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독 학생운동을 이끈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SDS)의 반권위주의 사회주의자
1967년 9월 한스위르겐 크랄과 함께 SDS 대표자 회의에 「조직 보고」를 내놓아, 혁명적 의식 집단이 눈에 띄는 비정규 행동으로 체제의 추상적 폭력을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반권위주의 노선을 SDS 전체에 관철했다.
동독에서 자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활동가. 1956년 헝가리 봉기를 겪으며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기대지 않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택했고,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서기 사흘 전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자유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며 1965년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SDS)에 들어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과 의회 밖 반대파(APO)의 대변인이 되었다. 1968년 4월 11일 극우 청년의 총격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고, 회복한 뒤 1973년 『레닌을 두 발로 세우려는 시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반핵 운동과 녹색당 창당 준비에 참여하다가 1979년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총격 후유증인 간질 발작으로 숨졌다.
다른 이름: 알프레트 빌리 루디 두치케
주요 활동과 소속
- 1963–1979
-
1965–1970
사회운동·조직
동독 청년에서 SDS의 대변인으로
1940년 3월 7일 루켄발데 근교 쇠네펠트에서 우체국 공무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독에서 자라며 루켄발데의 개신교 청년회에서 「종교적 사회주의」의 바탕을 얻었고, 1956년 헝가리 봉기를 겪으며 미국과 소련 어느 쪽과도 거리를 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택해 사회주의통일당(SED)도 거부했다. 같은 해 창설된 국가인민군 복무를 평화주의자로서 거부하자 1958년 졸업 성적이 깎여 곧바로 대학에 갈 수 없었다. 1961년 8월 10일 서베를린으로 넘어갔고, 사흘 뒤 장벽이 서자 정치 난민으로 등록했다.
그해 가을부터 서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사회학·민족학·철학·역사를 공부하며 실존주의에서 출발해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루카치·블로흐,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마르쿠제의 비판 이론으로 나아갔다. 1963년 가을 베른트 라벨과 함께 사회·문화 비판을 항의 행동과 결합한 「전복 행동」에 들어가 잡지 《안슐라크》를 함께 냈고, 1965년 1월 서베를린 SDS가 이 모임을 받아들인 뒤 6월 정치 자문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SDS를 반권위주의 행동 방식 쪽으로 열었다.
1966년 11월 대연정이 서자 이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SPD 권력욕의 산물로 보고 의회 밖 반대파(APO)를 꾸리자고 호소했다. 1967년 6월 2일 경찰관이 대학생 베노 오네조르크를 쏘아 죽인 뒤에는 악셀 슈프링거 언론 그룹의 몰수를 요구했고, 1968년 2월 베를린 공과대학의 국제 베트남 회의를 주도해 마지막 시위에서 나토 해체와 미군의 집단 탈영을 외쳤다.
「조직 보고」와 반권위주의 사회주의
두치케는 마르크스의 19세기 자본주의 분석이 여전히 들어맞는다고 보았지만, 계급의식이 저절로 자라리라는 예측은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어긋났다고 판단했다. 1967년 9월 SDS 대표자 회의에서 크랄과 함께 낸 「조직 보고」는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따라, 거대한 조작 체계가 사회적 모순을 무디게 해 대중이 스스로 들고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니 혁명적 의식 집단이 눈에 띄는 비정규 행동으로 체제의 추상적 폭력을 감각할 수 있는 확실성으로 바꾸어야 하며, 제3세계의 체 게바라식 게릴라를 대도시의 「행동에 의한 선전」이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다. 이 보고는 폭넓은 지지를 얻어 반권위주의 노선을 SDS 전체에 관철했다.
그는 의회주의를 마르쿠제가 말한 「억압적 관용」의 표현으로 보아 개혁될 수 없다고 했고, 그 구조는 길고 나라마다 다른 혁명 과정, 곧 「제도를 통한 대장정」으로 뒤집어야 한다고 했다. 1967년 10월 《쿠르스부흐》 대담에서는 파리 코뮌을 본떠 자주 관리 기업을 바탕으로 3천 명 이하의 집단이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서베를린 평의회 공화국」을 그렸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지구상에 아직 사회주의는 없다”고 썼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볼셰비키 안의 토론·분파 금지를 비판했고, 1965년 SDS의 모스크바 방문 때 크론시타트 수병 봉기를 물었다. 1968년 3~4월 프라하에서는 체코 학생들에게 사회주의와 시민권을 결합하라고 북돋웠으며, 그해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 뒤 SDS가 독일 공산당(DKP)·SED와 함께 일하는 것을 일절 거부했다.
총격 이후: 『레닌을 두 발로 세우려는 시도』와 녹색당
1968년 4월 11일 젊은 막노동자 요제프 바흐만이 쿠어퓌르스텐담의 SDS 사무실 앞에서 “더러운 공산주의 돼지!”라고 외치며 세 발을 쏘았고, 두 발이 머리에 맞았다. 두치케는 몇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다. 많은 학생은 몇 달 동안 그를 공격해 온 슈프링거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몇 달 동안 날마다 언어 치료를 받으며 말과 기억을 되찾았고, 스위스·이탈리아를 거쳐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영국 체류 허가를 받았다.
1973년 자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그 논문을 『레닌을 두 발로 세우려는 시도』로 냈다. 비트포겔을 따른 이 책은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가 애초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를 지배한 것은 봉건제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이었고, 그로부터 칭기즈 칸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공업화까지 끊기지 않은 「아시아적 전제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구권에 필요한 것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두 번째 혁명」이었다.
1970년대 후반 그는 반핵 운동에 나서고 동독의 반체제 인사 볼프 비어만·루돌프 바로와 교류했으며, 1978년 11월 바로 연대 회의를 열었다. 1976년부터 K그룹을 뺀 녹색·대안·좌파를 묶는 정당을 세우려 했고, 1979년 브레멘 녹색 명부에 들어가 1980년 1월 녹색당 창당 대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1979년 12월 24일 오르후스에서 총격과 뇌수술의 후유증인 간질 발작을 일으켜 욕조에서 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