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푸군관학교
Whampoa Military Academy
1924년 국민당이 소련의 자금과 교관을 받아 광저우 황푸의 창저우섬에 세운 육군 군관학교. 국민혁명군의 초급 장교를 기르는 곳으로, 장제스가 교장, 랴오중카이가 당 대표,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 아래 공산당원도 교관과 생도로 들어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의 장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원래의 학교는 1926년까지 운영되었고 1928년 난징으로 옮겨 중앙육군군관학교가 되었다.
상세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설립을 승인했고, 학교는 1924년 5월 문을 열어 6월 16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소련 교관들이 주요 교육을 맡고 소련이 재정을 댔으며, 국민당 군대에 처음으로 정치위원 제도가 들어왔다. 과정은 6~12개월로 보병 중심의 군사 훈련에 삼민주의·국민당사·정치경제학 강의를 더했다. 직업 군대의 교육에는 못 미쳤지만, 당이 통제하는 장교단이라는 점에서 군벌 군대보다 앞섰다. 제1기 490명이 1924년 11월 졸업했다.
학교는 곧 광저우 근거지를 지키는 무력이 되었다. 1924년 10월 생도로 만든 교도 연대가 광저우 상단의 봉기를 진압했고, 1925년의 동정에서 천중밍 군을 격파한 부대도 황푸 생도들이었다. 1925년 6월 사지 참안에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는 황푸의 생도와 장교가 많았다. 북벌이 시작되자 황푸 출신이 국민혁명군의 핵심 지휘관이 되었고, 1937년 항일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중국군 사단 대부분을 황푸 졸업생이 지휘했다.
학교는 두 당의 경쟁 무대이기도 했다. 정치 교관 다수가 공산당원이었고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의 비밀 군사 조직을 이끌었으며, 린뱌오·쉬샹첸 같은 훗날의 홍군 지휘관이 이곳을 거쳤다. 우파 생도들은 쑨원주의학회를 만들어 맞섰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 때 장제스는 황푸 생도를 동원해 공산당원 정치위원들을 체포했다. 조선인 최용건이 교관으로,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이 생도로 들어왔고, 호찌민은 이곳의 베트남 청년들에게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