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시절, 1930~1937

1920년대 말 건강 악화와 학업 중단으로 정체했던 샤덴코의 경력은 1930년 3월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정치담당 차장(보좌관) 임명을 기점으로 다시 열렸다. 아카데미에서 그는 "계급 경계" 강화를 자기 임무의 출발점으로 삼아 아카데미 안에 "계급 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했고, 옛 장교 출신 군사전문가들을 잠복한 적으로 지목했다. 1930년 옛 장교들을 겨냥한 이른바 "베스나"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그의 협조 아래 아카데미에서 15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두 사람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투하체프스키가 적대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진술을 곧바로 내놓았다. 1931년 투하체프스키가 아카데미를 검열하며 제기한 비판들에 격분한 그는 9월 보로실로프에게 편지를 보내 "모함"과 "조롱"을 호소하며 투하체프스키를 자신의 지위에서 오는 우월감에 취한 인물로 규정했고, 개편안을 전면 거부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가 전적으로 파괴만 한 때가 아니었다. 1931/32학년도부터 아카데미가 기병·항공·포병·기갑 등 여러 병과의 지휘 인재를 양성하도록 바뀌는 과정에서 샤덴코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 1933~1935년 아카데미를 이끈 에이데만·샤포시니코프와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1934년 1월 15일 아카데미의 전투·정치 훈련 지도 공로로 샤포시니코프와 함께 홍성훈장을 받았으며, 1935년 2월 23일에는 제1기병군 창설자라는 이유로 부됸니·보로실로프와 함께 레닌훈장을 받았다. 1935년 11월 28일에는 군단정치위원 계급을 받았는데, 이는 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의 정치담당 차장 가운데 그만이 가진 직급이었다.

1935년 9월 투하체프스키의 신임을 받던 A. I. 코르크가 아카데미장에 취임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샤덴코는 코르크가 제명된 "트로츠키주의자"와 백위군을 보호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짓밟는다는 편지를 보로실로프에게 보내는 등 집요하게 공격했고, 코르크를 옹호한 투하체프스키가 개입한 끝에 아카데미 직을 잃었다. 1936년 8월 아카데미장이던 코르크는 부국방인민위원 투하체프스키에게 샤덴코의 건강이 극히 위태롭고 언제든 격발성 정신착란 발작이 일어날 수 있다며 즉시 해임하고 의료진에게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동안 아무 직책도 얻지 못했던 그는 1936년 12월에야 하르코프 군관구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도 자기 주도로 체포를 진행했음을 1937년 6월 국방인민위원 회의에서 직접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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