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핵군축 운동가
1957년 《뉴리즈너》 창간호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에서, 당이나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스탈린주의」 같은 거창한 추상 대신 현실의 남녀를 사회주의 이론의 중심에 다시 세우자고 했다.
옥스퍼드의 감리교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영국의 역사가·작가·평화운동가.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영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다. 1946년 크리스토퍼 힐·에릭 홉스봄 등과 공산당 역사가 그룹을 만들었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뒤 존 새빌과 당내 반대파 잡지 《리즈너》를 내다가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항의해 탈당했고, 《뉴리즈너》를 창간해 영국 「첫 신좌파」의 중심이 되었다. 1963년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으로 사회사 연구의 분수령을 만들었고, 1978년 『이론의 빈곤』에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했다. 1980년대에는 유럽 핵군축(END) 운동을 이끈 대표적 반핵 지식인이었다.
다른 이름: 에드워드 파머 톰슨 · 에드워드 파머 톰프슨
주요 활동과 소속
공산당 역사가에서 첫 신좌파로
1924년 2월 3일 옥스퍼드에서 감리교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프랭크는 2차 세계대전 중 불가리아 반파시스트 빨치산을 돕다 붙잡혀 총살되었다. 1941년 케임브리지 코퍼스크리스티 칼리지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입대해 전차부대원으로 이탈리아 전선의 제4차 카시노 전투 등에서 싸웠고, 전쟁 뒤 돌아와 1946년 역사학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시절 영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1946년 크리스토퍼 힐·에릭 홉스봄·로드니 힐턴·도나 토르 등과 공산당 역사가 그룹을 만들어 1952년 학술지 《과거와 현재》를 창간했다.
당원 시절에 쓴 첫 대작 『윌리엄 모리스: 낭만주의자에서 혁명가로』(1955)는, 공산당이 늘 모스크바 노선만 따른다는 공격을 받던 때 영국 마르크스주의의 토착 뿌리를 강조하려던 역사가 그룹의 기획에 속했다. 반세기 넘게 모리스의 예술만 내세우고 정치를 깎아내려 온 비평가들에게서 그를 되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뒤 톰슨은 존 새빌 등과 당내 반대파 잡지 《리즈너》를 냈고, 발행을 멈추라는 지시를 거부해 새빌과 함께 정권(停權)되었다. 반년 뒤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반발해 동료 대부분과 함께 탈당했다. 1957년 새빌과 창간한 《뉴리즈너》는 공산당·트로츠키주의 정당의 경직된 공식 마르크스주의와 노동당의 관리주의적 냉전 사회민주주의 양쪽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의 대안을 찾으려 했고, 「신좌파」로 불리게 된 흐름의 가장 중요한 기관지가 되었다.
창간호에 실은 「사회주의 휴머니즘: 속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톰슨은 스탈린주의를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관료층으로 타락한 혁명 엘리트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했다. 그는 스탈린이 토대와 상부구조의 비유를 인간의 의식적 행위와 무관하게 반쯤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적 모형으로 썼다고 비판하고,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은 어떤 「토대」도 아니었다는 식으로 역사에서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되살리려 했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 휴머니즘은 교조주의와 비인간성에 대한 반란, 곧 당이나 「두 진영」 같은 추상에서 현실의 남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960년 《뉴리즈너》는 《유니버시티스 앤드 레프트 리뷰》와 합쳐 《뉴레프트리뷰》가 되었으나, 톰슨 등은 1962년 잡지를 넘겨받은 페리 앤더슨 그룹과 갈라섰다. 그 뒤로 톰슨 쪽을 「첫 신좌파」, 앤더슨 쪽을 「둘째 신좌파」라 부르는 관행이 생겼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아래로부터의 역사
리즈 대학에서 성인 교육을 맡던 1963년, 웨스트요크셔 핼리팩스에 살며 쓴 800쪽이 넘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냈다. 1780~1832년 「형성기」의 장인·노동자 사회를 다룬 이 책은 그때까지 무시되던 작업장 관습, 실패한 음모, 협박 편지, 민중가요, 조합원증 같은 기록을 뒤져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정치 좌파의 잊힌 역사를 되살렸다. 서문에서 톰슨은 가난한 양말 직공, 러다이트 전모공, 「낡은」 수직공, 「공상적」 장인을 「후대의 엄청난 멸시」에서 구해 내겠다고 썼다. 그들의 이상이 환상이었고 봉기 음모가 무모했을지라도, 그들의 열망은 그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정당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이론적 핵심은 계급의 정의였다. 톰슨에게 계급은 구조가 아니라 관계였다. 사람들이 물려받거나 함께 겪은 공통의 경험을 통해 자기들끼리 이해관계가 같고 그것이 다른 이들의 이해관계와 대립한다고 느끼고 표현할 때 계급이 「생겨난다」. 계급 경험은 대체로 생산관계가 정하지만, 계급의식은 그 경험을 전통·가치 체계·사상·제도라는 문화의 형태로 다루는 방식이므로 법칙처럼 정해지지 않는다. 그는 노동계급을 비인간적인 통계 덩어리로 다루는 접근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에서 떼어 내려 했으며, 1966년 이런 방법을 「아래로부터의 역사」라고 불렀다.
이어 「시간, 노동 규율, 산업자본주의」(1967)에서는 시계로 재는 시간이 산업혁명과 함께 사회 통제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 경제」(1971)에서는 식량 폭동의 군중을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정당한 가격에 관한 공동체의 관념을 지키려 나선 능동적 주체로 그렸다. 1965년 「영국인의 특이성」에서는 페리 앤더슨과 톰 네언이 영국사를 계급 범주에 끼워 맞추며 영국의 경험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린다고 반박했다. 뒷날 조앤 스콧 등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계급 정체성 형성에서 젠더의 중심성을 보지 못한 남성 중심적 서술이라고 비판했다.
『이론의 빈곤』과 유럽 핵군축 운동
1971년 워릭 대학이 상업화된다며 항의의 뜻으로 대학을 떠났고, 그 경위를 『워릭 대학 주식회사』에 남겼다. 그 뒤로는 미국 등지에서 객원 교수로 강의하면서 주로 독립 저술가로 《뉴소사이어티》·《소셜리스트 레지스터》 등에 글을 썼다. 1978년 『이론의 빈곤』에서는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뉴레프트리뷰》에 모인 그 영국 추종자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제목은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따른 것이었고, 페리 앤더슨은 1980년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으로 응답했다. 1970년대 말에는 당시 노동당 정부의 시민적 자유 경시를 비판하는 글로 넓은 독자를 얻었다.
1980년부터는 되살아난 핵군축 운동의 가장 이름난 지식인이었다. 정부의 민방위 홍보물 「보호하고 생존하라」를 비튼 소책자 「항의하고 생존하라」는 영국 핵군축운동(CND)이 다시 힘을 얻는 데 큰 몫을 했다. 켄 코츠·메리 캘더·댄 스미스 등과 함께 쓴 1980년 「유럽 핵군축 호소문」은 폴란드에서 포르투갈까지 핵 없는 유럽을 요구했고, 유럽 핵군축(END)의 창립 문서가 되었다. 톰슨은 서유럽 평화운동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반체제 인사들 사이의 대화를 여는 데 앞장섰고, 그 때문에 소련 당국에게서 미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비난을 받았다. 마지막 저작 『짐승에 맞선 증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도덕률』은 블레이크가 영국 내전기 급진 종파의 이단적 종교 사상에 얼마나 기대고 있었는지를 밝혔다. 4년간 건강이 나빠진 끝에 1993년 8월 28일 우스터셔 어퍼윅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