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리투아니아

시민권 9 · 민족·국가 25 · 사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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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9전체보기

안타나스 스메토나

Antanas Smetona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874–1944 ✕ 화재 사망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한 초대 대통령, 뒤에 1926년 쿠데타의 지도자

궁을 떠나기 전 그는 "나는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국가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으로 1918년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1919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1926년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웠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미국으로 피해 1944년 화재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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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빌뉴스에서 기자·민족운동 활동
  • 1917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
  • 1918리투아니아 독립법(2월 16일) 서명
  • 1919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
  • 1925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 의장
  • 192612월 쿠데타 주도, 대통령 복귀 뒤 권위주의 통치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883–1942 ○ 옥사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 뒤에 극우 「철의 늑대」의 지도자

1928년 국민회의를 해산하자 그는 "선거를 약속했을 뿐, 언제 열지는 약속하지 않았다"고 농담했다.

1918년 11월 리투아니아 첫 내각의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이후 파리와 국제연맹에서 빌뉴스 문제를 다투었다. 1926년 쿠데타 뒤 다시 총리가 되어 극우 「철의 늑대」를 이끌다 스메토나와 갈라졌고, 1942년 소련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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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철학부 석사 학위 수여
  • 1916페름 대학 교수, 국민진보당 입당
  • 1918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 취임 (11월), 파리 강화회의 수석대표
  • 1918–1920역대 내각에서 외무장관 역임
  • 1926제3대 세이마스 의원, 12월 쿠데타 뒤 총리 겸 외무장관 복귀
  • 1928독일과 국경 조약 체결, 극우 「철의 늑대」 실질 지도
  • 1929스메토나 대통령에게 해임되어 유배
  • 1934–1938쿠데타 미수 뒤 투옥, 1938년 프랑스로 추방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반혁명 세력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1891–1938 ✕ 암살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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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독립운동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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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25전체보기

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외교 소련 리투아니아 1871–1953 ○ 자연사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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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아론 알렉산드로비치 솔츠

Ар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льц
국가보안 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72–1945 ○ 사망

당의 양심이라 불린 볼셰비키 원로, 대숙청기에 검찰총장과 맞선 법률가

「나는 뜨리포노프를 30년 동안 진짜 볼셰비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멘셰비키로 알고 있다!」 — 1938년, 체포된 동료를 변호하며 비신스키에게 던진 말.

1898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당 윤리 체계를 설계해 '당의 양심'으로 불렸다. 1937년 비신스키의 조작 사건을 공개 비판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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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입당
  • 1903–1905예까쩨리노슬라브 지하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6년형 선고 후 조기 석방
  • 1905–1917뚜멘·뚜린스크·나름에서 유형 생활; 첫 비합법 신문 『뚜멘스끼 라보치』 발행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자』『쁘라브다』 편집진
  • 1920–1934중앙통제위원회(ЦКК) 위원 및 상임위원 (1923–1934); 당 윤리·징계 제도 구축
  • 1921–1934러시아·소련 대법원 판사, 노동농민감찰원 법률부장
  • 1935–1938.2소련 부검사 (비신스키 산하), 대법원 법률합의체 의장
  • 1938.2–1945비신스키 비판 후 강제 정신병원 격리; 말년에 민족박물관 기록보관원

안타나스 스메토나

Antanas Smetona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874–1944 ✕ 화재 사망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한 초대 대통령, 뒤에 1926년 쿠데타의 지도자

궁을 떠나기 전 그는 "나는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국가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으로 1918년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1919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1926년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웠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미국으로 피해 1944년 화재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빌뉴스에서 기자·민족운동 활동
  • 1917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
  • 1918리투아니아 독립법(2월 16일) 서명
  • 1919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
  • 1925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 의장
  • 192612월 쿠데타 주도, 대통령 복귀 뒤 권위주의 통치

빈차스 카프수카스

Vincas Mickevičius-Kapsukas
비소련 혁명가 소련 리투아니아 1880–1935 ○ 사망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 정부를 이끈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

그는 레닌이 리투아니아인을 붉은 군대에 더 징집하라고 요구하자,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며 이를 거부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8년 12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반이 되고 1919년 리트벨을 이끌었으나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패배 뒤 코민테른에서 발트 문제를 맡았고 1935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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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14크라쿠프에서 레닌과 접촉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입당, 리투아니아 문제 인민위원
  • 1918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용어 《티에사》 편집자
  • 1918–19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수반, 이어 리트벨 인민위원회 의장
  • 1923–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5전체보기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19–19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1987–1991

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가 열리자 그 기억이 곧 정치가 되었다. 1987년 8월 탈린의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비밀의정서를 처음 공개적으로 규탄했고, 1988년에는 세 공화국 모두에서 인민전선(에스토니아의 라흐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이 결성되었다. 합창 축제의 전통 위에서 자란 이 대중운동은 「노래 혁명」이라 불렸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고, 1989년 8월 23일 조약 체결 50주년에는 200만 명이 세 나라의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인민대의원대회는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병합의 법적 근거가 소련 스스로의 손으로 부정된 것이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