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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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1992년 앙카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소련 해체 후 첫 민선 대통령. 아랍어 문헌학자로 출발해 1970년대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89년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을 이끌며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90년 1월 13일 국방위원회를 조직해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지는 민족위기의 한복판에 섰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소련 공화국 중 최초의 반공산주의 민선 지도자가 되었다. 임기 내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3년 6월 러시아가 배후에 있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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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졸업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1969–1974바쿠 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체포(1975), 1년 6개월 복역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베리야 체포 뒤 흐루쇼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어떻게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릴 수 있는가.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베리야를 만났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트로이카는 피고를 부르지도, 기소장을 만들지도 않고 명단만 처리했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베리야와 함께 총살됐고 복권되지 않았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