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코 스피루

Nako Spiru
알바니아 국가기관 마르크스-레닌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918–1947 사망 경위 미확정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경제기획자, 유고슬라비아 경제통제의 비판자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다른 이름: 아타나스 스피루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사후 평가의 반전 (1947~2002)

죽음 직후: 시련과 “유고슬라비아 성향”

스피루가 죽은 뒤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알바니아어 전기에 따르면 1947년 12월 24일부터 1948년 1월 23일까지 그의 반유고슬라비아적 입장이 심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메흐메트 셰후의 보고에 대한 스피루의 반응이었고, 그 보고는 아내 리리 벨리쇼바와 파딜 파츠라미까지 ‘스피루의 사람’으로 지목했다. 벨리쇼바는 1946~47년 인민청년 조직을 이끌던 인물이었는데, 남편의 죽음 뒤 직위에서 해임되어 티라나에서 베라트로 내려가 교사로 일했다.

1948년의 전환: 책임 소재의 재배치

1948년 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 결렬은 이 사건의 서사를 완전히 뒤집었다. 호자는 소련-유고슬라비아 갈등에서 스탈린과 소련 편에 섰고, 티토주의 유고슬라비아는 알바니아의 주적으로 규정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수장이던 코치 조제는 티토주의 혐의로 축출·체포되어 1949년 처형되었다. 그와 함께 스피루에 대한 비판은 중단되었고, 그는 정치적으로 사후 복권되었다. 죽음의 책임은 이제 조제에게 돌려졌으며, 시구리미가 조제의 지시로 그를 살해했거나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명이 제시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죽음과 남은 불확실성

죽음의 정황은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최초의 공식 발표는 무기 취급 중의 사고사였고, 두 번째 발표는 ‘배신에 대한 자책’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알바니아어 전기는 1947년 11월 20일 티라나의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결말을 열어 둔다. 벨리쇼바는 남편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 요원들이 호자의 완전한 동의 아래 그를 제거했다고 믿었다. 러시아어 전기도 사망의 정황이 오늘날까지 명확하지 않다고 기록하며, 법무총장 베드리 스파히우가 병상에서 그가 죽고 싶다는 뜻을 비췄다고 전한 증언을 함께 소개한다. 사형 집행이나 체포 후 사망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2002년의 국가적 재평가

포스트공산주의 알바니아에서 스피루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갈린다. 한편으로 그는 호자의 측근이자 정치적 탄압의 가담자로 기억된다. 다른 한편으로 2002년 알프레드 모이시우 대통령은 그에게 ‘민족의 명예’ 훈장을 사후 수여하며 반파시즘 투쟁과 전후 알바니아의 독립 수호, 그리고 반파시즘 청년운동의 조직가·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