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파관
Hai Rui Dismissed from Office
역사학자이자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이 쓴 경극. 명나라의 청렴한 관리 해서(하이루이)가 백성의 빼앗긴 땅을 되돌려 주려다 파면되는 이야기다. 1965년 야오원위안의 비판 논문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해서(하이루이, 1514~1587)는 명나라 가정제 때 황제에게 직언하다 옥에 갇힌 관리다. 우한의 경극에서 그는 유능한 지방관으로 나온다. 권세가 서계에 맞서 해서는 두려움 없이 억울한 옥사를 풀어 주고 백성에게 땅을 돌려준다. 그 일로 그는 파면되어 물러나고, 백성들은 그를 기린다. 농민은 구원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피해자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마오쩌둥이 권한 일이었다?
그렇다. 대약진의 거짓 생산 통계가 문제가 되자 마오쩌둥은 1959년 4월 상하이 회의에서 해서를 배우라고 간부들에게 말했다. 우리 동지들 가운데 해서만 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는 것이었다. 명나라 전문가 우한은 이에 응해 두 달 뒤 「해서, 황제를 꾸짖다」를 발표했다. 그해 7월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숙청되었다. 마오쩌둥은 이때 해서가 “이사했다”면서 왼쪽의 해서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우한도 펑더화이를 ‘가짜 해서’로 비난했다.
경극은 그 뒤 명배우 마롄량의 요청으로 쓰였다. 몇 차례 고쳐 1960년 말에서 1961년 사이에 완성되었고,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이 서명한 『마오쩌둥 선집』을 우한에게 선물했다고도 하고, 마롄량을 식사에 초대했다고도 한다.
어떻게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나?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 《문회보》가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실었다. 땅을 돌려주라는 대목은 인민공사를 허물고 지주와 부농의 지배를 되살리려는 부르주아 반대파의 초점이라고 공격했다. 글은 장칭과 장춘차오가 주선했고, 마오쩌둥도 고쳐 주었다. 장칭은 당 지도부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면 막힐까 봐 미리 보여 주지 않았다.
당 기구는 즉각 반발했다. 베이징 시장으로 문화 정책을 담당하던 펑전은 3주 동안 다른 신문의 전재를 막았고, 학술 토론의 범위에 묶어 두려 했다. 우한은 자기비판에서 “한마디로 나는 계급투쟁을 잊었다”고 썼지만, 이 글의 연표는 오히려 루산 회의와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했다. 1965년 12월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해서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펑전의 ‘2월 제강’은 철회되었고, 5·16 통지가 그와 베이징시 당위원회를 무너뜨렸다.
정말 펑더화이를 빗댄 작품이었나?
정치를 아는 독자들은 황제를 마오쩌둥으로, 해서를 펑더화이로, 땅 문제를 대약진으로 읽을 수 있었다. 펑더화이 자신도 1962년 복귀를 청하는 편지에서 “나는 해서가 되고 싶다”고 썼다. 다만 이것은 공연 뒤 비평가들이 내놓은 해석이다. 펑전은 우한과 펑더화이 사이에 조직적이든 개인적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항변했고, 해서를 쓰게 된 계기는 마오쩌둥의 호소였다. 우한이 실제로 빗댈 뜻을 품었는지는 저자의 말로 확인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왜 이 논쟁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는지도 기록으로 분명하지 않다. 프레더릭 타이위스는 우한을 쳐서 펑전을, 펑전을 쳐서 그 후원자 류사오치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본다. 알레산드로 루소는 우한을 끝까지 지킨 것이 문화 관료들이었고 비판은 아래쪽 지식인들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우한은 옥중에서 1969년에 죽었고 1979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