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Left · 1956–1970년대

신좌파

New Left

신좌파는 1950년대 후반에 형성되어 1960~1970년대 서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퍼진 좌파 정치 운동과 그 사상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헝가리 혁명을 계기로 공산당을 떠나거나 비판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에게서 출발했고, 기성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소련·동유럽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두와 선을 그었다. 관료적·권위주의적 정당 정치 대신 참여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을 내세웠고, 학생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 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과 맞물려 1968년 무렵 정점에 이르렀다. 공통된 조직이나 단일한 이론은 없었으며, 그 안에는 반권위주의적·자유지상주의적 흐름부터 마오주의·트로츠키주의 그룹까지 폭넓은 입장이 섞여 있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신좌파의 아버지’로 불렸다.

상세

이름과 기원

신좌파는 1960년대에 등장해 1970년대까지 이어진 광범한 정치 운동이다. 독일어권 서술은 신좌파가 서로 다른 점이 많으면서도 기성 사회민주주의와, 1990년까지 존속한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두와 선을 그었다고 정리한다. ‘누벨 고슈(새로운 좌파)’라는 말은 1950년대 프랑스에서 이미 쓰였다. 《프랑스 옵세르바퇴르》의 편집인 클로드 부르데는 지배적인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 냉전의 두 진영 사이에 제3의 입장을 세우려 했고, 영국의 ‘제1세대 신좌파’는 이 프랑스어 표현을 빌려 왔다.

직접적 계기는 1956년이었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헝가리 혁명에 대해 미국과 영국 공산당이 보인 혼란스러운 대응을 겪으며, 일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전쟁 전 좌파 정당들의 중앙집권적·권위주의적 정치에 반대하는 더 민주적인 정치를 모색했다. 영국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E. P. 톰슨과 존 새빌은 당내에서 반대 잡지 《리즈너》를 냈고, 발행을 멈추라는 당의 요구를 거부해 당원 자격을 정지당한 뒤 1957년 여름 《뉴 리즈너》로 다시 펴냈다. 톰슨은 1959년 이 잡지에 쓴 글에서 소련을 ‘대숙청과 스탈린그라드, 비밀연설의 나라’, 헝가리 봉기를 진압한 나라로 보는 새 세대를 그리며 ‘신좌파’ 개념을 영국에 들여왔다. 미국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1960년의 공개서한으로 이 말을 널리 알렸다. 같은 해 《뉴 리즈너》와 《유니버시티스 앤드 레프트 리뷰》가 합쳐 《뉴 레프트 리뷰》가 되었고, 창간 편집인은 스튜어트 홀이었다. 1960년대 초 신좌파의 상당수는 1957년에 생긴 핵무장해제운동에 참여했다.

미국: 학생운동과 반전운동

미국에서 신좌파를 상징한 조직은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이었다. 1962년 톰 헤이든이 쓴 창립 문서 「포트휴런 선언」은 비폭력 시민 불복종에 바탕을 둔 ‘참여민주주의’를 내세웠다. SDS는 베트남 전쟁 기간 대학가의 대표적 반전 조직이 되어 회원이 크게 늘었으나, 1968~1969년 내부 갈등과 마오주의로의 경도 속에 분열했고, 그 과정에서 신공산주의 운동과 웨더 언더그라운드 같은 분파가 생겼다.

독일 출신 비판이론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신좌파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1960년대의 흑인 권력 운동과 학생운동을 자본주의의 새로운 도전자로 보았으며, 1971년 버클리 연설에서 급진 학생운동과 흑인·라틴계 투사들을 미국의 ‘유일한 진짜 반대 세력’이라고 불렀다. 신좌파 학생운동 안에서 여성들의 문제 제기도 자라났다. 1965~1966년 SDS 모임에서 발표된 글들이 여성의 자기 발견을 촉구했고, 1967년에는 버클리·보스턴·시카고·뉴욕·토론토에서 첫 여성해방 조직들이 생겼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67년 시카고 ‘새 정치를 위한 전국회의’에서 발언했고 뉴욕 래디컬 위민 등 급진 페미니즘 조직을 세웠다. 철학자 앤절라 데이비스는 미국 공산당원으로서 2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베트남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서독과 프랑스, 그리고 1968년

유럽의 신좌파는 서독과 서베를린에서 먼저 나타났다. 1960년대 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독일 지부로 구상된 ‘전복행동’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배운 동독 출신 루디 두치케가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분파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동맹(SDS)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두치케는 권력 구조와의 ‘체계적이고 제한된, 통제된 대결’이 대의민주주의의 계급적·권위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게 할 것이라고 보았고, 1968년 4월 11일 극우파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프랑스에서는 1967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와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이 나왔고, 상황주의 문헌의 문구가 1968년 5월 학생·노동자 파업과 시위의 포스터와 낙서를 채웠다. 파리 5월 사태에서 학생들은 한때 좌파 노동조합과 손잡았고, 시위는 전국적 대량 파업으로 번졌다. 낭테르 대학의 자유지상주의 활동가 다니엘 콘벤디트는 5월 운동의 대변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같은 해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일본, 스톡홀름 대학에서도 점거와 파업이 이어졌으나 대부분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경찰에 진압되었고, 1970년대에 학생운동의 영향력은 줄었다.

독일어권 서술은 신좌파를 마오주의·스탈린주의 계열의 K-그룹과 트로츠키주의자를 포함하는 ‘교조적 신좌파’와, 아나키스트·스폰티·아우토노메를 포함하는 ‘비교조적’ 또는 ‘반권위주의’ 신좌파로 나누기도 한다. 1980년대 초에는 K-그룹 출신 상당수가 비교조적 신좌파 출신들과 함께 녹색당에 합류했다.

사상과 쟁점

영국 신좌파 잡지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벗어난 ‘사회주의 인간주의’를 모색했다. 스튜어트 홀은 2010년 회고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인종·민족과 인종주의 같은 ‘제3세계’ 문제나 문학·문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데 고민했다고 썼으며, 그의 작업은 ‘문화연구’라는 분야를 여는 데 이르렀다. 페리 앤더슨이 오래 편집을 맡은 《뉴 레프트 리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람시, 알튀세르를 영어권에 소개했다. 미국에서는 C. L. R. 제임스와 라야 두나옙스카야의 존슨-포리스트 경향이 마르크스주의 인간주의를 내세웠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59년 쿠바 혁명부터 1990년까지 정당, 원주민·학생·농민 운동, 게릴라 조직을 아우르는 좌파를 넓게 신좌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적 평등 추구를 넘어 인종·민족 평등과 원주민 권리,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같은 과제를 내세웠다.

이웃 조류와의 관계

신좌파의 일부는 노동운동과 계급투쟁론 자체에서 멀어졌지만, 다른 일부는 마오주의를 받아들인 미국의 신공산주의 운동이나 독일어권의 K-그룹처럼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한 형태로 기울었다. 독일어권 서술에 따르면 신좌파의 일부는 스탈린 시대에 억압되었던 앞선 공산주의 구상, 곧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의회 민주주의나 트로츠키주의에 기댔고, 그 구상은 아나키즘적 사회상에까지 이르렀다. 1960년대 학생운동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장폴 사르트르·앙드레 고르스의 실존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주로 이론가들의 지적 전통이라면, 신좌파는 학생·반전·민권·여성 운동을 포괄한 정치 운동이었다. 이탈리아어 자료는 1920년대 좌익 공산주의의 생각이 1960년대 신좌파, 특히 1968년 5월 이후의 상황주의와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 운동에서 다시 제기되었다고 본다. 독일어권 서술은 신좌파의 영향이 1970년대 이후 대학의 학생 대표 기구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d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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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it.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