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1– 과학·기술 · 소련 ·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경력 연표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관련 역사 사건
1973년 사하로프 규탄 편지 서명과 과학계 내 위치
바소프의 과학적 성과는 소련 국가 기구와 깊이 얽혀 있었다.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67년부터 1990년까지 그 상임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74년 이후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을 세 차례 연임했다. 1963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을 세워 죽을 때까지 이끌었고, 1973년부터 1988년(또는 1989년)까지 연구소장을 맡아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장악했다. 1978년에는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에 양자전자공학과를 만들어 초대 주임을 맡았고,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전연방 계몽협회 '즈나니예' 이사회 의장으로서 대중 과학 교육 조직도 운영했다.
이러한 지위는 정치적 충성의 대가를 동반했다. 1973년 바소프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이 『프라우다』에 보낸 편지에 서명한 학자 중 한 명이었다. 이 편지는 사하로프가 “국가 체제와 소련의 대외·대내 정책을 훼손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고, 그의 인권 운동을 “소련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당시 소련 과학계에서 노벨상 수상자이자 대형 연구소장의 서명은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니라 제도적 압력의 일부로 기능했다.
그러나 그가 국가 폭력의 도구에 머물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연구는 민간 기초과학과 군사 기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소련 체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레이저 핵융합 연구와 고출력 레이저 개발은 에너지와 방위라는 두 목표에 동시에 봉사했고, 연구소장으로서 그는 이 연구를 국가 예산과 군수 수요에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985년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맞서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한 것은 그가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냉전 기술 경쟁의 정치적 대변인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