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구이

陈永贵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15.2.14.–1986.3.26. ↓ 퇴임 1980 · 폐암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의 모델 마을 지도자에서 부총리까지 오른 농민

모택동 시대 자력갱생의 상징이었다. 1964년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 이후 다자이 생산대대는 전국적 모델이 되었고, 그는 정치국원과 부총리까지 올랐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났다.

산시 시양현 다자이촌의 문맹에 가까운 농민으로 생산대대 서기로 계단밭을 일구고 1963년 홍수 뒤 국가 지원 없이 마을을 재건해 이름을 얻었다. 1964년 마오가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고 하면서 전국의 모델이 되었고, 그는 1969년 중앙위원, 1973년 정치국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농업을 맡았다. 다자이 모델은 집단노동과 자력갱생을 내세웠으나 통계 부풀리기와 강제성이 드러났고, 개혁개방 뒤 1980년 부총리에서 물러나 베이징 교외 농장에서 살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름: 진영귀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출생과 초기 생애

천융구이는 1914년 무렵 산시성 농촌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스스로 밝힌 1915년 2월 14일은 그해 음력설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중국어 전기 자료는 그가 자기 생년월일을 끝내 확정하지 못했고 관례대로 음력설을 생일로 삼았다고 전하며, 그래서 출생 시점은 1914년 무렵과 1915년 2월 14일이라는 두 가지 기록으로 제시된다.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일 때 다자이촌으로 이사했고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융구이는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942년 산시성에서 항일 유격전이 격화되며 일본군이 마을 장악을 강화하자, 그는 친일 단체인 흥아회의 다자이촌 대표로 뽑혔다. 그러나 사퇴하고 마을을 떠났는데, 1943~1944년 수용소에 1년간 구금되었다가 간신히 살아 나온 뒤였다. 이 경력 때문에 일본 패망 직후 부역자 혐의로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후 중국공산당이 이끈 토지개혁에 적극 참여했고 1948년 당에 입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