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덩샤오핑 시대
마오의 당은 어떻게 시장을 받아들였고, 무엇을 끝내 바꾸지 않았는가?
4인방 체포 뒤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의 「실사구시」가 맞섰고,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는 당의 중심을 경제건설로 옮겼다. 안후이의 농가생산책임제, 광둥의 경제특구, 국유기업 개혁과 가격 이중제가 이어졌으며 민주의 벽과 「자산계급 자유화」 비판이 정치적 경계를 그었다. 1989년의 후퇴 뒤 1992년 덩의 남순강화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정했다.
양개범시와 진리 기준 논쟁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의 정통성은 마오의 지명에서 나왔다. 1977년 2월 『인민일보』 사설은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단호히 지키고 지시는 모두 시종 따른다」고 선언했고, 이는 문화대혁명의 판정과 덩샤오핑의 실각도 유지한다는 뜻이었다. 덩은 4월 편지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자고 응수했고 7월 복귀했다. 1978년 5월 후야오방이 조직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 논문은 전국 논쟁을 일으켜 원로들과 지방 지도자들을 덩 편으로 모았다. 근거 1 · 근거 2
1978년 11~12월의 중앙공작회의는 예정된 농업 의제를 넘어 1976년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 펑더화이·타오주 등의 복권, 천윈의 정치국 상무위원 복귀를 결정했다. 12월 13일 덩의 폐막 연설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일치단결해 앞을 보자」가 이어진 11기 3중전회의 기조가 되었다. 전회는 「계급투쟁을 강령으로」를 버리고 당의 중심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옮겼다. 화궈펑은 직위를 유지했으나 실권은 넘어갔다. 근거 3 · 근거 4
복권과 「역사결의」
후야오방의 중앙조직부는 1978년부터 문화대혁명과 그 이전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했다. 류사오치는 1980년 복권되어 국장이 치러졌고, 반우파 투쟁의 우파 55만 명 중 극소수를 제외한 전원, 「61인 반도」와 「내몽골 인민당」 사건 관련자, 지주·부농 「모자」를 쓴 2천만 명이 낙인을 벗었다. 「발란반정(撥亂反正)」이라 불린 이 과정은 개혁의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다. 근거 4 · 근거 5
마오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남았다. 1980~1981년 4천 명의 간부가 토론한 뒤 1981년 6월 6중전회가 채택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문화대혁명을 마오가 「발동하고 이끈」 전면적 오류로, 대약진을 좌경 오류로 규정하되 마오의 「공이 주요하고 과가 부차적」이며 마오쩌둥 사상은 「집단지혜의 결정」이라고 결론지었다. 덩은 「마오 주석의 깃발을 버리면 당의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흐루쇼프식 전면 부정을 거부했다. 같은 회의에서 화궈펑이 당 주석에서 물러나고 후야오방이 뒤를 이었다. 근거 6 · 근거 7
농촌: 샤오강촌에서 인민공사 해체까지
개혁은 농민에게서 시작되었다. 1978년 가뭄 속에 안후이 펑양현 샤오강촌의 18호 농민은 처벌을 각오하고 토지를 나누는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었고, 이듬해 수확이 몇 배로 늘었다. 안후이 제1서기 완리는 이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뒷받침했으며, 쓰촨의 자오쯔양도 같은 실험을 허용했다.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곡식을 먹으려면 쯔양을 찾으라」는 말이 돌았다. 근거 8 · 근거 9
중앙은 처음에 청부제를 빈곤 산간 지역에 한정했으나 1980년 「75호 문건」, 1982년 「1호 문건」으로 단계적으로 허용했고 1983년 정사분리로 인민공사가 해체되었다. 국가 수매가 인상과 함께 농업 생산은 1978~1984년 연 7% 이상 성장했고 곡물은 3억 톤에서 4억 톤이 되었다. 향진기업이 농촌 잉여노동을 흡수하며 1980년대 성장의 한 축이 되었다. 토지는 집단 소유로 남았고 경작권만 농가에 주어졌다. 근거 8 · 근거 10
개방: 경제특구와 「창구」
1979년 광둥 제1서기 시중쉰은 홍콩 탈출을 막을 방책으로 중앙에 「선행일보」의 자율권을 요구했고, 덩은 「특구」라는 이름과 함께 「중앙에 돈은 없으니 스스로 길을 뚫으라」고 답했다. 1980년 8월 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이 경제특구가 되었다. 홍콩 자본의 위탁가공, 토지 사용권의 유상 양도, 계약제 노동, 외국인 투자가 처음 허용되었고, 어촌 선전은 10년 만에 인구 10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근거 11 · 근거 12
특구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천윈 등 계획파는 특구를 「조계의 재현」으로 의심했고 1982년 광둥의 밀수 사건과 1985년 하이난 자동차 수입 스캔들이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덩은 1984년 1월 첫 남순으로 「선전의 경험은 옳다」고 확인하고 14개 연해 도시를 추가 개방했으며, 1988년 하이난이 성이자 특구가 되었다. 「새장 경제」—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시장이라는 새를 날린다 — 는 천윈이, 「돌다리를 더듬으며 강을 건넌다」는 실용주의는 덩이 대표했다. 근거 13 · 근거 14
정치의 경계: 민주의 벽과 4항 기본원칙
1978년 11월 베이징 시단의 벽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의 억울함과 1976년 톈안먼 사건 재평가 요구였고, 덩은 이를 「좋은 일」이라 하며 3중전회의 논쟁에 이용했다. 그러나 12월 전기공 웨이징성의 「제5의 현대화 — 민주」는 덩의 4개 현대화가 민주 없이는 공허하며 덩 자신도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썼다. 『탐색』 『4·5 논단』 같은 민간 간행물이 잇달아 나왔다. 근거 15 · 근거 16
1979년 3월 30일 덩은 이론공작회의에서 「4항 기본원칙」— 사회주의 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 을 선언했고, 다음 날 웨이징성이 체포되어 10월 15년형을 받았다. 민주의 벽은 12월 폐쇄되었고 1980년 헌법에서 「대명대방·대자보」의 권리가 삭제되었다. 4항 기본원칙은 이후 개혁의 정치적 한계로 작동해 1983년 「정신오염 청소」, 1987년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운동의 근거가 되었다. 근거 17 · 근거 18
도시 개혁과 1980년대 후반의 동요
1984년 10월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은 개혁의 무대를 도시로 옮겼다. 국유기업에 이윤 유보와 경영 자율권이 주어졌고 계획 가격과 시장 가격이 공존하는 이중제가 도입되었으며, 개체호(자영업)와 사영기업이 허용되었다. 자오쯔양 총리 아래 1985~1988년 연 10%를 넘는 성장이 이어졌으나 이중제는 「관다오(官倒)」— 관료의 차익 거래 — 와 부패를 낳았고 인플레이션이 커졌다. 근거 10 · 근거 19
1986년 말 팡리즈의 강연에 자극받은 학생 시위가 허페이에서 상하이·베이징으로 번지자 원로들은 후야오방에게 책임을 물어 1987년 1월 사임시켰고, 자오쯔양이 총서기가 되었다. 자오는 1987년 제13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과 당정 분리 등 정치체제 개혁을 제기했다. 1988년 여름 덩이 밀어붙인 가격 「관문 돌파」 시도는 사재기와 은행 인출 사태를 낳아 철회되었고, 「치리정돈」의 긴축 속에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깊어진 채 1989년을 맞았다. 근거 20 · 근거 19
1992년 남순강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
1989년 6월의 진압과 소련·동유럽의 붕괴 뒤 보수파는 「화평연변(和平演變)」— 서방의 평화적 체제 전복 — 을 경계하며 개혁을 늦췄고 「성이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를 묻는 논쟁이 되살아났다. 88세의 덩은 공식 직위 없이 1992년 1~2월 우창·선전·주하이·상하이를 돌며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며 「계획과 시장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근거 21 · 근거 22
남순강화는 처음 홍콩과 광둥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군과 지방의 지지 속에 장쩌민 지도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1992년 10월 제14차 당대회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개혁의 목표로 확정했고 이후 10년의 고도성장과 국유기업 개혁, 2001년 WTO 가입이 뒤따랐다. 개혁개방은 세계은행 기준으로 약 8억 명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나 불평등·부패·환경 파괴와 정치 개혁의 부재를 함께 남겼다. 덩의 길은 「경제는 개혁하고 정치는 지킨다」는 공식으로 고르바초프의 길과 대비되어 왔다. 근거 10 · 근거 23
결과
중국은 15년 만에 집단농업과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에 편입되었고 빈곤이 급감했다. 그러나 「4항 기본원칙」은 정치체제 개혁을 배제했고,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실각은 그 경계를 보여주었다. 소련의 해체와 대비되는 「중국의 길」은 여기서 나왔다.
연표와 지도
- 1977.02「양개범시」 사설
화궈펑 지도부가 마오의 결정과 지시를 모두 지킨다고 선언했다.
- 1977.07덩샤오핑 복귀
10기 3중전회가 덩의 직위를 회복시켰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자」고 말했다.
- 1978.05.11「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
『광명일보』의 논문이 양개범시를 겨냥한 전국 논쟁을 열었다.
- 11978.11.24샤오강촌의 비밀 계약
안후이 펑양현의 18호 농민이 손도장을 찍고 토지를 나누었다.
- 21978.1211기 3중전회
당의 중심을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옮기고 1976년 톈안먼 사건을 재평가했다. 천윈이 부주석이 되었다.
- 31978.12–1979.03민주의 벽
시단의 벽에 대자보가 붙었고 웨이징성은 「제5의 현대화」를 요구했다. 1979년 3월 덩은 4항 기본원칙을 선언하고 웨이를 체포했다.
- 41980.08경제특구 설치
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이 특구가 되었다. 같은 달 자오쯔양이 총리가 되었다.
- 1981.06「역사결의」
6중전회가 문화대혁명을 오류로 규정하고 마오의 공과를 평가했다. 후야오방이 당 주석이 되었다.
- 1982.01중앙 1호 문건: 농가생산책임제 승인
1983년까지 인민공사가 해체되었다.
- 1984.1012기 3중전회: 「사회주의 상품경제」
개혁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국유기업으로 옮겨졌고 가격 이중제가 도입되었다.
- 1986.12–1987.01학생 시위와 후야오방 사임
허페이·상하이·베이징의 시위 뒤 후야오방이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 1988.08가격개혁 「관문 돌파」 실패
가격 자유화 발표로 사재기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개혁이 후퇴했다.
- 51992.01–02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우창·선전·주하이·상하이에서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라며 개혁의 재가동을 지시했다. 10월 제14차 당대회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목표로 삼았다.
관련 인물 16명
주도 · 집행2
지도부3
참여5
반대 · 저항5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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