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흐우

Tố Hữu
베트남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베트남 베트남 1920–2002 ○ 실각 1986 · 자연사

혁명을 노래한 시인이자 문예·선전의 경계를 정한 당의 사상 지도자

1985년 화폐 개혁 실패 뒤 민중은 “시인이 경제를 맡고, 장군이 피임 링을 놓는다”고 조롱했다.

식민지 감옥에서 혁명시를 쓰기 시작해 두 차례 항전 내내 민족의 투쟁을 서정으로 노래한, 베트남 혁명시의 기수였다. 1968년부터 중앙선전·문화 부문을 총괄하며 문학이 정치의 도구여야 한다고 보아 작가·지식인에 대한 강경한 통제를 주도했고, 그 이름은 인문·가이팜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1976년 제4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뽑혀 통일 뒤 남부의 언론·문화 기관을 단일 국가로 합치는 작업을 감독했고,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1985년 화폐 개혁의 실패 책임으로 실각해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다른 이름: 응우옌 낌 타인 · 응우옌김타인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인문·가이팜 운동 탄압과 문학 정책

1950년대 중반 북베트남의 작가·예술가들은 평화 시기의 문학적 자유와 당의 통제 문제를 제기했다. 1956년에는 《인문》(Nhân Văn)과 《가이팜》(Giai Phẩm) 등 관련 잡지들이 발간되었으나, 정부는 이 운동을 탄압했다. 문학정책 연구자 응우옌 뚜언 응옥은 이를 전쟁기에 굳어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리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당은 1958년 사상·문화 전선의 ‘파괴분자’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하노이에서 작가·예술가 약 500명을 대상으로 재교육을 실시했다. 일부 작가는 작가협회에서 제명되거나 정직되었고, 다른 이들은 공장이나 농촌으로 보내졌다. 1960년 재판에서는 관련 인사들이 징역형을 받았다. 응옥은 이 운동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이 맥락은 또흐우가 1958년 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가 당의 문학정책을 집행한 역할을 보여준다. 다만 해당 연구는 당시 당의 정책과 억압을 분석하며 또흐우 개인의 각 조치별 책임 범위를 상세히 입증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