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
파시즘의 위협은 어떻게 어제의 적들을 한 줄에 세웠고, 200만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한 한 달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얻지 못했는가?
1934년 2월 극우 동맹들의 폭동을 계기로 사회당·공산당·급진당이 결성한 인민전선은 1936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해 레옹 블룸의 정부를 세웠다. 승리와 취임 사이의 공백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파업이 터졌다. 6월 한 달에만 파업 12,142건에 참가자 183만 명, 그 4분의 3이 공장을 점거한 채 기계 옆에서 먹고 자는 새로운 방식의 파업이었다. 6월 7일 밤 마티뇽 협정으로 사용자들은 임금 인상과 단체협약, 노조 활동의 자유를 한꺼번에 내주었고, 의회는 곧바로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다. 그러나 스페인 불개입과 프랑 평가절하, 개혁의 「휴지기」를 거치며 연합은 안에서부터 무너졌고, 1938년 11월 총파업의 패배로 인민전선 시대는 막을 내렸다.
광장의 폭동에서 하나의 선서로
1934년 2월 6일 저녁, 악시옹 프랑세즈와 불의 십자단을 비롯한 극우 동맹들이 하원 의사당을 향해 행진했다. 경찰이 콩코르드 광장에서 발포해 15명이 죽고 1,500명 넘게 다쳤으며, 급진당 총리 달라디에는 이튿날 사임했다. 폭동 자체는 조직된 쿠데타가 아니었다는 것이 오늘날 연구의 대체적인 결론이지만, 당시 좌파는 이것을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으로 읽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지 1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서로를 주적으로 부르다 각개격파당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다.
응답은 아래로부터 왔다. 2월 12일 CGT가 부른 총파업 날, 사회당과 공산당은 따로 행진을 시작했으나 나시옹 광장에서 두 대열이 만나자 노동자들은 「단결!」을 외치며 서로 껴안았다. 지도부의 협정은 그 다섯 달 뒤였다. 7월 27일 사회당과 공산당이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고, 10월 낭트에서 토레즈는 연합을 급진당까지 넓히자며 「노동과 자유와 평화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놓았다. 코민테른 상부가 주저하는 동안 프랑스 지부가 앞서 나간 이 순서는 이듬해 8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의 보고로 추인되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노선이 된다.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이 서명되고 스탈린이 「프랑스의 국방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승인한다」고 선언하자, 반군국주의를 정체성으로 삼아 온 프랑스공산당은 하루아침에 국방 예산 반대를 접었다. 파리 거리에 「스탈린이 옳다」라는 당의 포스터가 붙었다. 7월 14일 혁명기념일에는 50만 명이 파리에서 행진하며 인민연합의 선서를 낭독했다. 빵과 평화와 자유, 동맹들의 해산, 공화국의 방어가 그 내용이었다.
「빵, 평화, 자유」: 온건한 강령, 선명한 승리
1936년 1월 발표된 인민전선 강령은 혁명 강령이 아니었다. 파시스트 동맹 해산, 프랑스은행 개혁, 공공사업, 곡가 지지, 군수산업 국유화, 주 40시간제의 검토가 골자였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말하는 조항은 없었다. 급진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 상한선이었기 때문이다. 블룸 자신이 이것을 권력의 「정복」이 아니라 「행사」라고 못박았다.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합법성의 틀 안에서, 위임받은 만큼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4월 26일과 5월 3일의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608석 중 386석을 얻었다. 사회당이 147석으로 사상 처음 제1당이 되었고 공산당은 10석에서 72석으로 뛰었으며 급진당은 오히려 줄었다. 좌파 전체의 득표 증가는 완만했지만 표의 이동은 왼쪽으로 선명했다. 공산당은 각료를 내지 않고 밖에서 지지하는 길을 택했다. 토레즈는 입각이 「공포를 부추길 것」이라 했고 모스크바의 판단도 같았다.
승리와 취임 사이에는 한 달의 공백이 있었다. 헌정 관행상 블룸은 6월 초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 한 달을 채운 것은 의회가 아니라 공장이었다.
기계 옆에서 잠드는 파업
5월 11일 르아브르의 브레게 항공기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안에 눌러앉았다. 메이데이에 파업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동료 두 명의 복직을 요구한 점거는 하루 만에 이겼다. 툴루즈의 라테코에르와 쿠르브부아의 블로크가 뒤따랐고, 5월 28일에는 비양쿠르의 르노에서 3만 3천 명이 기계를 세웠다. 6월 첫 주에 파업은 금속을 넘어 백화점과 카페, 보험사와 농장으로 번졌다. 노동부 통계로 6월 한 달 파업 12,142건에 참가자 183만 명, 그중 8,941건이 점거 파업이었다.
점거는 이 파업의 발명품이었다. 공장 안에 머무름으로써 대체 인력 투입을 막았고, 기계를 지킴으로써 파괴자라는 비난을 차단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동자들은 무도회를 열고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르노 공장에서 일했던 시몬 베유는 이 「순수한 기쁨」을 기록했다. 명령에 쫓기지 않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기가 일하는 자리를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기쁨이었다. 파업은 지도부가 조직한 것이 아니었다. CGT도 공산당도 파업의 뒤를 쫓아갔고, 트로츠키는 6월 9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썼으며, 사회당 좌파의 피베르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썼다. 공산당 기관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고 답했다.
6월 4일 밤 블룸이 내각을 구성했다.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였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나라에서 여성 차관 세 명을 앉힌 내각이었다. 우파 의원 그자비에 발라는 의사당에서 「이 오래된 갈로로마의 나라가 처음으로 유대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취임 사흘 뒤인 6월 7일 밤 총리 관저 오텔 마티뇽에서 경영자총연합과 CGT가 마주 앉았고,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사용자들은 임금 7~15% 인상, 단체협약, 노조 활동의 자유, 노동자 대표 제도를 한꺼번에 내주었다. 주오는 이것을 노동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 불렀고, 협상장의 사용자 대표들은 공장을 돌려받는 값이라 여겼다.
의회는 6월 11일 2주 유급휴가법을 563 대 1로, 12일 주 40시간제를 통과시켰다. 11일 저녁 토레즈는 파리의 당 활동가들 앞에서 「요구가 관철되었으면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공산당의 무게가 복귀 쪽에 실리면서 점거는 6월 말까지 차례로 풀렸다.
첫 휴가와 첫 후퇴
그해 여름 60만 명이 국철의 40% 할인 「인민 티켓」으로 생애 첫 휴가를 떠났다.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레오 라그랑주가 만든 제도였다. 유스호스텔이 두 해 만에 열 배로 늘었고 해변은 처음으로 노동자의 것이 되었다. 훗날 블룸이 리옴 법정에서 자기 정부의 업적으로 꼽은 것도 국유화나 임금이 아니라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들여놓은 「한 줄기 갠 하늘」이었다.
후퇴는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7월 스페인에서 군부 반란이 일어나자 블룸은 처음에 공화국 정부를 돕고자 했으나, 영국의 압력과 급진당의 반대, 내전이 프랑스로 번질 공포 앞에서 8월 불개입 정책으로 돌아섰다. 공산당은 「스페인에 대포와 비행기를」 캠페인으로 맞섰고 연합의 안쪽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9월에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프랑 평가절하를 해야 했다. 자본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11월에는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한 내무장관 살랑그로가 극우 주간지의 날조 보도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돈의 파업」과 상원의 벽
마티뇽의 성과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물가에 잡아먹혔다. 평가절하와 함께 돌아올 것이라던 자본은 돌아오지 않았고, 물가는 1937년 여름까지 임금 인상분을 사실상 도로 삼켰으며, 프랑스은행의 금은 계속 새어 나갔다. 좌파는 이것을 「돈의 파업」이라 불렀고, 「200가문」이 공화국을 인질로 잡았다고 썼다. 문제는 정부가 그 진단에서 아무 결론도 끌어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외환 통제를 도입하지 않는 한 자본 이동은 합법이었고, 재정 정통주의를 받아들인 정부에 남은 대답은 지출 축소뿐이었다. 1937년 2월 13일 블룸은 개혁의 「휴지기」를 선언하고 공공사업 계획을 줄였으며, 프랑 방어를 정통파 경제학자 3인 위원회에 맡겼다. 시장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지만 시장은 안심하지 않았고, 지지자들은 항복 선언으로 들었다.
한 달 뒤에는 피가 흘렀다. 3월 16일 노동자 도시 클리시에서 해산된 불의 십자단의 후신인 프랑스사회당(PSF)이 영화관 집회를 열자 인민전선 지지자 수천 명이 항의 시위에 나섰고,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5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죽은 것은 정부의 적이 아니라 정부의 지지자들이었다. CGT는 항의 반나절 총파업을 불렀고, 그날 밤 병원을 찾은 블룸은 사임을 생각했다고 훗날 말했다. 인민전선 정부가 인민전선의 군중에게 총을 쏜 셈이 된 이 사건 뒤로 거리의 열기는 다시 조직되지 않았다.
6월에 투기가 다시 프랑을 덮치자 블룸은 재정 전권을 요청했다. 하원은 가결했으나 급진당 원로 카요가 버티는 상원은 두 차례 거부했다. 싸울 길이 없지는 않았다. 하원의 다수를 앞세워 버티거나 거리에 호소하는 길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요구가 당 안팎에서 나왔다. 블룸은 둘 다 거부했다. 합법성의 틀 안에서 위임받은 만큼만 하겠다던 약속은, 선출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원이 벽을 세우면 그 앞에서 멈춘다는 뜻이기도 했다. 6월 21일 그는 사임했다. 1년 전 「모든 것이 가능하다」던 나라에서, 정부는 은행과 상원 중 어느 쪽과도 싸워 보지 않고 물러났다.
해체: 쇼탕에서 11월 30일까지
정부는 급진당의 쇼탕에게 넘어갔고 블룸은 부총리로 남았다. 쇼탕 정부는 프랑을 변동환율로 풀어 두 번째 평가절하를 사실상 집행했고, 개혁 목록에 마지막 큰 항목 하나를 보탰다. 1937년 8월 적자에 허덕이던 다섯 민간 철도회사를 국가가 과반을 쥐는 하나의 회사로 통합해 국유 철도공사(SNCF)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이미 되감기였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을 지켜 줄 정부는 없다는 감각이 퍼지면서 파업은 다시 잦아졌고 사용자들은 마티뇽에서 내준 것을 사업장 단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 1938년 1월 쇼탕은 사회당을 뺀 내각을 다시 짰고, 3월 12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던 바로 그 주말에 프랑스에는 총리가 없었다.
3월 13일 블룸이 두 번째로 내각을 맡았다. 그는 안슐루스 앞에서 토레즈부터 우파의 레노까지 아우르는 거국내각을 제안했으나 우파가 거부했고, 자본 과세와 외환 통제를 담은 비상 재정계획을 들고, 이번에는 망데스 프랑스를 재무차관으로 세워 다시 상원 앞에 섰다. 결과는 1년 전과 같았고 두 번째 내각은 26일 만에 끝났다. 4월 10일 달라디에가 정부를 세웠을 때 의석 배치는 1936년 그대로였지만 다수의 성격은 이미 다른 것이었다. 같은 인민전선 의석으로 달라디에는 9월 뮌헨 협정의 승인을 얻어 냈고(반대는 공산당 의원들을 비롯한 75표뿐이었다), 10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급진당은 공산당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인민전선은 해산 선언도 없이, 구성 정당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은 11월에 왔다. 재무장관 레노가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사실상 해체하며 「두 번의 일요일이 있는 주는 끝났다」고 선언하자, CGT는 11월 30일 하루 총파업을 불렀다. 정부는 철도를 징발하고 파업 예정 사업장에 경찰과 군을 미리 투입했으며 점거 시도를 그 자리에서 진압했다. 파업은 하루 만에 꺾였고, 르노를 비롯한 공장들에서 수천 명이 보복 해고되거나 재고용 각서를 쓰고서야 돌아갔으며, 400만이던 CGT 조합원은 이듬해 100만 대로 무너졌다. 1936년 6월이 세운 힘의 균형은 그렇게 30개월 만에 청산되었다.
1936년 6월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당대의 논쟁이 그대로 사학사의 논쟁이 되었다. 트로츠키에게 1936년 6월은 시작된 혁명이었고, 인민전선은 그것을 의회의 틀에 가두어 죽인 계급협조의 기계였다. 반대편에서 보면 인민전선은 프랑스에서 파시즘의 길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킨 방벽이었으며, 마티뇽의 성과는 혁명 없이 얻어 낸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 잭슨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두 독법 사이에서 이 정부가 안고 있던 제약을 강조한다. 급진당 없이는 다수가 없었고, 상원은 끝까지 적대적이었으며, 재정 정통주의를 받아들인 순간 개혁의 여력은 자본 이동이 결정했다.
분명한 것은 남은 것들이다. 유급휴가와 단체협약은 이후 프랑스 노동법의 골격이 되었고, 1936년의 기억은 1944년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 강령과 해방 후 사회보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인민전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스페인에서 칠레까지, 그리고 반세기 뒤 소련의 마지막 몇 해까지, 좌파가 위기 앞에서 연합을 부르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되돌려졌는가: 세 겹의 논쟁
인민전선이 무엇을 정착시켰는가의 물음은 세 갈래의 논쟁으로 갈라진다. 첫째는 경제와 국방의 논쟁이다. 달라디에와 뒤이은 레노의 법령은 40시간제와 임금 인상분을 해체했고, 우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40년의 패배를 인민전선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주 40시간이라는 상한선이 항공기와 탱크의 생산까지 옥죄어 독일의 재군비에 뒤처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이미 1936년 여름부터, 정부가 아무 법도 바꾸기 전에 「플뤼토 아틀러 쾨 르 프롱 포퓔레르(히틀러가 인민전선보다 낫다)」를 외치며 자본을 빼돌리고 있었다. 좌파 역사가들은 1940년을 패배가 아니라 연합의 국내 적들의 승리로 읽으며, 평가절하와 휴지기 속에서도 개혁이 남긴 뼈대가 전후까지 이어졌음을 상기시킨다. 둘째는 혁명 대 개혁의 논쟁이다. 트로츠키를 잇는 좌파 비판자들은 6월의 총파업을 혁명적 가능성의 순간으로 보고, 블룸이 이를 마티뇽 협정이라는 온건한 합의로 눌러 담은 탓에 이후 파시즘의 승리 길이 열렸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문제는 블룸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부르주아 급진당과 손을 잡는 정치 자체였다. 이에 맞서 개혁을 옹호하는 쪽은 1936년의 노동자 다수가 프롤레타리아 권력보다 빵과 휴가와 단체협약을 요구했고, 블룸이 그 요구를 법으로 옮긴 것이야말로 성취였다고 답한다. 셋째는 연속성의 논쟁이다. 비시가 40시간제를 폐기하고 노조를 해산했음에도, 유급휴가와 단체협약과 노동자 대표라는 제도는 비시와 해방을 지나 1944년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 강령과 1945년의 사회보장제도 속으로 옮겨갔다. 1936년 여름 처음 바다를 본 노동자 가족의 휴가가 돌이킬 수 없는 법적 권리가 된 것은 그때서다. 이 세 논쟁은 결국 같은 물음 위에 얹혀 있다. 파시즘에 맞선 방벽으로는 무너졌고 혁명으로는 시작되지도 못했으나, 노동자의 일상을 법의 골격으로 바꾼 한 해를 실패로 쓸 수 있는가. 역사가들은 아직 답을 통일하지 못했다.
무엇을 끝냈고, 무엇을 끝내지 못했는가
1936년의 승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확정했다. 첫째, 공장 점거는 단순한 임금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을 멈추고 집단적 힘으로 국가와 자본의 협상 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마티뇽 협정과 6월 법률은 이를 법적 권리로 번역했다. 단체교섭, 노조 대표, 유급휴가, 주 40시간제는 선거 공약의 문구만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르아브르와 비양쿠르의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점유한 뒤에야 얻어진 성과였다. 둘째, 극우의 거리 동원에 맞서 공산당, 사회당, 급진당이 공화국을 방어하는 공동 전선을 실제로 만들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여성에게 아직 투표권이 없던 국가에서 블룸 내각이 여성 차관 세 명을 임명한 일도 기존 공화국의 경계를 넓힌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누가 국가를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결하지 않았다. 인민전선의 강령은 프랑스은행 개혁과 군수산업 국유화를 약속했지만 사적 소유와 의회 국가의 틀을 넘지 않았다. 공산당은 정부에 들어가지 않고 지지했으며, 모리스 토레즈는 요구가 관철되면 파업을 끝낼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의 입장에서 이는 파시즘을 물리칠 시간을 벌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충돌을 피하며, 얻은 권리를 지키는 현실적 후퇴였다. 비판자들에게는 바로 그 절제가 점거의 잠재력을 의회 협상으로 봉합한 선택이었다. 두 해석 모두 1936년의 순서를 설명한다. 노동자들의 행동이 법을 밀어붙였지만, 그 행동의 종결은 지도부와 정부가 정했다.
역사가들의 쟁점도 여기에 모인다. 줄리언 잭슨은 인민전선을 민주주의 방어의 시도로 보면서도 그 유산을 실망과 실패로 요약한다. 반면 노동운동사 연구자들은 1936년을 임금과 생산성의 단기 성적표로만 재단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유급휴가와 단체교섭은 전쟁과 점령을 거쳐도 사라지지 않았고, 1944년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 강령과 1945년 사회보장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언어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를 곧바로 인민전선의 계획된 완성으로 부를 수도 없다. 그 제도들은 해방기의 새로운 세력관계가 다시 만든 결과였다. 따라서 1936년이 혁명의 실패였는지 개혁의 승리였는지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짧은 시간 국가의 법을 바꿀 만큼 강했지만, 자본의 도피, 상원의 거부권, 스페인 문제, 전쟁 준비를 둘러싼 분열을 넘어 권력 자체를 재편할 만큼 조직되어 있지는 않았던 순간이었다.
결과
인민전선 정부 자체는 2년을 채 버티지 못했고 40시간제는 1938년의 법령들로 해체되었지만, 유급휴가·단체협약·노동자 대표 제도는 프랑스 노동법의 골격으로 살아남아 1944년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 강령과 전후 사회보장으로 이어졌다. 코민테른에는 프랑스가 인민전선 노선의 첫 실험장이자 진열장이었고, 그 성공과 한계는 같은 해 스페인에서의 개입 노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파시즘에 맞선 방벽이었는가, 의회의 틀에 갇혀 버린 혁명이었는가라는 당대의 논쟁은 지금도 1936년 6월을 읽는 두 축으로 남아 있다.
연표
- 1934.02.06콩코르드 광장의 폭동
극우 동맹들이 하원 의사당을 향해 행진하고 경찰 발포로 15명이 사망한다. 달라디에 총리는 이튿날 사임했고, 좌파는 이 밤을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으로 읽었다.
- 1934.02.12반파시즘 총파업
CGT가 부른 총파업 날, 따로 출발한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열이 나시옹 광장에서 만나 「단결!」을 외친다. 지도부의 협정보다 거리의 단결이 먼저였다.
- 1934.07.27사회당·공산당 통일행동협정
두 당이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한다. 10월 낭트에서 토레즈는 연합을 급진당까지 넓히자며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놓는다.
- 1935.05.02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조약 서명 2주 뒤 스탈린이 프랑스의 국방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승인한다」고 선언하자, 반군국주의를 정체성으로 삼던 프랑스공산당은 국방 예산 반대를 접는다.
- 1935.07.14인민연합의 선서
혁명기념일에 50만 명이 파리에서 행진하며 빵과 평화와 자유, 동맹 해산, 공화국 방어를 선서한다.
- 1935.08.02코민테른 제7차 대회
디미트로프의 보고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노선이 된다. 프랑스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실험의 추인이었다.
- 1936.01「빵, 평화, 자유」 강령 발표
동맹 해산, 프랑스은행 개혁, 공공사업, 군수산업 국유화가 골자인 온건한 강령이 발표된다. 사회주의로의 이행 조항은 없었다.
- 1936.03CGT 재통합
툴루즈 대회에서 CGT와 공산당계 CGTU가 15년 만에 재통합한다. 조합원은 그해 안에 100만에서 400만으로 불어난다.
- 1936.05.03인민전선 총선 승리
결선에서 인민전선이 608석 중 386석을 얻는다. 사회당이 147석으로 제1당이 되고 공산당은 10석에서 72석으로 뛴다. 공산당은 입각하지 않고 밖에서 지지하기로 한다.
- 1936.05.11르아브르에서 시작된 점거
브레게 공장 노동자들이 메이데이 파업으로 해고된 동료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공장 안에 눌러앉아 하루 만에 이긴다. 툴루즈와 쿠르브부아가 뒤따른다.
- 1936.05.28르노 비양쿠르 점거
3만 3천 명이 기계를 세운다. 6월 들어 파업은 백화점과 카페, 보험사와 농장으로 번져 한 달간 12,142건, 참가자 183만 명에 이른다.
- 1936.06.04블룸 내각 출범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가, 여성 참정권이 없던 나라에서 여성 차관 세 명과 함께 취임한다. 취임하는 그 주에 파업 참가자는 200만에 육박했다.
- 1936.06.07마티뇽 협정
총리 관저에서 밤샘 협상 끝에 사용자들이 임금 7~15% 인상, 단체협약, 노조 활동의 자유, 노동자 대표 제도를 한꺼번에 내준다. 주오는 이를 「노동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 불렀다.
- 1936.06.11유급휴가·40시간제, 그리고 「파업을 끝낼 줄 알아야 한다」
하원이 2주 유급휴가법을 563 대 1로, 이튿날 주 40시간제를 통과시킨다. 같은 날 저녁 토레즈는 「요구가 관철되었으면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고, 점거는 6월 말까지 차례로 풀린다.
- 1936.08.08스페인 불개입
스페인 공화국의 무기 지원 요청 앞에서 블룸은 영국의 압력과 급진당의 반대에 밀려 불개입을 택한다. 공산당은 「스페인에 대포와 비행기를」 캠페인으로 맞서고, 연합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 1936.09.25프랑 평가절하
자본 유출 앞에서 정부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평가절하를 단행한다. 11월에는 내무장관 살랑그로가 극우 주간지의 날조 보도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1937.02.13개혁의 「휴지기」
물가가 임금 인상분을 삼키고 금이 새어 나가는 「돈의 파업」 앞에서, 블룸은 공공사업을 줄이고 프랑 방어를 정통파 경제학자들에게 맡긴다. 시장은 안심하지 않았고 지지자들은 항복 선언으로 들었다.
- 1937.03.16클리시의 총성
노동자 도시 클리시에서 경찰이 극우 PSF 집회에 항의하는 인민전선 지지 시위대에 발포해 5명이 죽는다. 정부가 제 지지자들에게 총을 쏜 셈이 되었고, 이날 이후 거리의 열기는 다시 조직되지 않았다.
- 1937.06.21블룸 사퇴
프랑 투기 앞에서 요청한 재정 전권을 하원은 주고 상원은 두 차례 거부한다. 블룸은 하원 다수로 버티지도 거리에 호소하지도 않고 물러난다.
- 1937.08.31철도 국유화, SNCF
쇼탕 과도기의 정부가 적자에 허덕이던 다섯 민간 철도회사를 국가가 과반을 쥐는 국유 철도공사로 통합한다. 인민전선 개혁 목록의 마지막 큰 항목이었다.
- 1938.03.13안슐루스 그늘의 2차 블룸 내각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튿날 블룸이 토레즈부터 레노까지의 거국내각을 제안하지만 우파가 거부한다. 자본 과세·외환 통제 계획도 상원이 다시 막아, 내각은 26일 만에 끝나고 달라디에에게 넘어간다.
- 1938.11.3011월 총파업의 패배
레노의 법령이 40시간제를 해체하자 CGT가 하루 총파업으로 답한다. 정부는 철도를 징발하고 군을 투입해 파업을 하루 만에 꺾었고, 수천 명이 보복 해고되며 CGT는 조합원 4분의 3을 잃는다. 인민전선 시대가 막을 내린다.
관련 인물 12명
지도부3
권력의 「정복」이 아니라 「행사」를 내걸고 마티뇽 협정을 중재했으며,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다. 스페인 불개입과 상원의 벽 앞에서 1년 만에 물러났다.
PCF 서기장, 「인민전선」 이름의 발명자모리스 토레즈1900–19641934년 낭트에서 연합을 급진당까지 넓히자며 이름을 처음 내놓았고, 1936년 6월에는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로 복귀를 이끌었다.
CGT 사무총장, 마티뇽 협정 서명자레옹 주오1879–1954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협정을 「노동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 불렀다. 조합원은 그해 100만에서 400만으로 불어났다.
참여7
토레즈와 함께 지지하되 입각하지 않는 노선을 집행했고, 인민전선 다수 의석의 하원에서 부의장을 맡았다.
코민테른 서기장, 인민전선 노선의 정식화자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1935년 8월 제7차 대회 보고로 프랑스에서 진행 중이던 실험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노선으로 추인했다.
프랑스-소련 조약과 국방 승인 선언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1935년 5월 「프랑스의 국방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승인한다」는 선언으로 프랑스공산당의 반군국주의 노선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진 집단안보 외교를 이끌었다.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급진당 지도자,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2월 폭동으로 물러난 총리이자 인민전선 연합의 우측 기둥. 1938년 총리로 돌아와 11월 법령과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을 제 손으로 끝냈다.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레오 라그랑주1900–1940「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로 그해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다.
사회당 좌파 「혁명적 좌익」 지도자마르소 피베르1895–1958파업 절정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썼고,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에서 혁명적 출구를 주장하다 1938년 당에서 제명됐다.
관련 용어
출처: Julian Jackson, The Popular Front in France: Defending Democracy, 1934–3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Jacques Danos & Marcel Gibelin, June '36: Class Struggle and the Popular Front in France (Bookmarks, 1986)Georgi Dimitrov, The Fascist Offensive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제7차 코민테른 대회 보고, 1935.08.02) —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imitrov/works/1935/08_02.htmLeon Trotsky, Whither France? (1934–1936) —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6/whitherfrance/Léon Blum, L'Exercice du pouvoir (Gallimard, 1937) 및 리옴 재판 진술(1942.03)Antoine Prost, Autour du Front populaire (Seuil, 2006)Simone Weil, La Condition ouvrière (Gallimard, 1951) 중 「공장 점거의 나날」 관련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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