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주의 학생동맹 (SDS)
Socialist German Student Union
1946년 9월 함부르크에서 창립한 서독·서베를린의 사회주의 대학생 단체. 독일 사회민주당의 대학 조직으로 출발했으나 재무장·핵무장 반대와 고데스베르크 강령 비판으로 당과 부딪쳐 1961년 11월 사회민주당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당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사회주의 대학 조직으로서 국제 신좌파의 일부를 자처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의회 밖 반대파(APO)와 서독 학생운동의 중심이었으나, 1968년 4월 루디 두치케 저격 뒤 여러 분파로 흩어져 1970년 3월 21일 스스로 해산했다.
상세
제2차 세계대전 뒤 여러 대학에서 새로 생긴 학생 단체들이 1946년 9월 3~6일 함부르크 창립대회에 모였다. 20개 대학에서 온 대의원 90여 명은 사회민주당 단체로 할지 당에서 독립된 단체로 할지를 두고 크게 다투었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에리히 올렌하우어가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만 요구하고 당적은 요구하지 않는 조직적 독립을 지지해 대회의 결렬을 막았다. 훗날 서독 총리가 되는 헬무트 슈미트가 1947~1948년 의장을 지냈다. 1950년대 SDS는 재무장과 핵무장에 반대하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비판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갈등을 키웠다. 1960년 5월 당에 충실한 사회민주주의 대학동맹(SHB)이 떨어져 나갔고, 1961년 11월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SDS 회원과 그 동조자를 당에서 내보내는 양립 불가 결의를 했다.
축출은 오히려 사회 비판적인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1961년 의장 미하엘 슈만은 SDS를 영국 뉴레프트와 프랑스 누벨 고슈에 기댄 국제 신좌파의 일부로 규정했다. 1964~1965년 SDS는 서베를린·프랑크푸르트·함부르크를 중심으로 21개 대학 지부를 두었지만, 1964년 회보를 받아 보는 활동 회원은 750명 남짓이었다. 1965년 초 「전복 행동」의 디터 쿤첼만, 프랑크 뵈켈만, 루디 두치케, 베른트 라벨이 들어오면서 SDS는 반권위주의 노선으로 기울었고, 베를린 SDS는 제한된 규칙 위반을 의식적인 시위 전술로 발전시켰다. 1965년부터 SDS는 비상사태법에 맞선 의회 밖 반대파(APO)의 핵심 세력으로 꼽혔다.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의 이란 국왕 방문 반대 시위에서 경찰관 카를하인츠 쿠라스가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를 쏘아 죽였다. 회원은 1967년 중반 1600~1800명, 정점인 1968년 약 2500명이었다.
1968년 SDS는 내부 노선 투쟁으로 찢겼고, 학생운동은 특히 1968년 4월 11일 두치케 저격 뒤 서로 적대하는 K그룹, 좌파 사회주의 단체, 몇몇 테러 조직으로 흩어졌다. 1969년 말 정통파 쪽 지부 일부는 마르크스주의 학생 연합을 만들었고, 여기서 뒷날 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 스파르타쿠스가 나왔다. 1970년 3월 21일 프랑크푸르트 학생회관에서 열린 집회가 박수로 연방 조직의 해산을 결정했고, 몇몇 지역 조직만 한동안 활동을 이어 갔다. 회원 가운데 울리케 마인호프는 뒷날 적군파(RAF)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