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백해-발트 운하와 굴라크의 탄생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야고다의 OGPU가 감독한 백해-발트 운하 공사에서 약 10만 명의 수용자 중 1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굴착기 한 대 없는 삽과 손수레만의 공사였다. 야고다는 이 '성공'을 바탕으로 강제노동을 소비에트 경제의 구조적 요소로 정착시켰다. 1934년 NKVD 초대 내무인민위원으로 취임한 그는 굴라크를 전면적으로 확장했고, 수용자 노동력을 대규모 건설·벌목·광산 사업에 동원하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굴라크의 설계자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다.

제3차 모스크바 재판과 최후

1938년 3월, 야고다는 '반소비에트적 우익-트로츠키주의 블록' 사건의 주요 피고로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 섰다. 기소 내용은 트로츠키·부하린·리코프와의 공모, NKVD 내 파시스트 음모 조직, 스탈린·예조프 암살 기도, 그리고 막심 고리키와 그 아들 막심 페시코프 독살 혐의까지 포함되었다. 고리키 부자 독살에 관해 야고다는 '개인적 감정' 때문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고리키의 며느리 나데즈다 '티모샤' 페시코바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검사 비신스키가 간첩 혐의를 추궁하자 야고다는 법정에서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간첩이었다면, 수십 개 국가가 자국의 정보기관을 해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반역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으나 간첩 혐의만은 부인했다. 3월 13일 새벽,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야고다는 사면을 탄원하며 '조국에 대한 나의 죄는 큽니다. 죽기에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라고 썼으나 기각되었다. 1938년 3월 15일, 그는 자신의 옛 별장이었던 특수시설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사형 집행 전 예조프의 지시로 NKVD 간부 이즈라일 다긴에게 구타당했으며, 다른 사형수들이 총살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본 뒤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2015년 러시아 대법원은 야고다의 재활을 거부했으며, 법원은 그가 '정의에 반하는 범죄를 스스로 저질렀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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