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베이 다비도비치 베르만

Матвей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소련 러시아 1898–1939 ✕ 처형

굴라크를 확장한 최장수 수장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백해-발트 운하와 '개조'(페레코프카)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소련 최초의 대규모 강제노동 건설 현장이었던 백해-발트 운하(벨로모르카날) 공사에서 베르만은 굴라크 수장으로서 수용소 남부 구역을 직접 감독했다. 이 공사는 약 10만 명의 죄수를 동원했으며, 월간 사망률이 14%에 달할 정도로 가혹한 조건 아래 진행되었다. 베르만은 나프탈리 프렌켈, 세묜 피린과 함께 현장 지휘부를 구성했으며, 이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은 굴라크 초기 지도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베르만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굴라크 강제노동의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다. 백해 운하 현장에서는 수용소 신문 《페레코프카》(Perekovka, '재단련'이라는 뜻)가 발행되었고, '개조'(perekovka)라는 개념이 공식 교리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강제노동을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죄수를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으로 다시 벼려내는 교화 과정이라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베르만은 공사 완공 직후인 1933년 8월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작가 막심 고리키가 주도한 선전물 《스탈린 백해-발트 운하》에도 헌정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나프탈리 프렌켈은 내부 지침에서 '죄수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짜내라. 그 뒤에는 필요 없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훗날 《수용소 군도》에서 베르만을 프렌켈, 피린 등과 함께 '스탈린과 야고다의 주요 앞잡이, 벨로모르의 주요 감독자, 여섯 명의 고용된 살인자'로 지목했다. 베르만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모스크바-볼가 운하 공사도 지휘했으며, 이 공로로 적성훈장을 추가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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