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영국 베트남 반전 운동을 이끈 파키스탄 출신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작가
1968년 4월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IMG)에 들어가 《블랙 드워프》를 편집했고,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의 지도자로 언론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령 인도의 라호르에서 언론인 아버지와 공산당원 활동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파키스탄계 영국인 활동가·작가·영화인. 10대에 파키스탄 군부독재 반대 운동에 나섰다가 영국으로 보내져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에서 철학·정치학·경제학을 공부했고, 1965년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이 되었다. 베트남 연대 운동의 핵심 활동가로 1968년 영국 학생·반전 운동을 이끌었고, 같은 해 트로츠키주의 조직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IMG)에 들어가 지도부와 제4인터내셔널 국제집행위원회에서 일하며 《블랙 드워프》·《레드 몰》을 편집했다. 1980년대 초 IMG를 떠났고,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으로 『근본주의의 충돌』(2002) 등의 정치 저작과 「이슬람 5부작」 소설을 썼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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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981
제4인터내셔널대표
사회운동·조직
라호르에서 1968년 런던으로
1943년 10월 21일 영국령 인도 펀자브의 라호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자르 알리 칸은 농민을 조직하다 《파키스탄 타임스》에 들어간 언론인으로 공산주의에 공감했으나 입당하지는 않았고, 펀자브 총리를 지낸 시칸다르 하야트 칸의 딸인 어머니 타히라는 공산당에 들어가 혼수와 집안 보석까지 당에 내놓은 활동가였다.
알리는 10대에 파키스탄 군부독재 반대 운동에 나섰다. 군 정보기관에 있던 삼촌이 더는 그를 보호할 수 없다고 경고하자 부모는 그를 영국으로 보냈고, 그는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에서 철학·정치학·경제학을 공부했다. 1964년 12월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맬컴 X를 만났고, 1965년 유니언 회장에 뽑혔다. 그해부터 영국 경찰 특수부의 위장 경관들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해 2003년까지 적어도 14명이 그를 사찰했다.
베트남 전쟁 중 헨리 키신저 등과 반전 토론을 벌이며 이름이 알려졌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심판한 러셀 법정에서 증언했다. 1967년에는 체 게바라가 붙잡힌 곳 근처인 볼리비아 카미리에서 레지스 드브레 재판을 지켜보다 쿠바 혁명가로 몰리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지원으로 생긴 베트남 연대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고, 1968년 런던 미국 대사관 행진에 앞장섰다. 1968년 10월 이 운동이 주도한 시위에는 약 10만 명이 트래펄가 광장으로 행진했다. 롤링 스톤스의 「스트리트 파이팅 맨」이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과 《블랙 드워프》
1968년 4월 트로츠키주의 조직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IMG)에 들어갔고, 언론에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의 지도자로 널리 소개되면서 IMG도 대중에게 알려졌다. 같은 해 창간된 《블랙 드워프》는 1817~1824년의 급진 신문에서 이름을 따온 정치·문화 신문으로, 알리가 편집을 맡고 실라 로보섬·프레드 핼리데이 등이 편집진에 참여했다. 1970년 편집진이 레닌주의 쪽과 비레닌주의 쪽으로 갈라지자 알리를 비롯한 IMG 쪽은 1970년 3월 《레드 몰》을 새로 냈다.
IMG가 1969년 5월 제4인터내셔널(통합서기국)의 영국 지부가 된 뒤 알리는 IMG 지도부에 들어갔고 제4인터내셔널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존 레넌·오노 요코, 스토클리 카마이클 등과도 교유했으며, 레넌의 「파워 투 더 피플」은 그가 알리와 나눈 인터뷰에서 나왔다. 1974년 2월 총선에는 셰필드 애터클리프 선거구에 IMG 후보로 나섰고, 만화책 『초보자를 위한 트로츠키』를 함께 썼다. 1980~1981년 무렵 IMG를 떠나 토니 벤의 노동당 부대표 도전을 지지하러 노동당 쪽으로 옮겨 갔으나, 그의 입당이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1990년 소설 『구원』에서는 동구권 붕괴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풍자했다.
『근본주의의 충돌』에서 『극단적 중도』까지
9·11 테러 뒤 펴낸 『근본주의의 충돌: 십자군, 지하드, 근대성』(2002)에서 알리는 테러와 함께 하나의 세계사적 전환점이 왔다는 논평가들의 선언과 「테러에 맞서 함께 서느냐 아니냐」라는 백악관의 양자택일을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9·11은 끔찍한 형태로 돌아온 역사였고, 양쪽 모두 종교적 상징을 내걸었다. 9·11의 「보이는 폭력」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팔레스타인·체첸에 가해져 온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맞서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제국주의적 근본주의라는 두 근본주의라고 보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새로운 서구 식민주의를 함께 설명하려 했다. 동시에 계몽주의가 내건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미국 제국을 새로운 해방의 기획으로 그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바빌론의 부시』(2003)로 이라크 침공을 비판했고, 2003년에는 전쟁저지연합 전국위원으로 침공 반대 운동에 나섰다. 2005년 포르투알레그리 세계사회포럼에서 「포르투알레그리 선언」에 서명했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혁명을 지지했다. 1999년 NATO의 발칸 개입을 비판한 글과 책에서는 보스니아·코소보에서 세르비아군이 저지른 범죄의 규모를 깎아내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5년 『극단적 중도: 경고』에서는 영국의 「구별할 수 없는 정치 엘리트」가 자본주의에 헌신하는 정치를 비판하고, 유럽연합과 NATO의 실패, 웨스트민스터의 부패, 미국 제국의 지배를 분석했다.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그 편집장 수전 왓킨스와 런던 캠던에서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