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다른 이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파울루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관련 역사 사건
뉘른베르크 증언과 책임의 문제 (1946)
파울루스는 바르바로사 계획의 세부 작전안을 작성한 참모였다. 그는 1940년 9월 3일 육군 총참모부 제1병참차장(Oberquartiermeister I)에 취임해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의 대리인이 되었고, 이미 존재하던 대소련 공격 구상의 세부 작전을 구체화했다. 그는 속전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계획이 실패할 경우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총참모부는 예상했다. 1941년 상반기에는 대소련전을 위한 독일 동맹국들과의 협상에도 참여했다.
전후 소련 당국은 그를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소 측 증인으로 활용했다. 그는 1946년 2월 11일 법정에 섰고, 다음 날 변호인 넬테의 신문을 받았다. 넬테는 바르바로사 계획의 작성 경위, 참모부 내부의 우려, 그리고 그러한 우려를 알면서도 제6군 사령관직을 수락한 경위를 추궁했다. 이때 책임 문제가 정면으로 드러났다. 파울루스는 자신이 소련의 준비된 공격설을 입증하는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고 답했고, 계획이 침공 준비의 첫 단계임을 다른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는 답변을 회피하려 했다. 그는 "재판정에 기소된 이 사건들의 증인이기 때문에" 자신에 관한 질문에서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넬테가 그 자신도 고등사령부 조직에 속해 기소된 범주에 들어간다고 지적하고 재판장이 답변을 명령하자, 그는 할더와 그러한 계획에 대한 우려를 나누었다고 답했다. 이어 자신이 파악한 것은 제6군 사령관으로서의 경험을 거쳐 스탈린그라드에서 정점에 이른 뒤에야 명확해졌으며, 침략전쟁의 성격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증언은 사후 평가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감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3년에도 여전히 부하 장교들을 "하일 히틀러"로 맞이했고 5월 1일 사회주의 기념행사 참석을 거부했으며, 빌헬름 피크가 반나치 조직 참여를 권유했을 때 자신은 병사로서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뒤에야 협력에 응했고, 8월 8일 독일 민중에게 히틀러를 버리라고 촉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했다. 그의 뒤늦은 전향은 국외에서도 의아하게 받아들여졌는데, 바로 그 파울루스가 히틀러의 명령을 마지막까지 무조건 따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그가 인정한 인식과 스스로에게 요구한 복종의 의무 사이의 간극은 침략전쟁에 참여한 참모 장교의 책임 문제를 남긴다.