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공산주의 불가리아 (1934–1945 소련 시민권 겸유)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사망 경위 일부 미확인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라이프치히 재판 (1933)

1933년 2월 27일 독일제국 의회(라이히스타크) 화재 사건 직후 나치는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검거에 나섰다. 디미트로프는 두 동료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및 독일 공산당 원내대표 에른스트 토르글러와 함께 피고로 기소되었다. 라이프치히 제국법원에서 열린 재판은 1933년 9월 21일부터 12월 23일까지 3개월간 계속되었다. 독일어에 능통했던 디미트로프는 법정을 반나치 고발의 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36차례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5차례 법정에서 퇴장당했으며, 헤르만 괴링에 대한 반대신문에서는 검사가 오히려 피고처럼 몰리기도 했다. 재판 라디오 중계는 나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중단되었다. 반 데어 루베만 사형을 선고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디미트로프를 포함한 나머지 네 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스크바가 불가리아인 세 명에게 소비에트 시민권을 부여한 후 이들은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이 재판의 여파로 나치는 정치 사건을 일반 법원에서 분리해 인민재판소(Volksgerichtshof)로 이관했으며, 이후 반체제 인사들은 공개 재판 없이 구금·처형되었다.

불가리아 지도자 시기 (1945/1946–1949)

코민테른이 해산된 뒤 디미트로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고(1943년 12월 27일–1945년 12월 29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1937–1945)을 지냈다. 1933년부터 당 서기장으로 재직한 그는 1945년 또는 1946년에 22년 만에 불가리아로 돌아왔다(영어 자료는 1946년, 러시아어 자료는 1945년 11월). 1946년 9월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된 뒤, 그는 키몬 게오르기예프를 이어 총리(1946년 11월 23일–1949년 7월 2일)가 되었으며, 그 전부터 이미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소비에트 시민권은 유지했다.

총리 취임 후 첫 행동 중 하나는 티토와의 남슬라브 연방 협상이었다. 양국 지도부는 1944년 11월부터 이를 논의했고, 1947년 블레드 협정(디미트로프와 티토 서명)으로 국경 통행 장벽 철폐, 관세동맹 구상, 유고슬라비아의 불가리아 전쟁 배상금 일방 면제가 합의되었다. 예비 계획에는 피린 마케도니아의 마케도니아 인민공화국 편입과 서부 변방 지역의 불가리아 반환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디미트로프가 양국을 대등하게 놓고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붙이는 구상을 한 반면, 티토는 불가리아를 베오그라드가 지배하는 일곱 번째 공화국으로 보았고 마케도니아인을 별개 민족으로 보았다. 1948년 스탈린-티토 결별 이후 연방과 통일 마케도니아 구상은 폐기되고 마케도니아인 교사들이 추방되었으며 마케도니아어 교육이 중단되었다. 제5차 당대회에서 디미트로프는 티토를 '민족주의'라고 비난했다.

모스크바에 있던 1944–45년에 그는 이른바 '인민법원'의 작업을 직접 조정했고, '그 쓰레기'를 위한 특별 노동수용소 설치를 명령했으며, 체제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가족 추방에 관해 인도와 자비의 고려가 어떤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는 1944년 이후 불가리아 탄압에서의 그의 책임을 보여주며, 반대파가 분쇄되고 그를 중심으로 대규모 개인숭배가 세워진 것과 함께 기록된다.

그는 1949년 7월 2일 모스크바 근교 바르비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독살되었다는 추측은 확인된 바 없지만, 그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었다.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묘에 안치되었고, 공산 통치 종료 후 1990년 소피아 중앙묘지에 매장되었으며 묘는 1999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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