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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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1924년, 90세의 존 D. 록펠러와 차를 마시고 숲을 산책하며 소련 석유에 대한 신용장을 얻어냈다. "록펠러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뜻밖에도 동의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Главзолото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미국 기술자를 직접 영입해 금 생산을 급증시켰으며, 이 금은 스탈린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오르조니키제의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 건설을 총괄했고, 1937년 대숙청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된 후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6년 10월 27일, 50세 생일. 퍄티고르스크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성대한 축하회가 열렸으나, 그는 참석을 거부했다. 바로 그날 친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빈 의석을 지켰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 1912년부터 중앙위원. 내전기 캅카스 소비에트화를 지휘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격했다. 스탈린의 오랜 그루지야 동지로서 중공업인민위원(1932~37)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계획을 진두지휘: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쿠즈네츠크 제철소,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우랄 중기계 공장 등 소비에트 산업화의 골격을 세웠다. 그러나 1936년 대숙청이 자신이 발탁한 공장장들과 친형 파풀리아를 집어삼키자 스탈린과 공개 충돌했고, 1937년 2월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국은 심장마비라고 발표했다.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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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1921년 10월, 레닌의 편지: '내가 욕한 것은 당신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위원회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표결에서 지면 당신의 소수의견을 명확히 정리해 내게 보내주십시오.'
빈트 출신으로 191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산업 행정가. 1920년대 초 돈바스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석탄 산업을 재건했고, 레닌이 직접 편지로 독려했다. 쿠즈바스 석탄 개발로 동부 야금 기지를 확충했으며,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거쳐 1936년 12월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취임 10개월 만에 허위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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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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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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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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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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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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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톰스크-7 건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원자로가 아니라 빵 공장이었다. 그는 '내가 석공을 구해 오겠다'며 수용자 중 벽돌공을 직접 찾아 데려왔다.
체카 기병 출신의 소련 내무부 공병 소장이자 산업 건설자로,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 시설인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 건설을 지휘했다. 1947년 ITL 제859호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해 1948년까지 4만 5천 명의 인원으로 공업용 원자로와 방사화학 공장을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까지 소련 핵 지도의 주요 시설을 연이어 건설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1949)과 스탈린상(195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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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4제국군 기병 위생병 → 1917년 볼셰비키 입당 → 체카 기병대 내전 참전, 특별기병대대장
사고가 날 때마다 슬라프스키는 가장 먼저 위험 구역으로 들어갔다. 훗날 의사들이 그의 누적 피폭량을 추산해보니 약 1,500뢴트겐, 치사량의 세 배였다. 동료들은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다.
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출신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한 후 엔지니어가 된 슬라프스키는, 알루미늄 공장장을 거쳐 1946년 원자폭탄 계획에 투입되었다. 첼랴빈스크-40 비밀 복합체 책임자로서 1949년 첫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고, 수소폭탄과 차르봄바 개발을 지휘하며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57년부터 29년간 중형기계공업 장관으로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총괄했고, 소련의 폐쇄 원자력 도시들과 거의 모든 원전을 세웠다. 1,500뢴트겐의 방사선을 견디며 현장을 지킨 거구의 지휘관으로 '위대한 예핌'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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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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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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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8'엘렉트로실라' 공장 설계기사 → 전기기계연구실장 → 기술부장
1938–1941NKVD 수사 중 '엘렉트로실라' 제40부서 특수연구실장으로 발전기 설계 지속
1941–1947'엘렉트로실라' 공장 주임기사 → 부공장장, 특수설계국장(1945–1946) 겸임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비행기를 생각했다 — 이미 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행기를.”
세묜 라보치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공군 주력 전투기 La-5와 La-7을 설계한 항공기 설계자로, 22,000대 이상 생산되어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LaGG-3로 시작한 OKB-301은 전후 La-176으로 소련 최초 음속 돌파(1948년)를 달성했고, 1950년대 이후 S-25 베르쿠트 방공망과 SA-2 대공미사일, 순항미사일 부랴 개발로 방공·우주 분야로 전환했다. SA-2는 1960년 게리 파워스의 U-2기 격추로 냉전사에 기록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4회, 과학아카데미 회원, 공병기술소장을 지냈으며 1960년 사리샤간 시험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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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붉은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1920–1927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수학, 항공역학 기사 자격 취득
1927–1939각 항공설계국에서 근무, 1939년 항공기 제작 수석설계사 직급
1939–1940고르부노프·구드코프와 함께 LaGG-3 전투기 공동 개발, OKB-301
1940–1945OKB-21 수석설계사(고리키), La-5·La-7 전투기 설계, 22,000대 이상 생산
1945–1960OKB-301 총책임자(힘키), La-15 제트 전투기, S-25·SA-2·부랴 미사일 개발 주도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고 그들의 역할을 이해하려 애썼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 안드레이 사하로프
광산공학을 전공한 기술관료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장을 거쳐 노릴스크 광산·금속 콤비나트를 굴라그 노동력으로 건설했다. 전쟁 중 NKVD 부인민위원으로 산업건설 총국들을 지휘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의 제1부책임자로서 우라늄 탐사, 독일 과학자 영입, 폐쇄도시 건설, 최초 핵실험 조립을 진두지휘했다. 스탈린 사후 베리야 몰락을 견디고 중형기계공업 장관 겸 부수상으로 핵산업을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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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3RKP(b) 입당, 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 우크라이나 당 활동
1923–1930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졸업, 용광로 기술자
1930–1933기프로메즈 소장, 카멘스코예 제철공장 지배인
1933–1937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
1938–1941노릴스크 건설 총책임자,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으로 최초 니켈 생산
1941–1946NKVD 부인민위원, 산업건설·광산·수로 굴라그 총국 지휘
1945–1953원자폭탄 계획 제1총국 제1부책임자, 우라늄·폐쇄도시·RDS-1 조립 책임
1946년, 흐루니체프와 야코블레프가 영국제 제트엔진 구매를 건의하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자기 비밀을 우리에게 팔겠는가?' 노동당 정부는 기꺼이 롤스로이스 닌 엔진과 청사진을 넘겼고, 이를 복제한 RD-45가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병대·공장 관리직을 거쳐 소련 항공공업 장관(1946~1953)까지 오른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탄약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포탄·항공폭탄 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 항공공업 수장으로서 쇠퇴한 소련 제트 기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1946년 야코블레프와 함께 스탈린을 설득해 영국 롤스로이스 닌 엔진을 도입, 이를 역설계한 클리모프 RD-45가 MiG-15에 탑재되며 소련은 단숨에 제트 전투기 시대에 진입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흐루니체프 우주센터에 남아 있다.
1939년 10월 소련 지도부는 석탄공업인민위원부를 신설하고 바흐루셰프를 초대 위원으로 임명했다 — 그는 이미 러시아공화국 총리였다. 한 사람에게 정부 수반과 전략 산업을 동시에 맡긴 것은 전운 속에서 석탄이 곧 총력전의 연료라는 판단이었다.
툴라의 자물쇠공 견습공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화국 정부 수반과 소련 최초의 석탄공업인민위원을 겸임한 산업 행정가. 1939년 신설된 석탄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었으며, 1943년 전시 연료 공급의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하던 중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공로는 크렘린 벽 묘지 안장으로 기려졌다.
전쟁 중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그의 직접 감독 아래 12,000대의 T-34 탱크가 생산되었다. 조선 인민위원이 바다가 아닌 육상 전투를 위해 가장 많은 탱크를 찍어낸 역설이다.
니콜라예프 조선소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소련 조선공업을 17년간 이끈 생산 관료다. 1940년 조선공업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대양함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전시에는 조선소 대피와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한편 탱크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을 겸임했다. 전후 수송기계·중기계 분야를 거쳐 1954년 조선공업장관으로 복귀, 소련 해군의 원양화와 원자력 잠수함 시대의 산업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유리 노센코는 KGB 장교로서 미국에 망명, 냉전기의 대표적 이중 스파이 사건을 일으켰다.
1939년, 스탈린의 호출에 트럭이 두 번 펑크 나 1시간 30분 늦었다. '콜롬나에서 트베리 경유로 오셨나?'라는 빈정거림에 서른일곱 살 공장장은 '기술도 사람이 못 따라가면 배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중기계 인민위원 임명을 사양하자 보로실로프가 팔을 붙잡았다: '모루 위의 보드카는 어디 갔나?'
스탈린 시대 소련 군수공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소련 원자력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중형기계공업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 기관차 설계사에서 출발해 전차, 조선, 핵무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수-기술 행정의 정점을 두루 거친 '스탈린의 인민위원' 세대의 전형이었다.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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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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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화학 공업을 잘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1942년 화학공업인민위원 임명 당시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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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장관) 겸 부총리,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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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퍼르신스카야 부지에 말뚝 하나를 박으며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불과 1년 만에 첫 쇳물을 뽑아내는 성과로 이끌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의 입지를 직접 선정하고 콤비나트 817호를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현대화했으며, 1972년 군사 기술자 출신 최초의 대장이 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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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1931–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1938–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1943–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1946–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1952–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스탈린이 말했다: '자네 생각을 말하게, 부끄러워 말게 — 자네는 젊지만 우린 자네를 믿네. 과거의 실수와 연루되지 않았으니, 우리를 항공의 수렁으로 이끈 옛 전문가들보다 객관적일 걸세.'
2차대전 소련 전투기의 3분의 2를 담당한 Yak-1·Yak-3·Yak-7·Yak-9의 설계자. '비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콥스키 사관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으나 글라이더 경연으로 돌파해 1932년 독자 설계국을 세웠다. 1940년 항공공업 부인민위원과 OKB-115 수석을 겸임: 소련 항공설계자 중 유일한 행정·설계 권력의 결합이었다. 전후 Yak-15(소련 최초 제트전투기), Yak-25(전천후 요격기), Yak-28(초음속 폭격기)에 이어 Yak-40·Yak-42 여객기까지 아우르며, 43년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스탈린상 6회·레닌상·레닌 훈장 10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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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31AVF-10 글라이더, AIR-1 경비행기 설계; 주콥스키 사관학교 졸업
1932–39항공제39공장에서 경항공기 설계국 창설; 주임설계자로 승진
1940–46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OKB-115 수석; Yak-1·Yak-7·Yak-9·Yak-3 전투기
“우리는 우리 목숨은 걸 수 있어도 교두보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걸 수 없었다.” — 비스와 강 도하 후, 1944년
소련 가스 산업의 실질적 창설자. 1957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글라브가스를 이끌며 연중무휴 시공 기술과 1420mm 대구경 파이프라인으로 거의 10만 km에 달하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대조국전쟁에서는 629소총연대를 지휘해 비스와 강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샤임-튜멘 송유관으로 서시베리아 원유의 경제성을 입증하며 튜멘 유전 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다.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3월, 베리야가 항공공업성을 국방공업성에 통합하면서 데멘티예프는 자리를 잃었다. 8월 베리야가 체포되자마자 그는 항공공업 장관으로 복귀했고, 이후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휘했다.
추바시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소련 항공공업을 거의 24년간(1953~1977) 이끈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전투기 대량 생산을 총괄했고, 종전 후 장관으로서 MiG 전투기에서 Tu-144 초음속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용·민간 항공기 생산 전반을 지휘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에 걸쳐 항공산업을 관장한 유일한 인물로,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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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27공장 노동자, 심비르스크 직업기술학교 졸업
1927–1931모스크바 기계연구소 →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1931–1934민간항공함대 연구소 선임기사·운용기술부장
1934–1941모스크바 제81·제1항공공장 작업반장 → 주임기사 → 공장장
1941–1953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제1부장관) — 전시 항공기 대량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1)
1953–1977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Tu-144·Il-76·Il-86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 재수훈(1977)
베리야에게 밤마다 전화로 공장 상황을 보고할 때면, 차관임에도 전화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소련의 중공업 행정가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산업과 민간 중공업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레닌그라드의 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책임자까지 오른 현장형 기술관료였으며, 1940년대에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직접 지휘 아래 노보크라마토르스크 중기계공장(NKMZ)의 방산 생산을 현장에서 감독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64~1986)과 최고회의 대의원(6~10기)을 지냈고,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장기 집권은 소련 군산복합체가 당-국가 체제 안에서 제도화된 안정적 관리 구조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인은 곰이 아니라 코끼리다. 우리는 기억이 길기 때문이다.” —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보이콧 위협에 답하며.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21년간 소련의 건설·에너지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 관료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동창.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위기 속에서 대회를 성사시켰으나,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주도로 1983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54년, 예고로프는 로켓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수상함과 잠수함에 미사일 무장을 배치하는 원칙을 공동 개발했다 — 소련 해군을 미사일-핵 해양함대로 탈바꿈시킨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군사·국가 지도자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조선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대양함대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930년 해군 공병학교 졸업 후 연구기관에서 선박의 항해성능을 연구했고, 1939년 조선공업인민위원회 제13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전시에는 설계국 재배치와 함정 재무장을 진두지휘했다. 1954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수상함·잠수함 미사일 탑재 원칙을 공동 수립했으며, 첫 원자력 쇄빙선 '레닌'과 중항공순양함 개발을 주관했다. 장관 재임 8년 동안 전략원잠 941형, 원자력 미사일순양함 1144형, 항공순양함 '바쿠' 등을 진수시켜 소련의 해군 전략적 균형을 확보했고, 상선톤수도 세계 3위로 끌어올렸다.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모스크바 근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한 항공 엔지니어다. 전시에는 항공공장 주임기사와 공장장으로 전선 수리 임무를 수행했고, 1947년 항공공업 차관에 올랐으나 베리야의 항공산업 분할 구상에 반대했다가 좌천되어 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으로 옮겼다. 1963년부터 21년간 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을 맡아 GOST 표준 체계를 현대화하고 전연방 계측·품질관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1977~1979년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으로서 ISO 9000 시리즈의 착수를 권고해 오늘날 전 세계 170개국에서 사용되는 품질경영 표준의 단초를 열었다.
1941년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밀은 특수구조부 기록보관소를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년간 쌓아온 연구 자료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그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몰래 빼내 탈출 행렬에 실었다. 훗날 그 자료들은 소련 헬리콥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소련 헬리콥터 산업의 창시자. 이르쿠츠크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ЦАГИ에서 카모프의 조수로 오토자이로를 연구했고, 1947년 독자 설계국을 세워 Mi-1을 탄생시켰다. Mi-4, Mi-6, Mi-8, Mi-10, Mi-12, Mi-24를 연달아 개발하며 60개 세계기록을 수립했고, Mi-8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쌍발 헬리콥터가 되었다. 단일 로터 방식으로 카모프의 동축 반전 로터와 경쟁하며 소련 헬리콥터의 주류를 장악했고, 시코르스키의 아들로부터 중량물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 세 차례 레닌 훈장을 받고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Mi-24는 100개국 이상에서 운용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싸운 헬리콥터'가 되었다.
쇼킨은 즐겨 말했다. "포드 사는 '포드' 자동차를 만든다. 그러니 MEP(전자공업부)는 '엘렉트로니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전자산업의 창설자로, 1961년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토대를 닦았다. 그가 구상한 젤레노그라드는 '소련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으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방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방위산업부장 회의에서 어떤 장관이 계획 지연을 설명하려 하자, 세르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미사일이다.'
소련 군산복합체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당 기구의 수장이었다. 1958년부터 1981년 사망까지 CPSU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장으로 재임하며 모든 미사일·항공·핵·우주 개발 프로그램의 당적 감독을 관장했고, 군수공업위원회(VPK)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서 각 방위산업 부처 간 조정과 병기 생산 계획 집행을 통제했다. 흐루쇼프 시기 전략로켓군 창설과 우주 경쟁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고,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이 미국과 전략적 동등성을 달성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실무에서 떠받쳤다. 다섯 개의 레닌 훈장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이반 뇌제(Грозный Иван)'라는 별명은 방위산업계 전체가 그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쿠이비셰프에서 우리는 흐름식 생산 조직화에 주력했지만, 컨베이어 원리를 바꾸었다. 고정 조립에서는 항공기가 아니라 작업대 자체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 Il-2 공장의 컨베이어 혁신을 설명하며.
소련 항공산업의 핵심 조직자. 타간로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연구소(MAI)를 졸업하고 제1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44년 공장장이 되었다. 전시에는 일류신 Il-2 슈투르모비크의 컨베이어 대량생산 체계를 확립했고, 종전 후 MiG-9·MiG-15 제트전투기, Tu-16 폭격기, Tu-104 여객기를 차례로 양산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과 보스토크 로켓 생산을 조직해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기술적으로 떠받쳤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일반기계공업성 차관으로서 미사일·우주산업 행정을 총괄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두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미국 방문 중 닉슨 대통령을 만난 네포로즈니는 지역 전력망을 연결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제 미국의 주요 지역들은 500kV와 750kV 송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러시아 위키백과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수력 기술자가 된 네포로즈니는, 1962년부터 23년간 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들과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총괄했다. 브라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사야노-슈셴스카야 등 시베리아의 거대 댐들과 볼가 강 cascade, 중앙아시아의 고압력 댐들을 동시에 추진했고, 소련 전역에 원전을 건설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통합에너지시스템(ЕЭС)을 구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의 발전 용량은 8,200만 kW에서 3억 1,500만 kW로 거의 네 배 성장했다. 레닌상 수상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2000년 사야노-슈셴스카야 수력발전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1966년 8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타라소프와 피아트의 발레타 회장이 협정서에 서명하는 순간은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단일 산업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였다.
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1965–1975)으로서 피아트와의 역사적 협력을 성사시켜 볼가 자동차 공장(VAZ) 건설을 주도한 산업 행정가다. 사라토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모스크바 자동차·트랙터 대학을 졸업한 뒤 쿠이비셰프 기화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해 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을 거쳤다. 1966년 5월 4일 비토리오 발레타 피아트 회장과 과학기술 협력 의정서에 서명했고, 그해 8월 본계약을 체결해 톨리야티에 연산 66만 대 규모의 승용차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라다(지굴리)는 수백만 소련 가정에 첫 승용차를 안기며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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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948쿠이비셰프 기화기·부속품 공장 기술자 → 설계국장 → 공장장 → 주임기사
1949–1951알타이 트랙터 공장장
1951–1958민스크 트랙터 공장장 — 수출용 벨라루스 트랙터 생산 기반 구축
1958–1963벨로루시 국민경제회의 의장 — 공업 재편과 모터·덤프트럭·베어링 등 신공장 건설 주도
가가린은 귀환 다음날 루드네프에게 1961년 4월 13일 자 《프라우다》를 건네며 이렇게 적었다: “지도자에게, 수행자로부터. 가가린.”
소련의 군수·우주산업 행정가. 툴라 출신의 무기 기술자로 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난 공장 책임자로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 로켓 연구소와 군수 관료직을 거쳐 1958년 국가국방기술위원회(GKOT) 의장에 올랐다. GKOT 의장으로서 초기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을 총괄했으며,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승인한 국가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1961~1965)으로 과학연구 조정을 담당했고, 계기·자동화·제어시스템 장관(1965~1980)으로 임명되어 민수 산업으로 전환했으나 퇴진으로 읽히기도 했다.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장관직을 유지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핵심 인물이다.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저는 평생 어떤 자리도 구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직접 타라소프 장관을 찾아가, 공장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건설 중인 VAZ의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하며.
볼가 자동차 공장(VAZ)의 건설을 지휘하고 자동차공업부 장관으로 11년간 소련 자동차 산업을 이끈 행정가다. 톰스크 출신으로 MADI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소형차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1958년 공장장이 되었다. 1966년 타라소프 장관에게 스스로 VAZ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해, 피아트와 협력한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3년 만에 가동시키고 1973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으며 '니바' 개발을 시작했다. 장관 시절 연간 200만 대 생산 체제를 완성했고 퇴임 후에도 엘라부가·KAMAZ·AVTOVAZ의 고문으로 평생을 바쳤다.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병실에서 석유부 장관 업무를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압박에 맞섰다.
바쿠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12년간 소련 석유부 장관을 지내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통해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타트네프티에서 터빈 시추 방식과 대형 블록 조립 공법을 도입해 로마슈킨스코예 유전 개발을 이끌었고, 이후 장관으로서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당의 압박에 맞서 합리적 채굴을 주장했으며, 암으로 입원 중에도 병실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레닌상 수상자, 네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타트네프티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77년 6월, 24년간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데멘티예프가 사망하자 카자코프가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4년도 못 되어 임기 중 사망했고, 생전에 일했던 모스크바 계기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모스크바 근교 마을에서 태어나 16세에 제도공으로 노동을 시작한 소련 항공공업 행정가. 항공기 계기·유도장치 분야의 핵심 연구소였던 NII-923 소장 시절 로켓무장과 핵잠수함 생산에 기여해 1963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고, 12년간 차관과 제1차관을 거쳐 1977년 표트르 데멘티예프의 후임으로 항공공업 장관에 올랐다. 기술자에서 장관까지 항공공업의 모든 단계를 거친 유일한 전후 세대 지도자로,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항공생산 체계의 실무적 안정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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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7모스크바 '엘렉트로스베트' 공장 제도공 → 모스크바 기계기술학교 졸업
1937–1944제213항공공장: 기술자 → 작업장장 → 부서장 → 주임기술자
1944–1951제122항공공장 주임기술자 → 제10국가설계연구소 부서장
1951–1960제122공장 수석기술자 (1955년 전소연방통신기계제조대학 졸업)
1960–1965NII-923 소장 — 항공기 계기·관성유도체계 개발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1963)
1965–1974소련 항공공업 차관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1977–1981소련 항공공업 장관 — 재임 중 사망, 레닌상(1976)·소련국가상(1967)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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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1950년대 크렘린에서 베리야가 수개월 내 미사일 생산을 지시하자, 젊은 기술자였던 아파나시예프는 '현실성이 없다'고 공개 반박했다. 동료가 '그를 해임하면 일정이 1년 이상 늦어진다'며 변호해 목숨을 건졌다.
1965년 신설된 일반기계공업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소련의 미사일·우주 산업 전체를 무에서부터 조직한 행정가다. 18년간 1,400기 이상의 ICBM과 1,000기의 SLBM 생산을 총괄하며 미국과의 핵전력 균형을 실현했고, 미르 우주정거장과 에네르기아 로켓 등 유인 우주 계획도 진두지휘했다. 부처의 존재 자체가 소련 말기까지 비밀이었으며, 서방에서는 '세계 최초의 우주 장관'으로 불렸다.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1941년 7월, 22세의 피노게노프는 7일간 열차로 코브로프 공장에 도착해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공장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ShVAK 기관포의 가장 핵심 부품인 포미 장치에 나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2세의 나이로 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관포 ShVAK와 대전차소총 PTRD 생산을 진두지휘했고, 전후에는 오토바이 민수 전환을 거쳐 공장장까지 오른 군수 생산 행정가다. 1954년부터 6년간 공장장을 맡으며 S-75 지대공 미사일 유도장치와 소련 최초의 대전차유도탄 '시멜'의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1979년 세르게이 즈베료프의 후임으로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까지 10년간 소련의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전체를 지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군수 조달의 안정성을 책임졌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레닌상(1982), 국가상 2회(1979, 1989)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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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 교대 마스터로 배치 — ShVAK 항공기관포 생산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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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샤도프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뚫을 광부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 중 누구라도 가지 않겠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야 한다."
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체렘호보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와 톰스크 공대를 거쳐 광산기사로 성장했고, 보스티부골(Vostsibugol) 생산합체의 총책임자를 거쳐 1985년 12월 소련 석탄공업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네륜그리·베료좁스코예 등 신규 탄광 개발과 노천 채탄 기술의 대규모 도입을 주도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에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굴착하는 광부들을 직접 지휘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를 휩쓴 대규모 광부 파업에 직면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지지로 해임되면서 소련 석탄공업장관직은 그와 함께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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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 '안가르스트로이' 콜호스에서 농업 노동
1944–1948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 전기기계과 수학, 졸업
1948–1950체렘호보우골 트러스트 5-비스 탄광에서 구역 정비사, 구역장, 수석정비사 보좌
1971년 3월, '5개년 계획의 석유 채굴 과제 수행과 높은 기술·경제 지표 달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마이코프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타타르·페름 유전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석유공업 장관(1977~1985)까지 오른 인물. 발렌틴 샤신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장관직을 이어받아, 브레즈네프 후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지휘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로 이끌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냈고, 고르바초프 집권 직전인 1985년 2월 퇴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1) 수훈자이며, 퇴임 후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소련 전기공업과 에너지 부문을 25년간 이끌었다. 1980년 전기공업장관, 1985년 에너지·전화장관을 역임하며 송배전 인프라와 원자력 발전을 총괄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인물로, 리즈코프 총리에게 보고한 직후 현장으로 떠나 가동 중이던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켰다. 셰르비나가 이끄는 정부위원회 위원으로서 사고 수습 1단계에 참여했으며, 이후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991년 2월, 새 내각에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한 지도부에 나는 필요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1980~1989)으로서 전략미사일과 에네르기아-부란 우주왕복선의 핵심 제어 체계를 총괄한 군수산업 행정가다. 부란 프로그램의 성공적 시험 비행을 이끈 공로로 1990년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정부 운영을 책임지다 1991년 신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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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노보체르카스크 공과대학 졸업, 크라스노다르 전자계측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경력 시작
1954–1968크라스노다르 ZIP 공장에서 기술실험실장·특별설계국장 거쳐 주임기사까지 승진
1968–1974기기제조부 중앙기구에서 전자계측기 총국 주임기사, 이후 소유즈엘렉트로프리보르 국장
1976년 4월, 전자공업부 전시회에서 동료 장관 발렌틴 프롤레이코는 페르비신을 이렇게 평했다: "자기 쪽 작업이 뒤처진 데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빈정거리며 오직 불평만 늘어놓았다."
모스크바 전기통신대학을 졸업한 통신기사 출신으로, 시베리아의 설치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전소련 설계·조립 트러스트 총책임자까지 올랐다.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간 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군사령·통제·통신(C3) 체계의 중추인 보안통신, 무선중계, 레이더 장비 생산을 총괄했고, 1976년 중앙위원 후보를 거쳐 1986년 정위원이 되었다. 1989년 통신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통합 통신망 구축을 추진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는 텔레콤 기업체를 이끌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민영화 전환기에 활동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하리코프 계기공장의 조립공으로 출발해 소련 로켓·우주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일반기계공업부 장관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에네르기야-부란 왕복우주선 계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 우주개발의 마지막 대역사를 이끌었다. 1988년 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로 당의 군수정책을 주관했고, 1991년 8월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8인 중 한 명으로 소련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후 1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2021년 사망 당시 GKChP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