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국민정부
Wuhan Nationalist Government
북벌 중 국민당 중앙과 국민정부가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겨 1926년 12월부터 1927년 9월까지 존속한 국민당 좌파 중심의 정부. 왕징웨이와 보로딘, 공산당이 이끌었고, 4·12 정변 뒤 난징의 장제스 정부와 맞섰다(영한 분열). 스탈린은 이 정부를 「중국 혁명운동의 중심」으로 지지했으나, 1927년 7월 15일 공산당과 결별하고 9월 난징 정부와 합쳤다.
상세
국민혁명군이 1926년 8~10월 우창·한커우·한양을 차지하자 세 도시를 합친 우한에 노조가 빠르게 생겨 그해 말 조합원이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국민당 중앙과 정부는 12월 광저우를 떠나 우한으로 옮겼고, 장제스는 난창의 총사령부에 머물렀다. 1927년 1월 군중이 한커우·주장의 영국 조계를 점거해 외교부장 천유런이 반환을 얻어 냈고, 3월 한커우의 국민당 2기 3중전회는 좌파와 공산당이 주도해 장제스의 권한을 줄였다. 정부는 여성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족 금지와 혼인·이혼의 자유 등을 승인하기도 했다.
정부의 기반은 곧 흔들렸다. 노농운동이 상인과 외국 기업을 몰아내고 농촌이 농민 자치로 넘어가자 지주 출신 장교들이 등을 돌렸다. 은행 거래가 끊긴 1927년 5월에는 지출 1천만 원에 수입이 180만 원뿐이었다. 5월 샤더우인의 반란과 창사의 마일 사변이 잇따랐고, 6월 1일 스탈린의 「5월 지시」를 로이에게서 본 왕징웨이는 이를 국민당을 파괴할 계획으로 여겼다. 6월 펑위샹이 쉬저우에서 장제스와 손잡고 보로딘 해임과 공산당 축출을 요구하면서 우한은 군사적으로도 고립되었다.
7월 15일 왕징웨이는 회의에서 5월 지시를 공개하고 공산당원에게 탈당이냐 정직이냐를 택하게 했다(분공). 보로딘은 7월 말 우한을 떠났고, 공산당은 8월 1일 난창에서 봉기했다. 우한 측은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난징과 화해했고, 장제스는 8월 12일 물러났다. 9월 21일 우한 정치분회가 난징 이전을 발표해 정부는 사라졌다. 우한 정부의 짧은 역사는 국민당 좌파와의 동맹에 혁명의 운명을 건 코민테른 노선의 시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