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로 중국 혁명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 역사가
1968년 위스콘신대학에서 냉전기 미국 학생들에게 마오 시대 중국을 가르쳤고, 개혁개방기 중국이 관료자본주의로 흘러갔다고 진단하며 1989년 베이징에 있었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위스콘신대학 매디슨 교수를 지냈다. 첫 저작 『리다자오와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1967)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농민에 대한 신뢰가 결합한 방식을 밝혔다. 1977년 초판이 나온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인민공화국사의 표준 교과서로, 마오주의를 사회주의의 이상과 후진국 근대화라는 이중 과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읽었다. 그는 마오 시대의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개혁기의 시장화가 사회주의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보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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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대표
경력 연표
- 1968–1999위스콘신대학 매디슨 역사학 교수
관련 역사 사건
중국사 연구의 출발과 반전 중국연구 운동
마이스너는 디트로이트의 웨인주립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대학 2년 만에 대학원 과정에 입학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시카고대학에서 부인 로레인과 함께 박사 과정을 밟았고, 그곳에서 중국사를 전공으로 택했다. 1949년 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중국의 부상이 드러나던 시기였음에도 중국사는 당시로서는 변방의 선택이었고, 그는 연구를 위해 중국어를 익히고 당시 드물던 중국 연구자들과 협력하기 위해 여행해야 했다. 1955년에는 19세기 중국의 농업 경제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완성했다. 1962년 박사 학위논문은 중국공산당 창립에 함께한 리다자오가 중국 혁명 이론에 기여한 독자적 몫을 다룬 것으로,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수용 과정에서 흔히 마오쩌둥의 공적으로 돌려지던 성과가 실제로는 리다자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 논문은 동아시아 연구자 얼 H. 프리처드와 소련 전문가 레오폴트 하임슨의 지도 아래 준비되었고,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센터에서 1년간 연구를 더한 뒤 1967년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냉전과 매카시즘은 그의 가정을 직접 건드렸다. 1952년 로레인은 1951년 동베를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참석한 일로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되었고, 대부분의 증인처럼 증언을 거부했다. 수정헌법 제5조에 근거한 이 거부에는 법적 제재가 따르지 않았지만, 당시 그녀가 재학 중이던 웨인주립대학 총장 데이비드 헨리는 그녀를 학교에서 제적했다. 그 무렵으로도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로 여겨졌고, 이후 다른 학교들도 이런 사유로 퇴학당한 학생을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마이스너는 아시아문제연구위원회(CCAS)의 초기 구성원이었다. 이 단체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붉은 중국’이 미국의 위협으로 묘사되던 시기에 중국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는 작업에도 나섰다. 그는 기관지 『아시아문제연구위원회 회보』에 글을 썼고, 2012년 사망할 때까지 이 학술지의 자문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