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경력 연표
- 1976–1980국무원 총리
- 1976–1981중공 중앙 주석
관련 역사 사건
양개범시와 1978년의 전환
1977년 2월 『인민일보』 사설이 내건 양개범시는 화궈펑의 권위가 마오의 지명에서 나온다는 사정을 반영했다. 그러나 같은 원칙은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으로 규정한 결정과 덩샤오핑의 실각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복권을 요구하는 원로들과 충돌했다. 1978년 5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논쟁은 마오의 권위를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가 되었다.
그해 11~12월의 중앙공작회의와 11기 3중전회는 톈안먼 사건을 재평가하고 당의 중심을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옮겼다. 화궈펑은 직위를 유지했지만 실권은 덩샤오핑과 천윈에게 넘어갔고, 1980년 자오쯔양이 총리, 1981년 후야오방이 당 주석이 되었다. 1981년 「역사결의」는 화궈펑이 4인방 분쇄에 공을 세웠으나 좌경 오류를 계속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시기는 마오 시대와 개혁기의 접합부로, 대약진식 「양약진」 투자 계획과 개혁의 첫 조치가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