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吴晗
중국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중국 중국 1909.8.11.–1969.10.11. ○ 옥사

명사(明史) 연구자이자 베이징 부시장, 역사극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명대사를 연구한 중국의 역사학자로 1949년 이후 베이징시 부시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역사극 『해서파관』이 마오를 겨냥한 우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했고 그 여파로 펑전도 숙청되었다.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저장 출신으로 후스의 제자였던 명대사 연구자였고 1940년대 민주동맹의 활동가였다. 건국 후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문화·교육을 맡았다. 1961년 마오의 권유로 쓴 역사극 『해서파관』은 청렴한 관리 해서가 황제에게 파면되는 이야기였는데,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이를 펑더화이 실각을 옹호하는 「독초」라 비판한 글이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체포되어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고 아내와 딸도 박해로 죽었다. 1979년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오함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명대사의 개척과 역사 대중화

우한은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들어가 명사를 연구 분야로 택했고, 1934년 졸업 뒤 학교에 남아 명사 강의와 연구를 맡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명사 연구가 자료의 산재와 연구 인력 부족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회고되며, 그는 학술 논문 수십 편을 썼다. 연구회 동료들과는 경제사와 민중사를 중시하고 사료와 역사관을 함께 다루는 연구를 했다. 1936년 「14세기의 방직공장」에서는 명대의 수공업을 여러 유형으로 나누고, 자본가가 작업장·원료·기계를 제공하고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의 생산관계를 분석했다. 1955년에는 명대의 자본주의 맹아와 연해 무역을 다룬 글과 보고에서 해금과 개방을 둘러싼 논쟁을 계급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해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에는 연구뿐 아니라 고전의 정리와 역사 지식 보급에도 힘을 쏟았다. 1954년 마오쩌둥의 제안에 따라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속자치통감』에 표점을 찍고 단락을 나누는 작업을 조직했으며, 뒤이어 이십사사 정리도 시작했다. 생전에는 전사(前四史)까지만 표점 작업을 마쳤다. 그는 중국사·외국사 소총서를 기획하고 편집해, 왕조 순서에 맞춘 서술 대신 아동 독자를 고려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이야기 형식으로 소개했다. 『중국역사소총서』는 147종, 『외국역사소총서』는 59종으로 편성됐고, 1962년에는 외국사와 지리 소총서도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