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
노래와 인간 사슬은 어떻게 제국의 국경을 다시 그렸는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가 열리자 그 기억이 곧 정치가 되었다. 1987년 8월 탈린의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비밀의정서를 처음 공개적으로 규탄했고, 1988년에는 세 공화국 모두에서 인민전선(에스토니아의 라흐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이 결성되었다. 합창 축제의 전통 위에서 자란 이 대중운동은 「노래 혁명」이라 불렸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고, 1989년 8월 23일 조약 체결 50주년에는 200만 명이 세 나라의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인민대의원대회는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병합의 법적 근거가 소련 스스로의 손으로 부정된 것이다.
1987년 이전, 세 나라가 안고 있던 것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소련에 강제 병합된 뒤 반세기 가까이 독립국가의 기억을 지워내는 압력 속에 살았다. 1941년 6월과 1949년 3월, 두 차례의 대규모 강제이주로 수십만 명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고, 전쟁과 탄압을 피해 서방으로 탈출한 인구까지 합치면 에스토니아는 전 인구의 약 5분의 1을 잃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까지 이어진 무장 저항, 이른바 숲의 형제들이 진압된 뒤에는 공개적인 반대는 사라졌지만, 저항의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972년부터 지하 출판물 『리투아니아 가톨릭 교회 연대기』가 발행되어 탄압의 실상을 기록했고, 1979년 8월 23일에는 세 나라의 양심수 45명이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의 공개와 발트 3국의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발트 호소문」을 유엔에 보냈다. 이 호소문은 서방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서명자들은 체포와 구금으로 대가를 치렀다.
인구 구성의 변화는 또 다른 압력이었다. 모스크바는 발트 지역을 소련의 산업화 체계에 편입시키면서 러시아인 노동자를 대거 이주시켰다. 그 결과 에스토니아인의 비율은 전쟁 직전 88퍼센트에서 1989년 61.5퍼센트까지 떨어졌고, 라트비아인 비율은 75퍼센트에서 52퍼센트로 하락했다. 비교적 러시아인 유입이 적었던 리투아니아조차 4퍼센트포인트 감소를 겪었다. 주택, 행정직, 당 간부 자리는 이주민에게 우선 배정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교육 체계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발트인들은 자기 땅에서 소수자가 되어간다는 위기감을 일상에서 체감했다.
그러나 발트 3국은 다른 소련 공화국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조건도 갖고 있었다. 첫째, 서방 세계는 병합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다수의 국가들은 발트 3국의 외교 공관을 계속 인정했고, 워싱턴과 런던 등지에 남은 대사관들은 독립국가의 법적 연속성을 유지했다. 이는 나중에 독립 회복의 핵심 논리, 「병합 무효」로 작동한다. 둘째, 서방 라디오 방송(미국의 소리, BBC, 자유유럽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소련 내부의 검열이 상대적으로 덜 통했다. 핀란드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던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은 소련의 공식 담론과 바깥 현실 사이의 간극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루터교 전통 아래, 리투아니아는 가톨릭 전통 아래 교회가 민족 정체성의 저장고 역할을 했고, 에스토니아의 합창 축제와 라트비아의 가무 축제 같은 대중문화 전통은 집단적 자기표현의 통로로 남아 있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시작된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이 축적된 압력이 분출할 틈을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이 비판이 비러시아계 공화국들에서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통제하지 못했다. 발트 3국에서 「개방」의 첫 시험 무대가 된 것은 환경 문제였다. 1987년 2월 25일, 에스토니아 텔레비전은 모스크바가 비루마 지역에 거대 인광석 광산을 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 광산은 에스토니아 하천의 40퍼센트가 발원하는 판디베레 지역의 수질을 오염시키고, 수만 명의 외지 노동자를 유입시켜 이미 위태로운 인구 균형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릴 위험이 있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의 엔델 리프마가 이끄는 과학자들은 이미 몇 년째 내부에서 반대해왔지만, 계획은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텔레비전 보도가 나간 지 두 달 만에 타르투 대학교 학생들이 대학 강당에서 집회를 열었고, 곧이어 노란 티셔츠에 「인광석은 사양합니다」라고 적은 학생들의 시위가 타르투 거리를 메웠다. 1987년 5월 1일 노동절 퍼레이드에서는 학생들이 인광석 반대 구호를 들고 행진했고, 이 운동은 몇 달 만에 에스토니아 전역의 대중적 저항으로 확산되었다. 당과 행정부 내부에서도 개혁파가 운동을 지지했다. 1987년 9월, 모스크바는 결국 광산 계획을 철회했다. 소련 체제에 대한 집단적 공개 저항이 단지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바로 이 인광석 전쟁이 두려움의 문화를 깨뜨렸다. 사람들은 글라스노스트가 단지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조직된 시민 행동이 실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공개적으로 금기시되어 온 주제들, 즉 민족의 장래, 이주민 문제, 모스크바의 의사 결정 과정이 신문과 공개 토론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승리의 맛을 본 에스토니아 시민사회는 다음 행보를 준비하고 있었다. 곧 있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 48주년에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결심을 말이다.
두려움이 무너진 날: 1987년 8월 23일 히르베파르크
1987년 8월 23일 탈린 히르베파르크에 모인 군중은 약 7천 명. 노래 혁명의 3년을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규모는 아니었지만, 이 집회가 가진 무게는 숫자가 아니었다. 에스토니아에서 시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공개 정치 집회는 소련 점령 이래 처음이었고, 주제는 당국이 '존재하지 않는 문서'라고 부정해 온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에스토니아 사회는 두려움의 마지막 문턱을 넘었다.
집회를 소집한 것은 8월 15일 결성된 MRP-AEG(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개를 위한 에스토니아 그룹)였다. 전직 정치수들이 주축이었다. 1980년 '40인의 편지'로 6년을 복역한 티이트 마디손, 1983년부터 4년간 수감된 라글레 파레크, 같은 시기 투옥되었던 헤이키 아호넨, 위리 미크, 마티 키렌드 등이 창립 멤버였다. 이들은 탈린 시 집행위원회에 정식으로 집회 허가를 신청했다. 라에코야 광장(시청 광장)은 거부되었지만, 뜻밖에도 히르베파르크 사용은 승인되었다. 8월 18일 미국 상원의원들이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서한(발트 3국의 집회에 간섭하지 말고 비밀의정서를 공개하라는 내용)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집회 당일, 사람들은 먼저 라에코야 광장에 모였다. 당국이 광장 사용을 막자 군중은 '비밀의정서를 공개하라' '발트 국가들의 자결권을' '스탈린의 집행자들을 법정에 세워라' '엔 타르토와 마르트 니클루스를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르유 거리를 따라 히르베파르크로 이동했다. 낫과 망치를 하켄크로이츠와 동격으로 그린 플래카드가 등장했고, 야외 카페에 앉은 시민들은 이 '인간의 강'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주요 연설자 티이트 마디손은 모임의 핵심을 이렇게 압축했다: 193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과 그 비밀 추가의정서가 동유럽을 분할했고, 1940년 에스토니아의 병합은 그 직접적 결과라는 사실. 그의 연설은 나안 같은 체제 역사학자가 1950년대에 수행한 역사 왜곡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에리크 우담은 독일과 소련 양쪽이 조약의 결과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라글레 파레크는 스탈린 테러 희생자 기념비 건립을 위한 서명을 현장에서 받기 시작했고, 62명이 즉석에서 이름을 올렸다. 위리 미크는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 민족이 되어가고 있다"며 에스토니아인의 생존 자체가 걸린 문제임을 환기했다. 메를레 얘게르와 라이보 라아베가 시를 낭송했고, 군중은 '우리의 조국은 나의 사랑'과 '자유로워라, 에스토니아의 바다여'를 불렀다.
집회는 평화롭게 끝났지만, 체제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관영 언론은 참가자들을 '도둑, 사기꾼, 도발자'로 규정하는 인신공격성 기사를 쏟아냈다. 노르테 핼(당시 에스토니아 청년신문)의 편집장은 히르베파르크가 정상적인 글라스노스트의 발현일 뿐이라고 쓴 한 고등학생의 투고를 실었다는 이유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 소환되어 심한 질책을 받았고, 곧이어 집회를 규탄하는 '독자 편지'들을 반강제로 실어야 했다. 위리 미크는 언론의 비방에 항의해 9월 1일부터 두 달간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티이트 마디손은 KGB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떠나야 했다. 1988년 초에는 헤이키 아호넨과 그의 어머니도 추방되었다.
그러나 공포의 주문은 이미 깨졌다. 당시 14세 소년으로 히르베파르크에 갔던 언론인 토마스 실담은 수십 년 뒤 ERR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탈린 경찰 연대의 트럭들, 방패와 곤봉을 든 병력들. 나는 생각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런데 집회가 평화롭게 끝나고 경찰 트럭들이 그냥 떠나갔을 때, 나는 깨달았다.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바뀌었다." 폭력은 없었다. 수천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금기였던 주제를 말하고, 국가를 부르고, 체제가 부정한 문서의 존재를 외쳤는데도 진압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히르베파르크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에 남긴 구조적 유산이었다.
1988년, 대중이 거리로 나오다
1988년은 발트 3국에서 두려움이 조직으로, 조직이 대중으로 바뀐 해였다. 4월 1-2일 탈린에서 열린 에스토니아 창작동맹(작가·미술가·건축가·영화인·연극인) 합동 총회는 분수령이었다. 러시아 태생의 카를 바이노 공산당 제1서기의 지도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러시아화 정책과 환경 파괴를 규탄했으며, 에스토니아어의 지위 회복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예술가 하인츠 발크는 "우리는 살해당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억압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지식인들이 먼저 공포의 벽을 허문 것이다.
2주 뒤인 4월 13일, 국가계획위원회 간부였던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에스토니아 TV 생방송 「좀 더 생각합시다(Mõtleme veel)」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담론을 빌려 합법적 대중운동을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사비사르와 사회학자 마리우 라우리스틴이 주축이 된 라흐바린네(에스토니아 인민전선)는 여름 내내 전국적인 지지 기반을 쌓았다. 5월 타르투 대중음악 축제에서 알로 마티센이 작곡한 「다섯 개의 조국 노래」가 첫선을 보였고, 이보 린나의 목소리로 불린 이 노래들은 독립운동의 감정적 동력이 되었다. 6월 10-11일 탈린 노래축제 광장에서 열린 구시가지 축제 이후 군중이 자발적으로 남아 밤새 애국가를 부른 사건 직후, 발크는 신문에 「노래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스크바도 변화를 감지하고 움직였다. 6월 16일 바이노가 해임되고 에스토니아계인 바이노 밸랴스가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밸랴스는 인민전선과 대화를 시작했고, 당과 대중운동의 공존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반대세력도 결집했다. 7월 19일 러시아계 노동자와 보수적 공산당원들이 주축이 된 인테르무브먼트(인테르프론트)가 결성되어, 인민전선을 "민족주의"라고 공격하며 소련 체제 수호를 내세웠다.
리투아니아에서는 6월 3일 빌뉴스 과학아카데미에서 35명의 지식인(17명이 당원)이 사유디스 발기 그룹을 결성했다. 음악학자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가 비당원으로 참여하여 곧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사유디스의 첫 대중집회는 6월 24일 게디미나스 광장에서 열렸고, 7월 9일 빙기스 공원 집회에는 10만 명이 운집했다.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 49주년 빙기스 공원 집회에는 25만 명이 참여하여 비밀의정서 공개를 요구했다. 당시 산업 담당 당서기였던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가 집회에 참석한 것은 당과 운동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라트비아에서는 6월 1-2일 작가동맹 총회에서 처음으로 자치와 민주화 요구가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다우가바 강 댐 건설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언론인 다이니스 이반스가 두각을 나타냈다. 라트비아 인민전선(LTF)은 10월 8-9일 리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고 이반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LTF는 발트 3국의 인민전선 중 가장 먼저 소수민족에게 손을 내밀어,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 외의 언어로도 교육을 받을 권리를 지지함으로써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창립 당시 회원은 10만 명을 넘었고, 곧 25만 명으로 성장했다.
가을은 제도적 도약의 계절이었다. 9월 11일 탈린 노래축제 광장에서 열린 「에스토니아의 노래(Eestimaa Laul)」에는 약 30만 명, 당시 에스토니아 인구의 5분의 1이 모였다. 트리비미 벨리스테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장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독립 회복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10월 1-2일 라흐바린네는 탈린 린나홀에서 3,071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공식 창립대회를 열었다. 대의원의 22%가 당원이었고, 사유재산의 헌법적 보장과 스탈린주의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급진적 강령을 채택했다. 10월 22-23일 사유디스도 빌뉴스에서 창립대회를 열어 란츠베르기스를 평의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11월 16일, 에스토니아 최고회의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주권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에스토니아 법률이 소비에트 연방 법률보다 우선한다고 명시하고, 에스토니아 영토 내 천연자원과 생산수단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 법적 표현은 연방 내 주권이라는 신중한 것이었으나, 그 실질은 모스크바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의장 아르놀드 뤼텔이 서명한 이 선언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헌법 개정으로 공화국의 권한을 축소하려던 고르바초프의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한 해가 시작될 때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12개월 만에 현실이 되었다.
200만 명의 사슬, 600킬로미터: 1989년 8월 23일
1989년 8월 23일은 수요일이었다. 오후 7시, 세 나라의 라디오가 동시에 세 언어로 된 노래 「발트가 깨어난다(Bunda jau Baltija)」를 내보냈다. 신호였다. 탈린의 톰페아 언덕 기슭에서 빌뉴스의 게디미나스 탑 기슭까지, 675킬로미터의 도로 위에서 약 200만 명이 손을 잡았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 인구 800만 명 중 4분의 1이 한꺼번에 일어선 셈이었다. 교통은 하루 종일 통제되었고, 에스토니아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이 규모의 시위를 준비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겨우 5주였다. 7월 15일 에스토니아 남부 휴양도시 패르누에서 3국 인민전선 대표들이 처음 회합했고, 8월 12일 라트비아 체시스 근처 외딴 마을 렌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인민전선 의장 다이니스 이반스는 회고록에서 “체시스 인민전선 조직원들이 미행을 피하려고 샛길로 우리를 데려갔다. 혼자서 다시 찾으라면 못 찾을 것”이라고 적었다. 소련 감시망 아래서 전화와 구두 연락만으로, 700킬로미터 구간을 1킬로미터 단위로 쪼개 배정하고, 부족한 구간을 메울 버스까지 편성한 조직력은 참가자들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날 모스크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8월 18일 『프라우다』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가 이끄는 비밀의정서 조사위원회의 인터뷰를 실어, 소련이 수십 년간 부인해 온 비밀의정서의 실재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다만 병합 자체는 불가침조약과 무관하다는 단서를 붙였다. 리투아니아 최고회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8월 22일, 1940년 병합이 독소불가침조약의 직접적 결과이며 따라서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소련 국가기관이 소련 통치의 합법성을 스스로 문제 삼은 첫 사례였다.
사슬 자체는 15분간 이어졌다. 폭력 없는 15분이었고, 체포도 없었다. 대신 헬리콥터와 경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서방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로이터는 다음 날 에스토니아 70만, 라트비아 40만, 리투아니아 100만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소련 관영 타스는 에스토니아 30만, 리투아니아 50만으로 축소 발표했고 라트비아 수치는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사흘 뒤인 8월 2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저녁 뉴스 『브레먀』 첫 19분을 할애해 성명을 발표했다. 발트의 길을 “민족주의적 히스테리”로 규정하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발트 민족을 밀어넣고 있는 심연”을 경고하며 “결과는 재앙적일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실질적 조치는 따르지 않았다. 역사가 알프레드 에리히 센의 평가처럼, 이 성명은 “모스크바가 아직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국 공허한 위협이 되었다.” 8월 31일 발트 활동가들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침략 위협을 호소하는 공동성명을 보냈고,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평화적 개혁을 촉구하며 소련을 압박했다.
제국이 스스로를 부정한 이틀: 1989년 12월 23-24일
1989년 12월은 발트 독립운동이 거리에서 제도 안으로 결정적 진입을 이룬 달이었다. 12월 7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는 헌법 제6조, 즉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보장한 조항을 삭제하고 다당제를 합법화했다. 일주일 뒤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는 당 대회에서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분리를 상정했고, 12월 20일 대의원들은 찬성 다수로 독립 정당을 선언했다.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소수파는 미콜라스 부로케비추스를 중심으로 별도의 '소련공산당 강령파'를 결성했다. 소련공산당의 지방 지부가 스스로 중앙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7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시기 모스크바에서는 제2차 인민대의원대회(12월 12일-24일)가 열리고 있었다. 의제의 핵심은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가 이끄는 26인 위원회가 6개월간 조사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의 정치적·법적 평가였다. 위원회는 5월 말 엔델 리프마 등 에스토니아 인민대의원 18명이 의회에 결의안 초안을 제출하면서 설치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 연설로 표결 없이 통과되었다.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부위원장을, 리프마·마리우 라우리스틴·이고르 그랴진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의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수파는 역사적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비밀의정서를 정당화하는 기사들을 전연방 언론에 쏟아냈다. 위원회 내부의 표결조차 14대 12라는 박빙이었다. 그러나 12월 14일 유리 아파나시예프가 이끄는 지역간대의원그룹이 자신을 의회 다수파에 대한 '야당'으로 선언하면서 의회 역학이 바뀌었다.
12월 23일, 야코블레프가 본회의에서 위원회 보고를 했다. 핵심 쟁점은 원본의 행방이었다. "원본은 소련 안팎의 어떤 기록보관소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위원회는 인정했다. 그러나 사본에 대한 필적·사진기술·어휘 분석과 이후 사건들, 즉 1939년 9월 소련의 폴란드 침공과 1940년 6월 발트 3국 점령이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사실상 증명한다"고 결론 내렸다. 국방부는 의회 로비에 '발트 3국의 자발적 합류'를 선전하는 대형 전시를 설치했고, 보수파 의원들은 수정안으로 결정 채택을 막으려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날 발언대에 서지 않았고, 표결은 부결되었다. 에스토니아 대표단은 학술원 위원회가 편찬한 자료집 「1940년의 에스토니아」(175쪽)를 의사당 안으로 들여와 배포했다. 여기에는 비밀의정서 사본이 실려 있었다.
부결 직후 리프마는 회의장에서 야코블레프 및 펠릭스 코발료프 외무부 역사외교국장과 접촉했다. 코발료프는 방청석에서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입증하는 문서들, 즉 문서 이관 기록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셋은 외무부가 문서를 공개하고 다음 날 문제를 재상정하기로 합의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야코블레프가 다시 연단에 섰다. 이번에는 고르바초프도 지지 입장을 밝혔다. 기명 투표 결과는 찬성 1432표, 반대 252표, 기권 264표로 압도적 통과였다. 결의문은 비밀의정서를 "서명 순간부터 법적으로 근거 없고 무효"라고 선언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중앙위원회·최고회의·정부 어디에도 비밀 협상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며 "이 배신적 결탁에 소련 인민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명시했다. 의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서명과 함께 이 결의는 「프라우다」 12월 28일자에 게재되었다.
12월 24일은 두 사건이 겹친 날이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소련 최고 권력기관이 발트 병합의 법적 토대를 스스로 무효화했고, 빌뉴스에서는 공산당이 모스크바로부터 독립했다. 소련은 이날 자신이 발트 3국에 대해 가졌던 유일한 법적 근거, 즉 1939년 8월의 비밀 조항이 존재했으며 동시에 무효였음을 공식 인정한 셈이었다. 이로부터 석 달 뒤 리투아니아는 이 결의를 근거로 독립 회복을 선언했다.
1990년 3월 11일, 한 공화국이 제국을 떠나다
1990년 2월 24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선거는 소련 역사상 최초의 자유 다당제 선거였다. 141석 중 사유디스가 지지한 후보가 96석을 차지했고, 1989년 12월 소련공산당에서 분리된 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브라자우스카스)은 46석,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공산당(CPSU 강령파)은 6석에 그쳤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독립공산당 지지율은 12%에 불과했다. 유권자들은 공산당의 분리 결정을 인정하면서도, 반세기 동안의 협력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3월 10일 소집된 새 최고회의는 다음 날 오전 곧바로 의장 선출에 들어갔다. 사유디스 의장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가 91표, 독립공산당 제1서기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가 38표를 얻었다. 4명은 두 후보 모두에게 반대했다. 란츠베르기스는 최고회의 의장이자 국가원수 권한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이어 최고회의는 국호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리투아니아 공화국」으로, 의회 명칭을 「최고회의」로 변경하고 국장을 중세 기사상 비티스로 복원했다. 건물 정면의 소련 리투아니아 국장은 철거되었다.
핵심 쟁점은 독립의 법적 성격이었다. 사유디스는 「회복」 논리를 취했다: 1940년 병합이 불법이었으므로 1918년 2월 16일 독립선언과 1920년 5월 15일 제헌의회 결의는 법적 효력을 상실한 적이 없으며, 소련 헌법은 리투아니아 영토에서 무효라는 것이다. 이날 최고회의는 소련 헌법과 리투아니아 SSR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1938년 5월 12일 리투아니아 헌법을 복원했으며, 붉은 군대에 대한 리투아니아 청년 징집을 중단했다.
오후 9시 기초위원회가 「리투아니아 국가 회복에 관한 법률」 초안을 완성했다. 오후 10시 39분, 알파벳 순 호명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찬성 124명, 기권 6명, 반대 0명. 기권자는 부로케비추스의 모스크바파 공산당 소속 전원이었다. 브라자우스카스를 포함한 독립공산당 의원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3명은 투표에 불참했다. 오후 10시 44분, 란츠베르기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최고회의에 축하를, 리투아니아에 축하를」이라고 선언했다. 의사당 밖에서는 300~500명이 빗속에서 촛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전국은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란츠베르기스는 모스크바에 협상을 제안하면서도 독립 선언의 철회·취소·정지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고르바초프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적대적이었다. 3월 15일 소련 인민대의원회의는 1,463 대 94로 리투아니아 결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4월 3일에는 「연방 탈퇴 절차법」을 제정해 공화국 전체 유권자 3분의 2 찬성, 5년 유예기간, 영토분쟁 해결 등 사실상 충족 불가능한 조건을 걸었다. 독립 선언 나흘 뒤 란츠베르기스는 카지미에라 프룬스키에네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협상은 교착에 빠졌고, 4월 18일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경제 봉쇄에 들어갔다.
1991년 1월, 탱크 앞에 선 사람들
1991년 1월, 모스크바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10개월째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경제 봉쇄로도 소용없자 강경파들은 군사적 해결을 밀어붙였다. 1월 8일,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친소 군중이 빌뉴스 최고회의 건물로 쇄도했다. 연단에는 대부분 러시아어를 쓰는 공장 노동자들 사이로 사복 차림의 소련 보안요원들이 섞여 있었다. 의회는 가격 인상을 철회했고, 총리 카지미에라 프룬스키에네가 사퇴했다. 같은 날 그녀는 고르바초프에게 군사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1월 10일,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에 최후통첩을 보내 소련 헌법의 즉각 회복과 모든 '반헌법적 법률'의 철회를 요구했다. 다음 날, 유오자스 예르말라비추스가 이끄는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이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의 창설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유일한 합법 정부라 칭했다. 동시에 소련군 특수부대(알파 그룹, 프스코프 공수사단)가 빌뉴스의 국방부 청사와 신문인쇄소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월 12일 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 소련 국방차관이 현지에 도착해 전 작전 지휘를 인수했다.
결정적 순간은 1월 13일 자정 직후 찾아왔다. 탱크와 BMP 장갑차가 TV 타워를 포위했고, 확성기에서는 예르말라비추스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탱크가 비무장 군중 속으로 돌진했고, 군인들이 실탄을 발사했다. 로레타 아사나비추테(23세)는 탱크 아래 깔려 사망했다. 그날 밤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17세 학생 다리우스 게르부타비추스, 기숙사에서 돌아가는 길에 총에 맞은 대학생들, 시베리아 유형에서 살아남은 52세 정육점 주인 알기만타스 페트라스 카볼류카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TV 방송은 아나운서의 마지막 말, 「무력으로 우리 입을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누구도 우리에게 자유와 독립을 포기하게 할 수 없다」는 외침을 끝으로 화면이 꺼졌다.
그러나 최고회의 건물은 함락되지 않았다. 5만 명의 시민이 건물 주변을 에워싸고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소련군은 진입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희생은 역설적으로 독립 진영을 단결시켰다. 한 달 뒤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0.47%가 독립을 지지했다.
빌뉴스의 소식이 전해지자 라트비아도 즉각 움직였다. 라트비아 인민전선은 이미 1990년 12월 「X시간을 위한 지침」이라는 비폭력 저항 계획을 발표해 두었고, 1월 13일 리가 대성당 광장으로 시민들을 소집했다. 약 70만 명이 모였다, 라트비아 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저녁이 되자 트럭과 농업용 중장비, 통나무를 실은 차량들이 도심으로 들어왔다. 시민들은 최고회의, 각료회의, 라트비아 텔레비전·라디오, 국제전화교환국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했다. 1월 14일 밤부터 리가의 주요 전략거점은 모닥불과 민간인 경비대로 둘러싸였다.
소련 내무부 특수부대 오몬(OMON)은 리가에서 이미 1월 2일부터 활동을 개시해 신문인쇄소 「프레세스 남스」와 전화교환국을 점거한 상태였다. 1월 16일에는 베츠밀그라비스 교량에서 교통부 소속 운전사 로베르츠 무르니엑스가 오몬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바리케이드의 첫 희생자였다. 1월 20일 저녁, 오몬 부대는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공격했다. 건물 안에는 경찰 15명이 소화기로 방어하고 있었고, 밖에는 비무장 지원자 약 100명이 있었다. 이 공격으로 5명이 사망했다: 경찰관 블라디미르스 고마노비치와 세르게이스 코노넨코, 17세 학생 에디스 리에크스틴슈, 그리고 리가 영화촬영소 소속 다큐멘터리 촬영기사 안드리스 슬라핀슈와 귀도 즈바이그네. 슬라핀슈와 즈바이그네는 건너편 호텔에서 촬영 중 저격수의 총에 맞았다. 국제 언론인 보호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오몬이 언론인을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보리스 푸고 소련 내무장관과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은 거듭 개입을 부인했으나, 야조프는 훗날 1990년 12월 라트비아에서 발생한 최초 4건의 폭탄 테러가 소련군 소행이었음을 시인했다. 빌뉴스와 리가 양쪽 모두에서, '국가구원위원회'라는 동일한 정치적 장치가 가동되었고, 오몬과 알파 그룹이라는 동일한 특수부대가 투입되었으며, 모스크바의 고위층은 동일한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두 공화국 모두에서 진압은 실패했다. 빌뉴스에서는 인파가 의회를 지켜냈고, 리가에서는 바리케이드가 1월 27일까지 버텨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수많은 외신 기자가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페르시아만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서 미국 부시 행정부조차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슬란드는 2월 4일 리투아니아를 주권 독립국으로 승인했고, 이것이 첫 번째 국제적 승인이었다. 강경파의 무력 행사는 역효과를 냈다: 죽음 앞에서 물러서지 않은 시민들의 모습은, 총검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방향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1991년 9월 6일, 제국이 스스로를 해체하기 시작하다
1991년 8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터졌을 때, 발트 3국은 50년 만에 찾아온 '기회의 창'을 정확히 인식했다. 에스토니아 최고회의는 8월 20일, 라트비아 최고회의는 8월 21일 각각 완전한 독립 회복을 선언했고, 1990년 3월 리투아니아가 이미 선언한 길을 따랐다. 쿠데타가 8월 21일 저녁 붕괴하자, 3국의 독립은 더 이상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건은 소련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보리스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은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이미 발트 3국의 편에 섰다. 옐친은 7월 29일 리투아니아와, 8월 24일 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 각각 국교 수립 조약에 서명하며 3국의 독립을 러시아 차원에서 승인했다. 유럽공동체(EC)도 8월 말 외교 관계 수립 의사를 밝혔고, 미국은 9월 2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외교 관계 수립 의사를 발표했다. 1940년 이래 발트 3국의 병합을 한 번도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은, 승인이 아니라 '외교 관계 회복'이라는 절차를 밟았다.
소련 국가평의회는 1991년 9월 5일 인민대의원대회의 법률로 창설된 임시 기관이었다. 고르바초프를 의장으로, 12개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 기관은 연방의 마지막 집단 지도부였다. 창설 이튿날인 9월 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회의는 개의 30분 만에 발트 3국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승인했고, 에스토니아의 에드가르 사비사르 총리가 3국 대표로 참석했다. 외무장관 보리스 판킨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그들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이 공화국들은 이제 소련에서 분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승인은 의도적인 모호성을 품고 있었다. 국가평의회의 세 건의 결의(ГС-1, ГС-2, ГС-3)는 각각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승인하면서도, 발트 3국이 줄곧 주장해 온 '1940년 병합이 처음부터 불법이었으므로 우리는 탈퇴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의문은 '구체적인 역사적·정치적 조건'이라는 표현으로 병합의 성격에 대한 판단을 회피했고, 이는 3국이 요구한 '병합의 불법성 인정'을 끝내 거부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 승인은 소련 자신의 법률을 명백히 위반했다. 1990년 4월 3일 제정된 「연방 탈퇴 절차법」은 공화국의 탈퇴에 주민투표와 최장 5년의 이행 기간을 요구했지만, 국가평의회는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발트 3국은 애초에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탈퇴'가 아니라 '회복'을 말했으므로, 모스크바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 셈이다. 법을 무시함으로써 법이 전제한 연방의 경계를 무화한 것이다.
6일 후인 9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709·710·711호로 3국의 회원 가입을 권고했고, 9월 17일 유엔 총회는 3국을 만장일치로 가입시켰다. 1940년 국제연맹 회원국이었던 세 나라가 반세기 만에 국제사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복귀한 순간이었다. 국가평의회의 승인은 한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소련 해체라는 더 큰 과정의 첫 공식 절차였고, 남은 12개 공화국은 이 선례가 곧 자신들의 차례임을 알고 있었다.
독립은 얻었으나, 그 뒤의 질문들
발트 독립운동이 이룬 것은 분명하다. 1991년 9월 소련이 자멸하기 전, 세 공화국은 이미 독립을 회복했고, 1994년 8월까지 러시아군도 완전히 철수했다. 2004년 세 나라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에 동시 가입하며 '유럽으로의 귀환'을 제도적으로 완결했다. 무엇보다도, 발트의 경험은 비폭력 대중 동원으로 제국의 변경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마크 베이신저(Mark Beissinger)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전역의 6,000여 건의 시위를 계량 분석해 보여주었듯, 발트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의 '파도'는 연쇄적으로 다른 공화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소련 해체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채 남은 문제도 있다. 가장 큰 것은 시민권이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독립을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아니라 '1940년 불법 병합 이전 국가의 회복'으로 규정했다. 이 '법적 연속성' 논리는 소련의 불법성을 국제법상 확정하는 강력한 무기였으나, 동시에 1940년 이후 이주해 온 러시아어 사용자들에게 시민권을 자동 부여하지 않는 근거가 되었다. 그 결과 에스토니아에서는 약 6만 명, 라트비아에서는 약 17만 5천 명이 '비시민' 신분으로 남았다. 이들은 지방선거조차 투표할 수 없었다. 아나톨 리벤(Anatol Lieven)은 1993년 저서 『발트 혁명』에서 "만약 시민권법이 서방의 압력으로 완화되지 않았다면 훨씬 위험한 상황을 맞았을 것"이라고 썼고, 25년 후 인터뷰에서도 이 판단이 유효하다고 확인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10%로 낮아 '제로 옵션' 방식으로 전 거주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 대조는 지금도 세 나라 정치 지형의 차이로 남아 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은 계속된다. 첫째, 발트 독립운동은 소련 붕괴의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결과였는가. 베이신저는 민족주의 동원의 '사건-생성적(event-generated)' 성격을 강조하며, 발트의 시위가 다른 공화국의 행동을 촉발했다고 본다. 반면 세르히 플로히(Serhii Plokhy)는 『최후의 제국』에서 소련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이탈이며, 발트는 이 흐름의 선봉이었을 뿐 '방아쇠'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둘째, '법적 연속성' 논리는 국제법적으로 승리했지만, 그것이 배제한 이들에게는 모순으로 읽혔다. 리벤이 지적했듯, 발트 민족주의의 내부에는 전간기 권위주의 시대를 미화하는 낭만적 민족사관이 흐르고 있었고, 이는 유럽연합이 지향하는 다원주의와 긴장 관계에 있다. 1991년에 열린 이 질문들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결과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가 독립 회복을 선언했고, 모스크바는 경제 봉쇄로, 1991년 1월에는 빌뉴스와 리가의 유혈 진압 시도로 응수했지만 되돌리지 못했다. 1991년 2월 리투아니아 국민투표에서 90% 넘는 유권자가 독립을 택했다. 8월 쿠데타가 실패하자 3국의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9월 6일 소련 국가평의회가 이를 승인했다. 비폭력 대중 동원과 「병합 무효」의 법적 연속성 논리를 결합한 발트의 경험은 다른 공화국들의 이탈에 선례가 되었으며, 연구자들은 발트 3국을 소련 해체 과정의 선봉으로 꼽는다.
연표
- 1987.08.23히르베파르크 집회
탈린에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규탄하는 집회가 처음으로 공개리에 열렸다.
- 1988인민전선의 해
사유디스·라흐바린네·라트비아 인민전선이 결성되었고,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다.
- 1989.08.23발트의 길
200만 명이 세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 1989.12비밀의정서 무효 선언
인민대의원대회가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으며,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소련공산당에서 분리를 결정했다.
- 1990.03.11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선언
사유디스가 주도한 최고회의가 독립 회복을 선언했고 모스크바는 경제 봉쇄로 응수했다.
- 1991.01빌뉴스와 리가
유혈 진압 시도가 시민의 저항과 국내외의 반발 속에 실패로 끝났다.
- 1991.09.06독립 승인
8월 쿠데타 실패 뒤 소련 국가평의회가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관련 인물 29명
주도 · 집행6
라트비아 출신의 내무장관으로 발트 강경책의 한 축이었다.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빌뉴스에 투입된 KGB 특수부대를 관할했다.
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1991년 1월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책임 계통 위쪽에 있었다.
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지상군 총사령관으로 빌뉴스 작전 당시 현지에 있었다.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자,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유오자스 예르말라비추스1940–20221991년 1월 11일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고, 1월 13일 BMP 확성기로 「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는 육성을 방송했다.
소련 국방차관, 빌뉴스 작전 현장 지휘관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1945–20111991년 1월 12일 빌뉴스에 도착해 모든 군사작전의 지휘를 맡았다.
지도부8
봉쇄와 협상 사이를 오갔고, 전면적 무력 사용은 끝내 택하지 않았다.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1932–사유디스 의장이자 최고회의 의장으로 독립 회복을 이끌었다.
라트비아 인민전선 의장다이니스 이반스1955–인민전선 의장으로서 발트의 길 3자 회담(패르누와 체시스)을 공동 주도했으며, 회고록에 당시 비밀 회합의 긴장을 기록했다.
에스토니아 주권 선언을 이끈 공산당 제1서기바이노 밸랴스1931–20241988년 6월 16일 카를 바이노를 대신해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에 취임했고, 에스토니아계로서 대중전선과 협력하여 주권 선언을 추진했다.
소련군 철수 서명운동 주도자로무알다스 오졸라스1939–2015사유디스의 중심 인물로서 발트의 길을 준비하던 시기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200만 명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3국 공동 계획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바리케이드 방어를 총괄한 라트비아 총리이바르스 고드마니스1951–바리케이드 당시 총리로서 인민전선과 전략 거점 방어를 조율했고, 1월 20일 공격 중 푸고에게 전화했으나 푸고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답했다.
바리케이드 당시 라트비아 최고회의 의장아나톨리스 고르부노우스1942–바리케이드 당시 라트비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을 받았으며,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상황을 논의했다.
히르베파르크 집회 주최자티이트 마디손1950–2021MRP-AEG의 지도자로서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소집했다.
참여10
비밀의정서 조사위원회를 이끌어 병합 무효론에 소련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1932–2010리투아니아공산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해 독립의 정치적 길을 넓혔다.
에스토니아 인민대의원, MRP 위원회 위원엔델 리프마1930–20151989년 5월 의회에 비밀의정서 결의안을 제출하고, 12월 23일 부결 후 야코블레프·코발료프와 함께 다음 날 재상정을 주선했다.
MRP 위원회 부위원장, 지역간대의원그룹 공동의장유리 아파나시예프1934–20151989년 12월 14일 자신이 이끄는 지역간그룹이 의회 다수파에 대한 '야당'임을 선언해 표결 분위기를 민주파 쪽으로 기울게 했다.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카지미에라 프룬스키에네1943–2026독립 선언 직후 총리에 임명되어 반봉쇄대책위원회를 이끌었고,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한 뒤 사퇴했다.
소련 외무장관보리스 판킨1931–1991년 9월 6일 국가평의회의 3국 독립 승인을 발표했다.
MRP-AEG 공동 창립자이자 단식 투쟁자위리 미크1948–2010히르베공원에서 에스토니아인의 인구적 위기를 경고하는 연설을 한 뒤, 언론의 비방 공세에 항의하며 두 달간의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발트 독립을 선제 승인한 러시아 대통령보리스 옐친1931–2007국가평의회보다 앞서 1991년 7~8월에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독립 승인 조약을 체결했다.
1월 사건 당시 총리알베르타스 시메나스1950–프룬스키엔 사임 후 1991년 1월 8일 총리가 되어 1월 사건을 맞았다.
야코블레프 위원회 에스토니아 대표이고르 그랴진1952–비밀 의정서를 조사한 위원회에서 법률 전문가로 활동했다.
반대 · 저항3
관련 용어
출처: Anatol Lieven, The Baltic Revolution: Estonia, Latvia, Lithuania and the Path to Independence (1993)Mark R. Beissinger, Nationalist Mobiliz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tate (2002)Serhii Plokhy, The Last Empire: The Final Days of the Soviet Unio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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