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비스

任弼时
중국공산당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04.4.30.–1950.10.27. ○ 뇌출혈

옌안 시기 「5대 서기」의 한 사람이었던 조직가, 건국 이듬해 요절했다

1940년 옌안으로 돌아온 뒤 서기처와 조직부에서 일했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혀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 서열에 올랐다. 1950년 10월 2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다른 이름: 임필시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옌안 시기 당 사무기구의 정비 (1940–1945)

1940년 3월 26일 옌안에 돌아온 런비스는 중앙서기처의 일상 사무를 맡는 중공 중앙 비서장(中共中央秘书长)에 임명되어 중앙조직부와 서북국, 노동·청년·부녀 사업을 함께 관장했다. 그가 우선 착수한 일은 중앙 판공청(中共中央办公厅)을 세우는 것이었고, 자신이 그 주임을 겸했다. 판공청 아래에 비서·행정·경위 세 처를 두고 문서 수발과 회객, 회계, 문서 관리, 기록 보관에 이르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각 기관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간부 공급제도 역시 이때 정비되어 동복과 하복을 1년에 한 벌씩 지급하고 간부 급별로 수당 기준을 정했다.

1940년 9월부터는 섬감녕변구 사업을 지도했고, 10월에는 장원톈 등과 함께 양자링으로 옮겨 마오쩌둥과 가까이 살며 그의 업무를 직접 보좌했다. 1941년부터 중앙 대강당 건립이 시작되었고 제7차 당대회 준비가 진행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중앙 비서장, 8월에는 중앙조사국 부국장과 당무연구실 주임 겸 근거지조 주임을 맡아 삼삼제(三三制)의 시행을 추진했다. 1942년 4월에는 섬감녕변구 총학습위원회의 정풍운동을 지도하고 정병간정(精兵簡政) 사업을 구체적으로 이끌었다.

1943년 3월 마오쩌둥·류사오치와 함께 중앙서기처를 구성했고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이 되어 섬감녕과 진서북 지역을 맡았다. 4월부터는 팔로군 시안판사처를 직접 관리했고, 연말에는 정치공작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44년에는 경제좌담회를 연이어 주재하며 섬감녕의 경제 건설과 금융·무역, 물가 안정을 지도했고, 5월부터는 「당의 역사상의 제문제에 관한 결의」 초안 작성 작업을 주재하여 4중전회에서 쭌이회의에 이르는 시기의 중앙 지도 노선 문제를 정리했다.

1945년 3월 제7차 당대회 주석단 상무위원 겸 대회 비서장을 맡아 7기 1중전회 제1차 회의를 주재했고, 중앙정치국 위원·중앙서기처 서기·중앙 비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당내 서열에서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인 ‘5대 서기’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이 시기 런비스는 당 사무기구와 간부 제도를 제도화한 조직가로, 훗날 당 건설의 실무 기반이 된 규정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