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아제르바이잔

시민권 4 · 민족·국가 19 · 사건 3

국경은 현재 세계를 기준으로 표시합니다.

시민권 인물 4전체보기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상세 이력 보기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아불파즈 가디르굴루 오글루 엘치베이

Əbülfəz Qədirqulu oğlu Elçibəy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38–2000 ○ 자연사

범투르크주의를 내건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민선 대통령

1992년 앙카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소련 해체 후 첫 민선 대통령. 아랍어 문헌학자로 출발해 1970년대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89년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을 이끌며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90년 1월 13일 국방위원회를 조직해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지는 민족위기의 한복판에 섰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소련 공화국 중 최초의 반공산주의 민선 지도자가 되었다. 임기 내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3년 6월 러시아가 배후에 있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졸업
  •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 1969–1974바쿠 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체포(1975), 1년 6개월 복역
  • 1976–1992아제르바이잔 과학아카데미 필사본연구소 연구원
  • 1989–1992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의장
  • 1990.01국방위원회 조직, 의장 취임 (바쿠)
  • 1992–199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대통령
  • 1997–2000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당 당수 (야당)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

에티바르 살리다르 오글루 마메도프

Etibar Səlidar oğlu Məmmədov

프리마코프에게 저항을 예고한 인민전선 부의장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8–1988바쿠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1988–1991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부의장 · 이사회 위원
  • 1990.01–11레포르토보 교도소 수감 (검은 1월 관련 체포)
  • 1990–2000아제르바이잔 최고 소비에트 · 국민의회 의원
  • 1991국가방위평의회 위원 · 「국가독립에 관한 헌법」 공동 기초
  • 1992–2004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NIPA) 창당자 겸 의장
  • 1998, 2003대통령 선거 출마 (1998년 2위, 11.6% 득표)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9전체보기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국가원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3 ✕ 처형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베리야 체포 뒤 흐루쇼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어떻게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릴 수 있는가.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베리야를 만났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트로이카는 피고를 부르지도, 기소장을 만들지도 않고 명단만 처리했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베리야와 함께 총살됐고 복권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31그루지야 체카·GPU 경제부와 정보국
  • 1931–1934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제1서기(베리야)의 보좌관
  • 1934–1937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소비에트무역부장, 이어 특별부장
  • 1937–1938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수송부장
  • 1938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
  • 1938–1941내무 제1부인민위원 겸 국가보안총국장
  • 1941국가보안인민위원(NKGB 1차)
  • 1941–1943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43–1946국가보안인민위원, 1946년부터 국가보안장관(MGB)
  • 1947–1950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장
  • 1950–1953국가통제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부 수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의 20년 통치자, 스탈린의 캅카스 대리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한 말: "내가 국민 앞에 지은 죄는 너무 커서, 총살도 교수형도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 조각조각 갈기갈기 찢겨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스탈린 시대 공화국을 통치했다. 대숙청을 지휘하는 한편 공업화와 바쿠 개발을 주도했으며, 베리야 실각 직후 몰락해 1956년 총살형에 처해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 5월 26일 바쿠에서 총살 집행

보리스 리보비치 반니코프

Борис Львович Ванни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7–1962 ○ 자연사

탄약과 원자력 행정을 맡은 베리야의 생산 관리자

«스탈린 동지, 당신은 적들에게 갇히셨지만, 나는 우리 편에게 갇혔습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s방위산업과 병기 생산 행정에서 성장
  • 1941체포 직후 전쟁 발발로 석방되어 탄약 생산에 복귀
  • 1941–1945탄약인민위원, 포탄·탄약 대량생산 체계 지휘
  • 1945–1953제1총국에서 원자폭탄 계획 행정 담당
  • 1953 이후베리야 몰락 뒤에도 원자력 생산 행정 경험으로 생존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3전체보기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