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프 스므르콥스키

Josef Smrkovský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11–1974 ○ 사망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프라하의 봄 최고 개혁파가 된 사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두브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정치적 몰락과 사망, 그리고 유골

1968년 8월 침공 이후 스므르콥스키는 점령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후사크가 이끄는 보수파의 압력을 줄이려 애썼다. 대중의 지지가 두터웠지만 그것이 정치적 제거를 막아 주지는 못했다. 1969년 1월 그는 연방의회 의원 및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이미 인민원 의장직에 그쳤고, 그해 가을 모든 정치 직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국가보안국(StB)의 도청 대상이 되었고 각종 단체에서 축출되었으며 군 계급도 강등되었다. 정상화 언론의 선동적 공격이 이어졌고, 1970년 3월에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같은 시기 건강도 무너졌다. 1969년 8월 왼쪽 고관절에 심한 통증이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1950년대 심문의 후유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방사선 검사에서 왼쪽 고관절 부위의 악성 종양이 드러났다. 1970년 봄부터 프라하의 야로시 교수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계속 나빠졌고, 1973년에는 집과 병원을 오가는 생활이 잦아졌다. 그는 1974년 1월 15일 화요일, 예순세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죽음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프란티셰크 크리겔의 추도 연설은 금지되었으나 약 1500명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다. 유골이 든 유골함은 곧 도난당했다가 체스케 벨레니체의 한 열차 안에서 발견되었다. 유족은 유골함을 프라하에 묻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유골은 프라하 올샤니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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