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서 공화국 권한을 주장한 소비에트 정치가
“공화국의 동의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89–1991 입법·국가 대표 · 소련
경력 연표
- 1958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교 졸업, 문헌학 연구
- 1966–197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바쿠 시당위원회 이념 담당 서기
- 1980–1983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장관
- 1983–1987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부 장관
- 1987–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90–1992아제르바이잔 최고소비에트 의장
관련 역사 사건
1990년 1월 계엄 항의와 공화국 주권 법안
1989년 6월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이 되었고, 이듬해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1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 소련군이 바쿠에 진입해 민간인 100여 명 이상이 사망했다. 카파로바는 그 시각 모스크바에 있었고, 공화국 간부회의는 그녀가 없는 사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이 결정은 부당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틀 뒤인 1월 21일에서 22일까지 그녀는 160명의 대의원이 요구한 최고소비에트 임시회의를 소집해 직접 주재했고, 회의는 연방 지도부의 군사 개입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 각국 의회에 사태를 알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소련 정부와 공화국 최고 권력 기관의 동의 없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는 점이 그 핵심 논거였다.
이 항의는 상징에 그치지 않았다. 카파로바는 최고소비에트 의장 재임 중 1991년 10월 18일 국가 독립 선언과 1992년 3월 2일 유엔 가입을 관철한 것으로 평가되며, 독립 승인을 요청하는 세계 각국 의회·정부 앞 호소문 채택도 그 시기에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키로바바드를 역사적 지명 간자로 되돌리고 노브루즈를 공휴일로 지정하는 조치도 그녀의 서명으로 나왔다. 다만 일부 사료는 독립 회복 법안의 시점과 형식을 1991년 8월 30일 선언으로 적어, 문헌마다 차이가 있다.
반대파와의 갈등도 컸다. 인민전선과의 관계는 그녀가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경색되어 있었고, 1991년 9월 방송 사고로 논란이 된 발언 이후 최고소비에트 청사 앞에서 물리적 공격을 당했다. 1992년 3월 유엔 가입 사흘 뒤 건강을 이유로 사퇴했고, 1993년 8월 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해 바쿠 명예묘역에 묻혔다. 1994년에는 1월 사태의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사망으로 형사 사건은 제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