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개하거나 공산주의 운동을 조직·지지한 사람들입니다. 공산당 활동과 사회주의 시기의 주요 국가 복무로 공산주의 세력에 연결되는 인물도 함께 봅니다. 마르크스·엥겔스와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상가·예술가를 포함하며, 당원 여부와 지지 활동은 구별합니다. 특정 시기의 경력이 포함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생애 전체가 같은 입장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옐리자베타 쿠셰레바로 태어나 결혼 뒤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썼다.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서 활동하고 1870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만났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대표로 파리에 가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코뮌 진압 때 바리케이드 전투에 참여해 부상당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다.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며 1916년 이후, 1918년 이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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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미하일 토마노프스키와 결혼해 상속 재산을 얻고 혁명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1868–1869제네바에서 러시아어 잡지 《나로드노예 델로》를 재정 지원·공동 편집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 창설에 참여했다.
1870제네바 지부의 사절로 런던에 가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71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과 노동권을 추진했다.
1871–1877코뮌 패배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하고 그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갔다.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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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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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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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1865년 7월 14일(26일) 리가현 콕네세 볼로스트에서 태어나 1932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과 신문 『디에나스 라파』를 이끌었고, 1897년 체포되어 7개월 구금 후 뱟카현으로 5년 유형되었다.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했으며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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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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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사회민주당 언론인으로 출발한 도이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베를린 급진파와 혁명적 오프로이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18년 11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지도부로서 평의회 체제를 헌정의 토대로 삼으려 했으나 제헌의회 지지 세력에 패했다. 그는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이끌고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1921년 2월 파울 레비와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3월 행동과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고, 1922년 USPD에 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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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게라·할레·에르푸르트의 사회민주당 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1베를린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에 군사 기술·노동자 교육 담당자로 합류했다.
1916《포어베르츠》를 떠난 뒤 독립사회민주당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
1918혁명적 오프로이테 지도자이자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주요 인사가 되었다.
1920독립사회민주당 의원으로 제국의회에 들어갔고, 볼셰비키의 21개 조건 수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지지했다. 12월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다.
19212월 파울 레비와 함께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직에서 사퇴했다. 3월 행동 이후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다.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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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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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1905년 10월 키이우의 대규모 혁명 집회를 이끌었고 10월 17일 칙령 이후 군중이 시두마 청사를 파괴했다. 10월 18일 발코니 연설은 1908–09년 재판의 기소 사유가 되었으며, 핀란드로 피신한 뒤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68년 8월 20일(구력)/9월 1일(신력) 폴타바현 루브니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일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조부는 뷔르템베르크에서 1818년 러시아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목수, 어머니는 몰락한 폴란드계 지주 가문 출신이다. 1882년 가족이 러시아 신민권을 취득했고 본인도 대학 시절 이를 취득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 학생 서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07년 제5차 RSDLP 대회(런던) 대의원이었다. 1917년 11월 RSFSR 농업인민위원, 1917년 12월–1918년 2월 식량인민위원으로 곡물 독점과 징발을 집행했다. 1920–21년 탐보프 주 집행위원장으로 반란 진압에 실패해 해임된 뒤 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1927–2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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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1917.12–1918.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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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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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절의 그녀 방을 이렇게 기억했다. 방에서는 늘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암호 편지를 촛불에 쬐어 읽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 지하 연락원의 가명과 주소가 그녀 머릿속에 있었다.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였지만, 스스로 조직을 세운 혁명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몰락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사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이스크라』의 서기로서 암호와 가명, 주소로 이어지는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을 묶어냈고, 1917년 이후에는 리크베스 문맹 퇴치와 전국 도서관망으로 소비에트 교육을 세웠다. 1925년 신반대파를 잠시 지지했다가 철회했고, 추콥스키의 동화를 비판한 글은 그를 아동문학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해로운' 도서를 걷어내는 도서관 정화를 주도하면서도 테러의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해 탄원했다. 1939년 2월 27일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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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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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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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그가 굶주림으로 열차에서 실신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1939년 영화 장면으로 퍼졌고 후대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이 1919년 6월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고 지시한 일은 문헌으로 확인된다.
1870년 알료시키(현 우크라이나 올레슈키)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대가정에서 자랐고, 1891년 마르크스주의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1893년 체포되어 헤르손 농업학교에서 제적된 뒤 통계사로 일했고, 1898년 RSDLP에 입당해 우파와 하르코프에서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하다 1902년 올로네츠현 3년 유형을 받았다. 1917년 우파 소비에트와 시두마를 이끌며 페트로그라드로 곡물을 보냈고, 1918년 2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식량인민위원으로서 5월 8일 식량 독재를 제안하고 곡물 분견대와 빈농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고스플란 의장을 지냈다. 1928년 5월 크림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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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1902–1904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3년 유형, 1904년 11월 우파로 복귀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1917–19211917년 11월 식량인민위원 대리, 1918년 2월 25일부터 1921년 12월 2일까지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고스플란 의장, 1925~26년 통제 수치로 연례 계획 수립 개시
「수동적으로 굶주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농촌 —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아니다」 — 1919년 회고록에서 1891–1892년 기근이 자신의 세대에 끼친 영향을 회고하며
1898년 입당한 초기 볼셰비키. 마르크스 『자본』의 러시아어 번역을 주도했으며, 레닌이 최고의 번역으로 꼽은 판본을 남겼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부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즈베스티야』와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레닌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을 이끌었고, 야로슬랍스키와 함께 전투적 무신론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사망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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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차르 암살 준비 혐의로 체포, 툴라 유배 중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
1901모스크바 사회민주당 위원회 조직 시도 중 체포, 시베리아 아친스크 유배
1907–1909보그다노프·바자로프와 함께 마르크스 『자본』 러시아어 번역 출간
1917.10RSFSR 초대 재무인민위원 임명 (취임하지 않음);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전쟁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했고, 프랑스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교사로 일하며 1901년 사회당에 가입했고, 교원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협력에 반대하고 짐머발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국제관계 재개 위원회와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창당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지도부에 참여했다.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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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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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1917.3–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1917.11–1918.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1919.6–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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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1917.3–1917.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17.12–1918.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1918.7–1919.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1918년 3월, 전직 차르 소장이 예이스크에서 은퇴해 있을 때 레닌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스크바로 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차르 군대 소장 출신으로 1918년 레닌의 요청으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 결정적 작전들을 설계했다. 공화국 야전참모장(1919–1921)으로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을 상대한 모든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1919년 10월 오룔-쿠르스크 작전으로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을 저지했다. 1921년 붉은 군대 초대 참모장이 되어 참모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아카데미 원장을 겸하며 장교 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이오나 야키르 휘하 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1925–1928)을 지냈다. 제정 참모본부와 소비에트 군사 전문성을 이은 핵심 보옌스페츠로, 비당원이었으나 '극히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1921년 8월 16일, 레닌은 포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ЦСУ를 '비공식 필자 집단보다도 뒤처진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고 불렀다.
파벨 포포프는 소비에트 중앙통계청(ЦСУ)의 초대 청장으로서 중앙계획의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였던 그는 우파 유형지에서 레닌 및 치우루파와 인연을 맺었고, 그 연결로 1918년 국가 통계 기구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ЦСУ는 1923/24년 세계 최초로 국민경제 산업연관균형표를 편찬했다. 1921년 레닌은 ЦСУ를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 질책했으나, 포포프는 1926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으로 경제 데이터의 계획 통합을 주도했다. 1924년에야 입당한 비볼셰비키였음에도 대숙청을 넘기고 1948년까지 근무한 드문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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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5우스티우다 교사,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
1896–1898혁명 활동으로 체포, 우파현 유형 중 통계학 입문
1898–1917우파·사마라·스몰렌스크·볼로그다·하리코프·툴라 젬스트보 통계국 근무
1917–1918식량성·농업인민위원부·최고경제회의 통계 부서장
1918–1926ЦСУ РСФСР/소련 관리자 (인민위원급); 세계 최초 산업연관균형표 편찬 주도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20년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8차 소비에트 대회. 크르지자놉스키의 GOELRO 계획 보고를 들은 레닌이 일어나 "당의 제2강령"이라고 선언했다. 거대한 지도 위로 30개 발전소의 붉은 등불이 점멸했다.
레닌의 가장 오랜 동지로, 1893년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체포·유배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혁명가 '바르샤뱐카'의 러시아어 가사를 썼다. GOELRO 전력화 계획의 수석 설계자이자 초대 고스플란 의장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 국가발전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소비에트 5개년 계획의 방법론적 원형을 세웠다.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에너지연구소를 창설, 통합에너지시스템의 과학적 기초를 닦았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으로 모든 지도직에서 밀려났으나 숙청은 면했고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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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s–1917레닌의 오랜 동지, 지하활동과 전기공학 전문성을 함께 축적
1920GOELRO 전력화 계획 작성의 핵심 인물
1921–1923, 1925–1930초기 고스플란 의장, 계획경제의 기술관료적 언어를 정착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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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범죄자는 '현재 위험한 사람이며, 격리하거나 교화하려고 시도해야 하지만, 결코 복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 1922년 형법 초안 작업 중
키예프 출신의 법률가로,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모스크바 무장봉기와 육군 병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으로서 소비에트 형법·민법·가족법의 기초를 놓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법을 종속시키는 '혁명적 합법성' 개념을 정식화했다. 1919~1920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대사로 일했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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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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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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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예방의학(프로필락티카)이 우리가 가는 길이며, 디스판세리자치야는 그 예방 과제를 푸는 방법이다.»라는 공식으로 소비에트 보건의료의 예방 우위 원칙을 대표하게 되었다.
의사이자 옛 볼셰비키로, 아버지 알렉산드르 세베리노비치 세마슈코는 폴란드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발렌티노브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누이였다. 학생 시절 체포·제적되어 1897년 고향으로 유배되었고, 1901년 카잔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마쳤다. 1904년부터 니즈니노브고로드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1905년 소르모보 파업을 함께 조직했다. 1918년 7월 11일부터 1930년 1월 25일까지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으로서 무료 보편의료와 구역 담당의, 디스판세리자치야를 축으로 하는 '세마슈코 모델'을 세웠고, 1921년부터 사회위생학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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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1모스크바대 의대 입학, 맑스주의 서클 참여, 체포·유배 후 카잔대학 의학 졸업
1904–1906니즈니노브고로드 RSDLP 위원회 활동, 1905년 소르모보 공장 파업 조직, 체포 후 스위스 망명
1907–1912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표, 파리 자граничное бю로 ЦК 서기, 롱쥐모 당학교, 프라하 전러시아당대회 보고
1917–1918모스크바 10월 봉기 의료 지원, 모스크바소비에트 의료위생부장
1918–1930초대 RSFSR 보건인민위원, 전 국민 무료의료·중앙집중식 국영 병원·예방의학 체계 구축
1921–1949모스크바대학(후 제1의학원) 사회위생학 교수, 대의학백과사전 편집장(1927–1936)
1930–193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아동위원회 의장으로 아동보건·부랑아 대책 주도
1944–1949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교육아카데미 회원, 학교위생연구소·보건조직의학사연구소 소장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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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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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s–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1914–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아내와 함께 무장 없이 요새로 들어가 앵커광장에서 박수로 맞았으나 수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연설은 중단되었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금속 노동자가 된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27년간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로 있었다. 대숙청기의 핵심 법령들, 즉 1932년 8월 7일 국가재산 보호에 관한 법령, 1934년 12월 1일 테러 사건 신속처리 법령, 1935년 4월 7일 형사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춘 법령에 서명했다. 벨라루스 제1서기가 3천 명 총살과 9천 8백 명 추방을 제안한 전문에도 '칼리닌 찬성'으로 기록되었고, 1940년 3월에는 폴란드 장교·수감자 2만 5천 7백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4일 농민 3만 8천 가구 추방 표결에서는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고, 2주 뒤 정치국의 결정 번복으로 이미 시작된 조치가 중단되었다.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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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1935년 체포된 뒤 수감자들에게 당 역사와 10월 혁명에 관한 강의를 이어갔고, 끝내 자신의 볼셰비키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동료 수감자들이 증언했다.
1897년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올드 볼셰비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철도역을 장악했고, 초대 철도인민위원(1918–1919)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이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거쳐 당 역사 연구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 도서관장을 지냈다. 500편이 넘는 혁명운동사 저술을 남겼으며, 1935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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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3모스크바 대학에서 사민주의 서클 조직, 체포와 유형 반복
1904–1905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 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당 집행위원, 체포·유형 반복, 중앙위원 후보에서 정위원으로
1917.3–10군사기구 창설, 「솔다츠카야 프라우다」 편집, 7월 봉기와 10월 혁명 준비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 강령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지도했으며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저택에서의 차르 가족 처형을 조직한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로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강제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0~1933년 카자흐 대기근과 함께 기록된다. 1933년 해임되어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내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61년 복권되었다.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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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소소, 그들도 나처럼, 너처럼 늙은 볼셰비키야. 늙은 볼셰비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지!」 예누키제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재판에 세워 처형하려는 스탈린을 말렸다. 스탈린은 답했다. 「기억해, 아벨.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이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의 공동 창립자.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로 17년간 소비에트 국가 최고 형식기관의 실무를 관장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를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대부였고,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1935년 「크렘린 사건」으로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처음으로 축출되었으며, 이는 대숙청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 치는 목동에서 시작해 스스로 공부한 이 올드 볼셰비키는,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동시에 맡으며 집단화 직전까지 볼셰비키 농민정책의 얼굴이었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한 올드 볼셰비키로, 차르 치하에서 5년간 투옥과 유형을 겪었다. 1917년 보고로츠크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거쳐 내전기에는 식량인민위원부 차관으로 곡물 조달을 담당했고, 1923년부터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겸임하며 네프 시기 농업정책과 코민테른의 국제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중앙위 서기와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승진해 당 지도부 핵심에 올랐으나, '스미르노프-에이스몬트-톨마초프' 반대파 그룹에 연루되어 1934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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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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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1930년 4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니켈 주화를 제안한 브류하노프를 조롱하는 음란한 쪽지를 돌렸고, 메줄라우크는 매달린 인민위원의 그림을 덧붙였다. 둘 다 1938년 총살되었다.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심비르스크에서 측량 기술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와 카잔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혁명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차르 체제에서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우파에서 볼셰비키 위원회를 이끌고 우파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으며, 제7차(4월) 전러시아 회의 대의원이었다. 내전기에 대규모 곡물 징발을 조직하고 식량징발대와 징벌 원정대를 지휘했으며, 1926년 1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되었다. 1930년 10월 해임 뒤 밀려났고, 1938년 2월 3일 체포되어 9월 1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일부 참고문헌은 사망일을 1942년 6월 30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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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05학생운동으로 체포·제적, RSDLP 입당(1902), 카잔·볼로그다에서 지하 활동과 유형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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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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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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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918년부터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를 이끌고 1922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 자율성을 지켰고, 1929년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했다. 인쇄공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1936년 8월 22일 조사 개시가 발표되자 볼셰보의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가족도 1930년대 후반에 탄압당했고, 1988년에야 혐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은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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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베를린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1918년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혁명사를 쓴 선반공
1918년 11월 혁명 때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부터 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했다.
튀링겐 농촌 출신의 선반공으로 베를린 금속노조 선반공 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 공장 대표들의 비밀 조직인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 리프크네히트 체포 항의 파업,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중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9일 밤 제국의회를 점거해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고,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 되었다. 뒤에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떠났고, 1924~1925년 세 권짜리 혁명사를 펴냈다.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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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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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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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아Q정전』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작가연맹으로 이어 간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1918년 「광인일기」로 백화문학을 열고,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돌아선 저장 사오싱 출신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 문예운동으로 이어 갔다.
저장 사오싱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다 「국민의 정신을 고치겠다」며 문학으로 돌아섰다.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이어 「아Q정전」에서 낡은 사회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그렸다. 1927년 이후 상하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번역하고 1930년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1936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라 불렀다.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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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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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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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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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1903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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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1917.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펼쳐 두고 일하던 샤포시니코프는 찾아온 젊은 대령을 다정하게 맞았다. 보고가 어긋나도 고함 대신 "자네, 이게 뭡니까, 귀여운 친구(голубчик)?"라고 되물었다.
제정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저작으로 지금도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1937년 6월에는 투하쳅스키 등을 사형에 처한 특별재판부에 참여했고, NKVD는 동시에 그에 대한 공작 진술을 수집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반격 계획 수립에 관여했고, 1945년 3월 폐결핵으로 죽기까지 스탈린의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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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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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비네는 1919년 4월 13일 뮌헨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붉은 군대 편성과 자본주의 극복을 내걸었고, 공화국이 진압된 뒤 6월 처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독일로 이주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러 돌아가 투옥되었다. 독일에서 USPD와 스파르타쿠스단에서 활동했고, 1919년 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갔다. 4월 13일 KPD가 톨러의 평의회 정부를 대신하자 그 지도자가 되어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공장을 노동자 관리에 넘겼다. 5월 뮌헨이 함락된 뒤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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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참가했다가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1918–1919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 창설에 참여하고 독일공산당(KPD)에서 활동했다.
1919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가 지역 조직을 정비하고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관여했다. 4월 13일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화국을 이끌었다.
1919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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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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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1917.11–1918.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1918.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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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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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1917년 레닌의 봉인 열차 귀국을 조직하고 코민테른 창립 대회 의장단에 앉은 스위스 공산주의자
1917년 레닌 일행의 독일 통과 귀국을 조직했고,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스위스 대표로 활동했다.
장크트갈렌 출신으로 스위스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활동했고 치머발트 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스위스에 있던 레닌 일행이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가는 봉인 열차 여행을 주선한 주역이었다. 1919년 스위스 공산주의자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의장단에 앉았고, 스위스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7~1922년 연방 하원 의원을 지낸 뒤 소련으로 이주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어 1942년 수용소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 역, 비보르크 구 위원회를 대표해 막 귀환한 레닌에게 당원증 제600호를 건넸다.
1905년 소르모보 봉기의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부였고, 1911년 레닌의 롱주모 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7년 2월에는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의 핵심으로서 여성의 날 파업을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레닌 귀환 당일 핀란드 역에서 당원증 제600호를 직접 건넨 노동자 혁명가이며, 10월에는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에 있었고 내전기에는 제5군 정치국장과 체카 간부를 지냈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갔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 함석공으로 일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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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소르모보 공장에서 노동하며 RSDLP에 입당, 지하 혁명 활동 시작
1905.12소르모보 무장봉기 지도 '5인조'의 일원으로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
1911레닌의 롱주모 당학교 수학, 귀국 직후 체포되어 나림스키 변방 5년 유형
1916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 RSDLP(b) 지하위원회 위원
1917.02–102월 혁명에서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무장봉기 주도;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 위원
1918–1919제5군 정치국장, 체카 간부회 위원 겸 서기, 체카 수송부장
1921–1937크라스노예 소르모보 부소장, 북부 조선소 소장, '혁명의 엔진' 공장 소장 등 산업 지도자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말했다: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트로츠키주의자 도적떼를 숙청할 때 침묵한 것을 우리가 비판했는데 이제는 아첨을 시작했어!" 트로츠키와 연이 닿은 구볼셰비키 가운데 그만 살아남았다.
볼린의 스비아테츠 마을에서 성직자 가문(영어권 사료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소르본에서 법학을 마친 볼셰비키다. 《브페료드》파 성원이었고 1917년 메즈라욘치에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코민테른 요직을 맡았다. 1920~30년대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로서 기구와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숙청을 지도했고, 1945~46년에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헌장 전문과 제1장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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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1926–1943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 1926년 12월~1928년 7월, 1931년 4월 15일~1943년 5월 해산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1924–19431924년 7월 15일~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 및 상임간부
1944–1952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외무장관 - 1944년 7월 12일~1952년 6월 10일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1941년 9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스타브카에 전보로 건의했으나 스탈린에게 해임되었고, 뒤이어 남서방면군 주력이 포위되었다.
돈 지역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징집되어 제정 러시아 기병으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을 이끌어 백군을 격파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고, 대숙청에서는 부하린·리코프 처형을 요구하고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했으나 자신도 수사 대상이었다. 1941년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 키예프 돌출부 철수를 건의했다가 스탈린에게 경질되어 다시는 야전군을 지휘하지 못했고, 전후에는 농업부 차관으로 군마 육종을 맡았다. 기병의 시대를 고집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직접 낙하산 강하를 시험하고 기계화기병집단 편성을 주도했으며, 1973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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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10RSDLP 입당,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쿠르스크·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 조직
1910볼셰비키로 전향, 이후 8차례 체포로 약 5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초대 의장,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소브나르콤 초대 농업인민위원(10.26–11.4)
1917–1918연립정부 주장하며 당중앙위·인민위원직 사퇴했다가 번복, VTsIK 경제부장과 VSNKh 부의장 역임
1918–1924VSNKh 간부·북서지역 경제회의 부의장, 코민테른 발칸·오스트리아 대표로 대외 활동
1924–1930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부 간부,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의장, 중앙통계국(TSu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1930–1937고스플란 부의장,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계획·학술 관료로 활동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1917년 10월 10일(23일) 정치국원, 10월 16일(29일) 무장봉기를 지휘할 당중심 위원에 선출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10월 24–25일 철도역 장악을 지도했고, 25일에는 야전참모장으로서 참모부를 지휘했다.
러시아 제정기에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당에 입당했고, 10월혁명을 준비한 정치국원이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맞선 좌파공산주의자였고, 1921–22년 민주중앙파에 속했으며, 1923년에는 트로츠키에게 가담했다가 그와 결별하고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1924년부터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트로츠키 계열 위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1929–1937년 계몽인민위원으로 전면 의무초등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10월 해임되어 그해 말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었으며, 1938년 8월 1일 처형되었다. 1956년 3월 14일 재활되고 3월 22일 당적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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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19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 조직
1906–1913스톡홀름 당대회 대표, 《프라우다》 편집위원
1914–1916사마라·볼가 하류 지역 혁명운동 지도, 투루한스크 유배
1917정치국원, 군사혁명당중심 위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내무인민위원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세대의 대표적 이론가로, 파시즘을 금융자본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계급 대립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집행권력으로 본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론의 창시자. 1929년 KPD에서 축출된 뒤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해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와 거리를 둔 독자 노선을 지키며 망명 속에서도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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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체포된 그는,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도 못 되어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1919년 몽골인민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 혁명 뒤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과 재무장관을 지내며 초기 인민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1922년 총리 보도를 숙청·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제한된 자본주의와 소련 고문 축소를 주장하다 코민테른 좌파와 충돌했고,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부르주아로 몰려 하루 만에 체포·총살됐다. 그 숙청이 당을 비자본주의 노선과 공화국으로 돌려세우는 분수령이 됐다.
1925년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에게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고 썼다.
1885년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피슈페크(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태어나 192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군사 지도자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에 입학해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총파업을 이끌고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1907년 체포되어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16년 탈출해 1917년 민스크에서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하고 크림을 점령했으며, 1924년부터 군사개혁을 추진하다 1925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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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1918년 5월, 사형제가 폐지된 뒤 방청객이 술렁이자 크릴렌코는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몰렌스크 현 베흐테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당명은 아브람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연대와 사단, 11군 위원회 의장을 거쳐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열었다. 이듬해부터 혁명재판소와 검찰, 사법인민위원직을 거치며 혁명적 법의식을 내세워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하고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과 1928년 샤흐띠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이끌었다. 1938년 1월 31일 부하린 우익 조직 연계와 사법기관 파괴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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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1913–16체포 및 유형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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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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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당 위원회 및 통제위원회 합동 총회 연단에 올라 '우경 위험'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우글라노프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886년 12월 5일(구력 17일) 야로슬라블현 페오도리츠코예의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다 1905~07년 혁명에 가담했고 1907년 볼셰비키로 입당했으며, 1914년 재징집되었다가 부상으로 1916년 제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고,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류틴과 함께 좌익 반대파 분쇄에 앞장섰다. 1928년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했으나 그해 11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37년 5월 31일 사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아서 랜섬은 1918년 12월 임명 직후 그를 만나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고 기록했고, 슈미트는 인민위원부가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1886년 12월 17일(그레고리력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어 전기에서는 독일계로 기재되어 있다.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일에서 도장공으로 지내다 돌아와 1915년부터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1917년 11월 노동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재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37년 1월 체포되어 1938년 1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7년 7월 30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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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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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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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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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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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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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 창립에 기권하고, 뒤에 대숙청으로 총살된 공산주의자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에벌라인은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위임에 따라 즉각 창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레닌의 설득으로 개인 의견은 바뀌었지만, 위임을 따라 반대표 대신 기권했다.
튀링겐 잘펠트 출신의 설계 기술자로 SPD에 들어갔고, 전쟁 중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1919년 3월 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서둘러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면 볼셰비키가 지배하게 된다는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권고에 따라 창립 표결에 기권했다. 창립 뒤에는 코민테른과 독일 당에서 조직·재정 일을 맡았고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7년 체포되어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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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1923–1924두러스 시의사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1943.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1944.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1946.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1953.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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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출신의 소련 혁명가이자 저술가로, 본명은 야니스 수드랍스이다. 1918년 7월부터 11월까지 동부전선 제5군의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을 지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서 키예프 체카를 직접 지휘했다. 1918년 11월 1일 카잔의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실어 계급 출신과 양육, 직업만으로 피의자의 운명을 정하자고 주장하며 계급적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다. 자료들은 그가 개인적 잔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전하며, 데니킨 위원회의 전우크라이나 체카 관련 자료와 라치스 자신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아들 드미트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여겼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뜻하는 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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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 지도자로서 담바도르지가 이끄는 우파와 함께 단잔을 '부르주아 이익 대표·미국·중국 회사와의 거래'로 고발했고, 단잔과 바바산 등은 대회가 계속되는 동안 24시간 안에 재판·사형·총살됐다.
자바이칼 부랴트 출신으로 1917년 4월 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이 되어 부랴트 자치의 기초를 놓았고, 1920년 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로 몽골 혁명가들과 협력했다. 1921년 혁명 뒤 1925년까지 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과 정부 고문, 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 대·소후랄 의원을 지냈으며, 1924년 헌법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이고 제3차 당대회에서 비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정당화했으나 같은 대회에서 단잔 고발에 가담했다. 1937년 6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체포돼(수감 기록에는 7월 19일로 기재) 1938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일과 처형 시점·장소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1955년 재심이 개시돼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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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 선출
1918시베리아 임시정부 교육장관에 서면 선출
1920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
1921–1925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정부 고문·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대후랄 및 소후랄 의원
1924헌법 초안 작성 참여, 제3차 당대회에서 단잔 고발
1926–1930적색교수연구소 수학
1927–1934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KUTV)에서 연구·교육 활동, 1934년 11월부터 정치경제학 교수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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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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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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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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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35년 2월 덴마크에서 열린 비밀 주재원 회의가 발각되어 중앙기구 간부 네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었고,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라트비아 출신으로 본명은 페테리스 큐지스이며, 1889년 리가 근처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1938년 처형되었다. 190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을 벌였고, 경찰 살해로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이르쿠츠크 유형에서 1914년 탈출했다. 1919년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년부터 적군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24~35년 제4(정보)국장으로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웠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을 지내고 1937년 정보국장에 복귀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1938년 7월 29일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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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7RSDLP 입당, 16세에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
1907–14경찰 살해로 8년 카토르가형(미성년으로 2년 감형), 복역 후 이르쿠츠크 유형, 1914년 탈출
1917겨울궁전 습격에 참가, 12월부터 체카에서 근무
1919.1–5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24적군 정보부(GRU 전신)에서 근무
1924–35제4(정보)국장,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움
1935.4–1936.6코펜하겐 실패로 사표를 내고 극동특별군(OKDVA) 부사령관
1936.10–1937.5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 «그리신 장군», 레닌훈장 수훈
1937.6–8GRU 국장 재임명, 두 달 만에 해임·체포
1937.11–1938«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으로 11월 27일 체포, 1938년 7월 29일 처형, 1956년 복권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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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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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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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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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으로 열다섯 살에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파리와 뉴욕 망명길에서 트로츠키를 따르다 1917년 5월 메즈라이온치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들어가 협상했으며(처음엔 팔친스키에게 체포됐다가 사관생도들의 요구로 풀려났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무사 통행을 보장한다는 약속으로 수비대가 잇달아 궁을 떠나게 했다.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독일 점령군·중앙라다와 싸우다 1917년 12월 라다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키예프에 들어온 소비에트군에 풀려났고,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된 끝에 숨졌는데, 전사했다는 기록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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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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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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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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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그를 '영국의 요원'으로 여긴 자하리아디스는 1946년 '어떤 경우에도 시안토스를 내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해외 탈출을 미뤘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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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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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아인슈타인·플랑크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1차대전을 겪으며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라 통일전선을 배격하며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였으나, 스탈린과 텔만에게 밀려나 1926년 제명된 뒤로는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길을 헤맨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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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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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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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돈바스 탄광 갱목용 목재를 금지령을 어기고 반출한 사건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리사욕이 없었음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전해진다.
1891년 블라디미르현 파호티노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2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을 받으며 상급 하사관까지 올랐다. 1919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에서 기병연대장과 바슈키르 기병여단장을 지켰으며, 1937년 해임되고 1938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3월 석방되었으며, 1943년부터 종전까지 제3군을 지휘했고 1945년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를 지휘하고 1955년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1964년 회고록으로 1930년대 대숙청을 상세히 밝힌 초기 소련 국가 요인이 되었다.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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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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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4년 정부 연구 여행으로 독일·영국·캐나다·미국을 돌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생산 조직을 연구하던 중 소로킨을 만났고, 소로킨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귀국해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892년 3월 4일(신력 3월 16일) 코스트로마현 키네솀마 우예즈드 갈루옙스카야 마을에서 열 자녀를 둔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경제학자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로, 1905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1906년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15년 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케렌스키의 농업 비서관과 식량차관을 지냈고,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창립해 1928년까지 소장을 맡으며 1923~1928년 농업 장기계획을 주도했다. 1927년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했고 1928년 4월 해임, 1930년 체포되어 1932년 8년형을 받고 1938년 9월 17일 처형되었다.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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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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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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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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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크렘린 승전 축하연. 스탈린이 지휘관들에 대한 건배가 끝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이제 진정한 사령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위대한 전쟁의 일꾼을 위해. 흐룔료프 동지를 위해.」
가난한 대장장이 가문의 소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금세공 도제를 거쳐 소련군 대장과 소련군 후방의 창설자로 올랐다. 1941년 8월 1일 통합병참체계인 소련군 후방(Тыл Красной армии)을 설립하고 종전까지 이를 이끌며, 동시에 1942~1943년에는 교통인민위원으로서 전시 철도를 관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크렘린궁 스탈린 집무실을 113회 방문하며 최고사령관과 직접 물자와 보급을 조율했고, 승전 기념연에서 스탈린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진정한 사령관이자 위대한 전쟁의 일꾼」이라며 흐룔료프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사후 흐루쇼프의 반대를 뚫고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1942년 여름, 독일 산악병들이 엘브루스 산에 나치 깃발을 꽂았다. 튤레네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미리 구축해 둔 테레크-그로즈니 방어선은 버텼고, 독일군은 석유에 닿지 못했다.
심비르스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4개 등급의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모두 받은 완전 기사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보과장과 기병여단장으로 싸웠고, 1940년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세 육군대장 중 한 명으로 진급했다. 1941년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나 참패 속에 중상을 입었고, 1942년 2월 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테레크 강과 그로즈니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2~43년 비터를 위한 캅카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바쿠 유전 돌파를 저지한 것이 그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공헌이었다. 전후에는 군관구 사령관과 기병 감찰감을 지냈고, 회고록 『세 전쟁을 넘어』를 남겼으며 1978년 사망 직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1916년 펑두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고 「외눈의 용」이라 불렸으며,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1948년 11월 회하이 전역을 지휘한 전략가였다.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1년 2월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월 캬흐타를 점령하고 7월 6일 후레에 입성했으며, 7월 11일 새 정부에서 군사부 장관이 됐다. 이 임명을 1922년 7월로 적는 몽골어권 기록도 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몽골인민당 창립 성원이며, 1921년 혁명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어 후레(오늘날 울란바타르)에 입성했다. 가난한 아랫(평민) 출신으로 활자공과 역참 마부로 일했고, 1919년 후레의 반중국 지하조직에 참여했다. 1920년 소련 방문에 나섰고 1921년 캬흐타에서 총사령관으로 확정됐으며, 같은 해 7월 군사부 장관이 됐고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사후 신격화 경위도 주요 논쟁점이다.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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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자신감뿐이다. 나는 서른에 장군이 되거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1914년 근위 소위 시절의 서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는 1893년 2월 4일(16일) 스몰렌스크현 알렉산드롭스코예에서 몰락한 귀족 아버지와 농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근위 제1사단 소속으로 부상당하고 다섯 차례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2월 포로가 되었고, 탈출 끝에 1917년 귀국해 1918년 3월 적군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제1군과 콜차크에 맞선 제5군을 지휘했고, 1921년에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하며 포병·항공기와 함께 화학무기 사용을 명령했다. 1925~1928년 참모총장과 1935년 최초의 소련원수 다섯 명 중 한 사람을 지냈으나, 1937년 6월 11일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밤 총살되어 1957년 복권됐다.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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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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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1933–1934OGPU 부의장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 특별 트로이카 의장으로 탄압을 주도한 뒤, 1937~1938년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볼린현 돌스크의 우크라이나인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루카 그리추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8년 입당해 두브로비차 봉기를 조직했다. 1920년부터 체카에서 일하며 튜튜닉 장군을 폴란드에서 끌어낸 작전에 참여했다. 1934~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를 이끌며 공화국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부터 NKVD 감옥부 부부장,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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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두브로비차 봉기의 조직자·지도자로 활동한 뒤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1920–1934체카·GPU·OGPU에서 근무했고, 카바르다발카르 OGPU 지역부서장까지 올랐다.
1934–1937카바르다발카르 자치주·공화국 국가보안부서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1938카바르다발카르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뒤 소련 NKVD 감옥부 부부장과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1939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자 루마니아 공산당 「모스크바파」의 수장, 1952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숙청으로 몰락하다
1952년 5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게오르기우데지는 파우케르·루카·제오르제스쿠를 「반당 분파」로 규탄하고 파우케르를 정치국에서 제거했다. 데지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온 뒤였고, 슬란스키 재판으로 동유럽 전역에 유대인 공산주의자 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바슬루이 지방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하나 라빈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어 교사로 일하다 191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1년 루마니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이듬해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며, 1941년 소련과의 죄수 교환으로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밑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1947년 11월 외무장관에 올라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 되었다. 바실레 루카·테오하리 제오르제스쿠와 함께 이른바 「모스크바파」를 이루어 감옥파의 게오르기우데지와 당권을 다투었으나, 1952년 5월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데지에 의해 「우편향」과 「좌편향」을 동시에 범했다는 죄목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나고 7월 외무장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풀려나 재판 없이 당적을 잃었고, 정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미국 『타임』이 1948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성」으로 표지에 올린 인물이지만, 로버트 레비의 연구는 그가 강제 집단화에 제동을 걸고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해 데지보다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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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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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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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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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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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1918.11RKP(b) 입당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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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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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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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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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9붉은 군대 복무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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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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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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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와 베리아를 비판했다고 여러 회고록이 전하는데, 해당 회의는 속기록이 남지 않아 발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 10월 20일(구력)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영어권 연구는 11월 1일생으로만 적는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툴라에서 「콤무나르」를 창간하고 시·주 소비에트와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되었다.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1925년에는 쿨라크의 협동조합 가입을 막는 데 반대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를 비판하고 베리아 관련 자료를 제출한 뒤 6월 25일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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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7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1915년 모스크바대 의대 입학(2개 학년 수료), 툴라 볼셰비키 서기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림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를 추진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1934.2–1937.3), 소련 위생총감(1935년부터),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피고들의 진술을 짜고 연습시켰으며, 이듬해 숙청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펜자현 인사르의 산림 감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프리놉스키의 도움으로 적위대 사무소에 들어갔고 1921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1929년 알마아타에 유배된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오데사로 옮겨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오게페우 참사회와 NKVD의 비서,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로 야고다의 신임을 받았고,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피고마다 진술을 연습시켰다. 1937년 3월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불리한 상세한 진술을 한 뒤 1938년 3월 15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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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펜자현 체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해 말 전러시아 체카 비밀정치부로 옮겼다.
1929알마아타에서 유배 중이던 트로츠키를 오데사로 비밀리에 이송하고 소련에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1929–1934오게페우 참사회 비서, 이어 제1비서를 지냈다.
1934–1937NKVD 비서와 NKVD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대본을 작성하고 피고들의 진술을 연습시켰으며, 1937년 3월 해임·체포되었다.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대한 증언을 한 뒤, 3월 13일 사형을 선고받아 15일 총살되었다. 1988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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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1936.9내무인민위원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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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단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손으로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령관이었다." — 이반 코네프 원수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고 내전에서는 여단·사단 참모장을 지낸 니콜라이 푸호프는, 전간기 대부분을 군사학교 교관으로 보내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소전을 맞았다. 1942년 1월 13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쿠르스크 북측면에서 모델의 9군을 6일간 저지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에서 세 개 전선군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체르니고프를 해방하여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까지 13군을 이끌며 중부 유럽을 관통했고, 13군은 최고사령관 명령에 26회 거명되었다. 전후에는 오데사·북캅카스·서시베리아·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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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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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1951년 7월 해군 주력군사평의회에서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깨끗하고 용감하며 훌륭한 선원이지만, 장관이 아니다.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맡기고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짜르 해군의 수병으로 출발하여 소련 해군 최고위에 오른 제독. 1939년부터 태평양함대를 지휘하며 극동의 해군 기지를 정비했고, 1945년 8월 대일전에서 함대를 이끌어 남사할린·쿠릴 열도 상륙과 조선 북부 해안의 청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7년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1950년 해군장관에 올랐으나, 스탈린은 그가 실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음주에 빠져 있다며 '사람은 좋지만 장관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1951년 경질했다. 이후 해군아카데미 교장으로 물러나 함대보다 교실을 지켰다.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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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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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1943년 1월 31일, 베케톱카 64군 사령부. 슈밀로프 장군 앞에 파울루스 원수가 들어섰다. 독일군 원수가 적군에 항복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를 생포한 것은 슈밀로프의 병사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베테랑 보병 장교. 1942년 8월 6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를 6개월간 책임졌다. 추이코프의 62군이 북부 시가전을 치르는 동안 64군은 헤르만 호트의 4기갑군을 저지하며 남부 방어선을 사수했고, 1943년 1월 부하들이 생포한 파울루스 원수를 직접 심문했다. 이후 제7근위군으로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쿠르스크, 드네프르 도하, 부다페스트, 프라하 공세까지 진군했으며, 드네프르 도하의 공로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백해군관구와 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을 지냈고, 사후 마마예프 쿠르간에 안장되었다.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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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겨울전쟁 계획기 무렵 크렘린의 비공식 오찬에서 스탈린이 부모에 대해 물었다. 바실렙스키는 1938년 자서전에서 1924년부터 개인적·서신적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놀라며 당장 관계를 회복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40년 회복되었다.
1895년 키네솀스키군 노바야 골치하에서 교회 선창자였다가 뒤에 사제가 된 아버지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코스트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9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1942년 6월 26일 참모총장이 되고 같은 해 10월 14일부터 국방인민위원을 겸해 스탈린그라드 반격을 조율했으며, 이후 쿠르스크·크림·벨라루스·발트 전역에서 스타프카 대표로 전선을 조율했다. 1943년 2월 16일 소련 원수가 되었다. 1945년 2월부터 4월까지 3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해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켰고, 그해 하반기에는 극동 소련군을 지휘했다. 전후 1946~1948년 참모총장, 1949~1953년 군사장관을 지냈다.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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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둡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둡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둡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체포 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썼다. 스탈린은 여백에 '악당이자 매춘부'라고 적었고, 보로실로프는 '완벽히 정확한 정의'라고 덧붙였다.
키시뇨프 유대인 약사 가정에서 태어나, 차르 시대 입학 제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 중 오데사에서 지토미르까지 적진 400km를 돌파한 전설적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기계화·공수 실험과 종심작전 교리 발전을 주도한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로, 1935년 콤안다름 1계급이 되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총살, 1957년 복권.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1938년 12월 28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2일 밤 총살되었고 복권되지 않았다.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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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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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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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1937년 7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로즈넨스키 라보치」의 부고는 그가 '잠깐의 병을 앓다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폴란드 정보장교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잠입해 활동하다 체카에 체포된 뒤, 체카·오게페우·엔카베데의 방첩 간부로 일했고 1937년 처형됐다.
리가의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폴란드군 정보장교이자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이었고,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 거점을 이끌었다. 1920년 6월 체카에 체포되어 8월 협력에 동의했고, 제르진스키가 레닌과 상의한 뒤 그의 입당을 추천했다. 방첩부 백위파과장, 오게페우 특별부 부부장 등을 지냈고 1935년부터 사라토프 변경주 NKVD 제1부국장이었다. 예조프 취임 직후인 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총살되었고 1958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0폴란드군 정보장교와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망을 운영했다.
19206월 체카에 체포되었고, 8월 체카 협력에 동의했다.
1920–1927체카·GPU 방첩부에서 근무하고, 1922~1927년 방첩부 백위파과장을 지냈다.
1934–1936오게페우·엔카베데 특별부 부부장을 거쳐, 1935년 1월부터 1936년 11월까지 사라토프 변경주 NKVD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1936–1958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으며, 1958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1933년 12월부터 1934년 5월까지 소련군을 이끌고 신장에 개입해 중국 당국을 지원하며 봉기를 진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톰스크 공과대학을 다니다 1916년 동원되었다. 내전기 적군 대대장·연대장을 지냈고 1920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마쳤다. 오게페우 부대를 이끌고 1931년 망기실라크 봉기와 1933년 바스마치 진압을 지휘했고, 1933년 12월~1934년 5월 신장의 무슬림 봉기 진압에 나선 소련군을 이끌었다. 1937년 4월 NKVD 국경·내무군 총국장이 되었으나 1938년 1월 우크라이나로 좌천되고 4월 체포되었다. 8월 19일 군사 음모 가담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아 그날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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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적군에 들어가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1920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연대장과 여단 참모장·여단장을 지냈다.
1921체카 부대에 들어가며 군 경력을 보안·국경 부대로 옮겼다.
1923OGPU 국경경비국 부국장과 OGPU 부대 감찰관 보좌를 겸했다.
1931망기실라크반도 봉기와 두르디 무르타의 바스마치 부대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1933–1934신장 작전에서 소련군을 지휘해 중국 당국을 지원하고 봉기 진압에 나섰다.
1937–1938NKVD 국경·내무군 수장을 지냈고, 이후 우크라이나 부대장으로 옮겨졌다가 체포되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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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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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1924–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1926–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1931–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적군 최고 사령부가 서로를 비방하던 시절, 쿠탸코프는 디벤코의 만취와 무능을 고발했다. 답장은 NKVD였다.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디벤코의 도움으로 체포되었다.
사마라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7세부터 머슴살이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차파예프 여단에 합류, 두 달 만에 정찰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올랐다. 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을 이끌어 우랄 백코사크군을 격멸했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바스마치 토벌에서 적기훈장을 세 차례 수훈했다. 콤코르 계급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까지 올랐으나, 1937년 상관 디벤코와의 상호 비방전 끝에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어 1938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사후 소설 『차파예프』에서 그의 이름은 '옐란'으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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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하급 부사관으로 복무.
1917.5볼셰비키 입당. 제2차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1918붉은 군대 입대, 차파예프 여단 합류. 73여단장으로 승진.
1919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장 취임. 우랄 코사크군 격멸. 명예혁명무기 수훈.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25사단 지휘. 두 번째 적기훈장.
1923–1924군사아카데미 졸업. 호레즘 집단군 사령관으로 바스마치 토벌. 세 번째 적기훈장.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대로 근처에서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소련의 유럽 불법 첩보망을 지휘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백군 망명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침투 작전의 거점이었다.
1936년부터 소련 대외정보국(INO NKVD) 부국장,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국장 대행을 지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체카 출신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가장 중대한 해외 공작들(파리에서 백군 장군 예브게니 밀레르 납치, 스위스에서 망명자 이그나티 레이스 암살, 로테르담에서 OUN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 제거)을 직접 지휘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파리 불법 거점을 운영했으며,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후대 정보장교들을 양성했다.
예조프에게 라트비아인 500명 체포를 청했다가 "말도 안 돼, 1,500~2,000명은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민족주의자다"라는 답을 받았다.
모스크바 노동자 출신으로, 적군 복무와 국가계획위원회 당비서를 거쳐 1927년 OGPU에 입문했다. 1937년 스몰렌스크 UNKVD 국장으로서 '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을 조작해 예조프에게 보고했고, 예조프의 "라트비아인 1,500~2,00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내 라트비아 작전 전역을 촉발시켰다. 1938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독일·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계 주민을 겨냥한 대량 체포와 즉결처형 체계를 도입해 수개월 만에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1938년 12월 베리야의 NKVD 숙청으로 체포돼 1940년 1월 총살되고 복권되지 않았다.
1940년 12월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파블로프는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인민의 적이 너무 많아서, 그 모두가 정말 적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장군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직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하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1937년부터 붉은군대 자동차장갑전차국장으로서 T-34 개발과 기갑 교리를 주도한 소련 기갑군의 설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고, 붉은군대에 합류해 시베리아에서 바스마치 반란까지 진압했다. 1941년 6월 서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 중앙집단군의 주공을 정면에서 맞았으나 전선은 참사로 무너졌다. 민스크 함락 후 체포되어 직무 태만으로 기소되었고, 전쟁 발발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되었으며, 그가 설계를 주도한 T-34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남았다.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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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제국군 포병 사관후보생, 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1917–1920붉은 근위대 합류, 내전에서 중대·대대·연대·여단 지휘, 장갑열차로 바쿠 점령
1921–193333소총사단장, 군사고문으로 중국 파견,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소총군단장
1937–1940볼가·자바이칼·오룔·북캅카스·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1.01–07보병총감 제1부감, 21군 사령관, 중부전선 사령관
1941.10–1942.0433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나로-포민스크 돌파 분쇄, 뱌지마 포위에서 전사
11월 17일, 공세 이틀 전, 볼스키는 직속 상관을 건너뛰어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우라누스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고.
차르 군대 이등병으로 출발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볼스키는 1930년대 초 소련 최초의 기계화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4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공세 이틀 전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우라누스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스탈린과의 통화 후 편지를 철회하고 공세에 참가해 포위망 최초 봉쇄 부대가 되었다. 이후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발트 해방과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했으며, 결핵 악화로 전선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4년 1월 27일 봉쇄 완전 해제. 스탈린은 관례를 깨고 승전 축포 명령을 고보로프에게 맡겼다. 대조국전쟁에서 어떤 전선군 사령관도 받지 못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뱌트카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제국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내전에서 콜차크 백군에 복무하다 1919년 탈주, 블류헤르 51사단에 들어가 적군으로 전향했다. 대숙청 시기 백군 경력으로 의심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독소전에서 5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맡아 주코프의 신임을 얻었고,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 방어를 체계화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하고 1944년 1월 완전 해방을 이뤘다. 전후 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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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7콘스탄틴 포병학교 졸업, 제국군 소위
1918–19콜차크 백군 8카마 사단 포대 장교, 중위 진급 후 탈주
1920–21블류헤르 51사단 포대장, 페레콥·카홉카 전투서 부상, 적기훈장
1933–38프룬제 사관학교·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원수 반', 포병 교관
1941.10–42.045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방어·반격
1942.04–45.05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이스크라 봉쇄 돌파, 완전 해방, 비보르크·발트 공세
예료멘코 원수는 이렇게 평했다: '자하로프는 머리는 나쁘지 않고 의지가 강하지만 끔찍한 무례자다.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때로는 구타하기까지 한다.'
사라토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1세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1916년 징집되었다. 1917년 10월 병사들에게 연대장으로 선출된 후 적군에 합류, 동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아카데미를 마친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좌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제2근위군을 이끌며 미우스 강 방어선 돌파와 세바스토폴 해방에 기여했다. 1944년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가했으나 공세 지연으로 신임을 잃고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전후 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과 비스트렐 과정장을 지냈다. 날카로운 작전 감각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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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1948년 9월 모스크바. 소련영웅 금성훈장을 단 크류코프 중장이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압수품에는 다이아몬드 208개, 레핀과 세로프의 그림 132점, 고급 승용차 3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형량은 징역 25년.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위까지 지낸 후 적군에 합류한 소련의 기병 지휘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장으로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을 이끌어 194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종전 후 유명 민요 가수 리디야 루슬라노바와 결혼했으나, 1948년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다.
절단 수술 후 라포포르트가 문병하자 보브시가 말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나? 이제 나는 다리만 잃었을 뿐 사람으로 남았지만, 거기서 나는 사람이기를 그만뒀네.'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1941~1950)로서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군대 전역의 치료 체계를 조직하고 전시 내과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8년 살해된 솔로몬 미호엘스의 사촌으로, 1953년 1월 '의사들 음모' 사건의 수괴로 타스 통신에 지목되어 체포·고문당했다. 스탈린 사후 석방되어 보트킨 병원에서 임상과 연구를 재개했으며, 말기 육종으로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병원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1941년 6월 23일 체포되어 9월 6일 석방되었다. 회고록에는 두 달간 "내 의사와 무관한 사정"으로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고 적었다.
러시아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에 모스크바 제철공이 되었고, 1917년 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를 조직해 서기가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7군을 지휘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참모총장이던 1941년 6월 23일 반소 군사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레포르토보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9월 6일 석방되었고 수사 파일은 1955년 폐기되었다.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깼고, 1945년 제1극동전선을 이끌어 관동군을 격파했다. 1944년 원수에 올랐고 1968년 사망해 유골이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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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 조직, 서기 겸 적위대 참모장
1918–19218월부터 적군 복무, 카잔 전투에서 부상, 1921년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2–1937벨로루시·극동군관구 참모장, 1936~1937년 스페인 내전 군사고문(가명 페트로비치)
1939–19401939년 12월 9일부터 제7군 지휘, 만네르헤임 선 돌파로 소비에트연방영웅
1940–19411940년 8월부터 참모총장, 이듬해 1월 해임; 1941년 6월 체포·고문, 9월 석방
1942–1944볼호프·카렐리야 전선 사령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 돌파, 1944년 원수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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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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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1945년 4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나란히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에 들어갔지만 제국의사당 게양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5월 9일 프라하를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고, 같은 해 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베리야 재판부를 이끌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1957년 주코프 실각에 가담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된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어 석방되었다.
타간로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내전과 겨울전쟁을 거쳐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어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붉은군대에 복귀했다. 종전 직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여러 군관구와 북부군집단을 지휘하고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건강상 이유로 퇴역해 197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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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야코프 데이치는 1937년 로스토프주 NKVD 국장으로서 대숙청을 집행한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8년 수사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11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북캅카스 체카·오게페우에서 체첸-그로즈니 주 지부장 등을 지냈고, 모스크바주와 칼리닌주를 거쳐 1936년 NKVD 인민위원 작전비서, 11월부터 NKVD 비서국장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1937년 체포된 정보기관 간부 아르투조프 사건의 '수사'에 관여했다. 1937년 8월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로스토프주 NKVD 국장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3월 체포되어 9월 27일 옥중에서 숨졌고, 고문 때문으로 추정된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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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1920–1931체카·GPU·OGPU에서 북캅카스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924~1925년 체첸-그로즈니주 부서를 이끌었다.
1931–1936모스크바주 OGPU에서 근무한 뒤 1935~1936년 칼리닌주 NKVD 국장을 지냈다.
1936–1937NKVD 중앙기구에서 인민위원 작전비서와 비서국장을 맡아 아르투조프 사건의 수사에 참여했다.
1937–1938아조프흑해 변경주와 로스토프주 NKVD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8년 3월 체포되어 9월 수사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38년 7월 28일 총살됐다.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판결문은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NKVD에서 ‘근거 없는 체포’와 수사자료 조작을 허용했다고 기록했다.
이반 말체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을 거쳐 국가보안기관의 지역 지휘관이 된 소련 관료였다. 그는 우랄과 시베리아, 북캅카스의 조직을 거치며 VChK·OGPU·NKVD가 지방 행정과 정치적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이끈 그는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테러의 집행 구조에 책임을 졌으며, 이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명령 제00447호의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탄압을 집행했고, 모스크바에서는 대숙청 관련 체포 작전을 지휘했다.
보로네시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사마르칸트에서 자랐다. 1918년 입당해 투르키스탄과 북캅카스의 특별부에서 경력을 쌓은, 예브도키모프가 이끈 '북캅카스파'의 일원이었다. 1937년 1~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으로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특별 트로이카에 들어 탄압을 집행했다. 가을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행정경리국장과 작전부장을 지내며 '우익·트로츠키 지하조직'과 민족 작전 관련 체포·수색·호송을 맡았다. 1938년 1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총살되었고, 2013년 복권 불가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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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볼셰비키당에 가입하고 사마르칸트 주 혁명재판소 서기를 지냈다.
1920–1935투르키스탄과 북캅카스에서 체카·GPU·OGPU의 특별부서와 작전부서를 맡았다.
1935–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과 볼가 군관구 NKVD 특별부서장을 맡았으며, 명령 제00447호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7–1938모스크바에서 NKVD 행정경리국장, 제2 작전부장, 제3 특별부장을 지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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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톰스크-7 건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원자로가 아니라 빵 공장이었다. 그는 '내가 석공을 구해 오겠다'며 수용자 중 벽돌공을 직접 찾아 데려왔다.
체카 기병 출신의 소련 내무부 공병 소장이자 산업 건설자로,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 시설인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 건설을 지휘했다. 1947년 ITL 제859호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해 1948년까지 4만 5천 명의 인원으로 공업용 원자로와 방사화학 공장을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까지 소련 핵 지도의 주요 시설을 연이어 건설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1949)과 스탈린상(195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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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4제국군 기병 위생병 → 1917년 볼셰비키 입당 → 체카 기병대 내전 참전, 특별기병대대장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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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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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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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제국군 징집 → 붉은군대 입대; 제1차 세계대전·내전 참전, 페트로그라드 포병과정 졸업
1920–193728산악사단 포대장·포병연대장 등 포병 지휘관 역임, 고등포병학교 졸업(1924)
1937–1941벨로루시아·북카프카스·키예프 특별군관구 포병사령관; 폴란드 원정·겨울전쟁 참전
1941–1948포병총국(GAU)장; 포병원수 진급(1944); 전시 내내 포병 보급·개발 총괄
1948–1952군무차관; S-60 대공포 결함으로 1952년 2월 체포·계급 박탈
1953–1960복권(1953.4); 방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총사령관; S-25 위원장; ABM 서한 공동서명
1960–1972국방부 감찰장단 감찰고문; 회고록 『Об артиллерии и немного о себе』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나는 하이루이(海瑞)가 되겠다!' — 1962년 마오쩌둥에게 제출한 8만 자 상소문에서, 황제에게 직언한 명나라 청렴 관리를 자처하며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했고 국방부장으로서 소련식 군대 개혁을 추진한 군사 지도자였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서한으로 비판한 일로 '반당 집단' 수장으로 숙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투옥·고문 끝에 1974년 옥사했으며 1978년 복권되었다.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이미 전개된 군대로 그냥 시작된다. 동원과 집중은 1914년처럼 전쟁 상태 발발 이후의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은밀히 진행된다」 — 『새로운 투쟁 형태』(1940)
소련의 군사 이론가이자 군 장교로, 트리안다필로프와 투하쳅스키와 함께 종심작전(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 교리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전술의 진화』(1932, 1937)는 전략과 전술 사이의 작전술을 체계화한 기념비적 저작이며, 참모 아카데미 작전술 학과장으로서 붉은 군대 지휘관 세대를 양성했다. 1940년 저서 『새로운 투쟁 형태』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동원 없는 전쟁 개시를 예언했으나 스탈린 지도부는 외면했고, 이 책은 오늘날 게라시모프 doctrine에서 인용되며 재평가되고 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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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8준사관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여름 붉은 군대 자원입대
1918–21제6군 정치부, 제159소총연대 군 정치위원, 제154소총연대 부지휘관
1921–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졸업; 서부전선 참모부 정보부장 겸임 (1923–24)
1925–30레닌그라드 군관구 작전부장 → 제10소총군단 참모장
1930–3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작전학부장 (1932)
1933–36제4소총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1935년 콤브리그 계급 부여
1936–39참모본부 제1부 부부장 → 참모 아카데미 군 작전학과장 → 작전술 학과장, 교수
1939.12겨울전쟁 당시 제7군 참모장 (12월 17–30일), 콤디브 계급 (12.9)
1940–41국방인민위원회 배속; 『새로운 투쟁 형태』 출간 (1940); 1941년 6월 7일 체포
1942–55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 복역; 만기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
1955–761955년 6월 복권, 대령 계급 회복 후 퇴역; 『군사사상』 편집부 근무, 저술 재개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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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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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란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1932년 10월, 고리키의 말라야 니키츠카야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을 향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1년 전 자기 손에 파멸한 작가를 그 자리에서 찾았다.
기술자이자 토지개량 전문가였던 그는 소설가로 돌아서 소련 문학에 뚜렷한 목소리를 남긴 작가였다. 본명은 클리멘토프이며, 아버지의 이름 플라톤에서 따온 '플라토노프'는 필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쓴 『체벤구르』와 『구덩이』는 집단화와 스탈린 정책을 회의적으로 그려 수십 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했고, 마지막 출판물은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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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31캅카스 체카·GPU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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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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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을 조직한 중공 노동운동 지도자로, 1930년 3월부터 8월까지 당 중앙의 실권을 쥐었다.
후난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 입당했고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 1925년 5·30 운동의 조직자였다. 1928년 이후 당 중앙의 실권을 쥐고 1930년 혁명의 고조가 왔다며 창사·우한 등 대도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실각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5년 동안 소련에 머물며 소련인 아내를 맞았고 1946년 귀국해 노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속에 1967년 자살했으며 1980년 복권되었다.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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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1937년 7월 14일, ANT-25기가 캘리포니아 샌재신토 목장에 착륙하자 현지 목장 주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로모프는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전설적 시험비행사이자 공군 지휘관. 1937년 ANT-25기로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무착륙 비행해 세계 거리 기록을 세웠고, 독소전쟁에서는 항공군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이감을 주선해 소련 우주 개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내가 책을 쓸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실수처럼 느껴진다」 — 『살아남은 자』(1945)
소련 군사정보국(GRU)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와 그리스 주재 대리대사를 역임했다.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7년, 동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처형 소식을 접한 뒤 아테네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OSS에서 복무하고 16년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회고록 『살아남은 자』에서 '내가 집필할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고 썼다.
1958년부터 국방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국 핵 계획을 지휘했고, '제국주의의 핵 공격을 받을 때 최소한의 보복 수단을 갖추기 위해' 첨단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벨기에·소련에서 배우고 황푸군관학교 정치교관을 지냈다. 대장정에서 린뱌오의 제1군단 정치위원이었고 항일전쟁기 화베이의 진차지 근거지를 세워 지휘했다. 국공내전 뒤 베이징 시장을 지냈고 1955년 원수가 되었다. 1956년부터 국무원 과학기술 담당 부총리로 소련 원조 철수 뒤에도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이르는 국방과학 계획을 총괄했다. 10대 원수 중 마지막으로 1992년 사망했다.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카루츠키는 명령 제00447호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스탈린 시기 탄압을 실행했으며, 1938년 5월 체포를 예상하고 자살을 시도해 그날 병원에서 숨졌다.
톰스크의 유대인 점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8년 콜차크군 군악대에 동원되었다가 탈영해 적색 빨치산에 합류했고,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투르크멘 GPU 의장, 카자흐스탄 오게페우 전권대표를 거쳐 서시베리아 변경주, 서부주, 모스크바주 NKVD 국장 등을 지내며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한편 '해결률'을 높이려는 증거 날조에는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1938년 4월 NKVD 참사회원이 되었으나 체포가 임박하자 5월 13일 권총 자살을 기도해 그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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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체카에서 근무를 시작해 동시베리아 군관구 특별부 부책임자, 제26소총사단·제5군 혁명군사재판소 수사관 등을 지냈다.
1922GPU에서 프리모리예·아무르주 부서장, 투르크멘 SSR GPU 의장, 중앙아시아 오게페우 전권대표부 부대표와 카자흐스탄 전권대표 등을 지냈다.
1934카자흐 자치 SSR과 서시베리아 변경주의 NKVD 국장, 벨로루시 SSR 내무인민위원 부위원장, 서부·스몰렌스크·모스크바주 NKVD 국장 등을 지냈다. 00447호 작전의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했다.
19384월 5일 NKVD 참사회원이 되었다. 5월 13일 체포를 예상해 권총 자살을 시도했고, 그날 병원에서 숨졌다.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1937년 6월부터 고리키주 NKVD 국장과 주 트로이카 의장을 맡아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탄압을 집행했다. 체포된 뒤 1940년 총살되었다.
오룔의 식당 급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입당했고, 1920년 제1기병군 특별부를 거쳐 체카에 들어갔다. 돈과 쿠반에서 부농 청산과 카자크 청산 정책을 집행했고, 샤흐티-도네츠 작전구역에서 '샤흐티 사건' 날조에 가담했다. 북캅카스 변경주 NKVD 비밀정치부장 등을 거쳐 1937년 6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고리키주 NKVD 국장으로 일하며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주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았다. 1938년 12월 4일 체포되어 1940년 1월 28일 총살되었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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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1919년 적군에 입대했고 1920년 제1기병군 특별부에서 일했다. 1922년 흑해관구 GPU 정보·요원부장이 되었다.
1925–1937블라디캅카스·쿠반 GPU에서 정보·등록 및 방첩 부서를 이끌었고, 1931~1933년 샤흐티·도네츠 작전구역 부국장을 지냈다. 부농 청산·카자크 청산 정책을 집행하고 샤흐티 사건 등 사건 조작에 가담했다.
1933–1938북캅카스 GPU·NKVD에서 비밀정치부장 등을 맡았고, 1937년 고리키주 NKVD 부국장을 거쳐 1937년 6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국장이었다.
1938–19401938년 12월 4일 체포되었다. 1940년 1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1956년 딸에게는 1945년 수감 중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1939년 7월 5일 국방인민위원 명령으로 시테른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선집단이 편성되어 제1붉은기군, 제2붉은기군, 자바이칼군관구, 제57특수군단을 통제했다. 7월 19일 제57특수군단이 주코프의 제1군집단으로 개편되었다.
1900년 8월 6일(구력 7월 24일) 키예프현 스멜라(현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에서 태어나 1941년 10월 28일 사망한 소련 군사지휘관이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키예프의 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했다. 1937~38년 '그리고로비치'라는 성으로 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을 지냈고,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을 지휘했다. 1939년 7월 5일 전선집단 사령관으로 할힌골 전투를 총괄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41년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 음모와 독일 스파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고, 10월 28일 쿠이비셰프 인근에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마슬렌니코프가 협상장에 나타나자 수감자가 외쳤다 — 「장군! 41년에 우릴 무장도 없이 늪지에 버렸소! 우린 25년형인데 장군만 살아남으셨군요!」 마슬렌니코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철도원 아들로 내전에서 기병여단장까지 올랐고, 1928년 OGPU 국경군으로 이적해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39년 베리야에 의해 NKVD 부인민위원 겸 국경·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 발발 후 29군·39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 선봉, 캅카스 전투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을 지휘해 바쿠 유전을 사수했으며, 1944년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프스코프·타르투·리가를 탈환하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대일전에서 바실렙스키 부사령관으로 관동군 격멸 작전을 입안해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MGB 부장관으로 복귀했으나 베리야 몰락 후 '부대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추궁받다 1954년 4월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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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적위대·붉은군대 복무, 내전 종결 시 기병여단장
1928–1935OGPU·NKVD 국경군,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1948년 1월 12일 밤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은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본명 라브렌티 잔즈가바로, 1900년 쿠타이시 현 나후나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20년 8월 당에 입당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기관을 이끌며 서부 벨로루시의 대규모 총살과 추방을 조직했고, 이 시기 체포자에 대한 구타에 직접 가담했다는 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의 지시로 미호엘스 암살이 결정되자 그의 다차가 작전 거점이 되었고, 1948년 1월 12일 밤 극장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1951년 말 소련 MGB 부장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4월 체포되어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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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8'엘렉트로실라' 공장 설계기사 → 전기기계연구실장 → 기술부장
1938–1941NKVD 수사 중 '엘렉트로실라' 제40부서 특수연구실장으로 발전기 설계 지속
1941–1947'엘렉트로실라' 공장 주임기사 → 부공장장, 특수설계국장(1945–1946) 겸임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비행기를 생각했다 — 이미 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행기를.”
세묜 라보치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공군 주력 전투기 La-5와 La-7을 설계한 항공기 설계자로, 22,000대 이상 생산되어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LaGG-3로 시작한 OKB-301은 전후 La-176으로 소련 최초 음속 돌파(1948년)를 달성했고, 1950년대 이후 S-25 베르쿠트 방공망과 SA-2 대공미사일, 순항미사일 부랴 개발로 방공·우주 분야로 전환했다. SA-2는 1960년 게리 파워스의 U-2기 격추로 냉전사에 기록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4회, 과학아카데미 회원, 공병기술소장을 지냈으며 1960년 사리샤간 시험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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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붉은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1920–1927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수학, 항공역학 기사 자격 취득
1927–1939각 항공설계국에서 근무, 1939년 항공기 제작 수석설계사 직급
1939–1940고르부노프·구드코프와 함께 LaGG-3 전투기 공동 개발, OKB-301
1940–1945OKB-21 수석설계사(고리키), La-5·La-7 전투기 설계, 22,000대 이상 생산
1945–1960OKB-301 총책임자(힘키), La-15 제트 전투기, S-25·SA-2·부랴 미사일 개발 주도
바르바로사 작전의 폭풍 속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하고, 해빙기에는 다시 공군을 재건한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공장 전보들이 증명한 진실: 701대의 완성 항공기가 조종사 부족으로 공장 비행장에 묶여 있었다. 스탈린 앞에서 지가레프의 '전투 불가' 이야기는 산산조각 났고, 스탈린은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열한 놈! 꺼져!"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에서 항공으로 전환한 소련 공군 지도자였다. 1941년 6월 독일 침공 직후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전쟁 첫해의 참담한 손실과 항공기 생산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대면에서 거짓말이 발각되어 1942년 4월 경질되었다. 이후 극동전선 공군을 지휘하며 1945년 소일전쟁에서 제10항공군을 이끌었고, 전후 장거리 항공대를 지휘하다 1949년 다시 공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1957년까지 재임하며 제트기 전환을 주도했다. 1955년 항공 총원수로 진급했고, 말년에는 민간항공총국장과 방공군사령학교장을 지냈다.
1940년, 리투아니아 NKVD에 보낸 지령에서 용의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체포할 것이며, 심문 중 태도에 따라 포섭 여부를 결정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차 차장 아들로 태어나 1921년 체카에 입문한 이후 KGB까지 38년간 소련 보안기관에 몸담으며 방첩과 해외정보 양 영역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NKVD·NKGB 방첩총국장으로서 전시 방첩작전과 카틴 학살에 관여했고, 전후 잠시 MGB 해외정보총국장과 정보위원회(KI) 부의장으로 소련의 대외첩보를 총괄했다. 1954년 KGB 출범과 함께 제2총국(방첩) 국장으로 복귀했으나 흐루쇼프 해빙기인 1956년 스탈린 시대 불법행위로 해임·강등되었고, 1959년 장군 계급을 박탈당하고 제명된 뒤 1963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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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937체카·GPU·OGPU·NKVD에서 북캅카스 지역 방첩·정보·비밀정치부서 요직 역임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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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구데리안은 므첸스크에서 카투코프의 T-34에 막힌 후 이렇게 썼다. "그들(러시아군)은 이미 무언가 배웠다."
미하일 카투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제1근위전차군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붉은 군대 최고의 기갑 지휘관이다.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그의 제4전차여단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저지하며 붉은 군대 최초로 근위 칭호를 획득했다. 쿠르스크에서는 전차 매복과 역습으로 독일 남부 돌파를 소모시켰고, 이후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기갑 선봉으로 활약했다. 전후 독일 주둔 소련군 기갑부대 사령관과 국방부 감찰총감을 지냈으며, 1959년 기갑군 원수와 두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5년 12월, 오골초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정치국 회의에서 MGB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며 거절했으나, 6년 뒤 아바쿠모프가 체포되자 그는 바로 그 자리의 대행을 맡았다.
세르게이 오골초프는 체카에서 MVD까지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전 역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1918년 17세로 체카에 들어가 제르진스키의 눈에 띄어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고, 마흐노 진압에서 인질 처형과 봉기 전멸 전술을 익혔다. MGB 차관 및 제1차관(1946–1953)으로서 아바쿠모프 휘하에서 작전 서부·봄·파도 등 대규모 강제이주를 조율했고, 1948년 솔로몬 미호엘스 살해를 민스크에서 직접 지휘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 해임 후 한 달간 MGB 장관 대행을 맡았으며, 스탈린 사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59년 계급과 훈장을 모두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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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사포조크 현 체카 수사관 → 랴잔 현 체카 작전집행위원 → 모스크바 체카 압수수색위원
1920–1925폴타바 현 체카 부서장 → 로흐비차 현 체카·GPU 정치국장
1927–1935OGPU 특별부서장 (제1기병사단, 제95·44·99소총사단 등)
1936–1939NKVD 국경부대 지휘관 (크림·아르한겔스크) → 레닌그라드시 NKVD 국장
1942–1944쿠이비셰프 주 NKVD·NKGB 국장 → 카자흐 SSR 국가보안인민위원
1945–1951NKGB·MGB 제1차관 → MGB 차관(일반 담당)
1951–1952MGB 장관 대행(7–8월) → MGB 제1차관 → 우즈베크 SSR MGB 장관
1942년 12월~1943년 2월, 노비코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독일군 집단에 대한 공중봉쇄를 조직해 수송기 보급로를 끊었다.
코스트로마 시골의 농민 아들로 태어나 교사로 일하다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30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33년 공군으로 전환해 겨울전쟁에 참전했고 1942년 4월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전선 공군을 항공군으로 바꾸고 동종 항공군단을 세워 대규모 항공작전을 가능케 했으며, 스탈린그라드 공중봉쇄와 쿠르스크·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 작전을 조율했고 1943년 항공원수, 1944년 항공 총원수를 처음 받았다.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야간 심문 끝에 자백을 강요당하고 티크시에서 복역, 1952년 석방과 1953년 복권 뒤 장거리항공대를 지휘했다. 1956년부터 레닌그라드 고등민간항공학교장을 지내고 1966년 중풍으로 은퇴했다.
쭌이 회의 뒤 총서기를 맡은 「28인의 볼셰비키」,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 편에 섰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으로 쭌이 회의 뒤 보구를 대신해 총서기가 되었고,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1976년 우시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 대신 마오를 지지해 당 총서기(총부책)를 맡았다. 옌안에서 선전·이론 부문을 이끌었고 정풍운동 이후 마오에게 실권을 넘겼다. 건국 후 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을 비판해 펑더화이와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문화대혁명기 유배지에서 197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복권되었다.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1941년 8월 28일 밤, 탈린을 탈출한 발트 함대가 기뢰밭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트리부츠는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라 명했다. 그는 밤새 함교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 해군에서 가장 오래 발트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1939–1947). 핀란드 겨울전쟁, 탈린 철수,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4–45년 발트 공세까지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함대를 지휘한 유일한 함대 사령관이었다. 독소전 직전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고,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함포와 해군 항공대로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탈린 전환에서 지휘 과실로 상당한 손실을 냈다는 비판도 있지만, 1943년 제독으로 진급해 전후까지 함대를 이끌었다. 퇴역 후 200여 편의 해군사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늘날 태평양 함대 구축함 '트리부츠 제독'에 그 이름이 살아 있다.
주코프 회고: “스탈린이 나를 기계로 불러 레닌그라드 근처 군대를 지휘할 좋은 사령관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페듀닌스키 장군의 이름을 댔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가이고, 부대 지휘의 명수다.”
우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내전을 치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제24차량화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후방을 돌파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 공적으로 주코프의 눈에 띄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으로서 도시 방어의 결정적 시기를 지휘했고, 이후 제2충격군 사령관으로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주공을 위장 전환하는 작전으로 1944년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트란스코카서스 및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며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망 시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복무했다.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올봄 소련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소문과 문서들은 영국, 어쩌면 독일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허위정보로 간주해야 한다." 94일 뒤 바르바로사가 시작되었다.
농민 출신 정치지도원으로 내전에 참전한 후 11년간 군 정치기관에서 복무하다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치고 지휘관으로 전환했다. 1940년 7월 GRU 정보총국장에 올랐으나, 1941년 봄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영미의 도발적 허위정보'라고 보고해 바르바로사의 전략적 기습을 막지 못했다. 독소전에서 모스크바 반격의 10군과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두 차례 대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했으나 그해 3월 하리코프 상실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전후 인사총국장을 거쳐 1958년 글라프PUR 총정치국장으로 흐루쇼프 시기 당의 군대 통제를 담당했고 1961년 소련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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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21적군 자원입대, '붉은 독수리' 연대에서 내전 참전, 정치지도원
1921–31군 정치기관에서 선전·선동 부서장 역임, KUVNAS 졸업(1929)
1931–3895연대장 → 61사단장 → 8기계화여단장 → 45기계화군단장
1938–39벨로루시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빈니차 군집단·6군 사령관
1939–406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참전
1940–41부참모총장 겸 GRU 정보총국장 — 바르바로사 직전의 첩보 평가
1941–42소련 군사사절단장(영·미) → 1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1942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1근위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1942–43재임명된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하리코프 공세, 이후 해임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1917년 7월 4일, 16세의 쿠로치킨은 크셰신스카야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경비했고, 훗날 그 연설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스몰렌스크주 고르네보 마을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제과점 심부름꾼과 기관차 수리공장에서 일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무장대에서 볼셰비키 집회를 경비하다 10월에 적위대에 가담했다. 1918년 8월 적군에 입대해 기병 과정을 마치고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으며, 1921년에는 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41년 7월 제20군 사령관으로 레펠 반격과 스몰렌크 포위전을 겪고 포위된 제16·제20군의 주력 돌파를 조직했으며, 이후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데먄스크 포위전을 지휘했다. 1944년부터 제60군을 이끌어 1945년 1월 27일 제322소총사단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진입했고, 1989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 무선조종 지뢰와 철도 사보타주로 파르티잔전을 설계한 사보타주 기술자
1941년 11월 14일 새벽 3시 30분, 스타리노프는 보로네시에서 암호화된 무선 신호를 보냈다. 300km 떨어진 하리코프에서 독일군 사령부 건물이 R-10 지뢰와 함께 폭발해 게오르크 폰 브라운 장군이 매몰됐다.
일찍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거친 뒤 철도부대 공병장교로 복무하며 기폭 기술을 독학했고,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파르티잔·사보타주 교관으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의 사보타주 작전을 조직했고,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무선조종 지뢰 R-10으로 하리코프 독일군 사령부를 원격 폭파했으며 중앙유격대본부의 사보타주 담당으로서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의 기술적 토대를 설계했다. 전후에도 KGB 교육기관에서 1987년까지 사보타주 전술을 가르친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로, 그의 반열차 지뢰(PMS)와 훈련 체계는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20세기 비정규전의 유산이 되었다.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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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명령 제00447호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준 한도는 1범주 4천 명, 2범주 6천 명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1일 자 그의 보고서는 작전 종료를 이렇게 명시했다.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해 1만 5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번째 범주로 7500명...'
체카와 OGPU 중앙 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1936년 여름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이 된 체키스트로, 나우모프는 그를 류시코프, 레덴스와 함께 '북캅카스 출신자' 집단으로 분류한다. 쿨라크 작전에서 정치국의 서면 승인 없이 한도 증액을 관철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명령 제00447호가 준 한도 1만 명을 훌쩍 넘겨 1만 5천 명 유죄 판결로 작전 종료를 보고했다. 1938년 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되었다가 6월 체포되었고, 10월 22일 'NKVD 내부의 공모'에 대한 상세한 진술로 공모 사건의 실을 처음 풀었으며 1939년 총살됐다.
부하린 아파트 수색에 "검은 양복, 흰 셔츠, 고운 반지에 긴 새끼손톱" 차림으로 나타났다. 안나 라리나는 "마치 연회에 온 듯했다"고 남겼다.
1921년 체카에 입문해 경제·방첩 부서를 거쳐 이노(INO)로 옮겨 베를린과 로마에서 비밀 거점을 운영한 소련 정보장교였다. 1935년 이노 제1부책임자로 외국정보를 총괄했고, 1937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공화국 전역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해 8개월 만에 6만 명을 체포하고 쿠라파티 집단처형을 감독했다. 1938년 9월 NKVD 3국장으로 전보된 직후 베리야의 숙청에 휘말려 체포됐고, 1939년 2월 총살됐으며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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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1942년 7월 보로네시가 위태롭던 작전회의에서 바투틴이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 저를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스탈린이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훗날 바투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행동은 아마도 주변에 더 적임자가 보이지 않을 때 즉시 중대 지휘를 맡겠다고 결심한 병장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소련의 육군대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라누스' 작전을 입안하고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를 지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했다. 1944년 2월 UPA 매복으로 중상, 4월 사망.
오자키 호쓰미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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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
니콜라이 펙렌코는 러시아 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소련의 기갑 지휘관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초기에 제57특별소총군단을 지휘했으나, 5월 전투의 실패 뒤 6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기계화군단과 전차군단, 전차병과 기계화부대의 편성·훈련을 맡으며 전쟁 수행 체계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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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회고)
1930년 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를 용광로 전문으로 졸업한 광산·야금 기술자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을 거쳐 1938년부터 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건설을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력으로 지휘했고, 1941년 3월부터 1946년 8월까지 NKVD 부인민위원으로 굴라그의 산업건설 기구들을 총괄했다. 원자력 계획에서는 1944년 12월 우라늄 탐사 책임을 맡았고, 1945년 8월부터 제1총국 제1부책임자 겸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특수수용자 노동력을 감독했으며 1949년 첫 핵실험을 앞두고 RDS-1 조립을 책임졌다. 1955년 중형기계공업 장관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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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3RKP(b) 입당, 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 우크라이나 당 활동
1923–1930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졸업, 용광로 기술자
1930–1933기프로메즈 소장, 카멘스코예 제철공장 지배인
1933–1937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
1938–1941노릴스크 건설 총책임자,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으로 최초 니켈 생산
1941–1946NKVD 부인민위원, 산업건설·광산·수로 굴라그 총국 지휘
1945–1953원자폭탄 계획 제1총국 제1부책임자, 우라늄·폐쇄도시·RDS-1 조립 책임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6년, 흐루니체프와 야코블레프가 영국제 제트엔진 구매를 건의하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자기 비밀을 우리에게 팔겠는가?' 노동당 정부는 기꺼이 롤스로이스 닌 엔진과 청사진을 넘겼고, 이를 복제한 RD-45가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병대·공장 관리직을 거쳐 소련 항공공업 장관(1946~1953)까지 오른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탄약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포탄·항공폭탄 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 항공공업 수장으로서 쇠퇴한 소련 제트 기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1946년 야코블레프와 함께 스탈린을 설득해 영국 롤스로이스 닌 엔진을 도입, 이를 역설계한 클리모프 RD-45가 MiG-15에 탑재되며 소련은 단숨에 제트 전투기 시대에 진입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흐루니체프 우주센터에 남아 있다.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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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1942년 11월 로콥소프스키가 전했다: "당신의 성 '지도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꾸길 바란다." 유대인 비하 표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철자 하나를 바꾸자 스탈린은 "아주 좋다"고 결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세력과 싸웠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6군 사령관으로 북쪽 방어를 지휘하며 독일군 측면 공격을 좌절시켰고, 이 공로로 부대는 제5근위군으로 개칭되었다. 쿠르스크의 프로호롭카 전차전,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제5근위군을 지휘하며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역을 관통했고, 1945년 4월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했다. 전후 지상군 제1부사령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55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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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2붉은군대 입대, 제46소총사단·제1기병군에서 내전 참전 —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토벌, 중상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1943년 2월 스탈린 앞에서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에게 첫 개편 전차군을 맡기며 "당신이 직접 증명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농촌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이자 기갑군 총원수로 올라선 전차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막은 코텔니코보 전투와 역사상 최대 전차전인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을 지휘했다. 프로호롭카의 막대한 손실은 평생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반격은 쿠르크 남부 방면 독일군 진격을 결정적으로 멈춰 세웠다. 1943년 초 스탈린에게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전환하자고 직접 설득해 전선의 주 타격 수단으로 재편시켰고, 자신이 첫 편제의 사령관이 되었다. 코르순-셰우첸콥스키 포위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민스크 해방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기갑군사학교장과 국방차관보로 소련 전차 교리와 장교 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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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부상, 적기훈장 수훈
1924–28제11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6–37극동 특별붉은기군 사령부 제1부장, 제63연대장
1937–39스탈린 기갑·차량화군사학교 전술교관, 당에서 잠시 제명 후 복권
1940소련-핀란드 전쟁 전차대대장, 제35경전차여단 참모장
1941.5–9제3기계화군단 참모장, 개전 직후 포위망 탈출
1941.9–1942.4제8전차여단(후 제3근위전차여단)장, 모스크바 공세
1942.4–12제7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1942.12–1943.2제3근위전차군단장, 코텔니코보에서 만슈타인 구원 차단
1943.2–1944.8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프로호롭카, 드네프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바그라티온, 민스크·빌뉴스 해방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베르만은 테레사 토란스카에게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에 복무하는 것은 단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내적 필요였다”고 말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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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제4방면군 총지휘로 장궈타오의 분열을 겪고, 1979년 국방부장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원수
1990년 6월 결핵이 재발해 입원했고 9월 21일 89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시신 인사도 추도회도 없이, 유골을 대별산·대파산·태행산·하서회랑에 뿌리라는 것이었다. 화장한 유골은 네 곳에 나뉘어 뿌려졌다.
산시 출신 황푸 1기생으로 광저우 봉기 뒤 어위완 소비에트에서 제4방면군 총지휘가 되었고, 대장정 중 장궈타오의 남하 결정에 따르다 1936년 서로군이 하서회랑에서 궤멸하는 참패를 겪었다. 항일전쟁기 129사단 부사단장, 국공내전기 화베이 군구 부사령관으로 타이위안을 점령했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2월 역류」 뒤 한직에 있다가 1978년 복귀해 국방부장으로 1979년 중월전쟁을 지휘했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스탈린에게 직통 전보를 보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된 그는 부하에게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처형 가능성에 대비했다.
스탈린 시대 군 방첩과 국가보안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전선 특별부서장으로서 사령관 고르도프의 무능함을 직통 전보로 스탈린에게 보고해 교체를 이끌어냈다. 1943년부터 스메르시 부국장으로서 독일 후방 침투 공작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폴란드 공안부의 소련 측 수석고문으로서 공산주의 보안 기구 건설을 주도했다. 1946년 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에 올랐으나, 1951년 'MGB 내 시온주의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 1953년 '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된 뒤 1997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와 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1918년, 16세 겐딘은 이렇게 썼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일을 탐욕스럽게 지켜보았고, 물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내 자리는 혁명 대열 속에 있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은 체카·OGPU·NKVD 방첩 장교로 경력을 쌓다 1937년 9월 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대리가 된 소련 군사정보 지휘관이다. 1918년 16세에 붉은군대와 볼셰비키당에 합류했고, 내전 후 모스크바 체카 수사관으로 전환해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에 참여했으며, 이후 OGPU 방첩부와 NKVD 특별부·비밀정치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GRU 국장 대리로서 대숙청이 정보기관을 초토화하는 와중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비합법 거점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막아냈으며, 이는 훗날 소련이 독소전 직전 일본의 전략 방향을 확인하는 결정적 정보선을 보존한 조치였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되었고 1957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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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붉은군대 입대·RKP(b) 입당
1918–1921남북전쟁: 페트로그라드·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대장·포대장·노보로시스크 요새지구 포병부사령관
야코프 스무시케비치는 스페인과 할힌골에서 소련의 공중전 경험을 축적한 군사 지도자이자 전쟁 직전 붉은군 공군을 재편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일본군에 맞선 항공작전을 지휘해 제공권을 회복했고, 귀환 뒤 붉은군 공군 수장이 되어 겨울전쟁의 교훈과 조종사 훈련·신형 장비의 부족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날조된 군사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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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소련 대사 우만스키가 완고하고 비협조적이며 금 보유고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자, 화가 난 루스벨트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우만스키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당시 워싱턴 최연소 대사였다. TASS 특파원과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장을 거치며 외신 검열을 총괄했고, 언론인 경력 속에 NKVD 정보 활동이 섞여 있었다는 정황이 여러 사료에서 제기된다. 주미 대사 시절 군수 물자 협상에서의 고압적 태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각료회의에서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다. 1943년 주멕시코 대사로 부임해 3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익혀 가장 인기 있는 외교관이 되었으나, 1945년 코스타리카 부임길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미하일 시레이데르는 그를 '극악무도한 출세주의자'로 기억했다. '예조프 주변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써서'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싸 왔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1937년 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이 되어 두 차례 상한 증액으로 한도를 4,800명 늘린 체키스트다. 1938년 2월 이바노보주로 옮겨 전임자 라드지빌롭스키가 '실수로' 풀어 준 사람들을 다시 잡아들였고, 그해 11월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쌌다고 고발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정치국에서 심의된 이 편지는 예조프 해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그 공으로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과 중앙위원 자리를 받았으나 곧 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밀려나 1946년에 죽었다.
1939년 10월 소련 지도부는 석탄공업인민위원부를 신설하고 바흐루셰프를 초대 위원으로 임명했다 — 그는 이미 러시아공화국 총리였다. 한 사람에게 정부 수반과 전략 산업을 동시에 맡긴 것은 전운 속에서 석탄이 곧 총력전의 연료라는 판단이었다.
툴라의 자물쇠공 견습공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화국 정부 수반과 소련 최초의 석탄공업인민위원을 겸임한 산업 행정가. 1939년 신설된 석탄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었으며, 1943년 전시 연료 공급의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하던 중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공로는 크렘린 벽 묘지 안장으로 기려졌다.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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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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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전쟁 중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그의 직접 감독 아래 12,000대의 T-34 탱크가 생산되었다. 조선 인민위원이 바다가 아닌 육상 전투를 위해 가장 많은 탱크를 찍어낸 역설이다.
니콜라예프 조선소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소련 조선공업을 17년간 이끈 생산 관료다. 1940년 조선공업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대양함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전시에는 조선소 대피와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한편 탱크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을 겸임했다. 전후 수송기계·중기계 분야를 거쳐 1954년 조선공업장관으로 복귀, 소련 해군의 원양화와 원자력 잠수함 시대의 산업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유리 노센코는 KGB 장교로서 미국에 망명, 냉전기의 대표적 이중 스파이 사건을 일으켰다.
1939년, 스탈린의 호출에 트럭이 두 번 펑크 나 1시간 30분 늦었다. '콜롬나에서 트베리 경유로 오셨나?'라는 빈정거림에 서른일곱 살 공장장은 '기술도 사람이 못 따라가면 배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중기계 인민위원 임명을 사양하자 보로실로프가 팔을 붙잡았다: '모루 위의 보드카는 어디 갔나?'
스탈린 시대 소련 군수공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소련 원자력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중형기계공업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 기관차 설계사에서 출발해 전차, 조선, 핵무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수-기술 행정의 정점을 두루 거친 '스탈린의 인민위원' 세대의 전형이었다.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폭발이 가라앉은 뒤 부분적으로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폭발 순간에 멈춘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1902년 11월 9일(구력 10월 27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현 보리스оглеб스크에서 태어나 1960년 10월 24일 바이코누르에서 사망했다. 출신 배경은 사료마다 달라 귀족 집안, 노동자 집안, 상인 점원 집안으로 갈리며, 아버지는 1907년에 사망했다. 1920년 붉은군대에 입대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고 1924년 당에 입당했으며, 스페인과 핀란드와 독소전쟁에서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1950~1952년과 1953~1955년 두 차례 포병총사령관을 지냈고 그 사이인 1952~1953년에는 무장 담당 전쟁차관을 맡았다.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와 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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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1941년 8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타전했다. 「누군가 이 구역에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포포프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황제의 의심은 3년 뒤 강등으로 이어졌다.
돈 강 유역 출신으로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했다. 독소전 초기 북부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독일군 진격을 저지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부사령관으로 포위 작전을 입안했다. 1943년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오룔과 브랸스크를 해방해 육군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발트에서의 부진과 정치위원 불가닌과의 충돌로 상장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부터 지상군 주참모장을 지냈고 196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바실렙스키와 골로바노프가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했지만 끝내 원수가 되지 못한 대표적 장군이다.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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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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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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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1928년 12월, 멕시코시티의 격렬한 당 회의에서 비탈리가 메야에게 소리쳤다 — "잊지 마라: 인터내셔널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다, 제명되거나 죽거나!" 한 달 후 메야는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쿠바 공산당을 공동 창립한 학생운동 지도자로, 아바나 대학에서 반제국주의 학생투쟁을 조직하고 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1925년 쿠바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세웠다. 마차도 독재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도 혁명운동을 이어가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으며, 쿠바 혁명 좌파의 상징적 순교자로 카스트로 세대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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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아바나 대학 법학부 입학 — FEU 공동 창립, 서기 역임
1923FEU 회장 취임 — 제1차 전국학생대회 주최, 호세 마르티 인민대학 설립
1924아바나 공산주의 그룹 가입, 반제국주의 동맹 쿠바 지부 결성
1925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쿠바 공산당 창당 — 중앙위원; 체포 후 18일 단식투쟁
1926대학 제적, 당에서 2년간 제명 — 온두라스·과테말라 거쳐 멕시코시티로 망명
1926–1927쿠바 혁명적 망명자 협회(ANERC) 창립 — 『쿠바 리브레』 등에 기고
1927브뤼셀 식민지 억압 반대 세계대회 참석 — 모스크바에서 국제노조인터내셔널 4차 대회 참관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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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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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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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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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1966년, 드골의 노보시비르스크 미사일 사단 시찰 중 브레즈네프의 신호에 지하 사일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불쑥 솟아올랐다. "파리도 겨냥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브레즈네프는 연기나는 발사대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16세에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한 크릴로프는 내전부터 만주 작전까지 소련의 모든 주요 분쟁을 관통한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추이코프의 제62군 참모장으로서 시가전을 지휘했고, 바그라티온 작전과 만주 공세에서 제5군을 이끌어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원수로 진급한 뒤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에 올라, 쿠바 위기 이후 열세였던 소련 핵전력을 지하 사일로 기반의 전투태세를 갖춘 군종으로 탈바꿈시켰다. 9년간의 재임기는 전략로켓군의 창설기이자 가장 집중적인 성장기로서, 소련 핵 3축의 한 기둥을 완성한 시기였다.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천이와 함께 화둥 당을 이끌다 1953년 중앙조직부장으로 베이징에 갔다. 1954년 가오강과 함께 숙청되고 1955년 당적이 박탈되었으며, 1975년 구금 중 사망했고 복권되지 않았다.
장시 출신으로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기 화둥국 서기로 천이와 함께 화둥을 관할했다. 건국 후 화둥 군정위원회 주석과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다. 1953년 가오강과 함께 류사오치·저우언라이를 밀어내려 했다는 이유로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비판받고 1955년 체포되었다.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가오강과 달리 공식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8년 8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최종 결정한 정치국 회의에서 그레치코는 '이 침공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더라도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병대 사병으로 남북전쟁에 뛰어든 후 정규 군사교육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카프카스 방어·키예프 해방·프라하 진격을 지휘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1967년 소련 국방장관에 올라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사상 최대 규모의 재래식 증강을 주도했으며, 19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한 핵심 책임자였다. 1973년에는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도화했다.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1942년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 교두보. 플리예프의 기병군단 병사들이 돈 전선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쳤다. 독일 6군 33만 명을 가둔 포위환이 처음으로 닫힌 순간이었다.
북오세티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소련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에서 도바토르 휘하 모스크바 방어전을 시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그의 부대가 독일 6군 포위를 최초로 완성했고, 이후 기계화기병집단을 이끌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종심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만주에서는 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을 지휘해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붉은군대에서 유일하게 기병 장군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핵전쟁 직전의 긴장을 직접 관리했고, 같은 해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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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1937년 6월 20일, ANT-25기가 밴쿠버의 피어슨 비행장에 착륙하자 미군 장교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치칼로프가 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1930년대 소비에트 항공력의 상징.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I-15, I-16 전투기를 시험하며 상승 스핀과 슬로 배럴 롤이라는 새 곡예비행 기동을 창안했다. 1936년 모스크바-우드 섬 9,374km 무착륙 비행으로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같은 ANT-25기로 모스크바-북극-밴쿠버(미국) 8,811km를 63시간 만에 횡단하며 북극 항로를 개척했다. 스탈린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올 만큼 대중적 영웅이 되었으나, 1938년 12월 서둘러 추진된 I-180 전투기 초도비행에서 엔진 정지로 추락해 34세로 사망했다.
1940년 옌안으로 돌아온 뒤 서기처와 조직부에서 일했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혀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 서열에 올랐다. 1950년 10월 2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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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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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소련 대표가 서명할 차례입니다"라는 맥아더의 말에 데레뱐코 중장이 걸어나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3분간의 의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소련의 군사정보 장교이자 중장으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소련 대표로 서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 종결에 참여했다. 독소전 기간에는 제53군, 제57군, 제4근위군의 참모장으로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셰브첸코 작전,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부다페스트와 빈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종전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시찰한 최초의 소련 관료로서 원자폭탄 피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소련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와 GRU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시찰 당시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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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붉은 군대 입대
1924제2키예프 붉은감제관학교 졸업, 제297보병연대 배속
1933–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방학부에서 영어·일본어 전공
1936–1938적군 정보총국(GRU) 근무, 스페인 내전 파견, 중국군 비밀 무기지원 작전 수행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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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첫 소련 원자탄의 이름을 정할 때 마흐뇨프는 'РД'(반응 엔진)에 이니셜 'С'를 덧붙여 'РДС', 곧 '스탈린의 반응 엔진'이 되게 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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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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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둡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이자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에 이은 두 번째 항공 총원수였다. 1919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해 제59소총연대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1924년 10월부터 OGPU에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아에로플로트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비행 조종사로 불렸다. 1942년 2월부터 스타프카 직속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했고, 1944년 12월 ADD가 제18항공군으로 재편되자 그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해임되었다. 1952년 공수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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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1943.08항공원수 진급, 붉은 군대 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
1944.08항공 총원수 진급
1944.12–1946.04제18항공군 사령관 (1944년 12월 6일 ADD에서 재편)
1946.04–1948.05소련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1948년 5월 해임
1948–1950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수학 (금메달 졸업)
1952–1953공수군단장 (TASS·«로디나»는 프스코프의 제15근위공수군단,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제37근위공수군단으로 기록)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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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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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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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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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소피 여사의 일기』에서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까지, 옌안과 반우파 투쟁을 모두 겪은 작가
1904년 10월 12일 후난 린리에서 태어나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이름을 얻고, 반우파 투쟁이던 1958년 당에서 제명되어 1986년 3월 4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난 출신으로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신여성의 내면을 그려 이름을 얻었고, 남편 후예핀이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입당했다. 1936년 산베이의 홍군 지역에 도착해 마오의 환영을 받았으나 1942년 「3·8절 유감」으로 옌안의 성차별을 지적해 정풍운동에서 비판받았다. 토지개혁을 그린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로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로 몰려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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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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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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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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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1939년, 어제까지 온 나라가 이름만으로 떨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가 심문 조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서를 쓰는 손은 에사울로프의 것이었다.
베리야의 수사선에서 몰락한 예조프의 자백을 받아내며 두각을 드러낸 NKVD 수사관. 뱌트카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어 일터로 나갔고, 로도스와 함께 베리야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까지 올랐으나 1954년 자연사하여 흐루쇼프 시기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트빌리시 처형장에서 사비츠키와 NKVD 간부들은 '사슬에 묶인 개처럼 죄수들에게 달려들어 권총 손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1954년 목격자 증언.
타슈켄트 출신의 NKVD 장교로, 차르 군대 대령이자 백위대 조직가의 아들이었다. 1931년 그루지야 NKVD에 들어가 보그단 코불로프의 후원 아래 빠르게 승진했으며, 대숙청기에는 제4부에서 수감자 고문과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로 전속되어 NKGB 서기국, 대외재산관리국을 거치며 베리야 파벌의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다. 대령 계급에 그쳤으나 1953년 베리야 몰락 직후 체포되어 2년 뒤 총살형을 받았다.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5월, 충칭 주재 파뉴시킨 휘하 정보거점이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는 개전 약 한 달 반 전에 전달된, 침공 주공 방향에 관한 정보였다.
1905년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했고, 1927년 당에 입당한 뒤 극동 국경부대에서 복무했다. 1938년 NKVD에 배치되어 제3특별부장을 지냈으며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으로 최대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고, 1941년 5월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워싱턴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을 지냈고, 1953년 내무부 대외정보국장, 1954년부터 1955년까지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외정보를 총괄했다.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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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2붉은군대 자원입대, 말라리아로 제대 후 사마라 철도에서 수리공으로 일함
1927–1935극동 국경부대 복무, 초소장 보좌에서 국경구역 사령관까지 진급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NKVD 배치
1938–1939NKVD 제3특별부장 (1938년 12월 23일 임명, 예조프 체포에 참여)
1939–1944주중 소련 전권대표 겸 정보총책 (충칭)
1944–1947중앙위원회 국제정보부 제1부장
1947각료회의 정보위원회 주임비서
1947–1952주미 소련 대사 겸 정보총책 (워싱턴)
1952–1953주중 소련 대사 (베이징)
1953–1954내무부 제2총국(대외정보) 국장
1954–1955K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1954년 3월 17일~1955년 6월 23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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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파블리토는 망설임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선두 전차 장갑 위로 올라타 해치를 두드리며 방향을 바꾸라고 외쳤다. 그가 지휘소로 돌아왔을 때, 외투에는 총알과 파편 구멍이 열 개도 넘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도제로 일하던 로딤체프는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자원하여 스페인 내전에 '파블리토 대위'라는 가명으로 참전, 공화파 편에서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여 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9월 13근위소총사단을 이끌고 맹렬한 포화 속에서 볼가 강을 도하,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을 탈환하여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 32근위소총군단장으로 쿠르스크·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지휘하며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여러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역임하고 회고록 여러 권을 남겼다.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반파시즘 연대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경험했다.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작가·번역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스페인으로 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코군에 속한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이며 스페인의 반파시즘과 아랍인의 해방 문제를 연결했다. 이후 언론과 문학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랍인 참가자의 시각에서 스페인 내전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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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예루살렘에서 영국 위임통치 당국 체신부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노동자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접촉,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
1925–1928팔레스타인 공산당 지도부의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수학하고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1930예루살렘에서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지하 신문 『일랄-아맘』 편집에 참여했다.
1931–1933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야파·아크레 감옥에서 2년형을 복역하고 석방 후 6개월간 경찰 감시를 받았다.
1933–1936코민테른의 파견으로 파리에서 아랍어 월간지 『알-샤르크 알-아라비』를 편집했으나 프랑스 당국의 폐간 조치를 당했다.
1935–1936타슈켄트에서 소련의 민족 문제 경험을 연구한 뒤 1936년 8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37–1939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옮겨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에 글을 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비판한 이유로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1939–1948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국 당국이 운영하는 근동방송에서 일하면서 문학 활동에 집중했고, 카이로에서 푸시킨(1945)과 체호프(1947)를 출간했다.
1948–19761948년 팔레스타인인 대이주 이후 방송국을 따라 키프로스 리마솔로 옮겨 1950년까지 살았고, 이후 베이루트에서 언론·번역·문학 비평 활동을 이어갔다.
1976–1979딸이 살던 그리스 아테네로 옮겼고 1979년 그곳에서 사망해 아테네에 안장되었다.
레오니트 네메노프는 핵물리학과 입자가속기 기술을 연구한 소비에트 물리학자였다. 그는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들어가 피지테흐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을 회수했고, 실험실 2에서 1944년 가동한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끌었다. 이 장치는 최초의 미량 플루토늄을 얻어 화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분할령 갈리시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부터 배관공으로 일했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3년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로 밀려나 1951~1954년 옥살이를 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10월 20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소련군의 진격에는 저항하되 동맹은 유지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소련이 물러섰다. 1967~68년 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노선은 끝났고, 1970년 12월 가격 인상에 항의한 그단스크·그디니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군대의 발포를 명령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보고한 전시 GRU 수장, 전략정보로 소련의 승리를 뒷받침한 정찰총국장
한밤 3시, 스탈린의 직통 전화가 울렸다. 손자들이 책상 위 연필을 모두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몇 분 동안 이어진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받아 적어야 했다.
소련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1942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이르는 모든 주요 작전의 정보 지원을 총괄했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과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1938년 정보기관에 투입되었고,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이력을 지닌 채 33세에 스탈린의 직접 면접을 받았다. GRU 수장으로서 베리야를 거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통 보고했으며, 해독반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가능성 발견(1942)과 클라우스 푹스를 통한 원자폭탄 정보 입수 등 전략정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오스트리아·주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우리 각자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쓴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당과 인민의 것이다.” 소비에트 작가 제2차 전연합 대회 연설(1954)에서.
러시아 제국 돈 지방의 비코사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로, 1925년부터 1940년까지 네 권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은 혁명과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어 놓은 10여 년을 그려 냈다. 1932년 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고발해 곡물 지원과 조사를 이끌어 냈고, 1937~1938년 대숙청기에도 탄원으로 지역 간부들을 구해 냈다. 충성스러운 당원으로서 1932년 입당해 1937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으나, 1966년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갈라섰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84년 뵤셴스카야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
스탈린은 1943년 8월 2~5일 전선 후방 시찰의 준비와 안전을 세로프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세로프는 그와 사흘을 함께했고, 이는 전시 스탈린이 수도에서 가장 멀리 나간 행차였다. 스탈린은 정치국에도 알리지 않았고, 세로프는 이를 일기에 남겼다.
1905년 볼로그다 주 농가에서 태어났다. 표준 인사기록은 민족을 러시아인으로 적었고 출생일은 8월 25·26일, 사망일은 7월 1일로 전한다. 1939년 NKVD 중앙기구에 들어가 우크라이나 인민위원과 부인민위원을 지내며 서우크라이나 병합과 1944년 북캅카스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베를린 함락과 독일 항복 조인식에 참여했고,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초대 KGB 의장이 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범 재활성화에 착수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현장에서 진압했고,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해임돼 계급과 영웅칭호를 잃었으며 1965년 제명됐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이자 친중파 원로로, 1979년 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한 정치국원 출신 정치가
1979년 중월전쟁 뒤 카라치에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하고 소련에 굴종한다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응에안 성 출신의 혁명가로 호찌민과 함께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50~1957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를 지내며 두 나라를 잇는 핵심 통로였고, 1956~1976년 정치국원, 1958~1979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중소분열 때 북베트남이 잠시 중국 쪽으로 기운 1960년대 초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밀려났다. 1979년 7월 동독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던 중 카라치에서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 영사관으로 피신해 베이징으로 갔고, 8월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했다. 1991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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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호찌민과 함께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을 도왔다.
1950–1957북베트남 초대 주중 대사로 재임했다.
1958–1979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국회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6–19761956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재선되었다.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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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1942년 「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한 당원으로, 제명과 투옥을 거쳐 1947년 비밀리에 처형된다. 다이칭은 이 사건을 정풍운동의 억압을 가늠하는 핵심 사례로 꼽는다.
허난 출신 번역가·작가로 1937년 옌안에 가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했다. 1942년 3월 『해방일보』에 실은 잡문 「야생 백합」에서 간부의 식사·의복 등급과 청년의 좌절을 지적했고, 곧 정풍운동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판 대회의 표적이 되었다. 1943년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1947년 국민당군의 옌안 공격으로 철수하던 중 산시성 싱현에서 처형되었다. 1991년 공안부가 트로츠키파 혐의를 공식 철회했다.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민병대 지휘관들을 평가한 한 보고서는 '도면 하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는 모데스토뿐'이라고 적었다.
후안 모데스토는 스페인 공산당의 군사 조직가에서 출발해 공화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5연대와 제5군단을 이끌며 민병대를 정규 군대로 통합하는 전쟁의 변화를 구현했다. 1938년 에브로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지휘했지만, 장기 소모전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패전 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했다.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페르신스카야 부지에 들판의 말뚝 하나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이끌어, 1943년 4월 1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1944년부터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수용소 노동력으로 특수 시설을 지었고, 체랴빈스크-40(마야크)과 콤비나트 817호를 비롯한 원자력 시설 건설을 지휘해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맡았으며, 197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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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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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마오쩌둥은 "하늘이 무너져도 키 큰 뤄가 받쳐 준다"며 그를 최측근 경호 책임자로 신임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으로 10년간 공안 체계를 세웠고, 총참모장을 지내다 1965년 말 실각했다.
쓰촨 출신 황푸 6기생으로 홍군 정치·보위 부문에서 일했고 항일군정대학 교육장이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이 되어 반혁명 진압운동과 공안 체계를 세웠고, 1959년 펑더화이 실각 뒤 총참모장으로 군을 관리했다. 정치보다 훈련을 앞세운 그는 1965년 말 린뱌오의 고발로 「군권 탈취」를 꾀했다는 비판을 받아 실각했고, 1966년 자살을 기도해 다리를 다쳤다. 1977년 복권되어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서독에서 수술 후 사망했다.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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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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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1931–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1938–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1943–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1946–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1952–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소림사에서 무술을 익힌 홍군 장군으로, 1979년 중월전쟁에서 광저우 군구를 이끌고 동부 전선을 지휘한 인물
1979년 중월전쟁에서 쉬스유는 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중국군 총사령관을 맡아 동부 전선을 지휘했다. 그의 지휘 아래 중국군은 베트남 북부의 까오방과 랑선 방면으로 진격했다.
허난 신셴 출신으로 소림사에서 8년 동안 무술을 익혔고, 「불교의 벗」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 홍군에 들어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렀고, 오랫동안 난징 군구를 이끌었다. 1974년 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옮겼고, 1976년 저우언라이 사후 4인방에게 밀려난 덩샤오핑을 정치위원 웨이궈칭과 함께 보호했다.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이끌며 까오방·랑선 방향의 동부 전선을 지휘했다. 1969~1982년 정치국원을 지냈고 1985년 난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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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홍군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4~1974난징 군구 사령관을 지냈다.
1974~1980광저우 군구 사령관으로 옮겼으며,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지휘했다.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스탈린이 말했다: '자네 생각을 말하게, 부끄러워 말게 — 자네는 젊지만 우린 자네를 믿네. 과거의 실수와 연루되지 않았으니, 우리를 항공의 수렁으로 이끈 옛 전문가들보다 객관적일 걸세.'
2차대전 소련 전투기의 3분의 2를 담당한 Yak-1·Yak-3·Yak-7·Yak-9의 설계자. '비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콥스키 사관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으나 글라이더 경연으로 돌파해 1932년 독자 설계국을 세웠다. 1940년 항공공업 부인민위원과 OKB-115 수석을 겸임: 소련 항공설계자 중 유일한 행정·설계 권력의 결합이었다. 전후 Yak-15(소련 최초 제트전투기), Yak-25(전천후 요격기), Yak-28(초음속 폭격기)에 이어 Yak-40·Yak-42 여객기까지 아우르며, 43년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스탈린상 6회·레닌상·레닌 훈장 10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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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31AVF-10 글라이더, AIR-1 경비행기 설계; 주콥스키 사관학교 졸업
1932–39항공제39공장에서 경항공기 설계국 창설; 주임설계자로 승진
1940–46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OKB-115 수석; Yak-1·Yak-7·Yak-9·Yak-3 전투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그에게는 단호한 행정가의 손길이 있었고, 건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동시대인의 평가
가죽 공장 노동자와 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으로 출발한 미하일 야스노프는 소비에트 체제가 길러낸 행정 실무자였다.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1950–1956)으로서 스탈린식 고층건물 완공, 남서부 주택단지 착공, 지하철 대순환선 개통 등 제2차 모스크바 재건계획을 진두지휘했으며, 주택 건설량을 두 배로 늘렸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85년까지 19년간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식적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방어선 구축을 지휘한 건설 전문가로서,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칠지만 확실한 행정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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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2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
1922–1928가죽 공장 노동자
1925모스크바국립대 노동자학부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1928–1930붉은 군대 복무
1930–1938모스크바 건설 신탁 관리직 역임
1938–1949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1942년부터 제1부의장), 모스크바 전투 시 방어선 구축 지휘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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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말 팜반동은 한 방문객에게 말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926년 광저우에서 호치민의 혁명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팜반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제네바 회담(1954) 북베트남 대표단장으로서 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대외적 얼굴로서 외교와 언론 대응을 주도했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수행, 통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나, 전시 동원형 경제 체제를 평화기에도 고수하여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호치민이 '또 하나의 나'라고 부를 만큼 신임한 혁명가로, 보응우옌잡·레주언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의 전 과정을 형성한 핵심 지도자였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사형선고 후 유서에 "5발의 확산탄으로 쏴 달라. 보통 총알 한 발로는 죽지 않을 테니"라고 썼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던 자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소련 MGB 대령, 국가보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수사관으로 악명 높다. 1937-38년 대숙청기 NKVD에 들어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 살해하고, 이삭 바벨과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를 심문했다. 전기 케이블로 그리고리 시테른의 눈을 적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1955년 총살형.
1935년 브로민의 방사능을 연구하던 그는 쿠르차토프 형제·미솝스키와 함께 원자핵 이성질체 현상을 발견했다.
레프 루시노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의 실험 기반을 넓힌 소련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에서 한 번의 분열마다 둘 이상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연쇄반응 조건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인공 방사성 핵의 이성질체와 중성자·감마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했으며, 전후에는 연구용 원자로 건설과 핵물리학 연구 집단의 조직을 이끌었다.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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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8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후 국영출판사 셀호즈기즈 편집자·부편집장
1938.8–11NKVD 특수목적학교 수료, 제5과 실습생 → 9분과장 → 부과장
1939–1946소련 해외정보 총책임자: GUGB NKVD 제5과장 → NKGB·NKVD·MGB 제1총국장
“우리는 우리 목숨은 걸 수 있어도 교두보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걸 수 없었다.” — 비스와 강 도하 후, 1944년
소련 가스 산업의 실질적 창설자. 1957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글라브가스를 이끌며 연중무휴 시공 기술과 1420mm 대구경 파이프라인으로 거의 10만 km에 달하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대조국전쟁에서는 629소총연대를 지휘해 비스와 강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샤임-튜멘 송유관으로 서시베리아 원유의 경제성을 입증하며 튜멘 유전 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다.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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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시테멘코는 스탈린을 수행해 매일 아침 전황을 브리핑했다. 스탈린이 연합국 수뇌들 앞에 펼쳐 보인 작전지도는 시테멘코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르게이 시테멘코는 스탈린 시기 소련군 작전기획의 핵심이자 최연소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엘리트였다. 돈 카자크 출신으로 1926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포병·기갑 장교를 거쳐 참모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중 작전총국장으로서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의 구체적 기획을 주도했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을 수행했다. 1948년 41세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52년 경질되고 베리야 연루로 강등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으로 복귀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고, 회고록 『전쟁 시기 참모본부』는 소련 군사사의 고전이다.
전후 11년간 내무기관을 이끌다 해임·박탈·제명을 겪은 크루글로프는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는데,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사인은 사고·자살·심장마비설로 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일하다 동양학을 공부한 크루글로프는 1938년 베리야 취임 뒤 국가보안 기관에 들어갔다. 1945년 12월 내무인민위원, 1946년 3월 내무장관이 되어 굴라그를 최대 규모로 운영했고, 1944~1945년 체첸인·인구시인 강제이주를 조직한 주요 책임자였다. 1953년 베리야 체포 이후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KGB 창설을 주도했으나, 1956년 초 해임되고 1959년 장성 연금과 전용 아파트를 박탈당했으며 1960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으나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갈리고 사인도 사고·자살·심장마비 등으로 엇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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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38당 조직인사부(ORPO) 책임조직원, 이후 NKVD 특별전권대표로 발탁
1939–1941NKVD 인사 담당 부인민위원 겸 간부국장
1941–1945NKVD 제1부인민위원, 전쟁 중 방어선 건설과 군사평의회 활동
1945.12–1946.3마지막 NKVD 내무인민위원
1946–1953MVD 내무장관: 굴라그 최대 규모, 원폭 건설, 민족 강제이주
1953.3–6베리야의 제1차관, 이후 베리야 체포에 가담
1953.6–1956.1재임명된 MVD 장관, KGB 분리 창설 주도
1956–1977좌천과 퇴직, 연금·주택 박탈, 당 제명, 1977년 기차 사망(사인 미확정)
1953년 3월, 베리야가 항공공업성을 국방공업성에 통합하면서 데멘티예프는 자리를 잃었다. 8월 베리야가 체포되자마자 그는 항공공업 장관으로 복귀했고, 이후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휘했다.
추바시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소련 항공공업을 거의 24년간(1953~1977) 이끈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전투기 대량 생산을 총괄했고, 종전 후 장관으로서 MiG 전투기에서 Tu-144 초음속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용·민간 항공기 생산 전반을 지휘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에 걸쳐 항공산업을 관장한 유일한 인물로,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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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27공장 노동자, 심비르스크 직업기술학교 졸업
1927–1931모스크바 기계연구소 →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1931–1934민간항공함대 연구소 선임기사·운용기술부장
1934–1941모스크바 제81·제1항공공장 작업반장 → 주임기사 → 공장장
1941–1953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제1부장관) — 전시 항공기 대량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1)
1953–1977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Tu-144·Il-76·Il-86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 재수훈(1977)
1954년 2월, 고르셰닌은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사형·유형·수용된 자의 정확한 숫자를 담은 증명서를 올렸다. 스탈린 사후 처음 나온 그 숫자는 해빙기 복권의 출발점이었다.
알라티리의 철도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법 연구소를 졸업하고 노동법 학자로 출발했다.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하는 한편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준비를 주도했다. 1948~1956년 소련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 제도 정비를 이끌었고, 1954년 2월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대숙청 희생자 통계를 담은 공식 증명서를 제출했으며, 1956년 주코프·루덴코와 함께 옛 포로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앙위원회 결의를 공동 발의했다. 법무부 폐지 후에는 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으로 학계에 복귀하여 소비에트 노동법전 편찬 작업에 헌신했다.
콘스탄틴 루네프는 섬유 노동자 출신의 당 관료로, 전후 모스크바 당 조직에서 경력을 쌓은 뒤 국가보안기구의 고위직으로 이동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 뒤 내무부 제1차관이 된 그는 전임 수장을 심리한 특별재판소에 내무부 대표로 참여했다. 이 역할은 내무부가 당의 정치적 결정에 복속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당 인사가 강압적 국가기구의 운영을 맡은 체제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후 KGB 제1부의장과 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대행을 지냈으나,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알렉산드르 부시긴은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대장장이로서 생산성 향상 방법을 현장에 도입하고 노동자 집단의 조직을 이끈 소련의 대표적 생산 노동자였다. 1935년 그의 작업반은 교대 한 번에 규정량 675개를 크게 웃도는 크랭크축 966개와 1001개를 단조해, 스타하노프 운동이 기계공업으로 확산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전쟁과 전후에도 공장 관리와 노동자 교육에 참여했으며, 노동 영웅의 성취가 개인의 숙련뿐 아니라 작업장 조직과 국가적 동원에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우리 당은 혁명의 첫날부터 베트남 인민의 전체 투쟁을 조직하고 통제한 유일한 지도자다.” — 1976년 통일 승리 연설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이론가.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프랑스 식민 감옥을 두 번 거친 후 호치민의 신임을 얻어 남부 조직을 책임졌다. 1956년 〈남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여 남베트남 무장해방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되어 호치민 사후(1969)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친소 노선 아래 중월전쟁(1979)을 겪으면서도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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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1931–1945두 차례 투옥 — 8월 혁명으로 석방, 호치민의 신임 획득
1951–1954남부 중앙사무국장 — 항불전쟁 남부 전선 지휘
1956〈남으로 가는 길〉 집필 — 남부 무장투쟁의 이론적 토대 마련
1960–1969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대미 전쟁의 실질적 최고지휘관
1969–1986당 최고지도자 — 통일(1975), 캄보디아 침공(1978), 중월전쟁(1979)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그의 혁명 가명 '쯔엉찐'은 '장정(長征)'을 뜻하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바치는 의도적 경의였다 — 이 이름 하나로 그가 당의 친중 이론가임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수석 이론가. 1928년 혁명청년동맹에 가입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0년 서기장에 선출되어 8월 혁명과 항불전쟁 시기 당을 이끌었다. 1953–1956년 토지개혁을 주도하여 대규모 과잉 숙청을 초래했고 그 책임으로 서기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국회 상임위원장(1960–1981)과 국가주석(1981–1987)을 지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1986년 레주언 사후 다시 서기장에 올라 도이머이 개혁 노선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다.
베리야에게 밤마다 전화로 공장 상황을 보고할 때면, 차관임에도 전화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소련의 중공업 행정가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산업과 민간 중공업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레닌그라드의 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책임자까지 오른 현장형 기술관료였으며, 1940년대에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직접 지휘 아래 노보크라마토르스크 중기계공장(NKMZ)의 방산 생산을 현장에서 감독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64~1986)과 최고회의 대의원(6~10기)을 지냈고,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장기 집권은 소련 군산복합체가 당-국가 체제 안에서 제도화된 안정적 관리 구조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러시아인은 곰이 아니라 코끼리다. 우리는 기억이 길기 때문이다.” —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보이콧 위협에 답하며.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21년간 소련의 건설·에너지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 관료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동창.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위기 속에서 대회를 성사시켰으나,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주도로 1983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6월 20일, 북극 상공에서 치칼로프가 저산소증으로 코피를 흘리자 바이두코프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 13시간을 홀로 비행해 ANT-25기를 밴쿠버 피어슨 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의 시험비행사, 군사 지휘관, 그리고 소비에트 훈장 최다 수훈자(21개). 1936년과 1937년 발레리 치칼로프의 ANT-25기 부조종사로서 모스크바–우드 섬 및 모스크바–북극–밴쿠버 무착륙 비행에 참여해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항공사단과 항공군단을 지휘했고, 전후 민간항공단 총국장(1947–1949)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국방부 제4총국장으로서 방공군(PVO)의 무기 조달을 총괄하며 소련 방공무기 체계 건설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작가동맹 회원으로 치칼로프 전기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까지 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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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8레닌그라드 군사항공이론학교·카차 군사비행학교 수료, 전투기 조종사
1931–1934NII VVS 시험비행사, 계기비행 방식 개발 참여
1935–1937ANT-25기 부조종사 — 모스크바–우드 섬(1936)·모스크바–북극–밴쿠버(1937)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 연방영웅
1941–1945제4근위돌격항공사단장, 제4돌격항공군단장 — 모스크바·르제프·베를린 작전 참가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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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1954년, 예고로프는 로켓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수상함과 잠수함에 미사일 무장을 배치하는 원칙을 공동 개발했다 — 소련 해군을 미사일-핵 해양함대로 탈바꿈시킨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군사·국가 지도자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조선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대양함대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930년 해군 공병학교 졸업 후 연구기관에서 선박의 항해성능을 연구했고, 1939년 조선공업인민위원회 제13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전시에는 설계국 재배치와 함정 재무장을 진두지휘했다. 1954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수상함·잠수함 미사일 탑재 원칙을 공동 수립했으며, 첫 원자력 쇄빙선 '레닌'과 중항공순양함 개발을 주관했다. 장관 재임 8년 동안 전략원잠 941형, 원자력 미사일순양함 1144형, 항공순양함 '바쿠' 등을 진수시켜 소련의 해군 전략적 균형을 확보했고, 상선톤수도 세계 3위로 끌어올렸다.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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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49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과 외교관 양성 학교를 나와 193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들어갔다.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 뉴욕 총영사, 오스트리아 주재 정치대표를 거쳐 1949~54년 헝가리 대사를 지냈다. 라코시가 스탈린과의 비밀 대화를 알려 주지 않아 곤란을 겪었고, 헝가리의 생활수준·탄압·지식인 동향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스탈린 사후 몰로토프는 1953년 6월 회담을 준비하며 그의 보고를 검토했다. 이후 이집트 대사, 유엔 사무차장을 지냈다.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세쿠리타테를 세운 첫 공산당 내무장관, 파우케르·루카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1952년 함께 숙청되다
1952년 5월 전원회의는 제오르제스쿠에게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를 물어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냈다. 세쿠리타테를 만든 사람이 이듬해 2월 그 세쿠리타테에 체포되었다.
부쿠레슈티 근교 키틸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했고, 192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들어가 인쇄 노조에서 활동했다. 1941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카란세베시 감옥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4년 8월 석방되어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5년 3월 그로자 정부의 내무장관에 올라 1952년까지 경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1946년 총선의 조작, 1947년 마니우 등 국민농민당 지도부의 체포와 재판, 1948년 세쿠리타테 창설과 무장 저항의 진압을 지휘했다. 당내에서는 아나 파우케르·바실레 루카와 가까워 「모스크바파」의 세 번째 인물로 꼽혔고, 1952년 5월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목으로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6년 풀려났고 당적을 잃은 뒤 인쇄소 책임자로 일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가 데지 시대 숙청을 재심하면서 복권되었고 1976년 부쿠레슈티에서 죽었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정치국에서 조사위원회가 빈 공장 사진을 내밀자, 우스티노프는 위원회가 떠난 다음 날 직접 찍은 가동 중인 공장 사진으로 맞섰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계 설계를 전공한 기술자로, 1941년 6월 병기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독소전쟁 중 레닌그라드 방위산업의 우랄 대피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독일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흡수해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57년 각료회의 부의장, 1965년 중앙위 서기로 군수공업 전반을 맡았다. 1976년 그레치코 사망 후 국방장관에 올라 트로츠키 이래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소련 원수로 진급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을 정치국에서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 중 하나였고, 1984년 12월 20일 폐렴과 심장마비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 — 스탈린 시기 실패와 탄압에 대한 모든 언급을 봉쇄하며.
소련군·해군 총정치국(GlavPUR)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이끈 최장수 국장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사상적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흐루쇼프가 군부에 대한 당 우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파격 승진시켜 기용했으며, 이후 글라브푸르를 CPSU 중앙위원회 부서처럼 운용하며 국방장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정치장교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공개 시사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카불을 방문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이라는 그의 말은 체제 정통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억압한 독단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1964년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며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리센코 동지를 더러운 중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농학자·육종학자로, 목화 품종 개량 연구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한 후 소비에트 농업과학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0년간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부총재로 재직하다가 1960년 말 흐루쇼프에 의해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농업 위기 속에서 물러나 VASKhNIL 총재로 복귀했다. 트로핌 리센코의 가장 충실한 동료 중 한 명으로, 1964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리센코 비판에 맞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리센코를 '위대한 과학자'로 옹호했다.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모스크바 근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한 항공 엔지니어다. 전시에는 항공공장 주임기사와 공장장으로 전선 수리 임무를 수행했고, 1947년 항공공업 차관에 올랐으나 베리야의 항공산업 분할 구상에 반대했다가 좌천되어 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으로 옮겼다. 1963년부터 21년간 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을 맡아 GOST 표준 체계를 현대화하고 전연방 계측·품질관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1977~1979년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으로서 ISO 9000 시리즈의 착수를 권고해 오늘날 전 세계 170개국에서 사용되는 품질경영 표준의 단초를 열었다.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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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명사(明史) 연구자이자 베이징 부시장, 역사극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명대사를 연구한 중국의 역사학자로 1949년 이후 베이징시 부시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역사극 『해서파관』이 마오를 겨냥한 우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했고 그 여파로 펑전도 숙청되었다.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저장 출신으로 후스의 제자였던 명대사 연구자였고 1940년대 민주동맹의 활동가였다. 건국 후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문화·교육을 맡았다. 1961년 마오의 권유로 쓴 역사극 『해서파관』은 청렴한 관리 해서가 황제에게 파면되는 이야기였는데,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이를 펑더화이 실각을 옹호하는 「독초」라 비판한 글이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체포되어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고 아내와 딸도 박해로 죽었다. 1979년 복권되었다.
1941년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밀은 특수구조부 기록보관소를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년간 쌓아온 연구 자료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그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몰래 빼내 탈출 행렬에 실었다. 훗날 그 자료들은 소련 헬리콥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소련 헬리콥터 산업의 창시자. 이르쿠츠크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ЦАГИ에서 카모프의 조수로 오토자이로를 연구했고, 1947년 독자 설계국을 세워 Mi-1을 탄생시켰다. Mi-4, Mi-6, Mi-8, Mi-10, Mi-12, Mi-24를 연달아 개발하며 60개 세계기록을 수립했고, Mi-8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쌍발 헬리콥터가 되었다. 단일 로터 방식으로 카모프의 동축 반전 로터와 경쟁하며 소련 헬리콥터의 주류를 장악했고, 시코르스키의 아들로부터 중량물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 세 차례 레닌 훈장을 받고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Mi-24는 100개국 이상에서 운용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싸운 헬리콥터'가 되었다.
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1963년 해임을 둘러싼 경위는 증언마다 엇갈린다. 측근들은 그가 술기운에 흐루쇼프에게 전화해 욕설을 들었다고 하고, 경호원의 증언은 다차 산책길의 대면 충돌에서 그가 모자를 벗어 던졌다고 전한다.
볼로그다현 로파리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7년제 학교를 마치고 1923~1929년 회계원으로, 1929~1930년 클럽 관리자와 촌소비에트 의장으로 일했으며, 1936년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1937년 당에 입당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들을 맡아 1953년 소련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고, 1959년 은행체계 개편과 1961년 10:1 화폐개혁을 이끌었다. 1963년 흐루쇼프와의 갈등 끝에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 탄압은 받지 않았고,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국가수입·산업금융 국장과 콜레기움 위원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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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1936–1939레닌그라드 주·시 공동은행 선임검사관, 부행장, 행장
1939–1940레닌그라드 시 재정국장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1950–1955소련 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1953–1958소련 재무차관, 재무부 콜레기움 위원
1958–1963소련 국가은행 총재(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내무장관이던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이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티토·카르델리에 이은 제3의 권력자로 여겨졌다. 1944년 5월 파르티잔 보안기구 오즈나를 창설했고, 전후 내무장관 겸 국가보안국(우드바) 수장으로서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해 1949년 골리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에 코민포름주의자 수용소를 세웠다. 코소보에서는 1947~1966년이 '란코비치 시대'로 불릴 만큼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경 진압이 자행되었고, 보이보디나 헝가리계와 산자크 무슬림에 대한 소규모 탄압도 있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을 고수했으며, 1966년 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된 뒤 두브로브니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사망했다.
그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소련·러시아 대외정보 역사상 가장 긴 재임이었다. 1955년 6월 대행으로 시작해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했고 1971년 7월 후임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 기록은 그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문서적 핵심이다.
1909년 9월 3일 코스트로마주 갈리치 예즈드 볼쇼예 오조기노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83년 11월 12일 사망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닌그라드 조선소에서 용접공·선체 표시공으로 일하다 1930년 2월 당에 입당했고, 1939년 2월 국가보안기관에 들어가 레닌그라드 NKVD 수상부서를 거쳐 1940년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 신분으로 해외 정찰 활동을 했다. 전쟁 중 레닌그라드 NKVD/NKGB 제1(정찰)과장으로 정찰·파괴 공작조를 적 후방에 투입했고, 1946년부터 MGB 중앙기구와 루마니아 고문으로 근무했다. 1955년 6월 KGB 제1총국장 대행,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해 1971년 7월까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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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31발트 조선소 및 북부 조선소 용접공·선체 표시공
1931–1934적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대학 야간 코무즈 졸업
1934–1939콤소몰·당 정치활동가, 발트해운회사 당위원회 서기
1939–1941NKVD 레닌그라드국 수상부서 근무, 해외 정찰 임무
1941–1945NKVD/NKGB 레닌그라드국 제1(정찰)과장, 40여 개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
1946–1952MGB 중앙기구, 스칸디나비아·발칸·중동 임무,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고문
1952–1955KGB 제1총국 부국장(1954년부터)·제1부국장(1955년 8월부터)
1955–1971KGB 제1총국장 대행(1955년 6월부터), 1956년 5월 총국장 취임, 1971년 7월까지 재임
모스크바 항공대학 출신으로 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을 거쳐 소련 최초 전자식 고속 계산기계 개발을 지휘, 1954년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1956년 계기제조·자동화부 초대 장관, 이후 우크라이나와 연방 고스플란에서 계획경제 실무를 쌓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1962~1977)를 지냈다. 흐루쇼프·코시긴·티호노프 3대 정부에 걸쳐 소련 블록 대외경제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쇼킨은 즐겨 말했다. "포드 사는 '포드' 자동차를 만든다. 그러니 MEP(전자공업부)는 '엘렉트로니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전자산업의 창설자로, 1961년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토대를 닦았다. 그가 구상한 젤레노그라드는 '소련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으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방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중앙계획경제를 굳게 믿은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시장화를 막았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을 열렬히 주장했다.
후베이 목수 출신으로 제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서로군 궤멸 뒤 살아남았다. 항일전쟁기 후베이의 신4군 제5사단을 세웠고 국공내전 초기 중원 돌파를 이끌었다. 1954년부터 재정부장으로 22년간 경제 운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에서도 저우언라이 곁에서 살아남았다. 1976년 4인방 체포에 참여했고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 사이에서 천윈과 함께 계획경제 우선을 주장했다.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1989년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1963년 3월 18일, KGB 대장 이바슈틴은 비류조프 원수로부터 GRU 간부들에게 새 국장으로 소개되었다. 펜콥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온 KGB 요원 —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24년을 더 있었다.
항공 조종사로 출발해 NKVD 방첩대로 옮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 SMERSH 방첩국장을 맡았다. 1956년 KGB 제1부의장이 되었고 1961년 11월 KGB 의장 대행을 지냈다. 1963년 펜콥스키 배신 사건 이후 GRU 국장으로 전격 기용되어 24년간 재임하며 실시간 위협경보 지휘소, 쿠바 루르데스 기술첩보 기지, 우주정찰 부서를 구축했다. 냉전기 소련 군사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1985년 영웅소비에트연방 칭호를 받았다.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실시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22킬로톤)에 참가했다.
소련의 국가보안 간부이자 중장으로, 스탈린 대숙청을 실제로 조직한 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베리야 측근이었다. 코노토프의 기계공장에서 자물쇠공으로 일하다 1931년 사마라 에너지 연구소에 들어갔고, 1932년 3월 당 중앙 결정으로 국가보안 기관에 배치되어 OGPU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1년 2월 NKVD 분리 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이 되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원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을 조직했다. 1953년 3월 베리야에 의해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진압을 주장한 주 내무부장들을 해임했고, 6월 30일 키예프에서 체포되어 12월 23일 처형됐으며 2000년 재활이 거부되고 형량이 징역 25년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이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측근들이 자샤트코의 음주벽을 문제 삼자 스탈린은 그를 불러 보드카 세 잔을 권했다. 자샤트코는 두 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는 정중히 사양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샤트코는 분수를 안다!" 임명은 결정되었다.
소련의 탄광 기술자이자 경제 관료. 돈바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광산기계공에서 시작해 38세에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고, 전후 돈바스 탄광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흐루쇼프 시기에는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고스플란 체계와 나란히 중앙계획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다.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은 중공업 행정의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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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5루간스크·고를롭카·노보샤흐틴스크에서 견습공과 기계공으로 일하며 돈바스 탄광에 입문, 도네츠크 광산대학 졸업
1935–193910bis 탄광에서 기사장·주임기사·광장으로 승진하며 현장 경영 두각
1939–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에서 '스탈린우골'·'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 콤비나트 장으로 전시 탄광 운영
1943–1948석탄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돈바스 탄광 복구 총괄, 5년 만에 전쟁 전 생산량 회복 달성
1948–1955소련 석탄공업장관 ― 전후 석탄 산업 전반을 지휘하며 거대 신규 탄광 건설과 기계화 추진
1955–1957체랴빈스크우골 콤비나트 장, 우크라이나 석탄공업장관으로 복귀해 생산 반등 주도
1957–1958국가계획위원회 연료공업 부문장(장관급) 겸 부의장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 ― 중앙계획의 최고위 조정자
1962년 5월 24일, 제네바 프레니 구릉. 쿠라쇼프는 WHO 신청사 기공식에서 흙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세워질 건물은 모든 인류가 언젠가 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자 초점이 될 것입니다」
철도 전철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 31세에 카잔 의학원 원장을 맡았고, 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을 거쳐 1959년 소련 보건장관에 올랐다. 흐루쇼프 집권기 소비에트 보건의료 체계를 확장하고 의학교육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기 과학잡지 《즈도로비예》(건강)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62년 제네바에서 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WHO 본부 신축 기공식에서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재임기 소련은 WHO 두창 박멸 계획을 적극 후원했으며, 1959–1960년 모스크바 두창 유입 사태 당시 KGB와 협력한 신속한 봉쇄·접종 작전으로 질병 확산을 차단했다.
1962년 11월 19~23일 CPSU 중앙위 전원회의가 당 조직을 산업계열과 농업계열로 분할했고, 루다코프는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어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다.
1910년 9월 11일(구력 8월 29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폴로히(현재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서 태어나 1966년 7월 10일 모스크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1925년 콤소몰에, 1931년 당에 입당했고 1927년부터 도네츠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 1937년 레닌그라드 광산연구소를 졸업했다. 1954년 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이 되었고 1962년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며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64년 11월 분할 개혁이 폐기된 뒤에도 사망 시까지 서기직과 중공업부장직을 유지했다. 공식 인사록과 러시아 측 사료는 그를 러시아인으로 적는 한편, 우크라이나 위키백과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산당 인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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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36도네츠 탄광 광부
1936–1938우크라이나 콤소몰 기구에서 활동
1938–194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원, 석탄공업부 차장·부장(1938년 7월부터 흐루쇼프 제1서기 보좌)
1942–1944CPSU 중앙위 기구 근무
1944–195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보, 석탄공업부장, 중공업부장, 당·노조·콤소몰기관부장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티토주의의 핵심 이론가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주요 설계자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는 질라스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 환상'을 신랄히 비판했으며, 전후 혁명적 기회를 놓친 서유럽 공산당의 기회주의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에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구별되는 분권적 자주관리 모델을 이론화했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헌법의 초안을 주도하며 공화국 간 자율성을 대폭 확대했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인물로 남았으며, 그의 헌법 사상은 연방 해체 후에도 후속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흔적을 남겼다.
덩화는 중국공산당 혁명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민해방군 장군이었다. 1950년에는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훈련을 맡아 압록강을 건널 부대를 실제로 준비했고, 조선전쟁에서 펑더화이의 제1부사령관으로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 1952년부터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하며 전선의 작전과 정전 국면을 이끌었다. 훗날 펑더화이와의 연좌로 실각했지만 1980년 명예를 회복했다.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방위산업부장 회의에서 어떤 장관이 계획 지연을 설명하려 하자, 세르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미사일이다.'
소련 군산복합체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당 기구의 수장이었다. 1958년부터 1981년 사망까지 CPSU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장으로 재임하며 모든 미사일·항공·핵·우주 개발 프로그램의 당적 감독을 관장했고, 군수공업위원회(VPK)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서 각 방위산업 부처 간 조정과 병기 생산 계획 집행을 통제했다. 흐루쇼프 시기 전략로켓군 창설과 우주 경쟁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고,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이 미국과 전략적 동등성을 달성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실무에서 떠받쳤다. 다섯 개의 레닌 훈장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이반 뇌제(Грозный Иван)'라는 별명은 방위산업계 전체가 그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쿠이비셰프에서 우리는 흐름식 생산 조직화에 주력했지만, 컨베이어 원리를 바꾸었다. 고정 조립에서는 항공기가 아니라 작업대 자체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 Il-2 공장의 컨베이어 혁신을 설명하며.
소련 항공산업의 핵심 조직자. 타간로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연구소(MAI)를 졸업하고 제1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44년 공장장이 되었다. 전시에는 일류신 Il-2 슈투르모비크의 컨베이어 대량생산 체계를 확립했고, 종전 후 MiG-9·MiG-15 제트전투기, Tu-16 폭격기, Tu-104 여객기를 차례로 양산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과 보스토크 로켓 생산을 조직해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기술적으로 떠받쳤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일반기계공업성 차관으로서 미사일·우주산업 행정을 총괄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두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1971년, 솔제니친 추방을 논의하는 폴리트뷰로에 「솔제니친 문제에 관하여」라는 메모를 보내 『암 병동』 출판과 모스크바 아파트 제공을 제안했다. 기각됐지만 KGB도 아니고 내무장관이 반체제 작가를 위해 움직인 장면은 브레즈네프기에 둘도 없다.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르파트전 동지로 소비에트 사상 최장 16년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경찰관 봉급을 대폭 올리고 전용 주택 10% 할당, 신규 경찰학교와 소비에트 최초의 내무아카데미를 세워 밑바닥 직업이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끌어올렸다.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넵스카야와 교류하고 솔제니친 추방을 막으려 폴리트뷰로에 탄원서를 냈으며, 니콜라이 2세 유해 수색을 처음 지시한 소비에트 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안드로포프의 후계 구도 속에서 부패 혐의로 모든 직위와 훈장을 박탈당하고 권총 자살했다.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1963년 9월 29일, 카사토노프가 승선한 원자력잠수함 K-181이 북극점 빙원을 뚫고 부상했다. 소련 해군 사상 최초로 지구 최북단에 잠수함을 띄운 순간이었다.
잠수함 장교로 출발하여 소련 4대 함대 중 3개를 차례로 지휘한 해군 원수. 북방함대 사령관 시절 소련 원자력잠수함의 첫 북극점 부상(1963년)을 직접 지휘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북방함대의 전력을 확장했다. 이후 10년간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서 고르시코프의 대양함대 건설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으며, 아들 이고르와 손자 블라디미르로 이어지는 3대 해군 제독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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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M.V. 프룬제 해군학교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 '볼셰비크' 당직사관·항해사
1932–1939태평양함대 잠수함 부장 → Shch-112 함장 → L-12 함장 → 제12잠수함사단장
1941해군참모대학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교육대대 참모장으로 전쟁 발발, 탈린·한코·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1941–1945해군 주참모부 작전국 근무, 태평양함대 전투훈련 지도, 얄타회담 해군 실무단 참가
1949–1954제5함대(태평양) 참모장 → 태평양함대 제1부사령관
1954–1955제8함대(북발트) 사령관
1955–1962흑해함대 사령관, 1961년 알바니아 주둔 소련 해군 철수 작전 지휘
1962–1964북방함대 사령관, 원자력잠수함 북극점 부상 작전(1963) 및 대잠항공미사일 '시크발' 훈련 지휘
1964–1974소련 해군 제1부총사령관 겸 군사평의회 위원, 대양 원자력미사일함대 건설 주도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몇 주 후, 80세의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그라나트니 거리 자택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다.
게오르기 파블로프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리국장을 지내며 당 중앙기구의 물적·행정적 기반을 총괄한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학교에서 브레즈네프보다 한 학년 아래로 함께 수학했으며, 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집권 직후 관리국장에 발탁되었다. 당의 재정·건설·출판·요양 시설을 장악하고 1980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했으며, 후임 니콜라이 크루치나도 한 달 앞서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여 '당의 금'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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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부설 공장학교 교사, 금속공업학교 재학
1939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40–1941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지도원 → 금속공업부장
1941–1943오르스크 피난, 시당 위원회 근무
1943–1947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1947–1949중앙위 간부관리국 감찰관 → 당·노조·콤소몰 기관부 지도원
1949–1950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제1서기
1950–1951첼랴빈스크 주당 제2서기 (부친의 점령기 경력 문제로 해임)
1951–1957코스트로마 주 집행위 부의장 → 주당 서기 →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1957년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수십 명의 연방 차관들이 지방으로 밀려났다. 마르티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슈켄트로 보내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던 발령은 아니었지만, 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련 경제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탄약 부인민위원으로 군수 공급을 총괄했고, 1965년부터 20년간 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에서 근무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 유통을 실제로 작동시킨 인물이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장에서 시작해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1976~1985)까지 오르며 50년간 소련 산업의 물적 토대를 떠받친 실무형 기술관료였다.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는 이론물리학과 원자로 연구를 오가며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계산과 조직을 맡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두보프스키, 포브즈네르와 함께 F-1에서 플루토늄이 축적되는 양을 계산했고, 흑연과 우라늄의 선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A-1의 발진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과학적으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를 장기간 운영해 원자력 국가의 연구 인력을 길렀다.
1941년 10월 자원입대한 화학자 프로코피예프는 해군 소방국에서 적의 소이무기에 대응하는 화학방어 및 독가스 제독 교재를 직접 집필해 전선의 소방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모스크바대학에 천연화합물화학과를 창설하고 12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핵산화학의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1966년 신설된 연방 교육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1984년까지 18년간 소련 교육을 총괄한 국가행정가다. 그의 재임기는 전면 중등교육으로의 이행기로, 차별화된 과학교육 도입과 교육과정 개혁을 진두지휘했으며,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1948~1952)를 거쳐 고등·중등전문교육 차관으로 행정 경력을 쌓았고, 장관 퇴임 후에도 모스크바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며 소련 과학계와 교육계를 잇는 독특한 경력을 완성했다.
미국 방문 중 닉슨 대통령을 만난 네포로즈니는 지역 전력망을 연결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제 미국의 주요 지역들은 500kV와 750kV 송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러시아 위키백과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수력 기술자가 된 네포로즈니는, 1962년부터 23년간 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들과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총괄했다. 브라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사야노-슈셴스카야 등 시베리아의 거대 댐들과 볼가 강 cascade, 중앙아시아의 고압력 댐들을 동시에 추진했고, 소련 전역에 원전을 건설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통합에너지시스템(ЕЭС)을 구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의 발전 용량은 8,200만 kW에서 3억 1,500만 kW로 거의 네 배 성장했다. 레닌상 수상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2000년 사야노-슈셴스카야 수력발전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내 오랜 군 복무 중 가장 위험하고 긴장된 시기는 대조국전쟁 시기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몇 달이었다」
니콜라이 벨로보로도프는 1941년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항공부대에서 기술장교로 복무했으며, 대조국전쟁에 참전했다. 1958년부터 12총국 산하 중앙 핵무기 저장기지의 책임자로 근무했고, 1962년 「아나디리」 작전 당시 핵기술지원 작전반을 지휘하며 핵탄두를 선박 「인디기르카」호에 싣고 쿠바 마리엘 항까지 직접 운반했다. 쿠바 주둔 59일 동안 모든 핵탄두의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철수를 감독했으며, 퇴역 후 1990년대에 당시 문서에 기초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위기의 실체적 규모를 처음으로 밝혔다. 1966년부터 1983년까지 12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소련 핵무기 관리체계의 중추를 맡았고, 국가상을 수상했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 스탈린이 물었다: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은가?" 리차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6기 개인 격추·14기 집단 격추를 기록하고 1936년 25세의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전투기 조종사. 중국 항일전과 할힌골에서 공군 고문으로, 겨울전쟁에서는 제9군 공군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1940년 8월 29세에 소련 공군 총국장(ВВС РККА)에 올랐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이 높은 사고율을 추궁하자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라고 직언했다가 해임되었고, 독소전 발발 사흘 뒤인 6월 24일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바르비시에서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1944년 3월, 보라틴 마을에서 UPA 대원들에게 포위되자 쿠즈네초프는 수류탄으로 자신과 적들을 함께 폭사했다.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이자 파르티잔. 독일어 6개 방언을 구사하는 언어 천재로, 독일군 중위 파울 지베르트로 위장하여 나치 점령 우크라이나의 수도 로브노에서 활동하며 6명 이상의 고위 독일 관리들을 직접 제거했다. 쿠르스크 전투를 앞두고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공격 계획을 최초로 입수했으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부를 겨냥한 '멀리뛰기 작전'을 사전에 탐지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네고반(현 그리스 플람푸로)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끈 1945년 3~4월 특별법정은 옛 공인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을 선고했고, 일부 동시대인은 그를 당시 알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보았다.
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회의에 참가하고 창당 시부터 정치국원을 지낸 인물로, 1944년 12월부터 인민보위국을 이끌며 시구리미를 장악했고 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해 반대파를 숙청했다. 1946~1948년 내무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으며, 티토주의 혐의로 축출·체포되어 1949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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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코르처 공산주의 그룹 창립자·초대 의장. 1930년대 후반 엔베르 호자, 코초 타슈코와 함께 주요 알바니아 공산주의자로 부상했다.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립 회의 참가, 창당 시부터 정치국·중앙위원회 위원.
19433월 부재중 조직비서로 선출, 7월 10일 총참모부 위원이 되었다.
1944페르메트 회의에서 중장으로 승진하고 민족해방반파시스트평의회(KANÇ)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44–1946인민보위국(Drejtoria e Mbrojtjes së Popullit) 국장. OZNA를 본떠 만든 이 기구가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맡았다.
1945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했다. 이 법정은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 8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브라질 공산당 하원의원 출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평화적 저항을 거부하고 도시 게릴라전 이론가이자 실천가가 되었다. 자신이 창설한 민족해방행동(ALN)을 이끌며 《도시 게릴라 소교본》으로 세계 혁명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1969년 상파울루에서 경찰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1960년 10월 24일, R-16 시험발사대에서 126명이 폭사한 네델린 참사 당시, 얀겔은 잠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목숨을 건졌다. 훗날 그는 '운명이 나를 살렸다'고 짧게 말했다.
이르쿠츠크 변경 유형수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대학 졸업 후 전투기 설계를 거쳐 1954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OKB-586(유즈노예)의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저장성 고비등 추진제를 채택한 R-12·R-14·R-16·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차례로 완성해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구축했으며, 코스모스·치클론 발사체로 우주계획의 실용적 기반도 닦았다. 1960년 네델린 참사 당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생존했고, 1971년 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966년 8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타라소프와 피아트의 발레타 회장이 협정서에 서명하는 순간은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단일 산업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였다.
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1965–1975)으로서 피아트와의 역사적 협력을 성사시켜 볼가 자동차 공장(VAZ) 건설을 주도한 산업 행정가다. 사라토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모스크바 자동차·트랙터 대학을 졸업한 뒤 쿠이비셰프 기화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해 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을 거쳤다. 1966년 5월 4일 비토리오 발레타 피아트 회장과 과학기술 협력 의정서에 서명했고, 그해 8월 본계약을 체결해 톨리야티에 연산 66만 대 규모의 승용차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라다(지굴리)는 수백만 소련 가정에 첫 승용차를 안기며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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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948쿠이비셰프 기화기·부속품 공장 기술자 → 설계국장 → 공장장 → 주임기사
1949–1951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1951–1958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 수출용 벨라루스 트랙터 생산 기반 구축
1958–1963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 — 공업 재편과 모터·덤프트럭·베어링 등 신공장 건설 주도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가가린은 귀환 다음날 루드네프에게 1961년 4월 13일 자 《프라우다》를 건네며 이렇게 적었다: “지도자에게, 수행자로부터. 가가린.”
소련의 군수·우주산업 행정가. 툴라 출신의 무기 기술자로 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난 공장 책임자로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 로켓 연구소와 군수 관료직을 거쳐 1958년 국가국방기술위원회(GKOT) 의장에 올랐다. GKOT 의장으로서 초기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을 총괄했으며,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승인한 국가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1961~1965)으로 과학연구 조정을 담당했고, 계기·자동화·제어시스템 장관(1965~1980)으로 임명되어 민수 산업으로 전환했으나 퇴진으로 읽히기도 했다.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장관직을 유지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핵심 인물이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오른 직후 부하를 불러 말했다: "자, 그동안 자네를 충분히 굴렸으니, 이제 은행을 굴려 보세."
니주니노브고로드 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기업 부기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9년 은행에 들어가 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들의 수석회계사와 지배인을 거쳤다. 중앙기구로 발탁된 후 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과 고스방크 부총재를 역임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고, 1960년부터 대외무역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대외결제를 관장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올라 코시긴 개혁 후반기부터 브레주네프 체제 초기까지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으며, 재임기는 1965년 개혁의 신용 레버리지 실험이 퇴조하고 중앙집권적 재정 규율로 복귀한 전환기였다.
볼가-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제1서기 그리신은 수감자 노동력으로 공사를 서두르라는 모스크바의 압박 속에서도 둑 높이를 둘러싼 기술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반 티모페예비치 그리신은 1911년 랴잔현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당에 입당한 후 콤소몰과 당 통제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2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전후에는 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5)로서 볼가-돈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로 외교 무대에 진출한 뒤, 1959년부터 사망하는 1985년까지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방 산업 설비와 기술 도입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6년간 차관직을 지키며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네 명의 지도부를 거친 그는 소련 대외경제 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한 관료였다.
25년간 소련 예산을 쥐고 흔든 그가 남긴 말: "예산이란 국가경제계획이라는 엉덩이에 난 뾰루지다. 불편해도 앉을 수는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공으로 일하다 하리코프 재정경제대학을 졸업했다. 키예프 재정경제대학 학장과 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소련 재무장관을 지냈다, 소련 역사상 최장 재임이다. 1965년 코시긴 경제개혁의 구상에 참여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보수적 예산 운용으로 재정 안정을 유지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6년 2월, RSFSR 최고재판소장 스미르노프는 가명으로 서방에 소설을 발표한 두 작가에게 반소비에트 선동·선전 혐의로 7년과 5년의 강제노동형을 직접 선고했다.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34년 검찰에 투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루덴코 소련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나치 점령지 전쟁범죄 공소를 담당하고 도쿄재판에서 소련 대표단 부검사를 지냈다. 1962년 RSFSR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시냡스키-다니엘 재판을 직접 주재했으며, 1972년부터 12년간 소련 최고재판소장으로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사법부를 대표했다. 국제법정에서 파시즘을 기소한 법률가가 국내에서는 정치범을 단죄하는 소련 법조계의 이중적 성격을 체현한 인물이다.
탐보프와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14년간 소련 곡물 조달을 총괄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농업 관료
흐루쇼프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탐보프 제1서기 졸로투힌을 두고 이렇게 조롱했다: "저 탐보프 서기 졸로투힌은 바지를 벗고 매를 맞아야 한다고 자꾸 우겼습니다. 이게 무슨 즐거움입니까!"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현장 농학자 출신으로, 전쟁 직후 탐보프주 당 기관에서 두각을 드러내 1955년부터 10년 넘게 제1서기로 탐보프를 이끌었다. 흐루쇼프 해임 직후인 1966년 크라스노다르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옮겨 소련 최대 곡창지대를 7년간 통치했고, 1973년 브레즈네프의 신임 속에 소련 조달장관으로 발탁되어 1987년까지 14년간 곡물·사료·제분을 포함한 식량조달 체계 전반을 관장했다. 이 시기는 소련이 대규모 곡물 수입국으로 전환된 때로, 국내 수매와 수입 물류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무거운 자리였다. 197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5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22년간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낸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 지역 간부였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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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레득토는 1968년 파리 회담에 참여해 북베트남 대표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1970년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남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노벨 평화상을 거부했다.
남딘 출신으로 본명은 판딘카이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30~1936년과 1939~1944년 프랑스 식민 감옥에 갇혔다. 항불전쟁 때 남부에서 레주언과 함께 당 조직을 맡았고, 1955년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에 들어갔다. 1968년 6월 파리 협상에 합류해 실질적으로 북베트남 대표단을 이끌었고, 1970년 2월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1월 파리 협정을 맺었다. 그해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정해졌으나 남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1990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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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0–1936, 1939–1944프랑스 식민 당국에 투옥됐다.
1948남부의 코친차이나 당 위원회 부서기이자 조직부장을 맡았다.
1955–1986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 당명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바뀌었다.
1968파리 평화 회담에 도착해 북베트남 대표단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70–1973헨리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파리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1973키신저와 공동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남베트남에 평화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상을 거부했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79년 중월전쟁에서 쿤밍 군구를 이끌고 서부 전선을 지휘한 뒤 총참모장이 된 장군
후난 리링 출신으로 1928년 홍군에 들어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지난 군구와 우한 군구를 거쳐 1979년 1월 쿤밍 군구 사령관이 되었고, 중월전쟁에서 서북부 방향의 서부 전선을 지휘했다. 쉬스유가 동부 전선을 맡았다. 1980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었고 1994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나를 심판하라. 그러나 빵도 명예도 없이 백성이 남게 될 때가 올 것이다」(1990년 체포 당시)
소피아 근교 프라베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하며 1932년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얀코'로 소피아 일대 저항을 조직했고, 1944년 반파시스트 봉기에 참여했다. 전후 체르벤코프의 후원으로 급부상해 1954년 제1서기가 되어 35년간 동구권 최장기 집권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을 이끌었고, 1987년 '7월 구상'으로 제한적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1984년 투르크계 강제동화 정책으로 큰 논란을 남겼으며, 1989년 11월 당내 쿠데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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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불가리아 공산당(BCP) 입당, 국영인쇄소 당조직 책임자
1941–44대독 저항 — 소피아 제3당구역 책임자, 파르티잔 여단 '차브다르' 정치지도원
1945–49BCP 중앙위 후보위원 → 소피아 시당 제1서기 → 소피아 시장
1950–54BCP 중앙위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농업·집단화 담당
1954–89BCP 제1서기(1954–81) → 총서기(1981–89) — 35년간 국가 최고지도자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정규 군사 교육 없이 게릴라 부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제국주의 정규군을 야전에서 무너뜨린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으로, 30년간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키우며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완성했다.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인민일보』 편집장, 『연산야화』로 대약진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된 언론인
1966년 『연산야화』와 『삼가촌 찰기』가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전국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5월 18일 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79년 2월 복권되었다.
푸젠 출신 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항일전쟁기 진차지 근거지에서 신문을 만들고 최초의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했다. 1949년부터 『인민일보』 편집장·사장을 맡았으나 1957년 마오에게 「서생 논정(書生辦報)」이라 질책받고 물러났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로 1961~1962년 『베이징만보』에 연재한 잡문 『연산야화』와 우한·랴오모사와 함께 쓴 『삼가촌 찰기』는 1966년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고, 그는 그해 5월 자살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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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1948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1960–1961, 1962–1965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1961년 8월부터 코네프의 부사령관으로 실무 주도, 1962년 4월 복귀)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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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24년간 카자흐스탄을 브레즈네프의 동반자로 이끌고, 해임으로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공화국 건설자
1986년 2월, 나자르바예프의 비판 보고가 있은 후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오히려 쿠나예프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전하자, 24년간 카자흐스탄을 이끌어온 노지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물러나겠소."
광산 기술자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24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있던 인물이다. 브레즈네프와의 친교를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을 소련 3대 경제권으로 끌어올렸고, 흐루쇼프의 남부 영토 이전 시도를 저지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지켰다. 전연방 정치국 정위원(1971–1987)으로서 중앙 무대에도 진출했으나,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 해임되면서 알마아타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 젤톡산(12월) 사건이 촉발되었다.
1965년 하바롭스크 변경에 레닌훈장이 수여되자 시티코프는 말했다. '변경의 훈장 수훈을 우리는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가 극동인들에게 베푼 큰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코스트로마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축산기술자로 출발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캄차카·유대자치주 당서기를 거쳐 1957년 하바롭스크 변경당 제1서기에 올랐고, 재임 13년간 도시 기반시설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70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14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중심을 형성했고, 소비에트 유럽안보협력위원회 의장으로서 데탕트와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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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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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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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자오제르나야에 오른 비네비틴은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에 따라 한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국경을 넘어 온 일본 헌병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NKVD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소위로, 저격 교관을 거쳐 공병대장을 맡았다.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 고지에서 제1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으로 만주 영토에 들어온 일본 헌병을 저격 사살해 하산 호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부상 뒤 병원을 이탈해 전선에 복귀했고, 8월 1일 새벽 지뢰 통로 개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초병에게 잘못된 암호를 대어 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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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1968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소련 과학자의 입장에서 핵군축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연구소에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그로즈니 출신으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체 원심분리법에 의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1964)의 과학적 책임자였다. 1962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과학의 제도적·국제적 좌표를 설정했고, 1964년부터 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을 맡아 1968~1969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서 핵군축과 과학 협력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쿠르차토프연구소 부소장으로 핵기술 개발을 지휘하면서도 1967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과학자와 정치가를 겸한 독특한 경력을 남겼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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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1956년 11월 4일, 너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너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1950년 중국 군사고문단장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웨이궈칭은 호찌민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자문했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베트남 대표단과 군사 문제를 논의했다.
광시의 좡족 출신으로 홍군에 들어가 국공내전에서 제3야전군 제10병단 부정치위원을 지냈다. 1950년 4월 류사오치의 명으로 중국 군사고문단장이 되어 베트남에 파견되어 호찌민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자문했다. 1953년 10월 호찌민에게 프랑스의 나바르 계획 사본을 건넸다고 전해지며, 1954년 저우언라이와 함께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 뒤에 광시 주석(1958~1975), 정치국원(1973~1982),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을 지냈고, 문화대혁명과 그 뒤의 숙청을 모두 비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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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웨이바췬이 이끄는 농민자위군에 참여했고, 12월 백색봉기에 참가한 뒤 홍군 제7군에 편입됐다.
1944신사군 제4사단 부사단장이 되었고, 이후 사단장으로 복무했다.
1949제3야전군 제10병단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 베트남 주재 중국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임명됐다.
1958–1975광시 좡족 자치구 정부 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기 광시에서 권력을 유지하며 4·22파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살해가 벌어졌다.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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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둡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1944년 10월 20일, 답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답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으나 1962년 실각해 16년을 감금·하방으로 보냈고,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경제특구를 열었다.
산시 출신으로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다. 건국 후 서북국 서기와 국무원 비서장·부총리를 지냈으나 1962년 소설 『류즈단』이 가오강을 옹호한 「반당」 작품이라는 캉성의 고발로 실각해 16년 동안 감금·하방되었다.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복귀해 홍콩 탈출 문제의 해법으로 중앙에 「선행일보(先行一步)」의 권한을 요구했고, 이는 1980년 선전·주하이·산터우 경제특구로 이어졌다. 1980년대 서기처 서기로 후야오방을 지지했으며 1987년 그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진핑의 아버지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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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1955년 젤도비치가 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에서 헝가리 비밀경찰이 가로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 장면은 그를 평생 사로잡았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 그가 본 해답은 무력뿐이었다.
1914년 6월 15일(구력 6월 2일) 출생. 공식 자료는 스타브로폴 지방 출생으로 적지만 출생지와 혈통을 둘러싼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리빈스크 수운기술학교(1936년 졸)를 거쳐 카렐리야에서 콤소몰 활동을 했고, 주헝가리 대사(1954~57), 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1957~67), KGB 의장(1967~82)을 지냈다. 반체제 탄압을 지휘해 1967년 제안으로 제5국을 만들고 1980년 사하로프를 고리키로 유배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간 진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11월 서기장이 되어 부패 간부를 숙청하고 개혁 구상에 착수했으며,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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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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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1961–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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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1975년 12월 2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누학을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정부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선출했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의장은 누학이 아닌 카이손 폼비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창당 멤버이자 파테트라오 혁명의 핵심 지도자였다. 시암(현 태국) 무크다한의 라오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창당 당시 정치국에서 카이손 다음 서열이었고 1972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에 들어가 경제 업무를 맡았다. 1975년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주석을 지냈다.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모택동 시대 자력갱생의 상징이었다. 1964년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 이후 다자이 생산대대는 전국적 모델이 되었고, 그는 정치국원과 부총리까지 올랐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났다.
산시 시양현 다자이촌의 문맹에 가까운 농민으로 생산대대 서기로 계단밭을 일구고 1963년 홍수 뒤 국가 지원 없이 마을을 재건해 이름을 얻었다. 1964년 마오가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고 하면서 전국의 모델이 되었고, 그는 1969년 중앙위원, 1973년 정치국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농업을 맡았다. 다자이 모델은 집단노동과 자력갱생을 내세웠으나 통계 부풀리기와 강제성이 드러났고, 개혁개방 뒤 1980년 부총리에서 물러나 베이징 교외 농장에서 살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문화대혁명 피해자의 복권과 사상 해방을 이끈 개혁파 총서기, 그의 죽음이 1989년 시위를 불렀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날 비공식 추모 집회가 정부에 그의 업적 재평가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10만여 학생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후난 출신으로 열네 살에 소년 홍군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고 건국 후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으며 1977년 중앙조직부장으로 수백만 건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해 복권시켰고, 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조직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뒷받침했다. 1981년 당 주석, 1982년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1986년 말 학생 시위 뒤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사임을 강요당했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추모 집회가 톈안먼 시위로 번졌다.
게오르기 로보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사단 지휘관으로 성장한 소련 공군 장성이었다. 조선전쟁에서는 64 전투기항공군단을 지휘하며 소련의 비밀 공중 개입을 조직했고, 직접 미그-15를 몰아 전투 경험을 전수했다. 그의 전후 증언은 미그 앨리에서의 전과를 내세우던 공식 서술과 미국 공군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는 현장 판단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이후 그는 군사교육과 전쟁사 연구에 힘쓰며 자신의 조선전쟁 경험을 글로 남겼다.
1951년 체포되어 고문받으면서도 자백을 거부하고, 감방에서 스탈린에게 국가보안 기관 개편안을 작성해 보내 결국 풀려났다.
스탈린 시대 소련 방첩의 핵심 인물로, 29세에 NKVD에 투신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맡아 전후 소련 방첩 체계를 이끌었고, 1950년 국가보안부 차관이 되었다. 1951년 '아바쿠모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53년 초 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으로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이후 동독과 중국에서 KGB 고문으로 활동했고, 1962년부터 KGB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소련 상공회의소 의장(1983–1988)으로서 무역 외교와 산업 스파이 활동을 조율했다.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와 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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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저는 평생 어떤 자리도 구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직접 타라소프 장관을 찾아가, 공장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건설 중인 VAZ의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하며.
볼가 자동차 공장(VAZ)의 건설을 지휘하고 자동차공업부 장관으로 11년간 소련 자동차 산업을 이끈 행정가다. 톰스크 출신으로 MADI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소형차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1958년 공장장이 되었다. 1966년 타라소프 장관에게 스스로 VAZ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해, 피아트와 협력한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3년 만에 가동시키고 1973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으며 '니바' 개발을 시작했다. 장관 시절 연간 200만 대 생산 체제를 완성했고 퇴임 후에도 엘라부가·KAMAZ·AVTOVAZ의 고문으로 평생을 바쳤다.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의 민위대원 200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의원 전원이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66세의 카리요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1960–1982)으로, 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함께 유로코뮤니즘을 주도한 핵심 이론가이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모스크바와 단절하고, 『유로코뮤니즘과 국가』(1977)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하며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평화적 민주 이행을 이끌었다.
루돌프 누리예프의 망명 후 KGB가 그의 가족을 압박하자, 누리예프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족을 내버려두시오, 그들이 무슨 반소비에트 분자란 말이오!” 그 후로 괴롭힘은 멈췄다.
바슈키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리예프는 1957년부터 12년간 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로 공화국을 이끌며 우파와 체르니콥스크를 통합하고 대규모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69년 소련 조달장관으로 중앙에 진출한 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각료회의 부의장 겸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식량 정책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25년간 중앙위원과 8회 연속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낸 그는 소수민족 간부가 연방 차원의 경제 관료로 자리 잡은 드문 사례였으며, 퇴임 후 회고록 『아울에서 크렘린까지』를 남겼다.
체포 후 진술: '나와 수사관 10명이 레닌그라드로 갔다… 아바쿠모프가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에서 즈다노프의 이름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 목숨을 건다고.'
1938년부터 NKVD에서 복무한 보안 요원으로, 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대령)까지 올랐다. 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아바쿠모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하며 피의자들을 직접 구타하고, 부하 수사관 푸틴체프의 조서 조작을 승인·지휘했으며, 재판 전 피고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리허설까지 주관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되었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1954년 사형 선고를 받고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으며, 현재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병실에서 석유부 장관 업무를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압박에 맞섰다.
바쿠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12년간 소련 석유부 장관을 지내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통해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타트네프티에서 터빈 시추 방식과 대형 블록 조립 공법을 도입해 로마슈킨스코예 유전 개발을 이끌었고, 이후 장관으로서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당의 압박에 맞서 합리적 채굴을 주장했으며, 암으로 입원 중에도 병실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레닌상 수상자, 네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타트네프티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77년 6월, 24년간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데멘티예프가 사망하자 카자코프가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4년도 못 되어 임기 중 사망했고, 생전에 일했던 모스크바 계기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모스크바 근교 마을에서 태어나 16세에 제도공으로 노동을 시작한 소련 항공공업 행정가. 항공기 계기·유도장치 분야의 핵심 연구소였던 NII-923 소장 시절 로켓무장과 핵잠수함 생산에 기여해 1963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고, 12년간 차관과 제1차관을 거쳐 1977년 표트르 데멘티예프의 후임으로 항공공업 장관에 올랐다. 기술자에서 장관까지 항공공업의 모든 단계를 거친 유일한 전후 세대 지도자로,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항공생산 체계의 실무적 안정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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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7모스크바 '엘렉트로스베트' 공장 제도공 → 모스크바 기계기술학교 졸업
1937–1944제213항공공장: 기술자 → 작업장장 → 부서장 → 주임기술자
1944–1951제122항공공장 주임기술자 → 제10국가설계연구소 부서장
1951–1960제122공장 수석기술자 (1955년 전소연방통신기계제조대학 졸업)
1960–1965NII-923 소장 — 항공기 계기·관성유도체계 개발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1963)
1965–1974소련 항공공업 차관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1977–1981소련 항공공업 장관 — 재임 중 사망, 레닌상(1976)·소련국가상(1967)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인 부모를 둔 시베리아 출신으로, 1959년 '민족주의자' 숙청 이후 라트비아 공산당을 이어받아 18년간 제1서기를 지낸 '인테르나치오날리즘'의 집행자였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면서도 공개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라트비아어로 말하지 않았던 이 모순이 그의 시대를 상징했다. 말년에는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올랐지만,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족운동 속에서 구질서와 함께 밀려났다.
테헤란 회담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순간 처칠이 말을 꺼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베레시코프에게, 스탈린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네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야.'
테헤란(1943), 얄타(1945), 포츠담(1945) 회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개인 통역을 맡아 전후 질서를 결정한 '빅3' 외교 현장을 목격한 소련 외교관. 1940~1941년 주베를린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통역을 맡았고, 리벤트로프의 대소 선전포고 현장에도 있었다. 부모의 전시 행방 문제로 외무부에서 밀려난 후 《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과 소련의 대표적 미국학 저널 《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을 지냈다. 주워싱턴 대사관 1등서기관(1979~1983)으로 복귀했고, 소련 붕괴 후 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에서 강의하며 권력 정점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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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안후이에서 농가책임제를 처음 시행한 개혁파 지도자로, 1983~1988년 제1부총리,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산둥 출신으로 건국 후 베이징 부시장으로 인민대회당 등 「10대 건축」을 지휘했고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다. 1977년 안후이 제1서기로 부임해 기근에 시달리던 농촌에서 샤오강촌의 비밀 토지 분배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해 개혁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1980년 부총리로 전국 농업을 맡아 인민공사를 해체했고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해외 순방 중 귀국해 계엄을 지지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어느 날 부대가 행군할 때 갈대밭에서 적 5~6명이 장군님을 겨누었다. 김정숙 동지는 몸으로 장군님을 가리고 리볼버로 적을 쓰러뜨렸다.
김정숙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휘하 여군 부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여성 빨치산으로, 생전의 전공보다는 사후 '백두여장군'으로 추앙받아 '3대장군' 백두혈통 정치신화의 모성적 핵심이 된 인물이다.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어머니로서 해방 뒤 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다 1949년 출산 중 사망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너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너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이 그래파이트 샘플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새끼 양을 대하듯 중성자를 잡아먹습니다": 첫 흑연 품질 측정 결과를 쿠르차토프에게 보고하며
이고리 파나슈크는 쿠르차토프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로,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 건설을 총괄 관리하고 1946년 12월 25일 임계 실험에서 제어반을 보조한 실험물리학자다. 1943년 제2연구소에 합류해 반응로 부문 부책임자로서 흑연과 우라늄 품질 검증부터 노심 조립까지 실무를 지휘했고, 1948년 첫 산업용 원자로 'A'의 기동에도 쿠르차토프 곁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 1954년 돌연 스승과 결별하고 주변부 연구직으로 밀려났는데, 쿠르차토프를 당에 고발한 것이 원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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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1레닌그라드 공업대학 물리공학부 졸업, 쿠르차토프 지도 아래 디플로마
1939–1943붉은군대 복무, 소련-핀란드 전쟁 및 대조국전쟁에서 야전병원 엑스선 기술자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
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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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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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1975년 사이공 점령을 지휘하고 1979년 캄보디아 침공과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이끈 장군
1975년 4월 사이공·자딘 해방 작전의 사령관으로서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린 공세를 지휘했다.
하노이 근교 뜨리엠 출신으로 1936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치렀고, 1953~1954년과 1954~1978년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1975년 봄 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해 사이공 함락을 이끌었다. 이어 크메르루주 캄보디아 침공과 1979년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지휘했다. 1980년 보응우옌잡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되어 1987년까지 재임했고, 1976~1986년 정치국원이었다. 2002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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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3–1978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으며, 1954년 정전위원회 베트남 측 대표단장으로 잠시 직무를 중단했다.
1971–19751971년 남부 라오스, 1972년 찌티엔, 1975년 떠이응우옌 작전을 직접 지휘·지도했고, 4월 사이공·자딘 작전 사령관이 되었다.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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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자랐다. 『혁명의 시대』 등 ‘긴 19세기’ 3부작으로 산업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형성을 서술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버크벡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다. 『혁명의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함께 다루었고, 『마르세유의 메아리』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후대 정치와 역사 서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폈다. 이 강좌에서는 계급과 사회구조, 혁명의 계승과 변형을 읽는 해석 기준으로 참고한다. 그의 분석은 당대 사료 자체와 구별해야 하며 혁명사 해석의 유일한 정답을 뜻하지 않는다.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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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1936–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1954–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1962–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1968.1–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1978년 3월, 지지가 탈환 작전: 페트로프는 정면 공격으로 속이고 주력은 헬기강습으로 북쪽에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4일 지지가가 해방되었고, 2주 안에 소말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2차대전을 최전선에서 싸운 소련 원수.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 해방, 루마니아·헝가리 전역까지 종군했으며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전후 프룬제 아카데미를 거쳐 극동에서 참모·지휘관으로 성장, 1972년 극동군관구 사령관에 올랐다. 1977–78년 오가덴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작전그룹을 지휘하며 지지가 탈환 작전을 입안해 전황을 결정지었다. 1980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85년 국방제1차관을 지냈으며 1983년 소련원수로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련 지상군의 중추를 이끈 전략가로, 냉전 말기 지상전력 현대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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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 군대 입대
1941–1945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 및 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 전역 참전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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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헬기에서 쿠바 중서부를 내려다본 스타첸코 소장은 깨달았다: 이 정도 야자수로는 90마일 북쪽 초강대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소련 전략로켓군 소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제51로켓사단을 지휘, 36기 R-12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10월 20일 전투 태세를 완료했다. 사후 보고서에서 정찰 부족과 현지 조건 무시 같은 참모본부의 '아나디리' 계획 결함을 솔직히 기술했다. 이후 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과 우주추적센터장을 지냈다.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로 냉전기 KGB 제1총국의 대외첩보 실무를 지휘하다 1971년 총국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재임 중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옮기고 과학기술 첩보를 확충하며,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지키려 한 전화 한 통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NATO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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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1950년대 크렘린 회의에서 베리야가 수개월 안에 군용 로켓 생산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젊은 기술자였던 아파나시예프는 비현실적이라며 시간을 더 요구했고, 회의 뒤 한 참석자만이 그를 두둔했다. 체포령이 첫 반응이었다는 세부는 영문 자료에만 있다.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주 클린에서 태어나 1941년 바우만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소련 국가 활동가다. 전쟁 중에는 몰로토프(페름)의 제172포병공장에서 성형작약탄 생산에 참여했고, 국방산업부 기술총국의 선임기사·과장·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지냈다. 1957~1965년 레닌그라드와 러시아연방 경제회의를 이끌었고 러시아연방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했다. 1965년 3월 2일부터 1983년 4월 8일까지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1983~1987년 중공업·수송기계공업부 장관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2회), 레닌상·스탈린상·소련국가상 수상자이며 1961~1989년 당 중앙위원, 1962~1989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었다. 2001년 5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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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
세르게이 크류코프는 소련의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R-7의 전체 형상과 중앙 블록 주위에 네 개의 측면 블록을 배치하는 패킷 구조를 구체화한 인물이다. 코롤료프가 총괄 설계자였다면 크류코프는 프로젝트 부문과 설계 조직을 이끌며 구상을 실제 구조와 도면으로 묶었다. 그는 이후 라보치킨 설계국과 에네르기아에서도 자동 행성간 정거장과 우주 운반체 개발을 지휘했다. 이 경력은 우주개발이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전문화된 집단 설계와 생산 체계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977년 8월 9일, 해운장관은 무르만스크 부두에서 아르크티카호에 직접 올랐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8일 뒤 인류 최초로 수상 선박이 북극점에 닿았다.
오룔 현의 농촌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전시 무르만스크 항에서 북극 호송선단 하역을 책임지며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사할린 해운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37세에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이 되었고, 1970년 해운장관에 올랐다. 16년 재임 동안 적자 부문이던 해운부를 80여 개 부처 중 외화 수입 5위의 핵심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레닌호 1척에 불과하던 원자력 쇄빙선대를 8척 체제로 확장했다. 1977년 직접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에 승선해 세계 최초로 수상 선박의 북극점 도달을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되었다. 1986년 여객선 아드미랄 나히모프호 침몰 참사로 경질되었으나, 그가 구축한 북극 항로와 쇄빙선대는 오늘날 러시아 북극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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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9무르만스크 항에서 교대 기사로 시작, 기계화 부서장·항만 주임기사로 승진하며 전시 북극 호송선단 하역 복구 책임
1951–1955홀름스크 항만장 → 코르사코프 항만장 → 사할린 해운회사장,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
1955–196037세,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으로 사할린 해운회사 경영 정상화
1960–1962해운부 인사국장
1962–1966CPSU 중앙위원회 교통·통신부 부장
1966–1970해운부 제1차관
1970–1986해운장관: 적자 부문을 외화 수입 5위로 전환, 원자력 쇄빙선대 1척→8척으로 확장, 연중 북극 항로 개설
예브게니 페펠랴예프는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연대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극동 전선에서 쌓은 경험을 한국전쟁의 제트 공중전에 투입했다. 그는 196전투비행연대를 이끌어 만주 기지에서 유엔군 항공기와 싸웠고, 공식 19승으로 한국전쟁의 소련 측 최고 수준 에이스가 되었다. 승리 집계는 자료에 따라 19승에서 23승까지 갈리며, 그는 일부 격추를 편대원에게 돌렸다고 전해진다. 1952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뒤에도 방공 지휘와 연구 업무를 맡았고 1973년 예편했다.
모스크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온 드루처에 대해, 보듈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첫 번째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주겠다."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20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 중 하나다.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농업 공화국이었던 몰도바에 기계제조·전자·식품가공 등 신산업을 도입하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과수원과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어 억제, 교회 폐쇄 등 강압적 러시아화를 추진했으며, 작가 이온 드루처에게 '고향에 돌아오면 첫 가로등에 매달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임되었고, 퇴임 후인 2003년 몰도바 공화국 훈장 수여는 작가 8명의 훈장 반납을 촉발했다.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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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보리스 파톤은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금속공학자로, 1962년부터 2020년까지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전기용접의 선구자로서 1950년대 초 전기슬래그 용접을 개발해 무제한 두께의 금속 접합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소련 중공업과 조선업을 혁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에서 탱크 생산 증대에 기여했다. 우주 용접 기술을 주도해 우주비행사들이 궤도에서 용접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전기용접을 의학에 접목해 생체 조직 용접법을 개척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영웅, CPSU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체르노빌 원전의 키예프 인근 건설을 반대하며 경고했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서방에 5천여 건의 소련 미사일 기밀을 넘겨 쿠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허세를 벗긴 GRU 대령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펜콥스키는 미국과 영국 육군 대령 군복을 차례로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이 제복을 진짜로 입게 될 날'을 말했다.
GRU 대령으로 근무하던 중 흐루쇼프 체제에 환멸을 느껴 1961년 MI6와 CIA에 자진 접촉했다. 18개월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태, 쿠바 미사일 기지 배치도, 군사교리 등 5천여 건의 기밀문서를 서방에 넘겼다. 그의 정보는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흐루쇼프의 위세와 달리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케네디에게 확신시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강경하게 대응할 근거가 되었다. 1962년 10월 KGB에 체포되어 이듬해 공개재판 끝에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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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39제2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39–1945폴란드 침공·겨울전쟁·독소전 참전, 두 차례 부상,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포병사령관 부관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30세에 대령 진급
1949–1953군사외교아카데미 졸업, GRU 제4(중동)국 배속
1955–1956주튀르키예 소련대사관 무관보 겸 GRU 거주자
1960–1962국가과학기술위원회 대외관계국 부국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GRU 활동
1961.4–1962.10MI6·CIA 이중첩보원, 런던·파리·모스크바에서 5천여 건 기밀 전달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둡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둡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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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1941년 7월, 22세의 피노게노프는 7일간 열차로 코브로프 공장에 도착해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공장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ShVAK 기관포의 가장 핵심 부품인 포미 장치에 나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2세의 나이로 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관포 ShVAK와 대전차소총 PTRD 생산을 진두지휘했고, 전후에는 오토바이 민수 전환을 거쳐 공장장까지 오른 군수 생산 행정가다. 1954년부터 6년간 공장장을 맡으며 S-75 지대공 미사일 유도장치와 소련 최초의 대전차유도탄 '시멜'의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1979년 세르게이 즈베료프의 후임으로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까지 10년간 소련의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전체를 지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군수 조달의 안정성을 책임졌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레닌상(1982), 국가상 2회(1979, 1989)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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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 교대 마스터로 배치 — ShVAK 항공기관포 생산
그의 회고록은 페트로프의 오경보 판단을 군 내부의 비밀에서 공개된 냉전사의 사건으로 바꾸었다.
유리 보틴체프는 소련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휘를 거쳐 방공과 미사일·우주방어 체계의 조직자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창설된 미사일·우주방어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기술 체계와 군 지휘를 결합했다. 1983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오경보 보고를 처음 받은 직속 상관이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사건을 공개해 페트로프의 판단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기록은 페트로프를 치하하면서도 군사 일지 문제로 질책한 체제의 모순을 보여 준다.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44년, 전선에서 세 번째 중상을 입고 제대한 두봅스키가 목발을 짚고 쿠르차토프를 찾아가자 쿠르차토프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하겠나?"라고 물었다. 한 달 뒤 그는 목발 없이 지팡이만 짚고 다시 나타나 제2연구소에 채용되었다.
하리코프 대학 출신의 소련 핵물리학자. 1944년 부상 제대 후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해 F-1 원자로 조립 중 방사선량 계측과 감마선 차폐 실험을 수행했으며, 중성자 계수기를 직접 제작하고 플루토늄 축적 계산을 맡았다. 1946년 12월 25일 임계 당시 통제실에 남은 소수 인원 중 하나였고, 이후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의 기초를 세웠으며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1954)와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로들의 물리 기동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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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하리코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하리코프 물리기술연구소 근무
1941–1943전선 복무, 보병대대장, 3회 부상으로 전역
1944–1946제2연구소 F-1 원자로: 선량계측·감마선 차폐·중성자 계수기·플루토늄 축적 계산
1947–1952방사선안전 그룹 책임자, 마야크(콤비나트 817호) 플루토늄 생산로 물리 기동
아나디리 작전 초기 계획 단계에서 참모총국은 단 5명의 장교만 기밀로 삼았다. 서기 한 명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계획 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냉전 시대를 관통한 군인이다. 1962년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안을 작성한 참모 장교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물리적 토대를 설계했으며,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퇴역 후에는 미·소 양측 장성이 함께 저술한 공동 회고록 『작전명 아나디리』(1994)를 통해 냉전 최대 위기의 내막을 공개하며 역사적 화해에 기여했다.
1944년 7월 비보르크 북방 전투에서 왼팔을 잃고 제대한 24세의 소위는, 13년 뒤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코롤료프의 지명으로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세묘르카'의 설계를 이끌었고, 쿠이비셰프(사마라)로 파견되어 항공공장에서 R-7 계열의 양산을 조직했다. 1974년 OKB-1에서 분리된 중앙특수설계국(TsSKB)을 창설해 초대 국장 겸 총설계자가 되었으며, 보스토크·몰니야·소유스 발사체와 정찰·과학 위성군을 개발했다. R-7의 설계·양산·계열화 모두에 걸친 그의 일생은 스푸트니크에서 오늘날의 소유스까지 이어지는 우주 수송의 척추를 세운 작업이었다.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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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1985년 화폐 개혁 실패 뒤 민중은 "시인이 경제를 맡고, 장군이 피임 링을 놓는다"고 조롱했다.
식민지 감옥에서 혁명시를 쓰기 시작해 두 차례 항전 내내 민족의 투쟁을 서정으로 노래한, 베트남 혁명시의 기수였다. 1968년부터 중앙선전·문화 부문을 총괄하며 문학이 정치의 도구여야 한다고 보아 작가·지식인에 대한 강경한 통제를 주도했고, 그 이름은 인문·가이팜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1976년 제4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뽑혀 통일 뒤 남부의 언론·문화 기관을 단일 국가로 합치는 작업을 감독했고,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1985년 화폐 개혁의 실패 책임으로 실각해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1968년 8월 21일 아침, 둡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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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1989년 11월 10일 일기,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출처: 고르바초프 재단 문서고,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번역.
1921년 5월 25일 모스크바(마리나 로샤)에서 태어나 2017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7월 붉은군대에 지원해 북서전선에서 발트 해방 작전에 참전했고 1945년 제대했다.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58–1961년 프라하에서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61년 중앙위 국제부에 들어가 1986년 3월부터 1991년까지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고, 1989–1991년 인민대의원을 지냈다. 1992년부터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문서 사업을 이끌었다. 학위 연도와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기는 사료 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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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6붉은군대: 1941년 7월 지원 입대, 제1충격군 소속 북서전선 참전, 부상, 1945–1946년 제대
1938–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1938–1941 재학, 1947–1949 복학 후 대학원); 1950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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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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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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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조야는 외쳤다: 「작별이에요, 동지들! 싸우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탈린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탈린이 올 것입니다!」
소련의 가장 상징적인 전쟁 영웅 중 한 명. 1941년 10월 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해 서부전선 사령부 직속 정찰·방화 공작부대 9903에 배속되었고, 독일군 후방에서 도로 매설과 통신선 절단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27일 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세 채에 방화한 뒤 이튿날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마디도 불지 않았고, 11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프라우다』 기자 표트르 리도프의 취재로 전모가 알려지자 스탈린은 "인민의 영웅"이라 칭했고, 1942년 2월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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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콤소몰 가입
1941.10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 서부전선 정찰·방화 부대 9903 배속
1941.11.4–17볼로콜람스크 방면에서 도로 매설·통신선 절단 임무 수행
1941.11.27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3채 방화
1941.11.28–29체포·고문 후 교수형 — 가명 「타냐」만 대고 끝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음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니콜라이 수탸긴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로, 제트전투기 시대의 대표적 에이스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그-15를 몰며 149회 출격과 66회 공중전을 기록했고, 소련 자료 기준 22대의 항공기를 격추해 소련군 조종사단의 전투 성과를 상징했다. 그의 전과는 냉전 초기 소련이 조선 상공에 비밀리에 개입한 현실과, 공중전의 승리 기록이 자료와 교전 당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1923년 러시아 탐보프주 빈드레이 마을에서 태어나 1983년 소련 원수, 1984~88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을 지낸 군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생도로 참전해 부상과 동상을 입은 뒤 기갑 병과로 전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파트너로서 INF 조약 등 군축 협상을 뒷받침했으나 군사개혁과 일방적 감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이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유서에는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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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5모스크바 제1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생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해 부상·동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1968~1972),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1988–1991국방부 총감독부 감독관 겸 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독소전 최고의 Yak 에이스에서 방공군 총사령관으로, 루스트 사건 한 방에 퇴장한 항공 총원수
1944년 11월 니시 상공. 미군 P-38 편대의 오인 공격에 콜두노프 대위가 Yak-9로 미군 선도기 옆에 붙어 날개를 흔들며 적색 별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소 직접 교전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독소전쟁에서 412회 출격, 96회 공중전을 치르며 46기를 격추한 Yak 전투기 최고의 에이스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니시 상공에서 소련 부대를 오인 공격한 미군 P-38 편대와의 교전을 직접 종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후 방공군으로 전환해 1978년 방공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84년 항공 총원수 계급을 받았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하자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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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5866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비행대장 — 412회 출격, 46기 격추,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1966년 바이코누르. 사일로에서 R-36이 솟아오르자 드골은 '콜로살!'을 연발했다. 웃킨은 훗날 회고했다. '그래도 진짜 전투발사로는 이어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얀겔의 후계자로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KB 유즈노예를 이끈 수석설계자. 얀겔의 저장성 추진제 로켓 노선을 계승하여 역대 가장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R-36M(NATO명 SS-18 '사탄')을 완성했고, 철도기동형 RT-23 몰로데츠와 우수한 중형 발사체 제니트를 개발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과 국가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1976~1990)을 지냈다. 냉전 후기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설계하며 미소 간 핵균형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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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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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전차군 사령관 리발코가 부상당한 자이체프 대위의 병실을 찾았다. "자네,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붉은기 훈장을 수여했다. 소련영웅 칭호는 40년 뒤에야 따라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싸운 전차부대 장교로, 전후 기갑군 사령관과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쳤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인 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을 맡아 하급 장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훈련 개혁을 단행했고, 1983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5년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군 작전을 지휘했으며, 산악전에 부적합한 BMP-1을 대체할 BMP-2의 대량생산을 중앙에 직접 요구해 관철시켰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막강한 체력으로 '훈련장 장군'이라 불린 그는, 냉전 말기 소련 지상군의 작전 교리와 장비 현대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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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2012년 8월 31일, 평생의 친구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의 부고를 듣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두 노장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Il-2 공격기 조종사로 222회 출격하여 적기 85대를 지상에서 격파한 위대한 조국전쟁 최고의 공격기 에이스로, 스물한 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금성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69년부터 15년간 공군 제1부사령관으로 Su-25 공격기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1984년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Su-25 실전 운용을 지휘하며 소련 공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이끌었다. 퇴역 후에도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군 원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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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8–1990소련 검찰총장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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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1955년, 코롤료프가 우랄 지부 부수석설계자 자리를 제안하자 서른 살 마케예프는 "수석설계자로만 가겠다. 대리는 안 한다"고 답했다. 코롤료프는 그 배짱에 놀랐지만, 결국 그를 SKB-385 수석설계자로 임명했다.
항공기 공장의 제도공으로 시작해 코롤료프의 눈에 띄어 31세에 SKB-385 수석설계자가 된 로켓 기술자. 30년간 단 한 조직을 이끌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세대를 개발: 수중발사, 공장연료주입, 대륙간사거리, MIRV 탑재를 차례로 실현하며 냉전기 해양핵억지력의 전략적 균형을 완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의 정체를 몰라 '우랄의 용'이라 불렀고, 그가 만든 R-17은 NATO 코드명 '스커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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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4모스크바 및 카잔 항공기 공장에서 제도공·설계사로 Pe-2 생산 참여
1947–55OKB-1/NII-88 주임설계사: R-11 및 최초 해군탄도미사일 R-11FM 개발
1955–85SKB-385 수석·총괄설계자: SLBM 3세대(R-21, R-27, R-29, R-29R, R-39, R-29RM) 개발
“100루블을 가지지 말고, 아주베이처럼 결혼하라” — 1950년대 모스크바를 떠돌던 이 말은 그의 출세가 흐루쇼프의 사위라는 지위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웅변한다.
알렉세이 아주베이는 흐루쇼프 해빙기 소련 저널리즘의 얼굴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으로서 관료적 기관지를 생동감 있는 일간지로 탈바꿈시켰고 발행부수를 160만 부에서 600만 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959년 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을 주도했고, 1960년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1963년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금지된 시 「저승의 묘르킨」을 이즈베스티야에 과감히 게재한 판단은 그가 단순한 흐루쇼프의 사위 이상의 언론인임을 증명했다.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1987년 바이코누르. 고르바초프가 위성들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 시베리아에서 합니까?" 레셰트뇨프가 답했다. "시베리아에서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200개 도시와 함께 일합니다."
코롤료프의 부수석 설계자로 출발해 1961년 시베리아 밀폐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독자 설계국 OKB-10을 창립한 우주공학자. 몰니야, 스트렐라, 라두가, 에크란 등 통신·방송 위성 계열을 차례로 완성했고, 측지·구난·항법 위성으로 영역을 넓혀 1982년에는 GLONASS 전지구 위성항법 시스템을 궤도에 올렸다. 그가 이끈 NPO PM(응용역학 과학생산연합)은 30여 종의 우주 시스템과 1,000기 이상의 위성을 제작해 소련 전체 위성의 3분의 2를 책임졌으며, 오늘날 ISS 레셰트뇨프 사로 이어져 러시아 위성산업의 중추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수상자이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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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2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입학, 전쟁으로 알마아타 피난
1942–46세르푸호프 항공정비사 학교 수료, 제26예비전투항공연대 정비사 복무
1950MAI 우등 졸업, 티호미로프 지도로 로켓 주제 졸업논문
1950–57OKB-1(코롤료프) 기술사 → 선임기술사 → R-11 미사일 수석설계자
1958–59OKB-1 부수석설계자, CPSU 입당(1951)
1959–61OKB-1 동부지부장(크라스노야르스크-26), 얀겔로부터 경량발사체 인수
1961–67OKB-10 수석설계자, 코스모스 발사체·스트렐라 위성 첫 발사(1964)
1967–77KB PM(응용역학 설계국) 총설계자, 몰니야·라두가 위성 계열 개발
1977–96NPO PM 총설계자 겸 총괄국장, GLONASS(1982)·에크란·고리존트·루치 등 완성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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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은 1974년 『마스터 타모다』로, 거만하고 식민지적으로 물든 말쟁이 '타모다 선생'은 앙골라 문학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민중의 사회적 처지"라고 말했다.
필명 우안넹가 시투로 알려진 앙골라의 간호 보조원·민족주의자·작가. 1924년 8월 29일 이콜루 이 벵구 주 카롬보로카에서 태어났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의료 보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7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독립을 위한 비밀 활동을 벌이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가석방으로 MPLA에 복귀해 루안다 시 조직부를 이끌었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2014년 2월 13일 루안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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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701942년부터 카테테-루안다에서 위생 요원으로 일했고, 1947년 간호 보조원 자격을 취득한 뒤 딩게·쿠이투·칼룸부·문구·카비리·봉 제주스 두 콴자와 벵겔라·루반구 병원의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했고,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재판과 유죄 판결 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57–1958루안다 외곽에서 당시 태동하던 MPLA와 '에스팔랴 브라자스' 그룹과 연결된 전단 위원회를 통해 앙골라 독립을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벌였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70–19881970년 가석방 후 MPLA에 복귀해 같은 해 루안다 시 조직부(DOM)를 이끌었고, 1974년 중앙위원이 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으며 한때 당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독립 후 혁명평의회에 임명되었다.
1979–1983루안다 주 위원 1979–1980년, 보건부 장관 1980–1983년.
1983–2000s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 주재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사(동독에서는 정치학도 공부)를 역임했고, MPLA 소속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나이를 이유로 물러났다. 2009년에는 MPLA 소속 최고령 의원으로 보도되었다.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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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썼다: "소비에트 역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했지만… 역사의 세부가 선입견과 충돌할 때는 후자가 양보해야 한다… 나는 좌파로 남아 있으며,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국의 경제사가. E. H. 카와 함께 『계획경제의 기초』를 집필했고, 카의 작업을 이어받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업화』 전7권을 완성했다. 휘트크로프트와 공저한 『기아의 해』(2004)에서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5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계획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흉작·지도부의 뒤늦은 대응이 결합된 결과로 설명했다. 젊은 시절 영국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 헝가리 침공 후 탈당했고, 좌파로서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평생 지켰다.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에크란'의 개발을 이끌었고,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해 국민 대다수가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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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2018년 11월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계류 중이던 2019년 8월 4일 복역 중 사망했다. 최고재판부는 판결을 무효로 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심 판단 기록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혁명가로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였다. 폴 포트의 '2인자'로 불렸고 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과 정부수반 대리를 지냈다. 2014년 반인륜범죄로, 2018년 11월 16일 베트남인·참 집단학살과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60–1998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
1970북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 교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6–1979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 정부수반 대리
199812월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20079월 19일 체포되었다
20148월 7일 사건 002/01에서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201811월 16일 사건 002/02에서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등 유죄를 선고받고 두 종신형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나는 태양을 향해 우주선을 지향시킬 수 없다」 — 소유즈 1호의 잇단 고장 속에서도 코마로프는 끝까지 수동 조작을 시도하며 지상에 상황을 보고했다.
소련 공군의 시험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로, 1964년 보스호트 1호 사령관으로서 세계 최초의 다인승 우주비행을 지휘했다.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우주비행사 중 한 명으로,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훈련 평가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1967년 소유즈 1호의 첫 유인 시험비행에서 단독 조종사로 나섰으나, 재진입 후 주낙하산 미전개로 귀환선이 추락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사망자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설계 검증과 안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로부터 민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다」
1949년 보병장교로 임관해 루마니아 공산군에서 승진을 거듭, 1985년 차우셰스쿠에 의해 국방장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혁명이 발발하자 티미쇼아라 진압을 지휘했지만 17일 정치집행위원회에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우셰스쿠에게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개 질책을 받았다. 22일 아침 차우셰스쿠와의 마지막 대면 직후 CC 청사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쏴 사망했고, 그의 죽음이 보도되자 루마니아군은 일제히 혁명 대열에 합류해 독재 정권 붕괴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1986년 12월 16일, 알마아타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는 단 18분 만에 끝났다. 모스크바에서 급파된 라주몹스키가 쿠나예프의 해임과 콜빈의 임명을 통보하자,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겐나디 콜빈은 소련의 당 기구에서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브레즈네프식 간부였으나,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예기치 않게 역사의 분수령에 서게 되었다. 니즈니타길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카자흐스탄과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의 임명은 알마아타에서 수천 명의 카자흐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는 젤톡산(12월) 봉기를 촉발했고, 이는 소련 민족문제의 폭발을 예고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다 1990년 은퇴했고, 1998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샤도프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뚫을 광부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 중 누구라도 가지 않겠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야 한다."
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체렘호보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와 톰스크 공대를 거쳐 광산기사로 성장했고, 보스티부골(Vostsibugol) 생산합체의 총책임자를 거쳐 1985년 12월 소련 석탄공업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네륜그리·베료좁스코예 등 신규 탄광 개발과 노천 채탄 기술의 대규모 도입을 주도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에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굴착하는 광부들을 직접 지휘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를 휩쓴 대규모 광부 파업에 직면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지지로 해임되면서 소련 석탄공업장관직은 그와 함께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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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 '안가르스트로이' 콜호스에서 농업 노동
1944–1948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 전기기계과 수학, 졸업
1948–1950체렘호보우골 트러스트 5-비스 탄광에서 구역 정비사, 구역장, 수석정비사 보좌
올레크 보골몰로프는 사회주의권의 국제경제 관계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이자 학술기관 운영자였다. 그는 동유럽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개혁 경험을 비교 연구하며 계획경제의 경직성과 시장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함께 검토했다. 안드로포프가 경제 개혁 준비를 추진한 1983년에는 관련 위원회에 참여해 개혁 논의에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 이후에도 시장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적 선택지를 넓혔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으로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자 뒤에 베트남 부주석이 된 외교관
196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민족해방전선 대표단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이 되어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사덱 성 출신으로 민족주의 지도자 판쩌우찐의 외손녀다. 1948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1~1953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사이공의 치호아 감옥에 갇혔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을 지냈고, 1969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어 파리 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다. 통일 뒤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92~2002년 두 차례 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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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베트남 공산당에 가입하고 풀뿌리 조직가로 활동했다.
1951–1954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치호아 구금시설에 수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석방되었다.
1969민족해방전선 파리 대표단 부단장을 맡았고, 뒤이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 겸 파리 대표단장을 지냈다.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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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1945영국 공산당 입당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어느 일방의 우월을 배제하는 평등과 동등한 안보의 원칙 위에서' — 1985년 제네바 군축협상 개시 성명
소련 외무부의 대표적 군축 전문 외교관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SALT-I·SALT-II·INF·START-I에 이르기까지 소련-미국 간 전략무기 협상의 결정적 국면에서 소련 측 실무를 이끌었다. MGIMO 졸업 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과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을 거쳐, 1985년 군축·군비제한문제국장으로서 제네바 협상에서 소련 대표단 단장을 맡았다. INF 전면폐기 조약(1987)과 START-I(1991)의 타결을 실무적으로 관철시켰고, 1990년 외무차관에 올라 소련 붕괴 직전까지 대미 전략무기 관계를 총괄했다.
1971년 3월, '5개년 계획의 석유 채굴 과제 수행과 높은 기술·경제 지표 달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마이코프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타타르·페름 유전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석유공업 장관(1977~1985)까지 오른 인물. 발렌틴 샤신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장관직을 이어받아, 브레즈네프 후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지휘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로 이끌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냈고, 고르바초프 집권 직전인 1985년 2월 퇴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1) 수훈자이며, 퇴임 후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사하로프조차 비밀에 부친 '제3의 아이디어'의 수수께끼에서, 곤차로프는 그 실마리가 푹스의 1948년 보고서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1987년 총리가 되어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3~4일 군사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쓰촨 출신으로 아버지가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저우언라이 부부의 보호 아래 자랐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배워 전력 관료로 성장했고 1987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5월 18일 학생 대표들과의 텔레비전 대화가 결렬된 뒤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4일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삼협댐 건설을 밀어붙였고 1998~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사망했다.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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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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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도 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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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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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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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소말리아군을 격파한 지지가 전투를 지휘했다. 사료는 지지가 탈환 시점을 1978년 3월 4일과 3월 5일로 각각 기록한다.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1930~1989)는 쿠바 혁명군(FAR)의 사단장이자 쿠바 공화국 영웅이었다. 카코쿰 출신으로 1958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고, 피그스만 침공을 막았으며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을 20여 년 지냈다. 1975년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섰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1984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89년 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료는 둘째 이름을 토마스와 테오도미로로, 사망 당시 나이를 58~59세와 57세로 각각 기록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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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1974–1983소련 재무차관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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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소련 정부 수반이 된 실라예프는 옐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연방 재산을 러시아로 이전하는 포고령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달 뒤 그는 해임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고리키 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20년 만에 공장장이 된 항공산업 관료였다. 1981년 항공공업장관으로 취임해 MiG-29, Su-27, Tu-160, 부란 우주왕복선 등 소련 항공·우주 기술의 정점을 총괄했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1990년 옐친에 의해 RSFSR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실상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옐친이 연방 기관을 일방적으로 접수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한 달 만에 해임되었고, 소련 해체라는 결과에는 결국 맞서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이다.
1991년 2월, 새 내각에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한 지도부에 나는 필요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1980~1989)으로서 전략미사일과 에네르기아-부란 우주왕복선의 핵심 제어 체계를 총괄한 군수산업 행정가다. 부란 프로그램의 성공적 시험 비행을 이끈 공로로 1990년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정부 운영을 책임지다 1991년 신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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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노보체르카스크 공과대학 졸업, 크라스노다르 전자계측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경력 시작
1954–1968크라스노다르 ZIP 공장에서 기술실험실장·특별설계국장 거쳐 주임기사까지 승진
1968–1974기기제조부 중앙기구에서 전자계측기 총국 주임기사, 이후 소유즈엘렉트로프리보르 국장
1977년 2월 3일 그는 수도 밖에서 민병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고 있었고, 관측자들은 그 일이 목숨을 구했다고 보았다. 11월 11일 데르그 본부에서 체포돼 이튿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1974년 황제를 축출한 군사위원회 데르그의 창설 세대다. 제4사단 소령으로 데르그 부의장에 선출됐고 1975년 4월 이후 중령이 됐다. 1976년 에리트레아 전선에 보낼 수만 명의 농민 민병 모집을 맡았고 보수적·민족주의적·종교적 성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7년 2월 3일 총격에서 살아남아 제1부의장이 됐으나 같은 해 11월 12일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시베리아 빈농가 출신으로 14세에 집을 나와 노릴스크 기술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를 우등 졸업했다. 14년간 아무르의 조선소에서 핵잠수함 원자로를 설치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73년 체르노빌 원전으로 옮겨 3·4호기를 총괄하는 부수석기사가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을 현장 지휘했고, 사고 후 설계 결함이 원인임을 주장했으나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도 RBMK 노형의 구조적 결함을 입증하려 애쓰며 『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집필했고, 1992년 IAEA 자문보고서는 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다.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바레를 대신해 수개월간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가덴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970년부터 국방장관, 1971년부터 부통령을 맡았고, 평의회 해산 뒤 1976년 혁명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당 장악을 상징했다. 1987년 쿠데타 이후 첫 총리가 되었으나, 이삭족 학살 지휘 책임으로 미국 법원에서 21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았다.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1931년 저장성 주지 출신. 1965년 11월 10일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실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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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7귀국해 프놈펜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시아누크의 상쾌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좌익 탄압을 피해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했다
1973–1974FUNK·GRUNK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중국·조선·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알제리 등을 순방했다
1976–1979민주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1976비동맹 정상회의에 민주캄푸치아 대표로 참석했다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에서 부주석 겸 외무를 맡아 유엔 의석 유지를 주도했다
1985–1998폴 포트를 공식 계승해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되었다
1997폴 포트를 비난하고 크메르 민족연대당을 창당해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9812월 누온 찌어와 함께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2007체포되었고, 국제적 압력에도 훈 센 총리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20148월 7일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811월 16일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참 집단 학살 관여는 무죄로 인정됐다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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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1976년 4월, 전자공업부 전시회에서 동료 장관 발렌틴 프롤레이코는 페르비신을 이렇게 평했다: "자기 쪽 작업이 뒤처진 데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빈정거리며 오직 불평만 늘어놓았다."
시베리아 설치 현장에서 출발한 통신기사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간 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군사령·통제·통신(C3) 체계의 중추인 보안통신·무선중계·레이더 장비 생산을 총괄했다. 1989년 통신부 장관으로 옮겨 통합 통신망 구축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에는 러시아 통신 기업을 이끌며 민영화 전환기에 활동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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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하리코프 계기공장의 조립공으로 출발해 소련 로켓·우주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일반기계공업부 장관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에네르기야-부란 왕복우주선 계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 우주개발의 마지막 대역사를 이끌었다. 1988년 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로 당의 군수정책을 주관했고, 1991년 8월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8인 중 한 명으로 소련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후 1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2021년 사망 당시 GKChP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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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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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고멜 출생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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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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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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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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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4인방의 최연소자. 상하이 면방직공장 보위 간부에서 1966년 11월 노동자 반란 본부를 세우고 상하이 코뮌을 조직했으며, 38세에 당 제2부주석까지 올랐다가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체포되었다.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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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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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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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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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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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1981년 12월 2일 해임되어 체포됐으나, 12월 5일까지 총리·당 서기장직을 유지했다. 같은 날 헹 삼린이 당 서기장이, 찬 시가 총리 대행이 됐다.
크메르루주와 결별하고 베트남과 협력한 캄보디아 정치가다. 1978년 캄푸치아 구국 민족 통일전선 창립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1979년 정권 교체 뒤 인민혁명당 서기장으로서 당·행정 체제 건설을 이끌었다. 1981년 6월 총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베트남의 압력으로 해임·체포되어 1992년까지 구금됐다.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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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그는 재판을 앞두고 안경을 깨뜨려 그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 법정은 한 번 연기되어야 했다.
니콜라이 포민은 1972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하여 1981년 주임기사로 승진한 소련의 원자력 기술자였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직후 현장에 도착한 그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끝내 믿지 않고, 파손된 4호기에 수시간 동안 냉각수를 계속 주입하도록 강행했으며 부하 직원을 치사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찰 임무에 보냈다. 사고 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전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수용 끝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칼리닌 원전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회의 전날 아침, 그는 레바논 공산당 지도자 조지 하위에게 "오늘 구체적 제안을 할 텐데, 알리 나세르가 거부하면 권총을 뽑아 내 머리를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예멘 민족해방전선 유격대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인민민주공화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다. 소비에트 모델로 군대를 재편하고 1978년 살림 루바이 알리 축출과 1980년 이스마일 퇴진을 주도하며 권력 핵심에 섰다. 훗날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의 경제 자유화에 반대해 반대파의 중심이 되었고, 1986년 1월 13일 정치국 회의장에서 대통령 경호원의 총격에 사살되자 장교단이 대통령에게서 이탈하며 남예멘 내전이 불붙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1991년 8월 22일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고 썼다. 발사 순서는 사료가 엇갈리며, 검찰은 그가 먼저 쐈다고, 야블린스키의 목격 진술은 아내가 마지막에 쐈다고 본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콤소몰과 당 사업을 거쳐 1980~1984년 라트비아 KGB 의장, 1984~1989년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12월 소련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법질서 노선을 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해 내무기관을 그 결정 실행에 동원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8월 2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흑색 1월 뒤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직접 이끌며 모스크바의 현장 대리인이 되었다.
빅토르 폴랴니치코는 소련 공산당의 조직가이자 국제 공산주의권의 정치 고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남캅카스에서 모스크바의 정책을 현지 권력으로 옮긴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2서기로서 그는 흑색 1월 이후 바쿠의 통치력을 회복하려 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이끌며 군대와 당 기구를 결합한 강경한 질서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쟁을 억누른 중재자이자 강압을 동원한 중앙의 대리인으로 상반되게 기억된다. 소련 붕괴 뒤 러시아 부총리급 임시행정 책임자가 되었으나 1993년 북오세티야에서 피살되었다.
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500일 프로그램을 통해 가격 형성 연구를 소련 경제의 시장 전환 구상으로 밀어붙였다.
니콜라이 페트라코프는 가격 형성과 경제적 균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며 계획경제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였다. 그는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 개혁을 탐구했고, 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구상은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 공화국으로의 권한 이양을 통해 소련 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했으며, 페트라코프의 연구와 정책 활동은 학술적 모델과 급박한 정치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이후 시장문제연구소를 세워 시장 전환과 경제정책 연구를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5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1963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산업 생산의 수익성과 가격 형성 연구
1970–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1972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계획경제의 가격 형성 연구
1984–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경제 담당 보좌관, 이후 소련 대통령 경제 담당 보좌관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1977년 5월 20~21일 MPLA 중앙위원회가 그와 니투 알베스를 분파주의 혐의로 제명했고, 5월 27일 쿠데타 미수가 뒤따랐다.
앙골라의 군인·정치가·반식민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계열이던 가족의 영향으로 의학 공부를 접고 MPLA에 들어가 루안다 지하위원회를 조직했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0년 1월 군사정보 임무로 포르투갈 식민군에 입대해 무기를 빼내다 체포됐다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뒤 석방됐다. 1974년 7월 룬도지 회의에서 최연소 중앙위원이 됐고, 1975년 3월 FAPLA 국가정치위원 겸 부참모장에 임명됐다. 1976년 제25차 소련공산당 대회에 니투 알베스와 함께 참석했고, 정통 공산주의 니티스타 지도부였다. 1977년 5월 제명 뒤 체포돼 처형됐다.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1986년 1월 무력 충돌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살아남아 2월 예멘사회당 서기장에 올랐다.
남예멘의 혁명 지도자로 예멘사회당 서기장으로서 남예멘의 마지막 시기를 이끌었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의 동맹자로 1986년 1월 아덴 무력 충돌에서 살아남아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 세력이 패퇴한 뒤 당·국가 지도권을 장악했다. 1990년 통일 예멘의 초대 부통령이 됐으나 1993년 사임하고, 1994년 내전에서 단명한 예멘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 뒤에는 남부 독립운동 알히라크를 이끌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1986년 1월 총격 당시 그는 인도에 있었고, 소련에서 내전 수습을 협상한 뒤 귀국해 대통령에 올랐다.
하드라마우트 출신 전기기술자로 민족해방전선에서 성장해 남예멘의 장관과 총리를 거쳤다. 1986년 아덴 유혈 충돌 뒤 대통령에 올라 혼란을 수습했고, 남예멘의 마지막 국가수반으로서 1990년 남북 통일을 주도해 통일 예멘의 초대 총리가 됐다. 1994년 내전에서는 남부 분리 정부의 총리를 맡았다가 패배 뒤 망명했다.
1977년 8월 체포와 그 뒤의 소식 단절은 더르그의 탄압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을 넘어 자기 협력자였던 메이손 지도부로 돌아선 전환점이었다. 1979년 무렵의 사망은 여러 사료가 전하지만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으로, 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메이손)의 지도자이자 의장이었다. 오로미아 월레가 아르조 출신으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후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었다. 1975년 12월 더르그가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을 맡아 1976년 4월 20일 발표된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했다. 1977년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되었으며, 수개월의 구금 끝에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1979년 무렵 사망했다는 서술은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라틴 문자 쿠베 철자법의 선구자로 '쿠베의 아버지'라 불린다.
상세 이력 보기
1968유럽 에티오피아 학생연맹 제8차 대회에서 메이손 창립에 참여하고 유럽 오로모 학생 학습반을 조직·지도
1973파리에서 쿠베로 쓴 오로모어 문법서 『히르마타 두비 아파안 오로모』를 출간
1974–1975에티오피아로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보급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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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1996년 결선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아 미르차 스네구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표트르 루친스키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관료로 성장해 소비에트 말기의 공화국 정치와 독립 이후 몰도바 국가 형성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1989년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독립 뒤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와 의회 의장을 거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몰도바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제도권의 연속성과 새 국가의 주권·대외노선 조정이 한 정치가에게 겹친 과정을 보여준다.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로, 1972년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해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서인도제도대학 강단에서 탈식민 사회과학의 중심을 세웠고, 가이아나에서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예멘의 군인·정치가로 예멘사회당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고 독립 뒤 군에서 성장했으며, 당 분열 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알투그마 계열에 섰다. 1986년 1월 13일 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을 때 숨졌다. 그의 죽음은 뒤이은 내전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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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대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NLF) 참여
1967 이후독립 뒤 남예멘 군에서 성장, 제22보병여단 지휘
1978예멘사회당 창당 당시 이미 당의 고위 인사
1979.08.11당내 분쟁 속에 내무장관직에서 해임
1980.10.16–1981.08.30내무장관 (사료에 따라 1980~1982년으로 기재되기도 함)
1981.08.30–1986.01.13국방장관, 1985년 2월 하이다르 알아타스 내각에서도 유임 (사료에 따라 1982년부터로 기재되기도 함)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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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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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1977년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나는 곧 혁명의 화신이다"라며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앙골라 해방운동 MPLA의 초대 내무장관이자 급진 '니티스타' 파벌 지도자였다. 식민지 전쟁기 뎀보스 지역 게릴라 지휘관으로 떠올라, 독립 뒤 내무부를 장악해 추종자들을 국가 기구 곳곳에 심었다.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 스스로를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로 내세워 소련의 지지를 구했으며, 이것이 네투 지도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식 채택을 재촉했다. 1977년 5월 쿠데타 미수 끝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 당시 아찰로프는 공수부대의 모스크바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봉쇄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1월 13일 타타르 자치공화국 아트닌스키 구의 아타마시 마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6년 카잔 전차학교, 1973년 장갑병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7근위공수사단장(1978), 제8근위군 사령관(1985~1987), 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1987~1989)을 지냈으며 1980년 소장이 되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1990년 12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1989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17일 KGB 시설 회의에서 권력 장악에 합의한 국방차관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고, 1993년에는 루츠코이의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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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위로부터의 혁명』의 핵심 주장은 소련의 집권 정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늘리려 스스로 체제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M. 코츠는 제도 변화와 정치경제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프레드 위어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경제 붕괴와 대중 봉기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넓히려 체제를 해체한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표 저서인 『Revolution from Above』는 소련의 정체, 페레스트로이카, 자본주의 연합의 형성과 그 이후 러시아를 연결해 해석했다.
아만바예프는 농업 전문가 출신의 키르기스 공산당 간부로, 당 조직과 지역 행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소련이 해체로 향하던 1991년 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두 직책은 연방 붕괴와 함께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는 이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정부 업무를 맡아 소비에트 당 관료와 새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었다.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파벨 팔라젠코는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핵심 대화 현장을 기록한 통역자이자 저술가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통역을 맡아 제네바, 레이캬비크, 몰타 등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회고록은 정상들의 발언뿐 아니라 군축 협상과 신뢰 형성이 작동한 실무 현장을 보여 주며, 평화로운 냉전 종식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국제관계와 언론 업무를 맡으며 통역과 정치 분석을 이어 갔다.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동료와 함께 도피했다가 3주 만에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한 처형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앙골라 태생의 의사이자 혁명가다. 포르투갈공산당에 입당해 지타 세아브라와 함께 공산학생동맹(UEC)을 이끌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는 UEC 대표로 모스크바의 콤소몰 대회에 파견되어 있었다. 1975년 앙골라로 돌아와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통파에 합류했으며,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사망 시점은 사료마다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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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04UEC 대표로 모스크바 콤소몰 대회 참석
1975앙골라 귀환, MPLA 친소 정통파에 합류
1976–1977니투 알베스의 지시로 혁명적 지식인위원회 책임, 대중조직부(DOM) 산하 활동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그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이고르 그랴진은 에스토니아의 법학자이자 정치가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회에 진출한 그는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비밀 의정서와 발트 국가 병합의 법적 의미를 검토한 에스토니아 측 법률가였다. 그의 활동은 학술적 법률 논증을 소비에트 해체기의 주권과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 연결했다.
4호기 교대 감독관, 사고 당일 수습을 지휘하고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소련 원자력 기술자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소련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9월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7월 10일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에서 그가 원자로 정지를 지시했고 01시 23분 39초에 AZ-5 버튼이 눌렸으나 실제로 누른 사람은 증언이 엇갈려 분명하지 않다. 폭발 후 약 8시까지 4호기에 남아 소방대와 구급대를 부르고 급수 계통 밸브를 수동으로 열게 했으며, 15Gy를 넘는 치명적 피폭을 받았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33세로 사망했고, 일부 영어권 출처는 5월 10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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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제어봉 문서를 공부하던 톱투노프는 친구 사샤 코롤에게 '특정 조건에서는 제어봉이 반응을 늦추기는커녕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석 달 뒤 그 예감은 그가 직접 누른 AZ-5 버튼에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트 톱투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로, 1986년 4월 26일 참사 당시 야간 교대조 제어반을 맡고 있던 불과 25세의 기술자였다. 독립 근무 석 달째 처음 맞은 정지 작업에서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으나 RBMK 제어봉의 설계 결함이 반응도를 급증시켜 폭발을 촉발했고, 사고 직후 통제실로 돌아와 물 공급 밸브를 수동 개방하다 1,300렘의 치명적 방사선을 흡수해 5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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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우크라이나 수미주 니콜라예프카에서 출생
1983오브닌스크 원자력공학연구소 졸업
1983–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무: 블록 제어 기술자, 이후 4호기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야간 교대조에서 AZ-5 비상정지 작동, 치명적 방사선 피폭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피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에서 반당 그룹에 대한 언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거의 네 배 많았다고 지적했다.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피지코프는 1965년 11월 27일 모스크바주 라멘스코예에서 태어나 2019년 9월 16~17일 밤 모스크바에서 폐색전증으로 사망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국가 관료다. 1998년 후보 학위, 199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3~2004년 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을 지녔다. 말년에는 17세기 교회 분열과 구신도 연구로 널리 알려졌는데, 구신도가 혁명과 소비에트 체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구신도계 안에서도 평가가 갈렸다. 타타르-몽골 지배 부정 같은 음모론적 문명사 구상으로도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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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모스크바주 교육대학 역사학부 졸업
1989년부터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당사 부문 연구원
19981953~1964년 소련 사회의 사회정치 발전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19991950~1960년대 소련 사회의 정치개혁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2000러시아 연방 통신정보부 장관 보좌관
2000–2003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보좌관
2003.6.5–2004.6.18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으로 교육의 질 관리와 기관 국가인가를 담당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 세력으로 몰아 체포·처형했고, 그 뒤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으로, 1921년 제1차 당대회에서 몽골인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어 서기와 부의장을 지냈고 1923~1928년에는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을 맡았다.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의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온건파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로 몰아 체포·처형하는 데 가담했고, 이후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1928년 제7차 당대회에서 '우경'으로 제명되어 모스크바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로 밀려났으며 1934년 6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르딘 에르흐』, 『위넨』과 잡지 『몽골 아르딘 남』의 초대 편집인이자 엥겔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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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나이슬레l 후레와 히악트에서 전신·철도 통신 노동자
1920가을부터 애국자 운동에 참여
1921제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선출, 임시정부 대외관계부 관료; 3월 중앙위원회 대행 의장
1921–1923중앙위원회 서기; 1922년 1~3월 부의장, 3월 15일~1923년 1월 12일 의장
1921서부 국경 담당 전권 대표로 백위군과 싸우고 서부 국경 정부·인민당 위원회 수립에 참여
1924–1928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 (1924년 8월 31일~1928년 10월 27일)
1928–1929소련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 1929~1932년 모스크바 국민경제고등학교 수학
1938년 6월 13일 밤, 훈장을 단 야전 복장으로 제59국경분견대에 나타난 류시코프는 분견대장에게 비밀 요원과 단독 접선한다며 물러나게 한 뒤 국경을 넘어 일본 측에 투항했다.
오데사 출신으로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근무하며 192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극동의 체카·OGPU·NKVD 요직을 거쳤다. 1930년 독일 융커스 사에 대한 산업스파이 임무를 수행했고, 1936~1937년 아조프-흑해 지역과 극동의 NKVD 국장을 지내며 대숙청의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지휘했다. 1937년 극동 NKVD 국장 재임 중 고려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 데 관여했으며, 이는 25만 명 규모 추정치의 사망자를 낳은 소련 최초의 민족 단위 강제이주였다. 1938년 6월 체포될 것을 알아차리고 만주국으로 넘어가 일본 측에 투항해 소련 군사정보를 넘겼고, 1945년 8월 소련군이 다롄에 다가오자 일본 측 인사에게 사살되었다.
1964년 10월 19일,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으로 향하던 비류조프 일행의 소련 공군 Il-18이 안개 속에서 착륙 코스를 이탈해 아발라 산에 충돌했고, 승무원 11명과 대표단 7명 등 18명이 숨졌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스코핀(랴잔주)에서 태어났다. 공식 러시아 측 전기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적고, 다른 자료는 러시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서술한다. 1922년 9월 15일 적군에 입대해 1926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를, 193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30소총사단 참모장, 1939년부터 제132소총사단장을 지냈다. 독소전쟁 첫해에 다섯 차례 부상을 당했고, 제48군과 제2근위군 참모장, 남부·제4우크라이나·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을 거치며 돈바스·크림 해방과 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를 기획했다. 전후 방공군과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내고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10월 19일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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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란코프가 1946년(란코프는 9월), 영어 위키백과가 1945년 10월로 갈린다. 1947년에는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란코프는 그가 조선 국가보위의 최초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 출신 고려인으로,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출생 연도도 출처에 따라 1912~1914년으로 갈린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정보기관에서 일했고,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란코프가 1946년, 영어 위키백과는 1945년 10월로 적는다. 1947년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1948년 9월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이 되었으나,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안전상(1951년 3월/5월설)과 내무상(1960년 11월까지)을 지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를 탄압 체계의 조직자이자 명령에 순종한 집행자로 함께 서술한다. 소련파였으나 충성으로 숙청을 피해 1992년 7월 18일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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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4카자흐스탄 강제이주 후 크질오르다에서 검사, 1942~1944년 크질오르다·탈디쿠르간 검찰 근무(러시아어 위키백과). 1940년 당 입당. 란코프는 1946년 이전 행적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1947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란코프). 영어 위키백과는 1947년 5월 내무국 총국장으로 적으나, 1948년 이후 내무성 산하 국(局) 체제와 어긋나 단정하기 어렵다
1948최고인민회의 대의원(러시아 위키백과)
1948년 9월–1951년 2/3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영어 위키백과).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1951년 3월/5월–1952년사회안전상(정치보위국이 사회안전성으로 개편). 3월설은 영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월설은 영어 위키백과 사회안전성 문서
1952년 10월–1960년 11월내무상(사회안전성이 내무성으로 개편)
1956년 8월8월 종파사건 때 내무상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평양을 감시하고 '종파주의자' 수사를 지도(영어 위키백과). 같은 사건 문서에는 당시 그가 해외에 있었다는 기술도 병존한다
1956–1980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 선출, 1970년 11월·1980년 10월 재선)
1960년 11월–1972년중앙재판소 부소장, 1966년 11월부터 당 연락국 정보 책임자
1972년 12월–1992년중앙재판소 소장(1982년·1986년 재임명, 사망 시까지 재임)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발사 때 접혀 있던 볼가 에어록이 궤도에서 부풀어 오른 뒤 그 문을 열고 우주로 나갔다.
보리스 미하일로프는 모스크바 근교 토밀리노의 제918공장(훗날 NPO 즈베즈다)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하며 1964년 중반, 단 9개월 만에 팽창식 에어록 '볼가'를 설계·제작·시험한 인물이다. 보스호트 우주선에 금속제 에어록을 탑재할 공간이 없었기에,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궤도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유연 구조물 설계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바로 이 에어록을 통해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946.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1946.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앙골라의 화학 공학자·외교관·정치인. 리스본 유학 중 1956년 MPLA 창립 문서 「1956년 선언」에 서명하고 1961년부터 PIDE의 감시를 받다가 1962년 포르투갈을 떠나 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를 맡았다.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를 거쳐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뒤 MPLA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로 1998년 인터뷰에서 당·국가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6월 26일 루안다에서 76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6–1962리스본 대학 이학부에서 화학 공학 수학, 제국학생회관 거주, 1956년 선언 서명, 1961년부터 PIDE 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