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젠잉

叶剑英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897.4.28.–1986.10.22. ○ 자연사

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다른 이름: 엽검영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쑨원 휘하의 군인에서 장제스와의 결별까지

예젠잉은 1917년 윈난육군강무학교에 들어가 1920년 1월 졸업한 뒤 쑨원의 혁명 운동에 합류한다. 같은 해 구광시파 토벌에 참여했고, 1921년 10월에는 광시 시찰에 쑨원을 수행한다. 1922년 6월 천중밍의 반란 때 해군 육전대 대대장으로서 쑨원을 안전한 곳으로 호송한 뒤 천중밍 군과 싸웠다. 이후 푸젠에서 동로토벌군 제8여단 참모장을 지내고 광둥으로 돌아와 천중밍 토벌에 나섰으며, 옌링관 전투의 승리로 유능한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1924년 초 광둥군 제2사 참모장이 된 그는 랴오중카이의 초청으로 황푸군관학교 설립 준비에 참여해 5월 5일 교관부 부주임이 되어 병기학을 가르친다. 황푸에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1925년경에는 입당을 처음 신청한다. 당은 슝루이를 보내 면담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장제스 휘하의 고급 장교라는 이유로 계속 관찰하자는 의견이 있어 신청은 미결로 남았다.

1926년 7월 북벌에 참가해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참모장을 맡았고 난창 전역에 참여했다. 장제스가 정예 부대인 제1사 사령관 자리를 제의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공산당원·좌파 국민당원 숙청으로 장시가 백색테러에 들어가 노동조합과 농민협회, 학생단체, 신문이 탄압받자, 그는 우한 국민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장제스에 반대하는 전문을 작성해 보냈다. 이후 좌파 장교들을 이끌고 우한으로 가 제4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에 장제스는 그를 국민당에서 제명한다. 1927년 7월 그는 리스안의 소개와 저우언라이의 승인으로 중국공산당에 비밀리에 입당한다.

난창 봉기 직전에는 왕징웨이가 예팅과 허룽을 체포·제거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주장 간탕후의 작은 배에서 두 사령관을 몰래 만나 위험을 알리고 신속히 난창으로 이동하도록 권했다. 봉기가 패배한 뒤에는 장파쿠이를 설득해 추격을 막아 반군의 퇴각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