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바트의 지도자로 1918년 아제르바이잔 국민평의회를 이끌어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정치가
1884년 바쿠 근처에서 태어나 1904년 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후메트를 세웠다. 1909년 이란 입헌혁명에 참여했고, 1913년 바쿠로 돌아와 무사바트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8년 5월 아제르바이잔 민족회의 의장으로서 5월 28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1920년 공화국이 무너진 뒤 저항을 지휘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전에 이오시프 스탈린을 경찰로부터 숨겨 준 일 덕분에 풀려나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1922년 핀란드로 탈출해 튀르키예·폴란드·루마니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55년 앙카라에서 숨졌다.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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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무사바트의 지도자로 1918년 아제르바이잔 국민평의회를 이끌어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정치가
1884년 바쿠 근처에서 태어나 1904년 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후메트를 세웠다. 1909년 이란 입헌혁명에 참여했고, 1913년 바쿠로 돌아와 무사바트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8년 5월 아제르바이잔 민족회의 의장으로서 5월 28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1920년 공화국이 무너진 뒤 저항을 지휘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전에 이오시프 스탈린을 경찰로부터 숨겨 준 일 덕분에 풀려나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1922년 핀란드로 탈출해 튀르키예·폴란드·루마니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55년 앙카라에서 숨졌다.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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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