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경력 연표
- 1919북드비나 소함대 입대 (나이를 두 살 높여 지원)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우등 졸업
- 1933–1936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 1936–1937스페인 공화국 해군 수석 고문 (돈 니콜라스 레판토)
- 1938–1939태평양함대 사령관
- 1939–1946해군인민위원 (34세,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
- 1948소장으로 강등, 극동 해군 부사령관으로 전출
- 1951–1953해군장관으로 복귀 (계급은 중장)
- 1953–1955국방제1차관·해군총사령관,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 1956중장으로 재강등 및 강제 퇴역
관련 역사 사건
1948년 명예재판과 첫 번째 강등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 2월, 독립 해군인민위원부가 폐지되고 해군은 통합 군대인민위원부(후에 국방부) 산하로 흡수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총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으로 격하되었고, 곧이어 자신이 주도한 10개년 군함건조계획이 스탈린에게 거부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947년 1월 해군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해군군사교육기관 국장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결정적인 타격이 내려졌다.
1948년 1월 12일, 쿠즈네초프는 동료 제독들인 레프 갈레르, 블라디미르 알라푸조프, 그리고 게오르기 스테파노프와 함께 '명예재판'에 회부되었다. 기소 사유는 충격적이었다: 전쟁 중이던 1942~1944년에 소련 정부의 승인 없이 영국과 미국에 고공낙하산어뢰, 원격수류탄, 함포 체계, 사격통제장치 도면 및 대량의 비밀 해도를 넘겼다는 것이다. 이 기술들은 모두 대독(對獨) 전쟁을 수행 중이던 연합국과의 군사협력 과정에서 공유된 것으로, 전시 동맹을 위한 실무적 결정이었다. 명예재판을 주재한 것은 레닌그라드 방어전의 영웅인 레오니트 고보로프 원수였다.
2월 3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쿠즈네초프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나 '과거의 큰 공로'를 참작해 형사처벌은 면제했다. 대신 제독 계급에서 소장으로의 3계급 강등을 권고했고, 이는 곧바로 집행되었다. 공동 피고인 갈레르와 알라푸조프는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며, 갈레르는 1950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쿠즈네초프 본인은 훗날 회고록 『급격한 전환』에서 이 사건이 함대 분할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의견 충돌에서 비롯된 정치적 숙청이었음을 암시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5월에야 유죄판결이 말소되고 제독 계급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