방공무기 체계 건설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작가동맹 회원으로 치칼로프 전기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까지 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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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8레닌그라드 군사항공이론학교·카차 군사비행학교 수료, 전투기 조종사
  • 1931–1934NII VVS 시험비행사, 계기비행 방식 개발 참여
  • 1935–1937ANT-25기 부조종사 — 모스크바–우드 섬(1936)·모스크바–북극–밴쿠버(1937)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 연방영웅
  • 1941–1945제4근위돌격항공사단장, 제4돌격항공군단장 — 모스크바·르제프·베를린 작전 참가
  • 1947–1949민간항공단(GVF) 총국장
  • 1957–1972국방부 제4총국장 — PVO 방공무기 조달 총괄
  • 1972–1988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

게오르기 카르포비치 치뇨프

Георгий Карпович Цин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브레즈네프가 KGB 안에 심은 또 하나의 눈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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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야금 공장 노동자 · 기술자
  • 1939–41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간부 (브레즈네프 아래서 근무)
  • 1941–45군 정치위원: 칼리닌 전선 폴리트국 부국장 → 제57군 폴리트부장
  • 1945–51소련 측 오스트리아 연합국위원회 보좌관 · 부최고위원
  • 1953–58주독 소련군 특별부장 (MVD/KGB)
  • 1966–67KGB 제3국장 (군 방첩)
  • 1967–70KGB 제2총국장 (방첩)
  • 1970–82KGB 부의장 (군 방첩·수사부서 총괄)
  • 1982–85KGB 제1부의장
  • 1985–92국방부 총감찰관단 감찰관

세묜 안드레예비치 스카치코프

Семён Андреевич Скач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96 ○ 자연사

25년간 소련 대외경제원조를 총괄한 공업 관료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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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하리코프 증기기관차 공장(제183호) 기술자·주임야금기사
  • 1941–1945우랄바곤자보드 당 조직자(파르토르크), 전차 생산 총괄 지원
  • 1945–1949레닌그라드 디젤 공장장 → 우랄바곤자보드 공장장
  • 1949–1954첼랴빈스크 트랙터 공장(ChTZ) 공장장
  • 1954–1957운수기계제조부 제1차관
  • 1957–1958하리코프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8–1983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1978년부터 장관급)

파벨 아나톨리예비치 수도플라토프

Павел Анатольевич Судопл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트로츠키를 제거한 스탈린의 첩보 거장, 결국 스탈린의 감옥에서 15년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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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이반 바실리예비치 아르히포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Архи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7–1998 ○ 자연사

중소 경제협력의 얼굴, 4대 서기장을 보좌한 소련 경제 최고 실무자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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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9칼루가 철도 공장 선반공
  • 1938–1939크리보이로크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3전연방당 중앙위 간부국 비철금속부장
  • 1943–1950비철금속·금속공업 부인민위원·부장관
  • 1950–1958중국 주재 수석경제고문
  • 1958–1974대외경제관계 국가위 제1부의장
  • 1974–1980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6각료회의 제1부의장

콘스탄틴 안토노비치 페트르자크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Петржа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7–1998 ○ 자연사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하고 소련 원자폭탄의 토대를 놓은 물리학자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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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8마로비셰르스키 유리공장 도자기·유리 화공
  • 1931–1936레닌그라드대학교 물리학부, 쿠르차토프 지도하 졸업
  • 1936–1941흘로핀 라듐연구소(RIAN) 대학원생, 쿠르차토프·흘로핀 지도
  • 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자발핵분열 공동 발견 (국가발견등록 제33호)
  • 1941–1942붉은 군대 복무, 중위; 카잔으로 소환되어 원자폭탄 계획 투입
  • 1947–1986RIAN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 창설 및 실장
  • 1949–1984렌소베트 기술원 핵물리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48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예고로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Ег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7–2000 ○ 자연사

소련 핵잠수함 함대와 대양해군을 건설한 조선공업 장관

1954년, 예고로프는 로켓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수상함과 잠수함에 미사일 무장을 배치하는 원칙을 공동 개발했다 — 소련 해군을 미사일-핵 해양함대로 탈바꿈시킨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군사·국가 지도자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조선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대양함대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930년 해군 공병학교 졸업 후 연구기관에서 선박의 항해성능을 연구했고, 1939년 조선공업인민위원회 제13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전시에는 설계국 재배치와 함정 재무장을 진두지휘했다. 1954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수상함·잠수함 미사일 탑재 원칙을 공동 수립했으며, 첫 원자력 쇄빙선 '레닌'과 중항공순양함 개발을 주관했다. 장관 재임 8년 동안 전략원잠 941형, 원자력 미사일순양함 1144형, 항공순양함 '바쿠' 등을 진수시켜 소련의 해군 전략적 균형을 확보했고, 상선톤수도 세계 3위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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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F.E. 제르진스키 고등해군공병학교 졸업
  • 1930–1939해군 군함건조연구소(NII)에서 기술자·선임기술자·부서장 역임
  • 1939–1946조선공업인민위원회(후에 성) 제13·제5총국장 — 함정 설계·연구 총괄
  • 1946–1948제5총국 수석기사, 이후 총국장 복귀
  • 1953–1955소련 수송·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55–1965조선공업부 차관 → 국가조선위원회 제1부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제1차관
  • 1976–1984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노비코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Нов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2000 ○ 자연사

군수공장 기술자에서 국가계획 수장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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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62–1965소련 코메콘 대표;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07–2000 ○ 자연사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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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블라디미르 벨레비트

Vladimir Velebit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계 1907–2004 ○ 자연사

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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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허가이

Алексей Хега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소비에트 고려인 1908–1953 ✕ 숙청 후 의문사

조선로동당 창립 핵심 조직자이자 초기 '소련파'의 지도자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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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2극동지역 콤소몰 서기
  • 1937당에서 숙청·제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 1939당적 회복, 우즈베키스탄에서 당 간부로 복귀
  • 1946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조직국장
  • 1948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
  • 1949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
  • 1951김일성과 충돌 후 전직 해임, 부수상으로 좌천

빅토르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Виктор Семёнович Абаку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54 ✕ 처형

스메르시를 지휘하고 MGB를 통치한 스탈린의 보안 수장

1949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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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NKVD에서 성장, 대숙청기 보안 실무를 거쳐 승진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장, 전시 군 방첩을 지휘
  • 1946–1951MGB 국가보안장관, 전후 보안기관을 지휘
  • 1949–1951레닌그라드 사건 등 전후 숙청 국면에 관여
  • 1951–1954체포 뒤 스탈린 사후 재판을 거쳐 처형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61 ↓ 좌천 1955

스탈린의 수석 이념 감독관, 철학 논쟁에 무너지다

1947년 6월 철학 논쟁장. 즈다노프가 500명 앞에서 묻는다: "이 책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깨물어먹는 장면은 묘사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어떻게 그 모두를 쓸어버렸는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산드로프는 침묵한다.

스탈린 시대 수석 철학 관료. 고아에서 선전선동국장까지 올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1947년 철학 논쟁으로 실각했다. 문화장관도 성추문으로 1년 만에 민스크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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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20s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전기기사 아들. 내전기 고아가 되어 보리소글렙스크 고아원에서 성장
  • 1930–1935모스크바 철학문학사연구소(МИФЛИ) 졸업 및 아스피란투라 수료
  • 1935–1939МИФЛИ 교수, 철학사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박사학위
  • 1939중앙위 선전선동국 부국장 겸 고등당학교(ВПШ) 교장
  • 1940–1947중앙위 선전선동국장: 전쟁기 선전·대외이념공세·전후 문화통제 주도
  • 1943, 1946『철학사』3권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스탈린 전기(2판) 공동 집필
  • 19476월 철학 논쟁: 스탈린·즈다노프의 비판. 9월 선전선동국장 해임, 철학연구소장으로 전출
  • 1954–1955소련 문화장관 임명. 1년 만에 「검투사 사건」 성추문으로 파면
  • 1955–1961민스크의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철학법률연구소 분과장으로 좌천, 말년을 보냄

예브게니 드미트리예비치 키셀료프

Евгений Дмитриевич Кисе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1908–1963 ○ 유엔 재직 중 사망

라코시를 불신한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 대사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과 외교관 양성 학교를 나와 193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들어갔다.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 뉴욕 총영사, 오스트리아 주재 정치대표를 거쳐 1949~54년 헝가리 대사를 지냈다. 라코시가 스탈린과의 비밀 대화를 알려 주지 않아 곤란을 겪었고, 헝가리의 생활수준·탄압·지식인 동향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스탈린 사후 몰로토프는 1953년 6월 회담을 준비하며 그의 보고를 검토했다. 이후 이집트 대사, 유엔 사무차장을 지냈다.

프롤 로마노비치 코즐로프

Фрол Романович Коз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65 ○ 뇌졸중

뇌졸중 하나로 브레즈네프 시대를 연 제2서기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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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39이젭스크 제철공장 제강소장 → 당위원회 서기
  • 1940–44이젭스크 시당 제2서기: 군수생산 지휘
  • 1947–49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중공업·항공 감독
  • 1949–53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레닌그라드 사건」 후 당 재건
  • 1953–57레닌그라드 주당 제1서기: 지하철·도시 현대화 추진
  • 1957–58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8–60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일상적 정부 운영 총괄
  • 1960–64중앙위 서기, 사실상의 제2서기: 서기국·상임위원회 주재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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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이사예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Ис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71 ○ 자연사

소련 우주선의 심장을 만든 엔진 설계자: 폐쇄식 사이클의 발명가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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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금속공장 기술자
  • 1934–44볼호비티노프 설계국: 항공기 착륙장치, BI-1 로켓전투기 엔진
  • 1944–47OKB-2 수석설계자, 독일 로켓기술 조사단 참가(1945)
  • 1948–52니리-88 제9부: 진동방지 격벽, 평판 분사기, 폐쇄식 사이클(1949) 발명
  • 1951–55R-11(스커드) 엔진 S2.253;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8–61OKB-2 확대; 보스토크 TDU 제동엔진(104회 비행 성공)
  • 1962–71KTDU 계열: 소유스·살류트·미르·행성탐사선 엔진; N1-L3 달착륙선용 LOX/LH2 엔진
  • 1967–71KB KhimMash(舊 OKB-2) 수석설계자로 사망 시까지 재임

발레리 드미트리예비치 칼미코프

Валерий Дмитриевич Калмы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74 ○ 자연사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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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 로스토프 공업전문학교 야간 수료
  • 1929–1933모스크바 '모스카벨' 공장 작업반장 → 책임기사
  • 1934모스크바 동력대학(MЭИ) 야간부 졸업
  • 1935–1942조선공업인민위원부 НИИ-10: 설계기사 → 주임설계자 → 주임기사
  • 1942–1949НИИ-10(후 НИИ-100 '알타이르') 소장
  • 1949–1951조선공업부 반동무장 총국장
  • 1951–1954각료회의 제3총국 부국장 (레이더·대공미사일)
  • 1954–1957소련 무선기술공업부 장관
  • 1957–1963각료회의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3–1965소련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4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 (재임 중 사망)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75 ↓ 실각 1960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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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08–1976 ○ 사망

세쿠리타테를 세운 첫 공산당 내무장관, 파우케르·루카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1952년 함께 숙청되다

1952년 5월 전원회의는 제오르제스쿠에게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를 물어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냈다. 세쿠리타테를 만든 사람이 이듬해 2월 그 세쿠리타테에 체포되었다.

부쿠레슈티 근교 키틸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했고, 192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들어가 인쇄 노조에서 활동했다. 1941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카란세베시 감옥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4년 8월 석방되어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5년 3월 그로자 정부의 내무장관에 올라 1952년까지 경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1946년 총선의 조작, 1947년 마니우 등 국민농민당 지도부의 체포와 재판, 1948년 세쿠리타테 창설과 무장 저항의 진압을 지휘했다. 당내에서는 아나 파우케르·바실레 루카와 가까워 「모스크바파」의 세 번째 인물로 꼽혔고, 1952년 5월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목으로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6년 풀려났고 당적을 잃은 뒤 인쇄소 책임자로 일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가 데지 시대 숙청을 재심하면서 복권되었고 1976년 부쿠레슈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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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인쇄 노조 활동
  • 1941–1944체포, 10년형, 카란세베시 감옥 복역
  • 1944석방, 중앙위원회 서기
  • 1945–1952내무장관
  • 1948세쿠리타테 창설 지휘
  • 1952정치국·내무장관 해임
  • 1953–1956체포, 재판 없이 석방, 당적 박탈
  • 1968복권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체르노우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оу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78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후폭풍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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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8–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당·노조·콤소몰 기관부장
  • 1939–1948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38–1939모스크바 시 스탈린 구당위 제1서기
  • 1955–1957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52–1955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8–1979 ○ 자연사

KV·IS 중전차를 만든 탱크그라드의 수석 설계자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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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육군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연구부문 엔지니어, 설계국장
  • 1937–1968키로프 공장 SKB-2 수석 설계자 (레닌그라드/첼랴빈스크)
  • 1941–1943소련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겸 수석 설계자
  • 1943–1945제100실험전차공장장 겸 수석 설계자 (첼랴빈스크)
  • 1949–1968VNII-100 전차연구소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1968–1972소련 방위공업차관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필류긴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Пилю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82 ○ 자연사

스푸트니크에서 부란까지: 소련 우주시대의 두뇌를 설계한 유도·항법 수석설계자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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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공대 졸업, 자이로 계측기 '지로그라프'로 졸업논문
  • 1935–43ЦАГИ·비행시험연구소에서 정밀기계공, 항공기 자이로 계측 설계
  • 1943기술과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4–46NII-1 로켓기술부; 독일에서 V-2 잔해 및 유도장치 연구
  • 1946–82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 수석설계자회의 정식 구성원
  • 1948–57R-1·R-2·R-5·R-7 유도제어계 — 스푸트니크1호·보스토크1호 발사
  • 1960s–70s프로톤, 달·금성·화성 탐사선, 부란 왕복선 유도제어계 총괄
  • 1954–82NII-885(후일 NPTs AP) 소장, 196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9–82모스크바 무선기술·전자·자동화대학(MIREA) 학과장
  • 1975사하로프 노벨평화상 비난 아카데미 성명 서명 — 72인 중 1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카마닌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Кама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82 ○ 자연사

첼류스킨호 구조에서 가가린 선발까지, 우주비행사를 만든 공군장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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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보리소글렙스크 군사 조종사 학교 졸업, 극동 레닌 항공연대 배속
  • 1934첼류스킨호 구조: 혼성 항공분견대 지휘, 34명 구조, 소련영웅 №2
  • 1939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제19경폭격여단장
  • 1942–1943제292돌격항공사단장 (칼리닌 전선: 벨리키예루키·데먄스크)
  • 1943–1945제8혼성·제5돌격항공군단장, 쿠르스크·키예프·리비우·부다페스트·비엔나
  • 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73항공군 사령관 (중앙아시아)
  • 1960–1971공군 우주비행훈련 책임자, 유인궤도비행 군사총괄, 공군총사령관 우주보좌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우스티노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Уст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84 ○ 자연사

군수공업의 사람, 국방장관이 되다

정치국에서 조사위원회가 빈 공장 사진을 내밀자, 우스티노프는 위원회가 떠난 다음 날 직접 찍은 가동 중인 공장 사진으로 맞섰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계 설계를 전공한 기술자로, 1941년 6월 병기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독소전쟁 중 레닌그라드 방위산업의 우랄 대피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독일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흡수해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57년 각료회의 부의장, 1965년 중앙위 서기로 군수공업 전반을 맡았다. 1976년 그레치코 사망 후 국방장관에 올라 트로츠키 이래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소련 원수로 진급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을 정치국에서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 중 하나였고, 1984년 12월 20일 폐렴과 심장마비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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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병기인민위원, 전시 무기생산 동원 체계 지휘
  • 1946–1953병기장관(1946년 인민위원회가 부로 개편), 전후 군수공업 재편
  • 1957–1963각료회의 부의장, 군수공업 전반 총괄
  • 1965–1976중앙위 서기, 방위산업 담당 정치국급 원로로 부상
  • 1976–1984국방장관, 정치국 정회원으로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관여
  • 1953–1957국방공업장관, 군수공업 총괄
  • 1963–1965각료회의 제1부의장,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아르히프 미하일로비치 률카

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4 ○ 폐암

독일 엔진을 베끼지 않고 소련 제트추진 시대를 연 설계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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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 1957–81OKB-165 총설계자; AL-7, AL-21, AL-31F 엔진 시리즈
  • 1968–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가스터빈 위원회 의장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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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예피셰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Епи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85 ○ 자연사

23년간 소련군을 당 통제 아래 둔 최장수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 — 스탈린 시기 실패와 탄압에 대한 모든 언급을 봉쇄하며.

소련군·해군 총정치국(GlavPUR)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이끈 최장수 국장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사상적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흐루쇼프가 군부에 대한 당 우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파격 승진시켜 기용했으며, 이후 글라브푸르를 CPSU 중앙위원회 부서처럼 운용하며 국방장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정치장교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공개 시사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카불을 방문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이라는 그의 말은 체제 정통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억압한 독단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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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콤소몰 아스트라한 구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30–1938붉은 군대 복무, 스탈린 기갑·차량화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8–1940하리코프 코민테른 공장 당조직자, 구당위 제1서기
  • 1940–1941하리코프 주당위·시당위 제1서기
  • 1942–1943니즈니타길 시당위 제1서기, 중형기계제조 부인민위원
  • 1943–1945제40군·제38군 군사평의회 위원 (소장)
  • 1946–195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간부 담당 서기
  • 1950–1951오데사 주당위 제1서기
  • 1951–1953소련 국가보안성 간부 담당 차관
  • 1955–196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주유고슬라비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2–1985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육군대장)

엔베르 호자

Enver Hoxha
알바니아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908–1985 ○ 자연사

고립과 자력갱생을 국가 노선으로 만든 알바니아 지도자

소련과의 1961년 단교는 작은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적 단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알바니아 공산당과 대독일 점령 저항을 이끌어 전후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61년 소련과 단교하고, 뒤에는 중국과도 결별하며 독자적 스탈린주의 노선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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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85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국가 지도자
  • 1961소련과 외교 관계 단절
  • 1978중국과 결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올샨스키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Ольша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88 ○ 자연사

리센코 농생물학을 수호한 소련 농업과학 행정가

1964년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며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리센코 동지를 더러운 중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농학자·육종학자로, 목화 품종 개량 연구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한 후 소비에트 농업과학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0년간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부총재로 재직하다가 1960년 말 흐루쇼프에 의해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농업 위기 속에서 물러나 VASKhNIL 총재로 복귀했다. 트로핌 리센코의 가장 충실한 동료 중 한 명으로, 1964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리센코 비판에 맞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리센코를 '위대한 과학자'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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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1전연방육종유전연구소(VSGI) 기술자 → 목화부장 → 소장 대행, 오데사
  • 1941–1945로즈데스트벤스크 농업기술학교장 → 쿠이비셰프 농업대학 학장
  • 1945–1951VSGI 연구부소장, 오데사
  • 1951–1960VASKhNIL 부총재
  • 1960–1962소련 농업장관
  • 1962–1964VASKhNIL 총재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파톨리체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Патол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89 ○ 자연사

27년간 소련 대외무역을 지휘한, 열한 개 레닌 훈장의 보유자

1940년, 소련-핀란드 전쟁 실패 직후 소집된 중앙위원회 임시 전원회의에서 흐룰료프 장군이 31세의 파톌리체프를 스탈린에게 소개했다. 스탈린은 콤소몰 지휘를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 만남은 이후 말렌코프와의 대립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전시 탱코그라드를 조직하고 전후 벨라루스 공산당을 이끌었다. 1958년부터 27년간 대외무역장관으로 소련 석유·가스 수출과 서방 경제 데탕트를 지휘했으며, 11개 레닌 훈장의 유일한 보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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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1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1942–46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탱코그라드' 조직
  • 1946–47볼셰비키당 중앙위 서기
  • 1950–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6–58외무부 차관 · 제1차관
  • 1958–85대외무역장관 — 27년간 소련 수출입 총괄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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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74–89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 소련 유인우주계획 총괄
  • 1988RD-170 엔진 탑재 에네르기야-부란 발사 성공

바실리 필리포비치 마르겔로프

Василий Филиппович Марге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08–1990 ○ 자연사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 VDV를 중무장 타격군으로 변모시킨 사령관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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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제49근위소총사단장 (드네프르 도하, 헤르손 해방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8–1950제76근위공수사단장 (프스코프)
  • 1950–1954제37근위공수군단장 (극동)
  • 1954–1959소련 공수군(VDV) 사령관 (1차 재임)
  • 1959–1961VDV 제1부사령관 (강등)
  • 1961–1979VDV 사령관 (2차 재임, 전면적 현대화 주도)
  • 1979–1990국방부 감찰총감단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페도세예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с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90 ○ 자연사

소련 이념 장치의 철학 행정가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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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 1950–1954중앙위원회 감사관 · 고등당학교 변증법적 유물론 주임
  • 1954–1955『파르티나야 지즌』(당 생활) 주필
  • 1955–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장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2–1967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인문사회과학 담당)
  • 1967–1973중앙위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 1971–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재임)
  • 1961–1989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28년간)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프로미슬로프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Промыс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8–199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모스크바의 얼굴을 만든 23년 집권 시장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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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38건설 현장 감독, 글라브기드로에네르고스트로이 부서장
  • 1938–41모스크바 시당 기구 → 중공업인민위원부
  • 1941–45탱크공업인민위원부 → 국방공업건설총국
  • 1946–51모스크바 시당 → 모스크바 시 집행위 부의장
  • 1955–59글라브모스스트로이 국장 겸 시집행위 제1부의장
  • 1959–63RSFSR 건설위 의장 → RSFSR 부수상 겸 건설장관
  • 1963–8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사실상 시장)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투르코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Тур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08–1994 ○ 자연사

쿠즈네초프가 야로슬라블에 심은 인물, 사형 대신 15년형을 산 레닌그라드 사건 피고인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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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7유리 공장 노동자 →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 기술자·기획생산부장
  • 1937–1940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장
  • 1940–1944레닌그라드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당위 간부서기 → 제1서기
  • 1944–194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45–194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46–1949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49–1954레닌그라드 사건: 해임·체포·15년형 (MGB 구타로 허위 자백)
  • 1954–1956쿠스타나이 주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56–레닌그라드 주 계획위원회 부의장 → 연방급 개인연금 생활자

페트로 예피모비치 셸레스트

Пётр Ефимович Шелес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96 ↓ 해임 1972

우크라이나 문화투자로 밀려난 공화국 제1서기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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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4하르키우·첼랴빈스크·사라토프 당 간부, 키예프 항공공장장
  • 1954–1957키예프 주당위 제2서기
  • 1957–1962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63–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4–1973CPSU 중앙위 정치국(상무회) 위원
  • 1972–1973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 1974–1984모스크바 교외 항공공장 설계국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보이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й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97 ○ 자연사

GOST 체계와 ISO 9000의 기초를 닦은 표준화 관료

베리야가 항공산업을 쪼개려 하자 그는 버텼다. 산업은 지켰고, 자신은 좌천됐다.

모스크바 근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한 항공 엔지니어다. 전시에는 항공공장 주임기사와 공장장으로 전선 수리 임무를 수행했고, 1947년 항공공업 차관에 올랐으나 베리야의 항공산업 분할 구상에 반대했다가 좌천되어 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으로 옮겼다. 1963년부터 21년간 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을 맡아 GOST 표준 체계를 현대화하고 전연방 계측·품질관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1977~1979년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으로서 ISO 9000 시리즈의 착수를 권고해 오늘날 전 세계 170개국에서 사용되는 품질경영 표준의 단초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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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0모스크바 제39항공공장 기술자·작업장장
  • 1940–1942콤소몰스크-나-아무레 제130항공공장장
  • 1942–1943제156항공공장 주임기사
  • 1943–1944항공공업인민위원부 제17공군 대표, 야전 항공기 수리
  • 1944–1946사라토프 제292항공공장 주임기사 (Yak-3 생산)
  • 194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47–1963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
  • 1963–1984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
  • 1977–1979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 1984–1997바우만 MVTU 학과장, 연금 생활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м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98 ○ 자연사

매주 월요일 지도부 전화를 수확하던 정체기 영화 총책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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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9건설 노동자 → 고등국립문학과정 수료(3년)
  • 1929–1944신문 《스텝의 진리》(악튜빈스크), 《고리키 코뮌》 기자·부장·책임비서·부편집장
  • 1944–1946《프라우다》 고리키주 특파원
  • 1946–1949《고리키 코뮌》→《소비에트 벨로루시》 책임편집자
  • 1949–1955부쿠레슈티 발행 공산당 기관지 부주필
  • 1955–1963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부장 → 이념부 제1부부장
  • 1961–1986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63–1972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2–1983《소비에트 문화》 주필

앙리 롤탕기

Henri Rol-Tanguy

파리 봉기를 지휘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1944년 8월 21일, 그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라는 명령을 게시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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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탈보 금속공장 노동자,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 1936파리 지역 금속노동조합 CGT 서기
  • 1937–1938스페인 국제여단 제14여단 정치위원, 에브로 전투 참전
  • 1941–1942파리 지역 무장조직 책임자, FTP 창설 지도부
  • 1943파리 지역 FTP 재편, FFI 지역 참모부 합류
  • 1944파리 지역 FFI 사령관, 파리 봉기 지휘
  • 1945–1962프랑스 육군 중령, 전후 군사 보직
  • 1962–1987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보리스 바실리예비치 페트롭스키

Борис Васильевич Пет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8–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아래 15년간 소련 보건을 이끈 심장혈관외과의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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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모스크바주 포돌스크 구역병원 외과의
  • 1932–1937모스크바 종양학연구소 연구원 (P.A. 게르첸 지도)
  • 1939–1945핀란드 전선 및 대조국전쟁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
  • 1948–1956제2모스크바의대 일반외과학 교수; 크렘린병원 수석외과의 (1953–1965)
  • 1956–1965제1모스크바의대(세체노프) 병원외과학 주임
  • 1963–1988전연방외과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65–1980소련 보건장관
  • 1966–1981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코텔니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те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8–2005 ○ 자연사

표본화 정리를 발견하고 금성 레이더 탐사를 이끈 과학자-국가원수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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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MPEI 졸업, 통신연구소 엔지니어, MPEI 강사·연구실장
  • 1933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 발표
  • 1939–1942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 '소볼-P' 개발 주도
  • 1941–1944통신산업 개발자로 대전 지원
  • 1944–1980MPEI 정교수, 무선공학부 학장(1947–1953), OKB MPEI 소장(1948–1953)
  • 1954–1988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 연구소(IRE) 소장
  • 1970–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제1부총재)
  • 1973–1980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81–1992인테르코스모스 위원회 의장

보이보

薄一波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8–2007 ○ 자연사

초대 재정부장이자 「61인 반도 사건」의 당사자, 개혁기에 보수적 원로로 돌아온 인물

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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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재정부장
  • 1982–1992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

러이크 라슬로

Rajk László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9–1949 ✕ 처형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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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 1941–44헝가리 귀환 후 지하 저항운동, 당 중앙위원회 서기, 헝가리 전선 공동 지도
  • 1946.03–1948.08내무장관 — ÁVH(국가보안국) 창설, 초기 쇼재판·숙청 지휘
  • 1948.08–1949.05외무장관
  • 1949.09–10티토주의 간첩 혐의 쇼재판, 사형 선고 및 집행
  • 1956복권 및 10월 6일 국장 재매장, 10만 인파 운집 →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

게오르기 막시모비치 푸시킨

Георгий Максимович Пу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63 ○ 자연사

흐루쇼프에게 베를린 위험을 경고한 소련 외교관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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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외무인민위원부 제2서방부·중앙유럽부 근무
  • 1940–41주슬로바키아 전권대표·대사
  • 1942–44우루무치(중국) 총영사
  • 1944–45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
  • 1945–49주헝가리 공사, 1948년 대사로 승격
  • 1949–52주동독 공사·대사
  • 1952–53소련 외무차관
  • 1954–58주동독 대사 겸 소련 최고위원
  • 1958–59CPSU 중앙위 대외정보부장
  • 1959–63외무차관, 라오스 제네바 회의 수석대표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쿠체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уче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63 ○ 자연사

전후 복구에서 국가건설위까지 건설 행정을 총괄한 기술관료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마케옙카·하리코프·도네츠크의 공장들을 다시 세웠다. 흐루쇼프는 그에게 국가건설위원회를 맡기며 소련 전역의 건설 기준과 주택 공급을 일임했다.

전후 우크라이나와 우랄에서 산업시설 복구를 지휘한 소련 건설 행정의 기술관료. 1955년 국가건설위원회(Gosstroy) 초대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대규모 주택·산업 건설 계획을 총괄했으며,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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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로조바야 역 작업장 노동자·십장
  • 1929–1933하리코프 토목공학대학 학생
  • 1936–1939인두스트로이 트레스트 공장 건설 수석기사
  • 1939–1950우크라이나·우랄 지역 건설 트레스트 관리자
  • 1950–1952소련 기계제조 기업건설 차관
  • 1955–195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55–1961소련 각료회의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 1961–1963소련 건축·건설 아카데미 원장

우한

吴晗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9–1969 ○ 옥사

명사(明史) 연구자이자 베이징 부시장, 역사극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명대사를 연구한 중국의 역사학자로 1949년 이후 베이징시 부시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역사극 『해서파관』이 마오를 겨냥한 우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했고 그 여파로 펑전도 숙청되었다.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저장 출신으로 후스의 제자였던 명대사 연구자였고 1940년대 민주동맹의 활동가였다. 건국 후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문화·교육을 맡았다. 1961년 마오의 권유로 쓴 역사극 『해서파관』은 청렴한 관리 해서가 황제에게 파면되는 이야기였는데,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이를 펑더화이 실각을 옹호하는 「독초」라 비판한 글이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체포되어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고 아내와 딸도 박해로 죽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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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66베이징시 부시장

미하일 레온티예비치 밀

Михаил Леонтьевич Мил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70 ○ 뇌졸중

Mi-1부터 Mi-24까지: 세계 헬리콥터 역사를 다시 쓴 밀 설계국의 창립자

1941년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밀은 특수구조부 기록보관소를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년간 쌓아온 연구 자료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그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몰래 빼내 탈출 행렬에 실었다. 훗날 그 자료들은 소련 헬리콥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소련 헬리콥터 산업의 창시자. 이르쿠츠크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ЦАГИ에서 카모프의 조수로 오토자이로를 연구했고, 1947년 독자 설계국을 세워 Mi-1을 탄생시켰다. Mi-4, Mi-6, Mi-8, Mi-10, Mi-12, Mi-24를 연달아 개발하며 60개 세계기록을 수립했고, Mi-8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쌍발 헬리콥터가 되었다. 단일 로터 방식으로 카모프의 동축 반전 로터와 경쟁하며 소련 헬리콥터의 주류를 장악했고, 시코르스키의 아들로부터 중량물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 세 차례 레닌 훈장을 받고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Mi-24는 100개국 이상에서 운용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싸운 헬리콥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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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1톰스크→노보체르카스크에서 항공공학 전공, 카모프 초청으로 첫 오토자이로 실습
  • 1931–41ЦАГИ 특수구조부에서 오토자이로 А-7, А-12, А-15 개발
  • 1940–41제290호 회전익기 공장 부수석 설계자 (카모프 보좌)
  • 1941–43징집, 서부전선 오토자이로 정찰대대 복무; 전투기 안정성 개량
  • 1943–47ЦАГИ 제5연구소장, 헬리콥터 연구 주도, 박사학위 (1945)
  • 1947–64국가 헬리콥터 설계국 수석설계자 — Mi-1, Mi-4, Mi-6 탄생
  • 1964–70밀 설계국 총설계사 — Mi-8, Mi-10, Mi-12, Mi-24, 60개 세계기록

아담 라파츠키

Adam Rapacki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70 ○ 자연사

동서 긴장 속에서 협상 공간을 넓힌 외교가

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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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독립사회주의청년동맹 가입
  • 1939–1945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교육·정치 활동
  • 1947–1950폴란드 해운장관
  • 1950–1956고등교육·과학 및 고등교육 장관
  • 1956–1968폴란드 외무장관
  • 1964유럽안보회의 소집 제안
  • 19683월 사태 뒤 정치 활동에서 이탈
  • 1948–1968PZPR 정치국원(1954~56년 후보위원)
  • 1968.12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외무장관직에서 해임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코로부슈킨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орову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76 ○ 자연사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흐루쇼프에게 모자를 던졌다는 은행가

1963년 해임을 둘러싼 경위는 증언마다 엇갈린다. 측근들은 그가 술기운에 흐루쇼프에게 전화해 욕설을 들었다고 하고, 경호원의 증언은 다차 산책길의 대면 충돌에서 그가 모자를 벗어 던졌다고 전한다.

볼로그다현 로파리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7년제 학교를 마치고 1923~1929년 회계원으로, 1929~1930년 클럽 관리자와 촌소비에트 의장으로 일했으며, 1936년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1937년 당에 입당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들을 맡아 1953년 소련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고, 1959년 은행체계 개편과 1961년 10:1 화폐개혁을 이끌었다. 1963년 흐루쇼프와의 갈등 끝에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 탄압은 받지 않았고,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국가수입·산업금융 국장과 콜레기움 위원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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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 1936–1939레닌그라드 주·시 공동은행 선임검사관, 부행장, 행장
  • 1939–1940레닌그라드 시 재정국장
  •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 1950–1955소련 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 1953–1958소련 재무차관, 재무부 콜레기움 위원
  • 1958–1963소련 국가은행 총재(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 1963–1969브네슈토르그방크 평의회 의장, 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국장
  • 1966–1976러시아공화국 재무부 산업금융국장, 1969년 8월부터 콜레기움 위원
  • 19761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Александар Ранко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1909–1983 ○ 심장마비

코민포름 숙청을 지휘한 티토의 3인자

내무장관이던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이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티토·카르델리에 이은 제3의 권력자로 여겨졌다. 1944년 5월 파르티잔 보안기구 오즈나를 창설했고, 전후 내무장관 겸 국가보안국(우드바) 수장으로서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해 1949년 골리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에 코민포름주의자 수용소를 세웠다. 코소보에서는 1947~1966년이 '란코비치 시대'로 불릴 만큼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경 진압이 자행되었고, 보이보디나 헝가리계와 산자크 무슬림에 대한 소규모 탄압도 있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을 고수했으며, 1966년 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된 뒤 두브로브니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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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9–1935공산주의 활동으로 체포·투옥
  • 1941–1945파르티잔 최고사령부에서 복무, 1944년 OZNA 창설
  • 1946–1953유고슬라비아 내무장관 겸 UDBA 수장
  • 1948–1955코민포름 반대 숙청 총괄, 골리오토크 수용소 건설
  • 1963–1966유고슬라비아 부통령
  • 1966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 당에서 제명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사하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Саха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83 ○ 자연사

15년간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그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소련·러시아 대외정보 역사상 가장 긴 재임이었다. 1955년 6월 대행으로 시작해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했고 1971년 7월 후임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 기록은 그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문서적 핵심이다.

1909년 9월 3일 코스트로마주 갈리치 예즈드 볼쇼예 오조기노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83년 11월 12일 사망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닌그라드 조선소에서 용접공·선체 표시공으로 일하다 1930년 2월 당에 입당했고, 1939년 2월 국가보안기관에 들어가 레닌그라드 NKVD 수상부서를 거쳐 1940년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 신분으로 해외 정찰 활동을 했다. 전쟁 중 레닌그라드 NKVD/NKGB 제1(정찰)과장으로 정찰·파괴 공작조를 적 후방에 투입했고, 1946년부터 MGB 중앙기구와 루마니아 고문으로 근무했다. 1955년 6월 KGB 제1총국장 대행,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해 1971년 7월까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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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1발트 조선소 및 북부 조선소 용접공·선체 표시공
  • 1931–1934적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대학 야간 코무즈 졸업
  • 1934–1939콤소몰·당 정치활동가, 발트해운회사 당위원회 서기
  • 1939–1941NKVD 레닌그라드국 수상부서 근무, 해외 정찰 임무
  • 1941–1945NKVD/NKGB 레닌그라드국 제1(정찰)과장, 40여 개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
  • 1946–1952MGB 중앙기구, 스칸디나비아·발칸·중동 임무,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고문
  • 1952–1955KGB 제1총국 부국장(1954년부터)·제1부국장(1955년 8월부터)
  • 1955–1971KGB 제1총국장 대행(1955년 6월부터), 1956년 5월 총국장 취임, 1971년 7월까지 재임
  • 1971–1975KGB 의장 선임 고문
  • 1939–19411940년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 신분으로 7개월 넘게 해외 정찰 활동
  • 1941–1944레닌그라드 NKVD/NKGB 제1(정찰)과 부과장(1941년 8월), 과장(1942년 11월부터)

미하일 압크센티예비치 레세치코

Михаил Авксентьевич Лесеч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84 ○ 자연사

소련의 대외경제 통합을 주도한 18년차 부총리

그의 18년 부총리 재임 기간 동안 소련의 코메콘 블록 내 무역 비중은 절반을 넘어섰다.

모스크바 항공대학 출신으로 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을 거쳐 소련 최초 전자식 고속 계산기계 개발을 지휘, 1954년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1956년 계기제조·자동화부 초대 장관, 이후 우크라이나와 연방 고스플란에서 계획경제 실무를 쌓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1962~1977)를 지냈다. 흐루쇼프·코시긴·티호노프 3대 정부에 걸쳐 소련 블록 대외경제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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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헤르손 제2인터내셔널 공장 선반공
  • 1934–1942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주임기사
  • 1942–1946항공공업인민위원부 총국 부국장
  • 1948–1954모스크바 계산분석기계 공장장 겸 SKB-245 소장
  • 1954–1956기계제조·계기제조부 제1차관
  • 1956–1957계기제조·자동화부 장관
  • 1957–1958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 부의장 겸 장관
  • 1958–1962소련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겸 장관 · 대외경제위원장
  • 1962–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62–1977소련 코메콘 상주대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랴잔스키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Ряза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87 ○ 자연사

소련 우주로켓의 '라디오맨': 모든 로켓과 위성의 무선 시스템을 책임진 수석설계자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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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소련 최초 단파교신: 쇄빙선 크라신과 통신 성공
  • 1929–31니즈니노브고로드 무선연구소, 군용 무선국 개발
  • 1935–41오스테흐비우로: 무선조종 전차·항공기·어뢰정 개발
  • 1941–45페그마티트(P-2) 레이더 주임설계자 — 모스크바 방공, 스탈린상
  • 1946–54NII-885 수석설계자: R-1부터 R-7까지 탄도미사일 무선유도체계
  • 1957–65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달·금성·화성 탐사선 무선시스템, 레닌상
  • 1965–86NIIP(후일 RNII KP) 수석설계자 겸 과학지도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쇼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Шо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88 ○ 자연사

소련 전자산업을 창설하고 20년간 이끈 군수 전자공학의 설계자

쇼킨은 즐겨 말했다. "포드 사는 '포드' 자동차를 만든다. 그러니 MEP(전자공업부)는 '엘렉트로니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전자산업의 창설자로, 1961년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토대를 닦았다. 그가 구상한 젤레노그라드는 '소련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으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방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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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조선공업 분야 기술자, 공장장, 설계국장
  • 1938–1943국방공업인민위원부 → 조선공업인민위원부 주임기사
  • 1943–1949레이더위원회 공업부장 → 각료회의 제3위원회 부의장
  • 1949–1955통신장비공업 차관 → 무선기술공업 차관
  • 1955–1961무선기술공업 제1차관 →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제1부의장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85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Громы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공식 기록은 러시아인) 1909–1989 ○ 자연사

「미스터 니예트」, 마지막 수로 개혁가를 추천하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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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4630대의 워싱턴 주재 대사
  • 1944–45덤바턴오크스·얄타·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 실무
  • 1957–85외무장관 28년
  • 1962쿠바 위기의 협상 창구
  • 1970s데탕트 조약들의 서명자
  • 1985–88고르바초프 추천, 명목상 국가원수로 이동, 1988년 사임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골류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Боголю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92 ○ 자연사

동구권 최대 국제연구소를 이끈 이론물리학의 제도적 거인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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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키예프 대학 수리물리학 교수
  • 1947–1992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 이론물리부장
  • 1953–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6–1965JINR 이론물리연구실장
  • 1966–1973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이론물리연구소장
  • 1966–1988JINR 소장
  • 1983–1988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장
  • 1966–1992모스크바 대학 양자통계 및 장이론 학과장

리셴녠

李先念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9–1992 ○ 자연사

문화대혁명을 살아남은 재정 책임자, 4인방 체포에 가담하고 국가주석이 된 「팔대 원로」

중앙계획경제를 굳게 믿은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시장화를 막았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을 열렬히 주장했다.

후베이 목수 출신으로 제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서로군 궤멸 뒤 살아남았다. 항일전쟁기 후베이의 신4군 제5사단을 세웠고 국공내전 초기 중원 돌파를 이끌었다. 1954년부터 재정부장으로 22년간 경제 운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에서도 저우언라이 곁에서 살아남았다. 1976년 4인방 체포에 참여했고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 사이에서 천윈과 함께 계획경제 우선을 주장했다.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1989년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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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5재정부장
  • 1983–1988중화인민공화국 주석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Piotr Jaroszewicz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92 ✕ 피살 · 미해결

차관료적 성장 노선의 총리

1976년 가격 인상안은 노동자들의 봉기 뒤 하루 만에 철회되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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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초등학교 교사·학교장
  • 1943–1945소련 내 폴란드군 정치교육 장교
  • 1945–1952폴란드군 고급 지휘·정치교육 보직
  • 1952–1970폴란드 정부 부총리
  • 1954–1956광업부·석탄광업부 장관
  • 1956–1970상호경제원조회의 폴란드 대표·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70–1980폴란드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1–1992정계 은퇴, 1981년 계엄 뒤 internment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바르민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Бар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카튜샤에서 부란까지: 모든 소련 로켓의 발사대를 설계한 엔지니어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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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모스크바공대 졸업, 냉동·압축기 전공
  • 1935–36미국 방문, 오르조니키제 후원으로 냉장 기술 시찰
  • 1940–45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 BM-13 카튜샤 발사대 개발
  • 1946–57GSKB 스페츠마시 수석설계자: R-1, R-2, R-5M, R-7 발사대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 발사 — R-7 발사대가 우주개발의 관문이 되다
  • 1960s–1970sR-12·R-14·R-9A·UR-100 사일로, 프로톤 발사대, 달·금성 토양채취기
  • 1970s–1988에네르기야-부란 발사대 및 달 기지 즈베즈다(바르민그라드) 프로젝트
  • 1959–1993바우만 공대 '발사 로켓 복합체' 학과 창설·주임

콘스탄틴 빅토로비치 루사코프

Константин Викторович Рус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사회주의권 당 대 당 외교를 관장한 브레즈네프의 비서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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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의 기술자·현장소장
  • 1939–1946수산공업인민위원부에서 건설·기술 간부로 승진
  • 1946–1957수산공업 차관·제1차관·장관(1950–1952) 역임
  • 1958–1960주폴란드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2–1963주몽골 소련 대사
  • 1964–1972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 차장 → 제1차장 → 부장
  • 1972–1977브레즈네프 중앙위 서기장 보좌관
  • 1977–1986중앙위 서기 겸 사회주의국가 공산당 연락부장

수파누봉

ສຸພານຸວົງ
라오스 공산주의 라오스 라오스 1909–1995

파테트라오와 초대 국가주석

1949년 미국 외교관에게 라오스를 '계급 없는 불교 국가'라 했던 왕자가, 뒷날 '붉은 왕자'로 불리는 공산 라오스의 초대 국가주석이 됐다.

라오스 왕족 출신의 혁명 지도자로 파테트라오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연립정부와 민족화해 과정에 참여했으며 1975년 인민민주공화국의 초대 국가주석이 됐다. 당과 정부를 이끈 카이손 폼비한과 국가 내 역할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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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라오이사라 정부 외교장관·라오스 해방군 총사령관
  • 1950라오스자유전선(파테트라오) 창립·의장
  • 1956라오스애국전선(네오라오학삿) 의장
  • 1957–1958계획·재건·도시개발 장관
  • 1962–1963부총리 겸 경제계획 장관
  • 1974국가정치협의회 의장
  • 1975–1991라오인민민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1986년부터 포우미 봉비칫이 대행)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츠케비치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цке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98 ○ 자연사

처녀지 이후 농정을 맡은 농업장관

1955년 아이오와 농장 시찰, 더위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장관이 현지식으로 응수했다: "그래도 옥수수엔 아주 좋은 날씨."

우크라이나 출신 축산기술자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장관을 두 차례 맡았다. 처녀지 개간을 주관했으나 이후 현장으로 좌천되었고, 복권 후 1972년 미국과의 대규모 곡물 거래를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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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0, 1965–1973농업장관 · 처녀지 이후 농정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롭스키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9–1999 ○ 자연사

체코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반대한 지상군 총사령관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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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328소총사단장으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 바르샤바 해방
  • 1952–1955북카프카스 군관구 제6소총군단장
  • 1955–1958자카프카스 군관구 제7근위군 사령관
  • 1961–1963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63–1967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67–1980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68년 다뉴브 작전 지휘
  • 1979아프가니스탄 사절단 파견, 소련군 파병 반대 보고서 제출
  • 1980–1992국방부 총감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표트르 이바노비치 이바슈틴

Пётр Иванович Ивашу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2002 ○ 자연사

24년간 GRU를 이끈 KGB 출신 군사첩보 수장

1963년 3월 18일, KGB 대장 이바슈틴은 비류조프 원수로부터 GRU 간부들에게 새 국장으로 소개되었다. 펜콥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온 KGB 요원 —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24년을 더 있었다.

항공 조종사로 출발해 NKVD 방첩대로 옮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 SMERSH 방첩국장을 맡았다. 1956년 KGB 제1부의장이 되었고 1961년 11월 KGB 의장 대행을 지냈다. 1963년 펜콥스키 배신 사건 이후 GRU 국장으로 전격 기용되어 24년간 재임하며 실시간 위협경보 지휘소, 쿠바 루르데스 기술첩보 기지, 우주정찰 부서를 구축했다. 냉전기 소련 군사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1985년 영웅소비에트연방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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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9항공학교 졸업 → 조종사 →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 NKVD 전출
  • 1939–41NKVD 특별과 근무 (제23소총군단),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3NKVD 특별과 부과장 (자캅카스·크림·북캅카스 전선군)
  • 1943–45SMERSH 방첩국장 (남서부전선 → 제3우크라이나전선)
  • 1945–52방첩국장 (남부군집단 → 독일주둔군 →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52–54우크라이나 MGB 장관 → MVD 차관 → MVD 제3총국 부국장
  • 1954–63KGB 부의장 → 제1부의장 (1961.11 의장 대행)
  • 1963–87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24년간 군사첩보 총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스미르튜코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миртю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2004 ○ 자연사

25년간 소비에트 정부의 제도적 기억이 된, 폴리트뷰로 밖의 실세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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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7농촌소비에트 서기 · 협동조합 서기 · 클럽장
  • 1927–31모스크바국립대 소비에트법학부
  • 1930–41인민위원회의 기구: 선임보좌관·컨설턴트·부문장
  • 1941–46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 · 미코얀의 GKO 보급 보좌관
  • 1946–53각료회의 사무국 부국장
  • 1953–64각료회의 부업무관리국장
  • 1964–89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89–90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고문

파벨 야코블레비치 메시크

Павел Яковлевич Меш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우크라이나라는 기록과 대립) 1910–1953 ✕ 처형

베리야 측근이자 스탈린 대숙청의 집행자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실시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22킬로톤)에 참가했다.

소련의 국가보안 간부이자 중장으로, 스탈린 대숙청을 실제로 조직한 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베리야 측근이었다. 코노토프의 기계공장에서 자물쇠공으로 일하다 1931년 사마라 에너지 연구소에 들어갔고, 1932년 3월 당 중앙 결정으로 국가보안 기관에 배치되어 OGPU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1년 2월 NKVD 분리 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이 되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원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을 조직했다. 1953년 3월 베리야에 의해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진압을 주장한 주 내무부장들을 해임했고, 6월 30일 키예프에서 체포되어 12월 23일 처형됐으며 2000년 재활이 거부되고 형량이 징역 25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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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NKVD 수사부장, 경제총국 부국장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NKVD 경제국장
  • 1943–1945스메르시 부국장
  • 1945–1953제1총국 부국장(원폭 계획 보안·방첩)
  • 1953우크라이나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자샤트코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Засядь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63 ○ 자연사

돈바스 탄갱에서 크렘린 경제계획 정상까지 오른 광부의 아들

스탈린이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측근들이 자샤트코의 음주벽을 문제 삼자 스탈린은 그를 불러 보드카 세 잔을 권했다. 자샤트코는 두 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는 정중히 사양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샤트코는 분수를 안다!" 임명은 결정되었다.

소련의 탄광 기술자이자 경제 관료. 돈바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광산기계공에서 시작해 38세에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고, 전후 돈바스 탄광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흐루쇼프 시기에는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고스플란 체계와 나란히 중앙계획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다.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은 중공업 행정의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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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5루간스크·고를롭카·노보샤흐틴스크에서 견습공과 기계공으로 일하며 돈바스 탄광에 입문, 도네츠크 광산대학 졸업
  • 1935–193910bis 탄광에서 기사장·주임기사·광장으로 승진하며 현장 경영 두각
  • 1939–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에서 '스탈린우골'·'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 콤비나트 장으로 전시 탄광 운영
  • 1943–1948석탄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돈바스 탄광 복구 총괄, 5년 만에 전쟁 전 생산량 회복 달성
  • 1948–1955소련 석탄공업장관 ― 전후 석탄 산업 전반을 지휘하며 거대 신규 탄광 건설과 기계화 추진
  • 1955–1957체랴빈스크우골 콤비나트 장, 우크라이나 석탄공업장관으로 복귀해 생산 반등 주도
  • 1957–1958국가계획위원회 연료공업 부문장(장관급) 겸 부의장
  •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 ― 중앙계획의 최고위 조정자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쿠라쇼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раш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65 ○ 자연사

WHO 총회 의장을 지낸 흐루쇼프기 보건장관

1962년 5월 24일, 제네바 프레니 구릉. 쿠라쇼프는 WHO 신청사 기공식에서 흙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세워질 건물은 모든 인류가 언젠가 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자 초점이 될 것입니다」

철도 전철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 31세에 카잔 의학원 원장을 맡았고, 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을 거쳐 1959년 소련 보건장관에 올랐다. 흐루쇼프 집권기 소비에트 보건의료 체계를 확장하고 의학교육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기 과학잡지 《즈도로비예》(건강)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62년 제네바에서 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WHO 본부 신축 기공식에서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재임기 소련은 WHO 두창 박멸 계획을 적극 후원했으며, 1959–1960년 모스크바 두창 유입 사태 당시 KGB와 협력한 신속한 봉쇄·접종 작전으로 질병 확산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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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카잔 의대 졸업, 정신과 전공
  • 1935–1941카잔 정신병원 주임의사, 타타르공화국 지역정신과장
  • 1941–1942카잔 의학원 원장
  • 1942–1953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
  • 1953–1955소련 보건차관
  • 1955–1959러시아공화국 보건장관
  • 1959–1965소련 보건장관
  • 1962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루다코프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Руд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공식 인사록 기록)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당 인물이라는 서술 병존 1910–1966 ○ 자연사

흐루쇼프 산업분할 서기국의 중공업 담당 서기

1962년 11월 19~23일 CPSU 중앙위 전원회의가 당 조직을 산업계열과 농업계열로 분할했고, 루다코프는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어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다.

1910년 9월 11일(구력 8월 29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폴로히(현재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서 태어나 1966년 7월 10일 모스크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1925년 콤소몰에, 1931년 당에 입당했고 1927년부터 도네츠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 1937년 레닌그라드 광산연구소를 졸업했다. 1954년 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이 되었고 1962년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며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64년 11월 분할 개혁이 폐기된 뒤에도 사망 시까지 서기직과 중공업부장직을 유지했다. 공식 인사록과 러시아 측 사료는 그를 러시아인으로 적는 한편, 우크라이나 위키백과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산당 인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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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6도네츠 탄광 광부
  • 1936–1938우크라이나 콤소몰 기구에서 활동
  • 1938–194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원, 석탄공업부 차장·부장(1938년 7월부터 흐루쇼프 제1서기 보좌)
  • 1942–1944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44–195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보, 석탄공업부장, 중공업부장, 당·노조·콤소몰기관부장
  • 1954–1962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62–1966CPSU 중앙위 서기 (산업 담당)
  • 1941–1942남서전선 군사평의회 위임 대표
  • 1962–1964CPSU 중앙위 산업·건설 담당 뷰로 의장

알렉산드르 트리포노비치 트바르돕스키

Александр Трифонович Твардовский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1 ○ 자연사

해빙기 문학의 문을 연 『신세계』 편집장이자 『바실리 죠르킨』의 국민 시인

솔제니친의 부고: 「시인을 죽이는 방법은 많다. 트바르돕스키에게 선택된 방법은 그의 자식이자 열정이던 잡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섯 달 뒤, 그는 임종의 자리로 들어갔다.」

『바실리 죠르킨』으로 전시 국민 시인이 된 작가. 『신세계』 편집장으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판해 해빙기 문학의 상징이 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 축출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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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첫 장시 『사회주의로의 길』 발표
  • 1936장시 『무라비아의 나라』 발표, 스탈린상 2급 수상 (1941)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에서 군사특파원 복무
  • 1942–1945『바실리 죠르킨』 연재 — 스탈린상 1급 (1946)
  • 1950–1954『신세계』 편집장 첫 임기 — 해빙 논쟁으로 해임
  • 1958–1970『신세계』 편집장 두 번째 임기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출판
  • 1961장시 『저 멀리 — 저 멀리』로 레닌상 수상; CPSU 중앙위원 후보
  • 1970『신세계』 편집장에서 강제 퇴진; 이듬해 사망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체스노코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Чесно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10–1973 ○ 실각 1953

스탈린이 마지막으로 정치국에 올린 철학자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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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43스베르들롭스크 대학 교수·학과장
  • 1943–1947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선전 담당 부장·비서
  • 1947–1948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부 부장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부소장
  • 1949–1952《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철학역사부장·《꼼무니스트》 편집장
  • 1953–1957고리키 주당위 부장·비서
  • 1957–1959국가방송·텔레비전 위원회 의장
  • 1959–1967모스크바 대학 역사적 유물론 강좌 주임
  • 1967–1970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부총장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푸르체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Фурц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4 ○ 자연사

해빙과 통제 사이의 장기 문화장관

1957년 주코프가 흐루쇼프로부터 국방장관 해임을 통보받고 물었다. "누구로 교체합니까?" "말리놉스키." 주코프가 답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푸르체바인 줄 알았어." 소련 최고 지도부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을 향한 동시대 남성 권력의 시선을 압축한 장면이다.

소련 공산당 상임간부회(정치국)에 진입한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다.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지지했고, 1960년부터 1974년까지 문화장관으로 해빙기 문화를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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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4문화장관

올가 표도로브나 베르골츠

Ольга Фёдоровна Берггольц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5 ○ 병사

봉쇄된 도시의 라디오 목소리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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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첫 시 「레닌」 발표
  • 1930레닌그라드대학 졸업, 첫 책 『겨울-여름-앵무새』 출간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38–1939체포·7개월 구금 후 석방 및 복권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 라디오 방송
  • 1942『2월 일기』, 『레닌그라드 시』 발표
  • 1951『페르보로시스크』로 스탈린상 수상
  • 1959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 발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 1910–1979 ○ 대장암

노동자 자주관리의 수석 이론가이자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료

노동자 정당들이 의회주의에 빠져 익사한다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티토주의의 핵심 이론가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주요 설계자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는 질라스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 환상'을 신랄히 비판했으며, 전후 혁명적 기회를 놓친 서유럽 공산당의 기회주의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에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구별되는 분권적 자주관리 모델을 이론화했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헌법의 초안을 주도하며 공화국 간 자율성을 대폭 확대했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인물로 남았으며, 그의 헌법 사상은 연방 해체 후에도 후속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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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슬로베니아 공산당 지도부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및 파르티잔 지도부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수상
  • 1948–1953유고슬라비아 외무장관
  • 1963–1967유고슬라비아 연방의회 의장
  • 1974–1979유고슬라비아 연방 간부회의 위원
  • 1950년대–1970년대노동자 자주관리 이론 수립

덩화

邓华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인 1910–1980 ○ 자연사

전쟁의 흐름을 읽은 야전 지휘관

그는 아내에게 “장군은 전장에서 죽는 법”이라고 남기고 북쪽으로 떠났다.

덩화는 중국공산당 혁명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민해방군 장군이었다. 1950년에는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훈련을 맡아 압록강을 건널 부대를 실제로 준비했고, 조선전쟁에서 펑더화이의 제1부사령관으로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 1952년부터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하며 전선의 작전과 정전 국면을 이끌었다. 훗날 펑더화이와의 연좌로 실각했지만 1980년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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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국공산당 입당
  • 1928–1937홍군 지휘관, 장정 참가
  • 1937–1945팔로군 제115사단 및 진차지 군구 지휘관
  • 1947–1949동북야전군 제7종대 사령관, 제15병단 사령관
  • 1950동북변방군 제13병단 사령관
  • 1950–1952중국인민지원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정치委员
  • 1952–1954중국인민지원군 대리 사령관 겸 정치委员, 사령관
  • 1955–1959인민해방군 상장, 선양군구 사령관

표트르 표도로비치 크리보노스

Пётр Фёдорович Кривонос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10–1980 ○ 자연사

철도에서 생산성 혁신을 조직한 기관사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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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슬라뱐스크 기관차고 정비공·기계공 학교 학생
  • 1929–1933남부도네츠 철도 보조기관사·기관사
  • 1935화물열차 운전 혁신, 철도 부문 생산성 운동의 선구자
  • 1937–1938슬라뱐스크 기관차고장
  • 1938–1941남부도네츠 철도 및 북도네츠 철도장
  • 1941–1943전시 철도 수송·건설 전권대표, 톰스크 철도장
  • 1943–1953북도네츠 철도장, 전후 철도 복구 책임자
  • 1953–1980우크라이나 남서 철도장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세르빈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Сер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81 ○ 자연사

23년간 소련 군수공업 전체를 총괄한 당의 '이반 뇌제'

방위산업부장 회의에서 어떤 장관이 계획 지연을 설명하려 하자, 세르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미사일이다.'

소련 군산복합체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당 기구의 수장이었다. 1958년부터 1981년 사망까지 CPSU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장으로 재임하며 모든 미사일·항공·핵·우주 개발 프로그램의 당적 감독을 관장했고, 군수공업위원회(VPK)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서 각 방위산업 부처 간 조정과 병기 생산 계획 집행을 통제했다. 흐루쇼프 시기 전략로켓군 창설과 우주 경쟁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고,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이 미국과 전략적 동등성을 달성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실무에서 떠받쳤다. 다섯 개의 레닌 훈장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이반 뇌제(Грозный Иван)'라는 별명은 방위산업계 전체가 그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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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VKP(b) 입당
  • 1935모스크바국립대학교 졸업, 기계수학연구소 대학원
  • 1936–1941공장 기술자, 부서 부장, VKP(b) 당조직자, 포돌스크 시당위 비서
  • 1941–1942공장 분소장(바르나울), 바르나울 시당위원
  • 1942–1946CPSU 중앙위 간부관리부 지도원·섹터장·부부장
  • 1946–1948CPSU 중앙위 간부관리부 무기공업과장
  • 1948–1950CPSU 중앙위 기계제작부 부부장
  • 1950–1952CPSU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 1952–1954CPSU 중앙위 산업운수부 부부장·섹터장
  • 1954–1958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 제1부부장
  • 1958–1981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빅토르 야코블레비치 리트비노프

Виктор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83 ○ 자연사

33년간 소련 항공·우주 양산을 지휘한 공장장

“쿠이비셰프에서 우리는 흐름식 생산 조직화에 주력했지만, 컨베이어 원리를 바꾸었다. 고정 조립에서는 항공기가 아니라 작업대 자체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 Il-2 공장의 컨베이어 혁신을 설명하며.

소련 항공산업의 핵심 조직자. 타간로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연구소(MAI)를 졸업하고 제1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44년 공장장이 되었다. 전시에는 일류신 Il-2 슈투르모비크의 컨베이어 대량생산 체계를 확립했고, 종전 후 MiG-9·MiG-15 제트전투기, Tu-16 폭격기, Tu-104 여객기를 차례로 양산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과 보스토크 로켓 생산을 조직해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기술적으로 떠받쳤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일반기계공업성 차관으로서 미사일·우주산업 행정을 총괄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두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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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제1항공공장 기술자
  • 1937제1항공공장 조립공장 기술국장
  • 1938제1항공공장 수석기사 대리
  • 1941제1항공공장 수석기사
  • 1944제1항공공장장 (쿠이비셰프)
  • 1962쿠이비셰프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소련 일반기계공업성 차관
  • 1973연금 퇴직

니콜라이 아니시모비치 셸로코프

Николай Анисимович Щёло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84 ✕ 자살

16년 MVD 수장, 브레즈네프 경찰국가의 설계사

1971년, 솔제니친 추방을 논의하는 폴리트뷰로에 「솔제니친 문제에 관하여」라는 메모를 보내 『암 병동』 출판과 모스크바 아파트 제공을 제안했다. 기각됐지만 KGB도 아니고 내무장관이 반체제 작가를 위해 움직인 장면은 브레즈네프기에 둘도 없다.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르파트전 동지로 소비에트 사상 최장 16년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경찰관 봉급을 대폭 올리고 전용 주택 10% 할당, 신규 경찰학교와 소비에트 최초의 내무아카데미를 세워 밑바닥 직업이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끌어올렸다.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넵스카야와 교류하고 솔제니친 추방을 막으려 폴리트뷰로에 탄원서를 냈으며, 니콜라이 2세 유해 수색을 처음 지시한 소비에트 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안드로포프의 후계 구도 속에서 부패 혐의로 모든 직위와 훈장을 박탈당하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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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39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 당위 제1서기
  • 1939–4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시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 브레즈네프와 인연 시작
  • 1941–45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 정치위원 → 218사단·28군단 정치부장, 대령 종전
  • 1951–65몰다비아 각료회의 제1부의장 → 몰다비아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66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6–82소련 내무장관(1968년까지 공공질서보호장관) — 16년 재임, 대장 진급
  • 1982–84국방부 총감찰단 전출 → 부패 혐의로 중앙위 제명·계급 박탈·훈장 몰수

파벨 표도로비치 바티츠키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Бат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84 ○ 자연사

소련 방공군을 건설한 원수, 베리야를 직접 처형한 사령관

베리야의 눈을 가리려던 헌병을 제지하며 바티츠키가 말했다. '왜 가리나? 보게 놔둬!'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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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254소총사단장, 데먄스크 전역 방어전
  • 1943–194473소총군단장, 드네프르 도하·체르카시 해방·코르순-셰우첸콥스키 작전
  • 1944–1945128소총군단장, 벨라루스·동프로이센·베를린·프라하 공세
  • 1950–1953공군 주참모장·공군 부총사령관, 베리야 체포·처형 참여
  • 1954–196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65–1966소련군 참모총장 제1차장
  • 1966–1978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군 사령관
  • 1978–1984국방부 감찰총감단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고르시코프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Гор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88 ○ 자연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키운 29년의 총사령관, 『국가의 해양력』 저자

「해군은 평시에도 국가 정책의 직접적 도구이며, 바다에서의 군사적 주둔 자체가 정치적 압력의 수단이다」 — 『국가의 해양력』, 1976

연안방어 함대를 대양 원자력 함대로 탈바꿈시킨 해군 원수. 29년간 총사령관으로 핵잠수함 중심의 대양함대를 구축, 소련에 전 지구적 해군력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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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M.V. 프룬제 해군학교 졸업, 구축함 '프룬제' 항해사로 흑해함대 배치
  • 1937–1938태평양함대 구축함 여단장, 하산호 전투 참전
  • 1941–1944흑해함대 순양함여단장 → 아조프 소함대 사령관 → 도나우 소함대 사령관, 오데사·노보로시스크 방어 및 다수 상륙작전 지휘
  • 1948–1955흑해함대 참모장 → 흑해함대 사령관
  • 1955–1956소련 해군 제1부총사령관
  • 1956–1985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원자력잠수함 함대와 대양작전능력 구축
  • 1976『국가의 해양력』 출간, 해군의 독자적 전략이론 제시

블라디미르 아파나시예비치 카사토노프

Владимир Афанасьевич Касат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89 ○ 자연사

발트·흑해·북방 세 함대를 지휘한 해군 원수, 소련 대양함대의 건설자

1963년 9월 29일, 카사토노프가 승선한 원자력잠수함 K-181이 북극점 빙원을 뚫고 부상했다. 소련 해군 사상 최초로 지구 최북단에 잠수함을 띄운 순간이었다.

잠수함 장교로 출발하여 소련 4대 함대 중 3개를 차례로 지휘한 해군 원수. 북방함대 사령관 시절 소련 원자력잠수함의 첫 북극점 부상(1963년)을 직접 지휘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북방함대의 전력을 확장했다. 이후 10년간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서 고르시코프의 대양함대 건설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으며, 아들 이고르와 손자 블라디미르로 이어지는 3대 해군 제독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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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M.V. 프룬제 해군학교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 '볼셰비크' 당직사관·항해사
  • 1932–1939태평양함대 잠수함 부장 → Shch-112 함장 → L-12 함장 → 제12잠수함사단장
  • 1941해군참모대학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교육대대 참모장으로 전쟁 발발, 탈린·한코·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41–1945해군 주참모부 작전국 근무, 태평양함대 전투훈련 지도, 얄타회담 해군 실무단 참가
  • 1949–1954제5함대(태평양) 참모장 → 태평양함대 제1부사령관
  • 1954–1955제8함대(북발트) 사령관
  • 1955–1962흑해함대 사령관, 1961년 알바니아 주둔 소련 해군 철수 작전 지휘
  • 1962–1964북방함대 사령관, 원자력잠수함 북극점 부상 작전(1963) 및 대잠항공미사일 '시크발' 훈련 지휘
  • 1964–1974소련 해군 제1부총사령관 겸 군사평의회 위원, 대양 원자력미사일함대 건설 주도
  • 1974–1989국방부 총감찰원 군사고문, 『발트함대사』 등 해군사 저술 참여

게오르기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Георгий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0–1991 ✕ 자살

브레즈네프의 18년 당 살림꾼, '당의 금' 지기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몇 주 후, 80세의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그라나트니 거리 자택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다.

게오르기 파블로프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리국장을 지내며 당 중앙기구의 물적·행정적 기반을 총괄한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학교에서 브레즈네프보다 한 학년 아래로 함께 수학했으며, 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집권 직후 관리국장에 발탁되었다. 당의 재정·건설·출판·요양 시설을 장악하고 1980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했으며, 후임 니콜라이 크루치나도 한 달 앞서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여 '당의 금'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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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부설 공장학교 교사, 금속공업학교 재학
  • 1939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0–1941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지도원 → 금속공업부장
  • 1941–1943오르스크 피난, 시당 위원회 근무
  • 1943–1947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47–1949중앙위 간부관리국 감찰관 → 당·노조·콤소몰 기관부 지도원
  • 1949–1950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50–1951첼랴빈스크 주당 제2서기 (부친의 점령기 경력 문제로 해임)
  • 1951–1957코스트로마 주 집행위 부의장 → 주당 서기 →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 1957–1963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
  • 1961–1971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3–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
  • 1965–1983중앙위원회 관리국장(Управляющий делами ЦК КПСС)
  • 1971–1986중앙위원회 위원
  • 1980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베니아민 엠마누일로비치 딤시츠

Вениамин Эммануилович Дымши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93 ○ 자연사

23년간 소련 부총리를 지낸 유대인 건설기술관료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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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마그니토스트로이 트레스트 관리자
  • 1946–1950자포로시스트로이 트레스트 관리자
  • 1950–1957중공업·야금화학 건설 차관
  • 1957–1959인도 빌라이 제철소 건설 수석기사
  • 1959–1962고스플란 자본건설국장 → 제1부의장
  • 1962고스플란 의장 (7월–11월)
  • 1962–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62–1965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76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의장

겐나디 이바노비치 보로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94 ↓ 정치국 퇴진 1973

브레즈네프에게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러시아 공화국 수상

«보로노프는 무뚝뚝한 사내였고, 브레즈네프의 면전에서도 생각하는 바를 모두 말했다.» — 미하일 스미르튜코프, 소련 각료회의 사무국장

전기기사 출신으로 러시아 공화국 수상과 정치국원까지 오른 실무형 당료. 코시긴 개혁을 지지하고 농업 자율작업조 '즈베노'를 주창했으나 브레즈네프에게 막혀 1973년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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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37전기기사·작업반장으로 노동, 톰스크 공업대학 졸업
  • 1937–48프로코피옙스크·치타에서 당 선전·조직 책임자
  • 1948–55치타 주당위 제1서기
  • 1955–57소련 농업부 차관
  • 1957–61오렌부르크(치칼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61–73정치국(간사국) 위원: 1961년 후보, 1961–73년 정위원
  • 1962–71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수상)
  • 1971–73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3농업 개혁안('즈베노')이 브레즈네프에게 거부되어 정치국에서 퇴진

이오시프 이오시포비치 쿠지민

Иосиф Иосифович Кузь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96 ○ 자연사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을 집행한 계획가

1957년 12월, 쿠지민은 전국 소브나르호스 의장들을 모스크바로 처음 소집했다. 그는 '공업의 대외시장 지향 개선'을 요구하며 1958년 2억 500만 루블 무역흑자 목표를 내걸었다.

전기공학자 출신 소련 계획가. 1957년 고스플란 의장으로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중앙부처 폐지와 지역경제회의 체제 전환)을 주도했으나, 개혁 혼선 속에 1959년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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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모스크바 투광기 공장 기술부장, 당위원회 서기
  • 1939–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책임통제관, 부의장
  • 1952–1957CPSU 중앙위 산업운수부·기계제조부 부장
  • 1957–1959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제1부총리 겸 부총리
  • 1959–1960국가과학경제회의 의장 겸 소련 장관
  • 1960–1963주스위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마르티노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Марты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98 ○ 자연사

군수에서 물자공급까지, 계획경제의 동맥을 관리한 기술관료

1957년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수십 명의 연방 차관들이 지방으로 밀려났다. 마르티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슈켄트로 보내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던 발령은 아니었지만, 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련 경제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탄약 부인민위원으로 군수 공급을 총괄했고, 1965년부터 20년간 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에서 근무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 유통을 실제로 작동시킨 인물이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장에서 시작해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1976~1985)까지 오르며 50년간 소련 산업의 물적 토대를 떠받친 실무형 기술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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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기관조수 → 전기기사
  • 1929–1933항공기 공장 전기기계공·기술자·에너지부장, 모스크바
  • 1933–1934예이스크 해군비행학교 생도
  • 1934–1939병기공장 에너지부장 → 주임기사 → 부공장장, 타타르
  • 1939–1941툴라 병기공장장
  • 1941–1946소련 탄약 부인민위원
  • 1946–1953농업기계제조 차관 → 제1차관
  • 1953–1955기계제조성 콜레기야 위원 →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성 동원국장
  • 1955–1957트랙터·농업기계제조 차관
  • 1957–1960타슈켄트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의장
  • 1960–1962우즈베크 SSR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2–1964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 공업·건설 지도국 의장
  • 1964–1965소련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겸 소련 장관
  • 1965–1976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 제1부의장
  • 1976–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Фур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0–1998 ○ 자연사

원자로 이론과 교육을 잇댄 핵 프로젝트 물리학자

“빠르게, 빈틈없이, 서두르지 않으면서 서둘렀다.”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는 이론물리학과 원자로 연구를 오가며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계산과 조직을 맡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두보프스키, 포브즈네르와 함께 F-1에서 플루토늄이 축적되는 양을 계산했고, 흑연과 우라늄의 선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A-1의 발진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과학적으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를 장기간 운영해 원자력 국가의 연구 인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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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조교·부교수
  • 1938–194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이론물리학과장 대행
  • 1941–1944붉은군대 정치장교·포병 배터리 commissar
  • 1944–1947제2연구소 이론 부문 선임연구원·부문장
  • 1947–1951콤비나트 817 A-1 원자로 과학 책임자
  • 1951–1954쿠르차토프의 우라늄·흑연 원자로 부책임자
  • 1954–198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 학장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99 ○ 자연사

소련 교육을 18년간 이끈 과학자-장관

1941년 10월 자원입대한 화학자 프로코피예프는 해군 소방국에서 적의 소이무기에 대응하는 화학방어 및 독가스 제독 교재를 직접 집필해 전선의 소방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모스크바대학에 천연화합물화학과를 창설하고 12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핵산화학의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1966년 신설된 연방 교육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1984년까지 18년간 소련 교육을 총괄한 국가행정가다. 그의 재임기는 전면 중등교육으로의 이행기로, 차별화된 과학교육 도입과 교육과정 개혁을 진두지휘했으며,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1948~1952)를 거쳐 고등·중등전문교육 차관으로 행정 경력을 쌓았고, 장관 퇴임 후에도 모스크바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며 소련 과학계와 교육계를 잇는 독특한 경력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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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부 학사
  • 1937–1940모스크바대학 화학연구소 대학원, 화학후보학위 취득
  • 1940–1941모스크바대학 화학연구소 부소장
  • 1941–1946해군 소방국 복무, 적십자훈장·조국전쟁훈장 수훈
  • 1948–1952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
  • 1959–1966소련 고등·중등전문교육부 제1차관
  • 1966러시아공화국 교육장관 (5~12월)
  • 1966–1984소련 교육장관 (초대 연방 교육장관)
  • 1966–1999모스크바대학 천연화합물화학과 교수·주임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네포로즈니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Непорожн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99 ○ 자연사

통합에너지시스템을 만든 최장수 에너지 장관

미국 방문 중 닉슨 대통령을 만난 네포로즈니는 지역 전력망을 연결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제 미국의 주요 지역들은 500kV와 750kV 송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러시아 위키백과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수력 기술자가 된 네포로즈니는, 1962년부터 23년간 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들과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총괄했다. 브라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사야노-슈셴스카야 등 시베리아의 거대 댐들과 볼가 강 cascade, 중앙아시아의 고압력 댐들을 동시에 추진했고, 소련 전역에 원전을 건설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통합에너지시스템(ЕЭС)을 구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의 발전 용량은 8,200만 kW에서 3억 1,500만 kW로 거의 네 배 성장했다. 레닌상 수상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2000년 사야노-슈셴스카야 수력발전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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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3중앙아시아 수자원·관개 및 수력 건설 현장에서 기술자로 활동
  • 1933–1935발트 해군 복무
  • 1935–1940레닌그라드 Гидропроект, 치르치크ГЭС 건설, 중공업인민위원부 수력건설총국 근무
  • 1940–1954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카홉카 수력발전소 건설에서 수석기술자 역임
  • 1954–1959우크라이나 SSR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 1959–1962소련 발전소건설부 제1차관
  • 1962–1985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
  • 1985–1999은퇴 후 에너지 분야 베테랑 협의회 지도

거스 홀

Gus Hall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핀란드계 1910–2000 ○ 당뇨 합병증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핀란드계 노동운동가이자 네 차례 대선 후보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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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미국 공산당 입당, 청년공산주의동맹 조직가
  • 1931–1933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5–1937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SWOC) 창립 참여, '리틀 스틸' 파업 주도
  • 1939클리블랜드 CPUSA 지도자
  • 1942–1946미 해군 기계병 복무 (괌)
  • 1948–1957스미스법 기소, 리븐워스 연방교도소에서 5년 이상 복역
  • 1959–2000CPUSA 서기장·의장
  • 1972–1984CPUSA 대통령 후보 (4회 출마)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벨로보로도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0–2003 ○ 자연사

쿠바에서 소련 핵무기를 지휘하고 30년 뒤 그 보고서를 남긴 12총국 부대장

「내 오랜 군 복무 중 가장 위험하고 긴장된 시기는 대조국전쟁 시기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몇 달이었다」

니콜라이 벨로보로도프는 1941년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항공부대에서 기술장교로 복무했으며, 대조국전쟁에 참전했다. 1958년부터 12총국 산하 중앙 핵무기 저장기지의 책임자로 근무했고, 1962년 「아나디리」 작전 당시 핵기술지원 작전반을 지휘하며 핵탄두를 선박 「인디기르카」호에 싣고 쿠바 마리엘 항까지 직접 운반했다. 쿠바 주둔 59일 동안 모든 핵탄두의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철수를 감독했으며, 퇴역 후 1990년대에 당시 문서에 기초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위기의 실체적 규모를 처음으로 밝혔다. 1966년부터 1983년까지 12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소련 핵무기 관리체계의 중추를 맡았고,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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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군 입대
  • 1941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항공부대 기술장교
  •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 1958–196612총국 중앙 핵무기 저장기지 책임자
  • 1962「아나디리」 작전 핵기술지원 작전반장, 쿠바 내 모든 소련 핵탄두 지휘
  • 1966–1983소련 국방부 12총국 제1부국장
  • 1983예편

파벨 바실리예비치 리차고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Рычаг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41 ✕ 처형

스탈린 앞에서 소련 공군을 '관짝'이라 말한 에이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 스탈린이 물었다: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은가?" 리차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6기 개인 격추·14기 집단 격추를 기록하고 1936년 25세의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전투기 조종사. 중국 항일전과 할힌골에서 공군 고문으로, 겨울전쟁에서는 제9군 공군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1940년 8월 29세에 소련 공군 총국장(ВВС РККА)에 올랐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이 높은 사고율을 추궁하자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라고 직언했다가 해임되었고, 독소전 발발 사흘 뒤인 6월 24일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바르비시에서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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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6전투기 조종사로 복무, 키예프 군관구 항공대에서 편대장·비행대장 역임
  • 1936–1937스페인 내전에서 I-15 전투비행단 지휘, 6기 개인·14기 집단 격추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37–1938중국 주재 소련 공군 수석 군사고문('바탈린 장군'), 중일전쟁에서 공군 작전 지도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9군 공군 사령관, 이후 공군 총국 부국장·제1부국장 역임
  • 1940.8–1941.4소련 공군 총국장(Начальник ГУ ВВС РККА) 겸 국방부 항공 담당 부인민위원
  • 1941.6독소전 발발 사흘 뒤 체포, 10월 28일 재판 없이 총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44 ✕ 전사

나치 점령지 한복판에서 독일 장교로 위장해 고위 관리들을 제거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

1944년 3월, 보라틴 마을에서 UPA 대원들에게 포위되자 쿠즈네초프는 수류탄으로 자신과 적들을 함께 폭사했다.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이자 파르티잔. 독일어 6개 방언을 구사하는 언어 천재로, 독일군 중위 파울 지베르트로 위장하여 나치 점령 우크라이나의 수도 로브노에서 활동하며 6명 이상의 고위 독일 관리들을 직접 제거했다. 쿠르스크 전투를 앞두고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공격 계획을 최초로 입수했으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부를 겨냥한 '멀리뛰기 작전'을 사전에 탐지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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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튜멘 농업대학 입학, 부친 사망으로 중퇴
  • 1927–1929탈리차 임업기술학교 재학, 독일어·에스페란토·폴란드어 독학
  • 1930–1932코미-페르먀크 자치구에서 삼림 측량사, OGPU 협력 개시
  • 1932–1938스베르들롭스크 산업대학 재학, 우랄마시에서 외국인 기술자 감시
  • 1938NKVD 중앙기관 특수요원, 모스크바 독일 외교관 감시
  • 1942파르티잔 부대 «포베디텔리» 배속, 파울 지베르트로 로브노 잠입
  • 1943쿠르스크 전차 공세 계획 및 장거리 도약 작전 정보 입수
  • 1943–1944로브노·리보프에서 독일 고위 관리 6명 이상 제거
  • 1944.3.9보라틴에서 UPA와 교전 중 전사
  • 1944.11.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사후 수여
알바니아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911–1949 ✕ 사형 집행

알바니아 인민공화국 초기 내무장관 겸 부총리

네고반(현 그리스 플람푸로)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끈 1945년 3~4월 특별법정은 옛 공인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을 선고했고, 일부 동시대인은 그를 당시 알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보았다.

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회의에 참가하고 창당 시부터 정치국원을 지낸 인물로, 1944년 12월부터 인민보위국을 이끌며 시구리미를 장악했고 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해 반대파를 숙청했다. 1946~1948년 내무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으며, 티토주의 혐의로 축출·체포되어 1949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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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코르처 공산주의 그룹 창립자·초대 의장. 1930년대 후반 엔베르 호자, 코초 타슈코와 함께 주요 알바니아 공산주의자로 부상했다.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립 회의 참가, 창당 시부터 정치국·중앙위원회 위원.
  • 19433월 부재중 조직비서로 선출, 7월 10일 총참모부 위원이 되었다.
  • 1944페르메트 회의에서 중장으로 승진하고 민족해방반파시스트평의회(KANÇ)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 1944–1946인민보위국(Drejtoria e Mbrojtjes së Popullit) 국장. OZNA를 본떠 만든 이 기구가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맡았다.
  • 1945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했다. 이 법정은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 8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1946–1948내무장관, 부총리, 국가통제위원회 위원장, 인민의회 간부회 부의장, 코르처 선거구 의원.
  • 194810월 내무장관에서 산업장관으로 옮겨졌고, 중앙위원회에서 직위를 박탈당하고 제명되었으며 11월 28일 체포되었다.
  • 19495월 재판에서 티토의 후원을 받은 암살 음모를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6월 11일 처형되었다.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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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카를루스 마리겔라

Carlos Marighella
공산주의 브라질 브라질 1911–1969 ✕ 사살

하원의원에서 도시 게릴라 이론가로: 브라질 군사독재 최대의 적

“나는 두려워할 시간이 없었다” — 마리겔라의 묘비명

브라질 공산당 하원의원 출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평화적 저항을 거부하고 도시 게릴라전 이론가이자 실천가가 되었다. 자신이 창설한 민족해방행동(ALN)을 이끌며 《도시 게릴라 소교본》으로 세계 혁명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1969년 상파울루에서 경찰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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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중재자 주라시 마갈량이스 비판 시로 첫 체포·투옥
  • 1934공과대학 중퇴, 브라질 공산당(PCB) 입당
  • 1936–1945반복적 체포·투옥 — 1939–1945년 장기 구금
  • 1946–1948PCB 소속 연방 하원의원 — 당 불법화로 의석 상실
  • 1953–1954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 혁명 시찰
  • 1967무장 투쟁 노선 갈등으로 PCB에서 축출
  • 1968.02민족해방행동(ALN) 창설
  • 1969.06《도시 게릴라 소교본》 집필
  • 1969.11상파울루에서 DOPS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

미하일 쿠지미치 얀겔

Михаил Кузьмич Янгел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71 ○ 자연사

저장성 추진제 로켓으로 전략로켓군의 척추를 만든 설계자

1960년 10월 24일, R-16 시험발사대에서 126명이 폭사한 네델린 참사 당시, 얀겔은 잠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목숨을 건졌다. 훗날 그는 '운명이 나를 살렸다'고 짧게 말했다.

이르쿠츠크 변경 유형수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대학 졸업 후 전투기 설계를 거쳐 1954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OKB-586(유즈노예)의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저장성 고비등 추진제를 채택한 R-12·R-14·R-16·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차례로 완성해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구축했으며, 코스모스·치클론 발사체로 우주계획의 실용적 기반도 닦았다. 1960년 네델린 참사 당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생존했고, 1971년 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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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폴리카르포프 설계국 입사
  • 1937–44전투기 I-153, I-180, I-185 개발; 미코얀·먀시셰프 설계국 근무
  • 1946–48항공공업부에서 항공기 개발 조정
  • 1950–54NII-88에서 코롤료프 부하; R-5·R-7·R-11·R-12 초기 연구
  • 1954–71OKB-586(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저장성 추진제 로켓 개발
  • 1959/61R-12·R-14·R-16 배치,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0네델린 참사(R-16 폭발)에서 흡연실로 피해 생존
  • 1971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75 ○ 자연사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시대를 연 LADA의 주역

1966년 8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타라소프와 피아트의 발레타 회장이 협정서에 서명하는 순간은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단일 산업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였다.

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1965–1975)으로서 피아트와의 역사적 협력을 성사시켜 볼가 자동차 공장(VAZ) 건설을 주도한 산업 행정가다. 사라토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모스크바 자동차·트랙터 대학을 졸업한 뒤 쿠이비셰프 기화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해 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을 거쳤다. 1966년 5월 4일 비토리오 발레타 피아트 회장과 과학기술 협력 의정서에 서명했고, 그해 8월 본계약을 체결해 톨리야티에 연산 66만 대 규모의 승용차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라다(지굴리)는 수백만 소련 가정에 첫 승용차를 안기며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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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8쿠이비셰프 기화기·부속품 공장 기술자 → 설계국장 → 공장장 → 주임기사
  • 1949–1951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 1951–1958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 수출용 벨라루스 트랙터 생산 기반 구축
  • 1958–1963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 — 공업 재편과 모터·덤프트럭·베어링 등 신공장 건설 주도
  • 1963–1965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부의장 겸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 — VAZ/라다 프로젝트와 KAMAZ 구상 주도

므스티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켈디시

Мсти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 Келдыш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11–1978 ○ 자연사

우주과학을 조정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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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75과학아카데미 총재 · 우주과학 조정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루드네프

Константин Николаевич Руд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80 ○ 자연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낸 군수산업 행정가

가가린은 귀환 다음날 루드네프에게 1961년 4월 13일 자 《프라우다》를 건네며 이렇게 적었다: “지도자에게, 수행자로부터. 가가린.”

소련의 군수·우주산업 행정가. 툴라 출신의 무기 기술자로 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난 공장 책임자로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 로켓 연구소와 군수 관료직을 거쳐 1958년 국가국방기술위원회(GKOT) 의장에 올랐다. GKOT 의장으로서 초기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을 총괄했으며,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승인한 국가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1961~1965)으로 과학연구 조정을 담당했고, 계기·자동화·제어시스템 장관(1965~1980)으로 임명되어 민수 산업으로 전환했으나 퇴진으로 읽히기도 했다.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장관직을 유지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핵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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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툴라 병기공장 설계사, 설계국 부장, 수석기사
  • 1941–1947제314공장 수석기사 → 책임자 (메드노고르스크, 철수)
  • 1947–1950NI-61 소총·기관포무기 연구소장
  • 1950–1952NII-88 로켓연구소장
  • 1952–1953소련 무기부 차관
  • 1953–1957소련 국방공업부 차관
  • 1957–1958국가국방기술위원회 부위원장
  • 1958–1961국가국방기술위원회(GKOT) 의장 · 소련 장관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과학연구조정위원회 의장
  • 1965–1980계기·자동화·제어시스템 장관 (민프리보르)

메포디 나우모비치 스베시니코프

Мефодий Наумович Свеш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11–1981 ○ 자연사

농민 출신으로 소비에트 단일은행 체제 정점에 오른 경력 은행가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오른 직후 부하를 불러 말했다: "자, 그동안 자네를 충분히 굴렸으니, 이제 은행을 굴려 보세."

니주니노브고로드 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기업 부기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9년 은행에 들어가 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들의 수석회계사와 지배인을 거쳤다. 중앙기구로 발탁된 후 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과 고스방크 부총재를 역임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고, 1960년부터 대외무역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대외결제를 관장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올라 코시긴 개혁 후반기부터 브레주네프 체제 초기까지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으며, 재임기는 1965년 개혁의 신용 레버리지 실험이 퇴조하고 중앙집권적 재정 규율로 복귀한 전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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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기업 근태계원·부기계원
  • 1929–1930우랄 변경주 프세콤방크 부기계원
  • 1930–1937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 수석회계사·지배인
  • 1937–1939체르누신스키 구 콤소몰 서기
  • 1938–1939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화폐유통 부문장
  • 1940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
  • 1946고스방크 이사·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
  • 1948–1957고스방크 부총재
  • 1957–1960고스방크 이사·해외업무국장
  • 1960–1969대외무역은행 총재·고스방크 부총재
  • 1969–1976고스방크 총재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그리신

Иван Тимофеевич Гри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85 ○ 자연사

26년간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브레즈네프 시대 산업 수입 협상을 주도한 인물

볼가-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제1서기 그리신은 수감자 노동력으로 공사를 서두르라는 모스크바의 압박 속에서도 둑 높이를 둘러싼 기술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반 티모페예비치 그리신은 1911년 랴잔현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당에 입당한 후 콤소몰과 당 통제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2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전후에는 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5)로서 볼가-돈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로 외교 무대에 진출한 뒤, 1959년부터 사망하는 1985년까지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방 산업 설비와 기술 도입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6년간 차관직을 지키며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네 명의 지도부를 거친 그는 소련 대외경제 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한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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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ВКП(б) 입당
  • 1939–1940당 중앙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2노보시비르스크주 당 중앙통제위원회 전권대표
  • 1942–1945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
  • 1948–1949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49–1955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5–1960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9–1985소련 대외무역성 차관

바실리 표도로비치 가르부조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Гарбу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85 ○ 자연사

정체기의 장기 재무장관

25년간 소련 예산을 쥐고 흔든 그가 남긴 말: "예산이란 국가경제계획이라는 엉덩이에 난 뾰루지다. 불편해도 앉을 수는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공으로 일하다 하리코프 재정경제대학을 졸업했다. 키예프 재정경제대학 학장과 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소련 재무장관을 지냈다, 소련 역사상 최장 재임이다. 1965년 코시긴 경제개혁의 구상에 참여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보수적 예산 운용으로 재정 안정을 유지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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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50s재정기관과 우크라이나 재정 행정에서 성장
  • 1960–1985재무장관, 정체기 예산·가격·국가재정 운용 담당
  • 1965코시긴 개혁 이후 기업 인센티브와 예산통제의 균형을 관리
  • 1970s군비와 사회지출이 커지는 구조 속에서 보수적 재정 지속성 유지
  • 1985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사망, 장기 재무행정의 시대가 끝남

레프 니콜라예비치 스미르노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Сми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86 ○ 자연사

뉘른베르크 보좌검사에서 소련 사법부 수장으로, 정치재판을 주재한 최고재판소장

1966년 2월, RSFSR 최고재판소장 스미르노프는 가명으로 서방에 소설을 발표한 두 작가에게 반소비에트 선동·선전 혐의로 7년과 5년의 강제노동형을 직접 선고했다.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34년 검찰에 투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루덴코 소련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나치 점령지 전쟁범죄 공소를 담당하고 도쿄재판에서 소련 대표단 부검사를 지냈다. 1962년 RSFSR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시냡스키-다니엘 재판을 직접 주재했으며, 1972년부터 12년간 소련 최고재판소장으로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사법부를 대표했다. 국제법정에서 파시즘을 기소한 법률가가 국내에서는 정치범을 단죄하는 소련 법조계의 이중적 성격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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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레닌그라드·무르만스크 검찰청 수석수사관, 레닌그라드 전선 군검찰 수사관
  • 1942–1946소련 검찰청 특별중요사건 수사관, 뉘른베르크 재판 소련 수석검사 보좌관
  • 1946–1948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 소련 대표단 부검사
  • 1949하바롭스크 재판(일본 세균전) 국가공소인
  • 1957–1962소련 최고재판소 부소장
  • 1962–1972RSFSR 최고재판소장
  • 1972–1984소련 최고재판소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졸로투힌

Григорий Сергеевич Золоту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1–1988 ○ 자연사

탐보프와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14년간 소련 곡물 조달을 총괄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농업 관료

흐루쇼프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탐보프 제1서기 졸로투힌을 두고 이렇게 조롱했다: "저 탐보프 서기 졸로투힌은 바지를 벗고 매를 맞아야 한다고 자꾸 우겼습니다. 이게 무슨 즐거움입니까!"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현장 농학자 출신으로, 전쟁 직후 탐보프주 당 기관에서 두각을 드러내 1955년부터 10년 넘게 제1서기로 탐보프를 이끌었다. 흐루쇼프 해임 직후인 1966년 크라스노다르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옮겨 소련 최대 곡창지대를 7년간 통치했고, 1973년 브레즈네프의 신임 속에 소련 조달장관으로 발탁되어 1987년까지 14년간 곡물·사료·제분을 포함한 식량조달 체계 전반을 관장했다. 이 시기는 소련이 대규모 곡물 수입국으로 전환된 때로, 국내 수매와 수입 물류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무거운 자리였다. 197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5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22년간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낸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 지역 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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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차킨스키 농업전문학교 근무, 르자크사 MTS 선임농학자, 콤소몰 서기
  • 1940–1944탐보프주당 보좌관 → 토카룝카 군당위 제1서기
  • 1944–1949탐보프주당 서기 → 고등당학교 수강
  • 1949–1955탐보프주당 서기 겸 농업부장 → 제2서기
  • 1955–1966탐보프주당 제1서기
  • 1966–1973크라스노다르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73–1985소련 조달장관
  • 1985–1987소련 곡물생산물장관

레프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89 ○ 자연사

소련 국가통계의 수호자, 혁명 순교자의 동생으로서 계획경제의 숫자를 관리하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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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 1967–75ЦСУ 소련 각료회의 제1부청장
  • 1975–85ЦСУ 소련 청장 — 소련 각료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Józef Cyrankiewicz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인 1911–1989 ○ 자연사

저항의 생존자이자 체제의 수호자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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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폴란드 사회당과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
  • 1935–1939크라쿠프 지역 폴란드 사회당 노동자위원회 서기
  • 1942–1945아우슈비츠와 마우트하우젠 수감, 수용소 저항조직 활동
  • 1945–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
  • 1947–1952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54–1970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70–1972국가평의회 의장
  • 1973–1986전국 평화위원회 의장, 세계평화평의회 위원

레득토

Lê Đức Thọ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11–1990 ○ 자연사

키신저와 비밀 협상으로 파리 협정을 이끌고 노벨 평화상을 거부한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

레득토는 1968년 파리 회담에 참여해 북베트남 대표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1970년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남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노벨 평화상을 거부했다.

남딘 출신으로 본명은 판딘카이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30~1936년과 1939~1944년 프랑스 식민 감옥에 갇혔다. 항불전쟁 때 남부에서 레주언과 함께 당 조직을 맡았고, 1955년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에 들어갔다. 1968년 6월 파리 협상에 합류해 실질적으로 북베트남 대표단을 이끌었고, 1970년 2월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1월 파리 협정을 맺었다. 그해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정해졌으나 남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1990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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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 1930–1936, 1939–1944프랑스 식민 당국에 투옥됐다.
  • 1948남부의 코친차이나 당 위원회 부서기이자 조직부장을 맡았다.
  • 1955–1986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 당명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바뀌었다.
  • 1968파리 평화 회담에 도착해 북베트남 대표단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 1970–1973헨리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파리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 1973키신저와 공동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남베트남에 평화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상을 거부했다.

비더 페렌츠

Vida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계 1911–1990 ○ 자연사

정치재판을 집행한 공산주의 법관

그는 1989년에도 너지 임레를 유죄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뉘우치지 않았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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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세게드 법학원 졸업,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35–1942헝가리 불법 공산주의 운동 참여, 변호사 수습
  • 1942–1945쇤헤르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독일로 강제 이송
  • 1945–1949헝가리 공산당 지구위원회 서기, 내무부 고문
  • 1951–1953법무부 근무
  • 1953–1972대법원 법관, 인민법정회의 주재 및 법원 평의회 부의장
  • 1958너지 임레 재판 주심 법관, 사형 판결 선고

게오르기 모케예비치 마르코프

Георгий Мокеевич Мар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11–1991 ○ 자연사

시베리아를 노래하며 문학적 정통을 수호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문학 총감독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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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1톰스크 콤소몰 활동
  • 1931–1941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 신문·잡지 편집자
  • 1941–1945자바이칼 전선군 신문 《전투 초소에서》 종군기자
  • 1956–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59–1965RSFSR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이사회 의장
  • 1971–1986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9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세묘노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Семё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92 ○ 자연사

소련 독일정책의 40년 설계자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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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주리투아니아 소련 전권대표부 참사관
  • 1940–1941주독일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45–1953주독 소련군정청·통제위원회 정치고문
  • 1953–1954소련 최고위원 겸 주동독 대사
  • 1955–1978소련 외무부 차관
  • 1978–1986주서독 소련 대사

양더즈

杨得志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1–1994 ○ 자연사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79년 중월전쟁에서 쿤밍 군구를 이끌고 서부 전선을 지휘한 뒤 총참모장이 된 장군

후난 리링 출신으로 1928년 홍군에 들어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지난 군구와 우한 군구를 거쳐 1979년 1월 쿤밍 군구 사령관이 되었고, 중월전쟁에서 서북부 방향의 서부 전선을 지휘했다. 쉬스유가 동부 전선을 맡았다. 1980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었고 1994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95 ○ 자연사

NK-12부터 NK-33까지: 소련 하늘과 우주를 움직인 엔진 총설계자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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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3모스크바 항공기술학교 야간부·제24공장 기계공
  • 1933–193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8–1942주콥스키 아카데미 교편·연구; 1941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42제6공군 제239전투기사단 선임기사 (전선 근무)
  • 1943–1949우파 제26항공공장 → 부수석설계자 → 수석설계자
  • 1949–1994OKB-276 (후일 쿠즈네초프 명명 SNTK) 수석설계자·총설계자, 쿠이비셰프/사마라
  • 1963–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
  • 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Тодор Христов Живков
불가리아 공산주의 불가리아 불가리아 1911–1998 ○ 자연사

동구권 최장 35년 집권, 소련에 가장 충성한 발칸 지도자

「나를 심판하라. 그러나 빵도 명예도 없이 백성이 남게 될 때가 올 것이다」(1990년 체포 당시)

소피아 근교 프라베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하며 1932년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얀코'로 소피아 일대 저항을 조직했고, 1944년 반파시스트 봉기에 참여했다. 전후 체르벤코프의 후원으로 급부상해 1954년 제1서기가 되어 35년간 동구권 최장기 집권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을 이끌었고, 1987년 '7월 구상'으로 제한적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1984년 투르크계 강제동화 정책으로 큰 논란을 남겼으며, 1989년 11월 당내 쿠데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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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불가리아 공산당(BCP) 입당, 국영인쇄소 당조직 책임자
  • 1941–44대독 저항 — 소피아 제3당구역 책임자, 파르티잔 여단 '차브다르' 정치지도원
  • 1945–49BCP 중앙위 후보위원 → 소피아 시당 제1서기 → 소피아 시장
  • 1950–54BCP 중앙위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농업·집단화 담당
  • 1954–89BCP 제1서기(1954–81) → 총서기(1981–89) — 35년간 국가 최고지도자
  • 1962–71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71–89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89.11.10당내 쿠데타로 전격 해임, 이후 BCP 제명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1–2000 ○ 자연사

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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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айб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1–2008 ○ 자연사

장기 정체기의 고스플란 의장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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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세르게이 레오니도비치 소콜로프

Сергей Леонидович Соко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2012 ↓ 해임 1987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된 국방장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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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기갑·기계화 지휘 경험 축적
  • 1960s–1970s레닌그라드 군관구와 국방부 제1차관으로 승진
  • 1979–1980s아프가니스탄 전쟁 지휘·감독에 깊이 관여
  • 1984–1987국방장관, 고르바초프 초기 군부의 보수적 얼굴
  • 1987마티아스 루스트 모스크바 착륙 사건 뒤 해임

보응우옌잡

Võ Nguyên Giáp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11–2013 ○ 자연사

정규 훈련 없이 두 제국을 격파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정규 군사 교육 없이 게릴라 부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제국주의 정규군을 야전에서 무너뜨린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으로, 30년간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키우며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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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비엣민 군사 사령관
  • 1946–1947내무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1946–1980국방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1951–1982정치국 위원, 베트남 공산당
  • 1955–1991부총리
  • 1972현장 지휘관직에서 물러남 (반띠엔중으로 교체), 국방장관직 유지
  • 1982–1991중앙위원회 위원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라스코바

Ма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Раск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43 ✕ 추락사

여성 전투비행연대를 창설한 소련의 기록비행사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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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항법연구소 제도사
  • 1933소련 공군 최초의 여성 항법사 자격 취득
  • 1934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교관 — 여성 최초
  • 1935계기비행 교관 자격 취득, 중앙비행클럽 졸업
  • 1937–1939NKVD 특별과 전속 자문관
  • 1937–1938다수의 여성 세계항공기록 수립 (항법사)
  • 1938'로디나' 호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1여성항공연대 창설 — 586·587·588연대 조직
  • 1942–1943587폭격항공연대장, Pe-2 폭격기 전환 훈련 지휘

보리스 키드리치

Boris Kidrič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 1912–1953 ○ 백혈병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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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덩퉈

邓拓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2–1966 ✕ 자살

『인민일보』 편집장, 『연산야화』로 대약진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된 언론인

1966년 『연산야화』와 『삼가촌 찰기』가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전국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5월 18일 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79년 2월 복권되었다.

푸젠 출신 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항일전쟁기 진차지 근거지에서 신문을 만들고 최초의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했다. 1949년부터 『인민일보』 편집장·사장을 맡았으나 1957년 마오에게 「서생 논정(書生辦報)」이라 질책받고 물러났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로 1961~1962년 『베이징만보』에 연재한 잡문 『연산야화』와 우한·랴오모사와 함께 쓴 『삼가촌 찰기』는 1966년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고, 그는 그해 5월 자살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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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인민일보』 편집장 · 사장

이반 이그나티예비치 야쿠봅스키

Иван Игнатьевич Якуб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1976 ○ 병사

바르샤바조약군을 9년간 지휘한 벨라루스계 원수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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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 1948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60–1961, 1962–1965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1961년 8월부터 코네프의 부사령관으로 실무 주도, 1962년 4월 복귀)
  • 1965–196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7–1976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소련원수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즈베레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Зве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78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재래식 군수 생산을 13년간 총괄한 국방공업장관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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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노동자로 출발, 레닌그라드 광학기계공장에서 광학기사 훈련
  • 1936레닌그라드 정밀기계·광학연구소(LITMO) 졸업, 광학기사로 설계·기술직 근무
  • 1939–1944카잔·요시카르올라 광학공장 주임기술자·수석기사, 전시 광학장비 생산 주도
  • 1944–1947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 수석기사·부소장
  • 1947–1958군비부·국방공업부에서 본부장, 차관 역임
  • 1958–1963국방기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제1부위원장
  • 1963–1965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 — 대신급, 고체연료 로켓·우주체계 개발 관장
  • 1965–1978소련 국방공업장관 — 전차·화포·소화기·탄약 생산 총괄

사비트 아타예비치 오루제프

Сабит Атаевич Орудж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2–1981 ○ 자연사

바쿠 유전에서 시작해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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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오르조니키제네프티 트러스트 기계공, 작업반장
  • 1939–1946아즈네프티 계열 트러스트 관리자·트러스트장
  • 1946–1949크라스노다르네프티 주임기사, 아즈네프테라즈베드카 청장
  • 1949–1955소련 석유공업부 해양·서부지역 총국장
  • 1955–1957소련 석유공업부 차관
  • 1957–1959아제르바이잔 SSR 인민경제회의 의장·각료회의 부의장
  • 1965–1972소련 석유채취공업부 제1차관
  • 1972–1981소련 가스공업부 장관

미하일 포르피리예비치 게오르가제

Михаил Порфирьевич Георга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12–1982 ○ 자연사

네 국가원수 아래 25년간 모든 소비에트 법령에 공동 서명한 제도적 닻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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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1소련 농업부, 기술자에서 부서장까지 승진
  • 1941–1942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중상으로 퇴역, 적성훈장 수훈
  • 1951–1953그루지야 SSR 농업차관
  • 1953–1954그루지야 SSR 농업장관
  • 1954–1956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56–1957그루지야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82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61–1982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블라디미르 바카리치

Vladimir Bakarić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912–1983 ○ 자연사

공화국의 이해와 연방 사회주의를 조율한 공산주의 지도자

1948년 2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 비난을 직접 들은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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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 1941–1943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해방운동의 정치위원
  • 1944–1969크로아티아 공산당 및 공산주의자동맹의 최고 지도자
  • 1945–1953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 집행위원회 의장
  • 1948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 회담에 파견
  • 1953–1963크로아티아 의회 의장
  • 1974–1983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직 위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학문 정통성의 문지기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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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중부볼가 지방 콤소몰 활동, 1931년 당 입당
  • 1935–1944펜자주 당 간부, 세르돕스크 지역위 제1서기, 펜자주당 농업부장
  • 1948–1956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 겸 『몰도바 공산주의자』 편집장
  • 1956–1960중앙위 서기 L.I.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0–1965중앙위 고등당학교 연구부학장
  • 1965–1983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학계 인사·교육과정·출판의 최종 심판관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마지막 서기장

1985년 2월, 병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든 최초의 서기장 — 선거운동도, 연설도 없는 승리

브레즈네프의 비서 출신으로 안드로포프 사후 서기장이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통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짧은 집권은 고르바초프 등장의 막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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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1985서기장
  • 1984–1985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레오니트 비탈리예비치 칸토로비치

Леонид Витальевич Кантор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6 ○ 자연사

중앙계획을 수학으로 최적화하려 한 노벨상 수상자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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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레닌그라드 산업건설기술자 연구소 교수
  • 1934–1960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22세에 임용)
  • 1939–1948군사공학기술대학 수학 주임
  • 1948–1960레닌그라드 대학 수학·역학 연구소 부서장
  • 1960–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수리경제 부문 창설·지도
  • 1971–1976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국민경제운영연구소
  • 1976–1986전연방 시스템연구소 (ВНИИСИ)

블라디미르 일리치 스테파코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Степ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7 ○ 자연사

레닌 테제 오류로 축출된 브레즈네프기 아지트프롭 수장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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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모스크바주 MGB 부국장
  • 1957–1961모스크바 시당 선전선동부장 → 제2서기
  • 1964–196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65–1970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브레즈네프기 일상 이념 장치 총괄
  • 1967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1978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로만 피델스키

Roman Fidelski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12–1988 ○ 사망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해 포즈난 봉기를 부른 기계공업부 장관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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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바르샤바 공대 졸업, 기계공학자
  • 1942–1944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공장 기술자
  • 1949중공업부 차관
  • 1952기계공업부 차관
  • 1955–1956기계공업부 장관
  • 1958각료회의 사무처 차관, 대외경제과학기술협력위원회 부위원장
  • –1968각료회의 산하 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카다르 야노시

Kádár Jáno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12–1989 ○ 자연사(병사, 사인 미확정)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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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58, 61–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핀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2–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5년간 소련 TV·라디오를 장악한 방송 총책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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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출판부 선임지도원·부문장
  • 1944–1949전연방 방송위원회 정치방송 주필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방송위원회 부의장
  • 1953–1955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55–195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당위원회 서기
  • 1956–1960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 외무장관
  • 1962–1965소련 외무차관
  • 1965–1967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0TASS(타스) 사장
  • 1970–1985소련 각료회의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1978년부터 고스텔레라디오)

딘무하메드 아흐메트울리 쿠나예프

Дінмұхамед Ахметұлы Қон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카자흐스탄 1912–1993 ○ 자연사

24년간 카자흐스탄을 브레즈네프의 동반자로 이끌고, 해임으로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공화국 건설자

1986년 2월, 나자르바예프의 비판 보고가 있은 후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오히려 쿠나예프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전하자, 24년간 카자흐스탄을 이끌어온 노지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물러나겠소."

광산 기술자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24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있던 인물이다. 브레즈네프와의 친교를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을 소련 3대 경제권으로 끌어올렸고, 흐루쇼프의 남부 영토 이전 시도를 저지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지켰다. 전연방 정치국 정위원(1971–1987)으로서 중앙 무대에도 진출했으나,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 해임되면서 알마아타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 젤톡산(12월) 사건이 촉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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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프리발하시스트로이 광산 수석기사
  • 1942–1952카자흐 SSR 인민위원회/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55카자흐 SSR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55–1960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1차)
  • 1960–1962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1차)
  • 1962–1964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2차)
  • 1964–198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2차, 22년)
  • 1971–1987CPSU 정치국 정위원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시티코프

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Шит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93 ○ 자연사

하바롭스크 변경당 위원장에서 연방회의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얼굴

1965년 하바롭스크 변경에 레닌훈장이 수여되자 시티코프는 말했다. '변경의 훈장 수훈을 우리는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가 극동인들에게 베푼 큰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코스트로마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축산기술자로 출발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캄차카·유대자치주 당서기를 거쳐 1957년 하바롭스크 변경당 제1서기에 올랐고, 재임 13년간 도시 기반시설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70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14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중심을 형성했고, 소비에트 유럽안보협력위원회 의장으로서 데탕트와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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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축산기술사 → 아르다토프 콤소몰 지구위 제1서기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소령)
  • 1945–1952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 → 캄차카 주당위 서기
  • 1952–1955유대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5–1957하바롭스크 변경당위 서기 → 제2서기
  • 1957–1970하바롭스크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4–1991재외동포문화교류 소비에트협회 상임위 의장

김일성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2–1994 ○ 병사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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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동독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12–1994 ○ 사망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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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71–1989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총서기
  • 1976–1989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89대중 시위 속에서 실각

보리스 표도로비치 브랏첸코

Борис Фёдорович Брат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0년간 소련 탄광을 이끈 석탄공업 장관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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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2키젤·로스토프 탄광에서 광산기사, 구역장, 수석기사로 승진
  • 1942–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 및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에서 근무
  • 1943–1949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탄광장,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수석기사
  • 1949–1953카라간다우골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53–1957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57–1959카멘스크·로스토프 소브나르호스 의장, 고스플란 석탄부장
  • 1959–1961카라간다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61–1965카자흐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5–1985소련 석탄공업장관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Леонид Никола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2007 ○ 자연사

고르바초프에게 스타브로폴을 넘겨주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당원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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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 1941–46보로네시 제18항공공장 주임기사, 당 조직자 (Il-2 생산)
  • 1946–52쿠이비셰프 당 간부 → 주 집행위원장
  • 1952–58쿠르스크 주당 제1서기 (1957년 주에 레닌훈장 수여)
  • 1958–62고리키 주당 제1서기
  • 1962–65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 · 상임위 후보위원
  • 1964–7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후임: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70–8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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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아브라시모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брас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9 ○ 자연사

냉전 베를린을 관리한 소련의 '통치 대사'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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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소련 각료회의 상임대표
  • 1948–195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0–1952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2–1955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7–196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61–1962스몰렌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71주동독 소련 대사 (1차)
  • 1971–1973주프랑스 소련 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 1973–197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 1975–1983주동독 소련 대사 (2차)
  • 1983–1985소련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
  • 1985–1986주일본 소련 대사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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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비네비틴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иневи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38 ✕ 아군 오인사격

프리놉스키 명령으로 일본 헌병을 쏜 NKVD 저격 소위

자오제르나야에 오른 비네비틴은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에 따라 한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국경을 넘어 온 일본 헌병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NKVD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소위로, 저격 교관을 거쳐 공병대장을 맡았다.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 고지에서 제1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으로 만주 영토에 들어온 일본 헌병을 저격 사살해 하산 호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부상 뒤 병원을 이탈해 전선에 복귀했고, 8월 1일 새벽 지뢰 통로 개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초병에게 잘못된 암호를 대어 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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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리스키 철도 직업기술학교 수학
  • 1932–1935철도 도로기사·구간장, 우리유핀스크 제5공사구간장
  • 1935NKVD 국경수비대 소집
  • 1935–1938저격 교관, 이후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공병대장 (소위)
  • 1938.07.15프리놉스키 명령으로 자오제르나야에서 일본 헌병 사살
  • 1938.08.01아군 초병의 오인 사격으로 전사
  • 1938.10.25소비에트 연방 영웅·레닌 훈장 추서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류민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Рю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54 ✕ 처형

의사들 음모 조작자, NKVD 회계사 출신 부역장

베리야가 류민에게 남긴 마지막 말: '더 이상 당신과 나는 서로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청산할 것이오.' 1953년 3월 28일.

NKVD 회계사에서 MGB 부역장까지 오른 인물. 아바쿠모프를 고발해 '의사들 음모'를 조작, 스탈린 말기 반유대 숙청을 주도했다. 스탈린 사후 체포·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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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NKVD 회계사로 입문
  • 1948MGB 특별중요사건부 배속
  • 1951MGB 특별중요사건부장 → 부역장, 의사들 음모 조작
  • 1952해임
  • 1954재판 후 총살형

니키타 아르카디예비치 크리먄

Никита Аркадьевич Крим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튀르키예 1913–1955 ✕ 처형

서른한 살에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이 된 수사관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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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캅카스 GPU 경제부 견습, 이어 담당관
  • 1935–1937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선임요원, 이어 과 부책임자
  • 1937–1938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과장
  • 1938–1940그루지야 NKVD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리보프주 NKVD 관리국 부국장
  • 1941–1943야로슬라블주 NKGB·NKVD 관리국 부국장
  • 1943–1945야로슬라블주 NKGB 관리국장
  • 1945–1947아르메니아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7–1950울리야놉스크주 MGB 관리국장
  • 1951–1953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 인사부장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

Николай Романович Мир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64 ✕ 항공사고

흐루쇼프 축출을 조직한 당의 '권력 부처' 담당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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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 1951–1956MGB·KGB 제3총국(군 방첩) 부국장, 소장 진급
  • 1956–1959레닌그라드주 KGB 국장
  • 1959–1964중앙위 행정기관부장 — KGB·내무·군·검찰·법원 감독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밀리온시코프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иллионщ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73 ○ 자연사

핵무기를 만들고 핵군축을 외친 과학자-정치가

1968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소련 과학자의 입장에서 핵군축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연구소에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그로즈니 출신으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체 원심분리법에 의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1964)의 과학적 책임자였다. 1962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과학의 제도적·국제적 좌표를 설정했고, 1964년부터 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을 맡아 1968~1969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서 핵군축과 과학 협력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쿠르차토프연구소 부소장으로 핵기술 개발을 지휘하면서도 1967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과학자와 정치가를 겸한 독특한 경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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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60제813콤비나트 부과학지도자 · 가스원심분리 농축
  • 1960–197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연구부소장
  • 1962–1973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4세계 최초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 과학책임자
  • 1964–1973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
  • 1967–1973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68–1969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

남일

남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고려인 1913–1976 ✕ 교통사고

소련에서 온 고려인 장군,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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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소련에서 교사·교육 공무원으로 근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 참전
  • 1946–1950조선 북부 파견, 교육성 부상까지 승진
  • 1950–195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
  • 19537월 27일 정전협정 조선인민군 측 서명
  • 1953–1959외무상
  • 1957–1976내각 부수상
  • 1966–1972철도상·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1972–1976정무원 부총리·국가경공업위원회 위원장

자보르 라술로비치 라술로프

Джабар Расулович Рас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키스탄 1913–1982 ○ 자연사

21년간 타지키스탄을 이끈 농학자 출신 지도자, 검소와 청렴의 공산주의자

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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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타지크 SSR 바흐시 계곡 면화 재배 농업국 농학자
  • 1938–1940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부 곡물관리국장
  • 1940–1941타지크 SSR 농업부인민위원
  • 1941–1945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
  • 1946타지크 SSR 공예작물인민위원
  • 1946–1955타지크 SSR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겸임
  • 1955–1958소련 농업부 제1차관
  • 1958–1960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0–1961주토고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1–1982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окры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3–1985 ○ 자연사

소련 전투기 전술을 다시 쓴 에이스, 전시에 세 번의 영웅 금성을 단 유일한 군인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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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 1968–1972소련 방공군 부총사령관
  • 1972–1981DOSAAF 중앙위원회 의장
  • 1976–1985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79–1984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위원회 위원
  • 1981–1985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고문

도나트 페렌츠

Donáth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13–1986 ○ 사후 복권, 1989년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너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너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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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너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너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웨이궈칭

韦国清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좡족) 1913–1989 ○ 자연사

1950년 중국 군사고문단장으로 베트민에 파견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자문한 좡족 장군

1950년 중국 군사고문단장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웨이궈칭은 호찌민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자문했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베트남 대표단과 군사 문제를 논의했다.

광시의 좡족 출신으로 홍군에 들어가 국공내전에서 제3야전군 제10병단 부정치위원을 지냈다. 1950년 4월 류사오치의 명으로 중국 군사고문단장이 되어 베트남에 파견되어 호찌민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자문했다. 1953년 10월 호찌민에게 프랑스의 나바르 계획 사본을 건넸다고 전해지며, 1954년 저우언라이와 함께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 뒤에 광시 주석(1958~1975), 정치국원(1973~1982),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을 지냈고, 문화대혁명과 그 뒤의 숙청을 모두 비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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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웨이바췬이 이끄는 농민자위군에 참여했고, 12월 백색봉기에 참가한 뒤 홍군 제7군에 편입됐다.
  • 1944신사군 제4사단 부사단장이 되었고, 이후 사단장으로 복무했다.
  • 1949제3야전군 제10병단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 베트남 주재 중국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임명됐다.
  • 1958–1975광시 좡족 자치구 정부 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기 광시에서 권력을 유지하며 4·22파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살해가 벌어졌다.
  • 1977–1982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을 지냈다.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플료로프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Флё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90 ○ 자연사

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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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3–1990 ○ 사망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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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구스타프 후사크

Gustáv Husák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3–1991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둡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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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부의장
  • 1946–1950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 — 민주당 해체 주도
  • 1954–1960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 레오폴도프 교도소 수감
  • 1968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 소련 침공 후 반개혁 노선으로 전환
  • 1969–198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총서기 — 정상화 주도
  • 1975–1989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89벨벳 혁명으로 사임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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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사빈킨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Савин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9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19년간 소련 전력 기관들의 인사 문지기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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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붉은 군대 입대, 무선통신대대 사병 및 하급 지휘관
  • 1937적군 화학연구소 콤소몰 서기
  • 1939–1941군사정치 아카데미 수학, 서부전선 제33군 정치부 선전담당 고등교관
  • 1942–1944자바이칼 전선: 여단 정치부장, 전선 정치부 간부부 차장, 총정치국 간부국 고등교관
  • 1947–1950군사정치 아카데미 복학 및 졸업
  • 195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행정부 교관
  • 1952–1959중앙위 행정부문 육군 부문장, 부문 차장 등 역임
  • 1959–1968중앙위 행정기관부 차장 → 제1차장, 1964년 10월부터 부장 대행
  • 1968–1987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키릴린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ирил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1999 ○ 자연사

과학기술혁명기 소련 민간 R&D의 총괄 설계자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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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54모스크바동력학원(MPEI) — 기술자, 대학원, 교수, 부원장
  • 1954–1955소련 고등교육부 차관
  • 1955–1962CPSU 중앙위원회 과학·고등교육·학교부장
  • 1963–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5–1980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80–1988과학아카데미 물리기술학·에너지학부 아카데미크-서기, 이후 상임간부회 고문

페코 답체비치

Пеко Дапче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 1913–1999 ○ 자연사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 이어진 파르티잔 지휘관

1944년 10월 20일, 답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답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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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스페인 공화국군 국제여단 자원병, 중대 지휘관
  • 1941로브첸 파르티잔 분견대 사령관, 몬테네그로 봉기
  • 1942제4 몬테네그로 프롤레타리아 충격여단 사령관
  • 1942–1943제2 프롤레타리아 사단 사령관
  • 1943–1944제2 충격군단 사령관
  • 1944제1군집단 사령관, 베오그라드 작전
  • 1945–1949제1군 사령관, 이어 유고슬라비아군 총감찰관
  • 1953–1955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Алекс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2001 ○ 자연사

카스트로의 신뢰를 얻은 소련 정보장교 출신 초대 주쿠바 대사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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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단 통역
  • 1941–1943이란 주재 NKVD 정보장교
  • 1944–1951파리 주재 NKVD/KI 레지던트 (공식 직함: 대사관 아타셰)
  • 1954–1958아르헨티나 주재 KGB 레지던트 겸 대사관 1등서기관
  • 1959–1960쿠바 주재 TASS 특파원 겸 KGB 레지던트
  • 1960–1962주쿠바 소련 대사관 문화고문
  • 1962–1968주쿠바 소련 대사
  • 1974–1980주마다가스카르 소련 대사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13–2001 ○ 진폐증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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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프랑스 공산당 입당, 랑스 탄광 지구에서 활동
  • 1934레포레스트 탄광 점거 파업 주도, 폴란드로 강제 추방
  • 1937–46벨기에 이주, 벨기에 공산당 및 대독 레지스탕스 '백색여단' 활동
  • 1948–54귀국, PZPR 카토비체 주당 서기, 이후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57–70PZPR 카토비체 주당 제1서기 — '카토비체 공국'의 실리적 통치
  • 1970–80PZPR 중앙위 제1서기 — '기에레크의 10년'
  • 1976–80국가평의회 위원 겸임
  • 1981PZPR 제명, 계엄령 하 인터닝 (1981.12–1982.12)

시중쉰

习仲勋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3–2002 ↓ 실각 1962 · 자연사

산베이 근거지의 창건자, 16년 실각 뒤 광둥에서 경제특구를 열어 낸 개혁가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으나 1962년 실각해 16년을 감금·하방으로 보냈고,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경제특구를 열었다.

산시 출신으로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다. 건국 후 서북국 서기와 국무원 비서장·부총리를 지냈으나 1962년 소설 『류즈단』이 가오강을 옹호한 「반당」 작품이라는 캉성의 고발로 실각해 16년 동안 감금·하방되었다.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복귀해 홍콩 탈출 문제의 해법으로 중앙에 「선행일보(先行一步)」의 권한을 요구했고, 이는 1980년 선전·주하이·산터우 경제특구로 이어졌다. 1980년대 서기처 서기로 후야오방을 지지했으며 1987년 그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진핑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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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2국무원 부총리 겸 비서장
  • 1978–1980광둥성 당위원회 제1서기

티혼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Тихон Николаевич Хре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3–2007 ○ 자연사

43년간 소비에트 음악의 문지기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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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2그네신 음악전문학교 작곡·피아노 전공
  • 1932–1936모스크바 음악원 셰발린(작곡)·네이가우스(피아노) 사사
  • 1935교향곡 1번 초연,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해외 연주
  • 1941–1967붉은군대 중앙극장 음악감독
  • 1948–1991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 (1957년까지 총서기, 이후 제1서기)
  • 1961–2007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66년부터 정교수)
  • 1962–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 1976–1990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솔로멘체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оломен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2008 ○ 자연사

러시아 공화국을 12년간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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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졸업, 방위공업 공장 배치
  • 1941–1948우랄 대피 공장에서 당 조직원으로 활동
  • 1948–1954즐라토우스트·첼랴빈스크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 1955–1959첼랴빈스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59–1962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당위 제1서기
  • 1962–196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4–1966로스토프 주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중앙위 서기 겸 중공업부장
  • 1971–1983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 1983–1988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장, 정치국 정위원
  • 1987–1988정치국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 위원장
  • 1988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 은퇴

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
공산주의 프랑스 마르티니크 1913–2008 ○ 자연사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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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미할코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хал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2009 ○ 자연사

스탈린부터 푸틴까지 국가를 쓴 시인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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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장편시 〈스표파 아저씨〉 발표
  • 1937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41–1945군사통신원으로 복무,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참전
  • 1944엘레기스탄과 공동으로 소련 국가 가사 집필 (스탈린판)
  • 1950CPSU 입당
  • 1962–2008풍자 뉴스릴 《피틸》 창간·편집장
  • 1965–1970소련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제1서기 · 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70–1990러시아공화국(RSFSR) 작가동맹 의장
  • 1977소련 국가 가사 개정판 집필 (스탈린 언급 삭제)
  • 2000러시아 연방 국가 가사 집필 (푸틴판)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바바킨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Баба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4–1971 ○ 심장마비

루나 9호·루노호트의 수석설계자, 달과 금성에 최초로 닿은 자동탐사선을 만든 사람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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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시 전화국 라디오 서비스 기술자
  • 1937전연방 통신기술학교 연구원
  • 1943자동화연구소(VSNITO) 레이더·유도체계 연구실장, 수석기술자
  • 1949NII-88 체르톡 부서 지대공미사일·유도체계 연구
  • 1952OKB-301(라보치킨) 순항미사일 부랴·V-300 대공미사일 개발
  • 1965OKB-301 / NPO 라보치킨 수석설계자 — 무인 달·행성 탐사선 총괄
  • 1966루나 9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 루나 10호 최초 달 인공위성
  • 1970루나 16호 로봇 표본 귀환, 루노호트 1호 월면 로버, 베네라 7호 금성 착륙
  • 1971마르스 2·3호 발사 — 8월 3일 심장발작으로 급서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

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ави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14–1983 ○ 자연사

열핵무기 2단계 구상의 선구자

1955년 젤도비치가 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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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산업대학, 학생
  • 1937–194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43–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제2연구소, 연구원
  • 1948–1952KB-11, 연구원·부서장
  • 1952–1963KB-11, 부문장·과학 부책임자
  • 1963–198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및 합동핵연구소, 연구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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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s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4–1984 ○ 자연사

KGB에서 개혁가를 길러 낸 역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에서 헝가리 비밀경찰이 가로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 장면은 그를 평생 사로잡았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 그가 본 해답은 무력뿐이었다.

1914년 6월 15일(구력 6월 2일) 출생. 공식 자료는 스타브로폴 지방 출생으로 적지만 출생지와 혈통을 둘러싼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리빈스크 수운기술학교(1936년 졸)를 거쳐 카렐리야에서 콤소몰 활동을 했고, 주헝가리 대사(1954~57), 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1957~67), KGB 의장(1967~82)을 지냈다. 반체제 탄압을 지휘해 1967년 제안으로 제5국을 만들고 1980년 사하로프를 고리키로 유배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간 진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11월 서기장이 되어 부패 간부를 숙청하고 개혁 구상에 착수했으며,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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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7부다페스트 주재 대사: 1956년 개입의 현장
  • 1957–67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
  • 1967–82KGB 의장: 반체제 단속, 제5국 신설
  • 1979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의 핵심 3인
  • 1982–84서기장: 규율 캠페인, 고르바초프 등 신진 발탁

파벨 스테파노비치 쿠타호프

Павел Степанович Кута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4–1984 ○ 뇌졸중

소련 공군 최장기 총사령관, 냉전기 공군력을 정점으로 이끈 에이스 출신 지휘관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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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 1944–1948제20근위전투항공연대장
  • 1954–1957제71전투항공군단장 (주독 소련군)
  • 1961–1967제48항공군 사령관
  • 1967–1969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69–1984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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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1987),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Яков Борисович Зельд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87 ○ 자연사

스스로 배운 물리학자에서 소련 핵무기 이론가·우주론의 거인이 된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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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4화학물리연구소 실험조수, 레닌그라드 대학 청강
  • 1936이학준박사 취득 — 흡착이론
  • 1939이학박사 취득 — 질소산화열역학(Zeldovich mechanism)
  • 1939–1941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동역학 계산
  • 1943–1946쿠르차토프 원자폭탄 팀 합류, 모스크바 비밀연구소
  • 1946–1963아르자마스-16(KB-11) 이론부장 — 핵·열핵무기 계산 주도
  • 1958–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1987천체물리학·우주론 전념 — 모스크바대 교수, 슈테른베르크 천문연구소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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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키릴 트로피모비치 마주로프

Кирилл Трофимович Мазу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89 ○ 자연사

파르티잔 출신 벨라루스 지도자, 브레즈네프 정치국원 겸 연방 부총리

오늘날 내가 같은 작전을 지휘하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코인들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벨라루스 파르티잔 지도자로 1956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65년부터 소련 정치국 정위원 겸 제1부총리로 13년간 경제를 총괄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정치감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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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6파리치 지역 도로부 기술자, 고멜 자동차도로기술학교 졸업
  • 1936–1938붉은 군대 복무, 이후 벨라루스 철도 정치부 근무
  • 1940–1941고멜 시 콤소몰 비서 → 브레스트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2–1943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 지도 (중령 → 대령)
  • 1943–1947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49–1950민스크 시당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50–1953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3–195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5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
  • 1965–1978CPSU 정치국 정위원 겸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작전 현장 정치감독관
  • 1986–1989전연방 전쟁·노동 재향군인회 초대 의장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튤린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ю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4–1990 ○ 자연사

테레시코바, 레오노프, 루노호트의 발사에 'Go'를 내린 사람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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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 1945–1946독일서 V-2 로켓 기술 회수팀 지휘 ('튤린 경영')
  • 1948–1955NII-4 탄도연구소장 → 과학담당 부소장 → 제1부소장
  • 1959–1961NII-88 (후일 TsNIIMash) 소장
  • 1961–1965국방기술국가위원회(GKOT) 부의장 → 제1부의장
  • 1965–1976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S. A. 아파나시예프 장관 아래)
  • 1974–1975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EPAS) 소련 측 조정위원회 의장
  • 1977–1990모스크바국립대학교 기계수학부 파동역학연구실 조직·지도

장칭

江青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4–1991 ✕ 자살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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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914–1992 ○ 자연사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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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비탈리스 페트로비치 루벤스

Виталий Петрович Рубе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 1914–199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민족소비에트를 10년간 이끈 라트비아인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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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학자로 근무
  • 1942–1943리빈스크 지구신문 《스타하노프 노동》 편집장
  • 1947–1948라트비아 공산당 다우가프필스 군위원회 제2서기
  • 1958–1960라트비아 SSR 국가계획위 농업·조달부장
  • 1960–196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농업부장
  • 1962–1970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70–1974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74–1984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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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콜니코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Шко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4–2003 ○ 자연사

흐루쇼프 시절 3개 주를 지배하고 인민통제로 간 실무자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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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3페름 공장에서 교대장·직장·동력책임자로 근무
  • 1943–1945몰로토프(페름) 주당위 부서장
  • 1945–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전권위원(블라디미르·보로네시 주)
  • 1947–1949칼루가 주당위 제2서기
  • 1952중앙위 지도원·부부장
  • 1952–1955탐보프 주당위 제1서기
  • 1955–1960보로네시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5–1974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4–1987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누학 품사완

ໜູຮັກ ພູມສະຫວັນ
라오인민혁명당 공산주의 라오스 라오스 (시암 출생) 1914–2008 ○ 노환

라오스 혁명 지도자·국가주석

1975년 12월 2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누학을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정부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선출했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의장은 누학이 아닌 카이손 폼비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창당 멤버이자 파테트라오 혁명의 핵심 지도자였다. 시암(현 태국) 무크다한의 라오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창당 당시 정치국에서 카이손 다음 서열이었고 1972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에 들어가 경제 업무를 맡았다. 1975년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주석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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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라오스 혁명운동 창립 참여
  • 1949동부지역 라오 저항위원회 의장
  • 1950라오 저항정부 재무장관
  • 1954제네바 회담 파테트라오 대표
  • 1955창당대회에서 정치국 서열 2위
  • 1972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진입, 경제 업무 담당
  • 1975부총리 겸 재무장관
  • 1989제2기 최고인민의회 의장
  • 1992국가주석

클라우디아 존스

Claudia Jones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15–1964 ○ 심장마비

마르크스주의 틀 안에서 교차성 분석을 선취한 흑인 여성해방 이론가: 노팅힐 카니발의 어머니

「인민의 예술은 그들의 자유의 기원이다」 — 1959년 첫 카리브 카니발 슬로건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이론가. 1949년 인종·계급·성별 삼중 억압 분석으로 교차성 선구자로 평가된다. 영국 추방 후 흑인 신문 창간, 카리브 카니발 조직해 노팅힐 카니발 기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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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트리니다드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출생 — 8세에 할렘으로 이주
  • 1936청년공산동맹 입당 — 『위클리 리뷰』 필진·부편집장·편집장 역임
  • 1945–1955CPUSA 여성위원회 간사, 전국위원회 위원(1948), 『데일리 워커』 흑인 담당 편집자
  • 1949「흑인 여성 문제의 방기에 대한 종언」 — 마르크스주의 교차성 분석의 선구적 텍스트
  • 1948–19554차례 투옥, 스미스법 유죄 — 1955년 영국으로 추방
  • 1958–1964『웨스트인디언 가제트』 창간·편집, 1959년 실내 카리브 카니발 조직
  • 196412월 24일 심장마비 사망 — 마르크스 묘 왼쪽 하이게이트 묘지 안장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시모노프

Конста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Симон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5–1979 ○ 폐암

「나를 기다려 주오」의 시인, 여섯 번의 스탈린상을 받은 전쟁기자이자 문학 관료

「나는 병사가 아니었다. 단지 특파원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 평생 잊지 못할 땅이 있다 — 1941년 7월, 하루 만에 우리가 독일 전차 39대를 격파하고 불태우는 것을 처음 목격한 모길료프 들판이다.」

「나를 기다려 주오」로 전시 소련을 울린 시인. 6회 스탈린상을 받은 종군기자로 3부작 『산 자와 죽은 자』를 남겼다. 파스테르나크 박해 가담자였으나 불가코프 작품 출간을 관철한 문학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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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첫 시 발표, 고리키 문학대학 졸업, 작가동맹 가입
  • 1939할힌골 전투에 종군기자로 파견
  • 1941–1945『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종군기자, 베를린 항복문서 조인 참관
  • 1942시 「나를 기다려 주오」 발표 — 전국적 현상
  • 1946–1950 / 1954–1958『노비 미르』 편집장 (두 차례)
  • 1950–1953『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59–19713부작 『산 자와 죽은 자』 완성
  • 1974사회주의 노동 영웅 · 레닌상 수상

레오니트 아르카디예비치 코스탄도프

Леонид Аркадьевич Костан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5–1984 ○ 심장마비

브레즈네프 시대 화학화 계획을 지휘한 최장수 화학공업 장관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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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 기사·직장장·주임기사·공장장
  • 1953소련 화학공업부 질소공업 총국장
  • 1958국가화학위원회 부위원장 → 1961년 제1부위원장
  • 1963국가화학·석유기계제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80소련 화학공업부 장관
  • 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년부터 후보위원)
  • 1980–1984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천융구이

陈永贵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5–1986 ↓ 퇴임 1980 · 폐암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의 모델 마을 지도자에서 부총리까지 오른 농민

모택동 시대 자력갱생의 상징이었다. 1964년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 이후 다자이 생산대대는 전국적 모델이 되었고, 그는 정치국원과 부총리까지 올랐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났다.

산시 시양현 다자이촌의 문맹에 가까운 농민으로 생산대대 서기로 계단밭을 일구고 1963년 홍수 뒤 국가 지원 없이 마을을 재건해 이름을 얻었다. 1964년 마오가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고 하면서 전국의 모델이 되었고, 그는 1969년 중앙위원, 1973년 정치국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농업을 맡았다. 다자이 모델은 집단노동과 자력갱생을 내세웠으나 통계 부풀리기와 강제성이 드러났고, 개혁개방 뒤 1980년 부총리에서 물러나 베이징 교외 농장에서 살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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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80국무원 부총리 (농업)

마리안 리비츠키

Marian Rybicki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15–1987 ○ 자연사

노동자 봉기 앞에서 질서를 세운 법률 관료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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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바르샤바대학교 법학 과정 졸업
  • 1945–1947국가민족회의 의장단 법률부 근무
  • 1947–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서기국 참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52–1956국가평의회 초대 서기
  • 1956–1957폴란드 인민공화국 검찰총장
  • 1957–1965법무장관
  • 1965–1983폴란드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법학 교수 및 전국민족통일전선 서기

후야오방

胡耀邦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5–1989 ↓ 실각 1987 · 심장마비

문화대혁명 피해자의 복권과 사상 해방을 이끈 개혁파 총서기, 그의 죽음이 1989년 시위를 불렀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날 비공식 추모 집회가 정부에 그의 업적 재평가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10만여 학생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후난 출신으로 열네 살에 소년 홍군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고 건국 후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으며 1977년 중앙조직부장으로 수백만 건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해 복권시켰고, 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조직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뒷받침했다. 1981년 당 주석, 1982년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1986년 말 학생 시위 뒤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사임을 강요당했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추모 집회가 톈안먼 시위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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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7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81–1982중공 중앙 주석
  • 1982–1987중공 중앙 총서기

게오르기 아게예비치 로보프

Георгий Агеевич Ло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5–1994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전투를 지휘한 소련 전투기 지휘관

“우리는 공중에서 미국인들을 극복할 수 없었다.”

게오르기 로보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사단 지휘관으로 성장한 소련 공군 장성이었다. 조선전쟁에서는 64 전투기항공군단을 지휘하며 소련의 비밀 공중 개입을 조직했고, 직접 미그-15를 몰아 전투 경험을 전수했다. 그의 전후 증언은 미그 앨리에서의 전과를 내세우던 공식 서술과 미국 공군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는 현장 판단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이후 그는 군사교육과 전쟁사 연구에 힘쓰며 자신의 조선전쟁 경험을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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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8붉은군대 공군 조종사학교 생도
  • 1938–1941제19전투기항공연대 비행대 지휘관
  • 1942–1943제275전투기항공사단 정치 담당 부사단장
  • 1945제7근위전투기항공사단 사단장
  • 1946–1951제303전투기항공사단 사단장
  • 1951–1952제64전투기항공군단 군단장
  • 1955–1962소련 국방부 및 공군 총감부 전투기·전선항공 감찰관
  • 1963–197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공군학과장, 교수

예브게니 페트로비치 피토브라노프

Евгений Петрович Питовр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5–1999 ○ 자연사

스탈린의 방첩 수장에서 브레즈네프의 무역 외교관으로 변신한 생존자

1951년 체포되어 고문받으면서도 자백을 거부하고, 감방에서 스탈린에게 국가보안 기관 개편안을 작성해 보내 결국 풀려났다.

스탈린 시대 소련 방첩의 핵심 인물로, 29세에 NKVD에 투신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맡아 전후 소련 방첩 체계를 이끌었고, 1950년 국가보안부 차관이 되었다. 1951년 '아바쿠모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53년 초 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으로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이후 동독과 중국에서 KGB 고문으로 활동했고, 1962년부터 KGB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소련 상공회의소 의장(1983–1988)으로서 무역 외교와 산업 스파이 활동을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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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4NKVD 입문 → 고리키·키로프·쿠이비셰프주 NKVD/NKGB 국장 역임
  • 1945–1946우즈베크 SSR 국가보안인민위원·장관
  • 1946–1950M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0–1951소련 국가보안부(MGB) 차관
  • 1953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 1953–1957동독 주재 KGB 전권대표·고문
  • 1962–1966KGB 고등학교 교장
  • 1983–1988소련 상공회의소 의장

보리스 빅토로비치 라우셴바흐

Борис Викторович Раушенба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계 1915–2001 ○ 자연사

수용소에서 보스토크까지: 우주비행 제어의 개척자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와 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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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 수학 및 글라이더 연구
  • 1937–1941RNII (로켓연구소) 엔지니어 — 코롤료프 휘하 유도탄 비행제어
  • 1942–1946타길라그 강제수용소 수감 — 볼호비티노프 설계국에 계산 제공
  • 1946–1948니즈니타길 특별정착 — 켈디시 산하 계산국 근무
  • 1948–1954NII-1 연구원 — 켈디시 지도하 진동 연소 이론 연구
  • 1955–1959OKB-1 — 코롤료프 지도하 우주선 방향제어 선구적 연구
  • 1960–1973OKB-1 부서장 — 루나·보스토크·화성·금성·소유즈 유도체계 총괄
  • 1959–197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교수 및 이론역학 주임
  • 1978–2001과학아카데미 우주개척자 유산위원회 위원장 · 예술이론·신학 연구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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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카피토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Капит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노멘클라투라를 21년간 운영한 인사 책임자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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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54–1959모스크바 주당 제1서기
  • 1959–1964이바노보 주당 제1서기
  • 1965–1983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65–1986중앙위 서기 (조직·간부 담당)
  • 1986–1988중앙감사위원회 의장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체르보넨코

Степан Васильевич Червон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3 ○ 자연사

중소분쟁·프라하의 봄·데탕트를 관통한 24년 임기 소련 대사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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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중학교 교사·교장, 키예프주·수미주
  • 1941–1944붉은군대 복무,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 1944–1949체르카시 사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과장·부학장
  • 1949–195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강사단장
  • 1951–195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과학·고등교육 부장
  • 1956–195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이념 담당)
  • 1959–1965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5–1973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3–1982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1973~1974)
  • 1982–1988CPSU 중앙위 해외간부·출국관리 부장
  • 1989–1993소련·러시아 외무부 고문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폴랴코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ол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5–2004 ○ 자연사

볼가 강변에 소련의 자동차 대중화를 세운 VAZ의 초대 총책임자

“저는 평생 어떤 자리도 구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직접 타라소프 장관을 찾아가, 공장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건설 중인 VAZ의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하며.

볼가 자동차 공장(VAZ)의 건설을 지휘하고 자동차공업부 장관으로 11년간 소련 자동차 산업을 이끈 행정가다. 톰스크 출신으로 MADI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소형차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1958년 공장장이 되었다. 1966년 타라소프 장관에게 스스로 VAZ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해, 피아트와 협력한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3년 만에 가동시키고 1973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으며 '니바' 개발을 시작했다. 장관 시절 연간 200만 대 생산 체제를 완성했고 퇴임 후에도 엘라부가·KAMAZ·AVTOVAZ의 고문으로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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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견습 정비공 → 모스크바 자동차수리 공장 부책임자, MADI 야간부 졸업
  • 1938–1946서부·카렐리야 전선 자동차부대 복무, 공병소좌 전역 — 1941년 중상
  • 1946–1963MZMA(모스크바 소형차 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사 → 수석기사 → 공장장(1958)
  • 1963–1965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 의장
  • 1965–1966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66–1975볼가 자동차 공장(VAZ) 초대 총책임자 — 건설부터 연산 66만 대 체제 완성, '니바' 개발 착수
  • 1975–1986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 — 연간 200만 대 생산, 세계 6위 도달
  • 1986–2004NAMI 전문위원 → 엘라부가·KAMAZ·AVTOVAZ 고문, 90세로 사망

산티아고 카리요

Santiago Carrillo
스페인 공산당 공산주의 스페인 스페인 1915–2012 ○ 자연사

총구 앞에서 담배를 붙인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의 민위대원 200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의원 전원이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66세의 카리요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1960–1982)으로, 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함께 유로코뮤니즘을 주도한 핵심 이론가이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모스크바와 단절하고, 『유로코뮤니즘과 국가』(1977)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하며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평화적 민주 이행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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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사회주의 청년단 기관지 『레노바시온』 기자
  • 1934스페인 사회주의 청년단(JJ.SS.) 서기장
  • 1934–19361934년 혁명봉기 참여로 수감
  • 1936.11PCE 입당, 마드리드 방위위원회 공공질서 담당 위원
  • 1937PCE 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7638년간 망명 생활 — PCE 재조직
  • 1946–1947망명 공화국 정부 무임소장관
  • 1960PCE 서기장 — 돌로레스 이바루리 후임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반대, 모스크바와 결별
  • 1976가발로 위장해 비밀 귀국, 체포 후 석방
  • 1977.3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유로코뮤니즘 선언
  • 1977–1986스페인 하원의원(마드리드 선거구)
  • 1981.2.2323-F 쿠데타 의회 난입 속 자리 지키며 담배
  • 1982선거 참패 후 PCE 서기장 사임
  • 1985PCE에서 제명, 좌파 분파 결성
  • 1991분파 해산, PSOE 합류 제안 거절

지야 누리예비치 누리예프

Зия Нуриевич Нур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바슈키르 1915–201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을 총괄한 바슈키르 출신 각료회의 부의장

루돌프 누리예프의 망명 후 KGB가 그의 가족을 압박하자, 누리예프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족을 내버려두시오, 그들이 무슨 반소비에트 분자란 말이오!” 그 후로 괴롭힘은 멈췄다.

바슈키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리예프는 1957년부터 12년간 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로 공화국을 이끌며 우파와 체르니콥스크를 통합하고 대규모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69년 소련 조달장관으로 중앙에 진출한 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각료회의 부의장 겸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식량 정책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25년간 중앙위원과 8회 연속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낸 그는 소수민족 간부가 연방 차원의 경제 관료로 자리 잡은 드문 사례였으며, 퇴임 후 회고록 『아울에서 크렘린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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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집단농장 청년학교 교사
  • 1935–1938부라옙스키 지역 교육국장
  • 1938–1940적군 복무: 포병연대 콤소몰 서기
  • 1940–1942부조뱌조프스키 지역 교육국장
  • 1942–1944MTS 정치부장 → 부조뱌조프스키 지역당 제2서기
  • 1944–1945키긴스키 지역당 제1서기
  • 1945–1957바슈키르 주당위: 농업부장 → 서기 → 제2서기
  • 1957–1969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
  • 1969–1973소련 조달장관
  • 197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국가고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Ком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1954 ✕ 처형

레닌그라드 사건에서 피의자를 구타하고 조서를 조작한 아바쿠모프의 수사 부관

체포 후 진술: '나와 수사관 10명이 레닌그라드로 갔다… 아바쿠모프가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에서 즈다노프의 이름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 목숨을 건다고.'

1938년부터 NKVD에서 복무한 보안 요원으로, 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대령)까지 올랐다. 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아바쿠모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하며 피의자들을 직접 구타하고, 부하 수사관 푸틴체프의 조서 조작을 승인·지휘했으며, 재판 전 피고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리허설까지 주관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되었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1954년 사형 선고를 받고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으며, 현재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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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NKVD 기관에 입문
  • ~1948–1951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 (대령)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조서 조작·구타·재판 리허설 주도
  • 1951.07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
  • 1954.12사형 선고 및 총살

발렌틴 드미트리예비치 샤신

Вале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Ша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1977 ○ 자연사

세계 1위 산유국을 만들고도 '무리한 증산'을 경고한 장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병실에서 석유부 장관 업무를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압박에 맞섰다.

바쿠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12년간 소련 석유부 장관을 지내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통해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타트네프티에서 터빈 시추 방식과 대형 블록 조립 공법을 도입해 로마슈킨스코예 유전 개발을 이끌었고, 이후 장관으로서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당의 압박에 맞서 합리적 채굴을 주장했으며, 암으로 입원 중에도 병실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레닌상 수상자, 네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타트네프티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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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스테를리타마크 석유전문학교 졸업, 이심바이네프티 검층반 근무
  • 1943모스크바 석유연구소 졸업, 바시키르 유전에서 시추 기술자
  • 1947–1953바쉬네프테라즈베드카 트러스트 수석기술자 → 관리자
  • 1953–1956타트네프티 시추 담당 부책임자
  • 1956–1960타트네프티 책임자
  • 1960–1965RSFSR 국민경제회의 석유·가스공업 총국장
  • 1965–1970소련 석유채굴공업 장관
  • 1970–1977소련 석유공업 장관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카자코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аз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1981 ○ 자연사

공장 기술자에서 항공공업 장관까지 오른 군수산업 행정가

1977년 6월, 24년간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데멘티예프가 사망하자 카자코프가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4년도 못 되어 임기 중 사망했고, 생전에 일했던 모스크바 계기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모스크바 근교 마을에서 태어나 16세에 제도공으로 노동을 시작한 소련 항공공업 행정가. 항공기 계기·유도장치 분야의 핵심 연구소였던 NII-923 소장 시절 로켓무장과 핵잠수함 생산에 기여해 1963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고, 12년간 차관과 제1차관을 거쳐 1977년 표트르 데멘티예프의 후임으로 항공공업 장관에 올랐다. 기술자에서 장관까지 항공공업의 모든 단계를 거친 유일한 전후 세대 지도자로,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항공생산 체계의 실무적 안정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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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모스크바 '엘렉트로스베트' 공장 제도공 → 모스크바 기계기술학교 졸업
  • 1937–1944제213항공공장: 기술자 → 작업장장 → 부서장 → 주임기술자
  • 1944–1951제122항공공장 주임기술자 → 제10국가설계연구소 부서장
  • 1951–1960제122공장 수석기술자 (1955년 전소연방통신기계제조대학 졸업)
  • 1960–1965NII-923 소장 — 항공기 계기·관성유도체계 개발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1963)
  • 1965–1974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77–1981소련 항공공업 장관 — 재임 중 사망, 레닌상(1976)·소련국가상(1967)

헬무트 그뢰트루프

Helmut Gröttrup
소련 소련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16–1981 ○ 자연사

페네뮌데에서 고로도믈랴까지, R-7의 개념적 선조를 설계한 독일인 로켓 기술자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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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V-2 유도 제어 부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
  • 1945–1946뷰로 그뢰트루프 소장, 블라이헤로데 (소련 점령지구)
  • 1946노르트하우젠 연구소 독일 측 책임자, 이후 중앙공장 총책임자
  • 1946–1950NII-88 분소 1호 소장, 고로도믈랴 섬
  • 1954–1958연구원, SEL (슈투트가르트)
  • 1970–1980GAO 전무이사, 기제케 앤 데브리언트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바히레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Бахи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6–1991 ○ 자연사

냉전기 소련 재래식 탄약 대량생산 체계를 19년간 지휘한 군수 행정가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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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제2공장(데그탸레프 공장) 설계국 엔지니어
  • 1948OKB-2 부소장(경험 업무)
  • 1950–1952제575공장 수석 설계자
  • 1952–1954OKB-2 소장
  • 1954–1960데그탸레프 공장 수석 엔지니어·부공장장
  • 1960–1965데그탸레프 공장장
  • 1965–1968소련 방위공업부 제1차관
  • 1968–1987소련 기계공업장관

체덴발

Цэдэнбал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916–1991

몽골의 계획경제와 대소 관계

몽골과 소련의 관계를 '큰 형과 작은 동생'(ах дүү) 관계로 규정했던 그는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소련 편입을 청했으나 모스크바는 거절했다.

초이발산 사후 1952년 몽골 정부 수반이 된 지도자다. 소련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바탕으로 산업화와 협동목축을 추진했다. 장기 집권은 근대화 정책과 당내 반대파 배제, 대외 의존이라는 문제를 함께 남겼으며 1984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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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몽골인민혁명당에 입당하고 재무차관이 되었다.
  • 1940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당내 2인자).
  • 1941–1945인민군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5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52–1974각료회의 의장(정부 수반).
  • 1958–1984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재취임(1981년 총비서 칭호).
  • 1974–1984인민대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국가원수) 겸 인민군 총사령관.
  • 1979몽골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16–1994 ↓ 퇴임 1989

라트비아 당 지도자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인 부모를 둔 시베리아 출신으로, 1959년 '민족주의자' 숙청 이후 라트비아 공산당을 이어받아 18년간 제1서기를 지낸 '인테르나치오날리즘'의 집행자였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면서도 공개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라트비아어로 말하지 않았던 이 모순이 그의 시대를 상징했다. 말년에는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올랐지만,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족운동 속에서 구질서와 함께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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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라트비아 공산당 조직에서 성장
  • 1966–1984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 정체기 발트 공화국 관리 담당
  • 1984–1989민족소비에트 의장, 말기 소련 연방대표제의 보수적 얼굴
  • 1988–1989발트 민족운동과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 영향력 약화
  • 1989 이후중앙정치에서 퇴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베레시코프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Береж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1998 ○ 자연사

스탈린의 개인 통역사이자 소련의 미국 전문가

테헤란 회담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순간 처칠이 말을 꺼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베레시코프에게, 스탈린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네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야.'

테헤란(1943), 얄타(1945), 포츠담(1945) 회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개인 통역을 맡아 전후 질서를 결정한 '빅3' 외교 현장을 목격한 소련 외교관. 1940~1941년 주베를린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통역을 맡았고, 리벤트로프의 대소 선전포고 현장에도 있었다. 부모의 전시 행방 문제로 외무부에서 밀려난 후 《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과 소련의 대표적 미국학 저널 《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을 지냈다. 주워싱턴 대사관 1등서기관(1979~1983)으로 복귀했고, 소련 붕괴 후 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에서 강의하며 권력 정점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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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태평양함대 통역 장교
  • 1940–1941주베를린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고문, 스탈린·몰로토프 개인 통역
  • 1943 · 1945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5–1960s《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 (필명 보그다노프)
  • 1970–1989《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
  • 1979–1983주워싱턴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
  • 1992–1998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 교수

레오니트 바실리예비치 스미르노프

Леонид Васильевич Смир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2001 ○ 자연사

22년간 소련 군산복합체를 조율한 VPK 의장, 군수공업의 숨은 설계자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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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프로호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рохоров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6–2002 ○ 자연사

노벨상 수상 레이저 공동 발명가이자 소련 대백과사전의 얼굴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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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 국립대 물리학과 우등 졸업;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입소
  • 1941–1944붉은 군대 보병 복무, 두 차례 부상
  • 1954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진동연구실장
  • 1959레닌상 수상;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
  • 1964바소프·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믹)
  • 1969–2001《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
  • 1982–1998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일반물리학연구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테레빌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Тереб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이후 러시아 러시아인 1916–2004 ○ 자연사

사라졌던 법무부를 되살려 소비에트 법전 편찬을 지휘한 법률가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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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주 파르골로보 지구 검사
  • 1941노동자 분견대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
  • 1945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키 지구 검사
  • 1949전연방 범죄수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7소련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수사국 부국장
  • 1962소련 대법원 부원장
  • 1970소련 법무장관
  • 1984소련 대법원장
  • 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 도첸트

비탈리 라자레비치 긴즈부르크

Виталий Лазаревич Гинзбург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6–2009 ○ 심부전

수소폭탄의 '제2의 아이디어'에서 노벨상까지, 한 세기를 가로지른 이론물리학자

나는 수소폭탄 덕분에 살아남은 아주 드문—아마도 유일무이한—사람이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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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2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FIAN 이론부 연구원
  • 1945–1961고리키 국립대학 방사물리학부 학과장
  • 1948–1952소련 수소폭탄 개발 참여 — 중수소화리튬-6 아이디어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68–2009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물리·천체물리 문제 학과장
  • 1971–1988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
  • 1989–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대표 인민대의원
  • 1998–2009«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 편집장

완리

万里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6–2015 ○ 자연사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 안후이에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한 개혁의 선구자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안후이에서 농가책임제를 처음 시행한 개혁파 지도자로, 1983~1988년 제1부총리,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산둥 출신으로 건국 후 베이징 부시장으로 인민대회당 등 「10대 건축」을 지휘했고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다. 1977년 안후이 제1서기로 부임해 기근에 시달리던 농촌에서 샤오강촌의 비밀 토지 분배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해 개혁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1980년 부총리로 전국 농업을 맡아 인민공사를 해체했고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해외 순방 중 귀국해 계엄을 지지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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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0안후이성 당위원회 제1서기
  • 1988–199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왕둥싱

汪东兴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6–2015 ↓ 퇴임 1980 · 자연사

마오의 경호대장, 중난하이의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한 뒤 「양개범시」로 밀려난 인물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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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7중앙경위국(8341부대) 국장
  • 1977–1980중공 중앙 부주석

김정숙

김정숙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7–1949 ○ 출산 중 사망

백두산 항일 빨치산에서 '3대장군'의 하나로 추앙된 여장군

어느 날 부대가 행군할 때 갈대밭에서 적 5~6명이 장군님을 겨누었다. 김정숙 동지는 몸으로 장군님을 가리고 리볼버로 적을 쓰러뜨렸다.

김정숙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휘하 여군 부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여성 빨치산으로, 생전의 전공보다는 사후 '백두여장군'으로 추앙받아 '3대장군' 백두혈통 정치신화의 모성적 핵심이 된 인물이다.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어머니로서 해방 뒤 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다 1949년 출산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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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동북항일연군 입대
  • 1936김일성 부대 친위전사 및 신갈파부대 여군 부대장
  • 1937보천보 전투 참가; 중국공산당 입당
  • 1937–1938국내 신파·풍산·단천 등지에서 혁명조직 확대 활동
  • 1940김일성과 결혼, 소련으로 이동
  • 1945해방 후 평양 귀환
  • 1946–1949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 및 여성운동 참여

로숀치 게저

Losonczy Géza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7 ○ 옥사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너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너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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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버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너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너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이고리 세묘노비치 파나슈크

Игорь Семёнович Панасю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7–1972 ○ 병사

쿠르차토프의 가장 가까운 조수로 F-1을 관리했으나, 스승을 고발하고 밀려난 물리학자

"이 그래파이트 샘플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새끼 양을 대하듯 중성자를 잡아먹습니다": 첫 흑연 품질 측정 결과를 쿠르차토프에게 보고하며

이고리 파나슈크는 쿠르차토프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로,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 건설을 총괄 관리하고 1946년 12월 25일 임계 실험에서 제어반을 보조한 실험물리학자다. 1943년 제2연구소에 합류해 반응로 부문 부책임자로서 흑연과 우라늄 품질 검증부터 노심 조립까지 실무를 지휘했고, 1948년 첫 산업용 원자로 'A'의 기동에도 쿠르차토프 곁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 1954년 돌연 스승과 결별하고 주변부 연구직으로 밀려났는데, 쿠르차토프를 당에 고발한 것이 원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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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레닌그라드 공업대학 물리공학부 졸업, 쿠르차토프 지도 아래 디플로마
  • 1939–1943붉은군대 복무, 소련-핀란드 전쟁 및 대조국전쟁에서 야전병원 엑스선 기술자
  • 1943–1947제2연구소 제1섹터(반응로) 부책임자, F-1 건설 및 기동
  • 1947–1950제2연구소 제1섹터장, 산업용 원자로 'A' 과학책임자
  • 1950–1954F-1 원자로 시설 책임자, 삼중수소 생산로 AI-1 건설 참여
  • 1954–1972원자력연구소(IAE) 선임연구원, 주변부 연구직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نور محمد تره‌کی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17–1979 ✕ 베개에 질식사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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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봄베이에서 무역회사 점원으로 일하며 야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접함
  • 1940s–1958작가·언론인으로 활동,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 발표
  • 1952–1953주미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공보관
  • 1965PDPA 창립, 초대 서기장 선출
  • 1967PDPA 분열 후 칼크(민중)파 지도
  • 1978.04–124월 혁명으로 혁명평의회 의장·총리 취임, 소련과 20년 우호조약 체결
  • 1979.03헤라트 봉기 와중 소련에 군사 개입 요청, 거절당함
  • 1979.09–10아민에게 축출되어 베개에 질식사당함

세묜 쿠지미치 츠비군

Семён Кузьмич Цвигу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7–1982 ✕ 자살

브레즈네프가 안드로포프 옆에 심은 감시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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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역사 교사 · 중학교 교장
  • 1939NKVD 입대
  • 1941–45남서부·남부 전선 및 SMERSH 복무 (전선 기록 논란)
  • 1951–53몰다비아 MGB 부장관: 브레즈네프와 인연
  • 1957–63타지크 KGB 의장
  • 1963–67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 1967–82KGB 제1부의장 · 제5국장: 반체제 탄압 총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시도렌코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идо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1982 ✕ 교통사고

사막과 선캄브리아기를 횡단한 소련 지질학의 제도적 설계자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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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 대학 광물학과 조교·대학원생
  • 1941–1943붉은군대 소대장·포대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중상
  • 1943–1950소련 과학아카데미 투르크멘 분소 지질연구소: 선임연구원 → 부장
  • 1950–1961콜라 분소 부의장 → 상임간부회 의장, 지질연구소장 겸임
  • 1961–1962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과학연구조정 국가위원회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지질·지하자원보호장관 → 국가지질위원회 의장 → 지질장관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겸 지구과학부문 의장
  • 1979–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암석권연구소 창설 소장

샤라프 라시도비치 라시도프

Шараф Рашидович Раши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1983 ○ 심장마비

24년간 우즈베키스탄을 이끌며 산업화와 문화 부흥을 진두지휘한 작가 출신 지도자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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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중학교 교사
  • 1937–1941사마르칸트 지역지 《레닌 욜리》 기자·편집자
  • 1941–1943소련군 소위, 모스크바 전투·볼호프 전선 참전, 중상
  • 1944–1947사마르칸트 주당위원회 서기
  • 1947–1949공화국 일간지 《키질 우즈베키스톤》 편집장
  • 1949–1950우즈베키스탄 작가동맹 이사장
  • 1950–1959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
  • 1959–1983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3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후보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7–1983 ○ 암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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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바바힌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баба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1984 ○ 자연사

소련 제2핵무기설계국의 과학지도자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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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5KB-11(아르자마스-16) 이론물리학자
  • 1955–1960NII-1011 부과학지도자·이론부문장
  • 1960–1984VNIITF(첼랴빈스크-70) 과학지도자
  • 1968–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쿠르콧킨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кот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1990 ○ 자연사

소련군 후방을 16년간 지휘한 마지막 원수들 중 하나

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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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오룔 전차학교 졸업, 정치장교로 복무
  • 1941–1945독소전 참전: 정치지도원에서 전차대대장, 14·13근위전차여단장으로 승진, 프라하까지 진격
  • 1951–1958기갑·기계화군사아카데미와 참모아카데미 졸업, 전차사단장
  • 1959–1968군단장, 근위전차군·야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 제1부사령관
  • 1968–1971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71–1972주독소련군 총사령관
  • 1972–1988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 책임자: 후방 개혁, 아프간·체르노빌·스피타크 대응
  • 1988–1990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오가르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Огар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1994 ○ 자연사

군사혁명을 예견한 참모총장, 아프간 파병에 맞서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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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 1984–1992서방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좌천된 뒤 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 1992–1994러시아 국방부 및 CIS 합동군 참모총장 고문

바딤 알렉산드로비치 마트로소프

Вад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тро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1999 ○ 자연사

17년간 KGB 국경군을 지휘한 군사적 축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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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퇴역까지 근무

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7–2001 ↓ 전보 1976

농업과 정부 부문을 오간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73년 2월, 브레즈네프는 상임간부회에서 폴랸스키의 농업장관 전보를 통보했다. 몸을 떨며 일어선 폴랸스키가 "아무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자, 브레즈네프는 "자, 지금 상의하고 있잖나"라고 응수했다.

정치국원·제1부수상을 지내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폴랸스키 보고서'를 작성한 소련 고위 관료. 이후 농업장관을 거쳐 일본·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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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6농업장관

바실리 파블로비치 미신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Ми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917–2001 ○ 자연사

코롤료프를 이어 소유즈·살류트·N-1을 책임진 실천적 우주설계자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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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35ЦАГИ 공장 견습공, 야간반 거쳐 МАИ 입학
  • 1941–45볼호비티노프 항공설계국: 첫 로켓전투기 БИ-1 무장 설계
  • 1945–46독일 파견, V-2 조사단에서 코롤료프와 평생의 동료가 됨
  • 1946–66OKB-1 제1부수석설계자: Р-1부터 Р-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까지
  • 1956Р-5 개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66–74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 소유즈, 살류트, N-1 달로켓
  • 1974N-1 실패와 내부 서한으로 해임, 달탐사 계획 폐기
  • 1974–2001МАИ 교수·학과장, 교과서 《장거리유도탄탄도학》 등 저술

반띠엔중

Văn Tiến Dũng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17–2002 ○ 자연사

1975년 사이공 점령을 지휘하고 1979년 캄보디아 침공과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이끈 장군

1975년 4월 사이공·자딘 해방 작전의 사령관으로서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린 공세를 지휘했다.

하노이 근교 뜨리엠 출신으로 1936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치렀고, 1953~1954년과 1954~1978년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1975년 봄 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해 사이공 함락을 이끌었다. 이어 크메르루주 캄보디아 침공과 1979년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지휘했다. 1980년 보응우옌잡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되어 1987년까지 재임했고, 1976~1986년 정치국원이었다. 2002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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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다.
  • 1953–1978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으며, 1954년 정전위원회 베트남 측 대표단장으로 잠시 직무를 중단했다.
  • 1971–19751971년 남부 라오스, 1972년 찌티엔, 1975년 떠이응우옌 작전을 직접 지휘·지도했고, 4월 사이공·자딘 작전 사령관이 되었다.
  • 1980–1986국방장관을 지냈다.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톨스티코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Толст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2003 ○ 자연사

해빙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당 지도자이자 주중 대사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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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건설 기술직 후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 졸업, 군 건설현장 주임기사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 주독 점령군 수송부서장
  • 1948–1960레닌그라드에서 건설·소비에트·당 직책 역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까지 승진
  • 1962–1970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CPSU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1962–1966)
  • 1962–1971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70–1978주중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9–1982주네덜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Керим Алиевич Кер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7–2003 ○ 자연사

오랫동안 이름이 숨겨진 유인우주비행 관리자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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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91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장춘차오

张春桥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7–2005 ○ 사형 선고 후 감형, 1998년 석방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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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중국 공산당 입당
  • 1949–1966《해방일보》 편집장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주임 (시장)
  • 1969–1973정치국 위원 → 1973–1976: 정치국 상무위원
  • 1975–1976부총리 겸 총정치부 주임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4–1998사형 선고 → 무기징역 → 18년형 → 의료 석방

니콜라이 프로코피예비치 페도렌코

Николай Прокофьевич Федо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2006 ○ 자연사

수학으로 계획경제를 재설계한 CEMI의 창립자이자 SOFE의 설계자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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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 1953–1958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부총장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3–1985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 창립·초대 소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믹)
  • 1965–1988학술지 《경제학과 수리방법》 초대 편집장
  • 1967–1983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197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
  • 1987–2006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고문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2008 ↓ 중앙직 사임 1961

중앙아시아 출신 첫 프레지디움 위원, 민족 정책 실무자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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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붉은군대 복무, 정치·무선정찰 업무
  • 1948–1950나망간 주당위 제1서기
  • 1951–1953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5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복직)
  • 1955–1957우즈베키스탄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1CPSU 중앙위 서기 겸 프레지디움 위원
  • 1968–1977주시리아 소련 대사
  • 1986–2008우즈베키스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의장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Пётр Нилович Дем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2010 ○ 자연사

문화정책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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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모스크바 당 조직과 중앙위 선전 라인에서 성장
  • 1961–1974중앙위 서기, 이념·문화 담당으로 해빙 이후 문화통제 관리
  • 1974–1986문화장관, 정체기 공식 예술·공연·출판 행정 총괄
  • 1986 이후고르바초프기 문화정책 변화 속에서 중앙 무대에서 물러남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혁명의 사회적 기반과 후대 기억을 연구한 역사가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자랐다. 『혁명의 시대』 등 ‘긴 19세기’ 3부작으로 산업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형성을 서술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버크벡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다. 『혁명의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함께 다루었고, 『마르세유의 메아리』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후대 정치와 역사 서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폈다. 이 강좌에서는 계급과 사회구조, 혁명의 계승과 변형을 읽는 해석 기준으로 참고한다. 그의 분석은 당대 사료 자체와 구별해야 하며 혁명사 해석의 유일한 정답을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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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버크벡 칼리지 역사학 강사
  • 1952학술지 『과거와 현재』 창간에 참여
  • 1970–1982버크벡 역사학 교수
  • 1982버크벡 명예교수로 퇴임
  • 1984–1997뉴스쿨 사회연구소 방문교수
  • 2002버크벡 총장에 선임

바실 빌랴크

Vasiľ Biľak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7–2014 ○ 사망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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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 1936–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54–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 1962–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 1968.1–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 1968–88KSČ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대외정책·이념 총괄
  • 1970「위기 발전의 교훈」 기초, 정상화의 교리적 헌장
  • 1988.12정치국·서기직 해임, 1989년 당에서 제명

바실리 이바노비치 페트로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2014 ○ 자연사

오가덴 전쟁을 지휘한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마지막 전시 세대 원수

1978년 3월, 지지가 탈환 작전: 페트로프는 정면 공격으로 속이고 주력은 헬기강습으로 북쪽에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4일 지지가가 해방되었고, 2주 안에 소말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2차대전을 최전선에서 싸운 소련 원수.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 해방, 루마니아·헝가리 전역까지 종군했으며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전후 프룬제 아카데미를 거쳐 극동에서 참모·지휘관으로 성장, 1972년 극동군관구 사령관에 올랐다. 1977–78년 오가덴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작전그룹을 지휘하며 지지가 탈환 작전을 입안해 전황을 결정지었다. 1980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85년 국방제1차관을 지냈으며 1983년 소련원수로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련 지상군의 중추를 이끈 전략가로, 냉전 말기 지상전력 현대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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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 1941–1945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 및 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 전역 참전
  •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속성과정 및 본과정 졸업
  • 1953–1955제50소총연대장
  • 1955–1957제39소총사단 참모장
  • 1957–1961제129차량화소총사단장
  • 1964–1966제5군 사령관
  • 1966–1972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2–1976극동군관구 사령관
  • 1976–1978소련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 1977–1978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국방부 작전그룹장 (오가덴 전쟁)
  • 1978–1980극동군 총사령관
  • 1980–1985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83소비에트 연방 원수 진급
  • 1985–1986소련 국방제1차관
  • 1986–1992소련 국방부 총감찰관
  • 1992–2014러시아 연방 국방부 고문

나코 스피루

Nako Spiru
알바니아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918–1947 사망 경위 미확정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경제기획자, 유고슬라비아 경제통제의 비판자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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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9두러스 소년 초등학교
  • 1929–1937코르푸의 이탈리아계 학교 수학
  • 1937토리노에서 경제학 전공 시작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청년부 책임자
  • 1944정치국원, 페르메트 회의 대표
  • 1946인민의회 의원 겸 간부회 서기, 3월 22일 경제장관
  • 1947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 베오그라드 경제교섭 대표

강건

강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8–1950 ✕ 전사

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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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표도르 다비도비치 쿨라코프

Фёдор Давыдович Кул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78 ○ 급사

브레즈네프의 후계 후보였으나 급서로 고르바초프의 자리를 열어준 농업 담당 서기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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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 1950–1955펜자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55–1959RSFSR 농업 차관
  • 1959–1960RSFSR 곡물생산물 장관
  • 1960–1964스타브로폴 변경당위 제1서기 — 고르바초프를 발탁·후원
  • 1964–1976중앙위 농업부장
  • 1965–1978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71–1978정치국 위원 (후보위원 건너뜀)

표트르 미로노비치 마셰로프

Пётр Миронович Маше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8–1980 ✕ 교통사고

벨라루스 파르티잔 영웅에서 산업화를 이끈 15년의 지도자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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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로소니 중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41–1942로소니 지하 콤소몰 조직 책임자
  • 1942–1943파르티잔 분견대 '쇼르스' 지휘관 (호출부호 '두브냐크')
  • 1943–1944로코솝스키 파르티잔 여단 정치위원, 빌레이카 지하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7–1954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55–1959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9–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65–1980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0CPSU 정치국 후보위원

이고리 데먀노비치 스타첸코

Игорь Демьянович Стац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87 ○ 사망

쿠바에 R-12 미사일을 배치한 51 로켓사단장

헬기에서 쿠바 중서부를 내려다본 스타첸코 소장은 깨달았다: 이 정도 야자수로는 90마일 북쪽 초강대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소련 전략로켓군 소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제51로켓사단을 지휘, 36기 R-12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10월 20일 전투 태세를 완료했다. 사후 보고서에서 정찰 부족과 현지 조건 무시 같은 참모본부의 '아나디리' 계획 결함을 솔직히 기술했다. 이후 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과 우주추적센터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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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치칼로프 대공포학교 사관생도
  • 1942–1945서부·북부전선 대공포대대장
  • 1957–1961제61대공사단장 → 참모본부 아카데미
  • 1961–1962제43로켓사단장 (롬니)
  • 1962제51로켓사단장, 아나디리 작전 (쿠바)
  • 1963–1967제5독립로켓군단 부사령관 (키로프)
  • 1967–1971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
  • 1971–1976제153우주추적센터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șescu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18–1989 ✕ 처형

독자 외교와 개인숭배를 결합한 루마니아 지도자

1968년 침공 비판은 동유럽 사회주의권 내부의 균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지도자가 되어 국가주의적 독자 노선과 강한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했으나, 1989년 혁명 속에서 정권과 함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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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89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국가 지도자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비판
  • 1989루마니아 혁명으로 실각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셰르비츠키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Щерби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0 ○ 자연사

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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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표도르 콘스탄티노비치 모르틴

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ор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90 ○ 자연사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 데탕트기 KGB 대외첩보의 짧았던 수장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로 냉전기 KGB 제1총국의 대외첩보 실무를 지휘하다 1971년 총국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재임 중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옮기고 과학기술 첩보를 확충하며,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지키려 한 전화 한 통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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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시골 학교 물리·수학 교사
  • 1939–1940지구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40–1941지구 중학교 교장
  • 1941–1942지구 당위원회 조직부장
  • 1942–1945현역군 정치장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45–1947소련군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중국어·영어 습득
  • 1947–1950KGB 대외첩보 장교, 장기 해외 파견
  • 1950–1954CPSU 중앙위원회 기구 근무
  • 1954–1958KGB 제1총국(PGU) 부국장
  • 1958–1971KGB 제1총국(PGU) 제1부국장
  • 1966–1967KGB 제101학교(고등정보학교) 교장 겸임
  • 1971–1974KGB 제1총국(PGU) 국장
  • 1974–1975소련 각료회의 과학기술 국가위원회 과학기술협력국장
  • 1975–1982KGB 의장 자문단 선임 자문관
  • 1982정년 퇴직

예브게니 필리포비치 이바놉스키

Евгений Филипп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라루스 1918–1991 ○ 자연사

NATO와 맞선 소련 최전선 전력을 8년간 지휘한, GSFG 최장 재임 사령관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NATO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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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전차 소대장 · 중대장, 모스크바 군관구
  • 1939–1940서부 벨라루스 진주 및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1945전차대대 참모장·대대장, 2전차군단 정찰부장·작전부장, 62근위중전차연대장 (서부·브랸스크·보로네시·제1·제2벨로루시 전선군)
  • 1946–1952근위기계화군 정찰부장 · 전투훈련부장
  • 1952–1953벨로루시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부사령관 (자주포)
  • 1953–1956기계화사단 참모장 → 전차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 1958–1961극동 군관구 제1부참모장
  • 1961–1965제1근위전차군 사령관, GSFG
  • 1965–1968모스크바 군관구 제1부사령관 → 사령관 직무대행
  • 1968–1972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72–1980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
  • 1980–1985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85–1989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89–1991국방부 감찰총감단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Аген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93 ○ 자연사

네 명의 서기장을 보좌한 소련 외교정책 실무자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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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타스 스톡홀름 특파원
  • 1942–1947주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 (콜론타이 보좌)
  • 1947–1961외무부 장관 보좌관
  • 1961–1963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3–1966중앙위 서기·제1서기의 국제문제 보좌관
  • 1966–1986중앙위 서기장 국제문제 보좌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셸레핀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Шелеп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94 ↓ 실각 1975

청년동맹에서 KGB로 간 야심가

1958년 KGB 의장에 임명될 때 흐루쇼프가 덧붙였다: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내가 도청당하지 않도록 조치해주게." 6년 후 셸레핀은 KGB를 동원해 흐루쇼프의 통신을 차단하고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콤소몰 지도자에서 KGB 의장으로 옮겨 보안기관의 세대교체를 상징했다. 이후 당 지도부에서 브레즈네프의 경쟁자로 여겨졌고 점차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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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콤소몰 제1서기, 전후 청년동맹 세대를 대표
  • 1958–1961KGB 의장, 보안기관의 젊은 세대교체를 추진
  • 1961–1967중앙위 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의장, 셸레핀 그룹 형성
  • 1964흐루쇼프 축출 과정에 참여
  • 1967–1975브레즈네프 체제에서 경쟁자로 여겨져 단계적으로 주변화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키순코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исунь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8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작전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계한 소련 군사과학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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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 1953SKB-30 / KB-1 — 특수설계국장, 대미사일 방어 주제 착수
  • 1956시스템 A 수석설계자 — 세계 최초의 실험적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
  • 1958A-35 미사일 방어 체계 총설계자
  • 1961OKB-30 (후일 OKB 빔펠) — 초대 소장 겸 총설계자
  • 1970중앙과학생산연합 빔펠 — 과학담당 부총국장
  • 1975중앙무선전자시스템연구소 — 과학담당 제1부소장 (ABM 작업에서 배제됨)
  • 1979–1987국방부 제45중앙연구소 — 과학 고문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이론문제부 — 연구실장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코체마소프

Вячеслав Иванович Кочем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8–1998 ○ 자연사

동독 해체를 지켜본 마지막 소련 대사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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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고리키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9–1955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55–1960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 1961–1962대외문화교류 국가위원회 부의장·제1부의장
  • 1962–1983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66–1983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83–1990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글루시코프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Глу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1999 ○ 자연사

11년간 소련의 모든 가격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수석 가격 행정관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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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화학임업 생산협동조합 회계사
  • 1936–1940소비자협동조합 체계 수석 회계사 → 주임 회계사
  • 1940–1944세베로니켈 콤비나트 수석 감사관, 노릴스크 콤비나트 부주임 회계사
  • 1944–1949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 주임 회계사 → 재무부장
  • 1949–1952예니세이스트로이 총국 재무부장
  • 1952–1957소련 비철금속부 광산관리국장
  • 1957–1963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부서장 → 재무경제관리국장 → 부의장
  • 1963–1965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 1966–1973소련 비철금속부 계획경제총국장
  • 1973–1975소련 비철금속부 차관
  • 1975–1986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아파나시예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фанас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2001 ○ 자연사

미사일과 우주산업의 장기 장관

1950년대 크렘린 회의에서 베리야가 수개월 안에 군용 로켓 생산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젊은 기술자였던 아파나시예프는 비현실적이라며 시간을 더 요구했고, 회의 뒤 한 참석자만이 그를 두둔했다. 체포령이 첫 반응이었다는 세부는 영문 자료에만 있다.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주 클린에서 태어나 1941년 바우만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소련 국가 활동가다. 전쟁 중에는 몰로토프(페름)의 제172포병공장에서 성형작약탄 생산에 참여했고, 국방산업부 기술총국의 선임기사·과장·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지냈다. 1957~1965년 레닌그라드와 러시아연방 경제회의를 이끌었고 러시아연방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했다. 1965년 3월 2일부터 1983년 4월 8일까지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1983~1987년 중공업·수송기계공업부 장관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2회), 레닌상·스탈린상·소련국가상 수상자이며 1961~1989년 당 중앙위원, 1962~1989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었다. 2001년 5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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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포병·미사일 관련 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61–1965방위산업 관련 국가위원회에서 로켓·우주 생산 조정
  • 1965–1983일반기계공업 장관, 탄도미사일·발사체·위성 산업 지휘
  • 1970s군사우주와 전략미사일 생산의 비밀 행정가로 활동
  • 1983 이후장기 우주산업 장관에서 물러나 군산복합체 원로로 남음

이반 키릴로비치 야코블레프

Иван Кириллович Яков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2002 ○ 자연사

내부군을 기동타격대로 재편하고 체르노빌 방어선을 친 MVD 장군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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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
  • 1958–1965국방부 군사교육국·육군 주참모부·육군 전투훈련본부 근무
  • 1965–1968모스크바군관구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
  • 1968–1986소련 MVD 내부군 총사령관 (1980년 육군대장 진급)
  • 1986–1992소련 국방부 장성감찰단 군사감찰관·고문
  • 1996–2002러시아 MVD 내부군 총사령관 고문, 참전용사협의회 활동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크류코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рю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2005 ○ 자연사

R-7의 패킷 구조를 설계한 코롤료프의 핵심 동료

1957년 8월 21일, 크류코프가 설계에 참여한 R-7이 마침내 예정 궤적을 완주했다.

세르게이 크류코프는 소련의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R-7의 전체 형상과 중앙 블록 주위에 네 개의 측면 블록을 배치하는 패킷 구조를 구체화한 인물이다. 코롤료프가 총괄 설계자였다면 크류코프는 프로젝트 부문과 설계 조직을 이끌며 구상을 실제 구조와 도면으로 묶었다. 그는 이후 라보치킨 설계국과 에네르기아에서도 자동 행성간 정거장과 우주 운반체 개발을 지휘했다. 이 경력은 우주개발이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전문화된 집단 설계와 생산 체계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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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40바흐치사라이 출생, 스탈린그라드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수학
  • 1940–1945바리카디 공장과 526번 공장에서 포병 생산을 감독
  • 1946–1947NIИ-88에서 근무, 독일 로켓 자료 조사와 귀환 수송을 담당
  • 1947–1956OKB-1 프로젝트 부문에서 선임 엔지니어와 부문 책임자로 승진
  • 1956–1961제3설계부장, R-7 주임 설계자, 사회주의노력영웅
  • 1961–1970OKB-1 부수석설계자, 이후 중앙설계국 부문장
  • 1970–1977라보치킨 설계국 수석설계자, 자동 행성간 정거장 개발 지휘
  • 1977–1996에네르기아 제1부총설계자와 과학 고문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그리고렌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го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7 ○ 자연사

SMERSH 라디오 게임에서 KGB 제2총국까지 40년 방첩의 설계자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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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NKVD 특별부 작전장교, 남서전선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 1943–1946SMERSH 3과 선임작전장교, 181건의 라디오 게임 수행
  • 1954–1956헝가리 주재 KGB 대표부 제1부대표
  • 1962–1969KGB 제1총국 대외방첩국장
  • 1970–1983KGB 제2총국장
  • 1978–1983KGB 부의장 (제2총국장 겸임)
  • 1983–1989소련 일반기계제작부 차관

비탈리 바실리예비치 페도르추크

Виталий Васильевич Федорч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8 ↓ 전보 1982

안드로포프 뒤의 짧은 KGB 의장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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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70s우크라이나와 군 방첩 계통에서 장기 보안 경력 축적
  • 1970–1982우크라이나 KGB 의장, 공화국 보안기관을 지휘
  • 1982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KGB 의장으로 승진
  • 1982–1986곧 내무장관으로 이동, 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의 규율 캠페인에 관여
  • 1986고르바초프 집권 뒤 해임

티모페이 보리소비치 구젠코

Тимофей Борисович Гуж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2008 ○ 자연사

원자력 쇄빙선대로 북극을 정복한 해운장관

1977년 8월 9일, 해운장관은 무르만스크 부두에서 아르크티카호에 직접 올랐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8일 뒤 인류 최초로 수상 선박이 북극점에 닿았다.

오룔 현의 농촌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전시 무르만스크 항에서 북극 호송선단 하역을 책임지며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사할린 해운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37세에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이 되었고, 1970년 해운장관에 올랐다. 16년 재임 동안 적자 부문이던 해운부를 80여 개 부처 중 외화 수입 5위의 핵심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레닌호 1척에 불과하던 원자력 쇄빙선대를 8척 체제로 확장했다. 1977년 직접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에 승선해 세계 최초로 수상 선박의 북극점 도달을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되었다. 1986년 여객선 아드미랄 나히모프호 침몰 참사로 경질되었으나, 그가 구축한 북극 항로와 쇄빙선대는 오늘날 러시아 북극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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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9무르만스크 항에서 교대 기사로 시작, 기계화 부서장·항만 주임기사로 승진하며 전시 북극 호송선단 하역 복구 책임
  • 1951–1955홀름스크 항만장 → 코르사코프 항만장 → 사할린 해운회사장,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
  • 1955–196037세,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으로 사할린 해운회사 경영 정상화
  • 1960–1962해운부 인사국장
  • 1962–1966CPSU 중앙위원회 교통·통신부 부장
  • 1966–1970해운부 제1차관
  • 1970–1986해운장관: 적자 부문을 외화 수입 5위로 전환, 원자력 쇄빙선대 1척→8척으로 확장, 연중 북극 항로 개설
  • 1977아르크티카호 북극점 원정 직접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 수훈

예브게니 게오르기예비치 페펠랴예프

Евгений Георгиевич Пепеля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8–2013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소련 에이스

“열두 번은 확신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합니다. 부풀리면 열다섯 번일지도 모릅니다.”

예브게니 페펠랴예프는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연대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극동 전선에서 쌓은 경험을 한국전쟁의 제트 공중전에 투입했다. 그는 196전투비행연대를 이끌어 만주 기지에서 유엔군 항공기와 싸웠고, 공식 19승으로 한국전쟁의 소련 측 최고 수준 에이스가 되었다. 승리 집계는 자료에 따라 19승에서 23승까지 갈리며, 그는 일부 격추를 편대원에게 돌렸다고 전해진다. 1952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뒤에도 방공 지휘와 연구 업무를 맡았고 1973년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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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제8군사비행학교 졸업, 극동 배치
  • 1943제162전투비행연대에서 벨로루시 전선 훈련·작전 비행
  • 1945제300전투비행연대 부연대장, 대일전 참전
  • 1949–1952제196전투비행연대장
  • 1951–1952한국전쟁 참전, 미그-15 편대 지휘
  • 1958–1960제133전투항공사단장
  • 1960–1973제78방공전투항공군단 항공대장, 중앙지휘소 근무 후 예편

이반 이바노비치 보듈

Иван Иванович Бодюл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몰도바 1918–2013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 20년 가까이 몰도바를 통치한 공화국 제1서기

모스크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온 드루처에 대해, 보듈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첫 번째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주겠다."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20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 중 하나다.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농업 공화국이었던 몰도바에 기계제조·전자·식품가공 등 신산업을 도입하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과수원과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어 억제, 교회 폐쇄 등 강압적 러시아화를 추진했으며, 작가 이온 드루처에게 '고향에 돌아오면 첫 가로등에 매달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임되었고, 퇴임 후인 2003년 몰도바 공화국 훈장 수여는 작가 8명의 훈장 반납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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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콜호즈 수석 농업기사
  • 1942–1946붉은군대 수의장교 (제127근위포병연대 → 제59근위소총사단 → 제10근위소총군단)
  • 1946–1951몰도바 SSR 각료회의 농업 담당 보좌관·감사관
  • 1951–1956키시뇨프·볼론티롭카·올라네슈티 지역당위 제1서기
  • 1956–1959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후 중앙위 조직당업무부 지도원
  • 1959–1961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1–1980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0–1985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이반 파블로비치 카자네츠

Иван Павлович Казане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13 ○ 자연사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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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보리스 예브게니예비치 파톤

Борис Евгеньевич Пато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8–2020 ○ 자연사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전기용접의 아버지

“과학은 내 삶의 본질이며, 아카데미는 내 직장이 아니라 나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보리스 파톤은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금속공학자로, 1962년부터 2020년까지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전기용접의 선구자로서 1950년대 초 전기슬래그 용접을 개발해 무제한 두께의 금속 접합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소련 중공업과 조선업을 혁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에서 탱크 생산 증대에 기여했다. 우주 용접 기술을 주도해 우주비행사들이 궤도에서 용접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전기용접을 의학에 접목해 생체 조직 용접법을 개척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영웅, CPSU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체르노빌 원전의 키예프 인근 건설을 반대하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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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 전기기사, 고리키
  • 1942–1953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연구원 → 부소장
  • 1953–2020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소장
  • 1962–202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62–1989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연방회의 부의장 1966–1989)
  • 1966–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프랑스 의용유격대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919–1944 ✕ 전사

점령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투쟁의 선구자

“티티의 원수를 갚았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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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전투원
  • 1939–1940프랑스 공산당 청년운동 간부
  • 1940–1941점령 프랑스의 지하 공산주의 조직가
  • 1941–1942조직특별부대 군사위원
  • 1942–1943두 지역 FTP 마키 조직자
  • 1943–1944프랑스 전역 FTP 마키 지휘관
  • 1944파리 해방 전후 FTP·FFI 지휘관
  • 1944파비앵 부대 지휘관, 동부 전선 전사
  • 1941.08.21바르베 지하철역에서 독일 해군 장교 알퐁스 모제르 사살
  • 1944.12.27알자스 합셈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

올레그 블라디미로비치 펜콥스키

Олег Владимирович Пеньк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1963 ✕ 처형

서방에 5천여 건의 소련 미사일 기밀을 넘겨 쿠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허세를 벗긴 GRU 대령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펜콥스키는 미국과 영국 육군 대령 군복을 차례로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이 제복을 진짜로 입게 될 날'을 말했다.

GRU 대령으로 근무하던 중 흐루쇼프 체제에 환멸을 느껴 1961년 MI6와 CIA에 자진 접촉했다. 18개월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태, 쿠바 미사일 기지 배치도, 군사교리 등 5천여 건의 기밀문서를 서방에 넘겼다. 그의 정보는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흐루쇼프의 위세와 달리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케네디에게 확신시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강경하게 대응할 근거가 되었다. 1962년 10월 KGB에 체포되어 이듬해 공개재판 끝에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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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제2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39–1945폴란드 침공·겨울전쟁·독소전 참전, 두 차례 부상,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포병사령관 부관
  •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30세에 대령 진급
  • 1949–1953군사외교아카데미 졸업, GRU 제4(중동)국 배속
  • 1955–1956주튀르키예 소련대사관 무관보 겸 GRU 거주자
  • 1960–1962국가과학기술위원회 대외관계국 부국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GRU 활동
  • 1961.4–1962.10MI6·CIA 이중첩보원, 런던·파리·모스크바에서 5천여 건 기밀 전달
  • 1963.5.11–16반역죄 사형 선고, 5일 뒤 집행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쿠노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к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1989 ○ 자연사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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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프라우다』 정보부 기자 → 문예담당, 주필 보좌관
  • 1941–1944전쟁 특파원 (칼리닌·북서·브랸스크·제4우크라이나·제2벨로루시 전선)
  • 1946–1947, 1951–1957『프라우다』 근무
  • 1957–1965CPSU 중앙위 기구 → 사회주의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 차장·제1차장
  • 1965–1976『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76–1983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3–198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
  • 1984–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엘레나 차우셰스쿠

Elena Ceaușescu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19–1989 ✕ 처형

권력과 과학의 권위를 함께 세운 독재정권의 2인자

“함께 싸웠으니, 함께 죽는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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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7루마니아 공산당 활동가·섬유공장 노동자
  • 1957–1967화학 연구자, 화학공학 학위와 박사학위 취득
  • 1972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3–1974정치집행위원회 위원, 상임국 위원
  • 1975–1989대국민의회 의원, 당·국가 지도부 인사
  • 1980–1989루마니아 각료회의 제1부총리
  • 1989.12혁명으로 체포되어 남편과 함께 처형

보리스 예브도키모비치 셰르비나

Борис Евдокимович Щербин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919–1990 ○ 자연사

시베리아 유전을 일군 체르노빌 사령관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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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련-핀란드 전쟁 자원입대 (제316스키대대)
  • 1942–1944하리코프주 콤소몰 서기
  • 1951–1961이르쿠츠크주 당서기 → 제2서기
  • 1961–1973튜멘주 당 제1서기
  • 1973–1984소련 석유·가스공업 건설장관
  • 1984–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에너지 부문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88아르메니아 지진 구호위원장

빌리암 샬고비치

Viliam Šalgovič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9–1990 ✕ 자살

둡체크를 체포해 소련에 넘긴 내무차관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둡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둡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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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 파르티잔으로 탈주
  • 1945–1951체코슬로바키아군 방첩 장교, 레이친 계열
  • 1950–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62–19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통제감사위 부위원장
  • 1968.6–8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 프라하의 봄 진압 계획
  • 1969헝가리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무관
  • 1975–1989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알히모프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Алх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1993 ○ 자연사

국가은행을 오래 이끈 통화 관료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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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0전연방 대외무역아카데미 수료, 영국 은행 연구로 경제학 박사 취득
  • 1950–1967대외무역부 산하 연구소·통화관리국에서 성장, 주미 무역고문 역임
  • 1967–1976대외무역부 차관, 소련의 대외결제 및 통화정책 조정
  • 1976–1986국가은행 총재, 계획경제의 결제·신용·발권 관리
  • 1986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과 가족 망명 여파 속 퇴임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부슈예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Бушу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1996 ○ 자연사

소련 화학공업을 지휘한 당 중앙위 부장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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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 졸업
  • 1942–1950s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엔지니어 → 선임 엔지니어
  • 194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50s–1965고스플란 부문장 → 소련 각료회의 산하 고스플란 부서 부책임자
  • 1965–1976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
  • 1966–1981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67–1980RSFSR 최고회의 대의원 (제7·8·9 소집)

게오르기 엠마누일로비치 츠카노프

Георгий Эммануилович Цук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9–2001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문서를 통제한 조용한 문지기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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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 1958–1960CPSU 중앙위원회 기구
  • 1960–1963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기구
  • 1963–1964CPSU 중앙위원회 서기 보좌관
  • 1964–1966CPSU 중앙위원회 제1서기(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서기장(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 보좌관
  • 1983–198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담당부서 제1부장
  • 1985–2001연금 생활

올레크 알렉산드로비치 트로야놉스키

Олег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03 ○ 자연사

스탈린의 통역에서 유엔 대사까지, 냉전 위기를 재치로 버텨낸 소련 외교관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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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붉은 군대 복무, 군사외국어대학
  • 1944–1947주영 소련 대사관 아타셰·스탈린 통역
  • 1947–1953몰로토프 비서진·영문지 『뉴스』 편집
  • 1953–1958소련 외무장관 보좌관
  • 1958–1967각료회의 의장 외교 보좌관 (불가닌·흐루쇼프·코시긴)
  • 1967–1976주일 소련 대사
  • 1976–1986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6–1990주중 소련 대사

파벨 바실리예비치 피노게노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Финоге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재래식 무기 생산을 총괄한 국방공업장관

1941년 7월, 22세의 피노게노프는 7일간 열차로 코브로프 공장에 도착해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공장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ShVAK 기관포의 가장 핵심 부품인 포미 장치에 나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2세의 나이로 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관포 ShVAK와 대전차소총 PTRD 생산을 진두지휘했고, 전후에는 오토바이 민수 전환을 거쳐 공장장까지 오른 군수 생산 행정가다. 1954년부터 6년간 공장장을 맡으며 S-75 지대공 미사일 유도장치와 소련 최초의 대전차유도탄 '시멜'의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1979년 세르게이 즈베료프의 후임으로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까지 10년간 소련의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전체를 지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군수 조달의 안정성을 책임졌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레닌상(1982), 국가상 2회(1979, 1989)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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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 교대 마스터로 배치 — ShVAK 항공기관포 생산
  • 1941–1942선임 마스터, 부공장장, 공장장 대리 — DP·DT 기관총, PTRD 대전차소총 생산
  • 1942–1946공장장 — ShVAK 기관포·기관총·대전차소총 공장 책임
  • 1946–1948오토바이 생산 책임자 — 전후 민수 전환, K-125 모델 시리즈 출시
  • 1948–1953공장장, 생산부장 대리, 주임기사 — 공장 내 주요 생산 책임
  • 1953–1954주임기사 겸 부공장장
  • 1954–1960데그탸료프 공장장 — S-75 유도장치·대전차유도탄 '시멜' 양산 체계 구축
  • 1960–1963블라디미르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기계제조·에너지 관할
  • 1963–1965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제6국장
  • 1965–1973소련 국방공업 차관
  • 1973–1979소련 국방공업 제1차관
  • 1979–1989소련 국방공업장관 —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총괄
  • 1989–1992연방급 개인 연금 수급자
  • 1992–2004OAO 특수기계제조·야금 선임 엔지니어

유리 브세볼로도비치 보틴체프

Юрий Всеволодович Вотин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9–2005 ○ 자연사

미사일방어 체계를 세우고 오경보를 증언한 장군

그의 회고록은 페트로프의 오경보 판단을 군 내부의 비밀에서 공개된 냉전사의 사건으로 바꾸었다.

유리 보틴체프는 소련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휘를 거쳐 방공과 미사일·우주방어 체계의 조직자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창설된 미사일·우주방어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기술 체계와 군 지휘를 결합했다. 1983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오경보 보고를 처음 받은 직속 상관이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사건을 공개해 페트로프의 판단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기록은 페트로프를 치하하면서도 군사 일지 문제로 질책한 체제의 모순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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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8레닌그라드·수미 포병학교 수학
  • 1938–1942트빌리시·펜자 포병학교 교관 및 포대 지휘관
  • 1943–1945제295박격포연대 지휘·참모, 전선 전투 참가
  • 1959–1963투르키스탄·제30독립방공군단 사령관
  • 1963–1967제12독립방공군 사령관
  • 1967–1986미사일·우주방어군 초대 사령관
  • 1984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훈
  • 1993–2005회고록 집필 및 모스크바 지역 참전용사회 활동

자오쯔양

赵紫阳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9–2005 ↓ 실각 1989 · 연금 중 사망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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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80쓰촨성 당위원회 제1서기
  • 1980–1987국무원 총리
  • 1987–1989중공 중앙 총서기

유리 안드레예비치 즈다노프

Юрий Андреевич Жд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9–2006 ○ 자연사

스탈린의 사위, 리센코를 비판했다 굴복한 과학 관료에서 로스토프 대학의 설계자로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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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교관·선전문필원
  • 1947–1948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부장
  • 1948–1950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섹터장
  • 1950–1952중앙위 과학·고등교육부장
  • 1952–1953중앙위 자연·기술과학·고등교육부장
  • 1952–1956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53–1957로스토프 국립대학 조교·부교수·교수, 로스토프 주당위 과학문화부장
  • 1957–1988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

보리스 그리고리예비치 두봅스키

Борис Григорьевич Дуб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08 ○ 자연사

F-1 첫 임계의 방사선 계측을 책임지고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를 세운 물리학자

1944년, 전선에서 세 번째 중상을 입고 제대한 두봅스키가 목발을 짚고 쿠르차토프를 찾아가자 쿠르차토프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하겠나?"라고 물었다. 한 달 뒤 그는 목발 없이 지팡이만 짚고 다시 나타나 제2연구소에 채용되었다.

하리코프 대학 출신의 소련 핵물리학자. 1944년 부상 제대 후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해 F-1 원자로 조립 중 방사선량 계측과 감마선 차폐 실험을 수행했으며, 중성자 계수기를 직접 제작하고 플루토늄 축적 계산을 맡았다. 1946년 12월 25일 임계 당시 통제실에 남은 소수 인원 중 하나였고, 이후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의 기초를 세웠으며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1954)와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로들의 물리 기동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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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하리코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하리코프 물리기술연구소 근무
  • 1941–1943전선 복무, 보병대대장, 3회 부상으로 전역
  • 1944–1946제2연구소 F-1 원자로: 선량계측·감마선 차폐·중성자 계수기·플루토늄 축적 계산
  • 1947–1952방사선안전 그룹 책임자, 마야크(콤비나트 817호) 플루토늄 생산로 물리 기동
  • 1954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세계 최초) 물리 기동, A.K. 크라신과 공동 지휘
  • 1958–1977물리·에너지연구소(오브닌스크) 핵안전연구실장
  • 1977–1986중형기계제조부 근무, 체르노빌 사고 후 설계 결함 공개 비판으로 퇴직
  • 1990년대국가두마 생태위원회 전문가, 방사성폐기물 안전법 초안 참여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그리브코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Гриб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08 ○ 자연사

쿠바 미사일 위기의 비밀 설계자이자 바르샤바 조약군의 마지막 참모총장

아나디리 작전 초기 계획 단계에서 참모총국은 단 5명의 장교만 기밀로 삼았다. 서기 한 명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계획 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냉전 시대를 관통한 군인이다. 1962년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안을 작성한 참모 장교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물리적 토대를 설계했으며,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퇴역 후에는 미·소 양측 장성이 함께 저술한 공동 회고록 『작전명 아나디리』(1994)를 통해 냉전 최대 위기의 내막을 공개하며 역사적 화해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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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제39경전차여단 전차소대장,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1945참모총국 작전장교·대표, 서부·브랸스크·칼리닌·남부전선에서 종군
  • 1960–1965참모총국 주작전국 작전국장 겸 부국장
  • 1962아나디리 작전 계획 수립 및 쿠바 파견, 국방장관 대표
  • 1965–1968제7근위군 사령관 (자캅카스 군관구)
  • 1973–1976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76–1989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
  • 1989–1992소련 국방부 감찰장군단

드미트리 일리치 코즐로프

Дмитрий Ильич Коз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09 ○ 자연사

R-7의 설계·양산·계열화를 모두 이끈 코롤료프의 오른팔

1944년 7월 비보르크 북방 전투에서 왼팔을 잃고 제대한 24세의 소위는, 13년 뒤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코롤료프의 지명으로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세묘르카'의 설계를 이끌었고, 쿠이비셰프(사마라)로 파견되어 항공공장에서 R-7 계열의 양산을 조직했다. 1974년 OKB-1에서 분리된 중앙특수설계국(TsSKB)을 창설해 초대 국장 겸 총설계자가 되었으며, 보스토크·몰니야·소유스 발사체와 정찰·과학 위성군을 개발했다. R-7의 설계·양산·계열화 모두에 걸친 그의 일생은 스푸트니크에서 오늘날의 소유스까지 이어지는 우주 수송의 척추를 세운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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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1NII-88 → OKB-1 설계기사
  • 1951–1958OKB-1 주임 설계자: R-5,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8–1961OKB-1 부수석설계자, 쿠이비셰프 제1공장 R-7 양산 책임
  • 1961–1966OKB-1 부수석설계자 겸 제3지부장·주임설계자
  • 1966–1974TsKBEM 제1부수석설계자, 쿠이비셰프 지부장 · 주임설계자
  • 1974–1983TsSKB 초대 국장 겸 주임설계자
  • 1983–1996TsSKB 국장 겸 총설계자
  • 1996–2003TsSKB-프로그레스 총책임자 겸 총설계자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도브리닌

Анатолий Фёдорович Добры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2010 ○ 자연사

냉전기 24년간 워싱턴에 머물며 미소 외교의 숨은 회로가 된 대사

1962년 10월 27일 밤, 로버트 케네디와의 비밀 독대. 소련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고, 미국은 터키의 미사일을 조용히 철거하겠다는 비공식 확약을 전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내며 냉전기 미소 외교의 핵심 회로로 기능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로버트 케네디와의 비밀 협상으로 핵전쟁을 막았고, 이후 키신저와의 비공식 채널을 구축해 데탕트와 SALT 협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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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고등외교학교 입학, '스탈린식 외교 소집'
  • 1946외무성 입성, 몰로토프·그로미코 보좌
  • 1952–1957주미 대사관 참사관
  • 1957–1959유엔 사무차장
  • 1960–1962외무성 미주국장
  • 1962–1986주미 대사 — 24년간 6명의 미 대통령과 근무
  • 1986–1988중앙위 서기 겸 국제부장
  • 1988–1991고르바초프 외교 고문

투르다쿤 우수발리예비치 우수발리예프

Турдакун Усубалиевич Усубал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스탄 1919–2015 ○ 자연사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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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코치코르 중학교 교사·교무주임
  • 1941–1942코치코르 지구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42–1943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 1945–1955CPSU 중앙위원회 교관 (모스크바)
  • 1955–1956공화국 일간지 《소베티크 키르기즈스탄》 편집장
  • 1956–1958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8–1961프룬제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9–1961키르기스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61–1985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3–2005키르기스 공화국 조고르쿠 케네시(의회) 의원

에두아르두 시밤부 몬들라느

Eduardo Chivambo Mondlane
모잠비크 해방전선 공산주의 포르투갈 모잠비크 1920–1969 ✕ 암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류학자에서 모잠비크 해방전선의 창립자로

“비록 대학 생활을 무엇보다 사랑했지만, 나는 남은 생애를 조국 해방 전쟁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였으나, 교수직을 버리고 흩어진 모잠비크 해방 조직들을 한데 모아 해방전선(FRELIMO)을 창립했다. 초대 의장으로서 1964년 무장 투쟁을 개시해 독립 전쟁의 토대를 놓고 이를 이끌다가, 1969년 서신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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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오벌린 칼리지 인류학·사회학 학사
  • 1955노스웨스턴대 석사
  • 1957–1961유엔 신탁통치국 연구관 — 아프리카 현지 조사
  • 1960노스웨스턴대 인류학 박사 — 허스코비츠 지도
  • 1961–1963시러큐스대 교수 — 동아프리카학 프로그램 구축
  • 1962FRELIMO 창립, 초대 의장 선출
  • 1964포르투갈 식민 통치에 맞서 무장 해방 투쟁 개시 (9월 25일)
  • 1968제2차 FRELIMO 대회 — 사회주의 노선과 지구전 전략 채택, 의장 재선
  • 1969.2.3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서신 폭탄으로 암살

이반 니키토비치 코제두프

Иван Н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0–1991 ○ 심장마비

연합군 최고 격추 기록의 소련 전투기 에이스

「단련되지 않은 용기는 빈 총알일 뿐이다」 — 『조국에 대한 충성』에서.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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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9공군사관학교(모니노) 졸업
  • 1951–1952제324전투항공사단장, 한국전쟁 참전 (암호명 '크릴로프')
  • 1956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4–1971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제1부사령관
  • 1971–1978공군 전투훈련총국 제1부국장
  • 1985항공원수 진급

카이손 폼비한

ໄກສອນ ພົມວິຫານ
라오스 공산주의 라오스 라오스 (라오·베트남계) 1920–1992

라오스 혁명과 경제개혁

1975년 12월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군주제 폐지와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지도자이자 1975년 공화국 수립 후 총리였다. 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재편했고, 1980년대에는 신경제체제로 이어지는 시장 지향 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 국가주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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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인도차이나공산당 입당
  • 1947라오스 북동부 저항 지도, 인민무장조직 구성
  • 1949라오인민해방군 창설
  • 1950저항정부 국방장관
  • 1955라오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75라오인민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 1986'신경제체제'(찐타깐마이) 개혁 발표
  • 1991국가주석

후세인 쿨미예 아프라

Xuseen Kulmiye Afrax
공산주의 소말리아 소말리아 1920–1993

소말리아 혁명평의회의 지도부

1991년 정권 붕괴 뒤, 그는 다른 하위예 장교들과 함께 모가디슈에서 체포되지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소말리아의 경찰 간부 출신 정치가로 1969년 쿠데타 이후 바레 정권에 참여했다. 1970년 내무장관이 되었고 1971년부터 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중 한 명을 맡았다. 군·경 출신 지도부가 국가 행정을 장악한 구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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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이탈리아 식민지 경찰에 입대
  • 1950–1954모가디슈 경찰학교 교관·통역, 로마 장교학교 수료
  • 1960아덴 압둘라 오스만 대통령의 부관
  • 1970내무장관 (1974년까지)
  • 1971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6부통령, 혁명사회당 정치국 위원
  • 1987부총리 겸 국가계획장관
  • 1989국민의회 의장 (1991년까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레쿤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екун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0–1996 ○ 자연사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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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로스토프주 베르흐네돈스코이 지구 검사 보좌관
  • 1947–1952로스토프주 콘스탄티놉스키·아조프 지구 검사
  • 1960–1966브랸스크주 검사
  • 1966–1971보로네시주 검사
  • 1971–1976러시아 SFSR 검찰 제1부검사장
  • 1976–1981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1–1988소련 검찰총장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 1992–1994러시아 연방 검찰청 정치탄압 피해자 재활부 검사

또흐우

Tố Hữu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20–2002 ○ 실각 1986 · 자연사

혁명을 노래한 시인이자 문예·선전의 경계를 정한 당의 사상 지도자

1985년 화폐 개혁 실패 뒤 민중은 "시인이 경제를 맡고, 장군이 피임 링을 놓는다"고 조롱했다.

식민지 감옥에서 혁명시를 쓰기 시작해 두 차례 항전 내내 민족의 투쟁을 서정으로 노래한, 베트남 혁명시의 기수였다. 1968년부터 중앙선전·문화 부문을 총괄하며 문학이 정치의 도구여야 한다고 보아 작가·지식인에 대한 강경한 통제를 주도했고, 그 이름은 인문·가이팜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1976년 제4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뽑혀 통일 뒤 남부의 언론·문화 기관을 단일 국가로 합치는 작업을 감독했고,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1985년 화폐 개혁의 실패 책임으로 실각해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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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5투아티엔후에 기폭위원회 위원장
  • 1948베트남 문예협회 부총서기
  • 1954선전부 차관
  • 1968–1982중앙 선전·문화위원회 위원장
  • 1976정치국 후보위원 · 중앙 통일위원회 위원장
  • 1980–1986부총리(각료회의 제1부주석)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예고리체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Егоры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0–2005 ↓ 강등 1967

모스크바 당 보스에서 브레즈네프에게 도전했다가 외교관으로 밀려난 인물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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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서기
  • 1956–1960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60–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62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2서기
  • 1962–1967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88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야드가르 사디코브나 나스리디노바

Ядгар Садыковна Насриддин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0–2006 ↓ 퇴임 1974

우즈베크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크림 반도 귀환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 중앙과 공화국 엘리트의 연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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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우즈베크 공화국 콤소몰·당·국가 행정에서 성장
  • 1959–1970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70–1974민족소비에트 의장, 중앙의 공화국 대표제에서 높은 지위에 오름
  • 1974우즈베크 지도부 교체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퇴임
  • 이후공식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메샤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Меся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20–2011 ○ 자연사

조작된 의사 사건을 밝혀낸 관료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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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해군 인민위원부·내무인민위원부 특별부·스메르시 수사관
  • 1946–1952전연방 레닌주의 청년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
  • 1953국가보안기관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의사 사건 재검토
  • 1955–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62–1964중국 주재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산당 관계 부서 부부장
  • 1964–1970소련 국가텔레비전·라디오방송위원회 위원장
  • 1970–1972오스트레일리아 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2–1988사회과학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역사학부장

이반 라브렌티예비치 우스티노프

Иван Лаврентьевич Уст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0–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군 방첩의 수장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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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북우랄 NKVD 교정노동수용소 의료진
  • 1941–1945NKVD 특별부서 · SMERSH 작전요원 (서부·발트·벨로루시 전선)
  • 1951–1957주독 소련군 MGB/MVD/KGB 방첩부서 요직
  • 1958–1963KGB 제6근위전차군 특별부서장
  • 1963–1968극동군관구 KGB 특별부서 부국장 → 국장
  • 1968–1970KGB 제3국 부국장
  • 1970–1973KGB 제3국장 (군 방첩 총괄)
  • 1973–1981주독 소련군 KGB 특별부서장
  • 1981–1991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 (KGB 예비역)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0–2021 ↓ 실각 1990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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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Василий Иосифович Ст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21–1962 ○ 알코올 중독

공군 중장이자 소련 아이스하키의 창시자, 지도자의 아들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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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공군 소위 임관
  • 1941–1942제16전투항공연대에서 복무, 전투 출격 수행
  • 1943제32근위전투항공연대 연대장
  • 1944–1945제3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86전투항공사단 사단장
  • 1946항공 소장 진급, 제1근위전투항공군단장
  • 1948–1952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항공 중장 진급(1949)
  • 1953체포,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8년형 선고
  • 1960–1962석방 후 재수감, 카잔으로 유배,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테파리 벤티

ተፈሪ በንቲ
에티오피아 공산주의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921–1977 ✕ 군부 숙청으로 피살

데르그의 초기 의장

1975년 7월 그는 '구체제를 거부한 모든 세력'의 '밑으로부터' 세워지는 통일전선을 제안했고, 멩기스투 진영은 이 전략을 반대했다.

1974년 말 에티오피아 데르그 의장이 된 군인이다.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진행된 시기에 국가원수를 맡았으나 군부 내부 권력투쟁을 통제하지 못했다. 1977년 2월 살해됐고 멩기스투가 지도부의 우위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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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에티오피아 육군 입대
  • 1967워싱턴 주재 무관
  • 1974제4사단 준장
  • 1974–1977데르그(PMAC) 의장 겸 국가원수

바딤 스테파노비치 티쿠노프

Вадим Степанович Тик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1–1980 ○ 자연사

흐루쇼프기 RSFSR 경찰을 이끈 셸레핀계 내무장관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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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7콤소몰 악퇴빈스크 지역위원회 서기 → 에스토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47–1952블라디미르주 콤소몰 제1서기 → 블라디미르 시·주 당위원회 서기
  • 1952–1959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국가보안 담당 섹터장 → 부부장
  • 1959–1961소련 KGB 부의장
  • 1961–1966RSFSR 내무장관 (1962년부터 공공질서수호장관)
  • 1967–1969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
  • 1969–1974주 루마니아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74–1978주 상부볼타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8–1980주 카메룬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이노젬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Иноземце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1–1982 ○ 자연사

브레즈네프 데탕트의 지적 설계자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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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7『꼬무니스트』 국제부 컨설턴트
  • 1957–1959IMEMO 국제관계 부문장
  • 1959–1961IMEMO 부소장
  • 1961–1966『쁘라우다』 부주필
  • 1966–1982IMEMO 소장
  • 1971–1981CPSU 중앙위 후보위원
  • 1981–1982CPSU 중앙위원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21–1990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둡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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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5–56즐린(고트발도프) 지역당 서기
  • 1960–62KSČ 중앙위 계획부장
  • 1962–63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63–68체코슬로바키아 교통장관
  • 1968.8'초청 편지' 서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내정
  • 1968–71KSČ 중앙위 서기
  • 1971–89KSČ 정치국원, 연방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비노그라도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1–1997 ○ 자연사

1973년 전쟁과 이란 혁명을 내부에서 목격한 소련 중동 외교관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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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3붉은 군대 복무
  • 1948–1950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장
  • 1950–1952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대표
  • 1952–1956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 부국장
  • 1956–1962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장
  • 1962–1967주일 소련 대사
  • 1967–1970소련 외무차관
  • 1970–1974주이집트 소련 대사
  • 1974–1977소련 외무부 특명대사
  • 1977–1982주이란 소련 대사
  • 1982–1990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
  • 1990–1997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 강의, 중동평화위원회 위원장

화궈펑

华国锋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21–2008 ↓ 퇴임 1981 · 자연사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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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0국무원 총리
  • 1976–1981중공 중앙 주석

게르하르트 쉬러

Gerhard Schürer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21–2010 ○ 사망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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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쿨리코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Кул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1–2013 ○ 자연사

12년간 바르샤바 조약군을 지휘한 최장수 총사령관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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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 195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계화연대·사단장 역임
  • 1959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5근위전차군 부사령관
  • 1964제6제병연합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67–196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9–1971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71–1977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 1977–1989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겸 국방제1차관
  • 1999–2003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체르냐예프

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1–2017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펜이자 양심: 신사고 외교의 설계자

1989년 11월 10일 일기,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출처: 고르바초프 재단 문서고,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번역.

1921년 5월 25일 모스크바(마리나 로샤)에서 태어나 2017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7월 붉은군대에 지원해 북서전선에서 발트 해방 작전에 참전했고 1945년 제대했다.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58–1961년 프라하에서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61년 중앙위 국제부에 들어가 1986년 3월부터 1991년까지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고, 1989–1991년 인민대의원을 지냈다. 1992년부터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문서 사업을 이끌었다. 학위 연도와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기는 사료 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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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붉은군대: 1941년 7월 지원 입대, 제1충격군 소속 북서전선 참전, 부상, 1945–1946년 제대
  • 1938–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1938–1941 재학, 1947–1949 복학 후 대학원); 1950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50–1958모스크바대학 근현대사 강의, 학과장 대리
  • 1958–1961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
  • 1961–1986중앙위 국제부: 포노마료프 밑의 담당관에서 부부장으로(러시아어 위키백과·RGASPI는 1970–1986년, NSA는 1972–1985년으로 기록)
  • 1986–1991고르바초프 외교정책 보좌관: 정상회담 실무, 연설문, 신사고 외교 설계
  • 1992–2011고르바초프 재단: ‘페레스트로이카 문서사’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정책’ 사업; 1992–2011년 재직

아고스티뉴 네투

Agostinho Neto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22–1979 ○ 췌장암 · 만성 간염(간암설도 있음)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 시인,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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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Enrico Berlinguer
이탈리아 공산당 공산주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1922–1984 ○ 뇌출혈

서구 최대 비집권 공산당을 이끈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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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PCI 입당, 사사리 청년공산주의자 지부 창립
  • 1944반파시스트 빵 시위로 체포, 3개월 구금 후 무혐의 석방
  • 1949–1956이탈리아청년공산동맹(FGCI) 서기
  • 1962PCI 서기국 위원 겸 국제부 책임자
  • 1968–1984이탈리아 하원의원 (로마, 5선)
  • 1969PCI 부서기, 루이지 론고의 후계자로 내정
  • 1972–1984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
  • 1979–1982유럽의회 의원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플레샤코프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Плеш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2–1987 ○ 자연사

소련 전파전자전의 설계자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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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 1958–1964TsNII-108 소장, 공병대령
  • 1964–1968국가무선전자위원회 부위원장, 라디오공업 차관
  • 1968–1974라디오공업부 제1차관
  • 1974–1987라디오공업부 장관, 대장 진급

게오르기 니키토비치 볼샤코프

Георгий Никитович Больш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2–1989 ○ 사망

흐루쇼프와 케네디 사이의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한 GRU 장교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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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 1962–1989노보스티 통신사 근무, 잡지 「소비에트 연방」 편집장 역임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2–1994 ○ 암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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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비치 가푸로프

Мухамедназар Гапурович Гапу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22–1999 ○ 자연사

16년간 브레즈네프 시대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끌며 면화·가스 경제를 통합한 공화국 지도자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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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차르조우주 8년제 학교 교사
  • 1941–1943소련군 자동소총 분대장, 북서전선 참전, 중상으로 제대
  • 1943–1944학교 교무주임·교장, 차르조우주
  • 1944–1947차르조우 지역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48–1951차르조우주 콤소몰 제1서기
  • 1951–1955투르크멘 SSR 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2차르조우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63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3–1969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 1969–1985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1971 후보위원)

헤게뒤시 언드라시

Hegedüs Andrá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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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니콜라이 겐나디예비치 바소프

Николай Геннадиевич Б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2–2001 ○ 자연사

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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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바딤 알렉세예비치 키르피첸코

Вадим Алексеевич Кирпи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2–2005 ○ 자연사

소련 대외정보 작전을 12년간 지휘한 KGB 제1총국 부국장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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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제103근위소총사단 복무 (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전선)
  • 1947–1952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
  • 1952–1953KGB 제101정보학교
  • 1953–1954KGB 제1총국 동방부
  • 1954–1960KGB 주이집트 부주재관
  • 1962–1964KGB 주튀니지 주재관
  • 1967–1970KGB 제1총국 아프리카부장
  • 1970–1974KGB 주이집트 주재관
  • 1974–1979KGB 제1총국 부국장 겸 'S'국장 (비합법정보)
  • 1979–1991KGB 제1총국 제1부국장
  • 1988–1989KGB 제1총국장 권한대행
  • 1991–1997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고문단장

보반끼엣

Võ Văn Kiệt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22–2008 ○ 싱가포르에서 별세

도이머이 개혁의 설계자이자 베트남의 총리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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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6–195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참전
  • 1976–1982호찌민시 당 책임자
  • 1982–1991부총리
  • 1991–1997총리
  • 1995아세안 가입, 미국과 국교 정상화

올레그 겐리호비치 이바놉스키

Олег Генрих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22–2014 ○ 자연사

초기 우주선의 조립과 시험을 이끈 설계자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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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붉은군대 국경·기병부대 복무,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NI-88 기술자·선임기술자, 모스크바 동력공학대학 졸업
  • 1954–1957OKB-1 설계자, 초기 인공위성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 1호·2호 및 달 탐사선 설계 책임, 보스토크 수석설계자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군산문제 국가위원회 우주부문장
  • 1965–1983라보치킨 설계국 달·행성 부문 부총괄·총괄설계자
  • 1983–2014라보치킨 우주기술박물관장 및 과학고문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2–2019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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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조야 아나톨리예브나 코스모데먄스카야

Зоя Анатольевна Космодемьянска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41 ✕ 처형

소련 최초의 여성 영웅, 18세에 교수대에서 「스탈린이 올 것이다」를 외친 파르티잔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조야는 외쳤다: 「작별이에요, 동지들! 싸우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탈린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탈린이 올 것입니다!」

소련의 가장 상징적인 전쟁 영웅 중 한 명. 1941년 10월 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해 서부전선 사령부 직속 정찰·방화 공작부대 9903에 배속되었고, 독일군 후방에서 도로 매설과 통신선 절단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27일 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세 채에 방화한 뒤 이튿날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마디도 불지 않았고, 11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프라우다』 기자 표트르 리도프의 취재로 전모가 알려지자 스탈린은 "인민의 영웅"이라 칭했고, 1942년 2월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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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콤소몰 가입
  • 1941.10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 서부전선 정찰·방화 부대 9903 배속
  • 1941.11.4–17볼로콜람스크 방면에서 도로 매설·통신선 절단 임무 수행
  • 1941.11.27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3채 방화
  • 1941.11.28–29체포·고문 후 교수형 — 가명 「타냐」만 대고 끝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음
  • 1942.2.16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수여 (여성 최초, 추서)

디파 누산타라 아잇

Dipa Nusantara Aidit
인도네시아 공산당 공산주의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923–1965 ✕ 처형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세계 3대 공산당으로 키운 조직가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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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게린도(인도네시아 인민운동) 청년조직 활동
  • 1943인도네시아 공산당 입당
  • 1944–1945지하 반파시스트 조직 '자유 인도네시아 운동' 지도부
  • 1947–1948PKI 중앙위원 → 정치국원
  • 1951–1959PKI 서기장
  • 1959–1965PKI 중앙위원회 의장
  • 1959–1965최고자문회의 위원, 임시국민협의회 부의장, 무임소장관 겸직
  • 1965.11.22중부자바에서 체포되어 즉결처형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82 ○ 병사

OGAS라는 전국 실시간 네트워크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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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로스토프 대학 졸업, 우랄 산림공과대학 교편
  • 1951–1955물리수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 힐베르트 제5문제 연구
  • 1956–1962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계산센터 소장 — MESM 실험실 계승
  • 1962–1982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창설 소장 겸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3–1982국가과학기술위 산하 전산기술·경제수학 도입 위원회 의장
  • 1966–1982키예프 대학 이론사이버네틱스 학과장, 사이버네틱스 학부 공동 창설
  • 1967–1982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키예프 분과 창설·지도
  • 1971–198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8~10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수탸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Сутя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3–1986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최고 득점 소련 에이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상공에서 149회 출격해 22승을 기록했다.

니콜라이 수탸긴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로, 제트전투기 시대의 대표적 에이스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그-15를 몰며 149회 출격과 66회 공중전을 기록했고, 소련 자료 기준 22대의 항공기를 격추해 소련군 조종사단의 전투 성과를 상징했다. 그의 전과는 냉전 초기 소련이 조선 상공에 비밀리에 개입한 현실과, 공중전의 승리 기록이 자료와 교전 당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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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붉은군대 징집, 체르니고프 군사비행학교 조종사 과정
  • 1942–1947제5전투항공연대 조종사·편대장, 극동전선
  • 1945소련·일본 전쟁과 만주 전략공세에 참전
  • 1947–1951제17전투항공연대, MiG-15 전투기 전환
  • 1951–1952한국전쟁, 제17전투항공연대 부대 지휘·전술 담당, 22승
  • 1956–1964군사·총참모부 아카데미 수학, 교육부대 지휘
  • 1964–1978하르키우 항공학교장, 공군 지휘관, 베트남 항공 군사고문
  • 1978항공 소장으로 전역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1923년 러시아 탐보프주 빈드레이 마을에서 태어나 1983년 소련 원수, 1984~88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을 지낸 군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생도로 참전해 부상과 동상을 입은 뒤 기갑 병과로 전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파트너로서 INF 조약 등 군축 협상을 뒷받침했으나 군사개혁과 일방적 감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이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유서에는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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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모스크바 제1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생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해 부상·동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1968~1972),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 1988–1991국방부 총감독부 감독관 겸 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콜두노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лд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2 ○ 자연사

독소전 최고의 Yak 에이스에서 방공군 총사령관으로, 루스트 사건 한 방에 퇴장한 항공 총원수

1944년 11월 니시 상공. 미군 P-38 편대의 오인 공격에 콜두노프 대위가 Yak-9로 미군 선도기 옆에 붙어 날개를 흔들며 적색 별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소 직접 교전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독소전쟁에서 412회 출격, 96회 공중전을 치르며 46기를 격추한 Yak 전투기 최고의 에이스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니시 상공에서 소련 부대를 오인 공격한 미군 P-38 편대와의 교전을 직접 종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후 방공군으로 전환해 1978년 방공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84년 항공 총원수 계급을 받았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하자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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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866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비행대장 — 412회 출격, 46기 격추,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52–1960공군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전투항공연대장·사단장
  • 1962–1968바쿠 방공군구 전투항공 사령관 → 제11방공군 사령관 (극동)
  • 1970–197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75–1978방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78–1987방공군 총사령관, 1984년 항공 총원수 진급
  • 1987.6마티아스 루스트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해임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루셰프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у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7 ○ 자연사

바르샤바 조약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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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 두 차례 부상
  • 1950s–1960s기갑부대 장교로 복무, 전차연대장과 전차사단장 역임
  • 1969–1975동독 주둔 제1근위전차군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으로 진급
  • 1975–1985볼가·중앙아시아·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
  • 1985–1986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 1986–1989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89–1991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최종)
  • 1991–1992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브리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бр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9 ↓ 해임 1988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의 KGB 의장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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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82안드로포프 휘하 KGB에서 승진, 방첩·보안 행정 경험 축적
  • 1982–1988KGB 의장,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보안기관 지휘
  • 1983–1985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 반부패·규율 캠페인과 보안 통제 유지
  • 1985–1988고르바초프 초기 개혁 속에서도 한동안 보안기관 대표로 정치국에 잔류
  • 1988개혁 속도와 맞지 않아 KGB 의장에서 교체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웃킨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Ут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0 ○ 자연사

'사탄' 미사일의 아버지: 냉전 핵균형의 기술적 초석을 놓은 설계자

1966년 바이코누르. 사일로에서 R-36이 솟아오르자 드골은 '콜로살!'을 연발했다. 웃킨은 훗날 회고했다. '그래도 진짜 전투발사로는 이어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얀겔의 후계자로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KB 유즈노예를 이끈 수석설계자. 얀겔의 저장성 추진제 로켓 노선을 계승하여 역대 가장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R-36M(NATO명 SS-18 '사탄')을 완성했고, 철도기동형 RT-23 몰로데츠와 우수한 중형 발사체 제니트를 개발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과 국가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1976~1990)을 지냈다. 냉전 후기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설계하며 미소 간 핵균형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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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 유즈노예 입사, 엔지니어·선임엔지니어
  • 1967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제1대리
  • 1971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겸 소장
  • 1976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CPSU 중앙위원
  • 1979KB 유즈노예 총설계자 겸 소장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NPO 유즈노예 총괄국장 겸 총설계자
  • 1990–2000TsNIIMASh 소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자이코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Зай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2 ↓ 실각 1990

방산 공장 견습공에서 군산복합체 총괄 정치국원이 된 테크노크라트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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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5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자물쇠공, 3차례 전선 탈출 시도
  • 1961–71레닌그라드 국영 '노바토르' 공장장
  • 1974–76과학생산연합 '레니네츠' 총책임자
  • 1976–83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 1983–85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85–90중앙위 서기(군수공업·기계제조 담당), 정치국 위원(1986–90)
  • 1987–89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겸임)

필리프 티모페예비치 예르마시

Филипп Тимофеевич Ермаш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2 ○ 자연사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꾼 정체기 영화 총책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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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공병, 적성훈장·용기메달 수훈
  • 1951–1956스베르들롭스크 시 콤소몰 제2서기 → 제1서기
  • 1956–1962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과학·학교·문화부장
  • 1962–1972중앙위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 → 문화부 부장
  • 1972–1986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6–1989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소련 소련 공산주의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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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보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칼린

Борис Иванович Стук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기 출판·검열의 최고 책임자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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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 1982–1985CPSU 중앙위 선전부장
  • 1985–1990주 헝가리 소련 특명전권대사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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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3해병여단 소대장; 1942년 8월 중상, 1943년 2월 제대
  • 1953–72중앙위 기구에서 성장, 선전부 부부장 대행
  • 1973–83캐나다 대사 10년
  • 1983–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비밀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동독 공산주의 독일민주공화국 독일 1923–2006 ○ 자연사

냉전 정보전의 장기 설계자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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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3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
  • 1933–1943소련 망명, 모스크바와 코민테른 학교에서 수학
  • 1943–1945모스크바 독일인민방송 편집자·방송원
  • 1949–1951독일민주공화국 모스크바 대사관 초대 참사관
  • 1952–1986대외정보기관 IWF와 HVA 국장
  • 1953–1986국가보안부 장관 제1차관
  • 1986–1990퇴임 후 회고록 집필과 개혁 논쟁 참여
  • 1990–2006망명과 재판을 거쳐 베를린에서 사망

보리스 파블로비치 부가예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уг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에서 항공원수가 된 민간항공 수장

1961년 지중해 상공, 납치된 프랑스 전투기가 브레즈네프의 Il-18기에 발포했을 때 조종간을 잡은 부가예프는 급선회로 공격을 회피했다. 착륙 후 브레즈네프는 "네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로 발탁되어 1970년부터 17년간 민간항공부 장관을 지내며 아에로플로트를 제트기 중심의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1977년 항공원수로 진급하여 모든 병종을 통틀어 소련 최후의 원수 계급 보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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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항공훈련대대 생도, 악튜빈스크 항공학교 교관
  • 1943–1947215항공대 조종사·편대장, 당파운동 중앙참모부 임무 수행
  • 1948–1957브누코보 공항 기장·교관 조종사, 아에로플로트 최초 장거리 노선 개척
  • 1957–1966제235특별항공대대장, 브레즈네프 전용기 조종사
  • 1966–1970민간항공부 차관, 제1차관
  • 1970–1987민간항공부 장관, 아에로플로트 제트화·세계적 확장 주도
  • 1987–1992국방부 감찰총감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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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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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5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 복무, 부상
  • 1946–54조선소 설계기사 → 당위 비서·파르토르그
  • 1957–61레닌그라드 키로프 구 당 제1서기
  • 1963–70레닌그라드 주 당 제2서기
  • 1970–83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73–76정치국 후보위원
  • 1976–85정치국 정위원
  • 1983–85중앙위 서기, 군수공업 담당

미하일 미트로파노비치 자이체프

Михаил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й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9 ○ 자연사

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이자 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지휘한 대장

전차군 사령관 리발코가 부상당한 자이체프 대위의 병실을 찾았다. "자네,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붉은기 훈장을 수여했다. 소련영웅 칭호는 40년 뒤에야 따라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싸운 전차부대 장교로, 전후 기갑군 사령관과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쳤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인 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을 맡아 하급 장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훈련 개혁을 단행했고, 1983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5년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군 작전을 지휘했으며, 산악전에 부적합한 BMP-1을 대체할 BMP-2의 대량생산을 중앙에 직접 요구해 관철시켰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막강한 체력으로 '훈련장 장군'이라 불린 그는, 냉전 말기 소련 지상군의 작전 교리와 장비 현대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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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자원입대, 전차여단·군단 참모 장교로 종전까지 복무, 6개 전투훈장 수훈
  • 1945–1965공수·전차사단 참모, 육군참모대학 졸업(1965)
  • 1965–1969제17근위전차사단장, 제12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69–1972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1972–1980벨로루시 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어 사령관(1976)
  • 1980–1985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 육군대장 진급(1980), 소련영웅(1983)
  • 1985–1989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 퇴역(1992)

발렌틴 이바노비치 바렌니코프

Валентин Иванович Варе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1923–1991), 1991년 이후 러시아 러시아 1923–2009 ○ 모스크바에서 병사

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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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 2000s참전용사 담당 국방부 감찰관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마냐킨

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Маня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3–2010 ○ 자연사

26년간 옴스크를 통치한 소련 최장수 지역당 서기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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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붉은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
  • 1948–1957농업경제인: 농업기사 → MTS 소장 → 콜호즈 의장 (스타브로폴)
  • 1957–1960스타브로폴 지방당위 농업부장
  • 1960–1961스타브로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87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89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89–1990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예피모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Еф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23–2012 ○ 심장마비

Il-2 에이스 출신 소련 공군 총사령관,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2012년 8월 31일, 평생의 친구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의 부고를 듣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두 노장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Il-2 공격기 조종사로 222회 출격하여 적기 85대를 지상에서 격파한 위대한 조국전쟁 최고의 공격기 에이스로, 스물한 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금성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69년부터 15년간 공군 제1부사령관으로 Su-25 공격기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1984년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Su-25 실전 운용을 지휘하며 소련 공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이끌었다. 퇴역 후에도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군 원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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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Il-2 공격기 조종사 → 198공격항공연대 비행대장, 222회 출격
  • 1957–1959제339전폭항공사단장 → 제6근위폭격항공사단장
  • 1964–1969제57(후 제14)공군군단장, 프리카르파티아 군관구
  • 1969–1984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84–1990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0–1993국가공역이용·항공교통관제위원회 위원장
  • 2006–2010러시아 연방 시민회의소 위원,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마흐무트 아흐메토비치 가레예프

Махмут Ахметович Гар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타타르인 1923–2019 ○ 자연사

전쟁 경험을 군사이론으로 조직한 참모장군

1989년 철수 뒤에도 그는 카불에 남아 나지불라 정부의 전쟁 수행을 자문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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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대대·여단 참모 장교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65–1970제5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제28군 참모장
  • 1970–1971아랍공화국 군사고문단 참모장
  • 1974–1984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 작전총국 부참모장
  • 1984–1989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과학·작전훈련 담당
  • 1989–1990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수석 군사고문
  • 1995–2019군사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

호세 라몬 알바레스 페르난데스

José Ramón Fernández Álvarez
쿠바 공산주의 쿠바 스페인 1923–2019

피그스만(플라야 히론) 상륙 침공을 격퇴한 쿠바 혁명군 지휘관

1961년 4월 17일 피그스만 침공 때 피델 카스트로의 지시로 2506여단과 맞서 싸운 민병대·정규군 부대를 지휘했다. 4월 19일 늦게 플라야 히론으로 돌파하여 침공군을 항복시킨 부대에 속했다.

쿠바의 공산주의자·군사 지도자이며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23년 산티아고데쿠바에서 태어나 1959년 혁명 이후 쿠바 혁명군(FAR)에 복무했고, 각료·부의장·대의원 등 여러 국가 직책을 맡았다. 쿠바 혁명의 가장 오래 산 역사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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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2012각료회의 부의장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수하레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Суха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2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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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8–1990소련 검찰총장
  •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칼 겐리호비치 바이노

Карл Генрихович Вайн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923–2022 ○ 자연사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1978–1988),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부하며 러시아화를 밀어붙인 강경파

에스토니아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짙은 러시아어 억양으로 말해 '예스토니안'이라 불렸다.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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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
  • 1948–1953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주위원회 서기
  • 1953–1957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서장
  • 1957통신고등당학교 졸업
  • 1957–1960에스토니아 SSR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60–197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8–198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8–1990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통제위원회 위원

기 모케

Guy Môquet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인 1924–1941 ✕ 처형

점령 아래 처형된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

그는 처형 전 편지에 “내 죽음이 무언가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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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파리에서 출생
  • 1930년대 후반카르노 고등학교 학생, 공산주의 청년동맹 활동가
  • 1940.10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프렌 감옥에 수감
  • 1941.01–02무죄 판결 뒤에도 행정구금되어 상테와 클레르보 수감시설로 이송
  • 1941.05샤토브리앙의 쇼아젤 수용소로 이송
  • 1941.10.22샤토브리앙에서 인질로 처형

에발트 바실리예비치 일리옌코프

Эвальд Васильевич Ильен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1979 ✕ 자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변증법적 논리를 발굴한 소비에트 유럽인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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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포병소위, 제1·2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까지 진격
  • 1950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우등 졸업, 대학원 진학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종신)
  • 1955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주의'로 교수직 박탈
  • 1960『『자본』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출간
  • 1962「철학백과사전」에 「이상적인 것」 논문 발표
  • 1968박사학위 논문 통과, 『우상과 이상에 관하여』 출간
  • 1974주저 『변증법적 논리: 역사와 이론』 출간

빅토르 페트로비치 마케예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Мак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1985 ○ 자연사

CIA가 '우랄의 용'이라 부른 해양전략로켓의 창시자

1955년, 코롤료프가 우랄 지부 부수석설계자 자리를 제안하자 서른 살 마케예프는 "수석설계자로만 가겠다. 대리는 안 한다"고 답했다. 코롤료프는 그 배짱에 놀랐지만, 결국 그를 SKB-385 수석설계자로 임명했다.

항공기 공장의 제도공으로 시작해 코롤료프의 눈에 띄어 31세에 SKB-385 수석설계자가 된 로켓 기술자. 30년간 단 한 조직을 이끌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세대를 개발: 수중발사, 공장연료주입, 대륙간사거리, MIRV 탑재를 차례로 실현하며 냉전기 해양핵억지력의 전략적 균형을 완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의 정체를 몰라 '우랄의 용'이라 불렀고, 그가 만든 R-17은 NATO 코드명 '스커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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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4모스크바 및 카잔 항공기 공장에서 제도공·설계사로 Pe-2 생산 참여
  • 1947–55OKB-1/NII-88 주임설계사: R-11 및 최초 해군탄도미사일 R-11FM 개발
  • 1955–85SKB-385 수석·총괄설계자: SLBM 3세대(R-21, R-27, R-29, R-29R, R-39, R-29RM) 개발
  • 1962R-17(스커드) 작전전술미사일 실전 배치
  • 1965기술과학 박사
  • 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
  • 1960–85체랴빈스크공대 및 모스크바물리기술연구소 교수·학과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아주베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Аджубе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1993 ↓ 실각 1964

흐루쇼프의 사위이자 해빙기 이즈베스티야를 소련 최고의 신문으로 만든 편집인

“100루블을 가지지 말고, 아주베이처럼 결혼하라” — 1950년대 모스크바를 떠돌던 이 말은 그의 출세가 흐루쇼프의 사위라는 지위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웅변한다.

알렉세이 아주베이는 흐루쇼프 해빙기 소련 저널리즘의 얼굴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으로서 관료적 기관지를 생동감 있는 일간지로 탈바꿈시켰고 발행부수를 160만 부에서 600만 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959년 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을 주도했고, 1960년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1963년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금지된 시 「저승의 묘르킨」을 이즈베스티야에 과감히 게재한 판단은 그가 단순한 흐루쇼프의 사위 이상의 언론인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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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모스크바 군관구 적군가무단 복무
  • 1947–1952모스크바 국립대학 저널리즘 학부
  • 1951–1957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편집위원
  • 1957–1959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편집장
  • 1959–196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9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 주도
  • 1960『미국과 정면으로』 공저, 레닌상 수상
  • 1961–1964CPSU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
  • 1963트바르돕스키 금지 시 「저승의 묘르킨」 이즈베스티야 게재
  • 1964흐루쇼프 실각 후 전 직위 해임, 「소비에트 연방」지 부서장 좌천
  • 1992–1993「제3신분」 편집장

텡기즈 예브게니예비치 아불라제

თენგიზ ევგენის ძე აბულაძე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24–1994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문화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루지야의 영화감독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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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트빌리시 연극학교 입학, 1946년 졸업
  • 1953VGIK 졸업, 그루지야필름 입사
  • 1955「마그다나의 당나귀」 공동 연출, 칸영화제 단편상(1956)
  • 1967삼부작 첫 영화 「기도」 완성
  • 1976「소망의 나무」 완성, 트빌리시 연극학교 교수
  • 1984「참회」 완성, 2년간 상영 금지
  • 1986「참회」 공개,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되다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선출

미하일 표도로비치 레셰트뇨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ешетн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1996 ○ 자연사

시베리아 밀림에서 소련 위성통신·항법 제국을 세운 수석설계자

1987년 바이코누르. 고르바초프가 위성들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 시베리아에서 합니까?" 레셰트뇨프가 답했다. "시베리아에서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200개 도시와 함께 일합니다."

코롤료프의 부수석 설계자로 출발해 1961년 시베리아 밀폐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독자 설계국 OKB-10을 창립한 우주공학자. 몰니야, 스트렐라, 라두가, 에크란 등 통신·방송 위성 계열을 차례로 완성했고, 측지·구난·항법 위성으로 영역을 넓혀 1982년에는 GLONASS 전지구 위성항법 시스템을 궤도에 올렸다. 그가 이끈 NPO PM(응용역학 과학생산연합)은 30여 종의 우주 시스템과 1,000기 이상의 위성을 제작해 소련 전체 위성의 3분의 2를 책임졌으며, 오늘날 ISS 레셰트뇨프 사로 이어져 러시아 위성산업의 중추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수상자이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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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2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입학, 전쟁으로 알마아타 피난
  • 1942–46세르푸호프 항공정비사 학교 수료, 제26예비전투항공연대 정비사 복무
  • 1950MAI 우등 졸업, 티호미로프 지도로 로켓 주제 졸업논문
  • 1950–57OKB-1(코롤료프) 기술사 → 선임기술사 → R-11 미사일 수석설계자
  • 1958–59OKB-1 부수석설계자, CPSU 입당(1951)
  • 1959–61OKB-1 동부지부장(크라스노야르스크-26), 얀겔로부터 경량발사체 인수
  • 1961–67OKB-10 수석설계자, 코스모스 발사체·스트렐라 위성 첫 발사(1964)
  • 1967–77KB PM(응용역학 설계국) 총설계자, 몰니야·라두가 위성 계열 개발
  • 1977–96NPO PM 총설계자 겸 총괄국장, GLONASS(1982)·에크란·고리존트·루치 등 완성
  • 1974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80레닌상 수상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인 1924–1997 ○ 자연사

양보로 위기를 봉합한 당 관료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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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농민자조조합 중앙위원회 간부
  • 1953–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59–1970농업부 장관
  • 1970–1981폴란드 인민공화국 부총리
  • 1971–1975각료회의 계획위원회 위원장
  • 1971–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루블린 7월 파업 및 그단스크 8월 협상 정부 대표
  • 1980–1981그단스크 협정 정부 서명자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딘코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ин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불가리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을 세계 최대 가스 생산국으로 만든 가스·석유공업 장관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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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7소련군 정찰병,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 1954–1962크라스노다르네프티 · 아빈네프티 기술자
  • 1962–1965크라스노다르 가스관리국장 → 쿠반가스프롬 초대 사장
  • 1966–1970소련 가스공업부 가스채취총국(글라브가스도비차) 국장
  • 1970–1981소련 가스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1–1985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5–1989소련 석유공업 장관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투르크멘 SSR)
  • 1986–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세미차스트니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Семичастны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1 ↓ 해임 1967

흐루쇼프 축출을 지켜본 KGB 의장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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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콤소몰과 당 청년조직에서 셸레핀 계열로 성장
  • 1961–1967KGB 의장, 흐루쇼프 말기와 브레즈네프 초기 보안기관 지휘
  • 1964흐루쇼프 축출 과정에서 보안기관 수장으로 핵심 현장에 있음
  • 1967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해임
  • 1967 이후우크라이나와 노동조합 직책으로 이동

유리 파블로비치 막시모프

Юрий Павлович Макс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2 ○ 자연사

아프간 전쟁과 소련 해체 속에서 전략로켓군을 지휘한 군대대장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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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제1모스크바 기관총 사관학교 졸업, 남서전선 배치
  • 1943–1945제187·195근위소총연대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2·3·4우크라이나전선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1950–1953참모본부 작전총국 장교
  • 1957–1961주헝가리 남부군집단 차량화소총연대장
  • 1965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65–1968제7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아르한겔스크)
  • 1968–1969예멘 아랍 공화국 주재 최고군사고문
  • 1973–1976투르키스탄 군관구 제1부사령관
  • 1976–1978알제리 주재 소련 군사전문가단장
  • 1979–1984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아프간 전쟁 관할
  • 1982소비에트연방영웅, 육군대장 진급
  • 1984–1985남부전략방향군 총사령관
  • 1985–199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CIS 전략억지군 사령관 이임
  • 1993퇴역

블라디미르 레오니도비치 고보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идович Гово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4–2006 ○ 자연사

원수의 아들로 태어나 체르노빌 대응을 지휘하고 소련 민방위를 평시 체제로 전환한 대장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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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붉은 군대 징집, 랴잔 포병학교 졸업
  • 1943–1945포병 소대장·포대장, 레닌그라드 및 제2발트 전선
  • 1946–1949고등장교포병학교 졸업 후 포병대대장;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1963참모대학 금메달 졸업; 주독 소련군 집단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7–1969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주독 소련군)
  • 1971–1972발트 군관구 사령관
  • 1972–1980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겸 모스크바 주둔군 사령관
  • 1980–1984극동군 총사령관
  • 1984–1986국방차관 겸 국방부 총감찰관
  • 1986–1991소련 민방위 사령관 겸 국방차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크류치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рюч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7 ↓ 1991년 체포, 1994년 사면

8월 쿠데타를 설계한 KGB 의장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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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부다페스트 대사관 3등서기관(안드로포프 휘하)
  • 1967–74KGB 의장 비서실
  • 1974–88제1총국장: 해외정보 총괄
  • 1988–91KGB 의장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 주도
  • 1991–94수감, 사면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피로시코프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ирож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9 ○ 자연사

KGB 부의장 20년, 4대 의장을 보좌한 보안기관의 상수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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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 1946–1968알타이 지방 콤소몰·당 간부, 알타이 크라이콤 제2서기까지 승진
  • 1968–1970KGB 인사국장
  • 1970–1971KGB 당위원회 서기
  • 1971–1991KGB 부의장 — 인사·구조·대테러(알파 그룹) 총괄
  • 1991–2009FSB 재향군인회 의장

아고스티뉴 안드레 멘드스 드 카르발류

Agostinho André Mendes de Carvalho
독립 활동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24–2014

간호 보조원 출신 앙골라 민족주의자, 작가 '우안넹가 시투'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은 1974년 『마스터 타모다』로, 거만하고 식민지적으로 물든 말쟁이 '타모다 선생'은 앙골라 문학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민중의 사회적 처지"라고 말했다.

필명 우안넹가 시투로 알려진 앙골라의 간호 보조원·민족주의자·작가. 1924년 8월 29일 이콜루 이 벵구 주 카롬보로카에서 태어났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의료 보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7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독립을 위한 비밀 활동을 벌이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가석방으로 MPLA에 복귀해 루안다 시 조직부를 이끌었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2014년 2월 13일 루안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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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701942년부터 카테테-루안다에서 위생 요원으로 일했고, 1947년 간호 보조원 자격을 취득한 뒤 딩게·쿠이투·칼룸부·문구·카비리·봉 제주스 두 콴자와 벵겔라·루반구 병원의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했고,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재판과 유죄 판결 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 1957–1958루안다 외곽에서 당시 태동하던 MPLA와 '에스팔랴 브라자스' 그룹과 연결된 전단 위원회를 통해 앙골라 독립을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벌였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 1970–19881970년 가석방 후 MPLA에 복귀해 같은 해 루안다 시 조직부(DOM)를 이끌었고, 1974년 중앙위원이 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으며 한때 당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독립 후 혁명평의회에 임명되었다.
  • 1979–1983루안다 주 위원 1979–1980년, 보건부 장관 1980–1983년.
  • 1983–2000s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 주재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사(동독에서는 정치학도 공부)를 역임했고, MPLA 소속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나이를 이유로 물러났다. 2009년에는 MPLA 소속 최고령 의원으로 보도되었다.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17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국제부 이론가로,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으로서 '민족민주주의' 개념의 정립을 주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을 내부에서 반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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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출생지와 소련·러시아 국가 맥락 기준, 민족적 자기규정은 사료에 명시되지 않음) 1924–2020 ○ 사망 (모스크바)

마지막 소비에트 연방원수,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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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어린 장교로 독소전에 참전
  • 1960s–1970s극동·중앙아시아 등 군관구 지휘를 거쳐 승진
  • 1987–1991국방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군의 불만을 대표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참여하나 군을 결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함
  • 1991–1994체포·수감 뒤 사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돌기흐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Долги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6년간 중공업·에너지를 총괄한 당 서기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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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붉은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브랸스크 전선에서 중상 후 제대
  • 1949–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정련공장 기술자·주임기사, 귀금속 제련 특허 다수
  • 1962–1969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사장, 탈나흐 광상 개발로 생산 10배 증대
  • 1969–197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당 제1서기, 지역 종합개발 계획 수립
  • 1972–1988중앙위 서기, 중공업·에너지 담당 — 서시베리아 유전·연료복합체 총괄
  • 1976–1984중공업·에너지부장 겸임
  • 1982–1988정치국 후보위원
  • 2011–2018국가두마 의원 → 연방평의회 의원

루보미르 슈트로우갈

Lubomír Štrougal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4–2023 ○ 자연사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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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7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1~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파벨 이바노비치 벨랴예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еля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1970 ○ 복막염

최초의 우주유영을 지휘한 전투조종사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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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소일전 참전
  • 1959공군사관학교 졸업, 흑해함대 비행대대장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초대 단장
  • 1965.3.18–19보스호트 2호 선장: 인류 첫 우주유영, 수동 재진입
  • 1966–67소유스·알마즈 계획 훈련 지휘
  • 1969우주비행사훈련센터 제1국장

루스 퍼스트

Ruth First
공산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1925–1982 ✕ 암살

아파르트헤이트를 고발한 탐사 저널리스트이자 117일 독방을 견딘 공산주의 혁명가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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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 1949조 슬로보와 결혼
  • 1953민주주의자회의(COD) 창립 지원 — 의회동맹 백인 조직
  • 1955자유헌장 기초위원 — 집회 금지로 클립타운 대회 불참
  • 1955급진 정치 저널 《파이팅 토크》 편집장
  • 1956–1961반역죄 재판 피고 — 156명과 함께 기소, 전원 무죄
  • 1963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 — 117일 독방, 《117일》 집필
  • 1964런던 망명 — 영국 반아파르트헤이트운동 활동
  • 1964–1970s만델라·음베키·오딩가 평전 편집, 아프리카 해방운동 연구
  • 1970『총의 포신: 아프리카의 정치권력과 쿠데타』 출간
  • 1972–1978맨체스터·더럼 대학 연구원 겸 강사
  • 1978–1982에두아르두 몬들라네 대학 아프리카연구센터 연구국장 — 마푸투
  • 1982.08.17남아공 경찰 소포 폭탄으로 암살 — 34개국 정상·대사 장례 참석

블라들렌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프

Владле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2004 ○ 자연사

소련 말기 GRU를 이끈 마지막 군사첩보 수장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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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49입대 →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 소대장 → 중대장
  • 1951–54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발트 군관구 소총대대장
  • 1958–66연대 참모장 → 차량화소총연대장, 발트 군관구
  • 1966–68총참모부 사관학교 졸업
  • 1969–79제21차량화소총사단장(GSVG) → 제15군 참모장 → 투르키스탄 군관구 참모장
  • 1979–80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
  • 1980–83총참모부 제7국장 → 주작전총국장
  • 1983–87극동군 총사령부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7.2–7GRU 제1부국장
  • 1987.7–1991.10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1992건강상 이유로 퇴역

게오르기 마르코비치 코르니옌코

Георгий Маркович Корни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5–2006 ○ 병사

그로미코의 대미정책 실무 책임자, 아프간 침공과 거짓말에 맞섰던 외교관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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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련 외무부 산하 정보위원회에서 외교 경력 시작
  • 1960–1964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이후 공사참사관
  • 1965–1975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75–1977소련 외무차관
  • 1977–1986소련 외무제1차관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8CPSU 중앙위 국제부 제1부장

라미즈 알리아

Ramiz Alia
알바니아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925–2011

호자 이후의 알바니아

호자가 의사에게 알리아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 친구 같은 젊은 동지가 이어받을 겁니다."

1985년 호자 사후 알바니아 노동당의 지도자가 됐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하면서 제한적 대외 개방을 추진했으나 경제위기와 대중 시위 속에서 다당제 전환을 수용했다. 1991년 대통령이 되었고 1992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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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 1948중앙위원회 위원
  • 1956정치국 후보위원
  • 1961정치국 정식 위원
  • 1982인민의회 상임위원회(국가원수) 의장
  • 1985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 1991알바니아 공화국 대통령
  • 1992대통령직 사임

유리 필리포비치 솔로비요프

Юрий Филиппович Соловь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201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리가초프 측근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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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73렌메트로스트로이 근무, 수석기술자 거쳐 국장
  • 1973–1974레닌그라드 시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4–197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75–1978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78–1984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84–1985소련 산업건설부 장관
  • 1985–1989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198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겸임)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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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슬라프 그리고리예비치 콜레스니코프

Владислав Григорьевич Колес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2015 ○ 자연사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까지 이끈 마지막 전자공업 장관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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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툴라 무기공장 · 카스토르나야 기관차 차량기지 정비공
  • 1948–1952보로네시 무선부품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자
  • 1952–1954주동독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58–1969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 수석기술자 → 공장장
  • 1969–1971보로네시 '엘렉트로니카' 생산조합 총책임자
  • 1971–1985소련 전자공업부 제1차관
  • 1985–1991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체스와프 얀 키슈차크

Czesław Jan Kiszczak
폴란드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25–2015 ○ 자연사

계엄령 실행자에서 원탁회의 공동의장이 된 폴란드 내무장관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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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9군사정보부장 (총참모부 제2국)
  • 1979–1981내부군사부장 (WSW)
  • 1981–1990내무장관
  • 1981–1983구국군사평의회 위원
  • 1982–1990폴란드 통일노동당 정치국 위원
  • 1989원탁회의 정부 측 공동의장
  • 1989.8총리 지명 (내각 구성 실패)
  • 1989–1990부총리 겸 내무장관

유리 이바노비치 드로즈도프

Юрий Иванович Дроз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25–2017 ○ 자연사

KGB 불법정보국을 12년간 지휘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장교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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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
  • 1945–1952주독 소련군 및 발트 군관구 포병장교
  • 1952–1956군사외국어대학 졸업, 독일어·영어 전공
  • 1956–1957KGB 전입, 불법정보요원 훈련
  • 1957–1963동베를린 KGB 연락장교, 슈타지와 협력하며 불법요원으로 활동
  • 1964–1968KGB 베이징 주재원 (문화대혁명 시기)
  • 1968–1975PGU 중앙기구 근무, S국 부국장
  • 1975–1979KGB 뉴욕 주재원, 유엔 소련 부대표로 위장
  • 1979–1991PGU 부국장 겸 S국장 (불법정보 총괄), 빔펠 창설

보리스 이바노비치 아리스토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Арис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5–2018 ○ 자연사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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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야로슬라블주 집단농장 회계사
  • 1942–1943야로슬라블주 보병학교 사관생도
  • 1943–1946공병여단 분대장 → 모스크바 공병대대 서기
  • 1947–1952레닌그라드 '스베틀라나' 공장 기술자 → 조립구역장
  • 1952–1963비보르크 구당 산업운수부 지도원 → 부장 → 레닌그라드 주당 산업운수부 차장
  • 1963–1969레닌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제1서기
  • 1969–1971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1–1978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1978–1983주폴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85소련 외무차관
  • 1985–198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88–1992주핀란드 소련·러시아연방 대사

필리프 데니소비치 봅코프

Филипп Денисович Боб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5–2019 ○ 자연사

KGB 이념방첩의 설계자, 12명의 수장 아래 45년간 살아남은 체키스트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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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붉은 군대 복무, 서부·발트 전선, 두 차례 부상
  • 1946레닌그라드 스메르시 학교 졸업, MGB 배치
  • 1956KGB 제4국(이념방첩) 부장
  • 1961KGB 제2총국 부국장
  • 1969–1983KGB 제5총국장(이념방첩 → 헌법질서 수호)
  • 1983–1985KGB 부의장
  • 1985–1991KGB 제1부의장
  • 1992–2001모스트 그룹 분석국장

로버트 W. 데이비스

Robert W. Davies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영국 영국인 1925–2021 ○ 자연사

소련 공업화의 연대기를 7권으로 쌓은 영국의 경제사가

마지막 권에서 그는 썼다: "소비에트 역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했지만… 역사의 세부가 선입견과 충돌할 때는 후자가 양보해야 한다… 나는 좌파로 남아 있으며,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국의 경제사가. E. H. 카와 함께 『계획경제의 기초』를 집필했고, 카의 작업을 이어받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업화』 전7권을 완성했다. 휘트크로프트와 공저한 『기아의 해』(2004)에서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5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계획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흉작·지도부의 뒤늦은 대응이 결합된 결과로 설명했다. 젊은 시절 영국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 헝가리 침공 후 탈당했고, 좌파로서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평생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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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영국 공군 통신병 복무
  • 1950런던대 SSEES 학사
  • 1954버밍엄대 박사 (소비에트 재정)
  • 1954–1956글래스고대 소비에트연구소 강사
  • 1956–1965버밍엄대 연구원·강사·선임강사
  • 1963–1979버밍엄대 CREES 초대 소장
  • 1965–1988버밍엄대 소비에트경제학 교수
  • 1988정년퇴임, 명예교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1987 ○ 자연사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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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아르히포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рхи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6–1998 ○ 신장암

핵전쟁을 막은 소련 해군 잠수함 장교

토머스 블랜턴 미 국가안보기록보관소장은 그를 두고 "세계를 구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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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 함대 소해정에서 소련-일본 전쟁 참전 (사관생도)
  • 1947카스피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61K-19 원자력 잠수함 부함장, 방사능 누출 사고 대응
  • 1961–1964제69잠수함여단 참모장
  • 1964–1968제69잠수함여단장
  • c. 1968–1975제37잠수함사단장
  • 1975소장 진급
  • 1975–1985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
  • 1981중장 진급
  • 1988퇴역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샴신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ам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09 ○ 자연사

소련 통신 인프라의 현대화를 이끈 엔지니어 출신 통신장관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에크란'의 개발을 이끌었고,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해 국민 대다수가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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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 1968소련 통신부 차관
  • 1976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80–1989소련 통신장관
  • 1992–1997모스크바 시외·국제전화(OJSC) 이사회 의장
  • 1997–2009로스텔레콤(Rostelecom) 이사회 의장

비탈리 이바노비치 보로트니코프

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т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2 ○ 자연사

러시아를 떼어내지 않으려 했던 RSFSR의 마지막 수반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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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60쿠이비셰프 항공공장 기술자 → 당위원회 서기
  • 1961–67쿠이비셰프 주 당 서기 → 제2서기 → 주 집행위 의장
  • 1971–75보로네시 주 당 제1서기
  • 1975–79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9–82주쿠바 소련 대사
  • 1982–83크라스노다르 변경주 당 제1서기: 부패 척결
  • 1983–88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정위원
  • 1988–90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쿠바 공산주의 쿠바 쿠바 1926–2016 ○ 자연사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47년간 제국주의에 맞선 지도자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몬카다 재판 변론(1953)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쿠바 혁명가.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바티스타 독재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고, 1959년 게릴라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47년간 미국의 봉쇄와 압력 속에서도 사회주의 쿠바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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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몬카다 병영 공격 —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1954법정 최후진술을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로 비밀 출간
  • 1956–1959그란마 호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게릴라전
  • 1959바티스타 정권 전복 — 혁명정부 수립
  • 1961–1962피그스만 격퇴, 미사일 위기
  • 1976–2008국가평의회 의장
  • 2008–2016라울에게 이양, 2016년 사망

브세볼로드 세라피모비치 무라홉스키

Всеволод Серафимович Мурах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7 ↓ 퇴임 1989

고스아그로프롬의 초대 의장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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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89국가농공위원회 의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팔린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Ф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8 ○ 자연사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양보에 맞섰던 소련 최고의 독일 전문가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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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2독일 내 소련통제위원회 근무
  • 1952–1958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 1959–1971외무부 제3유럽(독일)부장, 그로미코 보좌관, 흐루쇼프 연설문 작성
  • 1971–1978주서독 소련 대사
  • 1978–1982CPSU 중앙위 국제정보부 제1부부장
  • 1983–1986『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실각기)
  • 1986–1988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8–1991CPSU 중앙위 국제부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1992–2000함부르크대학 평화연구·안보정책연구소 교수
  • 2000–2018모스크바 거주,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 강의

누온 체아

នួន ជា
민주 캄푸치아 공산주의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6–2019 ○ 복역 중 병사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2인자'

2018년 11월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계류 중이던 2019년 8월 4일 복역 중 사망했다. 최고재판부는 판결을 무효로 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심 판단 기록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혁명가로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였다. 폴 포트의 '2인자'로 불렸고 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과 정부수반 대리를 지냈다. 2014년 반인륜범죄로, 2018년 11월 16일 베트남인·참 집단학살과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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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98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
  • 1970북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 교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 정부수반 대리
  • 199812월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9월 19일 체포되었다
  • 20148월 7일 사건 002/01에서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 201811월 16일 사건 002/02에서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등 유죄를 선고받고 두 종신형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로루시아인 1926–2022 ○ 자연사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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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장쩌민

江泽民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26–2022 ○ 자연사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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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2002중공 중앙 총서기
  • 1993–200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라피크 니쇼노비치 니쇼노프

Rafiq Nishonovich Nishonov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6–2023 ↓ 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민족소비에트 의장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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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1970s우즈베크 공화국 외교·당 행정에서 성장
  • 1986–1988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라시도프 이후 공화국 정리 국면 담당
  • 1989–1991민족소비에트 의장, 연방 해체기의 마지막 대표 라인
  • 19918월 쿠데타와 연방 붕괴 속에서 직위가 소멸
  • 1991 이후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소련 말기 공화국 엘리트로 남음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ом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1967 ✕ 추락사

보스호트 1호 사령관이자 인류 최초 우주비행 희생자

「나는 태양을 향해 우주선을 지향시킬 수 없다」 — 소유즈 1호의 잇단 고장 속에서도 코마로프는 끝까지 수동 조작을 시도하며 지상에 상황을 보고했다.

소련 공군의 시험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로, 1964년 보스호트 1호 사령관으로서 세계 최초의 다인승 우주비행을 지휘했다.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우주비행사 중 한 명으로,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훈련 평가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1967년 소유즈 1호의 첫 유인 시험비행에서 단독 조종사로 나섰으나, 재진입 후 주낙하산 미전개로 귀환선이 추락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사망자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설계 검증과 안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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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소련 공군 전투기 조종사 (그로즈니·무카체보)
  • 1954–195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항공무장학부 생도
  • 1959–1960공군비행시험연구소(GK NII VVS) 시험비행사 겸 기술장교
  • 1960–1967우주비행사 — 제1차 공군 그룹, 훈련센터(TsPK)
  • 1964.10보스호트 1호 사령관 — 세계 최초 다인승 우주비행
  • 1966–1967TsPK 제3부장 · 선임교관 우주비행사
  • 1967.04소유즈 1호 사령관 — 첫 유인 시험비행 (귀환 중 사망)

바실레 밀레아

Vasile Milea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27–1989 ✕ 자살

차우셰스쿠의 마지막 국방장관, 그의 죽음이 군대의 혁명 합류를 촉발했다

「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로부터 민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다」

1949년 보병장교로 임관해 루마니아 공산군에서 승진을 거듭, 1985년 차우셰스쿠에 의해 국방장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혁명이 발발하자 티미쇼아라 진압을 지휘했지만 17일 정치집행위원회에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우셰스쿠에게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개 질책을 받았다. 22일 아침 차우셰스쿠와의 마지막 대면 직후 CC 청사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쏴 사망했고, 그의 죽음이 보도되자 루마니아군은 일제히 혁명 대열에 합류해 독재 정권 붕괴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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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보병장교 임관, 소위
  • 1950–1952군사아카데미 기갑·기계화 학부 수석 졸업
  • 1958재정비리로 사단장 해임·당 제명
  • 1960당 재입당, 전차장교학교 교장
  • 1965–1973제3군 사령관, 소장 → 중장
  • 1973–1978애국근위대 참모장
  • 1980–1985국방제1차관 겸 총참모장
  • 1985–1989국방장관

겐나디 바실리예비치 콜빈

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лб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1998 ○ 심장마비

낯선 러시아인 당간부로 임명되어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인물

1986년 12월 16일, 알마아타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는 단 18분 만에 끝났다. 모스크바에서 급파된 라주몹스키가 쿠나예프의 해임과 콜빈의 임명을 통보하자,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겐나디 콜빈은 소련의 당 기구에서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브레즈네프식 간부였으나,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예기치 않게 역사의 분수령에 서게 되었다. 니즈니타길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카자흐스탄과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의 임명은 알마아타에서 수천 명의 카자흐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는 젤톡산(12월) 봉기를 촉발했고, 이는 소련 민족문제의 폭발을 예고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다 1990년 은퇴했고, 1998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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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2니즈니타길 레닌구 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62–1970니즈니타길 시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70–1975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75–198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83–1986울리야놉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바딤 발렌티노비치 자글라딘

Вадим Валентинович Загла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06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유로코뮤니즘 대화의 얼굴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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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후 동 대학에서 교편
  • 1954–1964《노보예 브레먀》 및 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저널리스트
  • 1964–1967중앙위 국제부 고문(콘술탄트)
  • 1967–1975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 1975–1988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포노마료프 아래 서유럽 공산당 관계 총괄
  • 1988–1991미하일 고르바초프 고문
  • 1992–2006고르바초프 재단 고문, 유럽대서양협력협회 부회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코나레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онар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07 ○ 자연사

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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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미하일 이바노비치 샤도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Щад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1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석탄공업장관, 노천 채탄과 체르노빌 터널의 광부

1986년 체르노빌에서 샤도프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뚫을 광부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 중 누구라도 가지 않겠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야 한다."

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체렘호보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와 톰스크 공대를 거쳐 광산기사로 성장했고, 보스티부골(Vostsibugol) 생산합체의 총책임자를 거쳐 1985년 12월 소련 석탄공업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네륜그리·베료좁스코예 등 신규 탄광 개발과 노천 채탄 기술의 대규모 도입을 주도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에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굴착하는 광부들을 직접 지휘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를 휩쓴 대규모 광부 파업에 직면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지지로 해임되면서 소련 석탄공업장관직은 그와 함께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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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 '안가르스트로이' 콜호스에서 농업 노동
  • 1944–1948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 전기기계과 수학, 졸업
  • 1948–1950체렘호보우골 트러스트 5-비스 탄광에서 구역 정비사, 구역장, 수석정비사 보좌
  • 1950–1953톰스크 공과대학 부설 고등기술자 과정 수료, 광산기사 자격
  • 1953–1960사할린 및 체렘호보 탄광들에서 수석기사, 탄광장 역임
  • 1960–1963맘슬류다(Mamslyuda) 트러스트 관리자, 이르쿠츠크주 마마
  • 1965–1966이르쿠츠크주당위원회 지도원
  • 1966–1974보스티부골 콤비나트 부소장, 소장
  • 1974–1977보스티부골 생산합체 총책임자
  • 1977–1981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81–1985소련 석탄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석탄공업장관
  • 1992모스크바 신용은행 이사회 의장

올레크 티모페예비치 보골몰로프

Олег Тимофеевич Богомол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27–2015 ○ 자연사

사회주의권 경제 통합과 개혁을 연구한 경제학자

그는 소련 경제의 정체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첫 자극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올레크 보골몰로프는 사회주의권의 국제경제 관계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이자 학술기관 운영자였다. 그는 동유럽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개혁 경험을 비교 연구하며 계획경제의 경직성과 시장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함께 검토했다. 안드로포프가 경제 개혁 준비를 추진한 1983년에는 관련 위원회에 참여해 개혁 논의에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 이후에도 시장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적 선택지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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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대외무역부 고등무역학교 졸업
  • 1954국제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 1962–196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대외무역 관련 기관에서 근무
  • 1967–197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해외 사회주의 국가 경제지리학 강좌장
  • 1969–1991사회주의체제세계경제연구소 소장
  •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3안드로포프 경제 개혁 준비 위원회 참여
  • 1989–1991소련 인민대회 대의원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27–2016 ○ 자연사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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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우드무르티야에서 목수·선반공
  • 1944–1955콤소몰·공산당 기구 활동, 빌뉴스 사범대학 졸업
  • 1963–1976당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
  • 1976–1990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1–1994벨라루스로 도피
  • 1994–2006체포 후 12년형, 2006년 1월 만기 출소

응우옌티빈

Nguyễn Thị Bình
베트남 공산주의 베트남 베트남 1927–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으로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자 뒤에 베트남 부주석이 된 외교관

196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민족해방전선 대표단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이 되어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사덱 성 출신으로 민족주의 지도자 판쩌우찐의 외손녀다. 1948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1~1953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사이공의 치호아 감옥에 갇혔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을 지냈고, 1969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어 파리 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다. 통일 뒤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92~2002년 두 차례 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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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베트남 공산당에 가입하고 풀뿌리 조직가로 활동했다.
  • 1951–1954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치호아 구금시설에 수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석방되었다.
  • 1969민족해방전선 파리 대표단 부단장을 맡았고, 뒤이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 겸 파리 대표단장을 지냈다.
  • 1973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 1976–1987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92–2002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두 차례 선출되어 재임했다.

피터 프라이어

Peter Fryer
공산주의 영국 영국인 1927–2006 ○ 자연사

당의 침묵과 현장을 맞바꾼 공산주의 저널리스트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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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 1945영국 공산당 입당
  •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 1984『Staying Power』 출간
  • 2006런던에서 사망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Кату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0 ○ 자연사

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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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유리 페트로비치 바탈린

Юрий Петрович Бата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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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부를라츠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Бурлац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4 ○ 자연사

흐루쇼프 개혁의 설계자, 소련 정치학의 선구자

「나는 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철제 담장에 올라 팔을 벌리고 날아올랐다. 떨어져 팔이 빠졌다. 그것이 내 인생의 상징이 되었다」 — 권력에 맞서기를 회고하며

소련에서 정치학을 독립 학문으로 정립한 이론가. 1961년 당 강령에 '전인민국가' 테제를 삽입했으며,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개혁 노선을 이은 개혁적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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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타슈켄트 법학대학 졸업
  • 1951법학 후보학위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 1952–1960과학아카데미 상임간부회 과학비서 → 잡지 『콤무니스트』 국제부
  • 1960–1964CPSU 중앙위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안드로포프 휘하); 1961년 당 강령·도덕 규범 공동 집필
  • 1964철학 박사학위: 논문 「국가와 공산주의」
  • 1965–1967『프라우다』 정치평론가 (주필급, 독자적 발언권)
  • 1967–1977검열 반대 기사로 해임, 10년간 출판 금지·7년간 해외여행 금지
  • 1969–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 부소장
  • 1971–1989CPSU 중앙위 사회과학연구소 철학 주임
  • 1982–1991『문학신문』 정치평론가 → 주필 (1990–1991)
  • 1989–1991소련 평화기금 대표 인민대의원,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

보리스 이바노비치 고스테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Гост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5 ○ 자연사

시장개혁을 거부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마지막 정통파 재무장관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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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59신발 공장 기사, 경공업부, 칼리닌 소브나르호스 노동임금 부장
  • 1959–1966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경제위원회 부문 부장
  • 1966–1975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 제1부장
  • 1975–1982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장
  • 1982–1985당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장 → 경제부장
  • 1985.12–1989.6소련 재무장관
  • 1989–2002재정실무자 연수원 교수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7월 26일 운동 공산주의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1928–1967 ✕ 처형

청진기를 소총으로 바꾼 국제주의 혁명의 아이콘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만들어라.” — 삼대륙회의에 보낸 메시지(1967)

아르헨티나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쿠바 혁명의 게릴라 사령관으로서 1959년 바티스타 정권 전복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후 국제 혁명 투쟁에 투신,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이끌다 1967년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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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3의대생 — 라틴아메리카 종단 여행
  • 1955멕시코에서 카스트로와 만남, 7·26 운동 합류
  • 1956–1959쿠바 게릴라전 사령관 — 산타클라라 함락
  • 1959–1965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 1960《게릴라전》 출간
  • 1965–1967콩고·볼리비아 게릴라전
  • 1965논문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발표
  • 1967.10볼리비아에서 생포, 이튿날 총살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크루치나

Николай Ефимович Кручин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1991 ✕ 추락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금고를 지킨 마지막 재무관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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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노보체르카스크·카멘스크·스몰렌스크 시·주 위원회 제1서기
  • 1959–1962콤소몰 중앙위 농촌청년부장
  • 1962–1963중앙위 농업부 지도원
  • 1963–1965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니 크라이 위원회 서기
  • 1965–1978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노그라드 주 위원회 제1서기
  • 1978–1983중앙위 농업부 제1부장
  • 1983–1991중앙위 업무관리국장 (당 재무·재산 총괄)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Дмитр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ког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8–1995 ○ 위암

군 선전 장성에서 소련 기록을 파헤친 역사가로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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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63–1971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교수 · 학과 부책임자
  • 1971소련 육해군 총정치본부(GlavPU) 근무
  • 1979–1984GlavPU 특수선전(심리전) 총국장
  • 1984–1988GlavPU 부본부장 (상장군 진급, 1986)
  • 1988–1991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소장
  • 1991–1995러시아 대통령 국방·안보 고문, 국가두마 의원, 문서비밀해제위원회 의장

빅토르 파블로비치 카르포프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Кар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1997 ○ 자연사

SALT·INF·START를 관통한 소련 군축외교의 얼굴

'어느 일방의 우월을 배제하는 평등과 동등한 안보의 원칙 위에서' — 1985년 제네바 군축협상 개시 성명

소련 외무부의 대표적 군축 전문 외교관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SALT-I·SALT-II·INF·START-I에 이르기까지 소련-미국 간 전략무기 협상의 결정적 국면에서 소련 측 실무를 이끌었다. MGIMO 졸업 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과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을 거쳐, 1985년 군축·군비제한문제국장으로서 제네바 협상에서 소련 대표단 단장을 맡았다. INF 전면폐기 조약(1987)과 START-I(1991)의 타결을 실무적으로 관철시켰고, 1990년 외무차관에 올라 소련 붕괴 직전까지 대미 전략무기 관계를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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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8–1962소련 외무부 대외정책정보국 제1서기
  • 1962–1966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6–1980소련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
  • 1980–1985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 1985–1990소련 외무부 군비제한·군축문제국장, 콜레기야 위원
  • 1990–1991소련 외무차관
  • 1991–1997러시아 외무부 군축문제국 수석고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말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Маль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01 ○ 자연사

서시베리아 유전으로 소련 석유생산 정점을 이끈 장관

1971년 3월, '5개년 계획의 석유 채굴 과제 수행과 높은 기술·경제 지표 달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마이코프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타타르·페름 유전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석유공업 장관(1977~1985)까지 오른 인물. 발렌틴 샤신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장관직을 이어받아, 브레즈네프 후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지휘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로 이끌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냈고, 고르바초프 집권 직전인 1985년 2월 퇴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1) 수훈자이며, 퇴임 후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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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그로즈니 석유연구소 졸업, 광산기사 자격 취득
  • 1951–1956타트네프티 계통 공장장·주임기사·부책임자
  • 1956–1960타트네프티 산하 아즈나카옙스크네프티 국장
  • 1960–1961타트네프티 산하 부굴마네프티 국장
  • 1961–1972페름 소브나르호스 석유공업국장 → 페름네프티 생산합체 총책임자
  • 1972–1977소련 석유공업 제1차관
  • 1977–1985소련 석유공업 장관

레프 페트로비치 페옥티스토프

Лев Петрович Феоктис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28–2002 ○ 자연사

핵무기 설계자에서 핵군축의 비판자로

그는 핵무기 경쟁을 두고 “폭탄 하나에도 쓸모를 찾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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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에서 핵물리학 전공
  • 1951–1955KB-11 이론부, 아르자마스-16 연구원
  • 1955–1978VNIITF, 첼랴빈스크-70 이론물리학자
  • 1966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78–1988쿠르чатов 원자력연구소 연구자, MEPhI 교수
  • 1988–200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레이저 핵융합 부서장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카멘체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амен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8–2003 ○ 자연사

소련 수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기술관료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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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모스크바강 선박회사 화부·선반공·기관사
  • 1950–1957무르만스크 트롤어선단 기술자·국장·공장 수석기사
  • 1957–1962무르만스크 국민경제회의 수산공업 총국장·부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수산위원회 부위원장·제1부위원장
  • 1965–1979소련 수산부 제1차관
  • 1979–1986소련 수산장관
  • 1986–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 1993–2003전러시아 수산기업협회 회장·러시아 산업가연맹 부회장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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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이고리 세르게예비치 벨로우소프

Игорь Сергеевич Белоу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05 ○ 자연사

소련 해군 전략균형을 건조한 조선장관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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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발트 조선소에서 현장 기술자·콤소몰 서기·조립용접공장장·생산부장 역임
  • 1963–1967발트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7–1969아드미랄테이스키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9–1976소련 조선공업 차관
  • 1976–1984소련 조선공업 제1차관
  • 1984–1988소련 조선공업 장관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 2000–2005로소보론엑스포르트 수석고문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리지체프

Алексей Дмитриевич Лиз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8–2006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도 군 정치기관을 수호하려 했던 마지막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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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체레포베츠 보병학교 졸업, 콤소몰 정치업무 시작
  • 1957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통신)
  • 1960–1965총정치국장 보좌관 (콤소몰 담당, 대령)
  • 1965–1971제13근위군단 정치부장 →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국 제1부국장 (소장)
  • 1971–1980주독소련군 정치국 제1부국장 → 자바이칼 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 1980–1985총정치국 부국장 (상장) → 주독소련군 정치국장
  • 1985–1990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대장, 1986)
  • 1990–1992국방성 총감찰단, 퇴역

레프 알렉세예비치 보로닌

Лев Алексеевич Воро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08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의 수호자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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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9스베르들롭스크 제356공장 작업반장 → 작업장장
  • 1959–1963카멘스크-우랄스키 및 스베르들롭스크 방산 기업 수석기사
  • 1963–1965중우랄 소브나르호스 무선전자공업 국장
  • 1965–1968국방공업부 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장
  • 1968–1979국방공업부 국장 → 계획생산총국장 → 차관
  • 1979–1980소련 국방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12 리시코프 입원 시 의장 대행
  • 1991유럽공동체 주재 소련 상임대표

칭기즈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

Чингиз Торекулович Айтма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 1928–2008 ○ 자연사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새긴 소비에트 키르기스 작가이자 외교관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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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수의사로 일하며 첫 작품 발표
  • 1956–1958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 수료
  • 1959–1967『프라우다』 키르기스 특파원
  • 1966–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7~11기)
  • 1985–1991고르바초프 문화 고문,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86–1991키르기스 작가동맹 제1서기
  • 1990–1993소련·러시아 룩셈부르크 대사
  • 2000–2008키르기스스탄 EU·NATO·유네스코 대사

게르만 아르세니예비치 곤차로프

Герман Арсеньевич Гонч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8–2009 ○ 사망

사하로프 팀에서 출발해 소련 수소폭탄 역사의 수석 기록자가 된 물리학자

사하로프조차 비밀에 부친 '제3의 아이디어'의 수수께끼에서, 곤차로프는 그 실마리가 푹스의 1948년 보고서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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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11(아르자마스-16) 실험원자로부 선임연구보조원, 이후 엔지니어
  • 1953KB-11 이론부서 정식 연구원(사하로프 휘하)
  • 1955RDS-37 2단계 열핵전하 설계·계산 공동 수행
  • 1961차르 봄바(RDS-220) 물리 설계 참여
  • 1965메가톤급 열핵전하 신설계 방향 제안, 1966년 시험 성공
  • 1967–2004VNIIEF 이론부서장
  • 1990년대–2009『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다권본 책임 편찬자, 핵무기사 연구
  • 2002–2009VNIIEF 이론·수리물리연구소 수석연구원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사망

냉전을 끝낸 소련 외무장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되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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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 1957–61그루지야 콤소몰 제1서기
  • 1992–2003국가평의회 의장, 의회 의장, 국가수반, 대통령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8–2016 ○ 자연사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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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야코프 페트로비치 랴보프

Яков Петрович Ря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8–2018 ○ 자연사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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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리펑

李鹏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28–2019 ○ 자연사

1989년 5월 계엄을 선포한 총리, 「베이징의 도살자」라 불린 저우언라이의 양자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1987년 총리가 되어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3~4일 군사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쓰촨 출신으로 아버지가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저우언라이 부부의 보호 아래 자랐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배워 전력 관료로 성장했고 1987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5월 18일 학생 대표들과의 텔레비전 대화가 결렬된 뒤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4일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삼협댐 건설을 밀어붙였고 1998~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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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1998국무원 총리
  • 1998–200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발렌틴 카르포비치 메시야츠

Валентин Карпович Меся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19 ↓ 퇴임 1985

정체 말기의 농업장관

1978년 소련은 사상 최대 2억 3,7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다. 메시야츠는 회고했다: "우리는 헥타르당 1센트너의 비료를 썼고, 유럽은 10센트너였다."

쿠즈바스 광부의 아들로 1976~1985년 소련 농업장관을 지내며 침체기 식량난 속에서 농업을 책임졌다. 이후 고르바초프 체제 모스크바주당 제1서기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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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8MTS 농업주임·소장 (모스크바주)
  • 1958–1961체호프 지구 집행위원장·볼로콜람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65–1971러시아공화국 농업부 제1차관
  • 1971–197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2서기
  • 1976–1985소련 농업장관
  • 1985–1990모스크바주당 제1서기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탸젤니코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Тяже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28–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청년 간부 파이프라인의 전형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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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조교
  • 1950–1952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콤소몰 위원회 비서
  • 1952–1954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56–1961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선임교원, 당위원회 비서
  • 1961–1964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
  • 1964–1968첼랴빈스크 주 CPSU 위원회 이념담당 비서
  • 1968–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7–1982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 1982–199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체르나빈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ав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23 ○ 자연사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최초로 북극 빙하 아래를 항해한 원자력잠수함 장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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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 1992–2014러시아 잠수함장 연합 창설 및 회장, 2014년부터 명예회장

하피줄라 아민

حفیظ‌الله امین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29–1979 ✕ 살해

4월 혁명을 설계하고 3개월 만에 소련군의 총구 앞에 쓰러진 칼크파 실세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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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5컬럼비아·위스콘신 대학 유학, 마르크스주의에 경도
  • 1966PDPA 입당, 칼크파 합류
  • 1969칼크파 유일의 국회의원 당선
  • 1973–1978당 군사조직 책임자, 장교망 구축
  • 1978.044월 혁명 지휘
  • 1978–1979부수상 → 외무장관 → 총리 → 국방장관 겸임
  • 1979.09타라키 축출·처형, 총서기·혁명평의회 의장 취임
  • 1979.12.27슈토름-333 작전으로 소련 특수부대에 피살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탈리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лыз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1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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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빅토르 페트로비치 니코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Ник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3 ↓ 해임 1989

고르바초프의 농업 후임자이자 마지막 내부 비판자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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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8MTS 주임 농학자, 농업학교 교사, 크라스노야르스크 당 기관 근무
  • 1961–1967타타르 주당 제2서기
  • 1967–1979마리 주당 제1서기
  • 1979–1983소유즈셀호즈히미야 의장 · 소련 농업차관
  • 1983–1985러시아 공화국 농업장관
  • 1985–1989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87–1989정치국 위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파블로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Пав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3 ○ 자연사

반反해빙 노선의 콤소몰 수장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을 이끈 체육 장관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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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전임 간부로 활동, 모스크바 시당 콤소몰 제2서기·제1서기
  • 1959–196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셸레핀의 후계자로 청년동맹 지휘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63≪프라우다≫ 기사로 ≪노비 미르≫·솔제니친·에렌부르크 공격
  • 1965≪프라우다≫ 기사에서 1930년대를 부정적 일변도로 보는 풍조 비판
  • 1968–1983소련 체육·스포츠 위원회 의장, 15년간 스포츠 행정 총괄
  • 1972소련-캐나다 아이스하키 슈퍼시리즈 성사 주도
  • 1977–1983소련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
  • 1980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조직 총괄
  • 1983–1985주몽골 소련 대사
  • 1985–1989주버마 소련 대사, 이후 강제 은퇴

바브라크 카르말

ببرک کارم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29–1996 ○ 사망

소련 침공으로 집권했으나 국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얼굴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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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창립, 파르참파 결성
  • 1965–1973하원의원
  • 1978.4–6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8.7–9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 1979.12–1986.11혁명평의회 의장 겸 PDPA 사무총장
  • 1979.12–1981.6각료평의회 의장
  • 1986–1996모스크바 망명

안드리얀 그리고리예비치 니콜라예프

Андриян Григорьевич Никол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추바시인) 1929–2004 ○ 심장마비

보스토크 3호로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한 소련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도 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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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50산림기술자, 카렐리야
  • 1950–54징집, 전투기 비행훈련 (체르니고프·프룬제)
  • 1955–60모스크바 방공전투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2.8보스토크 3호: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 (64회 선회, 4일)
  • 1963–68소련 우주비행사단 지휘관
  • 1970.6소유즈 9호: 18일 체공 신기록
  • 1974–82가가린 훈련센터 제1부소장, 퇴역

아폴론 세르게예비치 시스초프

Аполлон Сергеевич Сыс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05 ○ 자연사

소련 항공공업의 마지막 장관: 부란에서 민영화까지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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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69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 → 기술자 → 조립공장장
  • 1969–1975타슈켄트 항공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75–1981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УАПК) 초대 총책임자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91–1995ОАО «아비아프롬» 부사장

율리 미하일로비치 보론초프

Ю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орон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9–2007 ○ 자연사

소련군 아프간 철수를 외교로 마무리한 군축 협상가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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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소련 외무부 유럽부·국제기구부, 유엔 대표부
  • 1966–1977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워싱턴 대사대리
  • 1978–1983주인도 소련 대사
  • 1983–1986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86–1990소련 외무부 제1차관, INF 조약 수석협상가
  • 1988–1989주아프가니스탄 대사 겸임, 소련군 철수 외교
  • 1990–1994유엔 주재 소련·러시아 상임대표
  • 1994–1998주미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비류코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Бирюк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08 ↓ 실각 1990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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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제1모스크바 날염직물 공장 기술자, 직장, 작업반장
  • 1959–1963모스크바 시 소브나르호스 섬유·니트 산업관리국
  • 1963–1968트료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면직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68–1985전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평의회(VTsSPS) 서기
  • 1985–1986VTsSPS 부의장
  • 1986–1988CPSU 중앙위원회 서기 (경공업·소비재 담당)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각료회의 사회발전국 의장

세르고 아나스타시예비치 미코얀

Серго Анастасович Микоян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1929–2010 ○ 자연사

냉전의 비공개 기록을 복원한 역사학자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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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졸업
  • 1956동 대학원 수료
  • 1957–1960《세계경제와 국제관계》 학술 편집자
  • 1960–1990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연구원
  • 1962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쿠바 협상 수행원
  • 1970–1990월간지 《라틴아메리카》 편집장
  • 1990년대미국 대학·문서보관소와 공동 연구
  • 2000년대조지타운대학교 교수

귄터 샤보프스키

Günter Schabowski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29–2015 ○ 국경 사망 유죄 · 사면

베를린 장벽을 실수로 무너뜨린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

기자회견에서 '언제 발효됩니까?'라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즉시, 지체 없이.'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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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FDGB 기관지 『트리뷔네』 편집자로 언론 경력 시작
  • 1952SED 입당
  • 1967–1968모스크바 CPSU 당학교 수학
  • 1978–1985SED 중앙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 1981–1989SED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후보위원, 1984년 정위원
  • 1985–1989SED 동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 1989.11.09기자회견에서 여행규정 즉시 발효 발언으로 장벽 붕괴 촉발
  • 1997–2000국경 사망 사건으로 3년형, 1년 복역 후 사면

예브게니 막시모비치 프리마코프

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15 ○ 자연사

대서양 상공에서 비행기를 돌린 아랍주의자 총리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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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62국영방송 아랍어 편집국, IMEMO 연구원
  • 1962–70《프라우다》 중동 특파원, 카이로 주재
  • 1970–77IMEMO 부소장, 비밀 중동 외교 임무
  • 1977–85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소장
  • 1985–89IMEMO 소장, 소련과학원 아카데미크
  • 1989–90정치국 후보위원, 소비에트연방회의 의장
  • 1991KGB 제1총국장 → 중앙정보국장 → SVR 국장
  • 1996–98러시아 외무장관, 다극체제 독트린
  • 1998–99러시아 총리, 대서양 반전 귀국

루시우 라라

Lúcio Lara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29–2016 ○ 루안다에서 사망

앙골라 해방운동의 이데올로그, MPLA 창립자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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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마요레츠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Майоре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9–2016 ○ 자연사

체르노빌 현장에 투입된 마지막 소련 에너지장관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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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 전기기사 → 선임 작업반장 → 책임자
  • 1962–1965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장
  • 1965–1974소련 전기공업부 차관
  • 1974–1980소련 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전기공업장관
  • 1985–1989소련 에너지·전화장관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위원회 위원 (셰르비나 위원장)

유리 니콜라예비치 흐리스토라드노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Христорад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9–2018 ○ 자연사

고리키 지역을 14년간 이끈 당 간부, 소련 말기 종교정책의 마지막 책임자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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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물 공장 작업반장
  • 1952주물 공장 부책임자 보좌
  • 1958주물 공장 부책임자
  • 1960자동차 공장 주물 단지 당위원회 서기
  • 1962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서기
  • 1963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66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8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9소련 각료회의 종무위원회 의장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차조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Ча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21 ○ 자연사

크렘린 의료를 20년간 총괄한 소련 심장학의 대부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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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키예프 의과대학 졸업, 모스크바에서 레지던트 수련
  • 1963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65–1976소련 의학아카데미 미야스니코프 심장학연구소 소장
  • 1967–1986소련 보건부 제4총국장 (크렘린 의료 총괄)
  • 1968–1986소련 보건부 차관
  • 1976–2014전연방 심장학 연구센터 소장
  • 1987–1990소련 보건부 장관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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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알렉세예비치 샬라예프

Степан Алексеевич Шал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22 ○ 자연사

소비에트 노동조합 체제의 마지막 지도자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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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 1963–1968임업·제지·목재가공 노동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 1968–1980VTsSPS 서기, 국가사회보험 예산 관장
  • 1980–1982소련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
  • 1982–1990VTsSPS 의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90자발적 사임, 연방급 개인연금자로 퇴임
  • 1991–2002노동조합 과학센터 소장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즐롭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зл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소련 지질학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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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5극동지질관리국: 부시추조수 → 주임기사 → 콤소몰스크 탐사대장
  • 1965–1973러시아공화국 지질부 기술관리국장
  • 1973–1974전연방 광물자원경제·지질탐사연구소(VIEMS) 소장
  • 1974–1975소련 지질부 차관
  • 1975–1989소련 지질장관
  • 1990–2009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MGRI) 교수·학과장
  • 1992–2022국제지질주식회사(MAKGO) 사장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9–202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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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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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91.1각료회의 의장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25 ○ 자연사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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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아르날도 토마스 오초아 산체스

Arnaldo Tomás Ochoa Sánchez
쿠바 공산주의 쿠바 쿠바 1930–1989 ✕ 총살형

아프리카 원정군을 지휘한 쿠바의 장군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소말리아군을 격파한 지지가 전투를 지휘했다. 사료는 지지가 탈환 시점을 1978년 3월 4일과 3월 5일로 각각 기록한다.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1930~1989)는 쿠바 혁명군(FAR)의 사단장이자 쿠바 공화국 영웅이었다. 카코쿰 출신으로 1958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고, 피그스만 침공을 막았으며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을 20여 년 지냈다. 1975년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섰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1984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89년 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료는 둘째 이름을 토마스와 테오도미로로, 사망 당시 나이를 58~59세와 57세로 각각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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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다.
  • 1961피그스만 침공에서 2506여단과 교전했다.
  • 1975루안다에서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에 맞서 싸웠다.
  • 1977–1978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 1984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쿠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 1987–1988앙골라 주둔 쿠바 군사사절단을 이끌며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에 참전했다.
  • 1989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7월 13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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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수학, 졸업
  • 1954–1957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대학원
  • 1958–1961『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자문위원, 철학 후보학위 취득
  • 1961–1966『평화와 사회주의의 제 문제』 비평·서지부장 (프라하)
  • 1966–1974국제노동운동연구소 부문장,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편집장
  • 1968–1980모스크바 국립대·VGIK·심리학연구소 강의; 철학박사(1970), 교수(1972)
  • 1980–1990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주임연구원, 트빌리시 국립대 강의

그로스 카로이

Grósz Károly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30–1996 ○ 신장암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동요한 공산당 말기의 과도기적 서기장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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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14세)
  • 1954–56Borsod-Abaúj-Zemplén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1974–79MSZMP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84–87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89MSZMP 정치국 위원
  • 1987.6–1988.11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88.5–1989.10MSZMP 서기장, 카다르 후임
  • 1989.12–1990재창당된 MSZMP 대행 의장, 총선 낙선

빅토르 표도로비치 그루슈코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Гру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1 ○ 자연사

해외정보부터 방첩까지 아우른 KGB 작전부사령관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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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0소련 외무부, 노르웨이 대사관 근무
  • 1960–1961KGB 제101학교 수료, PGU KGB 제3부 배치
  • 1968–1971오슬로 KGB 부주재관 (정치첩보)
  • 1971–1972오슬로 KGB 주재관
  • 1975–1980PGU KGB 제3부장 (영국·스칸디나비아 담당)
  • 1983–1989PGU KGB 제1부국장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2총국장 (방첩)
  • 1991.1–1991.8KGB 제1부의장

유리 세르게예비치 플레하노프

Юрий Сергеевич Плех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2 ○ 체포 1991, 사면 1994

KGB 도청 전문가에서 경호 총괄로, 8월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기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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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CPSU 중앙위 서기 안드로포프의 비서
  • 1970–1983KGB 12부서장: 도청·전화감청·우편검열 총괄
  • 1983–1990KGB 9국장: 당·국가 요인 경호
  • 1990–1991KGB 경호국장 (9국 후신), 콜레기움 위원
  • 1991.7.29노보오가료보 회담실 도청: 녹음이 쿠데타 세력에 유출
  • 1991.8–1994포로스에서 쿠데타 가담, 체포,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수감, 사면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보빈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Бов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 작성자, 데탕트의 문장을 쓴 언론인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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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6하디젠스크시 인민판사 (소련 최연소 판사)
  • 1959–1963잡지 『콤무니스트』 철학부 과학 컨설턴트
  • 1963–1972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 브레즈네프 연설문 작성
  • 1968체코슬로바키아 체르나 협상에 소련 대표단 자문으로 참여
  • 1970–1982브레즈네프 서기장 연설문 작성 (비공식 외부직으로 지속)
  • 1972–1991『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 TV '국제 파노라마' 진행자
  • 1981–198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91.12소련 이스라엘 대사 (1주일 후 러시아 대사로 전환)
  • 1991–1997러시아 연방 이스라엘 대사
  • 1997–2000『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복귀 · TV·라디오 진행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야코블레프

Ег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Яковле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 시대를 연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금기를 깨는 데 앞장서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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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졸업
  • 1956–1966『모스크바 프라우다』·『콤소몰카』·『이즈베스티야』 기자
  • 1967–1968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
  • 1968–1985『이즈베스티야』 특파원, 프라하 주재
  • 1986–1991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 1991–1992소련 및 러시아 국영 TV·라디오 의장
  • 1993–2002『옵샤야 가제타』 발행인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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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파벨 로마노비치 포포비치

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0–2009 ○ 뇌졸중

보스토크 4호로 첫 동시 유인 비행에 나선 4번째 우주인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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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전문학교·비행클럽 졸업
  • 1954군사 항공학교 졸업, 공군 복무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보스토크 1호 교신 담당관 (가가린 비행)
  • 1962.8.12–15보스토크 4호: 첫 동시 유인 비행, 니콜라예프와 6.5 km 접근
  • 1966–68소련 달 착륙 계획 훈련
  • 1974.7.3–19소유스 14호 사령관: 살류트 3호(알마즈) 도킹
  • 1978–89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 부센터장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두비닌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Дуб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3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를 워싱턴에서 대면한 소련 대사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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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6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실습
  • 1956–1959유네스코 사무국 직원 (파리)
  • 1959–1963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3등·2등서기관
  • 1963–1968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참사관
  • 1968–1971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부과장
  • 1971–1978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과장
  • 1978–1986주스페인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6.3–5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6–1990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0–1991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4–1996러시아 외무차관
  • 1996–1999주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라표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Лавё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6 ○ 자연사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마지막 책임자이자 우라늄 지질학자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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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이겜 RAS 우라늄광상연구실 선임연구원 → 실장
  • 1966–1972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 부국장
  • 1968–1972전연방 지질기금(ВГФ) 국장
  • 1972–1983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1989키르기스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8–2013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1소련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91소련 총리 부의장 겸 과학기술부 장관
  • 1991–2016이겜 RAS 소장 → 과학지도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데멘테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Дементе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0–2018 ○ 자연사

연방의 보존과 벨라루스 주권 사이에 선 의장

“내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소련은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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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
  • 1974벨로루시 공산당 비쳅스크주위원회 서기
  • 197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79–1989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농업 담당
  • 1989–1990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
  • 1990–1991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7–2000벨라루스 공화국 국민회의 공화국 평의회 의원
  • 2005회고록 「삶의 교훈」 출간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루키야노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Лукья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0–2019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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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조레스 이바노비치 알표로프

Жорес Иванович Алфё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0–2019 ○ 자연사

반도체 헤테로구조로 IT 시대를 연 공산주의 물리학자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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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최초의 소련 트랜지스터 개발 참여
  • 1963이중 헤테로구조 반도체 레이저 특허 출원
  • 197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이오페 연구소)
  • 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레닌상 수상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87–2003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 1989–2017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
  • 1995–201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연방명단)
  • 2000노벨 물리학상 수상 (헤르베르트 크뢰머와 공동 수상)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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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압두라흐만 할릴 오글루 베지로프

Əbdürrəhman Xəlil oğlu Vəzirov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0–2022 ○ 자연사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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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56–1959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9–1970전연방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0–1976키로바바트 시당위 제1서기, 이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공업부장
  • 1976–1979주캘커타 소련 총영사
  • 1979–1985주네팔 소련 대사
  • 1985–1988주파키스탄 소련 대사, 아프간 철수 협상 참여
  • 1988–199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이반 스테파노비치 실라예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Сил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3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 항공장관에서 제국의 청산인으로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소련 정부 수반이 된 실라예프는 옐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연방 재산을 러시아로 이전하는 포고령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달 뒤 그는 해임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고리키 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20년 만에 공장장이 된 항공산업 관료였다. 1981년 항공공업장관으로 취임해 MiG-29, Su-27, Tu-160, 부란 우주왕복선 등 소련 항공·우주 기술의 정점을 총괄했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1990년 옐친에 의해 RSFSR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실상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옐친이 연방 기관을 일방적으로 접수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한 달 만에 해임되었고, 소련 해체라는 결과에는 결국 맞서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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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4고리키 항공공장: 기술자 → 공장장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7–1980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0–198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85–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기계제조 담당)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90–1991RSFSR 각료회의 의장
  • 1991.8–12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 ― 사실상 소련 마지막 정부 수반
  • 1991–1994유럽공동체 주재 러시아 상임대표 (대사)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시카바르드냐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Шкабардн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5 ○ 자연사

정밀 계측으로 미사일과 우주왕복선을 통제한 장관

1991년 2월, 새 내각에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한 지도부에 나는 필요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1980~1989)으로서 전략미사일과 에네르기아-부란 우주왕복선의 핵심 제어 체계를 총괄한 군수산업 행정가다. 부란 프로그램의 성공적 시험 비행을 이끈 공로로 1990년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정부 운영을 책임지다 1991년 신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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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노보체르카스크 공과대학 졸업, 크라스노다르 전자계측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경력 시작
  • 1954–1968크라스노다르 ZIP 공장에서 기술실험실장·특별설계국장 거쳐 주임기사까지 승진
  • 1968–1974기기제조부 중앙기구에서 전자계측기 총국 주임기사, 이후 소유즈엘렉트로프리보르 국장
  • 1974–1980기기제조부 기술국장·과학기술국장 거쳐 차관
  • 1980–1989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
  • 1981–1986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 1986–1990CPSU 중앙위원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관리국장
  • 1991 이후연금 생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제어문제연구소 전문가 고문 및 회고록 집필

아트나푸 아바테

አጥናፉ አባተ
에티오피아 공산주의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931–1977 ✕ 총살형

데르그의 마지막 독립 지도자

1977년 2월 3일 그는 수도 밖에서 민병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고 있었고, 관측자들은 그 일이 목숨을 구했다고 보았다. 11월 11일 데르그 본부에서 체포돼 이튿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1974년 황제를 축출한 군사위원회 데르그의 창설 세대다. 제4사단 소령으로 데르그 부의장에 선출됐고 1975년 4월 이후 중령이 됐다. 1976년 에리트레아 전선에 보낼 수만 명의 농민 민병 모집을 맡았고 보수적·민족주의적·종교적 성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7년 2월 3일 총격에서 살아남아 제1부의장이 됐으나 같은 해 11월 12일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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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데르그 창설에 참여, 부의장 선출(제4사단 대표)
  • 1975중령 진급
  • 1974–1977테파리 벤티 아래 데르그 부의장·국가군사행정위원회 제2부의장
  • 1976농민 민병 조직 책임(라자 작전)
  • 19771977년 2월 제1부의장

아나톨리 스테파노비치 디야틀로프

Анатолий Степанович Дят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1–1995 ○ 방사선 후유증

체르노빌 4호기 안전시험을 지휘한 부수석기사, 사고 후 설계 결함을 주장한 핵공학자

비상시 핵분열을 멈추도록 설계된 원자로 보호계통이 원자폭탄 기폭장치 역할을 했다.

시베리아 빈농가 출신으로 14세에 집을 나와 노릴스크 기술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를 우등 졸업했다. 14년간 아무르의 조선소에서 핵잠수함 원자로를 설치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73년 체르노빌 원전으로 옮겨 3·4호기를 총괄하는 부수석기사가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을 현장 지휘했고, 사고 후 설계 결함이 원인임을 주장했으나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도 RBMK 노형의 구조적 결함을 입증하려 애쓰며 『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집필했고, 1992년 IAEA 자문보고서는 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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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2노릴스크 광업야금 기술학교 전기공학과, 전기기사로 근무
  • 1953–1959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 졸업 (자동화·전자공학, 우등)
  • 1959–1973콤소몰스크나아무레 조선소 23연구소, 핵잠수함 원자로 설치
  • 1973–1986체르노빌 원전 부수석기사(2차 구역 운영), 3·4호기 담당
  • 1987–1990안전규정 위반으로 징역 10년 선고, 건강 악화로 1990년 조기 석방
  • 1990–1995『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 집필, 설계 결함 주장 지속

겐리흐 안드레예비치 포고샨

Հենրիկ Անդրեյի Պողոսյան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1–2000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쪽으로 기울게 한 최후의 당 제1서기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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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1988.02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집행위원회 부의장·농공위원장
  • 1988.02–1989.01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스테파나케르트 선거구)
  • 1989–2000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

라울 카스트로

Raúl Castro
쿠바 공산주의 쿠바 쿠바 1931–

몬카다에서 대통령까지, 반세기 동안 쿠바 혁명의 2인자로 군림한 조직자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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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몬카다 병영 습격 참가 — 13년형, 22개월 복역
  • 1956그란마 호 상륙 — 시에라마에스트라 게릴라전
  • 1958사령관 승진,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개척
  • 1959–2008혁명무력부(MINFAR) 장관 —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
  • 2006–2008피델 투병 중 권한대행
  • 2008–2018국가평의회 의장 겸 각료회의 의장
  • 2011–2021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2021당 제1서기 퇴임 — 정치 은퇴

모함마드 알리 사마타르

Maxamed Cali Samantar
소말리아 공산주의 소말리아 소말리아 1931–2016 ○ 망명 · 자연사

오가덴 전쟁을 지휘한 바레 정권의 장성 출신 부통령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바레를 대신해 수개월간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가덴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970년부터 국방장관, 1971년부터 부통령을 맡았고, 평의회 해산 뒤 1976년 혁명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당 장악을 상징했다. 1987년 쿠데타 이후 첫 총리가 되었으나, 이삭족 학살 지휘 책임으로 미국 법원에서 21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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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이탈리아 카사노디로마 보병학교에서 군사 훈련
  • 1970국방장관 취임
  • 1971부통령 겸 국군 총사령관
  • 1976혁명사회당 정치국원·부서기장
  • 1977–1978오가덴 전쟁에서 국군 지휘
  • 1987–1990총리
  • 1991미국으로 망명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판킨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н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스탄 1931–

쿠데타 이후 붕괴 직전의 외무장관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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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8–11외무장관

야오원위안

姚文元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31–2005 ↓ 체포 1976 · 자연사

『해서파관』 비판문으로 문화대혁명의 문을 연 4인방의 이론가, 「몽둥이」라 불린 평론가

1931년 저장성 주지 출신. 1965년 11월 10일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실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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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원
  • 1969–1976중공 중앙 정치국원

빅토르 세르게예비치 마카렌코

Виктор Сергеевич Мака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1–2007 ○ 자연사

크림의 당 관료이자 마산드라를 지킨 실무 정치가

반알코올 운동 때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의 와이너리와 에노테카를 지키는 데 개입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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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크리보이로크 지역 주택관리국 노동자
  • 1955드니프로페트롭스크 금속공업대학 졸업, 크리보이로크 제철소 근무
  • 1967–1969크리보이로크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72–1977세바스토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7–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크림주위원회 제1서기
  • 1982–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7–2007연금 생활, 회고록 집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1991년 이후 러시아 시민권 보유) 러시아 (우크라이나계 어머니) 1931–2022 ○ 자연사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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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78스타브로폴 지방 당 제1서기
  • 1978–85농업 담당 서기, 49세에 정치국원
  • 1985.3서기장 선출
  • 1986–88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체르노빌 대응
  • 1987–89중거리핵조약, 아프간 철군, 동유럽 불개입
  • 1990초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 1991.12.25사임 연설, 소련 국기 하강

키우 삼판

ខៀវ សំផន

민주캄푸치아 국가원수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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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7귀국해 프놈펜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시아누크의 상쾌 정부 각료를 지냈다
  • 1967좌익 탄압을 피해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했다
  • 1973–1974FUNK·GRUNK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중국·조선·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알제리 등을 순방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 1976비동맹 정상회의에 민주캄푸치아 대표로 참석했다
  •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에서 부주석 겸 외무를 맡아 유엔 의석 유지를 주도했다
  • 1985–1998폴 포트를 공식 계승해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되었다
  • 1997폴 포트를 비난하고 크메르 민족연대당을 창당해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199812월 누온 찌어와 함께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체포되었고, 국제적 압력에도 훈 센 총리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 20148월 7일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201811월 16일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참 집단 학살 관여는 무죄로 인정됐다
  • 20229월 22일 항소가 기각되어 유죄가 확정됐다

파스칼 리수바

Pascal Lissouba
콩고공화국 공산주의 콩고-브라자빌 콩고-브라자빌 (은제비족) 1931–2020 → 망명 중 사망

내전으로 축출된 과학자 출신 대통령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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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튀니스 고등농업학교 졸업, 농업공학사
  • 1961파리대학 이학박사, ORSTOM 연구원
  • 1963–1966마삼바데바 정권 총리 (농업장관 겸임)
  • 1966–1970유전학 교수, 이학원장
  • 1977응구아비 암살 연루로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 1979–1990프랑스 망명, UNESCO 과학부문 국장
  • 1991범아프리카사회민주연합(UPADS) 창설
  • 1992–1997대통령, 1997년 내전 패배로 축출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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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보리스 사르키소비치 케보르코프

Բորիս Սարգսի Կևորկո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1998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바쿠의 통제를 집행한 아르메니아계 당료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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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바쿠 시 콤소몰 강사·선전부 차장
  • 1954–1961바쿠 제르진스키·나리마노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61–197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기관부 책임조직원·감찰관
  • 1970–1973바쿠 키로프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73–1988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1989소련 최고회의 민족회의 대의원 (9~11기)
  • 1988당에서 제명
  • 1993–1998모스크바 중학교 역사 교사

카렌 세로보비치 데미르찬

Карен Серобович Демирч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2–1999 ✕ 암살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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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블라소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Вл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2002 ○ 폐암

OMON을 창설하고 옐친에게 패한 마지막 공산당 RSFSR 총리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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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체렘호보 탄광 5호 갱부 감독; 콤소몰 체렘호보 시위원회 선전부장, 제2서기
  • 1955–1961이르쿠츠크 주 콤소몰 제2서기, 제1서기
  • 1961–1965이르쿠츠크 주 지민스키 구당 제1서기; 이르쿠츠크 공업주당 제2서기; 이르쿠츠크 주 집행위 제1부의장
  • 1965–1972야쿠트 주당 서기, 제2서기
  • 1972–1975CPSU 중앙위 감찰원
  • 1975–1984체첸-인구시 공화국 당 제1서기
  • 1984–1986로스토프 주당 제1서기
  • 1986–1988소련 내무장관 (중장, 재임 중 상장 진급)
  • 1988–1990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8.9–1990.7)
  • 1990.5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 패배 (467:535)
  • 1990–1991CPSU 중앙위 사회경제부장
  • 1994–2002이르쿠츠크 향우회 「바이칼」 회장

에를렌 키리코비치 페르비신

Эрлен Кирикович Первы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2–2004 ○ 자연사

군사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통신장비공업 장관

1976년 4월, 전자공업부 전시회에서 동료 장관 발렌틴 프롤레이코는 페르비신을 이렇게 평했다: "자기 쪽 작업이 뒤처진 데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빈정거리며 오직 불평만 늘어놓았다."

시베리아 설치 현장에서 출발한 통신기사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간 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군사령·통제·통신(C3) 체계의 중추인 보안통신·무선중계·레이더 장비 생산을 총괄했다. 1989년 통신부 장관으로 옮겨 통합 통신망 구축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에는 러시아 통신 기업을 이끌며 민영화 전환기에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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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7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톰스크 설치구역 기사
  • 1957–1959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크라스노야르스크 설치구역 책임자
  • 1959–1961제5설계·조립트러스트 부수석기사 (모스크바)
  • 1965–1969소련 무선공업부 전소련 설계·조립트러스트 총책임자
  • 1970–1974소련 무선공업 차관
  • 1974–1989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
  • 1989–1990소련 통신부 장관
  • 1991–1992통신기업 콘체른 '텔레콤' 이사회 의장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볼스키

Аркадий Иванович Воль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2–2006 ○ 백혈병

소련 기계공업을 총괄하고 탈소비에트 자본을 조직한 실무자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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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9ZIL 자동차 공장: 보조 직장 → 주물공장장 → 당위 서기
  • 1969–1983중앙위 기계제작부: 자동차산업 부문장 → 부부장 → 제1부부장
  • 1983–1984안드로포프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4–1985체르넨코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5–1990중앙위 기계제작부장
  • 1988–1990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회 위원장
  • 1990–2005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 회장
  • 1991.8–12소련 부총리 (산업·군수복합체 담당)

스테판 카라페티 포고샨

Ստեփան Կարապետի Պողոսյան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2012 ○ 자연사

붕괴 직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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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 1990–1991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카호르 마흐카모비치 마흐카모프

Қаҳҳор Маҳкамович Маҳка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크 1932–2016 ○ 자연사

소련 말기 타지키스탄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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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슈라브 탄광 기술자로 일하기 시작
  • 1963–1982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각료회의 부의장
  • 1982–1986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5–1991타지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90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1타지키스탄 초대 대통령
  • 2000–2016타지키스탄 국민회의 종신 의원

올레크 드미트리예비치 바클라노프

Олег Дмитриевич Бакл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2021 ○ 자연사

우주산업을 이끈 최후의 GKChP 생존자

1991년, 나는 우리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하리코프 계기공장의 조립공으로 출발해 소련 로켓·우주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일반기계공업부 장관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에네르기야-부란 왕복우주선 계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 우주개발의 마지막 대역사를 이끌었다. 1988년 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로 당의 군수정책을 주관했고, 1991년 8월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8인 중 한 명으로 소련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후 1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2021년 사망 당시 GKChP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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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2하리코프 계기공장에서 조립공·무선기기 조정사로 근무
  • 1963–1972하리코프 계기공장 주임 엔지니어
  • 1972–1975하리코프 계기공장 공장장
  • 1975–1976생산연합 '모놀리트' 총괄책임자
  • 1976–1981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차관
  • 1981–1983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8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 1988–1991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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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체토프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че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

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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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

레프 드미트리예비치 랴베프

Лев Дмитриевич Ряб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3–

체르노빌 직후 핵산업을 넘겨받은 중형기계공업 장관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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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3VNIIEF(KB-11) 기술자·선임 기술자
  • 1963–1967크렘료프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7–1969VNIIEF 생산 담당 부수석 기술자
  • 1974–1978VNIIEF 소장
  • 1978–1984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 중형기계공업 부문장
  • 1984–1986중형기계공업 차관·제1차관
  • 1986–1989중형기계공업 장관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연료에너지복합체 국장
  • 1993–2002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

사모라 모이세스 마셸

Samora Moisés Machel
모잠비크 공산주의 모잠비크 모잠비크 1933–1986 ✕ 추락사

포르투갈 식민지배를 무너뜨리고 모잠비크 독립을 이끈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아프리카의 해방은 대륙 전체의 해방이거나, 그 무엇도 아니다.”

모잠비크 독립혁명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 FRELIMO를 이끌어 포르투갈 식민 지배를 무장 투쟁으로 종식시키고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로디지아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해방운동의 동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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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탄자니아로 망명, FRELIMO 합류 — 알제리서 게릴라 훈련
  • 1966FRELIMO 국방담당 비서
  • 1968모잠비크 해방군 총사령관
  • 1970FRELIMO 의장 취임 —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채택
  • 1974포르투갈 신정부와 독립 협상 — 루사카 협정
  • 1975–1986모잠비크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 1984남아공과 은코마티 불가침협정 체결
  • 1986.10잠비아 방문 후 귀국 중 남아공 음부지니에서 항공 사고로 사망

이코 카레이라

Iko Carreira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포르투갈·이탈리아계) 1933–2000 ○ 자연사

앙골라 인민군을 창설한 초대 국방부 장관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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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독립운동 가입
  • 1961포르투갈군 탈영, MPLA 합류
  • 1971MPLA 서기장
  • 1975–1980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국방부 장관
  • 1982소련 보로실로프 총참모아카데미 졸업, 아프리카 장교 최초 장군 과정 수료
  • 1983–1986앙골라 인민공군 사령관
  • 1987알제리 주재 대사

캄란 마메드 오글루 바기로프

Kamran Məmməd oğlu Bağırov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3–2000 ○ 자연사

알리예프의 후계자였으나 위기 앞에서 무너진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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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바쿠 가스 사무소 정비공
  • 1957아제르바이잔 공과대학 졸업, 조교·전임강사·건축학부 부학장
  • 1968–197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건설·공공주택부 부부장
  • 1971–197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도시경제부장
  • 1974–1978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8–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2–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2아제르바이잔 국가산업안전·광산감독위원회 의장

압사마트 마살리예비치 마살리예프

Абсамат Масалы уулу Масали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 1933–2004 ○ 자연사

소련 말 키르기지야의 당 지도자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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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블라디미르 미그라노비치 몹시샨

Վլադիմիր Միգրանովիչ Մովսիսյան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33–2014 ○ 자연사

소련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공산당 제1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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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5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여러 지역의 수석 수의사
  • 1969–1973아르타샤트 지구당 제1서기
  • 1975–197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84–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소련 농업·식량부 차관
  • 1996–1999아르메니아 농업부 장관

마티외 케레쿠

Mathieu Kérékou

베냉 인민공화국과 체제 전환

2005년 3선 개헌 요구에 "권력을 떠나지 않으면 권력이 당신을 떠날 것이다"라고 답했다.

1972년 쿠데타로 집권한 베냉 지도자다. 1974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언하고 이듬해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1990년 국민회의의 전환 결정을 수용했으며 1991년 선거에서 소글로에게 패배한 뒤 권력을 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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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위베르 마가 대통령의 부관
  • 1967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1972군사 쿠데타로 집권
  • 1974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정 이념으로 선언
  • 1975베냉 인민공화국 수립, 일당 체제 출범
  • 1990국민회의 개최, 마르크스·레닌주의 폐기
  • 1991선거에서 소글로에게 패배해 권력 이양
  • 1996선거로 대통령 복귀, 2006년 임기 종료

포즈거이 임레

Pozsgay Imre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33–2016 ○ 사망

1956년을 '민중봉기'라 부르고 자기 당의 정통을 무너뜨린 개혁 정치국원

서베를린에서 동독의 '반파시스트 방어벽'은 '치욕'이라며 철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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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헝가리 노동인민당 입당
  • 1957–1969바치-키슈쿤주 당위 선전선동부장·서기
  • 1976–1980문화부 장관
  • 1980–1982교육부 장관
  • 1982–1988애국인민전선 사무총장
  • 1988–1989MSZMP 정치국원 겸 국가장관
  • 1989.01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로 규정
  • 1990헝가리 사회당 부의장·대통령 후보; 낙선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파스투호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асту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33–2021 ○ 자연사

콤소몰의 마지막 거물이자 고스코미즈다트 수장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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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바우만 구 콤소몰 제2비서
  • 1959–1961바우만 구 콤소몰 제1비서
  • 1961–1962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2비서
  • 1962–1964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1비서
  • 1964–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7–1982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6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 의장
  • 1986–1989주덴마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9–1992주아프가니스탄 소련/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1992–1996러시아 연방 외무차관
  • 1996–1998러시아 연방 외무제1차관
  • 1998–1999러시아 연방 CIS 담당 장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말로페예프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оф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로루시아인 1933–2022 ○ 자연사

연방 해체기에 당의 연속성을 지키려 한 벨로루시아의 조직가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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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고멜 출생
  •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 1978–1985고멜주 집행위원회 위원장, 벨로루시아 공산당 고멜주위원회 제1서기
  • 1985–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민스크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6–2000벨로루시아 공화국 국민의회 하원 초대 의장

발렌티나 레오니도브나 포노마료바

Валентина Леонидовна Пономарё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3–2023 ○ 자연사

가장 뛰어난 여성 우주인 후보였으나 비행하지 못한 시험비행사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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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 1957–62OKB-1 배치 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응용수학부 연구원 (켈디시 산하)
  • 1962.4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공군 입대
  • 1962–63보스토크 6호 훈련, 최종시험 최고점. 테레시코바의 제2후보로 배정
  • 1965–66보스호트 4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88우주비행사훈련센터 선임연구원, 궤도역학·우주비행사 교육
  • 1988–2023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우주비행사학사 그룹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메르트니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ссмертны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3–

소련 말기의 마지막 정규 외무장관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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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외무장관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넬류보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Нелю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4–1966 ✕ 자살

가가린의 두 번째 예비였으나 한 번도 우주에 닿지 못한 우주비행사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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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예이스크 해군항공학교 졸업, 해군 항공대 복무
  • 1960.03제1차 우주비행사단 선발 (뱅가드 6인)
  • 1961.01국가위원회, 탑승 순위 3위로 확정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
  • 1961.04보스토크 1호 두 번째 예비 (가가린)
  • 1962.06건강 문제로 보스토크 3·4호 훈련에서 제외
  • 1963.04치칼롭스카야 역 사건으로 우주비행사단 제적
  • 1963–66극동 방공부대 전투기 조종사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타라카노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Тарак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

체르노빌 지붕 위에서 인간이 로봇을 대신한 장군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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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하리코프 군사기술학교 졸업
  • 1963하리코프 도로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 1967–72모스크바 민방위 군사학교 교관, 쿠이비셰프 공병사관학교 부관과정
  • 1972–86민방위군 군사기술위원회 선임전문가, 전소련 민방위연구소 제1부소장, RSFSR 민방위참모부 부참모장
  • 1986체르노빌 특별위험구역 제염작전 지휘관
  • 1988스피타크 지진 구조작전 지휘관
  • 1990s–회고록 집필, 러시아 작가동맹 회원, 숄로호프 문학상 수상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파니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ан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34–

페레스트로이카 속 공작기계 공업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장관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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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5소련군 복무
  • 1955–1956드리빈 지구 DOSAAF 위원장
  • 1957–1959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 선반공
  • 1959–1964레닌그라드 연삭장비 특별설계국 설계사
  • 1964–1975일리치 공장 작업장장 →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연합 당위 부비서
  • 1975–1978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장 겸 연삭장비 특별설계국장
  • 1980–1981전연방 정밀공작기계 생산연합 책임자
  • 1981–1986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6–199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91–1992국영주식연합 '스탄코인스트루멘트' 회장
  • 1992–로스스탄코인스트루멘트 사장 · 스탄코인스트루멘트 이사회 의장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4–2022 ○ 사망

공산당 선전가에서 시작해 소련을 서명으로 끝낸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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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70정치경제학 교사에서 체르니우치 주당 선전선동 부장까지
  • 1970–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서에서 승진
  • 1980–8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장
  • 1988–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이념 부장
  • 1989–90.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정치국원, 제2서기
  • 1990.7–1991.8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의장; 독립선언 주재
  • 1991.12–1994.7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 협정 서명, 쿠치마에 패배
  • 1994–2006인민대의원, SDPU(o) 원내대표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오세티야계 러시아 1934–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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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1968 ✕ 추락사

인류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미소

재진입 돌입, 캡슐 밖은 3천 도의 플라스마에 휩싸이고 10G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가가린은 그 안에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 쇼스타코비치의 「조국은 듣는다, 조국은 안다」. 후일 회고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내내 그 노래를 불렀다.」

집단농장 목수의 아들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파예할리!(갑시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두 진영이 함께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우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훈련하다 1968년 미그기 추락으로 죽었다. 서른네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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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7공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12보스토크 1호: 인류 첫 우주비행 108분
  • 1961–67세계 순방, 우주비행사 훈련 부책임자
  • 1968.3미그-15 훈련비행 중 추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계 1934–1993 ○ 자연사

위기 속에서 공화국 권한을 주장한 소비에트 정치가

“공화국의 동의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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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교 졸업, 문헌학 연구
  • 1966–197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바쿠 시당위원회 이념 담당 서기
  • 1980–1983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장관
  • 1983–1987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부 장관
  • 1987–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90–1992아제르바이잔 최고소비에트 의장

발레리 표도로비치 비콥스키

Валерий Фёдорович Бык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4–2019 ○ 자연사

5일 동안 혼자 궤도를 돌며 아직도 깨지지 않은 단독 비행 기록을 세운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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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 1988–1990베를린 소비에트 과학문화관 관장
  • 1990은퇴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

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2019 ○ 자연사

인류 최초로 우주의 문을 열고, 붓으로 우주를 그린 사관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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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추게프 공군비행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59동독 주둔 소련 공군 정찰연대 배속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유리 가가린과 동기)
  • 1965.3.18보스호트 2호: 인류 최초 우주유영 12분 9초
  • 1968소련 유인 달착륙 계획 사령관 후보, 계획 취소
  • 1971소유스 11호 주승무원 사령관, 의료 문제로 교체 — 백업 승무원 전원 사망
  • 1975.7소유스 19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소 최초 도킹
  • 1976–1982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
  • 1991공군 소장으로 퇴역
  • 2002–2019통합러시아당 최고위원회 위원

바실리 게오르기예비치 자하로프

Василий Георгиевич Заха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2023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를 집행한 선전 관료 출신 문화장관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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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 1973–1983레닌그라드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서기, 문화·과학·교육 담당
  • 1983–1986중앙위 선전부 제1부부장 → 모스크바 시당위 제2서기 (옐친과 공조)
  • 1986–1989소련 문화장관, 글라스노스트기 금서 해제·검열 완화·극장 자율화 추진
  • 1989–1990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올레크 다닐로비치 칼루긴

Олег Данилович Калуг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

KGB 최연소 장군이자 최고위 망명 비판자

"나는 미국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7개월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여러분의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위장한 24세 KGB 장교가 《뉴스위크》에.

KGB 최연소 소장으로 대외방첩국(K국)을 이끌며 냉전기 대미 첩보전을 지휘했다. 1980년대 말 체제 개혁파로 전향하여 KGB의 부패를 공개 비판했고, 1991년 쿠데타에서 옐친을 지지한 뒤 미국에 망명해 회고록으로 기관 내부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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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KGB 외국어대학 (레닌그라드)
  • 1956–1958KGB 제101고등정보학교
  • 1958–1959컬럼비아 대학 풀브라이트 장학생 신분으로 작전 실습
  • 1960–1964KGB 뉴욕 레지덴투라 작전장교 (모스크바 라디오 기자 신분)
  • 1965–1970KGB 워싱턴 레지덴투라 부레지던트 겸 대행
  • 1971–1973제1총국 제2국(후일 K국) 부국장
  • 1973–1980KGB 제1총국 K국(대외방첩) 국장
  • 1980–1987KGB 레닌그라드국 제1부국장
  • 1990소련 최고회의 인민대표로 선출

헹 삼린

ហេង សំរិន

1979년 이후 캄보디아의 재건

1978년 12월 크라티에 대회에서 폴 포트 체제 타도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독립을 선언하고, 구국통일전선 의장으로 선출됐다.

크메르루주에서 이탈해 베트남과 협력한 캄보디아 지도자다. 1979년 정권 교체 뒤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을 이끌었다. 새 정권은 국가·협동·가족 경제를 결합해 재건을 추진했지만 전쟁과 국제적 대표권 분쟁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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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인민혁명평의회 의장
  • 1981국가평의회 의장 겸 인민혁명당 서기장
  • 1991인민혁명당 서기장 퇴임
  • 1992국가평의회 의장 퇴임
  • 1998국회 부의장
  • 2006국회 의장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로보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о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5–

알마아타에 군대 투입을 거부하고 소련 군사개혁을 설계한 마지막 총참모장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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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 1989–1991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겸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 1991.8소련군 총참모장 — 쿠데타 직후 임명, 소련 해체와 함께 해임
  • 1992–1994군 감찰관·러시아 대통령 군사고문, 이후 퇴역

왕훙원

王洪文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35–1992 ↓ 체포 1976 · 병사

상하이 노동자 반란파에서 당 부주석까지 오른 「헬리콥터」, 4인방의 최연소

4인방의 최연소자. 상하이 면방직공장 보위 간부에서 1966년 11월 노동자 반란 본부를 세우고 상하이 코뮌을 조직했으며, 38세에 당 제2부주석까지 올랐다가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체포되었다.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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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
  • 1973–1976중공 중앙 부주석

게르만 스테파노비치 티토프

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5–2000 ○ 심장마비

우주에 오른 두 번째 인간이자 군사우주체계 건설자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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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스탈린그라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1.04보스토크 1호 백업 조종사 (유리 가가린)
  • 1961.08보스토크 2호 탑승 — 17회 지구 궤도, 25시간 18분
  • 1965–1968스피랄 우주왕복선 조종사 훈련대장
  • 196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72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우주지휘통제 부대 부사령관
  • 1973–1979ГУКОС 연구·개발 담당 부국장
  • 1979–1991국방부 우주수단총국(УНКС) 제1부국장, 중장 → 상장
  • 1993–200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5–2006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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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5–2012 ✕ 자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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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8.22–23KGB 의장 대행

발렌티나 세메니브나 셰우첸코

Валентина Семенівна Шев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35–2020 ○ 사망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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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크리비리흐에서 피오네르 지도자, 지리 교사, 학교 콤소몰 서기
  • 1957–1962크리비리흐 시 콤소몰 서기, 이후 제르진스키 구 당위원회 서기
  • 1962–1969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겸 부서장
  • 1969–197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차관
  • 1975–1985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85–199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 1985–1989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세르게이 니키티치 흐루쇼프

Сергей Никитич Хрущ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미국 (이중국적) 러시아인 1935–202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의 유도체계 엔지니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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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 1959레닌상 수상
  • 1963–1964OKB-52 수석 설계자 겸 부설계국장
  • 1963사회주의 노동영웅 · 레닌 훈장 수훈
  • 1968–1991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부문장 → 제1부소장
  • 1991–2020미국 이주,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 선임연구원 · 교수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юх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35–2021 ○ 1988년 10년형, 5년 복역 후 석방

건설을 이끌고 사고의 책임을 진 체르노빌 원전의 첫 소장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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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타슈켄트 공과대학 졸업, 앙그렌 화력발전소 취직
  • 1966슬라뱐스크 화력발전소에서 부수석 엔지니어까지 승진
  • 1970–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 겸 건설 책임자
  • 1986.07사고 책임으로 당 제명·해임, 8월 체포
  • 1988.0710년형 선고, 도네츠크 교정노동시설 복역
  • 1991.09조기 석방, 우크라이나 대외무역부 근무
  • 1995–2015우크르인테르에네르고에서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
소련 소련 공산주의 몰도바 몰도바인 1935–2024 ○ 자연사

소련 말기 몰다비아 공산당의 마지막 수장

그는 공산당 금지를 “불법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며 1991년의 단절을 비판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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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농촌 중등학교 도서관장으로 노동 시작
  • 1954–1956소련군 복무
  • 1966–1970코토프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70–1980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제1부의장
  • 1980–1990몰다비아 공화국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1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4–1998루마니아 주재 몰도바 대사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소련 소련 공산주의 라트비아 라트비아인 1935–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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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

예브게니 파블로비치 벨리호프

Евгений Павлович Велих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5–2024 ○ 자연사

핵융합과 핵군축을 과학으로 연결한 소련의 물리학자

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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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대학 물리학부 졸업
  • 1961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입소
  • 1971–1978자기연구소장 · 트로이츠크 분소
  • 1973–1991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 과학책임자
  • 1978–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6체르노빌 사고 고르바초프 과학보좌역
  • 1989–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2015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 총재 → 명예총재

이반 쿠지미치 폴로스코프

Иван Кузьмич Полоз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5–

러시아 공화당을 세운 보수파 당간부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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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콤소몰 · 쿠르스크주 솔른체보 구 당 간부
  • 1969–1972쿠르스크주 당 부서 부장
  • 1972릴스크 구 집행위원회 의장
  • 1973–1978, 1980–1983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83–1984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이념 담당 서기
  • 1984–1985CPSU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과장
  • 1985–1990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위원

콘드라트 지그문도비치 테레흐

Кондрат Зигмундович Тере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35–

소비자협동조합 출신의 마지막 소련 무역장관

1987년 설탕 비축량 감소를 정부에 보고하며 소비 위기의 수치를 제시했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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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농촌 소비자협동조합 수석 회계원
  • 1954–1958소련 해군 복무
  • 1959–1963빌레이카 시 식품무역국장
  • 1967–1977민스크주 무역국장 및 벨코옵소유즈 제1부의장
  • 1977–1984벨코옵소유즈 의장
  • 1984–198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무역장관
  • 1992–대외경제협회 회장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라주몹스키

Георгий Петрович Разум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6–

페레스트로이카 인사교체의 설계자, 마지막 생존 정치국원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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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쿠반농업대학 졸업, 콜호스 농학자
  • 1959–1961콤소몰 구역위 제1서기
  • 1964–1967코레놉스크 구역당 제1서기
  • 1967–1971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조직당사업부장
  • 1971–1973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문장
  • 1973–1981크라스노다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81–1983소련 각료회의 사무국 농업부장
  • 1983–1985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85–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초프 후임)
  • 1986–1990중앙위 서기
  • 1988중앙위 당건설간부사업부장
  • 1988–1990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2주상하이 소련 총영사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레벤코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Рев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14 ○ 자연사

키예프 주당위 지도자에서 고르바초프 마지막 비서실장까지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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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 1984–1985CPSU 중앙위 감사원, 조직당사업부 부부장
  • 1985–1990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 1991–1992소련 대통령장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36–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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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철도공학원 졸업, 자포리자 전기기관차수리공장 근무
  • 1960–1967콤소몰 서기 → 자포리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67–1974레닌 구 당 제1서기 → 자포리자 시집행위 의장
  • 1974–1986자포리자 주당 산업담당 서기 → 제2서기
  • 1987–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
  • 1988.02볼스키 조에 합류, 숨가이트 파견
  • 1988–1990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

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6–1988 ✕ 자살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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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 1986–1988정부위원회 위원, 체르노빌 사고 수습

율리 알렉산드로비치 크비친스키

Ю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виц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6–2010 ○ 암

그로미코의 후계 외교관, '숲속 산책'으로 기억된 군축 협상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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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 1990–1991소련 외무부 차관
  • 1991소련 외무부 제1차관 (5월–9월)
  • 1997–2003주노르웨이 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2003–201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4·5대), 국제문제위원회 제1부위원장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구렌코

Станислав Иванович Гу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우크라이나 러시아 1936–2013 ○ 암

소련 해체 직전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마지막 제1서기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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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76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 → 공장장 (1970–1976)
  • 1976–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 1980–1987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체르노빌 사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제2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8–2006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제3·4대), 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이고르 니콜라예비치 로디오노프

Игорь Николаевич Роди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6–2014 ○ 병사

트빌리시 유혈 진압의 작전 명령을 내린 장군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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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펜 소반

ប៉ែន សុវាន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캄보디아 캄보디아 1936–2016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의 첫 총리

1981년 12월 2일 해임되어 체포됐으나, 12월 5일까지 총리·당 서기장직을 유지했다. 같은 날 헹 삼린이 당 서기장이, 찬 시가 총리 대행이 됐다.

크메르루주와 결별하고 베트남과 협력한 캄보디아 정치가다. 1978년 캄푸치아 구국 민족 통일전선 창립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1979년 정권 교체 뒤 인민혁명당 서기장으로서 당·행정 체제 건설을 이끌었다. 1981년 6월 총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베트남의 압력으로 해임·체포되어 1992년까지 구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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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크메르 이싸락 게릴라전 참여
  • 1978캄푸치아 구국 민족 통일전선 창립 지도자
  • 1979–1981캄푸치아 인민혁명당 서기장
  • 1981.6.27–12.5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총리
  • 1981–1992베트남 구금
  • 2007인권당 부대표
  • 2013–2016캄보디아 구국당 소속 국회의원(캄퐁 스푸주)

뱌체슬라프 프란체비치 케비치

Вячаслаў Францавіч Кебі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벨라루스 벨라루스 1936–2020 ○ 코로나19

소련 종말 문서에 서명하고서 '러시아만 미리 알고 왔다'고 증언한 벨라루스 초대 총리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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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 1985–199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90–1994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의장 / 벨라루스 총리
  • 1996–2004벨라루스 하원 의원

디디에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
마다가스카르 공산주의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1936–2021

마다가스카르의 사회주의 헌장

「사회주의 혁명은 자주적이고 인도적이며 조화로운 방식으로 급속한 경제·문화 발전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다」

1975년 집권한 마다가스카르 지도자다. 사회주의 혁명헌장과 제2공화국을 통해 국유화·계획 투자와 경제적 탈식민화를 추진했다. 부채와 생산 부진 속에서 1980년대 시장 지향 조정을 받아들였고 정치적 반대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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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프랑스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임관
  • 1972–1975가브리엘 라마난초아 과도정부 외무장관; 프랑스-마다가스카르 협정 재교섭, 프랑 환권 이탈
  • 1975최고혁명평의회 의장으로 국가 원수 취임
  • 1975국민투표로 대통령 선출, 제2공화국 수립
  • 1976집권당 AREMA 창당, 사무총장 취임
  • 1982 / 1989대통령 재선
  • 1991파노라마 협정 체결, 대통령직 유지하되 대부분 권력 이양
  • 1993다당제 대선에서 알베르 자피에 패배, 퇴임
  • 1997대통령 재선, 재임
  • 2002대선 분쟁 끝에 7월 망명
  • 2003궐석 재판에서 공금 유용으로 10년 중노동형
  • 2011망명 9년 만에 귀국

니콜라이 막시모비치 포민

Николай Максимович Фом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7–

파괴된 원자로를 인정하지 않고 물을 주입시킨 최종 기술책임자

그는 재판을 앞두고 안경을 깨뜨려 그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 법정은 한 번 연기되어야 했다.

니콜라이 포민은 1972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하여 1981년 주임기사로 승진한 소련의 원자력 기술자였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직후 현장에 도착한 그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끝내 믿지 않고, 파손된 4호기에 수시간 동안 냉각수를 계속 주입하도록 강행했으며 부하 직원을 치사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찰 임무에 보냈다. 사고 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전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수용 끝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칼리닌 원전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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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체르노빌 원전 입사
  • 1981–1986체르노빌 원전 주임기사
  • 198710년 노동교화형 선고, 수감
  • 1988정신병원 이송, 조기 석방
  • 1990s–2000s칼리닌 원전 근무
  • mid-2000s은퇴, 우도믈랴 거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መንግሥቱ ኃይለ ማርያም
에티오피아 공산주의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937–

데르그의 권력 집중

데르그 회의에서 그는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를 종 '바리아'로 부르던 귀족들을 겨냥해 "내가 곧 이 무식한 자들을 콩을 갈게 하리라"라고 선언했다.

1974년 혁명으로 등장한 에티오피아 군부 위원회 데르그의 지도자다. 1977년 내부 권력투쟁 뒤 우위를 굳혔고 군사·당국가 체제를 이끌었다. 토지개혁과 국가 주도 개발은 정치적 탄압과 장기 전쟁 속에서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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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홀레타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74데르그 위원(제3사단 대표)
  • 1974–1977데르그 부의장
  • 1977–1987데르그 의장, 군정 수반
  • 1984–1991에티오피아노동자당 서기장
  • 1987–1991에티오피아인민민주공화국 대통령
  • 1991짐바브웨로 망명

알리 아흐마드 나세르 안타르

علي أحمد ناصر عنتر
남예멘 공산주의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 남예멘 아랍인 (달리 출신) 1937–1986 ✕ 총살

두 차례 권력 교체를 주도했으나 동지의 경호원 총에 쓰러진 부통령

회의 전날 아침, 그는 레바논 공산당 지도자 조지 하위에게 "오늘 구체적 제안을 할 텐데, 알리 나세르가 거부하면 권총을 뽑아 내 머리를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예멘 민족해방전선 유격대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인민민주공화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다. 소비에트 모델로 군대를 재편하고 1978년 살림 루바이 알리 축출과 1980년 이스마일 퇴진을 주도하며 권력 핵심에 섰다. 훗날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의 경제 자유화에 반대해 반대파의 중심이 되었고, 1986년 1월 13일 정치국 회의장에서 대통령 경호원의 총격에 사살되자 장교단이 대통령에게서 이탈하며 남예멘 내전이 불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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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0월 14일 혁명에서 달리·라드판 전선 참전
  • 1969육군 사령관, 최초 대통령평의회 위원
  • 1970국방차관
  • 1975소련 참모 아카데미 수료, 참모 중령
  • 1978살림 루바이 알리 축출 쿠데타 주도
  • 1980부통령·제1부총리 취임, 이스마일 퇴진 주도
  • 1981국방장관 해임
  • 1986정치국 회의장에서 피살

보리스 카를로비치 푸고

Борис Карлович Пуг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37–1991 ✕ 자살, 발사 순서는 논쟁 중

라트비아 KGB에서 소련 내무장관까지, 쿠데타가 무너뜨린 질서의 수호자

체포영장이 발부된 1991년 8월 22일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고 썼다. 발사 순서는 사료가 엇갈리며, 검찰은 그가 먼저 쐈다고, 야블린스키의 목격 진술은 아내가 마지막에 쐈다고 본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콤소몰과 당 사업을 거쳐 1980~1984년 라트비아 KGB 의장, 1984~1989년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12월 소련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법질서 노선을 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해 내무기관을 그 결정 실행에 동원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8월 2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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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69콤소몰 라트비아 프롤레타르스키 구위원회 서기, 제1서기; 라트비아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0–1974전연방 콤소몰 중앙위 서기; CPSU 중앙위 감찰원
  • 1974–197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 시당위 제1서기
  • 1976–1980소련 KGB 감찰국 부서장; 라트비아 KGB 제1부의장
  • 1980–1984라트비아 SSR KGB 의장 (소장)
  • 198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8–1990CPSU 당통제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9.9–1990.7)
  • 1990–1991소련 내무장관; 안전보장회의 위원 (1991.3–)
  • 1991.8GKChP 위원; 쿠데타 실패 후 자살

빅토르 페트로비치 폴랴니치코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Полянич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1993 ✕ 암살, 미해결

해체기의 현장 집행자

흑색 1월 뒤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직접 이끌며 모스크바의 현장 대리인이 되었다.

빅토르 폴랴니치코는 소련 공산당의 조직가이자 국제 공산주의권의 정치 고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남캅카스에서 모스크바의 정책을 현지 권력으로 옮긴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2서기로서 그는 흑색 1월 이후 바쿠의 통치력을 회복하려 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이끌며 군대와 당 기구를 결합한 강경한 질서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쟁을 억누른 중재자이자 강압을 동원한 중앙의 대리인으로 상반되게 기억된다. 소련 붕괴 뒤 러시아 부총리급 임시행정 책임자가 되었으나 1993년 북오세티야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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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4오르스크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5–1971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제1서기
  • 1972–1978오렌부르크 주 공산당 서기
  • 1978–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선전 부문 책임자
  • 1985–1988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공산당 정치고문
  • 1988–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90–1991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조직위원회 위원장
  • 1993러시아 임시행정 수반, 부총리급

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Валентин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3 ↓ 체포 1991

소련의 마지막 총리, 8월 쿠데타 가담자

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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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총리

올레크 세묘노비치 셰닌

Олег Семёнович Ше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9 ○ 자연사

소련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간 마지막 정치국원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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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CPSU 입당
  • 1974–1977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
  • 1977–1983하카스 주당 제2서기 →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
  • 1985–1987하카스 주당 제1서기
  • 1987–1990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CPSU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조직당사업)
  • 1993–2001СКП-КПСС 평의회 의장
  • 2004–2009재건 КПСС 의장

겐나디 이바노비치 야나예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Ян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0 ↓ 체포 · 사면 1994

소련의 유일한 부통령, 8월 쿠데타의 얼굴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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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고리키주 기계화농업대장 → 셀호즈테흐니카 지부장
  • 1966–1968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
  • 1968–1980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 1986–1990VTsSPS 서기 → 부의장 → 의장
  • 1990.7–1991.1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 1990.12–1991.9소련 부통령
  • 1991.8.19–21GKChP 수장 · 대통령 권한대행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Маслю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키스탄 1937–2010 ↓ 해임 1991 · 병사

소련 말기의 마지막 고스플란 세대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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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1970s방위산업과 국가계획기관에서 기술관료로 성장
  • 1980s군수공업위원회와 계획기관에서 말기 소련 산업정책에 관여
  • 1988–1991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계획경제 해체 국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정치와 경제 관료제에서 계속 활동
  • 1998–1999러시아 정부에서 위기기 경제정책에 관여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페트라코프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Петраков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4 ○ 자연사

가격 이론에서 시장 전환까지 나아간 경제학자

그는 500일 프로그램을 통해 가격 형성 연구를 소련 경제의 시장 전환 구상으로 밀어붙였다.

니콜라이 페트라코프는 가격 형성과 경제적 균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며 계획경제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였다. 그는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 개혁을 탐구했고, 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구상은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 공화국으로의 권한 이양을 통해 소련 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했으며, 페트라코프의 연구와 정책 활동은 학술적 모델과 급박한 정치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이후 시장문제연구소를 세워 시장 전환과 경제정책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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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3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산업 생산의 수익성과 가격 형성 연구
  • 1970–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72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계획경제의 가격 형성 연구
  • 1984–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경제 담당 보좌관, 이후 소련 대통령 경제 담당 보좌관
  • 1990샤탈린-야블린스키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
  • 1990–201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장문제연구소 설립자 겸 초대 원장

갈리나 블라디미로브나 세묘노바

Гал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Семён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7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기의 여성·가족 정책 설계자, 정치국 네 번째 여성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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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오데사 지역신문 《콤소몰스코예 플레먀》 문예부원
  • 1963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이스크라》 부장
  • 1965–1974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지즌》 문예부원 → 부장 → 책임비서
  • 1974–1981《콤소몰스카야 지즌》 편집장
  • 1978–1981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 아카데미(AON) 대학원생
  • 1981–1990《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 편집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정치국 위원
  • 1991소련 대통령 비서실 고문

바딤 빅토로비치 바카틴

Вадим Викторович Бака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KGB를 해체하도록 임명된 마지막 의장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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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3케메로보 건설현장 기술자·관리자
  • 1973–85케메로보 시·주 당 간부, 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85–87키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87–88케메로보 주당위 제1서기
  • 1988–90소련 내무장관
  • 1991.3–8소련 대통령 직속 안전보장회의 위원
  • 1991.8–11KGB 의장 (마지막)
  • 1991.11–92.1공화국간보안국(MSB) 국장
  • 1992–97레포르마 재단 부총재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7–2025 ○ 자연사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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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발렌티나 블라디미로브나 테레슈코바

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

직공 출신 첫 여성 우주인, '차이카'

발사대 앞에서: 「에이, 하늘! 모자 벗어!」 — 마야콥스키의 시구를 외치며, 1963년 6월 16일.

1963년 보스토크 6호로 세계 최초 여성 단독 우주비행. 직물 공장 여공 출신으로 71시간 49바퀴를 홀로 비행하며 프롤레타리아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된 '차이카'. 후에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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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60타이어 공장·직물 공장 노동자, 야간학교·통신기술학교 졸업
  • 1959–61야로슬라블 비행클럽 낙하산 훈련 (90회)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 1963.6.16–19보스토크 6호: 첫 여성 우주비행, 71시간 단독비행
  • 1966–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간부회의 위원 (1974–89)
  • 1968–87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장
  • 196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기술과학 후보·교수
  • 1971–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7–92소비에트 해외우호문화교류협회연합 의장
  • 2011–현재통합러시아당 국가두마 의원
  • 1995/2025소장·중장 진급: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쿱초프

Вале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пц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7–

러시아 공화당을 재건한 마지막 세대 서기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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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볼로그다주 콜호스 노동자 · 독서실장 · 군 복무
  • 1958–1974체레포베츠 제철소 압연공 · 현장감독 · 당위원회 서기
  • 1974–1979체레포베츠 시당 제1서기
  • 1979–1984볼로그다 시당 제1서기
  • 1984–1985볼로그다 주당 제2서기
  • 1985–1990볼로그다 주당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사회정치조직 담당
  • 1991.8–1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1993–2004КПРФ 중앙위 제1부의장
  • 1995–2011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II–V 소집)

블라디미르 마카로비치 벨리치코

Владимир Макарович Велич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7–

소련 후기 중공업을 책임진 기술관료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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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
  • 1955–1962레닌그라드 기계공학대학에서 기계공학 전공
  • 1962–1971'볼셰비크' 공장 기술자 → 부서장 → 생산담당 부공장장
  • 1971–197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장
  • 1975–1983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7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장관
  • 1987–1989소련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공업부 장관
  • 1989–1991소련 중공업부 장관
  • 1991.1–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1–2016'탸제네르고마시' 회장 → AO '텐마' 회장 → FPG 회장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Геращ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의 중앙은행가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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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1970s소련 대외은행과 국제금융 부문에서 성장
  • 1980s브네슈토르그방크 등 대외금융기관을 거쳐 국가은행 지도부로 진입
  • 1988–1991국가은행 총재, 말기 소련 통화체계와 공화국 금융분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중앙은행에서 전환기 금융위기를 다룸
  • 1998 이후러시아 금융위기 뒤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37–

호네커를 계승했으나 장벽을 열고 50일 만에 몰락한 동독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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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입당
  • 1971–1974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 조직 의장
  • 1974–1983자유독일청년단(FDJ) 중앙평의회 제1서기
  • 1983–1989SED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 안보·청년·체육 담당 서기
  • 1984–1989국가평의회 부의장
  • 1989.10–12SED 총서기
  • 1989.10–12국가평의회 의장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97국경 사망 사건으로 금고 6년 6개월 선고

예고르 세묘노비치 스트로예프

Егор Семёнович Стро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

고르바초프 시기 마지막 농업 정치국원, 페레스트로이카 농정의 실무 책임자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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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4오룔 주당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
  • 1984–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 1985–1989오룔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농업)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3–2009오룔 주지사
  • 1996–2001러시아 연방평의회 의장

이리나 바야노브나 솔로비요바

Ирина Баяновна Соловьё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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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9우랄 공과대학 건설학부 졸업, 기계공학 전공
  • 1955–62국가대표 낙하산 선수, 스포츠 마스터(1959), 약 700회 강하
  • 1959–62우랄에네르고몬타주 설계국 엔지니어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우주비행사 훈련 이수
  • 1963.5보스토크 6호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
  • 1964–67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조종사-우주비행사-기사 자격
  • 1966포노마료바와 보스호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91우주비행사훈련센터 연구원·선임연구원, 심리학 후보학위(1980), 대령 퇴역

마리앵 응구아비

Marien Ngouabi
콩고공화국 공산주의 콩고-브라자빌 콩고-브라자빌 1938–1977 ✕ 암살

콩고인민공화국 수립

1970년 1월 취임식에서 응구아비는 콩고 인민과 혁명, 콩고노동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브라자빌의 콩고를 이끈 군인·정치가다. 1969년 콩고노동당과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이끌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체제를 조직했다. 1977년 암살 뒤 군부·당 내부의 권력 재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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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국민혁명평의회 수장으로 쿠데타 집단을 이끔
  • 1968–1977콩고 대통령
  • 1969콩고노동당 창당
  • 1969국호를 콩고인민공화국으로 개칭, 아프리카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선포
  • 1974콩고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장 재선

빅토르 스테파노비치 체르노미르딘

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Черномырд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8–2010 ○ 자연사

가스공업부를 가스프롬으로 바꾼 소련 마지막 가스공업 장관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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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3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운전기사,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 부주임기사·공장장
  • 1973–1982오르스크 시당·CPSU 중앙위 중공업부에서 산업 행정
  • 1982–1985소련 가스공업 차관, 튜멘가스프롬 청장
  • 1985–1989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9–1992국영 가스 콘체른 가스프롬 창설·초대 이사회 의장
  • 1984–1990소련 최고회의·RSFSR 최고회의 대의원, CPSU 중앙위원

이슬람 압두가니예비치 카리모프

Islom Abdugʻaniyevich Karimov

독립과 주권을 앞세운 권위주의적 국가 건설자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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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6타슈켄트 기계·항공 산업체의 기계공학자
  • 1966–1983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경제관료
  • 1983–1986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재무장관
  • 1986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카슈카다리야주 공산당 제1서기
  • 1989–1991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 1991–2016우즈베키스탄 초대 대통령
  • 1991–1996우즈베키스탄 인민민주당 의장

푸아트 엔베르 오글루 무사예프

Fuad Ənvər oğlu Musayev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인 1938–2017 ○ 신부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폭력을 숨가이트로 돌린 인물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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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7아제르바이잔 SSR 농촌건설부 제1차관
  • 1977–1981아제르바이잔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8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81–198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서기
  • 1983–1988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위원회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 담당 서기
  • 1992–2003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 연합(AFFA) 회장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안드레예바

Н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8–2020 ○ 자연사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 공격한 레닌그라드의 화학 강사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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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화학공학자
  • 1966CPSU 입당
  • 1972–1988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화학과 조교수·선임강사
  • 1979–1981CPSU에서 제명되었다가 당통제위원회 심사로 복권
  • 1988.3『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 발표
  • 1989전연방협회 '옌딘스트보(통일)' 창립, 조정위원회 의장
  • 1991–2020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 창당, 중앙위 총서기
  • 2020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인 1938–2022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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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

올레크 안토노비치 고르디옙스키

Олег Антонович Гордие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8–2025 → 1985년 망명 · 궐석 사형 선고

서방에 망명한 최고위 KGB 장교이자 1983년 전쟁 공포의 결정적 증언자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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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 1974–1985MI6 정보원 '오베이션'으로 이중 활동
  • 1985망명, 소련에서 궐석 사형 선고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

علي ناصر محمد
남예멘 공산주의 예멘 예멘 1939–

남예멘의 정책 갈등과 1986년 위기

떠나기 전 그는 '이미 너무 많이 양보했다, 더는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두 달 뒤 아덴 내전이 터졌다.

남예멘 총리를 거쳐 1980년 당·국가 지도자가 됐다. 대외관계와 경제 운영에서 실용적 조정을 추구했으나 이스마일 계열과의 권력 갈등이 깊어졌다. 1986년 아덴 무력 충돌 뒤 실각하고 북예멘으로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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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7국방장관
  • 1971–1985민주예멘공화국(남예멘) 총리
  • 1978대통령평의회 의장
  • 1980–1986예멘사회당 총비서 겸 최고인민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86실각, 북예멘으로 망명
  • 1994내전에서 사나 정부 편에 서 지지 세력 동원

압둘파타흐 이스마일

عبد الفتاح إسماعيل
남예멘 공산주의 예멘 예멘 1939–1986

남예멘 사회당의 지도자

예멘사회당의 창립자이자 주된 이념가로 1978~1980년 남예멘을 사실상 이끌었으며, 1986년 내전 중 사망했다.

남예멘의 혁명 지도자로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과 당·국가 지도부를 이끌었다. 1980년 권력에서 물러나 소련에 머물렀고 귀국 뒤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와 대립했다. 1986년 당내 무력 충돌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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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민족해방전선(NLF) 공동 창립, 아덴 지하 군사조직(페다인) 지휘
  • 1967문화·국가지도·예멘통일 담당 장관
  • 1969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서기장,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
  • 1971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의장(국가수반)
  • 1978예멘사회당 창당, 초대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79소련과 우호협력조약 체결
  • 1980건강상 이유로 전직 사임, 모스크바로 이주
  • 1985귀국, 예멘사회당 중앙위원회 서기 복귀

조아킹 시사누

Joaquim Chissano
모잠비크 공산주의 모잠비크 모잠비크 1939–

모잠비크 경제재건과 평화

「SADC 지역의 평화와 안정은 우리의 경제 발전과 통합을 위한 필수 전제다」

FRELIMO 지도자이자 독립 후 외무장관으로 활동했고 1986년 마셸 사후 대통령이 됐다. 1987년 경제재건계획과 이후 다당제 전환을 추진했다. 1992년 평화협정은 내전 종결과 전후 경제 회복의 주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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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FRELIMO 창립에 참여
  • 1974루사카 협정 협상에서 핵심 역할
  • 1975외무장관 취임
  • 1986대통령 겸 FRELIMO 대표 취임
  • 1992내전 종결 평화협정 체결
  • 1994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재선
  • 1999대통령 재선
  • 2003–2004아프리카 연합 의장

조제 반두넴

José Jacinto da Silva Vieira Dias Van-Dúnem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39–1977 ✕ 체포 후 처형, 날짜는 미확인

니투 알베스와 함께 니티스타 파벌을 이끈 앙골라 정치군사 지도자

1977년 5월 20~21일 MPLA 중앙위원회가 그와 니투 알베스를 분파주의 혐의로 제명했고, 5월 27일 쿠데타 미수가 뒤따랐다.

앙골라의 군인·정치가·반식민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계열이던 가족의 영향으로 의학 공부를 접고 MPLA에 들어가 루안다 지하위원회를 조직했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0년 1월 군사정보 임무로 포르투갈 식민군에 입대해 무기를 빼내다 체포됐다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뒤 석방됐다. 1974년 7월 룬도지 회의에서 최연소 중앙위원이 됐고, 1975년 3월 FAPLA 국가정치위원 겸 부참모장에 임명됐다. 1976년 제25차 소련공산당 대회에 니투 알베스와 함께 참석했고, 정통 공산주의 니티스타 지도부였다. 1977년 5월 제명 뒤 체포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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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MPLA 입당, 루안다 지하위원회 조직
  • 1970.01식민군 입대 후 무기 탈취 시도로 체포·수감
  • 1974.07룬도지 회의에서 최연소 중앙위원 선출
  • 1975.03FAPLA 국가정치위원 겸 부참모장 임명
  • 1976.02니투 알베스와 함께 제25차 소련공산당 대회 참석
  • 1977.05분파주의 혐의로 MPLA 중앙위원회에서 제명

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39–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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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3그루지야 콤소몰 간부,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3–1974고리 지구당 제1서기
  • 1974–1985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85–1989.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9–1991과학생산연합·농업연구소 소장
  • 1995, 2000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디롤루아

Carlos Alberto da Rocha Oliveira Dilolwa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39–1996 ✕ 루안다에서 자살

앙골라 계획경제의 설계자, MPLA 이론가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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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MPLA 가입, 전시명 디롤루아 채택
  • 1963동베를린 파견, 경제·금융 전공
  • 1974MPLA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 루안다 26인 대표단 참여
  • 1975–1978경제장관(1975),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1976~1978)
  • 1978–1996루안다 대학 경제학부 교수, 정치·경제 연구 저술

알렉산드르 필리포비치 카투세프

Александр Филиппович Катус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9–2000 ✕ 자살

숨가이트 포그롬의 불씨를 당긴 소련 부검찰총장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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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학교 졸업, 드네프르 야금 콤비나트 노동자
  • 1965하리코프 법학대학 졸업
  • 1966자바이칼 군관구 수비대 검찰 수사관
  • c. 1970s–1987소련 검찰청 수사관, 선임수사관, 수사부서장, 주임수사국장 역임
  • 1987–1989소련 부검찰총장
  • 1989–1991소련 주임군사검사 겸 부검찰총장
  • 1991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9–2017 ○ 폐렴

핵전쟁을 막은 소련 방공군 중령, 세르푸호프-15의 오경보를 직감으로 간파한 당직 장교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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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키예프 방공무선기술학교 입학
  • 1957–1967방공군 복무, 레이더 체계 정비
  • 1967–1972키예프 방공 고등공병무선기술학교 수학
  • 1973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 배치
  • 1983.09.26오코 위성 오경보 당직 근무, 핵 보복 발사 저지
  • 1984중령으로 퇴역
  • 1984–1990s조기경보체계 개발 연구소 근무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모이세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оис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9–2022 ○ 자연사

마지막 소련 총참모장, 8월 쿠데타로 몰락하다

1991년 8월 22일, GKChP 쿠데타가 무너지고 야조프가 체포되자 모이세예프는 단 하루 동안 소련 국방장관 대행을 맡았다. 이튿날 그 역시 해임되었다.

소련군의 마지막 총참모장(1988~1991). 드미트리 야조프의 측근으로 극동군관구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군 2인자 자리에 올랐으며, 아프가니스탄 철수 계획을 지휘하고 미소 군축 협상에도 참여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야조프를 지지했다가 실패 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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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군 복무, 극동전차학교 졸업
  • 1962–1972전차소대장·중대장, 독일주둔 소련군 및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72–1980전차연대장, 제50·2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82–1985극동군관구 제15군 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85–1987극동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7–1988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8–1991소련군 총참모장·국방제1차관
  • 1991.8.22–23소련 국방장관 대행
  • 2011–2016국가두마 의원(통합 러시아)

알리 살림 알비드

علي سالم البيض
남예멘 공산주의 예멘 예멘 1939–2026 ○ 망명 중 사망

남예멘의 마지막 지도자

1986년 1월 무력 충돌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살아남아 2월 예멘사회당 서기장에 올랐다.

남예멘의 혁명 지도자로 예멘사회당 서기장으로서 남예멘의 마지막 시기를 이끌었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의 동맹자로 1986년 1월 아덴 무력 충돌에서 살아남아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 세력이 패퇴한 뒤 당·국가 지도권을 장악했다. 1990년 통일 예멘의 초대 부통령이 됐으나 1993년 사임하고, 1994년 내전에서 단명한 예멘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 뒤에는 남부 독립운동 알히라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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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민족해방전선(NLF) 가입, 무칼라 지방위원회 창설
  • 1967–1969국방장관
  • 1978예멘사회당 창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 서기 선출
  • 1986–1990예멘사회당 서기장, 남예멘 최고 지도자
  • 1990–1993통일 예멘 부통령
  • 1994예멘민주공화국 대통령(5월 21일–7월 7일), 실패 후 오만 망명
  • 2009–남부 독립운동(알히라크) 지도자

유리 아나톨리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Ю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계 1939–

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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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하이다르 아부바크르 알아타스

حيدر أبو بكر العطاس

남예멘의 마지막 국가수반이자 통일 예멘 초대 총리

1986년 1월 총격 당시 그는 인도에 있었고, 소련에서 내전 수습을 협상한 뒤 귀국해 대통령에 올랐다.

하드라마우트 출신 전기기술자로 민족해방전선에서 성장해 남예멘의 장관과 총리를 거쳤다. 1986년 아덴 유혈 충돌 뒤 대통령에 올라 혼란을 수습했고, 남예멘의 마지막 국가수반으로서 1990년 남북 통일을 주도해 통일 예멘의 초대 총리가 됐다. 1994년 내전에서는 남부 분리 정부의 총리를 맡았다가 패배 뒤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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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아랍민족주의운동 가입
  • 1963민족해방전선(NLF) 가입
  • 1969–1978공공사업·교통·건설 장관
  • 1985–1986남예멘(민주예멘공화국) 총리
  • 1986–1990최고인민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국가수반)
  • 1990–1994통일 예멘 초대 총리
  • 1994남부 분리 정부(민주예멘공화국) 총리
  • 1994–2003요르단·UAE·사우디아라비아 망명

하일레 피다

ኃይሌ ፊዳ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에티오피아 오로모 1939–1979 1977년 체포 후 소식 단절, 사망설

에티오피아 마르크스주의 운동가, 메이손 지도자

1977년 8월 체포와 그 뒤의 소식 단절은 더르그의 탄압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을 넘어 자기 협력자였던 메이손 지도부로 돌아선 전환점이었다. 1979년 무렵의 사망은 여러 사료가 전하지만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으로, 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메이손)의 지도자이자 의장이었다. 오로미아 월레가 아르조 출신으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후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었다. 1975년 12월 더르그가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을 맡아 1976년 4월 20일 발표된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했다. 1977년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되었으며, 수개월의 구금 끝에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1979년 무렵 사망했다는 서술은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라틴 문자 쿠베 철자법의 선구자로 '쿠베의 아버지'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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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유럽 에티오피아 학생연맹 제8차 대회에서 메이손 창립에 참여하고 유럽 오로모 학생 학습반을 조직·지도
  • 1973파리에서 쿠베로 쓴 오로모어 문법서 『히르마타 두비 아파안 오로모』를 출간
  • 1974–1975에티오피아로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보급
  • 1975.12더르그가 비밀리에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에 임명
  • 1976.4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 멩기스투가 4월 20일 대중집회에서 채택을 발표
  • 1977.8메이손 지도부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가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코베츠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Кобец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9–2012 ○ 사망

8월 쿠데타 당시 옐친 편에 선 최고위 장성, 백악관 방어를 지휘했다

"군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기자회견)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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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참가
  • 1987–1991소련 국방부 통신병대 총책임자 겸 참모총장 차장
  • 1990RSFSR 인민대표로 선출
  • 1991.01RSFSR 국가방위안보위원회 위원장
  • 1991.08.20RSFSR 국방장관 임명, 8월 24일 대장 진급
  • 1993–1997러시아 연방 국방차관
  • 1997부패 혐의 체포, 유죄 판결

누르술탄 아비슐리 나자르바예프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연방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카자흐스탄의 30년 통치자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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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사파르무라트 아타예비치 니야조프

Saparmyrat Ataýewiç Nyýazow
소련 소련 공산주의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멘인 1940–2006 ○ 자연사

소련 말기에서 독립국의 개인통치를 세운 투르크멘 지도자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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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 공산당 입당
  • 1970–1980투르크멘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
  • 1980–1984아시하바트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5–1991투르크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0–2006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 1991신연방조약 9+1 회의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 수석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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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표트르 루친스키

Petru Lucinschi
소련 소련 공산주의 몰도바 몰도바인 1940–

소비에트 간부에서 독립 몰도바의 대통령으로 이동한 정치가

1996년 결선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아 미르차 스네구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표트르 루친스키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관료로 성장해 소비에트 말기의 공화국 정치와 독립 이후 몰도바 국가 형성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1989년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독립 뒤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와 의회 의장을 거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몰도바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제도권의 연속성과 새 국가의 주권·대외노선 조정이 한 정치가에게 겹친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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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1몰다비아 레닌주의 콤소몰 중앙위원회 강사·부서장·서기·제1서기
  • 1971–1976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76–1978키시너우 시위원회 공산당 제1서기
  • 1978–1986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서 부부장
  • 1986–1989타지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89–1990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정치국원
  • 1997–2001몰도바 대통령

김정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1–2011 ○ 병사

소련 출생 기록과 백두산 신화 사이의 후계자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17년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유일한 공개 육성이었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공고화된 그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권력을 승계하여, 소련 붕괴 뒤의 고립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끌며 17년간 국가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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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소련 출생 기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서사의 갈림
  • 1964–1974조선노동당 중앙위에서 승진
  • 1980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후계자로 공고화
  • 1991–1994인민군 최고사령관·국가 권력 승계 준비
  • 1994–201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 2000첫 남북 정상회담

렘비트 아누스

Lembit Annus
소련 소련 공산주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41–2018 ○ 자연사

소련 유지를 택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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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코흐틀라얘르베에서 출생
  • 1963소련 공산당 입당
  • 1983–1989잡지 《에스티 코무니스트》 편집장
  • 1990에스토니아 공산당 칼리닌 지구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КПСС 강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1–1999《프라우다》 에스토니아 특파원, 탈린 시의회 의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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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안드레이 세라피모비치 그라초프

Андрей Серафимович Гра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1–

개혁의 붕괴를 기록한 권력 내부의 목격자

그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소비에트 국가의 역사를 하루 연장했다"고 회고했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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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66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참사관
  • 1966–1973부다페스트 《세계의 청년》 편집부 소련 대표
  • 1973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73–1978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참사관
  • 1978–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정치선전부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차장
  • 1991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좌관 겸 공보비서
  • 1992–현재기자·정치평론가·저술가

월터 로드니

Walter Rodney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가이아나 가이아나 1942–1980 ✕ 암살

유럽이 아프리카를 어떻게 저발전시켰는가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로, 1972년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해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서인도제도대학 강단에서 탈식민 사회과학의 중심을 세웠고, 가이아나에서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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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서인도제도대학 역사학 학사(최우등)
  • 1966런던대학 SOAS 아프리카사 박사
  • 1966–1974다르에스살람대학 및 서인도제도대학 강사·부교수
  • 1968자메이카 정부에 의해 입국금지, 로드니 폭동 촉발
  • 1972『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출간
  • 1974–1980가이아나 귀국, 노동인민동맹(WPA)에서 활동
  • 1979방화 혐의로 체포, 증거불충분으로 기각
  • 1980조지타운에서 차량 폭탄으로 암살됨

살리흐 무슬리흐 카심

صالح مصلح قاسم
남예멘 공산주의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 남예멘 아랍인 (달리 출신) 1942–1986 ✕ 회의장 총격에 사망

1986년 1월 아덴의 총격으로 숨진 남예멘 국방장관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예멘의 군인·정치가로 예멘사회당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고 독립 뒤 군에서 성장했으며, 당 분열 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알투그마 계열에 섰다. 1986년 1월 13일 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을 때 숨졌다. 그의 죽음은 뒤이은 내전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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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대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NLF) 참여
  • 1967 이후독립 뒤 남예멘 군에서 성장, 제22보병여단 지휘
  • 1978예멘사회당 창당 당시 이미 당의 고위 인사
  • 1979.08.11당내 분쟁 속에 내무장관직에서 해임
  • 1980.10.16–1981.08.30내무장관 (사료에 따라 1980~1982년으로 기재되기도 함)
  • 1981.08.30–1986.01.13국방장관, 1985년 2월 하이다르 알아타스 내각에서도 유임 (사료에 따라 1982년부터로 기재되기도 함)
  • 1986.01.13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총격에 사망

자랄라 오마르

جار الله عمر
예멘 사회당 공산주의 예멘 예멘 1942–2002 ✕ 사나에서 암살

예멘의 사회주의 정치가, 통일과 민주화의 옹호자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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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아랍민족주의자운동 입당
  • 1968예멘혁명민주당 창당 참여, 중앙위원
  • 1972예멘사회당 정치국원
  • 1978예멘사회당 창당 참여
  • 1993통일 예멘 문화·관광부 장관
  • 2002예멘사회당 부서기장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코르누코프

Анатолий Михайлович Корну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42–2014 ○ 사망

KAL 007 격추를 직접 지시하고 러시아 공군 총사령관이 된 방공 장성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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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소련군 입대, 비행학교 입교
  • 1964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제54근위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4–1976제777전투항공연대장(사할린)
  • 1980–1985제40전투항공사단장(극동·사할린·쿠릴)
  • 1983.09KAL 007 요격기 오시포비치에게 격추 지시
  • 1985–1988제71전투항공군단장(주동독소련군)
  • 1990–1991제11방공군 사령관(하바롭스크)
  • 1998–2002러시아 공군 총사령관, 공군·방공군 통합 주도

공산당 서기 출신으로 라트비아 독립을 이끈 최고회의 의장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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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기술자(니크라체 국영농장), 리가 농업공학연구소 직원, 소련군 복무
  • 1970–1974리가 공과대학 선임강사, 키로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7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러 직책, 최종 이념 담당 서기
  • 1988–1990라트비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독립 회복 후 국가원수 대행
  • 1993–1995제5대 사에이마(국회) 의장
  • 1995–2002부총리, 환경보호지역개발장관, 교통장관 역임

크리스 하니

Chris Hani
남아프리카 공산당 공산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1942–1993 ✕ 암살

총을 내려놓고도 혁명의 불씨를 지킨 남아공 공산당 지도자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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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ANC 청년동맹 가입 (15세)
  • 1959–1961포트헤어 대학교에서 영문학·고전학 수학
  • 1961남아공 공산당 입당
  • 1962움콘토 웨 시즈웨(MK) 입대
  • 1963체포 후 레소토 망명 — '크리스'로 개명
  • 1967–1969로디지아 해방전쟁 — MK·ZIPRA 합동작전 참전
  • 1969'하니 각서' 공동 서명 — ANC·MK 지도부 비판
  • 1974ANC 전국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82MK 참모총장 — 루사카에서 게릴라전 지휘
  • 1990ANC 합법화 후 남아공 영구 귀국
  • 1991.12SACP 사무총장 취임 — 조 슬로보 후임
  • 1993.4.10복스버그 자택 앞에서 극우 이민자에게 피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샤포시니코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2–2020 ○ 자연사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 마지막 항공원수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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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하리코프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로 임관
  • 1969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1987오데사 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87–1988소련군 주독 집단군 공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1.8–1992.2소련 국방장관 (최후)
  • 1992–1993CIS 연합군 총사령관
  • 1993.6–9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5–1997아에로플로트 사장
  • 1997–2004러시아 대통령 보좌관 (항공·우주 담당)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안토시킨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Антош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모르드바계) 1942–2021 ○ 코로나19

체르노빌 원자로 상공에서 1,927회의 헬기 투하를 직접 지휘한 소련 공군 장군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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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0정찰비행 연대 조종사, 편대장
  • 1973–1979비행대대장, 정찰항공연대장 (오데사·투르키스탄 군관구)
  • 1980–1983제20근위군 항공사령관, 중부군집단 항공사령관
  • 1985–1988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 체르노빌 공중작전 지휘
  • 1988–1989중앙아시아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89–1993모스크바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93–1997러시아 공군 전선항공대 사령관
  • 2014–2021러시아 연방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당)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José Eduardo dos Santos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42–2022

네투 이후의 앙골라

1979년 네투 사망 뒤 앙골라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2017년까지 재임했다. 1992년 다당제 선거에서 1차 투표 1위를 했으나 결선 투표는 치러지지 않았고, 내전은 2002년 사비姆비 사망 뒤 끝났다.

1979년 네투를 이어 앙골라 대통령이 됐다. 소련에서 교육받았고 계획장관 등을 지냈다. MPLA 정권 아래 내전과 석유 의존 경제를 이끌었으며 민간 부문의 역할을 인정하는 실용적 경제 운영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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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식민 통치 탄압 속 MPLA에 가입, 콩고 브라자빌로 망명
  • 1975독립 후 초대 외무장관
  • 1978제1부총리 겸 계획장관
  • 1979MPLA 의장 겸 앙골라 대통령 취임
  • 1980일당제 인민의회 의장
  • 1992다당제 선거에서 사빔비를 꺾고 대통령 선출
  • 2002UNITA와의 내전 종식
  • 2017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로렌수에게 승계

루슬란 이므라노비치 하스불라토프

Руслан Имранович Хасбулатов
러시아 연방 국가기관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체첸계 1942–2023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최고소비에트 의장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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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0–1990모스크바 국민경제연구소(플레하노프) 교수, 국제경제관계학과장
  • 1990.03그로즈니 선거구에서 RSFSR 인민대의원으로 선출
  • 1990.06–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07–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권한대행
  • 1991.10–1993.10RSFSR/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4–2023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대학교 세계경제학과장

드니 사수응게소

Denis Sassou Nguesso
콩고공화국 공산주의 콩고-브라자빌 콩고-브라자빌 1943–

콩고노동당과 석유국가

우리 민족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우리 나라가 완전히 독립할 수 없습니다.

콩고노동당의 군인 출신 지도자로 국방장관을 거쳐 1979년 대통령이 됐다. 일당 체제의 국가 운영과 석유 수입에 기반한 개발계획을 이끌었다. 1991년 국민회의와 다당제 전환은 그의 첫 집권기의 권력 구조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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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응가비 집권 군사 쿠데타 참여, 국가혁명위원회 창립 위원
  • 1973국가보안국장
  • 1975국방·보안장관(32세)
  • 1977콩고노동당 군사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79콩고 인민공화국 대통령 취임
  • 1986–1987아프리카통일기구(OAU) 의장
  • 1997제2차 내전으로 재집권, 대통령 취임
  • 2002새 헌법 아래 대선 승리(89.4%)

보리스 프세볼로도비치 그로모프

Борис Всеволодович Гро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43–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마지막 소련 군인, 소련군 철수의 얼굴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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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9발트 군관구 차량화소총 소대장·중대장
  • 1972–1978대대장→연대장→제9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북카프카스 군관구
  • 1980–1982제5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제40군, 아프가니스탄 (1차 파병)
  • 1984제38군 제1부사령관, 프리카르파티아 군관구
  • 1985–1986소련군 총참모부 대표, 아프가니스탄 (2차 파병)
  • 1986–1987제28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7–1989제40군 사령관, 아프가니스탄 (3차 파병) — 소련군 철수 지휘
  • 198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90–1991소련 내무부 제1차관
  • 1991러시아 대통령선거 부통령 후보 (니콜라이 리시코프와 함께 출마)
  • 1991–1992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제1대리
  • 1992–1995러시아 국방차관
  • 2000–2012모스크바주 지사 (3선)

빅토르 페트로비치 두비닌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Дубы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3–1992 ○ 암

아프간 손실을 절반으로 줄인 40군 사령관, 러시아군 첫 참모총장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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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알렉산드르 미트로파노비치 오볼렌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троф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3–

소련사 최초로 현직 서기장에게 선거 대안을 제시한 엔지니어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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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5오룔 공장 선반공, 동독 주둔 소련군 복무
  • 1971레닌그라드 광산대학 지구물리학 전공 졸업
  • 1971–1992콜라 과학센터 극지지구물리연구소 기술자·설계기사
  • 1987–1989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DOSP) 아파티티 결성·의장
  • 1989–1992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레닌그라드 농촌 제20선거구)
  • 1990–1994러시아 사회민주당(SDPR) 공동의장·의장
  • 19918월 쿠데타 진상조사 의회위원회 위원장
  • 1993–1996TV·라디오 공사 '보스토크' 사장 겸 편집장, 오룔

모리스 비숍

Maurice Bishop
그레나다 공산주의 그레나다 그레나다 1944–1983 ✕ 처형

문맹률 35%→5%로,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를 외친 카리브 혁명가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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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네덜란드 식민지 아루바에서 출생
  • 1963–1969런던에서 법학 공부, 그레이즈인 변호사 자격 취득
  • 1970그레나다 귀국, 파업 간호사 변호로 명성
  • 1973신JEWEL운동(NJM) 공동 창립, 공동조정서기
  • 1973–1974'피의 일요일' 체포·구타, '피의 월요일' 아버지 총살
  • 1976–1979하원 야당대표로 게일리 독재에 맞서다
  • 1979.3혁명으로 게일리 축출, 인민혁명정부 수상 취임
  • 1979–1983문맹률·실업률 대폭 감축, 무상의료·여성권리 개혁, 쿠바 협력 공항 건설
  • 1983.10.19부수상 코드의 쿠데타로 체포되어 총살형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

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44–2015 ○ 사망

KAL 007을 격추한 소련 방공군 요격 조종사

「민간기인 줄 알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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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아르마비르 고등군사항공학교 입교
  • 1967졸업, 중위 임관 후 극동 제530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6사할린 제777전투항공연대 편대 지휘관
  • 1983.09.01KAL 007 보잉 747 격추
  • 1983.09제761훈련항공연대 선임 항법사 전임
  • 1984.08적성훈장 수훈
  • 1986MiG-21 탈출 중 척추 부상으로 비행 중단
  • 1989.11예비역 전역

엔아르노 아우구스토비치 실라리

Enn-Arno Augustovich Sillari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계 1944–

분열하는 당을 이끈 마지막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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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카우나스 폴리테크닉 연구소 졸업, 섬유 기계가공 전공
  • 1967–1972탈린 케일라 공장에서 기술자로 근무
  • 1972–1976탈린 레닌구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 1984–1986타르투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탈린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0–1992소련 공산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2024에스토니아 사업가, 발테코 공동 소유주

기비 그리고리예비치 굼바리제

Гиви Григорьевич Гумбаридз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인 1945–

위기의 공산당을 이끈 그루지야 관료

“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희생자 없이 집행되어야 한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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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 1977–198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행정기관 부문 간부
  • 1983–1985제스타포니 지구당 제1서기
  • 1988트빌리시 시당 제1서기
  • 1988–1989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 1989–199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89–1990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니투 알베스

Nito Alves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45–1977 ✕ 쿠데타 미수 · 총살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처하다 쿠데타 미수로 처형된 급진파

1977년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나는 곧 혁명의 화신이다"라며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앙골라 해방운동 MPLA의 초대 내무장관이자 급진 '니티스타' 파벌 지도자였다. 식민지 전쟁기 뎀보스 지역 게릴라 지휘관으로 떠올라, 독립 뒤 내무부를 장악해 추종자들을 국가 기구 곳곳에 심었다.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 스스로를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로 내세워 소련의 지지를 구했으며, 이것이 네투 지도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식 채택을 재촉했다. 1977년 5월 쿠데타 미수 끝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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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혁명교습소 지휘관
  • 1971뎀보스 지역 최고 지휘관
  • 1974루안다 귀환, '인민권력' 대중조직 구축
  • 1975.11내무장관 취임
  • 1976.03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 대표단 인솔
  • 1976.10내무장관 해임, 내무부 폐지
  • 1977.05MPLA 제명, 27일 쿠데타 미수
  • 1977.07체포(7일), 총살형 집행(14일)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Сур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45–

군 당조직에서 말기 정치국으로 이동한 간부

1991년 4월, 전군 당위원회 책임서기였던 그는 소련 말기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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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금속공 견습공으로 노동 시작
  • 1965–1977소련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88–1990제병연합군 정치부장
  • 1990–1991전군 당위원회 서기, 중앙정치총국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원
  • 1995–199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의원단 국방위 부위원장
  • 2000–2007러시아 회계원 감사관

블라디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아찰로프

Влади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Ача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타르인 1945–2011 ○ 자연사

소련 공수군 사령관, 8월 쿠데타에 가담한 국방차관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 당시 아찰로프는 공수부대의 모스크바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봉쇄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1월 13일 타타르 자치공화국 아트닌스키 구의 아타마시 마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6년 카잔 전차학교, 1973년 장갑병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7근위공수사단장(1978), 제8근위군 사령관(1985~1987), 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1987~1989)을 지냈으며 1980년 소장이 되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1990년 12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1989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17일 KGB 시설 회의에서 권력 장악에 합의한 국방차관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고, 1993년에는 루츠코이의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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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3제8근위군 전차소대장·중대장 (주독소련군집단)
  • 1973–1975제44공수훈련사단 제243자주포훈련연대 부지휘관
  • 1975–1977제137근위공수연대장
  • 1977–1978제98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78–1982제7근위공수사단장
  • 1984–1985제2근위전차군 부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5–1987제8근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7–1989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9–1990소련 공수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국방차관
  • 1993루츠코이 대안정부 국방장관
  • 2003–2011러시아공수군재향군인연합 의장

자한기르 뫼브숨 오글르 무슬림자데

Cahangir Mövsüm oğlu Müslümzadə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45–

깃발을 들고 군중 선두에 선 숨가이트 마지막 당 책임자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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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 1974–1978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조직부장,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무부 지도원
  • 1978–1985아제르바이잔 레닌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5–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아제르바이잔 합작기업 및 국제연합 협회 부회장
  • 1991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최고회의 인민대표

데이비드 코츠

David M. Kotz

소련 체제 변동을 연구한 정치경제학자

『위로부터의 혁명』의 핵심 주장은 소련의 집권 정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늘리려 스스로 체제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M. 코츠는 제도 변화와 정치경제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프레드 위어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경제 붕괴와 대중 봉기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넓히려 체제를 해체한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표 저서인 『Revolution from Above』는 소련의 정체, 페레스트로이카, 자본주의 연합의 형성과 그 이후 러시아를 연결해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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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미국 대기업의 은행 지배』 공동 저자
  • 1994『사회구조적 축적』 공동 편집자
  • 1997프레드 위어와 『위로부터의 혁명』 출간
  • 2007프레드 위어와 『고르바초프에서 푸틴까지 러시아의 길』 출간
  • 2015『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흥망』 출간
  • 2021매사추세츠 애머스트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

줌갈베크 벡술탄 울루 아만바예프

Жумгалбек Бексултан уулу Аманба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인 1946–2005 ○ 자연사

소련 말기의 키르기스 공화당 지도자

1991년 4월, 소련의 마지막 정치국에 키르기스 공화국 대표로 합류했다.

아만바예프는 농업 전문가 출신의 키르기스 공산당 간부로, 당 조직과 지역 행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소련이 해체로 향하던 1991년 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두 직책은 연방 붕괴와 함께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는 이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정부 업무를 맡아 소비에트 당 관료와 새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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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키르기스 농업대학 졸업
  • 1971–1973오시주 국립 종축장장, 알라이 지구당 제1서기
  • 1981–1985키르기스 공산당 오시주위원회 서기
  • 1985–1988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91이식쿨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이식쿨주 소비에트 의장, 소련 인민대의원
  • 1991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3–1995키르기스 공화국 부총리

무함마드 나지불라

محمد نجیب‌الله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47–1996 ✕ 고문 살해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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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파르참파 입당
  • 1977PDPA 중앙위원
  • 1978주이란 대사, 곧 해임 후 동유럽 망명
  • 1980–1985국가정보청(KHAD) 청장
  • 1986–1992PDPA 사무총장
  • 1987–1992아프가니스탄 대통령
  • 1992–1996카불 UN 건물 피신

파벨 세르게예비치 그라초프

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Грач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48–2012 ○ 뇌수막염

공수부대 사령관에서 옐친의 국방장관으로, 쿠데타의 열쇠를 쥔 인물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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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9랴잔 고등공수지휘학교 졸업 (금메달)
  • 1981–1983, 1985–1988아프가니스탄: 345공수연대장 → 103공수사단장
  • 1988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90.12–1991.08소련 공수군 총사령관
  • 1991.08–1992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92.05–1996.06러시아 연방 국방장관
  • 1997–2007로스보루제니예·로소보론엑스포르트 군사 고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9–

소련 중앙계획을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

그는 소련 계획경제의 종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공공재에 다가가게 할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로, 파블로프 내각에서 고스플란을 경제예측부로 개편하면서 초대 장관 겸 제1부총리가 되어 중앙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을 관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자동차 조립기업 '압토토르'를 설립해 성공한 포스트소비에트 기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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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4VAZ 건설 현장 엔지니어 → 톨리아티 콤소몰 간부
  • 1976–1982VAZ 계획경제국 차장·국장
  • 1982–1985KAMAZ 경제·계획 담당 부총책임자
  • 1985–1988국가노동위원회 국장 →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89–1991국가노동위원회 의장
  • 1991.3–1991.5소련 부총리
  • 1991.5–1991.11제1부총리 겸 경제예측부 장관 (고스플란 후신)
  • 1991 이후국제투자기금 설립 → 압토토르 홀딩 회장

토마 상카라

Thomas Sankara

관용차 메르세데스를 르노5로 바꾼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혁명가 개인은 살해할 수 있어도, 이념은 죽일 수 없다.” — 암살 일주일 전 연설(1987)

부르키나파소의 마르크스주의·범아프리카주의 혁명가. 33세에 집권해 국명을 '정직한 사람들의 땅'으로 바꾸고 백신·문맹퇴치·여성해방 개혁을 밀어붙였다. IMF를 거부했고 1987년 측근 쿠데타로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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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33세에 집권 — 혁명평의회
  • 1983–1987백신·문맹퇴치·녹화·여성 해방 개혁
  • 1984국명 개칭 — '정직한 사람들의 땅' 부르키나파소
  • 1987.7아디스아바바 연설 — 아프리카 부채 거부 호소
  • 1987.10측근 콩파오레의 쿠데타로 암살
  • 1987세계 여성의 날 연설 《여성 해방과 아프리카 해방 투쟁》 발표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바클라노프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Бакл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9–2019 ○ 자연사

노동영예훈장 완전 수훈자, 전 콜호스 기계화공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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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2004콜호스 '기간트' 기계화공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 1987–1989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제11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콜호스 조합 대표)
  • 2004연금 은퇴

파벨 루슬라노비치 팔라젠코

Павел Русланович Палажч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인 1949–

정상회담의 언어를 조율한 통역자

그는 통역을 ‘두 언어 사이의 실을 찾아 잇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파벨 팔라젠코는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핵심 대화 현장을 기록한 통역자이자 저술가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통역을 맡아 제네바, 레이캬비크, 몰타 등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회고록은 정상들의 발언뿐 아니라 군축 협상과 신뢰 형성이 작동한 실무 현장을 보여 주며, 평화로운 냉전 종식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국제관계와 언론 업무를 맡으며 통역과 정치 분석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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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2모리스 토레즈 모스크바 외국어교육대학에서 통번역을 공부함
  • 1972–1974유엔 통역자 과정 수료 뒤 대학에서 통역과 강의를 함
  • 1974–1979유엔 사무국 러시아어 통역부에서 근무
  • 1980–1985소련 외무부 통역부와 미국·캐나다 부서에서 근무
  • 1985–1991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수석 통역관,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
  • 1991소련 대통령실에서 근무
  • 1992–현재고르바초프 재단 국제관계·언론 업무 책임자 및 분석가
  • 1997《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와 보낸 나의 세월》 출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레베디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ебедь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50–2002 ○ 추락사

공수군 부사령관으로 옐친의 백악관에 투입된 뒤 편을 바꾸어 쿠데타를 무너뜨린 장군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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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81리ャ잔 공수사관학교 생도 → 교관 (훈련소대장·중대장)
  • 1981–1982제345독립공수연대 제1대대장 (아프가니스탄)
  • 1985–1988제331근위공수연대장 → 제76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88–1991.02제106근위공수사단장 (툴라)
  • 1991.02–1992.06소련 공수군 부사령관 (전투훈련·군사학교 담당)
  • 1992.06–1995제14근위군 사령관 (트란스니스트리아)
  • 1996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8–2002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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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빅토르 이만토비치 알크스니스

Виктор Имантович Алкснис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라트비아계 1950–2025 ○ 뇌졸중

의회 표결을 헌정 쿠데타로 몰고 간 소유즈파의 지도자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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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92소련 공군 복무 (발트 군관구 공군본부 선임공병감독관)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리가 제294선거구)
  • 1990–1991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의원
  • 1990–1991소유즈파 공동의장
  • 2000–2007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3·4기)
  • 2013–2015모스크바주 투치코보 도시정착지 장

시타 마리아 지아스 발레스

Sita Maria Dias Valles
포르투갈 공산당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51–1977 ✕ 체포 후 사망, 시점 미확정

앙골라의 의사·혁명가, 1977년 니티스타 숙청의 희생자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동료와 함께 도피했다가 3주 만에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한 처형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앙골라 태생의 의사이자 혁명가다. 포르투갈공산당에 입당해 지타 세아브라와 함께 공산학생동맹(UEC)을 이끌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는 UEC 대표로 모스크바의 콤소몰 대회에 파견되어 있었다. 1975년 앙골라로 돌아와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통파에 합류했으며,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사망 시점은 사료마다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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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04UEC 대표로 모스크바 콤소몰 대회 참석
  • 1975앙골라 귀환, MPLA 친소 정통파에 합류
  • 1976–1977니투 알베스의 지시로 혁명적 지식인위원회 책임, 대중조직부(DOM) 산하 활동
  • 1976–1977루안다에서 MPLA 청년·대중조직 총감독
  • 1977체포·비공개 재판·사망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Валерий Ильич Ходемчу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인 1951–1986 ✕ 폭발사

폭발 순간 펌프실에 있었고,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체르노빌의 첫 번째 희생자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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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입사, 보일러 기사·선임 기사(열·지하통신 작업장)
  • 19784호기 주순환펌프(GCN) 운전원, 이후 제7그룹 수석 운전원
  • 1984노동영예훈장 3등급 수훈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 북쪽 GCN 펌프실에서 순직
  • 1986.12명예휘장훈장 추서
  • 2008우크라이나 용기훈장 3등급 추서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소련 소련 공산주의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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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

이고르 니콜라예비치 그랴진

Igor Nikolayevich Gräzin
소련 공산주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52–

법의 언어로 소련의 공식 서사를 흔든 에스토니아 법학자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그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이고르 그랴진은 에스토니아의 법학자이자 정치가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회에 진출한 그는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비밀 의정서와 발트 국가 병합의 법적 의미를 검토한 에스토니아 측 법률가였다. 그의 활동은 학술적 법률 논증을 소비에트 해체기의 주권과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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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타르투에서 출생
  • 1975타르투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9–1987소련 국가·법 연구기관에서 법학 연구와 박사학위 취득
  • 1988–1989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법학 연구소 법률부문 책임자
  • 1989–1991소련 인민대회 대의원, 야코블레프 위원회 위원
  • 1990–2000미국 노터데임대학교 법학 교수·연구자
  • 2005–2018에스토니아 리기코구 의원
  • 2018–2019유럽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Ак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53–1986 ○ 방사선 피폭

4호기 교대 감독관, 사고 당일 수습을 지휘하고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소련 원자력 기술자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소련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9월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7월 10일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에서 그가 원자로 정지를 지시했고 01시 23분 39초에 AZ-5 버튼이 눌렸으나 실제로 누른 사람은 증언이 엇갈려 분명하지 않다. 폭발 후 약 8시까지 4호기에 남아 소방대와 구급대를 부르고 급수 계통 밸브를 수동으로 열게 했으며, 15Gy를 넘는 치명적 피폭을 받았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33세로 사망했고, 일부 영어권 출처는 5월 10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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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 2008우크라이나 대통령령으로 3급 용기훈장 사후 수여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예브도키모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55–

8월 쿠데타 당시 전차 10대를 백악관 방어선으로 돌린 타만 사단 대대 참모장

나는 어떤 명령을 받든 아무도 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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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 (소령)
  • 1991.08.1910대 전차와 함께 옐친 측으로 전향, 백악관 방어
  • 1991–1992타만 사단 잔류 (1992년 샤포시니코프에 의해 중령 진급)
  • 1992–2000티미랴젭스키 구 군사위원회 근무
  • 2000중령으로 전역
  • 2000년대 이후보안회사·장례업 전전, 모스크바 인근 공장 보안부 근무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톱투노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Топт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60–1986 ✕ 방사선 피폭

25세에 체르노빌 4호기 AZ-5 버튼을 누른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

제어봉 문서를 공부하던 톱투노프는 친구 사샤 코롤에게 '특정 조건에서는 제어봉이 반응을 늦추기는커녕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석 달 뒤 그 예감은 그가 직접 누른 AZ-5 버튼에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트 톱투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로, 1986년 4월 26일 참사 당시 야간 교대조 제어반을 맡고 있던 불과 25세의 기술자였다. 독립 근무 석 달째 처음 맞은 정지 작업에서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으나 RBMK 제어봉의 설계 결함이 반응도를 급증시켜 폭발을 촉발했고, 사고 직후 통제실로 돌아와 물 공급 밸브를 수동 개방하다 1,300렘의 치명적 방사선을 흡수해 5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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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우크라이나 수미주 니콜라예프카에서 출생
  • 1983오브닌스크 원자력공학연구소 졸업
  • 1983–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무: 블록 제어 기술자, 이후 4호기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야간 교대조에서 AZ-5 비상정지 작동, 치명적 방사선 피폭
  • 1986.05.14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 미티노 묘지에 안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프라비크

Володимир Павлович Прав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62–1986 ✕ 급성 방사선 증후군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체르노빌 3호기 지붕에 오른 첫 소방대장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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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1982체르카시 소방기술학교 졸업
  • 1982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 임관
  • 1982–1986체르노빌 원전 제2군사화소방대(VПЧ-2) 제3교대장
  • 1986.4.26체르노빌 참사 첫 대응, 3호기 지붕 화재 진압
  • 1986.5.11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피지코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ыжиков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인 1965–2019 ○ 자연사

소련 1950~60년대사와 러시아 교회 분열을 연구한 역사학자

피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에서 반당 그룹에 대한 언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거의 네 배 많았다고 지적했다.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피지코프는 1965년 11월 27일 모스크바주 라멘스코예에서 태어나 2019년 9월 16~17일 밤 모스크바에서 폐색전증으로 사망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국가 관료다. 1998년 후보 학위, 199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3~2004년 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을 지녔다. 말년에는 17세기 교회 분열과 구신도 연구로 널리 알려졌는데, 구신도가 혁명과 소비에트 체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구신도계 안에서도 평가가 갈렸다. 타타르-몽골 지배 부정 같은 음모론적 문명사 구상으로도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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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모스크바주 교육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89년부터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당사 부문 연구원
  • 19981953~1964년 소련 사회의 사회정치 발전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991950~1960년대 소련 사회의 정치개혁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00러시아 연방 통신정보부 장관 보좌관
  • 2000–2003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보좌관
  • 2003.6.5–2004.6.18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으로 교육의 질 관리와 기관 국가인가를 담당
  • 2000년대 이후모스크바 국립교육대학교 역사정치연구소 현대 러시아사 교수
  • 2001교수 학술 칭호 취득
  • 2013저서 《러시아 분열의 여러 면》으로 예고르 가이다르 상 역사 부문 수상

담바도르지

Дамбадорж
몽골 공산주의 몽골 몽골 ?–1934 모스크바에서 사망, 중독 의혹 미확인

단잔 숙청에 가담하고 우경으로 몰려 밀려난 몽골인민혁명당 지도자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 세력으로 몰아 체포·처형했고, 그 뒤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으로, 1921년 제1차 당대회에서 몽골인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어 서기와 부의장을 지냈고 1923~1928년에는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을 맡았다.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의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온건파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로 몰아 체포·처형하는 데 가담했고, 이후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1928년 제7차 당대회에서 '우경'으로 제명되어 모스크바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로 밀려났으며 1934년 6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르딘 에르흐』, 『위넨』과 잡지 『몽골 아르딘 남』의 초대 편집인이자 엥겔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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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나이슬레l 후레와 히악트에서 전신·철도 통신 노동자
  • 1920가을부터 애국자 운동에 참여
  • 1921제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선출, 임시정부 대외관계부 관료; 3월 중앙위원회 대행 의장
  • 1921–1923중앙위원회 서기; 1922년 1~3월 부의장, 3월 15일~1923년 1월 12일 의장
  • 1921서부 국경 담당 전권 대표로 백위군과 싸우고 서부 국경 정부·인민당 위원회 수립에 참여
  • 1924–1928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 (1924년 8월 31일~1928년 10월 27일)
  • 1928–1929소련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 1929~1932년 모스크바 국민경제고등학교 수학

겐리흐 류시코프

Генрих Лю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02–1945 다롄에서 사망, 정황 미확인

극동 NKVD 국장, 최고위 망명자

1938년 6월 13일 밤, 훈장을 단 야전 복장으로 제59국경분견대에 나타난 류시코프는 분견대장에게 비밀 요원과 단독 접선한다며 물러나게 한 뒤 국경을 넘어 일본 측에 투항했다.

오데사 출신으로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근무하며 192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극동의 체카·OGPU·NKVD 요직을 거쳤다. 1930년 독일 융커스 사에 대한 산업스파이 임무를 수행했고, 1936~1937년 아조프-흑해 지역과 극동의 NKVD 국장을 지내며 대숙청의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지휘했다. 1937년 극동 NKVD 국장 재임 중 고려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 데 관여했으며, 이는 25만 명 규모 추정치의 사망자를 낳은 소련 최초의 민족 단위 강제이주였다. 1938년 6월 체포될 것을 알아차리고 만주국으로 넘어가 일본 측에 투항해 소련 군사정보를 넘겼고, 1945년 8월 소련군이 다롄에 다가오자 일본 측 인사에게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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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제14군 정치위원
  • 1920오데사 체카 요원
  • c.1930독일 융커스 사 산업스파이
  • 1937–1938극동 NKVD 국장, 3급 국가보안위원
  • 1938만주국 망명
  • 1938–1945일본 관동군 정보 협력자

무함마드 시아드 바레

Maxamed Siyaad Barre
소말리아 공산주의 소말리아 소말리아 ?–1995

소말리아 군정과 사회주의

씨족제를 발전을 가로막는 '질병'이라 선언하고 결혼식까지 국가 지도 센터에서 치르게 했다.

1969년 쿠데타 이후 소말리아 최고혁명평의회를 이끈 군인·정치가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국가 통제, 문해교육과 행정 개편을 추진했다. 씨족주의 극복을 선언했지만 개인 권력과 씨족 관계가 통치에 계속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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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식민 경찰대 입대
  • 1960독립 무렵 육군 부사령관
  • 1969쿠데타로 집권, 최고혁명평의회 의장·대통령
  • 1974아프리카통일기구 의장
  • 1976소말리아혁명사회당 창당
  • 1977에티오피아에 맞서 오가덴 전쟁
  • 1991반군에 축출되어 망명

미하일 코즐롭스키

Михаил Козл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 ○ 자연사

안드로포프 시기 KGB 국경수비대를 지휘한 보안장교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소련 국경수비대는 3년 만에 병력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코즐롭스키는 이 팽창기를 지휘했다.

소련 KGB에서 국경수비대 총국(GUPV)을 관할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시기 국경 통제와 내부 단속 강화에 관여한 보안기관 간부이다. 브레즈네프 시기 KGB의 제도적 팽창 속에서 국경·내부 보안 체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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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79KGB 부의장 겸 국경수비대 총국장
  • 1979–?KGB 제1부의장
  • ?–?KGB 고등학교장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비류조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Бирю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05–1964 ✕ 항공사고

발칸 해방을 기획하고 전략로켓군을 지휘한 원수

1964년 10월 19일,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으로 향하던 비류조프 일행의 소련 공군 Il-18이 안개 속에서 착륙 코스를 이탈해 아발라 산에 충돌했고, 승무원 11명과 대표단 7명 등 18명이 숨졌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스코핀(랴잔주)에서 태어났다. 공식 러시아 측 전기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적고, 다른 자료는 러시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서술한다. 1922년 9월 15일 적군에 입대해 1926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를, 193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30소총사단 참모장, 1939년부터 제132소총사단장을 지냈다. 독소전쟁 첫해에 다섯 차례 부상을 당했고, 제48군과 제2근위군 참모장, 남부·제4우크라이나·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을 거치며 돈바스·크림 해방과 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를 기획했다. 전후 방공군과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내고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10월 19일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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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적군 자원입대, 보병·기관총 과정 수료
  • 192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 졸업, 소대장
  • 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30소총사단 참모장
  • 1939–1942제132소총사단장 — 첫해 5회 부상,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방어전
  • 1942–1943제2근위군 참모장 — 스탈린그라드 포위 후 소토성 작전
  • 1943–1944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 — 돈바스·크림 해방
  • 1944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 — 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 기획
  • 1944–1946제37군 사령관, 불가리아 주둔 소련군사절단장
  • 1955–1962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55년 소련원수 진급
  • 1962–1963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63–1964소련군 총참모장 겸 국방제1차관

바간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랸

Ваган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ь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1/1902–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 국제공산운동을 관리한 아르메니아 출신 당 간부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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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 1933–1946트빌리시 「자랴 보스토카」 편집장
  • 1946–1947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중앙신문부장
  • 1947–1949코민포름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부편집장
  • 1949–1953중앙위원회 대외정책위원회 위원장 (국제부장)
  • 1952–1954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3소련 외교부 콜레기야 위원 및 국장, 아자리야自治공화국 중앙위원회 전권대표

방학세

Пан Хак С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소련 한국(고려인) ?–1992 ○ 자연사( 사망)

조선 보안기구의 창설자이자 정치탄압의 집행자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란코프가 1946년(란코프는 9월), 영어 위키백과가 1945년 10월로 갈린다. 1947년에는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란코프는 그가 조선 국가보위의 최초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 출신 고려인으로,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출생 연도도 출처에 따라 1912~1914년으로 갈린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정보기관에서 일했고,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란코프가 1946년, 영어 위키백과는 1945년 10월로 적는다. 1947년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1948년 9월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이 되었으나,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안전상(1951년 3월/5월설)과 내무상(1960년 11월까지)을 지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를 탄압 체계의 조직자이자 명령에 순종한 집행자로 함께 서술한다. 소련파였으나 충성으로 숙청을 피해 1992년 7월 18일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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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카자흐스탄 강제이주 후 크질오르다에서 검사, 1942~1944년 크질오르다·탈디쿠르간 검찰 근무(러시아어 위키백과). 1940년 당 입당. 란코프는 1946년 이전 행적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 1947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란코프). 영어 위키백과는 1947년 5월 내무국 총국장으로 적으나, 1948년 이후 내무성 산하 국(局) 체제와 어긋나 단정하기 어렵다
  • 1948최고인민회의 대의원(러시아 위키백과)
  • 1948년 9월–1951년 2/3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영어 위키백과).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 1951년 3월/5월–1952년사회안전상(정치보위국이 사회안전성으로 개편). 3월설은 영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월설은 영어 위키백과 사회안전성 문서
  • 1952년 10월–1960년 11월내무상(사회안전성이 내무성으로 개편)
  • 1956년 8월8월 종파사건 때 내무상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평양을 감시하고 '종파주의자' 수사를 지도(영어 위키백과). 같은 사건 문서에는 당시 그가 해외에 있었다는 기술도 병존한다
  • 1956–1980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 선출, 1970년 11월·1980년 10월 재선)
  • 1960년 11월–1972년중앙재판소 부소장, 1966년 11월부터 당 연락국 정보 책임자
  • 1972년 12월–1992년중앙재판소 소장(1982년·1986년 재임명, 사망 시까지 재임)

보리스 미하일로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보스호트 2호의 우주유영을 가능케 한 팽창식 에어록 볼가의 수석 설계자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발사 때 접혀 있던 볼가 에어록이 궤도에서 부풀어 오른 뒤 그 문을 열고 우주로 나갔다.

보리스 미하일로프는 모스크바 근교 토밀리노의 제918공장(훗날 NPO 즈베즈다)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하며 1964년 중반, 단 9개월 만에 팽창식 에어록 '볼가'를 설계·제작·시험한 인물이다. 보스호트 우주선에 금속제 에어록을 탑재할 공간이 없었기에,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궤도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유연 구조물 설계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바로 이 에어록을 통해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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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65제918공장(즈베즈다) 수석 설계자, 팽창식 에어록 '볼가' 개발

최창익

최창익 (崔昌益)
조선신민당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896/1898–1957/1960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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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 1946.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 1946.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 1947.2북조선인민위원회 인민검열국장
  • 1948.4남북협상 참여
  • 1948–1952재정상
  • 1952–1953내각 부수상
  • 1953.2부수상 겸 재정상
  • 1955국가검열상 (검열국장)
  • 1956.8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 9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 복귀 결정
  • 1957.9제명·숙청 후 평양에 수감. 사망 시점에는 1957년설과 1960년설이 있다.

폴 포트

ប៉ុល ពត
민주 캄푸치아 공산주의 캄보디아 캄보디아 ?–1998

민주캄푸치아의 지도자

1975년 4월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루주는 약 200만 명의 도시를 하룻밤 사이 비우고 주민들을 시골로 내쫓았다.

캄보디아 공산당과 민주캄푸치아의 지도자다. 1975~1979년 정권 아래 강제 소개·노동과 집단농업, 정치적 숙청이 추진됐다. 베트남과의 전쟁 뒤 정권은 프놈펜을 잃었으나 크메르루주는 이후에도 무장세력으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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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프랑스에서 귀국해 크메르 비엣민에 합류했다
  • 1963–1981캄푸치아 공산당 서기장
  • 1976–1979민주캄푸치아 총리
  • 1979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실각해 태국 국경의 정글로 후퇴했다
  • 1985–1997국방고등연구소장으로 크메르루주 잔존 세력을 이끌었다
  • 1998타목에 의해 가택 연금된 뒤 사망했다

파울루 조르지

Paulo Teixeira Jorge
앙골라 공산주의 앙골라 앙골라 1934/1929–2010 ○ 병사

앙골라 MPLA의 외교관, 제2대 외무장관이자 좌익 분파의 핵심 인물

앙골라의 화학 공학자·외교관·정치인. 리스본 유학 중 1956년 MPLA 창립 문서 「1956년 선언」에 서명하고 1961년부터 PIDE의 감시를 받다가 1962년 포르투갈을 떠나 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를 맡았다.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를 거쳐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뒤 MPLA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로 1998년 인터뷰에서 당·국가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6월 26일 루안다에서 76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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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2리스본 대학 이학부에서 화학 공학 수학, 제국학생회관 거주, 1956년 선언 서명, 1961년부터 PIDE 감시
  • 1962–1976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
  • 1975루시우 라라와 루사카 휴전·몸바사 회의 교섭, 알보르 협정의 기초 마련, 네투의 파견으로 아바나에서 쿠바 지원 요청
  • 1976–1984앙골라 외무장관(1976년 11월 28일~1984년 10월 21일),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
  • 1977–1995MPLA 제1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협력 담당 서기, 비에 주 인민의회 의원, 1986년 인민의회 의원, 쿠안자노르테 주지사(1986–1989), 벵겔라 주지사(1989–1994), 1995년부터 MPLA 정치국 국제관계 담당 서기
  • 1992–2010국민의회 의원(1992년 선출, 2008년 재선), 사망 시까지 MPLA 정치국 위원 겸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