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경제의 숫자를 만들다 숙청된 관료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917–1920s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내전과 경제 행정에서 성장
- 1931–1934중공업·경제 행정에서 5개년계획 지표 관리
- 1934–1937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숫자와 배분을 조정
- 1937대숙청 속에서 체포
- 1938처형, 계획기관도 숙청의 대상이 됨을 보여줌
관련 역사 사건
체포와 가족의 몰살
1937년은 메즐라우크에게 숨 막히는 한 해였다. 2월 고스플란 의장에서 중공업 인민위원으로, 8월 기계제조 인민위원으로, 10월 다시 고스플란 의장으로, 이어 인민위원회의 부의장까지. 네 개의 최고위직을 10개월 사이에 거쳤다. 그러나 12월 2일, NKVD가 그를 체포했다. 혐의는 '독일 정부와의 접촉', '1925년 이후 우익 분파 가담', '라트비아 반혁명 지하조직 지도'였다. 스탈린은 1938년 4월과 7월 두 차례 처형 명단에 직접 서명했다. 7월 28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는 사형을 선고했고, 다음날 새벽 모스크바 외곽 콤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총살되었다.
가족에게도 비극은 가차 없었다. 동생 이반 메즐라우크는 형이 체포된 지 이틀 만에 체포되어 1938년 4월 25일 총살당했다. 셋째 동생 발렌틴도 곧 체포되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소피야는 콜리마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셋째 부인 차르나는 남편과 같은 날 체포되어 1941년 10월 총살당했다. 외동딸 알라는 1936년 7월, 열차에 치여 열여섯 살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1956년 3월 17일, 메즐라우크는 사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