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1996년 결선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아 미르차 스네구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표트르 루친스키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관료로 성장해 소비에트 말기의 공화국 정치와 독립 이후 몰도바 국가 형성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1989년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독립 뒤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와 의회 의장을 거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몰도바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제도권의 연속성과 새 국가의 주권·대외노선 조정이 한 정치가에게 겹친 과정을 보여준다.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1876년 베사라비아 러제니에서 태어나 1898년 키시너우 신학교를, 1903년 도르파트 대학 법학부를 마쳤다. 학생 단체를 만들었다가 체포되었고, 벌치에서 판사 대리로 일하며 그 도시 최초의 민족주의 단체를 꾸렸다. 1917년 몰도바 민족당에 참여했고, 스파툴 처리이 의장 선거에서 처음 과반을 얻었으나 자리는 인쿨레츠에게 돌아갔다. 1917~1918년 에르한·추구레아누 정부의 외무 총국장으로 이아시의 셰르바초프에게 군사 지원을 청했고 합병 운동에 앞장섰다. 합병 직후 바이다보에보드 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파리·런던·제네바에서 합병의 국제 승인을 위해 활동했으며, 국민당과 국민농민당 의원을 지냈다. 1950년 공산 당국에 체포되어 1954년 시게트 감옥에서 숨졌다.
1883년 베사라비아 쿠볼타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를 마치고 유리예프 대학에 들어갔으나 사회혁명당원이라 1905년 혁명 뒤 학업을 그만두었고, 잡지에 「깨어나라, 루마니아인이여!」를 실었다가 수배되어 이아시로 피해 1908~1912년 이아시 대학에서 공부했다. 1913년 신문 「몰도바의 말」을 펴내 합병을 주장했고, 1917년 몰도바 민족당 창당에 참여했다. 스파툴 처리이 부의장을 거쳐 의장이 되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장관 등을 지내고 국민농민당에 들어갔으며, 1924년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베사라비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1950년 체포되어 소련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1957년까지 갇혀 있다가 1979년 숨졌다.
스파툴 처리이 의장으로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을 이끌고 루마니아 합병을 성사시킨 베사라비아 정치가
1884년 베사라비아 러제니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마치고 기상 관측소 물리학자로 일했다. 2월 혁명 뒤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이 되었고, 케렌스키가 그를 러시아 임시정부의 베사라비아 대표로 보냈다. 처음에는 베사라비아가 러시아에 남아야 한다고 했으나, 스파툴 처리이 의장이자 몰다비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1918년 4월 루마니아와의 합병 결의를 이끌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국무장관이 되었고, 1923년 자기 계파를 이끌고 국민자유당에 들어가 보건·내무·통신 장관과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40년 심장마비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