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Feminism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서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성별 사이의 평등을 이루려는 정치·사회·문화 운동과 사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791년 올랭프 드 구주의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거쳐, 19세기 중엽부터 법 앞의 평등과 참정권을 요구한 제1물결, 1960년대 말 가부장제와 사생활의 정치를 문제 삼은 제2물결, 1990년대의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이어졌다. 자유주의·급진·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 갈래가 많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을 내세우면서도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선을 그었다.
상세
말과 정의
프랑스어 백과사전은 페미니즘을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며 그렇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과 사상의 총체로 정의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1872년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여성 평등을 지지하는 남성들을 비꼬는 뜻으로 썼고, 1882년부터 참정권 운동가 위베르틴 오클레르가 오늘날의 뜻으로 퍼뜨렸다. 그러나 여성해방 사상의 뿌리는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미니즘 안에는 서로 대립하는 흐름도 많아서, 여성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차이의 페미니즘과 성별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보편주의 페미니즘이 갈리고, 자유주의·급진·사회주의·유물론·퀴어 페미니즘이 나뉜다.
프랑스 혁명과 제1물결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에게 특별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올랭프 드 구주는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해 “여성은 처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으니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썼고, 뒤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9세기 중엽 시작된 제1물결의 주된 목표는 남녀가 법 앞에 평등해지는 것이었다. 1904년 베를린에서 국제여성참정권연맹이 세워졌고, 국가 차원의 여성 참정권은 1893년 당시 영국 자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처음 인정되었다. 유럽에서는 1906년 핀란드 대공국이 처음이었고, 러시아의 여성운동은 1917년 여름 임시정부로부터 모든 단위 선거의 보통선거권을 얻어 냈다. 프랑스 여성은 1944년에야 투표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클라라 캄포아모르가 앞장선 여성 참정권이 1931년 헌법에 들어갔다. 독일의 헬레네 슈퇴커는 1905년 모성보호동맹을 세우고 혼외 성생활의 자유와 피임, 낙태 권리를 주장하는 ‘새로운 윤리’를 내세웠으나, 시민계급 중심의 독일여성단체연합은 이 단체의 가입을 거부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부르주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과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1879)를 여성 문제의 이론적 원천으로 삼았다. 엥겔스는 사유재산의 출현을 모권이 끝나고 여성이 억압받기 시작한 시점과 겹쳐 보았다.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 전통의 대표자였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은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며 거부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 여성과 시민계급 여성의 생활 세계가 달랐다. 재산이 없는 노동자 여성에게는 산업 노동에서의 평등이, 시민계급 여성에게는 혼인법상의 평등과 정치 참여가 중심 요구였다. 체트킨이 이끈 잡지 《평등》이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구심이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1차 국제 사회주의 여성 대회는 사회주의 여성 인터내셔널을 만들었고, 체트킨은 ‘부르주아 페미니즘’과의 동맹을 거부하는 원칙을 관철했다. 이 흐름에서 여성의 동원은 계급투쟁에 종속되어야 했고, 자본주의의 타도만이 여성 억압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10월 혁명 뒤 볼셰비키는 처음에 여성운동과 협력해 페미니스트들이 준비해 온 개혁을 실행했으나, 독립적 여성운동은 부르주아적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국가가 주도하는 해방 사업을 폈다.
제2물결과 여러 갈래
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페미니즘의 대표적 명제를 남겼다. 1960년대 말 프랑스의 여성해방운동(MLF)과 미국의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시작된 제2물결은 가부장제 개념을 다시 다듬고 성차별주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사적 영역을 남성 지배의 중심 장소로 보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낙태와 피임처럼 여성이 자기 몸을 통제할 권리가 앞자리에 놓였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법 개정과 여론 활동을 통한 개혁을 추구했다. 급진 페미니즘은 남성의 여성 억압, 곧 가부장제를 사회 권력 체계의 토대로 보았다. 1969년 뉴욕급진여성은 자본주의를 여성 억압의 주된 원천으로 본 ‘정치파’와 남성 우위를 원천으로 본 ‘페미니스트’로 갈라졌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1970)에서 페미니즘 혁명의 목표가 남성 특권의 제거를 넘어 성 구별 그 자체의 제거라고 썼다. 프랑스의 유물론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을 적대하는 사회 계급으로 보았고, 크리스틴 델피는 가내 생산양식을 분석했다.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1960~1970년대 신좌파 속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얽힘에 주목하며 성장했고, 이 말을 처음 쓴 출판물은 1972년 시카고 여성해방연합의 팸플릿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무급 가사노동과 성관계로 넓혔다. 1972년 이탈리아에서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 셀마 제임스, 실비아 페데리치 등이 가사노동 임금 운동을 시작했다. 줄리엣 미첼은 1966년 「여성, 가장 긴 혁명」에서 보부아르와 엥겔스를 종합했고, 하이디 하트먼은 1981년 이런 논의가 여성과 남성의 관계보다 여성과 경제 체제의 관계만 묻는다고 비판했다. 게일 루빈은 1975년 「여성 거래」에서 ‘섹스/젠더 체계’ 개념을 만들었고, 리즈 보걸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1983)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공산당원 클라우디아 존스는 1930년대부터 흑인 여성 노동자의 요구를 당에 끌어들이며 인종·계급·성별의 ‘삼중 억압’을 이론화했고, 앤절라 데이비스는 『여성, 인종, 계급』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제3물결 이후
1990년대부터는 흑인 페미니즘을 이어받아 더 넓은 집단을 포괄하려는 제3물결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킴벌리 크렌쇼가 1989년 개념화한 교차성은 성차별과 다른 차별이 한 사람에게 겹쳐 작동한다고 본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1990)에서 젠더를 반복되는 행위로 구성되는 수행으로 보는 이론을 펴 퀴어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교차성이 부르주아적 정체성 정치에 기대어 계급을 좁게 이해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