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1992

개혁개방: 덩샤오핑 시대

마오의 당은 어떻게 시장을 받아들였고, 무엇을 끝내 바꾸지 않았는가?

4인방 체포 뒤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의 「실사구시」가 맞섰고,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는 당의 중심을 경제건설로 옮겼다. 안후이의 농가생산책임제, 광둥의 경제특구, 국유기업 개혁과 가격 이중제가 이어졌으며 민주의 벽과 「자산계급 자유화」 비판이 정치적 경계를 그었다. 1989년의 후퇴 뒤 1992년 덩의 남순강화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정했다.

4인방 이후: 화궈펑의 과도기와 「두 개의 모든」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은 당 주석·총리·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한 몸에 지녔지만, 그의 정통성은 마오가 남겼다는 「당신이 일을 맡으면 나는 안심한다」는 쪽지에서 나왔다. 1977년 2월 7일 《인민일보》·《홍기》·《해방군보》의 공동 사설 「문건을 잘 학습하고 핵심 고리를 잡자」는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은 모두 단호히 지키고, 마오 주석의 지시는 모두 시종 변함없이 따른다”고 선언했다. 이 「두 개의 모든」(양개범시)은 문화대혁명의 판정과 1976년 덩샤오핑의 두 번째 실각도 그대로 둔다는 뜻이었다. 1978년에는 회의장마다 마오와 화궈펑의 초상을 나란히 걸게 했다. 1 2 3

그러나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경제 노선과도 결별했다. 1977년 대학 입시가 10년 만에 부활했고, 1976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4,600여 명의 간부가 복권되었다. 1978년 2월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새 헌법과 「1976~1985년 국민경제 발전 10개년 계획 요강」을 통과시켰다. 계획은 1985년까지 강철 6천만 톤, 곡물 8천억 근을 목표로 강철 기지 10곳, 대유전 10곳, 대형 발전소 30곳 등 120개 대형 사업을 벌이려 했고, 1978년 여름까지 800억 달러어치의 기술·설비 수입이 계획되었다. 무리한 수입 계획은 뒤에 「양약진」(洋躍進)이라 비판받았지만, 소련식 대규모 공업화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개방을 함께 묶은 점에서 덩샤오핑의 1975년 「정돈」을 이은 것이기도 했다. 3 4 5 6

덩샤오핑은 4월 10일 중앙에 보낸 편지에서 「체계 전체로서의 진정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당을 이끌자고 제안했고, 아직 복권되기 전인 5월 24일 중앙판공청 간부들에게 「두 개의 모든」이 마르크스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오 동지가 한 말을 다른 문제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는 없으며, 마오쩌둥 사상은 체계 전체로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젠잉 등 원로들의 압력 속에 7월 제10기 제3차 전체회의는 그의 모든 직무를 회복시켰고, 8월 제11차 당대회는 화궈펑·예젠잉·덩샤오핑·리셴녠·왕둥싱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았다. 대회는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면서도 「계급투쟁을 중심 고리로」를 버리지 않았다. 7 1 6

진리 표준 토론과 11기 3중전회

돌파구는 철학 논문에서 나왔다. 난징대학 철학과 교원 후푸밍이 쓰고 여러 사람이 고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중앙조직부장 후야오방의 심사를 거쳐 1978년 5월 10일 중앙당교 내부 간행물에 실렸고, 이튿날 《광명일보》 1면에 「본보 특약 평론원」의 이름으로, 12일 《인민일보》와 《해방군보》에 실렸다. 7천 자가 넘는 글은 마르크스와 마오의 말을 들어 어떤 이론도 사회적 실천으로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두 개의 모든」의 이론적 기초를 흔들었다. 화궈펑이 북조선을 방문 중이던 때였다. 덩샤오핑은 6월 전군 정치공작회의에서 이 관점을 지지했고, 각 성과 군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진리 표준」 쪽에 섰다. 8 9 1

1978년 11월 10일부터 열린 중앙공작회의는 예정된 농업 의제를 넘어섰다. 천윈은 보이보 등 「61인 반도」 사건, 타오주·왕허서우·펑더화이의 문제, 1976년 톈안먼 사건, 캉성의 오류 같은 「여섯 가지 문제」를 제기해 마오파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덩샤오핑은 12월 13일 폐막 연설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일치단결해 앞을 보자」에서 사상 해방이 「중대한 정치 임무」라고 말했고, 이 연설이 전체회의의 기조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1979년 1월 1일의 미중 수교를 앞두고 있었고, 이듬해 초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공업·농업 생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 11 12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베이징 징시 빈관에서 열린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는 “대규모의 격렬한 대중적 계급투쟁은 이미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선언하고 당의 중심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옮겼다. 사회주의 아래서 대중적 계급투쟁은 끝났다는 류사오치의 견해가 공공연히 받아들여졌고 마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의 계속혁명」론은 버려졌다. 책임 있는 지도자의 개인 의견을 「지시」라 부르지 말라고 했고 「마오 주석」「화 주석」이라는 호칭도 피했다. 「우경 번안풍 반격」은 부정되었고, 펑더화이·타오주·보이보·양상쿤이 복권되었으며 1976년 톈안먼 사건이 재평가되었다. 천윈이 상무위원·부주석과 새로 세운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덩잉차오·후야오방·왕전이 정치국에 들어갔다. 화궈펑은 자리를 지켰지만 실권은 덩샤오핑에게 넘어갔고, 왕둥싱·지덩쿠이·우더·천시롄의 이른바 「작은 4인방」은 1980년 2월 모든 직무에서 물러났다. 10 13 6 1 5

발란반정: 복권과 「역사결의」

후야오방의 중앙조직부는 1978년부터 문화대혁명과 그 이전의 「억울하고 거짓되고 잘못된 사건」을 재심했다. 몇 해 사이 300만 건이 넘는 사건의 피해자가 복권되었고, 반우파 투쟁의 우파 55만 명 가운데 극소수를 뺀 전원, 「61인 반도」와 「내몽골 인민당」 사건 관련자가 낙인을 벗었다. 지주·부농 400만 명이 복권되었고, 「흑4류」로 몰렸던 사람과 그 가족 2천만 명 이상이 사회적 신분을 되찾았다. 류사오치는 1980년 2월 제5차 전체회의에서 복권되어 5월 국가 추도식이 열렸다. 「혼란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돌린다」는 뜻의 이 발란반정(撥亂反正)은 개혁을 지지할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다. 5 14 15 16

마오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남았다. 1980년 1월 덩샤오핑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만들겠다고 밝혔고, 후차오무가 15개월 동안 초안을 맡았다. 덩은 “어떤 경우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깃발을 버릴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전면 부정을 거부했고, 마오 자신이 문화대혁명을 「성과 7, 과오 3」으로 평가했던 모순도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980년 8월 이탈리아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에게 마오의 과오는 「부차적」이라고 말했다. 1980~1981년 간부 4천 명의 토론을 거쳐 1981년 6월 27일 제6차 전체회의가 채택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문화대혁명을 마오가 「발동하고 이끈」 전면적 오류로 규정하되 그의 「공이 일차적이고 과오는 이차적」이라고 결론지었다. 전날 화궈펑은 당 주석에서 물러났고, 1980년 9월에는 총리 자리를 자오쯔양에게 넘겼다. 후야오방은 당 주석이 되었다가 1982년 9월 제12차 당대회에서 주석직이 폐지되자 총서기가 되었다. 17 18 15 3

농촌: 샤오강촌에서 인민공사 해체까지

개혁은 농민에게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말 식량 부족은 관리들이 「1959년의 재앙」 재현을 경고할 만큼 심각했고, 가뭄이 도시의 식량 위기로 번졌다. 1978년 11월 24일 밤 안후이 펑양현 샤오강촌의 18호 농민은 처벌을 각오하고 토지를 집집마다 나누어 생산을 책임지는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1979년 샤오강촌의 곡물 생산은 6만 6천 kg으로 1966~1970년 다섯 해 생산을 합친 것과 맞먹었다. 안후이 제1서기 완리는 이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뒷받침했으며, 쓰촨의 자오쯔양도 같은 실험을 허용했다.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곡식을 먹으려면 쯔양을 찾으라”는 말이 돌았다. 19 6 20 21

중앙은 처음에 망설였다. 3중전회는 생산을 작업조에 맡기는 것까지만 허용하고 농가에 맡기는 것은 금했으며, 국가농업위원회의 왕런중은 집단경제의 장점을 내세워 반대했다. 1980년 1월 회의에서 안후이 농업위원회 주임 저우웨리가 1979년 말 생산대의 10%가 농가생산책임제를 택했다고 보고하자 격론이 벌어졌다. 덩샤오핑은 1980년 4~5월 서북·구이저우·윈난 같은 빈곤 지역에서는 농가 청부를 써야 하며 펑양현과 페이시현의 실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중앙은 1980년 「75호 문건」, 1982년 「1호 문건」으로 단계적으로 허용했고, 1983년 정사분리로 인민공사가 해체되었다. 땅은 집단 소유로 남았고 경작권만 농가에 주어졌다. 농가는 국가 할당량을 낮은 계획 가격으로 팔고 나머지는 더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19 22 6

결과는 극적이었다. 1975~1985년 농업 생산은 25% 늘었고, 농가생산책임제 아래 농업 생산은 개혁 전의 연 2.7%에서 연 8.2%로 빨라졌다. 자오쯔양은 회고록에서 1984년이 되자 농민들이 팔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곡식을 가졌고 국가 곡물 창고가 가득 찼다고 썼다. 향진기업이 농촌의 잉여 노동을 흡수해 그 고용이 1978년 2,800만 명에서 1996년 1억 3,500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농업 성장은 느려졌고, 농촌 공공 투자가 예산의 10%에도 못 미치는 가운데 도농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6 23 19

개방: 서커우, 경제특구, 연해 도시

개방의 첫 실험은 홍콩의 국영 해운사 초상국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화대혁명 때 친청 감옥에 갇혔던 교통부의 위안겅은 1978년 10월 초상국을 수단으로 본토 경제를 국제 시장에 여는 방안을 올렸고, 1979년 1월 31일 리셴녠과 구무가 참석한 중난하이 회의에서 바오안현 서커우의 공업구가 승인되었다. 4월 광둥 제1서기 시중쉰 등은 광둥·푸젠에 더 큰 자율권을 주고 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 네 곳에 특별 구역을 두자고 중앙에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특구」라는 이름을 지지하며 유격전 시절의 말을 빌려 “스스로 길을 찾아 혈로를 뚫으라”고 했고, 정치 실험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름은 「경제특구」로 정해졌다. 1979년 7월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이 나왔고, 네 특구는 1980~1981년에 세워졌다. 24 25 26 27 6

특구는 세금 감면, 낮은 관세, 싼 토지와 유연한 노동 계약을 내세워 주로 홍콩·타이완·동남아시아 화교 자본의 위탁가공을 끌어들였고, 1990년 말에는 홍콩 수출이 광둥 공업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위안겅의 서커우는 능력에 따른 채용과 임금, 단위에서 독립한 주택, 공개 입찰, 1985년 주민 2천 명이 참여한 지역 선거까지 실험했고, 「시간은 금, 효율은 생명」이라는 구호를 걸었다. 1980년 인구 3만 명이던 선전은 「선전 속도」로 불리는 성장 끝에 2025년 인구 1,820만 명의 도시가 되었다. 1984년 1월 첫 남방 시찰에서 덩은 선전과 주하이를 칭찬했고, 2월 24일 선전 특구의 번영에 감명받았다며 개방의 방침은 “열자는 것이지 닫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5월 다롄·톈진·상하이·광저우 등 14개 연해 도시가 개방되었고, 1985년 창장·주장 삼각주 등 연해 경제 개방구, 1988년 하이난성 특구, 1990년 상하이 푸둥 신구가 뒤따랐다. 26 24 28 6 29

특구는 처음부터 논쟁거리였다. 계획파 원로 천윈은 1980년 「새장 경제」를 내걸었다. “새장은 계획이며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새장 안에서 새는 마음대로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리셴녠은 끝내 선전을 찾지 않았다. 특구가 「조계의 재현」이 될 수 있다는 의심, 1982년 광둥의 밀수 사건과 1985년 하이난 자동차 수입 스캔들이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점진적 실험은 「돌다리를 더듬으며 강을 건넌다」는 말로, 천윈의 신중론은 계획의 틀 안에서 시장을 쓰자는 「새장」으로 요약되었고, 두 노선의 긴장은 천윈이 죽는 1995년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 초의 개혁 일부는 천윈이 1950년대 중반에 내놓은 구상을 실행한 것이기도 했다. 30 6 31 28

정치의 경계: 민주의 벽, 4항 기본원칙, 「정신오염」

1978년 11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베이징 시단 거리의 긴 벽돌담에 수천 명이 대자보를 붙였다.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의 억울함과 1976년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 요구가 많았고, 덩샤오핑은 이를 화궈펑 쪽을 압박하는 데 쓰며 「좋은 일」이라 했다. 12월 5일 전기공 웨이징성이 붙인 「제5의 현대화: 민주 및 기타」는 덩샤오핑의 4개 현대화가 민주 없이는 공허하다고 썼고, 덩 자신도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탐색』『4·5 논단』 같은 민간 간행물이 잇달아 나왔다. 32 33 34

1979년 3월 30일 이론공작 무허회에서 덩은 「4항 기본원칙」, 곧 사회주의의 길, 프롤레타리아 독재(뒤에 인민민주독재), 공산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라고 선언했다. 그는 “사회주의, 오직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며 오른쪽에서 오는 회의와 반대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았다. 웨이징성은 다른 활동가 15명과 함께 체포되어 10월 징역 15년을 받았다. 민주의 벽은 12월 폐쇄되었고, 1980년 9월 제5기 전인대 제3차 회의는 헌법에서 대명·대방·대변론·대자보의 「4대」를 없앴다. 4항 기본원칙은 이후 사상 해방의 「붉은 선」이 되었다. 35 36 33 34 37

1980년대 초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 아래의 「소외」와 마르크스주의 인도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인민일보》 부편집장 왕뤄수이는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이라 썼고 주양도 소외론을 폈다. 1983년 6월 4일 선전부장 덩리췬은 중앙당교에서 「정신오염 청소」를 처음 꺼냈고, 10월 12일 제12기 제2차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사상 전선에서 정신오염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마와 화장을 금하는 지방 조치까지 나왔고, 주양은 공개 사과했으며 10월 30일 《인민일보》 편집장 후지웨이와 왕뤄수이가 물러났다. 외국 투자자의 동요를 걱정한 후야오방·자오쯔양·완리가 경제와 농촌을 운동에서 떼어 냈고, 운동은 1984년 1월 두 달 만에 사실상 끝났다. 38 39 40 41 42

도시 개혁, 이중가격, 1986~1988년의 동요

1984년 10월 제12기 제3차 전체회의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은 계획경제만이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는 길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계획 있는 상품경제」를 목표로 삼아 개혁의 무대를 도시로 옮겼다. 국유기업은 이윤 유보와 경영 자율권, 청부 경영을 얻었고 개체호와 사영기업이 늘어났다. 1984년 5월의 국무원 규정과 1985년 3월의 조치로 계획 안의 물자는 국가 가격, 계획 밖의 물자는 시장 가격으로 파는 「가격 이중제」가 기본 정책이 되었다. 이중제는 부족을 풀고 향진기업에 원료 시장을 열어 주었지만, 권력으로 계획 가격 물자를 빼내 시장에 되파는 「관다오」(官倒)를 낳았다. 6 43 23

1986년 덩샤오핑은 정치체제 개혁 없이는 경제체제 개혁도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9월 자오쯔양 등으로 정치체제 개혁 연구 소조가 꾸려졌다. 같은 9월 제6차 전체회의는 덩의 고집으로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문구를 정신문명 결의에 남겼다. 12월 5일 허페이의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학생들이 인민대표 후보를 스스로 내게 해 달라며 시위를 시작했고, 시위는 상하이·난징·톈진·베이징 등 17개 도시 150개 대학으로 번졌다. 부총장 팡리즈의 강연과 16%의 물가 상승이 배경이었다. 12월 27일 후차오무·왕전·덩리췬·보이보가 덩의 집을 찾아 후야오방의 「유약함」을 탓했고, 1987년 1월 10~15일 보이보가 주재한 「생활회」에서 후야오방은 비판받았다. 그를 감싼 사람은 시중쉰뿐이었다. 1월 16일 그는 총서기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이 대리 총서기가 되었으며, 팡리즈·류빈옌·왕뤄왕, 이어 왕뤄수이가 당적을 잃었다. 37 44 15 45 41

뒤이은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운동에서 덩리췬은 사람들의 70% 이상이 운동에 저항한다며 3~4년의 투쟁을 말했지만, 자오쯔양은 운동이 개혁개방을 부정하는 데 쓰인다고 덩샤오핑을 설득해 1987년 중반 이를 가라앉혔다. 10월 25일~11월 1일 제13차 당대회에서 자오는 중국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있다는 이론을 내세워 시장과 계획은 사회의 기본 경제 제도를 정하지 않는 중립적 수단이라고 했고, 당정 분리를 제기했다. 덩은 군사위원회 주석만 남기고 물러났고, 천윈·리셴녠·펑전·후차오무 등 원로 90여 명이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덩리췬은 중앙위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원로들은 중앙고문위원회와 리펑의 총리 임명으로 영향력을 지켰다. 37 46 47 40

1987년 국민생산이 10% 넘게 늘어나는 사이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월별 소비자물가는 1987년 1월 5%를 넘어 1989년 2월 28.4%까지 치솟았다. 덩샤오핑은 “늦게 넘기보다 일찍 넘는 게 낫다”며 가격 개혁을 재촉했고, 1988년 5월 자오쯔양은 5년 동안 일정한 물가 상승을 감수하며 가격을 바로잡자는 계획을 냈다. 8월 15~17일 베이다이허 정치국 회의가 대부분의 상품 가격을 풀기로 하자, 소식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예금 인출과 사재기가 벌어졌다. 한여름 항저우에서 털옷이, 우한에서 소금 200kg이 팔려 나갔다. 9월 자오는 「관문 돌파」(价格闯关)를 미루고 「치리정돈」의 긴축으로 돌아섰으며, 뒤에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밝혔다. 긴축은 경기 침체를 낳았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깊어진 채 1989년을 맞았다. 48 6 49

1989년: 시위, 진압, 반「화평연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였고, 장례 전날 10만 명이 행진했다. 인플레이션과 「관다오」에 대한 분노, 정치 개혁 요구가 겹친 시위는 단식과 전국 도시의 시위로 번졌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에 대한 양보를 주장하다 실각했고, 5월 계엄이 선포되었으며 6월 3~4일 군이 베이징 시내로 진입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자세한 경과와 희생 규모는 「1989년 톈안먼 시위와 6·4 진압」 항목이 다룬다. 장쩌민이 천윈·리셴녠 등 원로의 지지로 총서기가 되었고, 11월 덩샤오핑은 군사위원회 주석에서도 물러났다. 15 50 6 51

1989년 11월 제13기 제5차 전체회의는 개혁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며 「치리정돈과 개혁 심화에 관한 결정」을 내렸고, 가격 이중제를 하나로 합치자고 했다. 동유럽의 격변과 1991년 12월 소련의 해체는 보수파의 경계심을 키웠다. 그들은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말했다는 서방의 「화평연변」, 곧 평화적 체제 전복을 막아야 한다며 「성이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묻기 시작했다. 1991년 봄 상하이 《해방일보》가 「황푸핑」이라는 필명으로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잇달아 싣자, 베이징의 《구시》와 《광명일보》가 이를 반박했다. 덩은 소련의 해체를 오히려 더 개방해야 할 이유로 보았다. 43 51 52

남순강화에서 WTO 가입까지: 「사회주의 시장경제」

87세의 덩샤오핑은 공식 직위 없이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우창·창사를 거쳐 선전·주하이·광저우, 상하이를 돌았다. 그는 선전에서 “전족한 여자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며 더 대담하게 실험하라고 했고, “계획과 시장의 비중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다.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 착취와 양극화의 소멸, 공동 부유에 있다고 했고, 기본 노선을 백 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며 “사회주의를 견지하지 않고,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라고 했다. 또 「우」도 경계해야 하지만 주로 「좌」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51 53 54

남순강화는 처음 베이징의 중앙 언론에 무시되었고 홍콩 언론이 먼저 보도했으며, 3월 26일 《선전특구보》가 중앙 승인 없이 상세히 실었다. 덩은 주하이에서 양상쿤·류화칭·양바이빙 등 군 지도자에게 “개혁을 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고, 군은 개혁을 「보가호항」(保駕護航)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쩌민 지도부는 방향을 바꾸었다. 1992년 10월 12~18일 제14차 당대회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로 확정하고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 이론을 당 규약에 넣었으며 중앙고문위원회를 없앴다. 1990년 상하이·선전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고, 1993년 회사법이 국유기업에서 국가를 출자자로 규정했으며, 1994년 주룽지가 주도한 분세제 개혁이 17%의 부가가치세를 중심으로 중앙 재정을 되살렸다. 51 55 56 6 57

1997년 덩샤오핑이 죽은 뒤 장쩌민과 1998년 총리가 된 주룽지는 「큰 것은 붙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抓大放小)는 방침으로 국유기업을 재편했다. 소수의 대형 독점 기업을 뺀 많은 국유기업이 매각·합병·청산되었고, 2001~2004년 국유기업 수는 48% 줄었다. 그 대가는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1995~2001년 국유기업 노동자 약 3,500만 명, 곧 30% 가까이가 일자리를 잃었고, 소속 단위에 이름만 남긴 채 적은 생활비를 받는 「샤강」(下崗) 노동자가 1999년 말 2,440만 명에 이르렀다. 피해는 둥베이와 화베이의 옛 공업 지대에 몰렸고, 매각된 공장이 옛 공장장과 당서기에게 헐값에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수많은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중국은 1986년부터 관세무역일반협정 복귀를 추진했고, 2001년 12월 11일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다. 평균 관세는 개혁기 동안 56%에서 15%로 내려갔다. 6 58 59 60

평가: 성장, 빈곤, 불평등과 「중국의 길」

성장은 유례가 없었다. 1978~2013년 중국 경제는 연평균 9.5% 성장했고, 국내총생산은 1978년 1,500억 달러에서 2024년 18조 7천억 달러가 되었다. 1978~2005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2.7%에서 15.7%로 올랐다. 세계은행 기준으로 극빈층 비율은 1981년 88%에서 1% 아래로 떨어졌고, 1978~2018년 극빈에서 벗어난 사람은 8억 명이 넘는다. 공업 생산에서 국유 부문의 비중은 1980년 81%에서 2005년 15%로 줄었고, 민간 부문은 2005년 국내총생산의 절반을 넘었다. 생산성 향상이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으며, 동유럽의 「충격 요법」과 달리 생산 감소와 초인플레이션을 피했다는 점이 자주 비교된다. 6 61

불평등도 함께 커졌다. 개혁 전 중국의 소득 분배는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의 표현으로 「모든 면에서 평등주의적」이었지만, 한 연구는 지니계수가 1980년 0.30에서 2002년 0.55로 올랐다고 추산한다. 공식 지니계수는 2008년 0.491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2019년 0.465였고, 서남재경대학은 2012년 0.61로 추산했으며, 세계은행은 농촌의 낮은 물가를 감안해 2016년 0.385로 계산했다. 2009년 도시 주민의 소득은 농촌의 3.33배로 30여 년 만에 가장 큰 격차를 보였다. 복지 체계의 후퇴와 연해·내륙의 차이, 「샤강」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1990년대 지식인 사회는 정치 개혁과 법치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와, 부패와 불평등을 시장화의 결과로 보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신좌파로 갈라졌다. 62 6 59

성공의 원인을 둘러싼 해석도 갈린다. 지방에 실험을 맡기고 성공한 것을 넓혀 간 분권과 점진주의, 성장 실적으로 관리를 승진시킨 유인 구조를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 린춘은 수십 년 동안 국가가 보건과 공교육에 투자해 쌓은 인적 자본, 토지의 국가·집단 소유, 전략 산업의 공공 보유 같은 개혁 이전의 유산이 적어도 그만큼 중요했다고 본다. 맨커 올슨은 문화대혁명이 기득권 집단을 파괴해 개혁의 저항을 줄였다고까지 주장했다. 모리스 마이스너는 1996년 『덩샤오핑 시대: 중국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한 탐구』에서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의 깃발 아래 「관료자본주의」가 자라났다고 분석했다. 덩샤오핑의 길은 「경제는 개혁하고 정치는 지킨다」는 공식으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대비되어 왔다. 4항 기본원칙은 정치체제 개혁을 배제했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그 경계를 보여 주었다. 6 63 64 36

사회주의 운동에 개혁개방이 남긴 물음은 두 겹이다. 한편으로 공산당이 이끄는 국가가 시장과 외자를 끌어들여 수억 명을 빈곤에서 끌어올리고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를 만들었으며, 당은 이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초급 단계」로 설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 과정은 국유기업 노동자의 평생 고용과 복지라는 사회주의 시기의 보장을 해체하고, 고용주와 노동자, 연해와 내륙,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되살렸다. 1992년 덩 자신이 공동 부유를 사회주의의 본질에 넣고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면 양극화가 나타난다. 사회주의 제도는 양극화를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있다”고 말했던 만큼, 그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가 개혁기 중국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남았다. 53 6 59 47

결과

중국은 15년 만에 집단농업과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에 편입되었고 빈곤이 급감했다. 그러나 「4항 기본원칙」은 정치체제 개혁을 배제했고,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실각은 그 경계를 보여주었다. 소련의 해체와 대비되는 「중국의 길」은 여기서 나왔다.

연표와 지도

베이징 샤오강촌 (안후이) 허페이 상하이 (푸둥) 청두 (쓰촨) 우창 선전 서커우 (선전) 주하이 하이커우 (하이난) 7 시단 1 중난하이 18 톈안먼 광장 3 인민대회당 4 인민대회당 11 인민대회당 13 인민대회당 17 인민대회당 20 인민대회당 2 베이징 6 베이징 9 베이징 12 베이징 14 베이징 15 베이징 21 베이징 22 베이징 5 샤오강촌 16 허페이 10 선전 19 선전 8 서커우
  1. 11976.10.06중국
    4인방 체포

    화궈펑·예젠잉·왕둥싱이 4인방을 체포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화궈펑은 당·정·군의 최고직을 겸했다.

  2. 1977.02중국
    「양개범시」 사설

    화궈펑 지도부가 마오의 결정과 지시를 모두 지킨다고 선언했다.

  3. 21977.07중국
    덩샤오핑 복귀

    10기 3중전회가 덩의 직위를 회복시켰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자」고 말했다.

  4. 31977.08.12중국
    제11차 당대회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했으나 「계급투쟁을 중심 고리로」는 버리지 않았다. 그해 대학 입시가 10년 만에 부활했다.

  5. 41978.02중국
    10개년 계획 요강

    제5기 전인대가 120개 대형 사업을 담은 1976~1985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뒤에 「양약진」이라 비판받았다.

  6. 1978.05.11중국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

    《광명일보》의 특약 평론원 글이 「두 개의 모든」을 겨냥한 전국 논쟁을 열었다.

  7. 51978.11.24중국
    샤오강촌의 비밀 계약

    안후이 펑양현의 18호 농민이 손도장을 찍고 토지를 나누었다.

  8. 61978.12중국
    11기 3중전회

    당의 중심을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옮기고 1976년 톈안먼 사건을 재평가했다. 천윈이 부주석이 되었다.

  9. 71978.12–1979.03중국
    민주의 벽

    시단의 벽에 대자보가 붙었고 웨이징성은 「제5의 현대화」를 요구했다. 1979년 3월 덩은 4항 기본원칙을 선언하고 웨이를 체포했다.

  10. 1979.01.01중국미국
    미중 수교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덩샤오핑은 곧 미국을 방문했다.

  11. 81979.01.31중국
    서커우 공업구 승인

    위안겅이 홍콩 초상국을 통해 제안한 공업구가 중난하이 회의에서 승인되어 개방의 첫 실험이 되었다.

  12. 91980.02중국
    류사오치 복권과 「작은 4인방」 퇴진

    11기 5중전회가 류사오치를 복권하고 왕둥싱·지덩쿠이·우더·천시롄을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야오방이 총서기가 되었다.

  13. 101980.08중국
    경제특구 설치

    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이 특구가 되었다. 같은 달 자오쯔양이 총리가 되었다.

  14. 111980.09중국
    「4대」 삭제

    전인대가 헌법에서 대명·대방·대변론·대자보의 권리를 없앴다. 같은 회의에서 자오쯔양이 총리가 되었다.

  15. 121981.06중국
    「역사결의」

    6중전회가 문화대혁명을 오류로 규정하고 마오의 공과를 평가했다. 후야오방이 당 주석이 되었다.

  16. 1982.01중국
    중앙 1호 문건: 농가생산책임제 승인

    1983년까지 인민공사가 해체되었다.

  17. 131982.09중국
    제12차 당대회

    당 주석직이 폐지되고 후야오방이 총서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이 제기되었고 12월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18. 141983.10.12–1984.01중국
    「정신오염 청소」 운동

    덩리췬·후차오무가 소외론과 인도주의를 공격했으나 운동은 두 달 만에 사실상 끝났다.

  19. 1984.05중국
    14개 연해 도시 개방

    덩의 첫 남방 시찰 뒤 다롄·톈진·상하이·광저우 등이 외자에 열렸다.

  20. 151984.10중국
    12기 3중전회: 「사회주의 상품경제」

    개혁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국유기업으로 옮겨졌고 가격 이중제가 도입되었다.

  21. 161986.12–1987.01중국
    학생 시위와 후야오방 사임

    허페이·상하이·베이징의 시위 뒤 후야오방이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22. 171987.10.25–11.01중국
    제13차 당대회

    자오쯔양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과 당정 분리를 제기했다. 원로 90여 명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23. 1988.08중국
    가격개혁 「관문 돌파」 실패

    가격 자유화 발표로 사재기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개혁이 후퇴했다.

  24. 181989.04.15–06.04중국
    후야오방 사망과 톈안먼 시위

    추모로 시작된 시위가 6월 3~4일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자오쯔양이 실각했다.

  25. 191992.01–02중국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우창·선전·주하이·상하이에서 「사회주의를 견지하지 않고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라며 개혁의 재가동을 지시했다. 10월 제14차 당대회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목표로 삼았다.

  26. 201992.10.12–18중국
    제14차 당대회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개혁 목표로 확정하고 덩샤오핑의 이론을 당 규약에 넣었다.

  27. 211994.01중국
    분세제 개혁

    주룽지가 주도해 17% 부가가치세를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의 세입을 나누고 중앙 재정을 되살렸다.

  28. 221997.02.19중국
    덩샤오핑 사망

    같은 해부터 장쩌민·주룽지가 「큰 것은 붙잡고 작은 것은 놓는」 국유기업 재편에 나섰다.

  29. 2001.12.11중국미국
    WTO 가입

    15년에 걸친 협상 끝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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