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후댜코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Худя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2–1950 ✕ 처형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에서 숙청된 유일한 아르메니아인 항공원수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이름 뒤의 삶: 한페랸츠에서 후댜코프로, 그리고 다시 한페랸츠로

후댜코프라는 이름은 개인의 선택이었지만, 그 이름을 되돌린 것은 국가 권력이었다.

1920년대 초 아르메나크 한페랸츠는 바쿠 탈출선이 영국 포함에 격침되었을 때 자신을 건져 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를 잃고, 그의 무기와 옷을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끈 뒤 그의 이름을 평생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군사사가 클레멘트 하루튜냔의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아르메니아어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군 경력은 러시아어 이름으로 쌓였다.

1950년 4월 18일 사형 선고와 함께 이름은 처벌의 근거가 되었다. 1954년 8월 소련 최고 군사검찰청이 재심을 개시하면서 작성한 공식 문서에서 처음으로 아르메나크 아르테모비치 한페랸츠라는 본명이 등장했다. 같은 해 8월 18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1950년 판결을 신설된 사실에 근거해 파기하고, 범죄 구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건을 종결했다. 1965년 7월 6일자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법령으로 그는 항공원수 계급과 훈장에 대한 권리를 사후 회복했고, 이후 군 정치부서가 당적도 회복시켰다.

이름의 복권은 가족의 복권보다 늦게,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1951년 1월 13일 아내 바르바라와 어린 아들 세르게이는 적국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로 유배되었고, 스탈린 사후 1953년 3월 27일자 사면령으로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숙청이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가족 전체에게 확장된 방식을 보여 준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아르메니아와 카라바흐의 기억 공간에 남아 있다. 2005년부터 아르메니아 군사항공대학이 한페랸츠의 이름을 쓰고, 예레반 아반 지구의 큰 거리 하나가 후댜코프의 이름을 쓰고 있다. 고향 마을 메츠타글라르에는 동상과 생가 박물관이 세워졌으나, 2020년 11월 이 지역이 아제르바이잔 통제로 넘어간 뒤 2021년 7월 위성 사진에서 박물관 앞 동상이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두 이름은 그의 생애와 사후 기억이 분단과 분쟁의 지형에 겹쳐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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