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CIA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바자라크의 장갈라크 마을에서 타지크족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 도스트 모함마드 칸은 왕립 아프가니스탄군 대령이었고, 카불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부르하누딘 라바니의 이슬람회에 가담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83년 소련군과의 휴전기에 12개 주 130명의 지휘관을 묶는 슈라에 나자르를 세웠다. 헤크마티아르와의 내전으로 카불이 파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정의 프로젝트와 휴먼라이츠워치는 1993년 아프샤르 작전 등 인권 침해의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1996년 이후에는 북부동맹의 군사 지도자로 탈레반에 저항했고, 2001년 9월 9일 알카에다 요원들의 폭탄으로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