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자하로비치 슈먀츠키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8 ✕ 처형

소련 영화산업을 설계한 혁명가 출신 문화행정가,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꾸다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혁명가의 길: 시베리아 철도노동자에서 첸트로시비리 의장까지

1886년 11월 4일(구력)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에서 가난한 대가족 장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들이 거주허용지대 밖으로 추방되면서 가족이 시베리아로 밀려난 뒤였다. 정규 학교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해 스스로 '가정교육'이라 적었고, 러시아어 외에 회화 수준의 부랴트어와 약간의 이디시어를 구사했다. 1896년 가족이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1898년부터 치타 철도 차량기지의 견습공으로 일했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4년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 기관구에서 활동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약 800명 규모의 볼셰비키 전투부대를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의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적십자 부대도 있었다. 이들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 공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했다. 봉기가 진압된 뒤 체포되었으나 1906년 1월 사형을 피해 탈출했다. 이후 일리야 실린(Ilya Silin) 명의의 여권으로 살았고, 지하 당명은 일리야-콘(Ilya-Kon), 신문 기고명은 일리야 실린이었다. 1906년에는 베르흐네우딘스크 당 위원회 서기였고 《프리바이칼리예》 《바이칼스카야 볼나》 《자바이칼레츠》의 편집을 맡았다.

경찰을 피해 1907년부터 하얼빈에 숨어 하얼빈 당 위원회 위원으로서 합법 사회민주주의 신문 《골로스 만추리이》와 《미슬》을 공동 편집했다. 1907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했고 태평양 함대 수병들의 무장봉기에 참여했다. 1908년 여름부터는 옴스크·톰스크·첼랴빈스크에서 불법 활동을 조직했다. 감시를 피해 1912년 8월부터 1913년 7월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과일농장과 판지공장에서 일했다. 귀국 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체포되어 반년간 수감된 뒤 군대에 징집되었는데, 크라스노야르스크 주둔 부대에서 볼셰비키 지하 활동을 이끌었고 1914년부터 《프라우다》에 기고했다.

2월혁명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부의장을 맡아 《이즈베스티야 크라스노야르스코고 소베타》 《크라스노야르스키 라보치》 《시비르스카야 프라우다》 발행을 도왔고, 볼셰비키 제7차(4월) 전러시아대표자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1917년 4월부터 당 중앙위원회 시베리아 지역국을 이끌었으며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 대표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프라우다》 편집위원이 되었다. 7월 사건 이후에는 지하에서 조직을 복구하고 제6차 당대회를 준비했고, 9월에는 《라보치 푸티》의 책임편집인이었다.

1917년 10월 중앙위원회의 시베리아·몽골 전권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당 시베리아 지역국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제1차 전시베리아 소비에트대회에서 시베리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첸트로시비리) 의장에 선출되어 10월 15~16일 밤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지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이르쿠츠크 반란 진압을 지도했고 교섭 중 부상을 입었다.

내전기에는 서시베리아 빨치산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했다. 1918년 3월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적위대 부대를 이끌고 이르쿠츠크를 떠났고, 부대가 해체된 뒤 서시베리아에 남아 알타이·이르쿠츠크·비스크·바르나울·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불법 신분으로 활동했다. 1919년 7월부터 적군 동부전선 제51사단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8월 당 중앙위원회 시베리아 지역국에 합류했으며, 튜멘 주 혁명위원회와 당 위원회 의장(1919년 10월~1920년 1월), 이어 톰스크의 같은 직을 맡았다(1920년 봄). 1920년 6월부터는 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의장 겸 극동공화국 외무장관, 7월부터 극동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소련 영화산업의 설계자: 소유즈키노에서 '소비에트 할리우드'까지

슈먀츠키가 1930년 소유즈키노 이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소련 영화산업은 만성적인 제작 부진과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중앙집중적 생산체계를 구축하고, 각본 검열과 제작 승인을 일원화했으며, 창작 인력을 국가 주도로 양성하는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차파예프》(1934)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전범이 되었고 개봉 첫해에 3천만 명이 관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어 《즐거운 친구들》(1934), 《청년 막심》 3부작(1934–1939), 《치르크》(1936), 《13인》(1937) 등이 제작되어 국내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35년에는 소련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모스크바 국제영화제를 창설하여 직접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크렘린에서 스탈린과 정치국 위원들을 대상으로 정기 영화 상영회를 열고 토론 내용을 속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은 소련 영화정책의 이면을 보여주는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34년 미국 시찰 이후 할리우드의 분업화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크림 반도 라스피 만에 연간 200편 제작 규모의 '소비에트 할리우드' 건설을 구상했으나, 1937년 인민위원회의에서 예산 문제로 거부되었다. 그가 저술한 《수백만의 영화》(1935)는 사회주의 영화의 대중적 사명을 이론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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