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江泽民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름: 강택민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기술자에서 산업 행정가로

장쩌민의 초기 경력은 전기공학과 기계공업에 걸쳐 있었다. 그는 국민교통대학 전기공학과를 1947년에 졸업하고 대학 재학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 1952년 상하이 제2설계국에 배치됐으며, 1954년에는 제1기계공업부의 5개년 계획 설계 업무를 거쳐 창춘의 자동차 생산시설로 옮겨갔다.

1955년 그는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에서 연수를 받았고, 귀국 뒤 창춘 제1자동차제조공장에서 일했다. 이후 업무의 중심은 기술 분야에서 행정 및 정치 업무로 옮겨갔다. 1962년 상하이 전기연구소 부소장이 됐고, 1966년 우한의 열공학연구소 소장 겸 당 부서기에 임명됐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그는 그 직위에서 해임돼 5·7간부학교에 보내졌다.

1970년 기계공업부 외사국 부국장이 된 그는 루마니아에서 기계제조 공장 15곳을 세우는 전문가단을 이끌었다. 이 공업·기술 행정 경력은 그가 1979년 이후 경제특구와 전자공업 부문의 정책 업무로 이동하기 전의 이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