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둥싱

汪东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16.1.1.–2015.8.21. ↓ 퇴임 1980 · 자연사

마오의 경호대장, 중난하이의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한 뒤 「양개범시」로 밀려난 인물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다른 이름: 왕동흥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마오의 경호 기구 구축과 좌천·복귀

왕둥싱의 가장 오랜 역할은 정책직이 아니라 중난하이에서 마오쩌둥의 경호 체계를 구축하고 운영한 것이었다. 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당 중앙판공청 부주임과 공안부 제9국 국장을 맡아 마오의 신변 경호와 중난하이 경비를 총괄했으며, 9국 예하에는 8341부대가 있었다. 중난하이 안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와 그의 부하들뿐이었고, 마오는 왕둥싱에게 경호원뿐 아니라 웨이터·요리사·비서 등 중난하이에서 일하는 모든 인원의 신원 조회를 맡겼다.

경호 업무는 그에게 승진과 갑작스러운 좌천을 함께 안겼다. 1955년 그는 뤄루이칭 밑에서 공안부 부부장이 되었고 공안 업무의 공로로 인민해방군 소장 계급을 받았다. 1958년 6월 마오는 그를 갑자기 강등해 장시 성 개간국 국장으로 보냈고, 1959년 2월부터 1960년 8월까지 장시 성당위 상무위원과 장시 공산주의노동대학 부교장 겸 당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1960년 8월 마오는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다시 경호 책임자와 공안부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왕둥싱은 마오의 충실하고 유능한 협력자로 남았으나, 홍위병이 공안부 보안 간부들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마오 사후 화궈펑 아래에서 당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